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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14 10:32
위대한 변화01: 도망노예 오네시모(1)(몬 1:1-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03  

위대한 변화01: 도망노예 오네시모(1)(몬 1:1-3)

노예 신분

빌레몬서는 주후 61-63년경 로마의 셋집에서 바울이 도망노예 오네시모를 위해서 주인 빌레몬과 그 가족 및 그 집에서 모인 골로새교회에 보낸 서신이다.

노예들은 법적으로 인간이 아닌 사고파는 물건이었다. 따라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노예에게는 자신의 운명조차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노예들은 몸에 노예표식을 지니고 있었고, 소유권이 없었으며, 결혼할 수 없었다. 노예들은 재량권이 없었으므로 무조건 복종해야했다. 노예들은 주인이 때리면 맞고 겁탈하면 겁탈 당하였다. 노예들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다. 노예들은 주인의 집안 별도의 공간에서 기거하였고, 자유민들과 뒤섞여 일하였다.

노예들은 대부분이 전쟁노예들이었다. 따라서 노예들의 국적이나 종족도 다양했다. 헬라어가 통용되던 다문화시대였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었다. 일부 노예들은 해적들에게 납치당해 팔렸거나 부모에게 팔렸거나 빚을 갚지 못해 노예가 되었거나 노예 부모한테서 태어난 자들이었다.

로마시대에는 노예의 숫자가 전체인구 6천만 명 가운데 15퍼센트인 9백만 명에 달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자유민 5명당 노예가 3명꼴이었다. 보통의 가정에서는 1-2명의 노예를 소유했지만, 카에칠리우스(Caecilius) 같은 상인은 10여명 이상, 부유한 사람들은 수백 명까지 소유했는데, 로마에 살았던 페다니우스 세쿤두스(Pedanius Secundus)는 4백여 명을 소유했었다. 그는 자신의 노예들 가운데 한 명에게 살해되었는데, 그로 인해서 나머지 노예들이 모두 처형당하였다.

도시 노예들은 농장, 목장, 광산,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예들보다 육체노동에 덜 시달렸다. 일부는 검투사로 팔리기도 했다. 반면에 도시 노예들은 능력에 따라 요리사, 정원사, 시중, 몽학교사(paidagogos), 가정교사, 의사, 사업장노동자, 비서, 악기연주자, 배우, 희극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은 주인이나 자유민들과의 접촉이 잦았고,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였으며, 시장, 신전, 극장, 원형경기장 출입도 할 수 있었다. 로마나 이탈리아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가난한 자유민과 노예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에게서 보듯이 살림을 잘 맡아 관리하거나 가계수입을 늘려주는 노예들은 주인으로부터 식구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해방 노예

모든 노예들이 죽을 때까지 노예로 남지는 않았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에까지 오른 것에서 보듯이 노예들 중에는 보상으로 자유가 주어졌다. 대개는 주인이 죽으면 유언에 따라 해방노예(libertus)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30세 이내나 100명 이상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해방노예들이라고 자유민의 권리를 다 누렸던 것은 아니다. 해방노예들은 선출직에 출마할 수 없었고, 군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해방노예들은 여전히 전 주인에게 해야 할 의무들이 있었다. 해방노예들은 매년 일정한 날수만큼 전 주인을 위해서 봉사해야 했고, 후원도 해야 했다. 해방노예들은 전 주인의 이름을 자기 이름에 사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유대총독이었던 펠릭스(Felix)는 자신의 이름에 전 주인의 이름 루치우스 카에칠리우스(Lucius Caecilius)를 붙여 루치우스 카에칠리우스 펠릭스로 불렸다.

총독 벨릭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어머니 안토니아의 집에 그의 형제 팔라스(Pallas)와 함께 노예였다가 자유인이 된 해방노예였다. 팔라스가 클라우디우스와 절친했었다고 한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벨릭스가 잔인하고 음탕하며 노예근성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세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한 여인은 안토니아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고, 또 한 여인은 헤롯 아그립바 I세의 딸 드루실라(Drusilla)였다. 드루실라는 15세 때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결혼했다가 그를 버리고 16세 때 벨릭스와 결혼하였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20여세였다. 벨릭스는 가끔씩 바울을 불러내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뇌물을 바란 때문이었다. 그러나 율리아(Julia)법은 돈을 받고 죄수를 풀어주는 것을 금하였다. 이를 위반하면 관직에서 쫓겨나 추방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이밖에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비서 3인방이 모두 해방노예들이었다. 또 로마의 에피그라피코 박물관(Museo Epigrafico)에 소장된 비문들 가운데 에바브로디도의 것이 있다. 이 비문의 주인공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에파프로디투스’(에바브로디도)로서 주후 20-25년 사이에 출생하여 95년경에 처형당하였다. 그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해방노예(Augusti libertus)로서 황제 네로의 비서관이었으나 네로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황제 도미티아누스로부터 처형당하였다.

비잔틴 노예

해방노예들도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지배계층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그들은 주인을 대신해서 가사와 공무 및 회계업무를 책임졌다. 주인은 자기 재산을 굴리고 부를 창출하여 여유로운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수족인 해방노예의 능력에 의존해야 했다. 이로 인해서 능력이 남다른 노예나 해방노예들은 막중한 일을 책임 떠맡거나 부를 쌓을 수 있었다. 해방노예는 옛 주인을 후원자로 모셨는데, 후원자(patron)란 아버지(pater)란 뜻에서 나왔다. 해방노예의 책무역시 아들의 책무에 준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해방노예는 신분상승을 이룬 후에도 자신이 몸담았던 노예공동체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노예와 자유인의 세계를 편하게 오간 역동적 존재였다.

로마제국시대에 대지주들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노예들을 거느렸다. 소멜라니아(Melania the younger, c. 383?439)의 경우 한꺼번에 그녀의 노예 8천명을 해방시켰다고 전한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엔나 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Sicilia, Italy)에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4세기에 지어진 거대한 저택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Villa Romana del Casale)가 있다.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저택은 50여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의 모든 방과 회랑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거대한 저택을 짓고 관리하고 농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노예들이었을 것이다. 이 저택의 주인은 수백 또 수천 명의 노예들을 거느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은 비잔틴제국에서조차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합법이었다. 심지어 사춘기 전후의 소년노예들이 거세되어 인기리에 거래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6세기경부터는 노예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봉건제도의 도입으로 10세기경에는 노예를 물건으로 취급하던 사물노예(slave-object) 개념이 노예를 사람으로 보는 신민노예(slave-subject)로 바뀌게 되고, 농민이 봉건 지주에게 예속되어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부역(賦役)과 공납(貢納)의 의무를 지닌 농노제도가 노예제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노예제도는 여전히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었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악폐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