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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5-23 05:26
하나님과의 사귐12: 하나님은 사랑(1)(요일 4:1-10)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280  

하나님과의 사귐12: 하나님은 사랑(1)(요일 4:1-10)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

요한일서 4장 1-6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고 하였다. 요한은 여기에서도 대조법을 써서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하나님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과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등으로 구분 지었다.

여기서 “적그리스도의 영,” “미혹의 영,” “거짓 선지자,” “세상에 속한” 것,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으로 지목된 된 자들은 영지주의 경향을 띤 율법주의 에비온파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나사렛당’(Notzrim)과 ‘에비온파’(Ebionites)가 있었다. 나사렛당은 유대교의 계명들을 준수했지만, 그것들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랍비들이 만든 울타리 법들의 구속력을 부정하였다. 이들은 유대-로마전쟁에 가담하지 않고 ‘펠라’와 ‘페트라’로 피신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에비온파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이단이었다. 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든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든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바울의 글들은 무시했으며, 마태복음만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단일신론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 성육신, 동정녀 탄생 등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교훈”을 주장하였다(고후 11:4, 갈 1:6-9, 딤전 1:3, 6:3, 히 13:9).

유대인들은 지상 가나안땅과 이스라엘 나라를 얻기 위해 첫 오순절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식을 체결하였고, 그 때 받은 율법(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이 땅과 나라를 빼앗긴 채 노예와 떠돌이가 된 원인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빼앗긴 지상의 땅과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땅의 것에 집착해왔고 땅의 것을 얻기 위해서 문자적으로 율법과 규례를 지켜왔다. 유대교는 영적인 종교가 아니다. 교리를 믿는 종교도 아니다. 율법을 실천하고 행하는 민족종교이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하늘 가나안땅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복음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한 후에 침례를 받아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복음의 내용을 믿고 실천하는 세계 종교이며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영적 종교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권면하였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에서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상반된 표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고, “하나님을 아는” 자 곧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이다. 반면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곧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자이다.

여기서 요한은 사랑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는데, 이 구절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톨스토이의 글과 연결된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가난하지만 착한 구두수선공 마르틴이 추운 어느 겨울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세 차례 돌본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것이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톨스토이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또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는 마태복음 25장 40절과 45절에 주목하였다.

또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또는 현현(계시)으로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극빈자들에게서 또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테레사의 확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행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께 행하는 것이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그들 속에 계신 예수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빵이나 치료보다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끔찍한 가난은 고독이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가장 심각한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나 에이즈가 아니라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느낌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빵에 대한 허기보다 사랑과 가치 평가에 대한 허기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돈이나 빵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저들의 이 깊은 사랑에 대한 갈망을 달래 줄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거기에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는 천국이 어떨지 확실히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심판을 받을 시간이 되면,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얼마나 많이 좋은 일을 했는지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번은 수행 신부에게 왜 양로원의 사람들이 입구 곁에 앉아서 모두 문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커다란 허기, 곧 사랑에의 허기를 느끼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비록 양로원이 물질적으로는 모두 갖춰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자녀들에게 잊혀진, 자녀들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의 가족들안에도 이런 가난, 이런 허기를 느끼는 분들이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

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로마서 3장 23-25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다”에 연결된다. 이것이 스위스 신학자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는 분이시다’고 말한 이유이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인간이 서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 대신 설 자로 선택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배반하고 죄 범한 인간에게 영생의 축복을 마련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셨다. 저주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오히려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셨고,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자신에게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와 죽음을 대신 받기로 결정하셨다. 또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당신께서 받는 대신에 당신의 몫 곧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인간을 높이기로 결정하셨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벌을 받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과 더불어 우리 죄인들을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으며,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대신 흘린 보혈이었다. 우리 죄를 속하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셨다.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서 사랑의 특성을 관심, 책임, 존중, 이해, 나눔이라고 했는데,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와 같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 다섯 가지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것이 관심과 책임이다. 2차 대전 후 패전국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산을 하나 두고 두 개의 영아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설과 음식이 좋은 영아원 아이들의 사망률이 시설이 나쁘고 가난한 영아원보다 60%나 높았다고 한다. 원인은 보모들의 관심과 사랑의 차이에 있었다고 한다. 가난했지만 보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들의 생명력이 끈질겼던 것이다. 또 날씨가 험악한 날 밤에 왕진을 와달라는 한 가난한 노동자의 청을 받은 의사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살려야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위험을 무릅썼다. 그 의사의 도움으로 노동자(구두 제조공이자 교회 목사인 외삼촌 리처드 로이드)가 키우는 어린 아이가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라는 이 아이는 훗날 영국의 수상(1916-1922)이 되었고, 국교인 성공회 신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실한 신자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의 더 자세하고 감동적인 출생이야기가 아래 인터넷주소에 있습니다.: http://www.economicsmagazine.kr/news/articleView.html?idxno=12530); http://kccs.info/with_home/bbs/board.php?bo_table=test&wr_id=33&sca=&sfl=wr_subject&stx=%B7%CE%C0%CC%B5%E5&sop=and&pag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