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세기에 걸친 스톤-캠벨 운동 역사: 조사와 분석 Stone-Campbell History Over Three Centuries: A Survey and Analysis
번역: 조동호 목사 출처: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
- 서론
- 운동사 저술에의 도전
- 초기 역사들
-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기술
-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
-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
- 미국 종교사 속에서 그 운동의 역사기술
- 요약과 분석
- 그 운동의 역사기술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상태
- 참고자료
- 역자 해설
요약과 분석 Summary and Analysis
몇 가지 뛰어난 주제와 경향들이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와 연결된다. 그 운동의 형성에서 발톤 스톤의 역할은 초기부터 하나의 주된 이슈였다. 스톤은 스톤-캠벨 운동의 실재적 기초로써 간주되는 캠벨의 개혁보다 먼저 그 운동을 시작한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상당히 낮게 평가되었다. 그 대신에 스톤은 그의 신학적 입장에 관한한 종종 알렉산더 캠벨과 사실상 하나로 정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A, W. 포춘과 C. C. 웨어와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리처드 휴즈와 다른 이들 사이에서, 스톤은 충분히 제몫을 다한, 캠벨부자만큼 중요한, 그러나 그들 부자(父子)와는 현저하게 다른 창시자로 다뤄졌다. 스톤의 이 같은 부활은 대단히 다른 양상을 띠게 하였다. 제자들 교회는 스톤을 그들 교회가 근대 에큐메니컬 운동에 진출할 수 있는 정당성을 더욱 더 제공한 초기 에큐메니컬 운동가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휴즈에게 있어서는 스톤이 도저히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사의 진보적인 에큐메니컬 운동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스톤은 “묵시문학적” 세계관을 구현시킴으로써 일치를 위한 모든 인위적인 조직을 경시하였고, 따라서 동시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비평할 수 있는 근거(묵시문학적 세계관)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가들은 스톤-캠벨 운동의 창설에 기여한 스톤의 역할과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필요한 스톤의 중요성 모두를 지속적으로 낮게 평가하였다.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가들을 통틀어서 또 다른 한 가지 공통적인 맥락은 승리주의이다.[역자 주31] 가장 초기에 표명된 승리주의는 스톤-캠벨 운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초상이었다. 그것은 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명확한 뜻에 부합하게 교회를 회복하려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며, 항상 귀에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 승리주의는 스톤-캠벨 운동이 분열되었을 때 다른 형태들을 띄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가들은 기독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해답으로 제시된 스톤-캠벨 운동을 갈수록 희미하게 서술하면서, 주장하기를, 다른 지류(支流)들(첫째는 그리스도의 교회들, 그 다음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스톤-캠벨 운동의 핵심을 놓쳤고, 당파심을 동반한 율법주의로 말미암아 탈선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각각의 지류는 자신들이 그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참된 후계자라는 생각을 표명했고, 또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 중에서는 다른 모든 기독교단들을 이겼다는 승리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소속 구성원들은 그들이 쓴 가장 최근의 역사들에서 스톤-캠벨 운동에 속한 자신들의 지류에 강한 충성심을 표명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논의함으로써 앞선 세대들의 승리주의를 완화시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스톤-캠벨 운동의 정신과 기독교를 전체적으로 유일하고 참되게 구현(one authentic embodiment)한 것으로 생각한다. 앞선 세대들의 승리주의를 약화(弱化)시킨 비슷한 사례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 소속한 헨리 웹의 저술에서 나타난다. 그의 개정판,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찾아서>는 2003년 에빌린기독대학교(ACU) 출판부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역자 주31] ‘승리주의’(triumphalism)와 비슷한 표현으로 배타주의(Exclusivism)가 있다. 승리주의가 좁은 파당간의 개념인 반면, 배타주의는 포용주의(Inclusivism) 및 다원주의(Pluralism)와 함께 넓은 종교간의 개념으로 쓰인다. 승리주의는 특정 교리나 주의(主義)가 절대적이란 식의 당파적 태도나 신념을 말하고, 배타주의는 특정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식의 신념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승리주의나 배타주의가 전적으로 다 내버려야할 나쁜 것인가라는 점이다. 마치 승리주의나 배타주의가 보수파에만 있는 것처럼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이런 신념은 중도파나 진보파 모두에게 있는 것이고, 만일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념이 전혀 무가치한 것이거나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전략적인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승리주의나 배타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거나 신념체계를 힘써 전달하게 하는 당파적 동력(dynamism)이다. 그런 당파적 동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집단이 진보파이고, 그 다음이 보수파이다. 신념이나 신념체계에 관한한 보수파도 문제이지만, 진보파일수록 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다. 만일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가 중도파이거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크고 작은 종교집단들, 심지어 그것이 정통개혁주의이든지, 민중신학 및 여성신학과 같은 진보주의이든지, 또는 교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모르몬교나 여호와 증인과 같은 이단 종파들이든지 간에, 처음 시작될 때의 정황들을 살펴보면, 그 동력이 바로 이 승리주의나 배타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종교집단이나 정치집단이든지 간에 승리주의나 배타주의 없이 집단을 제대로 형성한 사례는 없다. 칭찬을 듣는 포용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일수록 발전이 더딘 이유는 그 집단을 이끄는 동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꼴통’이란 악담을 듣는 배타주의 집단일수록 발전이 빠른 이유는 그 집단을 움직이는 동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모쪼록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내다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 번째 우세한 역사기술의 경향은 일치[연합]과 환원[복원]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려는 노력이다. ‘환원’(restoration)이란 말이 스톤-캠벨 운동 초기에는 그 운동을 지칭하는 말로써, ‘개혁’(reformation)이란 말만큼 일반적으로 쓰이지 못한 반면, 초대교회의 믿음과 실천에로 돌아가자는 사상은 시작 때부터 주된 주제이다. 처음 역사들이 쓰일 때까지, 용어 그 자체는 폭넓게 사용되었다. 가장 초기 지도자들이 신약성서가 분명히 가르친 교리와 실천들을 복원하는(환원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근거로 알았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인 가설이었다. 환원과 일치의 규범들에 내재된 갈등을 처음으로 제시한 역사는 제자들 교회의 역사가 에레트 게이츠의 것이었다. 게이츠의 분석은 제자들 교회와 스톤-캠벨 운동의 다른 지류들 사이의 차이점을 기술하는 표준방식이 되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지류들이 환원을 선택한 반면, 제자들 교회는 일치를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가장 초기 역사가들은, 신약성서의 믿음과 실천을 복원하는 목표에 최우선 순위를 분명하게 두는 한편, 오직 그 같은 복원만이 진정한 일치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입장을 스톤-캠벨 운동의 창시자들의 입장으로 이해하였고, 그들 자신들은 그 일치의 목표를 포기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일치를 이루겠다는 생각은 주기적으로 통렬하게 비난받았다. 반면에 성서의 단순한 가르침으로 그들이 깨닫고 있는 것에 동의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일치를 이루려는 목표는 공통적인 하나의 주제였다. 좀 더 최근에 리처드 휴즈와 레오나르드 알렌은 스톤-캠벨 운동의 환원운동사상을 미국 원시주의라는 보다 큰 정황 속에 놓고, 그 중요성이 미국 기독교에서 주요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에서는 전반적인 합의가 있어왔다. 그 합의란 환원과 일치가 스톤-캠벨 운동의 본래적 호소에서 분리될 수 없고, 또 본래적 호소인 환원은 일치를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특정한 실천적 우선순위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제임스 드포레스트 멀치에게 있어서 환원은 결정적이었다. 왜냐하면, 환원은 스톤-캠벨 운동이 사도 전례에 쏟는 절대적 헌신을 구체화할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면면히 이어졌던 환원운동들의 가계(家系)에서 그 운동이 갖는 역사적 혈통을 특징짓기 때문이었다. 좀 더 최근에 제임스 노스는 일치와 맞대고 있는 환원 대신에 “성서 권위”란 어휘를 사용했다. 성서 권위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주류 교회들 사이에서 더 큰 투쟁들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좀 더 그럴듯한 어휘일는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나온 주요한 역사 중 하나인 헨리 웹의 역사만이 환원의 실현 가능성을, 그것에 내재된 도전과 난관들을 지적하면서, 일치의 수단으로 평가한다.
몇 가지 다른 경향들도 또한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기술에서 눈에 띄었다. 그 운동을 기술하는 사람들이 아마추어들에서 전문가들로, 설교가들에서 학자들로 옮겨감으로써 세 지류 모두는 자기 이해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런 추이는 지속되고 있다. 가끔은 학자들이 논제(agenda)를 변증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저술했던 반면, 세 지류 모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역사가들이 등장한 이후에는 균형 잡힌, 즉 덜 승리주의적인 접근방식이 도입되었다. 이 방식의 역사적 접근은 스톤-캠벨 운동사에 새로운 수확을 얻게 하였다.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발생들 가운데 한 가지가 20세기 중후반에 그리스도의 교회들 안에서 창조적 역사기술이 일제히 쏟아져 나온 일일 것이다. 이 활동은 두 가지 요인이 집중되면서 촉발되었다. 첫째, 스톤-캠벨 운동의 그 지류는 그 세기의 상당기간 “진로와 엇갈리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미 1960년대에는, 비록 대부분이 성서학자들에 의한 것이었지만, 상당한 수의 박사학위 소지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중심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우려 왔다. 그 결과가 새로운 역사서들이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특출한 유산과 소명을 식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사한 현상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자들 교회 사이에서 발생하였는데, 그들이 점증하는 도시와 다원론적 문화 속에서 그들 자신을 정의하도록 도전받고 있을 때였다.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 에레트 게이츠와 W. E. 개리슨은 제자들 교회를 위해서 미래지향적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재해석하려고 힘썼다. 후대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학자들도 자신들의 지류를 위해서 동일한 노력을 기우렸다. 1940년대에 이르러서 예일대학교에서 공부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유산에 대한 이 뜨거운 관심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인 일치의 지지자로서 발톤 스톤을 연구하였고, 알렉산더 캠벨에 대한 연구에서 하나의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6)글에서 그 운동의 역사기술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상태(The Current and Future State of the Movement's Historiography)가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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