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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1-07 13:17
전하여 준 그대로(눅 1:1-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453  

전하여 준 그대로(눅 1:1-4)

전하여 준 그대로

누가복음 1장 1-4절은 복음서의 기록목적을 설명한 구절이다. 1절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은 주전 586년 유대왕국의 멸망 전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셨던 것들이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이뤄진 사실들을 말한다. 2절에서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다”는 진술은 몇 가지 귀중한 사실을 밝혀준다. 첫째는 누가복음이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복음서 성격의 다른 글들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저자들이 직접자료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철저히 의존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저자들이 목격자들의 증언을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3-4절은 누가 자신도 전해진 증언들을 처음부터 세세하게 조사한 것들을 차례대로 저술함으로써 이미 듣고 배운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란 것을 밝히려 했다는 점이다(공동번역).

누가의 이 짧은 진술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목격자들의 증언 위에 세워졌다는 점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기초가 목격자들의 증언이란 점을 밝혀주는 매우 귀중한 내용이다. 가장 신뢰할만한 목격자들은 사도들이다. 사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 수많은 제자들도 목격자들에 포함될 수 있다. 목격자들의 증언이란 목격자들이 선포한 설교와 교육을 말한다. 그들의 증언들은 종종 ‘사도들의 전통’이라 불리는데, ‘사도들의 전통’이란 사도들의 가르침에 사도들의 실천까지를 포함한 표현이다. ‘실천’이라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렸고(행 11:26), “안식 후 첫날에 ... 떡을 떼려 하여 모였으며”(행 20:7),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고”(행 2:42), “물 있는 곳”(행 8:36)에서 침례를 베푼 것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내용들이 글로 옮겨진 것이 신약성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어떤 가르침과 실천이 정통(옳음)인지를 명확하게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지어질 당시 수집된 책들의 정경여부를 결정짓는 잣대는 사도들의 전통이었다.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엡 2:20)고 했다. 여기서 “너희는”은 에베소 교회를 지칭한 것이고, “모퉁잇돌”이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즉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이뤄진 사실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목격한 자들의 가르침과 실천이 교회가 세워진 기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순종하라고 권하였고(롬 6:17),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고전 11:2) 하였으며, 심지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고전 11:23)고 하였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말씀하였다. 왜 교회가 신약성경 위에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밝혀주는 말씀들이다.

하나님이 명한대로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고소할 때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다”고 분노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 즉 모세오경에 실린 613개의 계명들을 주어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거룩함이었고 의로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질타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보호할 목적으로 울타리 법들을 수없이 만들어 계명들에 겹겹이 방어막을 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헛되이 지키게 할뿐 아니라, 외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통교회들에 남아있다.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자들이 중보자이신 예수님께 직접 기도하지 못하고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게 한 것과 신자석보다 상당히 높고 먼 곳에 주의 만찬상인 제단을 배치하여 사제의 권위를 높인 것이다.

성막건축에 관한 출애굽기의 말씀에서 거듭 강조된 구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이다. 출애굽기 39장에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는 이 구절이 무려 10번이나 쓰였다. 32-33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그들이 성막을 모세에게로 가져 왔다”고 했고, 42-43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고 하였다.

성막제작의 핵심사상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just as the LORD had commanded) 행하고 이루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장점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 6:5) 문자적으로 지키려하는데 있다. 토라의 613개의 계명들뿐 아니라,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랍비들이 만든 수많은 울타리 법들까지 성심을 다해서 지키려한다. 그러나 단점은 하나님의 계명들의 근본취지와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내적인 것, 영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 문자적인 것, 형식적인 것에 치우쳤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신약성경 저자들이다. 그들이 새롭게 이해한 것은 지상 가나안땅이 하늘 가나안땅의 그림자라는 것, 지상 가나안땅은 옛 언약이요, 하늘 가나안땅은 새 언약이라는 것, 지상 성막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라는 것, 지상 성막은 일시적이요, 하늘 성전은 영원하다는 것, 또 구약성경성막은 신약성경교회의 예표요, 모형이며, 그림자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 실패한 길을 걷고 있다.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했던 방식대로 해석하지 않고, 유대교의 랍비들이 유대교에 했던 것처럼 기독교에 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이 구약성경교회로 또는 유대교적기독교에 치우쳐 있다.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와 유대교적 권위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교회의 사도전통을 멋대로 왜곡시키고 있다. 기독교가 선민(특권)의식과 교조주의에 매어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만과 자기우상숭배로 인해서 응보를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

신약성경이 명한대로

유대교의 폐단을 고치려했던 것이 기독교였고, 가톨릭의 폐단을 고치려했던 것이 개신교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폐단은 누가 고칠 것인가, 무엇으로 고칠 것인가? 이 물음에 답을 줄 곳이 과연 있기는 한가? 다행히도 200여 년 전, 정확하게는 ‘알렉산더 캠벨’이 27살의 젊은 나이에 화려한 목회경력을 자랑하는 레드스톤 침례회의 목사들 앞에서 1816년 9월 1일 행한 ‘율법에 관한 설교’를 시발로 1823-30년까지 7년간 발행한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지와 1830-70년까지 40년간 발행한 <밀레니얼 하빈저>(Millennial Harbinger)지에 발표한 “옛 질서의 것들의 회복”(to restore the ancient order of things)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개신교는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각종 폐단과 분열이 심각하고 상호비방이 난무한다.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속한 집단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름이 다르고 조금만 다르게 실천해도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침례가 이단이 되고, 매주 행하는 주의 만찬이 이단이 되고, 신성한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조차 이단이 되는 게 현실이다. 유대교나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개신교에서조차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폐단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개신교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에로 돌아가 진리를 회복하자는데 있다. 그런데 이 좋은 취지와 뜻이 심각한 분열과 유대교적 기독교란 왜곡된 결과로 드러나고 말았다. 더 심각한 것은 개신교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데 있다. 원인을 지적하고 해결방도를 제시하면 의심부터 하고 그 알량한 지식과 전통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약성경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이해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이 말한 것을 말하고, 행한 것을 실천하고, 침묵한 것을 자유로 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렀으면 그렇게 부르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으면 그렇게 부르고, 침례를 행하였으면 그렇게 행하고, 매주일 주의 만찬을 행하였으면 그렇게 시행하여야 한다.

둘째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핵심사상은 만인사제론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민족의 차별, 남녀노소의 차별, 빈부귀천의 차별,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주님의 형제요 자매요, 일군들이다. 하나님의 집의 한 가족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다.

셋째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실천아래서 지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빙자한 분열은 죄악이다.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구약성경을 유대인들의 해석방법인 문자적 해석을 채용하는 것이고, 신약성경저자들의 모형(예표)론 해석과 단순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데 있다. 여기서 단순 원리는 신약성경이 말한 것을 말하고, 신약성경이 침묵한 것을 자유롭게 하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말한 것은 본질이다. 본질에는 일치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침묵한 것은 비본질이다. 비본질은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명한대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