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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10-12 11:51
하나님은 과연 전지전능하신가?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478  
하나님은 과연 전지전능하신가?
The Concept of God
http://kccs.pe.kr/god01.htm

머리말(Preface)

오늘날에는 "신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신이 존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와 같은 유신론적 종교들이 주장하는 신개념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설명이란 점을 입증해 보일 수 있다고 믿는다.

제1장 몇 가지 예비적 고려사항들(Some Preliminary Considerations)

무신론들은 유신론이 내적으로 모순을 갖고 있고, 따라서 유신론의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과정신학자들은(school of Process Theology) 무신론자들의 결론들을 거부하나, 그대신 고전적 신개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개념(The Concept of God)

기독교 유신론의 신개념은 논리적 일관성(logical consistency)의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신개념의 일관성 또는 논리성(coherency)의 4가지 요건들

1)각각의 속성은 스스로 일관적이어야 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전능자(omnipotent being)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그와 같은 모순(paradox)은 전능자가 너무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2)신적 속성들(divine attributes)은 논리적으로 피차 양립(compatible)해야 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신적 속성들이 논리적으로 양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전지(omniscience)는 신적 불변성(immutability)과 양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현재시각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은 변한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전지 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면, 그분은 무엇인가 변하는 것들을 아시는 게 되고, 그것들은 그분이 변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불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전능과 무시간성(timelessness)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고 주장된다. 어떻게 무시간적 존재가 잠정적 세계의 창조주가 될 수 있는가? 피조물이 특정시간에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한 존재가 무시간적이 될 수 있으며, 잠정적 세계, 즉 시간 속에 장소를 갖게된 사건을 만들 수 있는가? 게다가 어떻게 무시간적인 하나님이 잠정적 과정에 있는 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3)신적 속성들은 한 특별한 신학체계 속의 다른 중요한 관심들과 일치해야만 한다.

전지와 불변성의 양립을 의심했던 케니(Kenny)는, 예를 들면, 전지전능과 같은 신적 속성들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lack of responsibility for sin)는 것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human freedom of the will)와 같은 중심적인 기독교의 확신들이 과연 일치하는가를 의심한다. 대부분의 기독교 유신론자들은 어떤 종류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선택이 전지하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완벽하게 미래에 관해서 알고 계신다는 신념과 일치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아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예지에 부합되지 아니한 다른 미래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예지가 미래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4)신개념 그 자체가 일관적이고 모순(contradictory)이 없어야 한다.

만약 어떤 특별한 신개념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면, 그와 같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개념의 비논리성(incoherence)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존재를 반박하는 논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제2장 두 가지 신개념(Two Concepts of God)

토마스의 유신론(Thomistic Theism)

과정신학자 그리핀(Griffin)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의 핵심적인 신개념을 다음과 같이 8가지 하나님의 속성으로 요약한다: 1)순수 실재성(pure actuality), (2)불변성(immutability), (3)무감각(impassibility), (4)무시간성(timelessness), (5)단일성(simplicity), (6)필연성(necessity), (7)전지성(omniscience), (8)전능성(omnipotence).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핀(Griffin)과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사랑, 열정, 동정과 같은 속성들은 논리적으로 8가지 핵심 속성들과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토마스 유신론의 중요한 임무들 가운데 한 가지는 토마스의 8가지 속성들에서 기술된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성경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순수 실재성(pure actuality)

중세 스콜라주의 교리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가르침, 즉 하나님은 순수 실재이시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형태(form)와 물질(matter)로 구성된다. 모든 것은 실재성(actuality)과 가능성(potentiality)을 갖고 있다. 사물의 형태(본질)는 그것의 실재를 결정하고, 그것의 물질은 사물의 몇 가지 가능성들에 대한 근거이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어떤 주어진 시간에 단 한 가지 실재만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모든 존재는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을 갖는다. 예를 들면, 주어진 목재조각은 본질적인 속성들 때문에 실재성으로 책상일 수 있지만, 동시에 목재는 의자나 테이블과 같은 다른 수많은 사물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성을 일종의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와 같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어떤 가능성은 그분의 완전성을 손상시킨다고 보고, 하나님은 가능성을 전혀 갖지 않는 순수 실재임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지만, 수동적으로 활동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형태와 물질로 구성된다는 교리에서 제외된다. 가능성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물질을 갖지 아니하며, 순수한 형태임이 틀림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가지 이론 가운데 기독교 교리와 조화시키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은 변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어떤 것에 관하여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의 주의를 끌만한 완전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뿐이라고 한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무엇을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것이며, 오로지 활동을 자신의 본성에 대한 숙고에 제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무동의 동자(Unmoved Mover)는 성경에서 기술하고 있는 사랑의 하나님하고는 거리가 먼 외침이다.

2)불변성(immutability)과 무감각(impassibility)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감각성은 관련이 있으면서도 같지 않다. 불변성은 하나님이 변치 않는다는 것이고, 무감각성은 활동하게 될 가능성이 없음을 말한다. 그리핀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감각성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고 그분의 백성들의 기도에 움직이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3)무시간성(timelessness)

그리핀은 토마스의 무시간성으로의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무시간성은 하나님의 존재가 시작도 끝도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시간 밖에 존재하심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잠정적 기간도 없고, 잠정적 장소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시간의 순간에 존재하지 아니하신다. 그분의 존재는 시간의 어떤 기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분은 시간 밖에 계신다. 무시간적인 하나님에게는 모든 시간이 하나의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에 존재하며, 하나님에게는 미래도 과거도 없으시다.

 고전적 기독교 유신론에 헌신하는 기독교 사상가들의 상당수가 무시간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해석함에 있어서 다른 견해들을 보여왔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원하시다(everlasting)고 말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존재하셨고, 또 항상 존재하실 것을 뜻하며, 하나님을 시간의 진행에서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뜻한다.

4)단일성(simplicity)

만일 한 존재가 단일하다면, 그것은 어떤 지체도 갖지 않는다. 만일 한 존재가 지체를 갖지 않는다면,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기 때문에 변할 수 없다. 만일 어떤 것이 변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가능성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순수 실재임이 틀림없다. 전(before)이나 후(after)도 그와 같은 존재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단일한 존재는 무시간적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토마스의 신개념에서 단일성의 속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5)필연성(necessity)

이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외의 모든 것은 우발적(contingently)으로 존재한다. 즉 비존재가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분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분이 존재를 멈출 수 있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7)전지성(omniscience)과 전능성(omnipotence)

전지전능의 속성들은 하나님의 지식과 권세를 각각 말한다.

과정신학(Process Theology)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는 성공회 교구주관자대리의 아들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교(Cambridge University)에서 가르쳤고, 1910년과 1913년 사이에 버틀랜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함께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저술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가르치면서 사고철학과 전통 형이상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저서 가운데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는 잘 알려진 책이다.

화이트헤드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자는 챨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b. 1897)으로써 과정신학을 발전시킨 자이다.

과정신학은 범신론(pantheism)과 토마스 유신론 모두를 수용할 수 없는 극단들로 본다. 범신론으로부터 그들의 입장을 구별하기 위해서 과정신학자들은 종종 그들의 이론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부른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어떤 면에서 동일하다고 본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의존적이라고 본다. 만유재신론자들은 마음이 몸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은 종종 세상이 하나님의 몸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진술한다.

과정신학자들은 토마스의 8가지 하나님의 속성 모두를 거부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순수 실재하시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감각성을 거부한다.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의 존재는 시간의 과정에 불가피하게 개입되어 있다.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단일하지 않다. 하나님의 필연성은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독립적이란 점에서 이해되어진다. 따라서 이 교리도 거부된다. 과정신학자들은 그들의 하나님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다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11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과정신학에서 토마스의 유신론의 강조점인 "존재"(being)가 "되어감"(becoming)으로 강조점이 대치되었다. 과정신학자들에 의하면, 토마스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정지(static) 내지는 무감각 실체(impassive substance)로 본다. 과정 사고에서 실체는 과정으로 바뀌어진다. 만유재신론자들은 하나님과 실재를 상호관계를 강조하는 모델들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과정세계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 하나님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과정의 하나님은 이 우주적 상호의존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2)기독교 유신론의 하나님은 독립적인 창조주인데 비해서,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상호의존적 동역자이다. 토마스의 유신론을 수용하든 아니하든 기독교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생각한다. 창조의 교리는 세상이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동안,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세상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부인한다. 만유재신론자들에게는 하나님과 세상은 상호 의존적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가 아니다. 또한 과정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신의 초월성을 거부한다. 고전적인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분이 세상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만유재신론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몸이라고 믿는다.

3)기독교의 고전적인 신적 불변성의 교리는 변하는 하나님(changing God) 교리로 대치되고 있다. 과정신학자들은, 어떻게 전적으로 불변하는 하나님(unchanging God)이 그의 백성들의 기도들에 응답하실 수 있겠는가고 묻는다. 과정신학자들은 진정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견해와 불변성과 무감각성에 관한 고전적인 강조 사이에 있는 명백한 모순성(incompatibility)을 강조한다. 그들은 스콜라철학의 무감각한 하나님이 인격적이고(personal)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성서적 하나님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4)일부 과정 사상가들의 저술들에서는 유신론의 인격적인 하나님이 비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대치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사상가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보고 있다. 이 점이 과정 사상가들 사이에 있는 주된 불일치점이다.

5)과정신학자들은 토마스의 유신론의 무시간성의 교리를 만장일치로 거부한다. 그들은 살아 계시면서 변할 수 없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자가당착(self-contradictory)이라고 믿는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그분은 얼마간 변화를 경험하셔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문자적으로 경험하시고 과정을 실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분은 전과 후의 경험을 즐기신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전적으로 잠정적이시며(omnitemporal), 무시간적이 아니시다. 무시간적이기보다는 하나님은 잠정적이고 상대적이며 의존이고 지속적으로 변하신다. 그러나 신적 무시간성에 관한 논쟁은 과정 사상가들에게만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란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전 유신론자들의 상당수가 하나님의 시간과의 관계에 대한 재해석이 그들의 신개념의 다른 요소들과 양립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6)고전적 유신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완전성은 아무 것도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에 부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분은 완전하시고 충족된 완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유재신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완전성이 연속적으로 획득되어진다. 하나님은 완전성에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개발된다. 하나님의 몸으로써 우주 안에 있는 가치의 양이 증대되어질 때, 하나님 자신의 완전성은 진화하고 성장한다.

7)유신론자들과 만유재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절대적 또는 상대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불일치 한다. 이 문맥에서 "절대적"이란 말은 하나님이 세상과의 어떤 참된 관계에 개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상대적"이란 말은 어떤 것에 관계 맺어진다는 주장, 즉 이 경우에서는 세상과 관계 맺어진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전통적인 유신론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의미를 주실 수 있는 한편, 세상이 하나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과정 사상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영원한 존재를 부유케 하고 그것에 구현(embodiment)은 물론이고 자극과 의미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과정 사상가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고, 세상은 하나님에게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부족한 것을 채운다고 주장한다.

8)하나님의 전지가 무제한적인가 제한적인가? 유신론자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강한 의미에서 전지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미래의 우발적인 행동들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기 때문에, 성장한다고 말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트숀(Hartshorne)과 같은 과정 사상가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하나님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재하는 피조물들에 관한 경험들과 지식에 대해서 알게되는 하나님의 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하트숀에게는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미래에 관해서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미래는 개방적이고 미정이어서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한다.

9)전통 유신론은 하나님의 역할을 세계의 유력한 원인(efficient cause)으로 강조한다. 과정 사상은 하나님의 역할을 최종 원인(final cause)으로 강조한다. 전우주적 과정의 목표이거나 매력(lure)이신 하나님은 그것을 그것의 최종적 완성에로 이끄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최종적 원인이시자 마지막(telos)이시다. 그러나 과정신학자들이 유신론자가 하나님은 세상의 유력한 원인이시자 최종적 원인이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모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10)과정신학은 전통적인 유신론의 하나님의 일극(monopolar) 주장을 이극(dipolar)으로 대치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일극 견해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완벽한 분, 즉 그분의 절대성이 무제한적(unqualifed)인 것으로 생각한다. 하트숀이나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의 실제극(actual pole)과 가능극(potential pole)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가능성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무한하시다. 하나님의 원시성(primordial nature/가능극)은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시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결과성(consequent nature/실제극)은 하나님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과정철학에서 하나님의 원시성은 추상적이고 필연적이며 초월적이고 영원하시며 가능성이고 하나이시며 무한하시고 원인이시며 절대적이고 불변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과성은 견고하고 우발적이며 내재적이고 일시적이며 실제적이고 많고 유한하며 결과이시며 상대적이고 변하신다.

하나님의 원시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결과 또는 실제극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이며, 하나님의 몸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원시성은 언젠가 실제가 될 수 있을 모든 가능성들의 상상(직시, envisagement)으로 볼 수도 있다.

이극 하나님은 끝없이 변화의 과정에 개입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정의 지속적인 상태 속에 있다. 그것은 다른 실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끊임없이 다른 무엇인가가 된다. 세계는 하나님의 개념적 비전의 육체적 현실화 또는 실제화이다.

11)여기서 주목될 유신론과 만유재신론의 마지막 차이점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이다. 전통적인 유신론은 악의 모든 형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단언한다. 만유재신론에 따르면, 악에 대한 어떤 궁극적인 승리도 하나님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악은 결코 완전하게 정복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

제3장 전능(Omnipotence)

심지어 전능하신 하나님조차도 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분의 피조물들이 할 수 있는 어떤 것들, 즉 걷거나 앉거나 수영하기와 같은 것들을 할 수가 없다. 전형적인 스콜라주의의 해답은 그와 같은 피조물의 행동들이 하나님이 갖지 아니한 능력들을 인간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않는다고 하였다. 오히려 걷거나 수영하기 등의 인간의 행동들은 인간의 능력에 결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예를 들면, 죄 지을 능력은 능력이 아니라 결점이거나 연약함이다. 걷을 수 있는 능력은 육체를 가진 결과, 즉 그들의 견해로 볼 때, 결점에서 기인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수동적인 능력에서가 아니라 능동적인 능력의 관점에서 전능하시다고 하였다.

전능과 논리법들(Omnipotence and the Laws of Logic)

두 가지 별개의 방법들, 즉 물리적 가능성 또는 논리적 가능성 속에서 무엇인가가 가능하다거나 또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전능하시다. 비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논리적 의미에서 무엇인가가 가능하다. 아퀴나스가 언급한대로, 모순을 내포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전능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며, 모순을 내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가능성의 측면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신적 전능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할 수 없다기보다는 그것들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행위는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원을 정사각형으로 그리는 것(squaring the circle)은 논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아퀴나스는 신적 능력의 범주에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행위들을 배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거짓 일들로(pseudo-tasks) 간주하였다.

그러나 르네 데스카르테스(Rene' Descartes)와 몇몇 다른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비모순율에 의해서 제한된다는 견해를 반대하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그 자신보다 더 큰 자에게(히 6:18,13) 맹세할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능력으로 보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동작은 동작이 아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은 하나님이 행할 수 있거나 무엇이(X)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 일들을 수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능은 그분의 전능을 깎아 내릴 수 없다. 그와 같은 거짓 일들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가당착 행위들을 행하실 수 있다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겠다 하시고 실제로는 영원한 저주를 내리시더라도 그분의 약속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게된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실 수 있는가?(Can God Sin?)

전능은 모든 것을 행할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전능하실 수 있는가? 죄를 지을 능력은 능력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결과라고 안셀름(Anselm)은 지적하였다. 아퀴나스도 죄를 범하는 것은 완전한 행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며,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행위에 도달할 수 없는 능력 즉 전능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모순을 갖고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데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타고난 불완전한 것들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도덕적 불완전은 타고난 불완전의 일종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타고난 불완전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행하실 수 없고, 도덕적 불완전을 수반하는 어떤 것도 행하실 수 없다.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은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신다면, 오히려 그것이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할 수 없는 이유는 그분이 전능하시고, 그분의 전능은 필연적으로 도덕적 완전성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분이 전지하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그분의 완전한 뜻에 일치하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와 하나님은 죄를 범하실 수 없다는 명제들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능과 과거를 바꾸는 능력(Omnipotence and the Power to Change the Past)

비행기에 탄 100명 가운데 85명이 죽었다는 첫 보도가 있었고, 사랑한 사람이 그 비행기 사고에 관련되었다는 소식을 막 듣게 된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 비행기에 탄 사랑한 사람이 살아있기를 비는 기도를 자연스럽게 드리게 될 것이다. 문제의 그 사건이 과거에 속한 것이고 지금 죽은 사람들은 수 시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과거를 바꿔달라는 요구로 나타나게 된다. 그와 같은 기도에 일리가 있는가?

일면 그것은 일리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미래는 개방적일지라도 과거는 폐쇄적이고 이미 일어난 것을 되돌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고 믿는다. 환원하면, 대개의 인간들은 과거와 관련해서 숙명론자들이다.

만약 이 견해가 사실이라면, 과거가 되돌려지기를 바라는 기도는 무용하거나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그런가?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과거를 되돌리는 데까지 미치는가를 묻는 것이 일리가 있는가를 놓고 궁금해하였다. 부정적인 답은 하나님의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다. 결국 과거가 전능자의 능력의 범주밖에 놓이게 된다면, 오늘 그분의 능력 안에 놓여있는 상황이 내일이면 그분의 능력 밖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인가(X)를 하실 수 있다는 명제가 오늘은 진실이 될 수 있지만, 내일은 거짓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은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받아드려졌다. 하나님께서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을 주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전능자도 모순에 개입된 것을 행할 수 없다는 좀더 일반적인 주장에 달하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모순을 포함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의 범주아래 놓이지 않는다. 과거가 있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은 이제 반드시 모순을 수반한다. 소크라테스가 앉아있다 그리고 앉아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을 담고 있듯이 그가 앉았다 그리고 앉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가 앉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앉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가 있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은 신적 능력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Aquinas, summa theoligica I, 25, 4, p. 139.).

무엇인가 과거에 발생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앉지 않았다와 같은) 그런 사정을 기술하는 어떤 명제는 사실이다. 과거가 바꿔질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면, 소크라테스가 앉지 않았다는 모순을 가진 명제가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면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제안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정, 즉 소크라테스가 앉았다와 소크라테스가 앉지 않았다가 둘 다 옳다는 것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퀴나스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카마라(E. J. Khamara)는 과거를 바꾸는 것은 발생했던 것을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거나 발생하지 않았던 것을 발생했던 것으로 만들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 경우 모두 다 논리적인 불가능으로 판단되어진다고 말한다. 카마라는 전능자는 과거에 행사할 어떤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와 같은 권능을 갖는 것은 논리적 필연성들이나 논리적 불가능성들을 일으키는 능력에 관여하기 때문이며, 이것들은 이미 그분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져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께서 과거를 바꾸는 것은 아퀴나스가 제안한 의미로 볼 때, 모순이 수반되고, 그 견해는 거짓이란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저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접근방법을 제안해왔다. 그들은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사고는 하나님의 원인적 활동이 과거에로 지향될 수 있는가 라는 의미에서 과거를 생기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들은 미래를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한 듯싶다. 즉 그들의 원인적 활동은 미래에로 지향될 수 있고, 미래의 결과들을 생기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 5시에 머리를 빗는다는 결과를 생기게 하는 것은 내 능력 안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의 원인적 활동이 과거의 결과를 생기게 하기 위해서 과거에로 지향될 수 있는 일이 가능한가?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과거를 생기게 하는) 사고활동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전능자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과거를 생기게 할 수 있다는 주장에 어떤 일리도 없다는 주장을 다음의 3가지 논쟁들이 지지한다.

1)과거를 생기에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차이를 제거한다. 만약 축구공들이 갑자기 필름이 되감아지는 형식으로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계와 관련해서 심각한 어려움들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축구선수가 공을 찰 때, 왜 그것이 움직이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차지 않았을 때, 무엇이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가?

2)심사숙고아래 그 견해는 더 먼저와 나중에 사이의 차이를 제거할 것이다. 나중에 라는 말은 아직도 미래에 있는 것에 반대로 적용되는 것만큼 이미 발생된 것에 쉽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3)그 이론은 또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이를 말살할 것이다.

전능의 모순(The Paradox of Omnipotence)

아퀴나스가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할 때에 그가 옳다고 인정할지라도, 그 해답은 하나님이 너무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 없는 돌을 말들 수 있는가고 우리가 물을 때 일어나는 문제들에 적합한 것 같지가 않다. 너무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드는 행위는 마치 사각형 원을 그리는 것이 자가당착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가당착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서 하나님이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드는 것과 같은 행위들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질문들은 유신론자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만일 하나님이 너무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이 있게 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너무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인가 여전히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 있게 된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돌을 만들 수도 있고 만들 수 없기도 하다. 그러므로 양쪽 모두의 경우에서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양쪽 모두의 경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짓도록 강요당하는 느낌이다.

너무 무거워서 하나님께서 들어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드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살짝 제한하면서 그 돌을 들어올리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새비지(C. Wade Savage)가 발전시킨 사례에 따라서 우리는 70파운드보다 더 무거운 돌을 들어올릴 수 없는 한 존재(y)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만약 다른 존재(x)가 y가 들어올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무거운 돌을 만들 수 없다면, 그러면 분명히 만들어 낼 수 있는 x의 능력은 제한된다. 그러나 y가 어떤 무게의 돌을 들어올릴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바꿔 말해서, y의 들어올리는 능력이 무제한적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만약 x가 너무 무거워서 y가 들어올릴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없다면, x의 만들어낼 능력은 결국 제한적이지 않다.

소위 전능의 모순들은 전능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에까지 확장되지 않는다는 아퀴나스의 주장과 동일한 일반적인 주장들로 처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 같다.

결론(Conclusion)

어떻게 "전능"이 정의되어야 하는가? 전능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제시되었다.

윌리엄 로우(William Rowe)가 "전능"을 "하나님께서 절대 가능성(absolute possibility/ 즉 논리적으로 가능한)과 그분의 기본 속성들의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아주 적절한 정의였다고 생각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로우의 이 정의는 하나님께서 죄지을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제거해줄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완전히 선한 것과 모순되는 것이고, 완전히 선한 것은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악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분이 전능하시다는 사실과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과거를 바꾸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아퀴나스의 말이 옳다면, 로우의 정의 또한 그 경우에서 응용될 것이다. 케니(Kenny)는 그가 내린 정의에서 좀더 진전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적 전능은, 만약 그것이 논리에 맞는 주장이라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능력들을 가진 완전한 전능보다 못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지닌 한 존재가 소유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즉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능력들의 소유 속에 존재하는 좀더 좁은 전능임이 틀림없다.

전능의 개념이 논리에 맞는가? 그런 것 같다. 심지어 유신론의 반대자로 잘 알려져 있는 맥키(J. L. Mackie)조차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일단 우리가 전능이 논리적 불가능들을 성취할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론짓는다면 - 또 만일 그것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것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 개념 그 자체 속에는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전능의 개념이 논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전능하시다는 주장에 어떤 모순도 들어 있지 않다.

제4장 신적 전지와 인간의 자유(Divine Omniscience and Human Freedom)

신적 전지는 하나님께서 어떤 거짓 신념들을(beliefs)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모든 신념들은 진실할 뿐 아니라, 그분의 지식의 범위 또한 총체적이다. 그분은 모든 사실의 일들을(all true propositions) 아신다. 이 신적 전지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과 모순되는가? 이것이 유신론자가 해결해야할 중요한 도전들 가운데 한 가지이다. 일반적으로 무엇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특별하게 미래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알고 있을 때,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그 사람은 문제의 그 일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믿었던 일이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제니퍼(Jennifer)가 오늘이 제프(Jeff)의 생일이라는 것을 안다고 할 때, 그 때 제니퍼는 오늘이 제프의 생일이란 것을 믿는다. 어떤 일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알기 위한 한 가지 필요조건이다. 만약 제니퍼가 오늘이 제프의 생일이란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p(any proposition)를 아는 것은 p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하고 분명하게, 제니퍼는 그 일이 사실이 아니고서는 어떤 일의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만약 제니퍼가 p를 알고, p가 거짓이라면, 제니퍼가 갖고 있다는 그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녀는 오늘이 제프의 생일인 것을 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녀는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만약 전지자가 알고 있는 사실적인 일련의 일들이 인간들이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모든 사실적인 일들을 포함한다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결과가 발생한다. 분명히 어떤 전지자가 단 한 가지라도 거짓 신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제프가 내일 오후 8시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가 할 일이 마치 제프가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것을 해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제프가 하나님이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행할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제프의 행동이 자유한가? 만약 하나님이 제프가 미래에 할 일을 미리 아신다면, 제프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될 능력을 갖는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만약 제프가 그 능력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는 것 이외의 것을 행할 능력)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잘못 아셨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예지가 실제로 예무지(foreignorance)일 수 있게 되는 사례에서 하나님은 거짓 신념을 갖고 있었다는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들이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사실적 예지를 갖는다면, 그와 같은 행위들은 결정적인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와 같은 행위들이 결정적이지 않고, 인간들이 정말 무엇인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는다면, 하나님이 전지하지 않다는 결론이 뒤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시간과의 관계에 대한 재해석(The Reinterpretation of God's Relationship to Time)

오랜 기독교사상사 속에서 신적 예지와 인간의 자유를 화해시키는데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이론은 무시간성으로의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해석하는 일에 관련한다. 이 견해는 어거스틴, 뵈티우스(Boethius), 안셀름, 아퀴나스와 같은 사상가들의 저술들에서 나타난다.

미래인간의 행위들의 하나님의 일별(vision)과 인간의 현재적 인지(present perception) 사이의 비교는 이 논쟁에서 중요하다. 브라운(Brown)이 스미스(Smith)가 그의 귀를 긁고 있는 것을 볼 때, 스미스가 행하는 것이 분명하게 무엇인지에 대한 브라운의 인지는 스미스의 행위에 어떤 원인적 영향을 가질 수 없다. 현재 어떤 사람이 인지하는 것은 단순한 보기(vision), 즉 인지되어지고 있는 것에 영향을 주거나 필연적으로 만들 수 없는 단순한 관찰이다. 유사하게, 하나님이 현재 속에서 인지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분이 인지하시는 것에 대한 어떤 필연성이나 원인적 결과가 마찬가지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고 무시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은 그분의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 속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에게는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으시다. 인간의 과거에 속한 모든 것과 인간의 미래에 발생할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 견해에서, 하나님의 지각에(consciousness) 영원히 현재적이다. 그러므로, 기술적으로 하나님은 비록 그분이 미래에 발생될 모든 것을 오류 없이 다 아신다할지라도 예지를 갖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의 인간미래에 관한 지식은 그분의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분의 지식은 미래에 원인이 되거나 필연이 되게 하지 않는다. 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인간과 신의 현재가 비교될 수 있다면, 마치 여러분이 이 현재 시각에 어떤 것들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현재 속에서 모든 것들을 보신다. 그래서 이 신적 예지는 사물의 속성과 성질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것에 현존하는 일들, 즉 미래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발생할 일들을 정확하게 본다. 그것은 어떤 혼란한 판단을 하지 않고, 예지의 마음의 일별로써 필연적이든 아니든 스쳐지나갈 모든 것을 식별한다. 유사하게 여러분은 동시에 지상을 걷고 있는 사람과 하늘에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 비록 두 장면이 동시에 발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것들 사이를 식별하고, 의도된 것과 필연적인 것 사이를 판단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적 관찰도 그것들의 성질을 방해하지 않고 모든 것을 향해 내려다보며, 그분에게 그것들은 현존하는 것들이지만, 시간의 조건아래서 그것들은 미래의 것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발생할 것을 아실 때 또 존재해야할 아무런 필연도 그것에 부과되지 않는 것을 아실 때, 그것은 견해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기초한 지식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재해석(The Reinterpretation of Human Freedom)

많은 사상가들은 만일 신적 전지와 인간자유 사이에 모순이 있다면, 자유 쪽에서 어떤 절충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것을 결정론과 양립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자유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언제나 결론지어졌다. 결정론(determinism)과 반결정론(indeterminism) 사이의 갈등에서 철학자들은 양립론자들(compatibilists)과 모순론자들(incompatibilists)로 나뉘었다. 양립론자는 자유와 결정론은 어떤 면에서 화해될 수 있다고 믿었고, 모순론자는 그것들이 화해될 수 없다고 믿었다. 어거스틴, 루터, 칼뱅,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실제로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자유의 주장을 재정의하였고, 그래서 그것은 결정론과 양립된다.

인간들은 두 가지 아주 다른 의미에서 자유하다는 말을 듣게 될는지 모른다. 무차별의 자유(liberty of indifference)는 무엇인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인간의 자유를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를 한다면, 채널5보다는 오히려 TV채널4의 뉴스를 보려는 존스의 결정은 만약 오로지 만약에 그가 돌리려는 채널이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지(indifferent) 않다면 자유롭다. 무차별의 의미에서 진정으로 자유하기 위해서 사람은 무엇인가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발적 자유(liberty of spontaneity)는, 다른 한편, 인간의 자유를 사람이 하고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이 두 번째 견해와 관련해서 다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의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질문은 그가 가장 하고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무차별의 자유는 자유에 대한 모순론자의 정의이고, 자발적 자유는 양립론의 형태이다. 만약 자유가 무차별이란 말로 이해되어진다면, 만약 또는 오로지 만약에 존스가 채널4를 볼지 또는 채널4를 안 볼지가 자유롭다면 그의 결정은 자유롭다. 그러나 만약 자유가 자발적이란 말로 이해되어진다면, 존스는 심지어 채널4를 보기로 한 그의 결정이 결정되어져 있다해도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존스는 미리 최면에 걸렸을 수도 있고, 오직 한 개의 방송만 보라는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다. 혹은 TV가 고장나서 한 방송만 잡히거나 권총을 손에 쥔 누군가가 채널4 이외의 다른 채널을 돌릴 경우 목숨을 위협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스로 하여금 채널4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앞선 사건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그가 가장 보기를 원하는 채널이라는 사실이 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의 행동이 그가 원하는 것의 표현인한, 그의 행위는, 심지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미 결정된 것들이라 할지라도 자유롭다.

만약 인간의 자유가 자발적 자유라는 말로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면, 신적 예지와 인간의 자유를 화해시키는데 어떤 문제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결정들과 그들의 소원들이 어떤 면에서 이미 결정되어져 있다해도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그분의 피조물들이 행하도록 결정했던 것을 그들이 행하기를 원하는 것을 단순히 조처하실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이 양립론자의 접근을 수용하였다. 안토니 케니는 루터의 입장을 설명한다. "인간의 뜻은 마치 짐을 싣는 짐승과 같아서, 만약 하나님이 그것을 타시면, 그것이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뜻을 같이하여 갈 것이고, 만약 사단이 그것을 올라타면, 그것은 사단이 뜻하는 대로 뜻을 같이하여 간다. 그것은 올라탄 자가 명령하는 곳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탑승자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케니에 따르면) "선한 사람들이나 악한 사람들이나 모두 다 그들이 원한 것을 행하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들을 바꿀 능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는 그것이 스스로 나쁜 의지로부터 선한 의지로 바꿀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그와 같은 변화를 단지 수동적으로 겪을 수 있을 뿐이다."(Kenny, The God of the Philosophers, p. 73.)

신학적 양립론을 적절하게 평가하자면, 너무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 이론의 비평가들은 탈의실에 갇힌 사람에 자주 비교하고는 한다. 갇힌 사람이 탈의실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한 그는 자유롭다. 적어도 이것은 자발적 자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갇힌 사람이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의 의미를 너무 확대시켜 일상적인 사용의 범위들을 훨씬 넘어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립론자들은 이 논의가 ("자유"의 의미를 확대시키는 것에 관해서) 문제를 회피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신학적 양립론에 반대하는 가장 심한 공격은 그 입장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세상의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미래에 관한 명제들은 진실가치를 갖는가?(Do Propositions About the Future Have Truth-Value?)

인간의 자유와 관련해서 신적 전지로 야기되는 문제들에 관한 또 다른 제시된 해결은 미래에 관한 진술들의 진실가치에 관심 한다. 모든 가능한 미래사건들의 진술에 일치는 하나의 명제이다. 예를 들면, "1988년 테드 케네디(Ted Kennedy)의 대통령출마"라는 사건들의 가능한 진술에의 일치는 "1988년 테드 케네디(Ted Kennedy)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다"는 명제이다. "1980년 테드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했다는 명제는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은 미래의 우발적 사건들에 관한 명제들이 전적으로 어떤 진실가치를 갖는다는 것에 의심을 표명하였다. 즉 그들은 미래에 관한 명제들은("1988년 테드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다") 사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에 관한 한 가지 자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에 대해서}(De Interpretatione) 제9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미 일어난 것에 관한 어떤 명제는 진실이거나 거짓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에 관한 명제들이 진실이거나 거짓임이 틀림없다는 것 또한 사실인가고 그는 물었다. 예를 들어서, "내일 해전(sea fight)이 있을 것이다"라는 명제를 취해보자. 만약 미래에 관한 이 명제가 진실가치를 갖는다면 (즉 만약 그것이 오늘 사실이거나 거짓이라면), 미래는 고정적이다는 사실이 뒤따르는 것 같다. 만약 "내일 해전이 있을 것이다"는 명제가 오늘 사실이라면, 거기에 내일 해전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명제는 사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해전은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간접증명법(reductio ad absurdum)으로 읽는다. 케니가 설명한대로, "만약 단수들에 관한 미래시제의 명제들이 이미 사실이라면, 운명론은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운명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미래사건들이 아직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건들에 관한 진술은, 비록 나중에 그렇게 될지라도, 아직 진실이 아니거나 거짓이 아니다. 전지와 인간의 자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의 관련성은 분명해야한다. 만약 미래와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들에 관한 명제들에 어떤 진실가치가 없다면, 그것들은 전지한 하나님을 포함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 가능할 수 없다. 아는 것이 있는 사례들에서 아는 능력이 단지 강요되기 때문에 미래를 아는 하나님의 무능력은 그분의 전지에 불리하게 작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미래에 관한 어떤 명제들이나 자유로운 행위들이 사실일 수 없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위한 지식의 대상일 수 없다.

이 견해는 주요 난관인 하나님의 지식을 심하게 제한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미래를 예언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성경의 설명과 모순된다. 만약 미래에 관한 명제들이 사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라면, 하나님에게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정말 미래를 예언한다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아신다는 것을 추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래를 예언할 수 없다는 것이 뒤따른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하실 수 있는 것은 좋은 추측을 하는 것과 고전적 견해에 비교했을 때 인식론적인 책임을 갖는 것이다. 미래의 우발적 사건들에 관한 명제들에 진실가치들이 없다는 부정은 많은 전통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동정적 말을 듣지 못했다. 성경말씀과 정통신학이 하나님의 미래지식에 관해서 단언하는 상당부분과 화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극단적 입장이다.

"미래의 책"(The Book of the Future)

신적 전지와 인간 자유의 퍼즐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함에 있어서 유용할지도 모를 한 가지 모델은 우리가 "미래의 책"이라고 부를 한 문서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가상의 책이 펼쳐지기 전에, 세 가지 다른 시나리오들을 마음에 품는 것은 가능하다. 이들 가운데 첫째에 의하면, 책을 펴실 때, 하나님은 미래에 관해서 거기에 기록된 모든 진실한 계획을(proposition) 발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이론을 대표한다.

두 번째 가능한 시나리오에 의하면, 하나님은 미래의 책을 펼치시고, 모든 페이지가 비어 있는 것을 단지 발견하신다. 이것은 미래에 관한 일들이(propositions) 진실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설명한다. 그 관점에 관하여, 미래에 진정한 계획(명제)들이 없기 때문에, 미래에 관한 어느 책의 페이지들은 비어있어야만 할 것이다. 미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포함하여 어떠한 존재에게도 불가능하다. 전지의 교리가 하나님이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시는 것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분명한 전지의 제한은 그것의 신봉자들에 의한 경고로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에 의해서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분의 전지를 손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앞서 살펴본 대로 다른 문제들로 인해서 정말 어려움을 겪는다.

세 번째 시나리오에 의하면, 책은 미완성이다. 즉 다시 말하면, 일부 페이지들은 계획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갈라진 틈들, 때때로 매우 큰 틈들이 있다. 많은 페이지들은 완전히 비어 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하나님이 어느 정도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 미래에 대한 그분의 지식을 제한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래에 관한 부분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한다. 이 설명은 하나님이 일부 분명한 미래사건들에 대한 틀림없는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 즉 그분이 선포했던 일들이 발생해야만 한다는 것에 따른 다소 다른 이론과 함께 양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선포의 주제가 아닌 미래사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지식이 불가능하다.

에이어즈(Robert H. Ayers)는 이 세 번째 시나리오가 제안한 관점들이 전능의 제한에 대한 아퀴나스의 설명을 따라 신의 전지의 제한에 대한 논쟁들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하나님의 전능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말로 보존된다면, 왜 하나님의 전지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실 수 있다는 말로 보존될 수 없는가?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모든 과거와 현재의 실제들과 모든 미래의 가능성을 아실 수 있다. 확실히, 만약 전지가 어느 주어진 순간에 알기로 되어있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하고, 또 만약 시간이 환영(illusion)이 아니라면, 미정의 우발적인 사건들과 미래, 일부 과거에 상대적이고 결정된 실제들을 아는 것은 "전지"라는 말에 대한 수용할 수 있는 의미이다.<Robert H. Ayers, "A Viable Theodicy for Christian Apologetics," The Modern Schoolman 52(1975), pp. 395-96.>

나의 미래의 책의 모델에 관해서, 하나님은 미래의 책의 표지들 사이를 살짝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미래에 대한 그분 자신의 지식을 제한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하신다. 유사한 견해가 루카스(John Lucas)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하나님의 전지의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은 그분의 전능과 평형선을 그림으로써 발견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그분이 모든 것을 정말 하신다고 생각지 않는다. . . . 우리는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일어나는 것을 인정한다. . . .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그분의 전능을 손상시킬(compromise) 준비가 되면, 그 때 확실히 그분은 또한 그의 전지를 손상시킬 준비를 하실 것이다. 만약 그분이 피조물들이 그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하기 위해서 그분의 의지를 제한시키는 고통을 겪으신다면, 그분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계획들을 짤 수 있는 사람들 사생활을 허락하기 위해서 그분의 지식이 단축되도록 허락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으로부터 독립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능력을 행사하실 때, 그분은 그분의 무오류한 지식을 제한시켜야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전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John Luca, The Freedom of the Will(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p. 75.>

만약 이 이론이 하나님이 미래에 관한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취하여진다면, 그 견해는 하나님에 관한 성경자료들과 가장 전통적인 생각과의 명백한 충돌을 일으킨다. 그것은, 하나님이 적어도 어떤 미래의 행동들을, 예를 들면, 유다가 예수를 배신할 것을, 아신다는 신념과 명백히 모순된다.

하나님의 추측된 "중간지식"에의 호소(The Appeal to God's supposed middle knowledge)

신적 예지와 인간의 자유를 화해시키기 위한 독창적이지만 모호한 시도가 16세기 예수회 신학자, 몰리나(Louis de Molina)에 의해 진전을 보았다. 몰리나는 앞에서 언급된 세 가지 주장들을 수용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1)미래의 우발적인 일들은(propositions) 진실가치를 갖는다; (2)하나님은 미래에 관한 모든 사실의 일들을(propositions) 아신다; 그리고 (3)인간들은 무차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자유롭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유롭게 x를 하거나 x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몰리나의 체계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제1장의 본질적 서술의 논의에서 소개된 가능한 세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무한한 수의 가능한 세계들이(일들의 완전한 상태들) 있다. 단지 그것들 가운데 한 가지가 실제적이거나 참 세계이다. 서로 다른 한 가지 가능한 세계를 위해서, 적어도 일들의 한 가지 상태는(one state of affairs) 다름에 틀림없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도록 은 30개가 제시되는 가능한 세계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이 가능한 일들의 상태에 관하여 적어도 두 가지 것들을 안다. (1)우리는 그것이 또한 실제 세계의 일부분이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2)우리는 "만약 유다가 은 30개가 제시되면, 그가 예수를 배반할 것이다"는 가설적 명제가 사실이다는 것을 안다.

이제 참 세계로서 앞서와 동일하지만 또한 가지 다른 두 번째 가능한 세계를 상상해 보자. 이 두 번째 가능한 세계에서 유다는 단지 은 20개만을 제시받는다. 이 일들의 가능한 상태는 사실에 반대인 조건, 즉 "만약 유다가 은 20개를 제시받았다면, 그가 예수를 배신했을 것이다"에 의해서 설명될 것이다. 이 두 번째 가설적 진술이 사실인가 거짓인가?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두 번째 가설적 상황을 개관하는 한 가지 방법은 두 가지 더 가능한 세계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것들 가운데 한 가지에서 유다는 은 20개를 제시받고 예수를 배반한다. 다른 세계에서, 유다는 동일한 금액을 제시받고 예수를 배반하기를 거절한다.

만약, 실제로, 유다가 은 20개만을 제시받았다면, 이 두 가지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실제가 되었을 것인가를 인간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스럽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세계의 내용을 알고 계시다는 몰리나의 이론에서는 기본이다. 만일 유다가 은 20개를 제시받았다면, 또는 단 한 개나 전혀 아무 것도 제시받은 것이 없다면, 유다가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하나님은 아신다. 사실상, 하나님은 유다가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무엇을 자유롭게 이뤘는가를 아신다.

몰리나는 이 이상한 종류의 지식을 "중간 지식"(middle knowledge)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측컨대, 하나님께서 소유할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지식들 사이에서 오기 때문이다. 갈리규-라그랜쥐(R. Garrigou-Lagrange)는 설명한다.

이 지식은 그것의 적절한 대상의 근거에 의해서 중간이라 불린다. 그 대상은 조건부 미래 혹은 조건적으로 자유로운 미래의 행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단순한 지성의 지식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일별(vision)의 지식의 대상인 우발적 미래인 순수하게 가능한 것들 사이에 있는 중간이다. 몰리나에 따르면, 이 중간 지식에 의해서, 하나님은, 어떤 예정선언 이전에, 만약 특정한 환경에 놓인다면, 자유의지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또 어떻게 다른 특정한 사례들에서 그것이 다르게 결정할 것인가를 아신다. 그 후, 그분의 호의적인 계획들에 따라서, 그것에 다소 좋고 나쁜 환경들 속에 그것을 둠으로써 이 자유의지를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그분의 자연스런 지식에 의해서, 하나님은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은 가벼운 일별에 의해서, 무엇이 있을지, 참 세계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신다. 그리고 그분은 중간지식으로, 만약 세계가 어느 면에서 다르다면, 무슨 일이 있어나게 될지를 아신다. 페기스(Anton Pegis)는 하나님의 중간지식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모든 상황아래서 사람이 행동할 모든 방법들의 신성한 지식 속에 있는 영원한 총연습으로" 기술한다.

그리고 그분의 중간 지식으로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세계들과 각각의 가능한 개인이 그 세계들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agent) 그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충만한 지식으로 어떤 선행 조건들을 선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포는 인간(agent)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유다의 경우에서, 만약 유다에게 은 30개가 제시된다면, 유다의 의지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배반하기로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지가 성취되는 일련의 상황들을 단순히 실현시키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포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분의 피조물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지 않는다.

결론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실린 다음의 진술들을 숙고해보자.

그러므로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진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한다"는 이 명제는 언제나 구별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일이나 그 말하는 것을 언급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그 일을 언급하면, 그것은 나눠지고,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다"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된다면, 그것은 통합적이고 진실하다. 왜냐하면, 그 의미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필연적이다"이기 때문이다.<Summa Theologica I, 14, 13, p. 84>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진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한다"는 주장이 전지와 인간의 자유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사용된 논쟁에서 중요한 전제라는 것을 아퀴나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은 애매 모호하다. 그것은 두 가지 아주 다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퀴나스에 의해서 제시된 두 번째 의미, 즉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필요하다"에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실이다"는 명제가 하나의 필요한 진리라는 것을 의미할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전지하시다는 것이 주어졌으므로, 이 두 번째 명제의 번역은 가장 확실하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주장으로부터, 미래인간의 행위들의 자유를 떨어뜨릴지도 모를 아무것도 절대로 뒤따르지 않는다. 그 명제가 사실인 동안, 그것은 미래인간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논쟁을 지지하지 않는다.

사물들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필연적인 진리이다"고 읽혀질 수 있는 첫 번째 해석과 아주 다르다. 중요한 전제의 이 첫 번째 해석은 미래인간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수반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진 모든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진리이다"는 이 첫 번째 해석의 전제가 지금은 거짓으로 판명되고 있다. 필요한 진리들은 거짓일 가능성이 없는 수학과 논리학에서 발견된 것들과 같은 진술이다는 것이 기억되어질 것이다. "7 더하기 5는 12이다"는 진술은 단지 우연에 의해서 진리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실임에 틀림없고, 그것들은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진실하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모든 필연적인 진리들을 아신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발적이고,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 가능한 세계들에서 사실인 수많은 진리들을 알고 계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 링컨이 암살 당하였다"는 진정한 명제를 아신다. 그러나 분명히 이 명제는 필연적인 진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링컨이 살아서 그의 두 번째 임기를 끝냈고, 오하오주 클리브랜드(Cleveland, Ohio)에 은퇴했던 가능한 세계들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문제의 논쟁에서 중요한 전제의 유일하게 관련 있는 해석이 거짓으로 판명된다. 하나님의 예지가 모든 미래인간의 행동들을 필연적이게 한다는 것을 보여줄 논쟁이 없다고 해서, 이 장에서 배운 이론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