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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1 12:13
[은혜 13강]제4장 자유의 상징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449  
   http://kccs.info/gracejc_ch04.htm [283]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4장 자유의 상징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NAS).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유죄판결과 율법의 강요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단지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한 자유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데” 자유롭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이 우리를 우리의 형제들을 섬기도록하기 위해 해방시켰는가와 어떻게 이 섬김이 제공되어야 마땅한가를 살펴볼 것이다.

1. 신자들의 가족

성경은 교회를 한 가족이나 한 형제의 관계로 기술한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은 교회를 “믿음의 가정”(신자들의 가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하나님의 집의 식구들)이라고 에베소서 2장 19절은 말한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면한다(벧전 2:1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고후 6:18), 서로에게 형제자매이다(갈 5:13, 몬 2).

마치 어떤 가족들이 문장들이나 다른 독특하고 식별되는 상징들(예: 스코틀랜드 고지 사람들이 왼쪽 어깨에 걸치는 격자무늬의 나사)을 개발한 것처럼, 신자들의 가족도 식별되는 모양이나 “상표,” 말하자면 형제사랑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는 모든 사람을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교우들을 향하여 가져야할 사랑은 특별한 종류의 사랑, 즉 가족 사랑이다. “형제로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히브리서 13장 1절은 권면한다(베드로전서 3장 8절을 보시오). 로마서 12장 10절은 우리가 “형제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말은 그리스도인 사랑에 대한 일상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만 발견되는 그 다정한 애정을 말하는 단어이다.

2. 사랑으로 섬김

사랑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에든지, 그것은 그 자체를 능동적인 섬김으로 표현한다. 사랑은 수동적일 수 없다. 요한은 묻는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한다(갈 5:13).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백성을 도울 때 드러난다(히 6:10).

긴급을 요하는 사례들에서 우리는 차별 없이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누가복음 10장 29-37절을 보시오). 그러나 우리의 최우선적인 책임은 우리의 교우들을 돕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진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A. 영적인 봉사

우리는 흔히 그것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섬김은 영적인 문제들을 다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우리가 “서로의 짐을 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가 마음에 우선순위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형제가 끈질긴 죄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에 관하여 방금 이야기하고 있었다(1절). 그 같은 형제가 회개하고 신앙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 우리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후 2:7).

피차 짐을 져야할 필요와 책임은 빈번히 쓰인 성구들, 즉 “(여럿이) 서로”(one another) 또는 “(둘이) 서로”(each other)에서 드러난다. 다음의 목록을 고려하라.

    “매일 피차 권면하여....”(히 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살전 5:11).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약 5:16).
    “서로 대접하기를....”(벧전 4:9).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 3:16).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25).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KJV).

상호 섬김에 관한 이 강조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석조아치에 비교하게 하는데, 아치에서 개개의 돌은 다른 돌들을 지탱한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압도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영적인 후원이다.

B. 자선 행위

사랑은 또한 형제의 물질적인 필요를 고려한다. 이것은 자선의 영역이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교회들이 선교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소수의 교회들만이 계획된 자선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교회에서 거둔 헌금의 주된 용도가 자선을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생계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매일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하여 재산과 소유물을 팔았다(행 2:44-45, 4:32-37).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그들의 헌금에 관해서 지시할 때(고전 16:2, 고후 8-9장), 그는 기근을 당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수집하는 헌금을 말하고 있었다.

부유한 자들과(딤전 6:18)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기여하는” 신령한 은사들을 받은 자들은(롬 12:8) 다른 사람들을 도울 특별한 책임을 가진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듯이, 비록 그것이 수고를 필요로 한다고 해도, “우리는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행 20:35). 개인적인 사랑의 섬김의 좋은 사례는 도르가(Dorcas)이다. “그녀는 항상 선행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행 9:36-39).

심지어 복지국가사회에서조차 교회들과 개인들이 자선을 통하여 형제사랑을 표시할 수많은 필요들과 기회들이 여전하다. 미국과 해외에 우리의 후원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기독교 보육원들, 양로원들, 진료소들과 병원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소속한 교회들 안에는 혹독하게 어려운 시기들을 보내고 있는 교인들이 자주 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서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이 교인들의 가족을 향한 것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가족 가운데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필요들이 있는 한은, 이것들이 비 교회기구나 교파교회들로부터 오는 수많은 요청들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3. 사심 없는 봉사의 근거

“스미스 형제와 그의 가족이 이제방금 화재로 집과 소유물을 잃었습니다.”고 설교자가 알린다. “우리는 헌금접시를 돌려서 그들을 위해 특별헌금을 거두려고 합니다.” 당신은 그 접시에 10달러짜리 지폐를 놓는다.

“존스 형제는 실직했고, 그의 어린 딸이 심히 앓아왔습니다.” 안 좋은 소식이 더 이어진다. “헌금접시가 지나갈 때 가능한 한 아무쪼록 후하게 헌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5달러짜리 지폐를 놓는다.

“브라운 자매가 지난봄에 쓰러진 이후로 거동이 많이 불편하였습니다. 그녀에게 누군가 그녀의 집에 가서 청소를 좀 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원자가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손을 든다.

그 일들이 행해지고,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다. 참된 섬김이 주어졌다. 그러나 무엇이 그 동기였는가? 선행들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구제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안전하게 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지 않는가?

A. 성도들의 공동체

섬김을 위한 이들 두 가지 기초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communio sanctorum(성인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고대 라틴어 용어를 간략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성인들의 잉여공덕들의 나눔”을 뜻하는 것으로써 설명하였다. 성인들은 매우 선하고 의로운 소수의 사람들로서 그들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선행보다 더 많은 선행을 행하였던 자들이다. 따라서 잉여공덕들은 다른 사람들이 끌어다 쓸 수 있는 “공덕 창고”에 저장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communio sanctorum에 대한 이 해석을 올바르게 공격하였다. 첫째, 누군가를 구원하는 유일한 공덕들은 예수님의 것들뿐이다. 어떠한 죄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잉여공덕들을 쌓기는 고사하고, 자기 한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공덕조차 쌓을 수 없다.

둘째, 루터는 말하기를 이런 해석은 교인들을 본질상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사람은 단지 그가 교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위해서 교회의 일부분이 된다. 만약 당신이 구원이 획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자신의 선행조차도 당신을 단지 유익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교회는 communio sanctorum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성도의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공동체”는 나눔과 살아 있는 섬김의 공동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이다. 교회 회원권은 선행을 통하여 사랑을 베풀고, 나누고,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일을 이런 빛에서 보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以信稱義)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덕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바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잉여 공덕”을 흥정하면서 또는 우리 자신의 공덕의 비축량을 늘리면서 허둥거려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은 자기 추구와 공덕을 쌓기 위한 섬김을 사심 없고, 이웃 중심의 섬김으로 대치시킨다. 루터의 견해에 대해서 주석하면서 폴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그 점을 잘 말하고 있다.

루터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을 통한 의롭다하심의 복음만이 참된 공동체를 정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복음에서의 믿음은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놓으며, 모든 행동을 결정해왔던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그 이기적인 관심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따라서 그것은 그를 해방시켜 자기 형제들을 활동적으로 섬기게 한다(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p. 303).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질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에, 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이제 완전히 자유 하여 그가 가진 모든 것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며, 그의 형제 섬기는 것을 감수한다(Ibid, p. 308).

B. 섬김의 보상

비록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의 값없는 선물이지만, 또 비록 우리의 섬김이 사심 없는 사랑에서 유발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행들은 하나님 자신의 제한이 없는 자비심에 의해서 보상될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