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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1 14:12
[은혜 13강]제6장 쉽지 않은 길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950  
   http://kccs.info/gracejc_ch06.htm [258]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6장 쉽지 않은 길

우리의 유죄문제에 대한 해답은 의롭다하심이나 사죄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이 쉬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한 때 유행했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바라보는 것이 그분을 슬프게 할지라도, 그분은 언제나 말할 거예요, ‘나는 용서한다’고.”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가는 방향에 당신의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는 너희를 용서한다”고 말씀만하시면 되는 것인가? 용서받거나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은 “무죄”로 선포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유죄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 어떻게 우리의 얼굴을 똑바로 보시고 우리에게 무죄라고 선언하실 수 있는가?

이 물음에는 단 하나의 해답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듯이 “그분의 피로써 의롭게”된다(롬 5:9). 그렇지만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용서를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가? 그리고 왜 그것이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이 장(章)에서 우리는 화목제물(propitiation)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1. 화목제물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도 의로우시고(just)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justifier)이 되시고자한(롬 3:26) 때문이다. 여기에 아주 간결한 해답이 있다.

보통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이차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틀림없이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에 의존한다. 죄인들인 우리들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최종분석에서 볼 때, 십자가는 단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필요하다. 십자가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가 있다.

로마서 3장 26절은 하나님이 두 가지 방법, 즉 의로우시고(just)의롭게 하시는 분(justifier)으로서 완전하시려고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제멋대로 택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분은 그분의 바로 그 속성을 표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분이 의로우시고, 또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본성은 공의와 사랑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들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들이 십자가를 필요하게 만드는가?

A.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어떤 사람은 물을지도 모른다. “만일에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그분은 십자가와는 별도로 죄들을 그냥 용서하실 수 없는가? 왜 그분은 단지 ‘나는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왜 그분은 우리의 죄들을 그냥 털어버리시고 그분의 주권적인 선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가?” 그 대답은 하나님의 정의에 놓여 있다.

“....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ASV).

정의 혹은 옳음은 그분으로 하여금 죄를 처벌하시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그 특성이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이며, 그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위반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려는 실질적인 시도이다.

예를 들어, 속이지 말라는 계명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바로 그 본성에서 샘솟는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딛 1:2). 그러므로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 거짓말하는 것은 그분의 성품에 대한 위반이다. 우리가 거짓말할 때, 그때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제멋대로 만드신 어떤 추상적인 율법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이 이렇게 거짓말이나 어떤 다른 죄로 인해서 공격받았거나 부인되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셔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바로 그 성품을 모독하는 그것을 간과하실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하나님은 눈을 감고서 거짓말들과 살인들과 간음들이 존재하지 않는 체하실 수 없다. 그분의 정의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 죄에 대해 처벌해야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그분 자신의 본성이 위반될 때 그 위반은 반드시 처벌되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 필요성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처벌하셔야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정의는 죄를 가볍게 다룰 수 없다. 그분의 정의는 그분의 진노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고 그 불꽃은 죄를 극렬하게 태워버린다. 그분의 정의의 분노는 모든 죄인들 위에 반드시 쏟아부어져야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B.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또다시 반대한다. “당신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의롭다고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좋아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세요! 그분이 의롭게 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처벌하시도록 하세요. 그분이 우리 모두를 지금 당장에 지옥으로 던지게 하세요. 그분이 그분의 영원한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을 내리시도록 하세요.” 사실 정의는 만일 모든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면 만족될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십자가가 없이도 만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지 않는가? 왜 그분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내는 대신에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받게 하시지 않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장 8절을 보라). 만약 정의가 만족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분의 본성에 딱 들어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시고, 사랑은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벧후 3:9, 딤전 2:4). 그러므로 만약 모든 사람이 멸망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의 본성에 맞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의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동시에 의롭게 하시는 분이셔야 하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그분의 진노가 우리를 소멸하지 않도록 반드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셔야만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본성은 하나의 곤경, 즉 하나의 불가능한 요구를 제시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고, 사랑은 우리의 구원을 바란다. 그러나 정의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고, 정의는 우리의 천벌을 요구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적합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전지하신 구세주의 능력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배태(胚胎)한 곤경에 대한 해답은 그분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분이다. 그 해답은 그분의 독생성자(獨生聖子)가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그분에게 죄를 처벌하실 것과 죄인을 구원하실 것을 모두 다 요구한다. 십자가를 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이 분명히 믿기 어려운 임무이다.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또 의롭게 하시는 분이다.

C.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어떻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야기되는 이 곤경을 만족시키는가? 그 문제에 해답이 되게 하는 십자가에 무엇이 있는가? 근본적으로 그것은 화목제물이기 때문이다.

화목제물은 진노를 푸는 제물이다. 예를 들면, 아내를 부당하게 대우했던 성마른 남편이 (5장을 보라) 회개하고 잘못을 고치고 싶어 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래서 그는 꽃가게를 찾아가 12송이 장미다발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꽃들은 화목제물, 즉 그를 향한 아내의 분노를 풀게 할 목적의 제물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화목제물로 기술한다(롬 3:25, 요일 2:2, 4:10 KJV).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가 마땅히 받아야만 할 모든 진노와 형벌을 자기 자신이 받음으로써 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사법적인 요구들을 충족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그분이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개념은 두 개의 다른 인상적인 표현들, 즉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바” 되셨고(고후 5:21), 또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갈 3:13)에서 보다 더 분명히 나타난다.

비록 그분은 개인적으로 죄에 대해 유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죄와 매우 밀접하게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 자신의 몸에 죄로 인한 저주를 담당하실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이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좀 더 상세하게 의미, 즉 우리 죄들을 향한 전력(全力)적인 하나님의 진노를 그분이 담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형벌이 자기 자신에게 가(加)해지도록 허용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셨고,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의로워지게 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그것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의롭게 하는 분이 되게 한다.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에 나오는 대속에 관한 강조를 무시할 수 없다.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였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충족하셨다.

십자가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으며, 동시에 의로우실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 때문에 형벌을 받으셨다면, 우리의 죄들은 이미 그분 안에서 처벌되었다. 우리로 인한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 위에서 이미 스스로를 불살라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무시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우리에게서 용서되는 모든 죄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처벌되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우실 수 있고 또 의롭게 하시는 분이실 수 있다.

2. 의롭다하심(칭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롬 3:25)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롬 5:9)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만약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신뢰한다면, 경건치 아니한 자들조차도 의롭게 하실 것이다(롬 4:5).

유죄? 그렇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덮고 유죄를 흡수해버린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마치 그가 유죄하지 아니한 것처럼 취급하실 수 있다. 내가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마치 내가 결코 죄를 범하지 아니한 것처럼” 취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들? 그렇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 아래에 머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시려고 우리의 죄들을 붙들어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유죄선고를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3. 화목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평화로운 상태에서 산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평화성취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것은 죄인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들이란 사실을 참작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적의와 증오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데, 심지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기”(롬 5:10)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하는 데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적의가 반드시 제거돼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을 향해 적의를 품을 수 있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우리의 죄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돌리시게 했다고 가르친다(사 59:2). 그분은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보지 못하신다(합 1:13). 죄인들은 신(神)의 증오의 대상이다(잠 6:19).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적의이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조차 그리스도의 즉음은 우리를 화목하게 한다(롬 5:10). 그 화목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기도 전에, 또 그것이 우리에게 선언도 되기 전에, 그분께서 성취하신 어떤 것이다. 그분의 진노와 적의를 전적으로 예수님께 돌리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분 편에서 화목과 평화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셨다.

화목을 향한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우리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우리는 우리의 적의를 반드시 치워야 하며, “하나님과 화목”되어야 한다(고후 5:19-20). 이 방식에서 우리는 이미 성취된 화목을 바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롬 5:11).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는 그분의 친구들이 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죄문제를 해결하셨다. 하지만 그분 자신에게 큰 비용을 지불하고서야 그리된 것이다. 그 비용은 그분의 독생성자의 죽음이었다. 우리의 대속자이신 그분에게 신(神)의 진노와 적의가 쏟아 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