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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1 15:55
[은혜 13강]제8장 오직 시작일 뿐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971  
   http://kccs.info/gracejc_ch08.htm [240]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8장 오직 시작일 뿐

앞장에서 기술된 새 생명의 시작은 우리 가운데 누구나 경험하게 될 아마 가장 중요한 변화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오직 새 생명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그 이상의 변화를 가져올 심오한 가능성들에로 가는 길을 개방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로 그 형상을 따라 빚어진 피조물로서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지금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

거듭남의 실체는 마음의 내적 변화, 곧 우리의 근본 본성에서의 변화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 없는 무엇이며, 그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드린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가 의식하는 우리의 모든 영역들의 삶을 고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습관들, 우리의 행동들, 우리의 언어, 우리의 생각들, 우리의 기호(嗜好)들, 우리의 욕망들, 심지어 우리의 동기(動機)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자유하며, 하나님의 성결의 모범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임무인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변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변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결심해야 하고, 또 우리는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가능케 하시는 능력과 자유를 사용하여 그것을 반드시 해내야 한다.

1. 변화의 필요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한 변화는 필요하다. 변치 말아야할 유일한 것들은 완전한 것들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와 그분의 성결과 율법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때, 한 가지가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분명해진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성에서 얼마나 먼 길에 있는가를 배운다. 로마서 3장 20절이 말하는 대로,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죄를 깨닫는다.”

로마서 7장 7-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의 지식을 통해서 죄에 대한 자기 자신의 깊어지는 의식을 기술한다. 예를 들면, 만약 그가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는 무엇이 탐욕인지 혹은 그가 탐내고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계명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참으로 그렇지 않다. 그러면, 사람은 죽음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고, 심지어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사람이 자기 죄와 영적인 죽음을 깨닫게 한다. 그 같은 지식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하여”(7:13) 필요하다.

심지어 우리가 침례 때에 성령님을 통하여 거듭난 후에도 우리들의 삶을 위한 탐조등으로써 우리가 어디에서 변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드시 지속해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고, 살아있는 유기체는 반드시 변해야 하며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게 될 것이다.

A. 지식의 성장

우리는 우리의 지식에 있어서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오직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비롯된다. 구약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 백성, 즉 유대인들을 예비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세계의 구세주를 받게 하셨는가를 알게 된다. 복음서들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구세주의 생애, 가르침들,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배운다. 사도행전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교회, 즉 그리스도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성장했는가를 알게 된다. 신약성경의 나머지 책들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구세주께서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분의 교회와 백성이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지를 배운다.

그 같은 연구를 통해서 또 교회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사실들을 배울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된다.

히브리서 5장 11절부터 6장 3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지식에 있어서 성장을 등한시 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들을 책망하신다. 우리가 성경의 더 심오한 가르침들의 단단한 음식을 먹고 있어야 할 때에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젖을 빠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마치 자기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연구해야 한다(5:12).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이다”(6:3).

B. 태도의 성장

성장의 두 번째 분야는 우리의 태도들, 즉 우리의 전체 내적 삶에 있다. 죄 많고 자기중심적 태도들은 사심이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망들로 반드시 대체되어야 한다. 미움과 무관심은 사랑으로 반드시 대체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두려움과 탐욕이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그 대신에 사랑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질을 반드시 통제아래 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냥함과 친절로 채우시도록 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1-10절의 “팔복”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태도들의 종류들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온유, 겸손, 자비, 마음의 청결, 그밖에 다른 은혜들을 반드시 발전시켜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비슷한 목록을 제시한다. 그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열거한다. (또한 벧후 1:5-6, 빌 4:8을 보라.)

우리가 반드시 이뤄야할 가장 어려운 변화는 십중팔구 이 태도들의 분야에 있다. 시간이 걸릴 것이고, 과정이 고통스럽고 더딜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중요하며 우리는 반드시 그것에 열심히 종사해야 한다.

C. 선행의 성장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선행들에서 우리의 외적 행동에서 혹은 삶의 매너에서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죄의 습관을 반드시 정복해야 하며, 죄의 활동들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영적 습관들과 실천들의 패턴을 반드시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사랑, 순종, 선행의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

2. 변화의 소망

아이들은 성장하는 것에 항상 조급해 한다. 어린 소녀들은 엄마의 의복과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한다. 청소년들은 자동차를 운전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차기를 열망한다. 그들은 모두 성숙한 연령에 도달하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부터 반드시 그의 깊은 소망이어야 한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우리는 어릴 때의 연약함과 좌절들로부터 성숙에 따르는 성취의 힘과 기쁨에까지 변화하기를 반드시 정말로 원해야한다.

우리는 신생아가 일어서서 100야드 경주에서 달리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초짜 그리스도인이 즉시 완전하고 성숙한 삶을 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다양한 성장의 단계들에서 우리가 마땅히 되어 있어야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안다. 우리는 여전히 원치 않는 죄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한 죄인들일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극히 중요한 것은 변하고자하는 신실한 소망(sincere desire)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고 바울이 고백했던 대로, 우리는 성가신 죄로 인해서 좌절하는 우리 자신들을 종종 발견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바울을 믿지 않는 죄인과 다르게 만들었는가? 바울이 불신자와 달랐던 것은 그에게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으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죄짓는 것을 멈추고, 선하기를 원하였다.

우리가 죄를 극복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태도들과 행동으로 성숙해지려는 우리의 노력들에서 우리는 반드시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어야 하지 않는가? 대답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옛 격언에서 요약된다. 우리의 뜻이 변화하려는 소망에 참으로 전념될 때, 변화의 자유와 능력의 길이 우리의 뜻에 달려있다.

3. 변화의 자유

변화의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것은 “성령님(으로)의 선물”(행 2:38)이나 다름없다. 성령님 그 자신은 우리 안에, 즉 우리의 바로 그 삶과 몸들에 거주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신다(고전 6:19). 그분의 해방하시는 임재는 우리들을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며, 영적인 건강과 깨끗함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A. 성령님의 임재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살 영적 자원을 갖지 않는다. 그는 힘이 없어서 자기 자신에게 있는 죄를 이기지 못한다(롬 5:6). 로마서 8장 5-8절에서 바울은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죄인은 마치 건강을 해치는 질병에 조종당한 사람과 같다. 그는 그의 발들을 그것들이 가야할 곳으로 가게 할 수가 없다. 그는 그의 손들을 그것들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할 수가 없다. 그는 그의 입을 그것이 말해야 할 것을 말하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 그는 그 자신을 의사에게 내맡길 수 있고, 의사는 그를 치료하고 약을 처방하여 제 몸을 자신이 통제 할 수 있도록 고쳐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그 자신을 위대하신 의사 성령님께 굴복시킬 수 있고, 위대하신 의사는 그의 삶과 몸에 성령님 자신으로 채우실 수 있다. 성령님의 고침과 자유하게 하는 임재를 통해서 죄의 권세는 깨진다. 바울이 말한 대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롬 8:9. 11절을 보라).

만약 하나님의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렇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자들에게 발생하는 틀림없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의 바로 그 몸들 속에 주거를 정하시게 된다(고전 6:19). 이것은 새 언약시대의 축복들 가운데 한 가지이다. 에스겔은 그것을 예언하였고(36:27), 예수님은 그것을 약속하셨다(요 7:37-39). 오순절 날에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의 침례 안에서 수여자를 만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선포되었다(행 2:38).

어떻게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침례 때에 성령님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만약 우리가 침례 때에 철저한 항복으로 그분을 만난다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재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상의 어떤 확신도 더 필요치 않다. 더 많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삶을 살 영적 자원, 즉 성령님의 임재를 참으로 갖고 있다. 성령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없던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죄지을 성질에 대하여 승리를 주신다.

B. 성령님의 능력

많은 사람들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임재의 목적을 오해해왔다. 그들은 성령님이 어떤 종류의 지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생각해왔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롬 8:14) 존재에 대해서 참으로 말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내적 지식이나 인도를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유가 아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을 통해서 지식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벧후 1:21).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모르는데 있지 않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살아갈 수 없다는데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임재의 목적이 능력이라는 한 마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영적 에너지와 도덕적 힘의 근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것은 “성령에 의해서”(by the Spirit)이다. 우리가 “몸의 행실(잘못된 행실)을 죽이는”(롬 8:13)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 즉 우리가 그분이 성경에서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도록 하고, 우리가 그 길에서 걷고자 하는 우리의 뜻과 결심에 그분이 힘을 실어주시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RSV)는 빌립보서 2장 13절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바울은 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기를”(엡 3:16) 기도한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유혹을(고전 10:13을 보라) 물리칠 능력과 성결하게 성장할 능력을 주신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을 바꾸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과 의지력을 의존하기 때문에 종종 실패하고 만다.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아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기 시작하자.

유혹에 맞닥뜨릴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저지할 결심을 공급해 주실 것을 의식적으로 신뢰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한숨 돌리고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 우리가 원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 가져야할 태도들을 발전시켜주시도록 반드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의지는 성령님께 반드시 온전히 굴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뜻을 거슬러 우리를 돕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전히 항복한 마음에 그분은 자유와 능력을 부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