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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1 16:22
[은혜 13강]제9장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259  
   http://kccs.info/gracejc_ch09.htm [249]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9장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복 받은 확신, 예수님은 나의 것, 이 무슨 영광과 신성의 미리 맛봄인가!”(새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그곳에서 출석이 불릴 때, 나는 거기에 있겠다”(새 찬송가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그래, 내 이름이 거기에 적혔어. 하나님의 나라의 책의 희고 깨끗한 페이지에 - 그래, 내 이름이 거기에 적혔어!”

“앞에 있는 상을 향해 앞으로 가자! 머지않아 그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바라볼 것이다. 머지않아 진주 문들이 열릴 것이다. 우리는 황금 길들을 밟을 것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들의 상당수가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를 적고 있다. 우리는 그 찬송들을 매주일 부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날을 정말 기대하고 있는가? 우리가 정말 “심판 날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염려하는가?

성경은 우리가 확신을 가져도 좋다는 것을 뚜렷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도 좋다. 이것이 바로 그 성경적 어휘인 소망의 의미이다. 성경에서 소망은 간절히 바라는 생각이나 불확실한 갈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만만하고 확실한 무언가 좋은 것에 대한 기대이다. 그것이 소망이라 불리는 것은 그 대상이 오로지 여전히 미래에 있기 때문이지, 어떤 불확실성 때문이 아니다.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 상당히 혼란스런 생각이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일단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그는 결코 다시 잃어버림 당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비성경적 극단으로 치닫는다.

다른 한편, 상당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확신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래, 내 이름이 거기에 적혔어”라고 노래하는 대신, “내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어?”라고 그들은 그것을 질문으로써 오직 물을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천국에 간다면 - 그리고 저는 만약이란 말을 강조하였습니다”는 말로 지역교회의 한 장로가 그의 주일성경클래스에서 말했을 때, 그는 이 공통적인 의심을 표시하였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확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이 확신의 근거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확신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확신이 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것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의심과 불확실성은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서 지배한다.

본 장(章)에서 우리는 확신에 대한 그릇된 개념들과 잘못된 근거들을 폭로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확실성에 대한 유일하고 적절한 토대,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입증되고, 침례 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탐구할 것이다.

1. 확신과 예정

영원한 안전의 교리 혹은 “한번 구원받으면, 끝까지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주후 430년에 사망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라 불리는 북아프리카 교회의 지도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원래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칼뱅주의로 알려진 교리들의 체계나 묶음의 일부분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완전 부패하다는 개념으로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로는 복음을 믿거나 복음에 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누가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인지를 선택하신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 선택을 하신다. 이것이 무조건적 예정 혹은 선택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받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충족할지를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은 그가 예정하신 자들의 마음들을 여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지들을 바꿔서 그들이 복음을 믿도록 하게 하신다. (이것은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 불린다.)

환언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의 과정을 조종하신다. 우리의 의지들은 그 과정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들을 무시한 채 우리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신다. 그리고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들을 지속적으로 무시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결코 잃지 않도록 막아주신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을 받으면 끝까지 구원받는다.”

이 모든 체계는 완전 타락이라는 그릇된 개념에 근거한다. 죄인이 선한 일들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롬 8:7-8). 그러나 한 가지 것은 성경에서 분명하다. 모든 죄인은 죄에서 돌이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거듭나게 하셔서 율법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초청하신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이 체계는 또한 예정에 관한 그릇된 이해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사람들을 천국에 가도록 예정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리낌 없이 받아드릴 것이고,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신자들이 될 것을 오직 그분이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29절은 그것을 명백히 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그 “아들의 형상”은 우리가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영화롭고 부활한 상태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여 그를 구원에로 인도하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무시하여 우리를 지속적으로(끝까지) 구원받게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신자가 지속적으로 그의 믿음에 머물 경우에만 그가 구원받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1:23, 히브리서 3:6-14, 4:1,11, 6:4-6을 보라.

몇몇 교단들은 “한번 구원받으면, 끝까지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반면에 완전 타락, 무조건적 선택, 거절할 수 없는 은혜는 거부한다. 환언하면, 그들은, 그들이 비록 틀 그 자체를 올바르게 거부했지만, 어떤 한 틀 안에서만 일리가 있다는 믿음을 고수한다. 적절한 다음 단계는 “한번 구원받으면, 끝까지 구원 받는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은 확신을 가르친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고, 그의 선택의 자유를 위반하는 무조건적인 확신이 아니다.

2. 확신과 경험

오늘날의 공통 개념은 만약에 당신이 어떤 종류의 느낌이나 경험을 가졌다면, 당신은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의 종류는 다양할는지 모른다. 일부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기도하는 동안 경험한 따뜻하고 얼얼한 느낌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방언을 말하는” 능력일 것이다.

경험이 무엇이든지 간에 개념은 동일하다. 만약 당신이 경험을 가졌거나 느꼈거나 행하였다면,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는다. 또한 다수의 사람들은, 만약 당신이 그 같은 경험을 갖지 않았다면,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접근이 잘못이라는 점을 반드시 주장해야 한다. 첫 번째로 주관적인 느낌은 애매모호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될는지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느낌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어느 주관적인 느낌의 근원이나 원인을 식별하려할 때 특히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방언 말함”이 심리적으로 제약받거나 귀신의 권세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타고난 모호성은 경험을 확신에 대한 빈약한 근거로 만들고 만다.

또한 느낌들과 경험들은 자주 변하기 쉽다. 우리는 오늘 놀라운 느낌을 가질는지 모른다. 또 우리가 진실로 구원받았다는 결론을 내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내일 비극적인 경험을 갖거나 불쾌한 느낌으로 잠에서 깨어난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결론을 반드시 내려야하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곳에서도 주관적인 특별한 느낌이나 경험이 개인적인 구원의 확실한 표시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확신은 우리가 아래서 살펴보게 될 내용처럼 객관적인 사건들에 매인다. 자기 자신 안에서 보는 자는 소망에 대한 어떤 참된 근거도 찾지 못할 것이다.

3. 확신과 선행들

아마도 가장 슬픈 접근은 구원의 확신을 개인의 선함의 어떤 정도에 연결 짓는 것이다. 여기 한 개인이 구원받기에 “충분히 선한가”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은혜가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믿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받기에 참으로 충분히 선하다고 결정할는지 모른다. 또 강한 확신의 느낌을 가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처럼(눅 18:9-12) 그들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확신을 선함에 근거를 두는 대개의 사람들은 그러나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다. 대다수는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이란 것을 깨닫는다. 대다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들까지도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목표에 달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하늘을 찌르는 자랑과 추정이 아닌가? 우리는 그냥 충분히 선하지 못하다. 그 때문에 이 생애에서 확신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심판 날에 그의 행위들이 평가되고 인정된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슬픈 하나님의 백성의 공통적인 태도인가! 아무도 충분히 선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그것을 받기에 충분히 선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은혜 아래서, 비록 우리가 죄인들일지라도, 우리는 구원받는다. 죄가 거기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소망의 근거이다.

환언하면, 우리가 삶의 어느 지점에 도달할 특정한 선함이나 성화의 정도에 우리의 확신을 연결 짓는 것은 잘못이다. 그 같은 접근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확신에 대한 진정한 열쇠는 바로 이 사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지 율법의 행위로써 받지 않는다는 의식이다(롬 3:28).

4. 확신과 하나님의 약속들

여기 질문이 있다. 만약 당신이 바로 이 순간에 죽는다면, 천국에 갈 것 같은가? 두 눈을 감고 당신의 대답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그 질문을 심사숙고할 때, 당신은 첫 번째로 무엇을 생각했는가? 당신 자신이었는가? 당신 자신의 느낌들, 경험들, 혹은 선함이었는가? 당신이 의심과 절망으로 가득하다해도 이상할 것 없다. 이 모든 근거는 “가라앉는 모래”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섰는가? 당신은 그분의 사랑, 그분의 약속들, 그리고 그분의 신실함을 기억했는가? 당신은 모든 우리의 죄보다 더 큰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그분에게 감사했는가? 만약 그랬다면, 그러면 당신은 그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독점적으로,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개인적인 확신의 근거가 놓인다.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들에 궁극적으로 놓여있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들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으며,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그분은 이들 약속들을 어떤 객관적인 사건들에 엮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손에 쥘 수 있고, 그것들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객관화하고 성취시키는 세 가지 사실들이 특별히 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의심하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이들 사실들을 그냥 상기해야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요한복음 3:16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지를 의심하고 싶을 때, 우리는 갈보리, 즉 친히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깨질 수 없는 보증을 기억해야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럴 수 없다. 아무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아무 것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바꿔놓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의심해야 하는가?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 확신을 심지어 더 확고하게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들이었던 때에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면, 우리가 그분과 화목하고 있는 지금 그분이 우리를 훨씬 더 사랑하시지 않겠는가라고 바울은 말한다(8-9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둘째,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증하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것, 즉 우리를 침례 때에 영적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고, 재림 시(時)에 우리들의 몸들을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신다. 왜 우리는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과 그렇게 하시고자 하시는 소망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2장 12절을 보라.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구체화시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의 침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께서 침례 때 그렇게 하시기로 약속하셨고, 또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받고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면, 나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모든 유죄와 형벌이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아래 있다면, 내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침례 때에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로 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나는 안다.

나는 나의 느낌을 의심할는지 모른다. 나는 나의 경험들을, 특히 시간이 경과한 후에 수상히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잊지 못할 객관적인 참고(參考) 지점, 즉 내가 침례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던 시간을 여전히 갖는다. 또 그분이 내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모든 것을 거기서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우리들의 느낌 위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들 위에 놓인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위 위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들 사역들 위에 놓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변덕스러움 위에다 두지 말고, 하나님의 힘과 신실함 위에 두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자”(히 10:23).

[사도 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