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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1 18:23
[은혜 13강]제11장 자비: 실천의 은혜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140  
   http://kccs.info/gracejc_ch11.htm [239]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11장 자비: 실천의 은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관점으로)” - 결국 무슨 다른 관점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과 책임들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그것의 모든 깊이와 부요함 속에서 경험해왔다. 하나님 자신의 원수들이었던 우리, 불경스럽고 받을만한 자격이 없던 우리, 이런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친애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분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 무슨 자비인가? 이 무슨 은혜인가?

우리가 화목 되었다는 사실의 관점에서 우리는 화목한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삶을 반드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용서를 받은 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항상 자비로워야 한다.

바꿔서 말하면, 우리의 매일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은혜와 자비의 바로 그 본질과 성질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보이셨던 바로 그 태도들은 우리가 우리의 동료 인간을 향해서 반드시 지녀야할 태도들이다.

화목한 삶은 자비라는 특징에 의해서 가장 잘 예시되어질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어떻게 우리는 자비로울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자비를 보아온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가? 이것들이 우리가 이 장(章)에서 해답을 찾으려하는 물음들이다.

1. 불행에 자극받는 자비

동정은 자비의 한 형식이다. 많은 수의 병원들이 병들어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암시하는 “자애 병원”이란 이름으로 지어진다. 자애는 자비의 또 다른 통로이다. 그래서 거지가 소리친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쇼.” 만약 배심원이 자비를 권하면, 범법자들에게 관대히 대할는지 모른다.

우리가 자비란 말을 사용하는 방법의 이 사례들은 자비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비하다는 것은 불행에 자극받는 것이다(To be merciful is to be moved by misery).

세상에는 불행이 많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 기회는 항상 있다. 가난한 자들, 주린 자들, 굶주린 자들, 병든 자들, 중독자들과 억압당한 자들은 육체적 불행을 겪는다. 영적 불행은 심지어 더 넘쳐난다. 대다수는 죄의식과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다. 그들은 고독감, 공허감, 의미상실감에 빠져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분 주변의 불행에 자극받으셨던 것처럼(마 9:36, 14:14), 이 불행에 반드시 동정심으로 자극받아야 한다. 자비와 무관심은 양립할 수 없다. 참 그리스도인의 사랑(아가페)은 관심, 동정, 돌봄으로 가장 정확히 정의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롬 12:9)고 바울은 말한다. 만약 불행에 대한 자각이 우리를 내적인 아픔과 동정적인 고통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에 거짓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에게 불행을 줄이고자하는 감동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에 거짓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관하여 정말 인정 많은 사람이 되도록 반드시 힘써야 한다. 우리는 눈물이 날 지경까지 반드시 참으로 돌봐야 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반드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롬 12:15)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불행에 자극받아야 한다.

이것이 자비이며, 그 같은 자비는 그리스도인을 세상과 구별시킨 것이다. 그것이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다. 기독교가 세상을 뒤집어놓기 전에는 자비가 실제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자비를 실행하는 오늘날의 기관들은, 비록 세속화되었을지라도, 자비에 관해 가르친 기독교의 산물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온갖 종류의 불행에 자극받는다. 오늘의 사회 활동가들은 육체적 사회적 불행에 편향적으로 집중하는 결점이 있다. 그들은 보통 영적인 욕구와 불행을 무시하는데, 그것들은 다른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에 실제로 더 중요하다.

다른 한편,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는 일방성에 결점이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영적 고난에 집중한 나머지 육체적 불행을 겪는 우리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 교회가 남겨놓은 공백을 사회 활동가들이 그냥 붙들고 있게 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자비로워야 할 우리의 의무를 반드시 거듭 주장해야 한다.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은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자선이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그러나 자비는 교회의 경계들 너머에까지 미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 12:20).

지역의 회중은 교회 안팎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불행을 줄일 방법들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상담, 의술, 간호, 목회, 사회복지와 같은 자비의 직업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불행이 가장 심각하며, 반드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첫 번째 관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도록 죄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그들을 위해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자비이다.

2. 용서가 자유로운 자비

자비의 가장 예리한 형식은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누군가에게 동정과 친절을 베푸는 용서이다. 자비로운 마음은 보복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옆으로 치워버릴 수 있고, 가해자를 진실로 용서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계명을 갖고 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우리가 죄지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시원찮게 할 수 있는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그리스도인은 “눈에는 눈으로”의 원칙으로 살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의 원칙이다. 또 그것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정들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 바울이 그것을 언급하는 것처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7,19). (하나님께서 당신의 복수를 갚으시는 한 가지 방법은 행정 당국자들을 통해서이다. 로마서 13:1-4를 보라.)

우리는 어떤 악의를 품어서도 안 되고, 어떤 복수를 노려서도 안 되며, 우리는 “공평하려”해서도 안 되고, 가해자가 부당하게 고통 겪는 것을 보려 해서도 안 된다.

한 가지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오직 자비로운 것들만이 자비를 얻게 될 것이란 점이다. 말하자면, 용서하지 않는 자들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준 다음에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마 6:12).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는 것을 말한다. 자비심이 없는 종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마 18:21-35)는 이 점을 냉정하리만치 명확히 한다.

이것이 너무 거슬리는 듯싶은가? 이것이 바로 그 은혜와 자비의 원칙에 위배되는 듯싶은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가, 자비와 용서가 아닌가?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볼 때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가장 지독한 모욕까지 용서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바로 그 본질에 매우 반대되는 것이어서 만약 그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갖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리가 없다.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고집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취지를 총체적으로 놓친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용서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요한 웨슬리에게 언젠가 말했다. “저는 결코 용서 못합니다.” 웨슬리가 대답하기를 “그러시면, 저는 선생님께서 결코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비의 궁극적인 시금석은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데 항상 자유롭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자비로운가? 아니면, 당신의 정신이 아직도 보복과 복수의 속박으로 올가미를 썼거나 수의를 입었는가? 당신은 당신을 모욕하거나 상처 주는 사람에게 항상 대갚음해야 한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당신의 정신이 이 예속하는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운가? 당신은 용서하는 것에 자유로운가?

자비로운 자들은 진실로 복을 받는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잠 11:17).

3. 공의를 넘어서는 너그러운 자비

자비로운 마음을 개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서, “공정하게 대가를 받은 거야. 자기가 저지른 일이야. 받을 것을 받은 거지. 공평할 뿐이야.”라고 외치는 누군가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는지 모른다. 우리는 알코올중독자에게 혹은 미혼임신부에게 혹은 마약중독자에게 탓하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나 자주 누군가가 우리에게 못되게 하는가, 또 얼마나 자주 우리는 그를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우하기를 주저하는가? “그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십중팔구 그럴 자격이 없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대개의 우리는 매우 민감한 정의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공정한지를 알고 있다. 이것이 왜 연재만화들, 연속극들, 서부영화들 혹은 심지어 TV의 레슬링 중계에 빠지기가 그토록 쉬운지에 대한 한 가지 이유이다. 이것들은 보통 악역들을 등장시키고, 우리는 악당들이 “그들에게 들이닥칠 것을 당하는 것” 보기를 원한다.

우리의 정의감은 우리 자신들이 잘못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권리들”이 침해를 받았을 때 가장 강하다. 우리는 정의를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들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위반자가 지불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공격하고, 그에게 굴욕을 주며 또 사과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어디 너도 한번 당해봐라.” 그게 당연한 거다. (“Turnabout is fair play.” It is only just.)

그것은 사실이다. 금단증상의 고통을 겪는 것은 “중독자에게 당연한 것일는지” 모른다. 사실이다. 그가 그것을 저질렀으며, 당할 만하다. 사실이다. 불한당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사실이다. 대갚음은 공정한 플레이이다(Turnabout is fair play).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오로지 공정하기로 되어 있다고 도대체 누가 말했는가? 사람들이 받을 만한대로만 우리가 그들을 대우하기로 되어 있다고 도대체 누가 말했는가?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공정한 것 그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정의를 뛰어넘어 관대해야 한다. 이것이 자비이다. 이것이 실천의 은혜이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들을 계속해서 주장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분명히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이 자비가 무엇인가이다. “대갚음은 공정한 플레이이다.” 그러나 친절과 용서는 자비로운 방법이며, 그리스도인의 방법이다.

4. 하나님에 이끌린 자비

우리의 질문은 이제 “어떻게?”라고 묻는 것뿐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 자비로움의 경향이나 태도를 성취할 수 있는가? 그것이 거의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진실로 자비로움은 죄인의 능력을 초월한다. 우리는 이 목표를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할 때만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하나님의 모범을 따를 때에만 자비로울 수 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긍휼이 풍성하신”(엡 2:4)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표준이 되실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말하게 하거나 심지어 우리를 위해 자비를 정의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규범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규범은 진실로 고상한 것이요,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도달하기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써 자비롭기를 배울 수 있다(엡 3:16, 빌 2:13).

하나님께 화목 된 자들이 이 능력을 사용하게 하고, 원수들까지도 자비롭게 하며, 화목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 수 있는지를 불신 세계에 보이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