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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1 19:20
[은혜 13강]제13장 빚을 졌습니다.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244  
   http://kccs.info/gracejc_ch13.htm [290]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13장 빚을 졌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빚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우 잘 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면에서 다른 한 사람에게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안다. 가장 일반적으로 빚은 경제적인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일정한 금액을 갚아야 할 의무를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종류의 빚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 빚, 즉 도덕적 의무라 부를는지 모른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굉장히 친절한 행위로 호의를 베푼다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가 감사의 빚을 졌노라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는 사회에 그의 빚을 갚기 위해서 감옥에 간다.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지킬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부모들은 도덕적으로 그들의 자녀들을 후원해야할 의무가 있다. 자녀들은 도덕적으로 그들의 부모들에게 순종해야할 의무가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가 빚진 자들”이라고 말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 두 번째 의미, 즉 도덕적 의무감에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와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모두 빚진 자들이다.

이 사실은 빚지는 것을 다뤄야하는 신약성경의 잦은 단어들의 사용에 의해서 강조된다. 첫째는 “빚, 책임, 의무”를 의미하는 명사 오훼이레(opheile)가 있다. 둘째는 “빚진 자, 즉 일정한 책임아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명사 오훼이레테스(opheiletes)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책임아래 있는 것,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오훼이레인(opheilein)를 갖는다. 가장 빈번하게 이 마지막 단어는 “해야만 하다”(ought)로 번역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들 단어들의 사용에 세밀히 주목함으로써 우리가 세 가지 다른 면들에서 즉 피조물들로서, 죄인들로서 또 그리스도인들로서 빚진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될 것이다.

1. 우리 피조물들은 빚진 자들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진 빚은 순종의 빚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모든 계명을 순종할 빚을 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권적인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진실하다. 시편 24편 1-2절은 노래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KJV).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의 소유자란 것을 듣는다. 땅과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주님의 것이다. 우리의 소유주로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그분에게 전적으로 굴복해야할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 모든 그분의 계명들에 완전하게 순종해야할 빚을 지고 있다.

예수님은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신다(눅 17:7-10). 여기서 그분은, 설사 우리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들을 행한다할지라도, 우리는 그 어떤 특별한 인정이나 보상들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기” 때문이다(10절).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오훼이레인(opheilein)으로써 문자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갚아야할 일을 행한 것이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가 완전하게 복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그분께 갚는다.

2. 우리 죄인들은 빚진 자들이다.

우리가 우리의 순종의 빚을 갚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 경우 우리는 우리의 부채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계좌에 또 다른 빚을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피조물들로서 우리의 원래의 빚에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죄는 우리를 다른 종류의 빚 아래에 놓는다. 우리는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우리는 벌을 받아야 한다. 범죄자가 그의 “사회에 진 빚”을 반드시 갚아야하는 것처럼, 죄인도 거룩하신 율법수여자에게 그가 진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 죄인들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벌(永罰)의 빚을 지고 있다.

성경은 일종의 채무로서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모범기도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赦)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들을 사(赦)하여 주옵소서”(마 6:12)라고 기도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빚들이란 말을 사용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 13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사고로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들인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KJV). 죄인들로 번역된 말은 여기서 문자적으로 빚진 자들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빚지고 있는 죄인들만큼 우리의 곤궁한 상태를 기술하는 두 개의 비유들을 말씀하신다. 하나는 용서받은 빚진 자들에 대한 비유이고(눅 7:41-42), 다른 것은 용서하지 않는 종에 대한 비유이다(마 18:21-35). 후자의 비유는 죄인이 그가 지고 있는 모든 빚을 반드시 청산해야 하며(34절), 그가 빚지고 있는 것은 지옥의 영벌이라는 것을 특별히 보여준다.

구제의 가망이 거의 없이 깊이 빚지고 있는 것보다 몇 가지 것들이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빚진 자들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상환금을 빼내어 가실 것을 우리가 인식할 때, 죄인들로서 우리가 어떻게 느껴야하는가이다. 어떤 좌절감도 죄의 빚을 수반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이 진실로 좋은 소식이 되는 곳이 여기다. 갈보리의 소리는 희망이 없는 심령들에게 “예수님께서 모두 다 지불하셨다!”고 외친다. 복음의 최초요 첫 번째 논거는 바로 이것,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전 15:1-3)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특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들을 위해서 징계를 받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그 징계의 빚을 지불하셨다.

이것이 구세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기본 측면들 가운데 한 가지이다. 구원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값을 지불함으로써 해방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빚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몸값을 지불하셨다.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 20:28)이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딤전 2:5-6). 바울은 또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작사자가 그것을 말한 것처럼, “십자가 위에서 그는 나의 용서를 인봉하셨네. - 빚을 갚으시고 나를 해방하셨네.”

우리가 피조물들로서 갖는 순종의 빚과 죄인들로서 갖는 형벌의 빚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첫 번째 빚을 갚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순종의 의무를 다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형벌의 빚에 관해서는 경우가 다르다. 그것은 반드시 지불되어야할 빚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갖는 가장 복된 선택인 한 선택을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놓으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옥에서 영원토록 형벌의 빚을 갚기로 선택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갚도록 선택할 수 있다. 진실로 예수님은 갈보리의 은행에 충분한 몸값을 이미 예치해놓으셨다. 우리가 침례 가운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만날 때 그것은 우리의 계좌에 충당된다.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로 인해서 하나님께 찬양하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알고 완전한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 빚들을 사(赦)하여 주옵소서”(마 6:12)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빚진 자들이다.

찬송들 가운데 한 장은 “예수님이 그것을 다 지불하셨네. 내가 그분에게 진 모든 것을”이라고 노래한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지불하셨는가? 그분은 우리가 진 형벌의 빚을 지불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큰 빚, 즉 사랑과 감사의 빚을 진다. 참으로 “내가 그분에게 진 모든 것을.”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면, 우리는 그분이 걸었던 대로 걷는 것을 예수님께 빚지고 있다. 요한일서 2장 6절은 말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걸으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걸어야할지니라)”(KJV). 여기서 사용된 할지니라오훼이레인(opheilein)이다. 우리는 그분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할 빚을 지고 있다.

로마서 8장 12절(KJV)은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함축된 대조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기”(14절) 위하여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아야할 빚진 자들이란 것이다.

우리가 더 오래 믿은 그리스도인들일수록,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성장해야할 우리의 의무가 더 크다. 히브리서 5장 12절은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되어야할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를테면, 피조물들로서 우리가 행할 동일한 의무를 하나님께 우리가 갖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모든 그분의 계명들에 온전히 순종해야할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종류의 빚이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냥 피조물들이 아니라,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들이다(고후 5:17). 이제 우리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은 그냥 창조뿐만 아니라, 또한 구속(救贖)이다.

그것을 다르게 설명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해야 한다고 우리가 느끼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세주를 섬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것에 비춰볼 때, 어떻게 우리가 그보다 못할 수 있겠는가? “아, 은혜에 날이면 날마다 나는 부득불 얼마나 큰 빚진 자인가!”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그리스도인의 선행들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되갚아 드리는” 일종의 방법으로 생각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의 형벌의 빚을 지불하신 분에게 “감사 합니다”라고 말하는 유일하고 적절한 방법이다. 은혜 아래서 순종의 빚은 감사의 빚이 된다.

은혜 아래서 빚진 자들로서 우리의 신분에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우리의 구세주께 드리는 사랑의 감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어떤 의무들을 수행하도록 한다.

이 원리가 요한일서 4장 11절에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마땅하다는 말은 역시 오훼이레인(opheilein)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할 빚진 자들이다. 로마서 13장 8절은 명확히 권면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무슨 특별한 방법들로 우리가 서로에게 진 우리의 빚을 갚을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은 우리보다 더 연약하거나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믿음이 강한(의무를 지고 있는)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돕기 위해서 손을 (또는 기댈 팔을 혹은 훌쩍거릴 어깨를) 내미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갚아야할 빚이다.

예수님 자기 자신은 심지어 그분의 피가 갈보리에서 우리의 형벌의 빚을 씻어버리시기 전에 우리들을 이 의무 아래에 놓으셨다. 그분이 십자가의 수난을 겪기 전날 밤에 2층 방에서 그분은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때 그분의 겸손한 섬김의 본을 세우셨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리스도인이 지고 있는 가장 압박하는 빚들의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진 그의 빚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셨다. 그분은 그분의 은혜로 인하여 매우 후하게 행하셨고, 또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그분께 되갚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들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그분의 대사들로서 행하도록 또 그분의 화해를 선포하도록 하게 할 것을 정말 기대하신다(고후 5:14-20).

이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도 바울을 지방에서 지방으로 몰고 간 빚이다. 그것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4-15, KJV)고 바울이 말했던 것과 같다.

당신이 변호사로서 당신의 먼 친척의 한 사람이 죽었고, 당신과 당신의 형제자매들에게 각각 백만 불씩 유산으로 남겼다는 전갈을 받았다고 치자, 당신은 당신만 기뻐할 뿐 아니라, 당신의 형제자매들에게 그 좋은 소식을 알려야할 도덕적 의무감을 갖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은혜의 풍성함을 이미 즐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또한 돌아가셨는가를 말해야 할 빚진 자들이다.

대개의 우리들은 은행에 혹은 백화점에 혹은 의사에게 빚을 갚아야할 시기가 도래하면 상당히 책임적이 된다. 우리는 그 같은 의무들을 피하려고 심각하게 숙고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빚들을 심각하게 받아드릴 시기이다. 어째든 이것들은 우리가 갚아야할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빚들이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갚아야할 감사의 빚들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KJV)는 우리 주님의 말씀들을 유념하길 바란다. <본 13장은 Standard Lesson Commentary, 1974-75, 119-120쪽을 허락을 받아 재사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