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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9-09 12:48
유대민족의식에서 본 기독교 출범의 당위성 고찰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431  
유대민족의식에서 본 기독교 출범의 당위성 고찰
A Study on the Validity of the Emergence of Christianity Viewed on Jewish People Consciousness


조동호(한민대학교 신학과 교수)

목차
들어가는 말
I. 유대민족의식
1.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2. 우리는 떠돌이였네
3. 구원의 하나님
4. 언약의 하나님
5. 조상의 하나님
6. 민족의 통일성
II. 기독교 출범의 당위성과 과제
III.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
나오는 말
참고자료

들어가는 말

이 세상 그 어떤 민족도 유대인만큼 철저하게 신(神)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유대인은 자기 민족의 뿌리, 이동, 사상, 사명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유대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다.
유대민족은 하나님에 관한 독특한 의식을 갖고 있다. 유대민족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은 노예로 살고 있던 유대민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시다. 레위기 25장 38절과 민수기 15장 41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구들이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보면, 유대인의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출 19:4), ‘홍해를 육지처럼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시 66:6, 78:13, 106:9), 떠돌이였던 그들에게 정착할 땅을 주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그들과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언약의 말씀인 토라(Torah)를 주시고, 그것들을 지키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의식이 수천 년 동안 유대민족을 지탱해온 믿음이자, 정신이며, 유산이다. 그 속에 통일된 의식이 있고, 사상이 있고, 행동이 있고, 문화와 관습이 있고, 교육이 있고, 철학이 있고, 가치가 있고, 세계가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 유대민족의식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기독교 출범의 당위성,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유대교가 기독교에 주는 과제와 같은 것들을 고찰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우리는 떠돌이였네’, ‘구원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민족의 통일성’을 차례대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I. 유대민족의식

1.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유대민족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우리 민족의 8.15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자기 나라가 아닌 이집트에서 해방을 맞았고, 해방을 맞이할 당시 자기 나라가 없었으며, 그 때가 부활의 희망을 상징하는 봄철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대한제국이란 나라가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주권을 회복하였다. 그 후 이념차이로 남북이 갈라지고, 전쟁의 상흔과 가족이 흩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겪게 되었고, 그 아픔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은 해방을 맞고도 나라가 한 동안 없었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에도 아주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했으며, 주후 70년 이후에는 1878년간이나 나라가 없었다. 그 긴 세월동안 유대인들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숫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기독교는 유대인을 메시아를 죽인 대가를 치러야 할 죄인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이교도로 여겼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는 유대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취급하는 사회적 지위법이 공포되었고, 종교개혁시대이후에는 추방과 격리를 당하기도 하면서 히틀러 때까지 무려 1200만 명이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지금은 자기 나라도 있고,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살고는 있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 산재한 반유대인 기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3천년이 넘도록 지켜온 유월절은 아직도 유대인들에게는,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단순히 해방을 기념하는 명절이 아니고, 희망을 노래하는 명절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과거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던 때를 대 구원 사건으로 기념하면서 현재의 유배생활이 머지않은 장래에 끝나고 자기 나라에서 유월절을 먹게 되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을 희망하였고, 지금까지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매년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뜨는 유월절 밤이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이렇게 희망을 노래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는 “La shana Ha ba-ah birushalayim” 곧 “내년에 예루살렘에서!”라는 인사로 끝을 맺는다.{최명덕, ”유월절로 본 성만찬“(이스라엘문화원: 유대학술세미나자료, http://www.iscc.co.kr/seminar.asp).} 그들은 남의 나라에 살지만 언제나 그들의 눈을 동쪽 끝자락 시온에로 향하게 하고, 시온과 예루살렘 땅에서, 유대인들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노래했던 것이다.{조동호 역, “이스라엘의 땅”(http://kccs.pe.kr →성경연구→신약성경관련).}
유월절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뿐 아니라, 신구약성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성서는 흑암과 혼돈과 죽음에서 시작되듯이 그 흑암이 빛이 되고, 그 혼돈이 질서가 되고, 그 죽음이 생명이 되는 이야기로 66권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옛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연관된 사건 가운데 출애굽 사건이 대 구원 사건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사건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를 이룬 사건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건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흑암이 빛이 되고, 혼돈이 질서가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구약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사건이다. 또 이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사건이다. 유월절 사건에 대한 이해 없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해방절인 유월절 명절 식사 때에 ‘아바딤 하이누’ 곧 ‘우리는 노예들이었네’라는 노래를 부른다.{최명덕, ”유월절로 본 성만찬.“}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다네. 자유롭다네.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다네.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다네. 자유롭다네.

이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수치스런 과거사를 잊지 않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우리 민족은 과거에 이집트인들의 노예였단다.”라고 말이다. 신명기 26장 5-9절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노예였을 뿐 아니라, 떠돌이 민족이었다는 고백을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서슴없이 하고 있다. 왜 그들은 수치스런 과거사를 자자손손 전승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자자손손 이어가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의 시작과 진행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다. 나라가 없던 떠돌이요, 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유배생활과 노예상태를 벗지 못하던 민족이었는데, 하나님이 정하시고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언약을 맺어 선민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여기에 유대민족의 뿌리와 정신과 정체성이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하히 유지하느냐에 따라서 번영과 쇠퇴가 결정된다. 유대민족의 운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좌우된다.
둘째,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자자손손 이어가기 위해서이다. 신명기 6장 20-25절에 ‘왜 우리가 율법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하는가’라는 자녀들의 물음과 대답이 있다. 이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인식하는 율법은 지키기 어렵고 힘들고 고달픈, 그래서 정말 하기 싫은 뭐 그런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떠돌이였을 때 우리에게 안식할 나라를 주시고, 우리가 노예였을 때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을 주신 분은 우리를 아내로 맞아주신 남편이신 하나님, 혹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란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강제적인 법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과 약속한 언약의 내용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우리가 그분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얼마나 성실하게 지키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 감사생활을 자자손손 이어가기 위해서이다. 신명기 26장 2-11절에 ‘왜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소산의 맏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무슨 말로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지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기도와 고백들에서 발견되는 사실 한 가지는 자기들을 노예로 삼았던 나라들, 자기 나라를 침략하여 먼 다른 타국으로 끌고 갔던 민족들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보복하라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수치스런 과거사를 들춰내서 자자손손 가르치는 이유는 그들의 오늘의 있음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셨고, 예전에는 눈물로 맛없는 무교병과 쓴 나물을 급히 먹어야 했고, 사막에서 방황하며 천막에 거주했어야 했지만, 지금은 우리 땅에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 젖과 꿀을 먹고 마시는 축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히 예물로써 감사드릴 때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난날의 역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뒷거름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떠돌이였네
현재 유대인은 전 세계에 1400만 명이 있다. 그 가운데 60%인 840만 명이 떠돌이들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전 세계에 4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84%인 380만 명이 떠돌이들이었다. 떠돌이 유대인들은 본향을 떠나 사는 것을 유배생활이라 말한다.
신명기 26장 5절은 유대민족과 그 조상을 일컬어 ‘유리하는 아람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의 후손들이 다 떠돌이였다. 출애굽기 23장 9절은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보낸 430년의 세월을 나그네의 세월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본향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고, 영토주의가 팽배하다.
유대인들이 본향을 사모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야곱이후 본향에 대한 집착은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 되고 있다. 이 집단무의식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외국에 나가 살아도 반드시 본향에 돌아간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이 의식이 이집트 거주 430년 만에 대탈출을 만들고,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보낸 유배생활 70년 또는 173년 만에 본향으로 돌아오는 행렬을 만들고, 나라가 망한지 1878년 만에 나라를 세우는 기적을 만들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유랑의 세월이 3,800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불굴의 투지로 본향에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유대민족이 그토록 사모하는 본향이란 것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못된다. 쓸모 있는 땅이 많지 않고, 물도 귀하고, 기후도 좋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배되어 살던 곳은 그들의 본향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들이었다. 이집트의 고센 땅은 유대인들의 본향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옥한 땅이었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도 월등히 살기 좋은 곳이었다. 5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미국도 살기 좋은 곳이다. 대다수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그들의 본향보다 살기 좋은 곳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일찍이 본향을 본적이 없는 그들의 후손들조차도 본향을 사모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지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나라 없이 핍박과 추방과 학살을 당하며 살아온 서러움의 세월도 무시할 수 없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것이 있다. 제비, 갈매기, 연어, 송어 등은 귀소본능이 뛰어나다.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은 있다. 심층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의 의식 가운데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닌 '집단 무의식'이란 것이 있다고 했다. 집단 무의식이란 한 민족 또는 전체 인류가 공통으로 지닌 일종의 ‘오래된 기억'으로써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조상대대로 경험했던 축적된 의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 불교가 말하는 열반과 지옥, 그리스신화에서 말하는 낙원인 엘뤼시온(Elusion)과 지옥인 타르타로스(Tartaros)에 대한 종교적 상징들이 포함된다. 이 집단무의식은 우리 인간들이 돌아가야 할 궁극적 본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생은 나그네’나 ‘유리하는 아람사람’이란 말도 인간의 삶이 이생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세계로 회귀한다는 것을 집단무의식이 말해 주는 것이다.
유대민족의식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떠돌이의식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도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가 ‘더 나은 본향’(11:16)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을 일컬어 ‘나그네와 행인’같다고(벧전 2:11) 했고,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고 충고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 긴 떠돌이 세월동안 본향에 대한 기도를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본향에 들어가 사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받아드렸고, 본향에로의 이주를 ‘오름’이란 뜻의 ‘알리야’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조동호 역, “이스라엘의 땅.”}

3. 구원의 하나님
유대인은 자기 민족의 뿌리, 이동, 사상, 사명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유대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에 관련된 내용들이 ‘토라’라 일컫는 구약성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그 율법이 613개의 조문(條文)으로 세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부칙 또는 세칙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법들까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율법들을 억지나 강제로 지키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 지키며, 일 년에 한 차례씩 완독할 뿐 아니라, 심히 사랑하여 안식일 예배 때에 그 말씀에 입을 맞출 뿐 아니라, ‘메주자’라 불리는 칼집형태의 작은 말씀상자를 만들어 집안 문설주 옆에 부착해 놓고 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마다 세 번씩 입을 맞춘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혹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말씀을 더 사랑하며, ‘트필린’이라 불리는 작은 말씀상자를 만들어 끈으로 그들의 손이나 이마에 붙이며, 또 ‘찌찌트’라 불리는 옷술을 겉옷과 ‘탈릿’이라 부르는 기도보에 달아 계명을 기억하며, 율법의 말씀에 따라 예배와 기도와 명절을 지키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이어서보다는 자기 민족을 특별한 은총으로 선택하신 하나님과 선민의 조건으로 체결한 언약 또는 계약이란 인식하에서 지키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식 때 행한 서약과 같은 것이며, 부부가 의무로써 그 서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서약을 지키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내리 사랑으로 선택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체결한 언약의 말씀을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켜 왔던 것이다. 이 토라에서 발견되는 유대민족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찾아오신다. 버트란트 러셀과 같은 불신자들은 ‘종교의 기반을 두려움’이라고 말하지만, 민족의 뿌리와 이동과 사상과 사명을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두려움 때문에 찾게 되는 신(神)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고 자발적으로 찾아오시는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을 주어 창대케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의 뿌리와 이동사가 여기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발적인 찾아오심, 동행(同行)하심, 약속하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유대민족의식이요 집단무의식이다.
둘째,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이동시키시고, 나라와 언약의 말씀인 율법과 명절과 사명을 주신다. 레위기 25장 38절을 보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들 속에는 중요한 고백이 들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여호와,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신 영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국가란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노예로 살고 있던 유대인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다. 레위기 25장 38절을 비롯한 많은 성구들이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출 19:4) 혹은 ‘홍해를 육지처럼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시 66:6, 78:13, 106:9)이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 가운데 두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이적과 기사를 찬양하며 '다예누'라는 노래를 합창한다. 어린이들은 신나는 곡조와 간단한 가사 때문에 특별히 이 노래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가 우리를 애급에서 불러내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충족한가!“라는 내용의 노래이다.{최명덕, ”유월절로 본 성만찬.“}
넷째, 하나님은 이집트 대탈출 후 사막에서 머문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샘물로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길을 안내하신다. 신명기 29장 5절을 보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몸의 옷이 낡지 않게 하시고,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다섯째,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곳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신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땅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그곳이 아무리 척박하고 메마른 사막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터전이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를 땅인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1948년 건국이전에 유대인과 아랍인이 이미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국가 소유이다. 국유지는 사용목적에 따라 49년간 사용권을 허용하고 별 문제가 없을 때는 자동으로 사용권이 연장된다.{정호진, “이스라엘 농촌 사회”(이스라엘문화원, 유대학술세미나, http://www.iscc.co.kr/seminar.asp).}
이스라엘의 농촌은 4가지 형태가 있는데, 함께 살고, 함께 일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키부츠가 270여개, 사유재산을 허용하는 협동농업체인 모샤브가 360여개, 사유재산을 허용하는 노동기업체인 모샤브 쉬투피가 70여개, 농촌의 소도읍인 모샤바가 100여개 있다.{정호진, “이스라엘 농촌 사회.”}
이스라엘은 물이 부족한 나라이다. 사막지역에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을 끌어다 쓰거나 지하 2,000m에서 물을 끌어올려 농업용수로 쓰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기술혁신을 통해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세계적인 수준이다. 적은 자본을 투자해서 많은 이익을 창출해 내는 노하우도 갖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막이나 다름없는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고서도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고,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이야말로 세계의 그 어떤 아름답고 비옥한 땅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땅으로 간직하고 있고, 그들의 노력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세계적인 수준인 땅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4. 언약의 하나님
유대민족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하나님인식은 언약의 하나님이란 것이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관련된 말씀이다.
구약성서의 언약은 유대민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판가름하는 잣대이다.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시련을 겪는가에 대한 해답을 예언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얼마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았다.
하나님은 유대민족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으셨다.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 계약이다. 이 계약은 구약 39권을 구성하는 핵심내용이자, 예수님을 구세주 메시아가 되게 하고, 기독교를 탄생시킨 밑거름이다.
출애굽기 24장 1-11절은 계약이 체결되는 장면이다. 1-3절은 예비단계로써 하나님이 이런 저런 내용으로 계약을 맺고자 하시는데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는 장면이다. 4-8절은 본 단계로써 엄숙한 계약식의 장면이다. 모세가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기록한 후, 계약식 당일 이른 아침에 단을 쌓고, 열두 기둥을 세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번제와 소들을 잡아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워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고,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만 상징적으로 태우고, 살코기는 예배자의 몫으로 되돌려주어 공동체 식사에 사용되었다.
계약식의 중요단계 가운데 하나는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는 것이다. 모세가 소들의 피를 받아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린 다음 언약서(십계명과 율법)를 회중에게 읽어준다. 회중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습니다.”고 응답한다. 그러자 모세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11절은 언약의 식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9-10절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그리고 11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대표들 간에 나눈 언약의 식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했다. 고대근동에서는 계약체결 후 그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단을 쌓은 후에 계약 당사자들이 함께 식사를 나눴다.
이 시내산 계약을 구약 혹은 옛 언약이라고 말한다. 이 계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회중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제사장의 나라가 되었으며,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출 19:5-6). 우리는 이것을 ‘선민’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조건이 바로 이 시내산 계약이고, 이 시내산 계약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계약의 내용인 십계명과 율법을 언약한대로 잘 지켜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대인들은 언약을 잘 지키지 못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행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기”(사 24:5) 때문이라고 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행이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렘 22:9)라고 했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기”(렘 11:10)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시내산 계약과 같지 아니한 새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31:31-33). 이 새 언약을 히브리서 저자는 “더 좋은 언약”이라 했고, 예수님이 바로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 7:22) 또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히 8:6)라고 했다. 여기서 옛 것보다 “더 좋은 언약”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말한다. 마가복음 14장 24절은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1장 25절은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침례를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거룩한 새 언약 공동체가 되었으며, 매주일 주의 만찬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5. 조상의 하나님
유대민족의식 속에는 ‘조상의 하나님’이 있다. 유대민족의식 속에 있는 야훼는 조상의 하나님이다. 야훼는 어제 오늘 혹은 지난 몇 세대가 믿어왔던 하나님이거나 외국에서 입수했거나 전래된 하나님이 아니다.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대대로 3800년간이나 믿어왔던 하나님이다. 아버지가 믿었고, 할아버지가 믿었고, 증조부가 믿었고, 증조부의 할아버지가 믿었고,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믿었고, 믿었고, 믿었고... 이렇게 조상대대로 믿어왔던 하나님이다.
유대인들의 조상의 하나님 신앙과 전통은 우리 기독교인이 세워나가야 할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요 힘겨운 과제이다. 우리가 무엇을 자녀들에게 물려 줄 것인가?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유산을 물려주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자손대대로 조상의 하나님을 고백했던 이 엄청난 신앙유산을 가진 유대인들이 신생 기독교에 추월당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으로 묶어버리고, 소수 유대민족의 신으로 제한해 버린 때문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신앙유산을 물려받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옛 언약공동체로 무시해버린 기독교신앙과 복음에 뒤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무덤에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에 그 해답이 있다. 내 아버지가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고, 내 하나님이 너희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씀은 소수 민족의 하나님의 경계를 뛰어넘고 지평을 넓혀 만 인류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이 되게 한 위대한 선언이다. ‘조상들의 하나님 신앙’이 유대민족의 결속에는 도움이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민족신(民族神)으로 묶어버리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그들 조상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은 결코 소수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될 수 없는 이 우주에 한분밖에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패배한 것이다.
오랜 역사와 완고한 전통 속에 있던 유대교를 뛰어넘어 기독교시대를 연 인물이 누구인가? 바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부름을 통해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만인의 하나님으로 유대인의 구원의 하나님을 만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지평을 넓힌 사도이다. 그가 계시로 하나님의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고 밝힌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는 것이다. 이것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이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였던 비밀의 경륜”(엡 3:9)이라고 했다.
출애굽기에 자주 쓰인 조상의 하나님이 사도행전에도 자주 쓰이고 있다.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 모세와 그리스도의 연속성,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바통의 이동을 강조한 말씀들이다.

6. 민족의 통일성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온 민족인데도 통일성을 탁월하게 유지하고 있는 민족이다. 종교, 문화, 축일, 관습, 교육 등에서 뛰어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겠다.
첫째, 유대민족의 통일성은 그들의 언약서인 토라에 있다. 유대민족이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과 맺는 언약서, 곧 십계명과 율법서에서 유대교가 나왔고, 안식일예배가 나왔으며, 각종 축일과 전통과 관습이 나왔다.
둘째, 유대민족의 통일성은 가족이란 연대의식에 있다. 유대인은 창세기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야곱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고, 친척이기 때문에 연대의식이 강하다. 그러나 이 친족의식 때문에 유대교는 민족종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것을 극복한 것이 기독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란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기독교가 2천년이 넘도록 세계인의 종교가 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유대민족의 통일성은 그들의 신앙교육에 있다. 이 교육의 주체는 가정과 회당이다. 교육은 두 살 때부터 시작되고, 세 살 때부터 성경읽기를 가르친다. 유대인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계약이 있다는 표시로써 할례를 받는다. 성장해서 13세가 되면 종교적 성인식을 갖는다. 그밖에 각종 축일행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민이란 흔적을 몸에 새겨나가고, 평생 하나님과의 계약을 엄수하게 된다.{최명덕, “이스라엘의 가정교육”(이스라엘문화원: 유대학술세미나자료, http://www.iscc.co.kr/seminar.asp).}
넷째, 유대민족의 통일성은 뿌리문화에 있다. 한국에서는 시어머니, 며느리, 손녀딸 삼 세대 간의 생각과 생활방식이 각각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은, 정통파 유대인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이지만, 삼 세대가 거의 세대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삼 대가 다 동일한 삶의 철학과 사상과 생활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라를 잃고 1878년간이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다가 조국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다시 모여들었는데, 세대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세대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문화에는 뿌리문화와 표피문화가 있는데, 뿌리문화는 종교, 관습, 사상, 이상, 언어, 고전문학, 음악, 철학, 역사 등의 지혜중심의 문화이고, 표피문화는 물질, 명예, 권력, 유행 등의 성공위주의 문화이다.{현용수, “유대인의 IQ + EQ”(이스라엘문화원: 유대학술세미나자료, http://www.iscc.co.kr/seminar.asp).}
다섯째, 유대민족의 통일성은 역사교육에 있다. 유대인들은 수치스런 민족의 역사를 숨기지 않고 가르쳐 기억하게 하는 방식으로 역사의식을 심는다. 자기민족은 떠돌이였다는 것, 자기민족은 노예였다는 것, 주권상실로 해외에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보냈다는 것, 나치로부터 600만 유대인이 희생되었다는 것 등을 눈물로써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자기민족을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 가나안 일곱 족속을 몰아내시고 그 땅을 자기민족에게 주셨던 그 하나님이 기어이 1948년에는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땅에, 조상들이 살았던 바로 그 땅에 건국의 기쁨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날들을 축일과 기념일로 지키면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더욱 굳게 한다.

II. 기독교 출범의 당위성과 과제

유대인만큼 철저하게 신(神)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있는 민족은 없다. 유대인은 자기 민족의 뿌리, 이동, 사상, 사명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유대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다. 자기 민족은 떠돌이였었고, 노예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족장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삭의 하나님이 되셨으며,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이다. 또 자기 민족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노예였던 자기 민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민족은 하나님에 관한 독특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민족의 구원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레위기 25장 38절과 민수기 15장 41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구들이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보면, 유대인의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출 19:4), ‘홍해를 육지처럼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시 66:6, 78:13, 106:9), 떠돌이였던 그들에게 정착할 땅을 주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그들과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언약의 말씀인 토라(Torah)를 주시고, 그것들을 지키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의식이 수천 년 동안 유대민족을 지탱해온 믿음이자, 정신이며, 유산이다. 그 속에 통일된 의식이 있고, 사상이 있고, 행동이 있고, 문화와 관습이 있고, 교육이 있고, 철학이 있고, 가치가 있고, 세계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의 내용이 담긴 토라를 사랑하여 몸에 지니고 입을 맞추며, 일 년에 한 차례씩 완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메마르고 척박한 땅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땅으로 여기며, 아득한 과거에 빼앗긴 땅, 주인이 수없이 바꿨을 그 땅을 목숨 바쳐 되찾고 지키고 가꿔서, 사막에 꽃이 피게 하고, 젖과 꿀이 흐르게 하고, 풍부한 종교적 유산과 수천 년간 이어오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런 엄청난 신앙유산의 장점을 가지고 수천 년 동안 자손대대로 조상의 하나님을 고백했던 유대인들이 신생 기독교에 추월을 당하고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으로 묶어버리고, 소수 유대민족의 신으로 제한해 버린 때문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신앙유산의 장점을 물려받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옛 언약(구약) 공동체로 무시해버린 기독교신앙과 복음에 뒤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무덤에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에 그 해답이 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요 20:17)이란 표현이다. 내 아버지가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고, 내 하나님이 너희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씀은 소수 민족의 하나님의 경계를 뛰어넘고 지평을 넓혀 만 인류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이 되게 한 위대한 선언이다. ‘조상들의 하나님 신앙’이 유대민족의 결속에는 도움이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민족신(民族神)으로 묶어버리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그들 조상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은 결코 소수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 제한될 수 없는 이 우주에 한분밖에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패배한 것이다.
유대민족은 가족이란 연대의식이 강하다. 유대인은 창세기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야곱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고, 친척이기 때문에 연대의식이 강하다. 그러나 이 친족의식 때문에 유대교는 민족종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유대민족의 가족의식은 선민의식과 더불어 그들을 배타주의, 민족주의, 영토주의에 빠지게 한 올무였던 것이다. 이것을 극복한 것이 기독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란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기독교가 2천년이 넘도록 세계인의 종교가 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랜 역사와 완고한 전통 속에 있던 유대교를 뛰어넘어 기독교시대를 연 인물이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부름을 통해서 유대인의 하나님을 만인의 하나님으로 유대인의 구원의 하나님을 만인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지평을 넓힌 사람이다. 그가 계시로 하나님의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고 말한 내용이 무엇인가? 자신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신 것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고 했다. 이것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이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였던 비밀의 경륜”(엡 3:9)이며,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엡 3:11)이라고 했다. 또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구원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이 말씀의 한 가지 뜻은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고, 유다도 죽고, 요셉도 죽고, 그의 후손의 후손들도 죽었지만, 그들의 야훼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는 영존하는 하나님이시요, 이전 세대에도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시오, 지금 여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이다. 이 하나님을 유대민족은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인식함으로써 대 선교사명을 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동일한 하나님이 소수 유대민족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만 인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선포한 구원의 복음은 남녀신분학력민족의 차별 없이 또 값없이 또 은혜와 믿음으로만 된다는 귀한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여기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이 말씀의 또 다른 뜻은 자자손손 대대로 유대민족이 믿어온 하나님이시란 것이다. 여기에는 믿음의 뿌리가 있고 전통과 문화가 있고 명절과 관습이 있다. 이방 민족에는 없는 소중한 믿음의 유산이 있다. 이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란 말씀이다. ‘조상의 하나님’이란 말이 출애굽기 3장에만 네 차례 사용되었고, 그밖에 글에도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도 특히 출애굽기 3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출애굽기에 자주 쓰인 이 표현이 사도행전에도 자주 쓰이고 있다.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 모세와 그리스도의 연속성,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바통의 이동을 강조한 말씀들이다.
유대민족은 민족이기주의에 빠져서 여호와 하나님을 독점하였고, 대 선교사명을 망각하였다. 그것이 유대민족의 실패의 원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의 피로 맺은 옛 언약공동체와 같지 아니하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공동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대민족의 바통을 이어받아 세계선교에 이바지할 새 언약 공동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이다.
그렇다고 유대민족의 신앙유산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신앙고백과 그 전통은 우리 기독교인이 세워나가야 할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요 힘겨운 과제이다. 우리가 무엇을 후대에 물려주겠는가? 흑암을 빛이 되게 하시고,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고, 죽음에서 생명을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유산을 물려주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유대인들에게 지나치게 배타적인 면이 있고, 또 하나님을 자기민족의 하나님만으로 제한하는 우를 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점들을 극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약의 하나님으로, 가문이 대대로 믿고 섬기는 조상의 하나님으로 세워가야 하고, 신앙의 전통과 문화유산을 잘 만들어가고, 또 그것을 후대에 물려줘야하는 것이다.

III.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

마지막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인 차이점 한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라는 유명한 유대인 신학자가 1917년에 이런 글을 썼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그를 구원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메시아가 분명히 미래에 오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Will Herberg, ed., The Writings of Martin Buber, p. 31). 또 󰡔두 형태의 신앙󰡕(Two Types of Faith)에서는 기독교가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믿고 있는 반면에 유대교는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futuristic eschatology)을 믿고 있다고 했다.{최한구, 󰡔유대인은 EQ로 시작하여 IQ로 승리한다󰡕 (도서출판 한글, 1998).} 부버가 언급한 이 두 개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민족에게는 영적구원(종말)이 없고, 육적구원(종말)만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구원과 그의 재림 시(時)에 육적 완성이 이뤄질 것을 말하는데, 부버는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대(大) 구원(초기구원)이 이뤄졌고, 메시아가 오심으로 그 구원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이미 실현된 구원의 확신, 곧 종말에 주어질 축복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미리 맛보고 누리는 영적인 축복이 있는 반면, 유대교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데, 유대교인은 미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 유대교인에게는 ‘이미’가 없고, 오직 ‘아직’만이 있을 뿐이다. 이점이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한 가지이다.
유대민족의식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구원은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이미 이뤄진 것이고, 이 사건이 대(大) 구원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유대민족이 고대하는 올 세계(‘올람 하바’, Olam Ha-Ba 곧 world to come)의 도래, 곧 이스라엘 국가의 궁극적인 완성이자, 제2의 출애굽사건을 주도할 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왕이 오시면 이스라엘 국가는 완전하고 완벽하게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직도 오지 않았고, 세상 끝 날에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 같은 내용이 포함된 기도문 「쉐모네 에스레이」를 매일 세 차례씩 암송한다.{조동호 역, “쉐모네 에스레이”(http://kccs.pe.kr/jewishcal7.htm).}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란 말 대신에 ‘모쉬아크’(Moshiach)란 히브리어를 쓴다. ‘메시아’가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조동호 역, "유대주의에서의 메시아사상(Moshiach: The Messiah)“(http://kccs.pe.kr →성경연구→신약성경관련).}
‘모쉬아크’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써 마지막 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될 자를 뜻한다. 그러나 모쉬아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救世主)가 아니고, 죄가 없으신 신적(神的) 존재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쉬아크가 다윗 왕의 후손인 위대한 정치 지도자일 것이고, 유대법에 정통하여 그것의 계명들을 지킬 것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본보기를 따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위대한 군사 지도자일 것이고, 의로운 결정을 내릴 위대한 재판관일 것이지만, 이 모든 것 위에 그는 인간일 것이고, 신적 혹은 반신적 존재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Ibid.}
모든 세대에서 사람은 모쉬아크가 될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만약 그 사람이 살아서 활동할 때에 메시아시대에 적절한 때가 도래한다면, 그 사람은 모쉬아크가 될 것이지만, 만약 그 사람이 모쉬아크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죽는다면, 그 사람은 모쉬아크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Ibid.}
일반적으로 모쉬아크는 (세상이 죄로 넘쳐서)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때나 (세상이 심히 좋아져서) 가장 합당한 때로 여겨지는 시기에 오시게 될 것이라고 믿어진다. 모쉬아크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킴으로써 정치적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며, 이스라엘에 한 정부를 세울 것이고, 그것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전 세계 정부의 중심에 세울 것이며, 성전을 재건할 것이고, 성전예배를 다시 세울 것이며, 이스라엘의 종교법정 체계를 회복시킬 것이고, 나라 법으로써 유대법을 세울 것이라고 믿는다.{Ibid.}
이때의 세계를 유대문학에서 ‘올람 하바’(Olam Ha-Ba), 곧 다가올 세계라 부른다. 올람 하바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이며(사 2:4), 모든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이 유배되었던 나라들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며(사 11:11-12, 렘 23:8, 30:3, 호 3:4-5), 희년법이 다시 효력을 갖게 되고, 전 세계가 유대인의 하나님을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유대종교를 유일하고 참된 종교로 인정하게 될 세계라는 것이다(사 2:3; 11:10; 미가 4:2-3; 슥 14:9). 이 세계에서는 살인, 약탈, 경쟁과 질투는 사라질 것이고, 죄도 없어질 것이다(습 3:13). 희생제물은 성전에서 계속 드려질 것이나 제물들은 감사예물에 국한될 것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 속죄를 위한 제물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Ibid.}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민족에게는 출애굽사건에서 시작해서 모쉬아크 사건에서 완성되는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과 완성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은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성도들이)가 성령의 능력가운데서 영적으로 시작되는 구원으로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육적으로 완성되는 구원을 말하고 있다. 성령의 능력가운데서 영적으로 시작되는 구원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뤄지는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으로써 약속과 인침과 보증과 선취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또한 ‘칭의’라 부른다. 약속과 인침과 보증과 선취란 그리스도의 재림 시(時)에 완성될 육적 구원(성도들의 육체부활과 우주의 회복인 새 하늘과 새 땅), 곧 종말에 이뤄질 축복들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약속받고, 인침(도장) 받고, 보증(선수금) 받고, 맛보고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미’ 이뤄진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된 종말론 혹은 시작된 종말론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유대교에는 없다. 이와 같은 축복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축복인데,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출애굽사건으로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란 것은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왕국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요, '아직'이라는 말은 완성될 하나님의 왕국이 아직 소망 가운데 있다는 뜻인데, 유대인들은 ‘아직’만 믿고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유대인들의 신앙에는 현재구원이 없고, 오직 미래구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뤄진 구원을 맛보며, '아직' 이뤄지지 아니한 것을 은혜 가운데서 희망하는 것이다.

나오는 말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그들이 대단한 민족이란 것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그런 그들의 귀중한 유산을 물려받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유대민족은 선교사명을 망각하고 민족이기주의와 배타주의에 빠져 이 귀중한 전통과 유산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특권을 기독교에 넘기고 말았다. 만일 우리 기독교가 유대민족의 전철을 밟는다면 하나님은 유대민족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 특권을 다른 곳으로 옮기실 것이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다수가 이방민족이고 다신(多神) 사상 속에 있기 때문에 유대민족이 조상의 하나님 신앙유산을 잘 지켜왔던 것처럼 기독교 신앙의 전통과 문화를 바르게 세워 후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일에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1. 인터넷 자료
유대교 관련 자료들(Judaism 101, http://www.jewfaq.org/to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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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학술세미나 자료들(이스라엘 문화원, http://www.iscc.co.kr/semina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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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용수. “유대인의 IQ + EQ.” 이스라엘문화원: 유대학술세미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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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자료

최한구. 󰡔유대인은 EQ로 시작하여 IQ로 승리한다󰡕 도서출판 한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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