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희망’에 관한 신약성경의 이해(1)
New Testament scriptures' Understandings on Jewish Hope
소광(素光)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에는 유대교 이해와 관련한 글들이 많다. 대표적인 글이 히브리서이다. 필자는 이미 “히브리서의 유대교 이해에 관한 고찰”이란 글을 쓴바 있다. 신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신약성경에는 유대교 ‘희망’(Ha-Tikvah)에 관해 유대인들의 기존 해석과 아주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대교 희망이란 가나안땅(Olam Ha-Ba, 다가올 세상)을 말한다. 네 복음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희망했던 지상 가나안땅보다 더 안전하고 완벽하며 영원한 하늘 가나안땅에로 우리를 인도하여 들이실 참 그리스도로 피력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이후 고대했던 첫 번째 희망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모세보다 훨씬 뛰어난 바벨론포로기 이후 두 번째 희망의 그리스도의 실체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이 내용을 네 개의 글로 작성하였다. 네 개의 글을 위한 본문으로는 네 복음서의 첫 장 첫 절을 택하였다. 각 복음서의 첫 장 첫 절에 각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담겼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각 복음서마다 한 개의 글을 작성하였고, 네 개의 글이 균등한 분량이며, 각각의 글은 또 균등한 분량의 세 개의 짧은 글들로 구성하였다. 동일한 맥락과 방법에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로마서, 고린도후서, 에베소서)과 히브리서와 계시록에서 드러난 유대교 희망에 관한 신약성경의 이해들을 차례로 다뤘으며, 총 8개의 글을 실었다.
1. 희망의 증거(마태복음 1:1,17)
유대교인들의 믿음의 특징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대까지 총 40대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 17절을 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열네 대였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희망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이뤄졌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특이한 족보이자, 아브라함과 그리스도 사이에 이어지고 있는 희망의 끈을 보여주는 족보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출생연도를 유대력으로 1948년(주전 1813년)생으로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나이 75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분의 마음에 가나안 땅에 대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셨다(빌 2:13).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희망을 품은 때가 나이 일흔 다섯이었고, 2010년 8월은 유대력으로 5771년이므로 그 때가 주전 1738년이었고, 지금으로부터 3748년 전의 일이다. 아브라함의 출생부터 그리스도의 출생까지 걸린 시간이 1813년,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교회가 출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768년이다. 이 1768년은 기독교 시각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희망이 정확하게 이뤄지는데 걸린 시간이다.
아브라함이 나이 일흔다섯에 가나안 땅의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또 그 희망이 1768년 만에 이뤄졌다는 사실도 놀랍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 시각에서 본 것이고, 유대교 시각에서 볼 때, 그들의 희망이 아직 완벽하게 영적으로까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세속적으로 겨우 이뤄지는데 걸린 시간이 주전 1738부터 주후 1948년까지 무려 3686년이다. 이것은 유대교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희망을 간직했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믿음의 특징은 결단코 접지 않는 희망과 불굴의 인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약속을 받고 다윗 왕이 그 약속을 성취하는데 걸린 시간이 14대 임을 말해준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을 가장 강성한 나라로 일으켜 세운 임금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정치군사적인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상 아브라함의 약속이 가장 근접하게 이뤄진 때가 다윗 임금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 왕국은 14대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굳건하게 섰던 왕국의 터가 처참하게 허물어졌다. 임금으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로부터 다시 14대만에 허물어진 터를 굳건하게 다시 세우고, 완벽하고 강성한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더 이상 세속국가가 아니었다. 그분이 세우신 나라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활동했던 예언자들이 예견한 메시아 왕국이 유대교의 성전예배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나라일 뿐 아니라 완벽한 세속국가라고 믿는다. 이 해석의 차이가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이후 14대만에 찾아온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지 못하고 다시 2천년의 시간을 유배와 떠돌이로 보내야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며, 그것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 단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특징
떠돌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가나안 땅의 희망이 생긴 이후 무려 1768년이나 된 이 오래 묵은 꿈이 주후 30년 오순절 날에 이뤄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다.
17절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는 이스라엘 왕국의 출범과 발전기를 말한다.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모세가 싹을 틔어 다윗이 통일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리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는 왕국의 쇠퇴기와 멸망을 말한다. 솔로몬사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북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망한 지 136년 만에 남유다 왕국도 망하였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는 노예와 떠돌이였던 아브라함이후 모세 때처럼 예언자들은 새로운 희망 또는 두 번째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운 분이 모세였다면, 두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운 분은 예수님이었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다. 그리고 바울이 가나안 땅의 국경을 온 세계로 그 지경을 넓혔고, 예루살렘과 유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는 기독교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오늘날까지 이 왕국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나안 땅을 지독하게 아주 눈물겹게 집착하는 유대인들로서 바울과 같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희망의 지경을 예루살렘과 유대뿐만 아니라 (혹은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포기할망정)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넓혔다는 것도 놀랍고, 교회가 출범된 지 283년 만인 주후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 그 후 79년 만인 주후 392년에 당시 천하였던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불법종교에서 합법종교가 되고 다시 국교가 되기까지 걸린 362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무수히 많은 탄압과 핍박을 받아야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꺼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죽음을 당할망정,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평화의 왕국을 희망하며, 그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며”(히 10:33-34),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히 11:35-37).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나라를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희망을 간직했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특징이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과 불굴의 인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39절은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속에 치우쳐 기독교 신앙을 얕잡아 볼 뿐 아니라,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모든 믿음의 용사들처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히 12:1-2).
인류의 희망과 증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희망이요, 그 증거임을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이다. 또 마태복음은 작게는 유대인들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이뤄졌고, 그 나라가 그리스도의 왕국 또는 천국임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족보로 시작하여 예수님이 전하는 천국복음과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는 외침의 소개로 시작하여 크게 다섯 개의 설교가 소개되고 있다. 중심 장인 13장에는 천국 비유 8개가 실려 있는데, 천국의 본질과 성격을 말해준다. 또 5-7장 산상설교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설교하고 있고, 24-25장에는 종말에 관한 비유 8개가 실려 있는데, 천국이 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 10장은 천국의 시작을, 18장은 천국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왕국이란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 천국을 말하고 한다. 아브라함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모세가 싹을 틔어 다윗이 통일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지만, 결국 쇠퇴하고 멸망한 유한하고 실패한 일시적인 나라가 아닌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 유대인들이 지독하게 또는 눈물겹게 집착하지만, 외침이 끊임없고 가난과 지진과 전쟁으로 흔들리는 불안한 가나안 땅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나라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희망이요, 증거가 된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희망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인류의 희망에로 지평을 넓히고 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희망인 다가올 세계의 성격을 유대인들의 것과 달리 이해하였다. 그들이 꿈꾸는 육체적인 물질세계의 다가올 세상을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였다. 임시적이고 유한한 것에서 무한하고 영원한 것에로 눈을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마태가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한 희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속적인 희망에 매어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강성한 나라를 꿈꾸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의 본질이요 특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희망은 철저하게 현실 중심, 팔레스타인 중심, 예루살렘과 시온과 지상의 성전 중심이다. 그들의 희망은 철저하게 이 땅에서 이뤄지는 지상의 나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태복음의 천국복음을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가?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었으면서도 과연 마태복음의 천국복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가? 또 사도들이 이해했고 실천했던 믿음을 우리는 실천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철두철미하게 믿지만, 그들의 희망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개념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태복음과 히브리서를 비롯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고, 지병 때문에 하나님이 없고, 작고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고, 환란과 역경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제대로 된 희망을 품고 있고 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고민하고 점검해 볼 때이다.
2. 희망의 시작(마가복음 1:1)
세 번째 희망
마태복음 1장 17절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는 이스라엘 왕국의 출범과 발전기를 말한다.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모세가 싹을 틔어 다윗이 통일왕국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리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는 왕국의 쇠퇴기와 멸망을 말한다. 솔로몬사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북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망한 후 136년 만에 남유다 왕국도 망하였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는 노예와 떠돌이였던 아브라함이후 모세 때 품었던 첫 번째 희망처럼 포로기시대의 예언자들은 새로운 희망 또는 두 번째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운 분이 모세였다면, 두 번째 희망의 싹을 틔운 분은 예수님이었다. 이 두 번째 희망의 시작, 곧 새천년의 시작을 마태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였고,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복음서가 선포한 새천년의 시작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세속 국가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박해 받고 있던 성도들에게 두 번째 희망의 완성이자, 세 번째 희망의 시작인 천년왕국 또는 신천신지를 선언하였다. 이 세 번째 희망의 시작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한 영원한 세계로써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이후 지금까지 희망하고 있는 나라와 비슷한 세계이다. 이 영원한 나라는 영적인 동시에 부활했거나 영광스런 몸으로 변형된 성도들이 영원토록 살게 될 신천신지로 변모한 자연세계요, 새 예루살렘을 포함한 신령한 가나안 땅이다.
1800년대 초 미국에서 일어난 신약성서교회운동과 교회연합운동의 배경을 보면, 세 번째 희망인 새천년시대의 도래를 확신하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운동과 교회연합운동을 젊어서 시작하여 죽는 순간까지 펼쳤던 발톤 스톤은 새천년시대에는 모든 교파명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가지 이름아래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였다. 그의 이런 희망 때문에 1804년 6월 28일 스프링필드 장로회가 <<유언서>>를 남기고 해체되었다. 교파들이 해체될 때, 계시록 20장에 예언된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스톤은 노예해방운동도 활발하게 펼쳤는데, 천년왕국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스톤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운동, 교회연합운동, 노예해방운동을 <<그리스도인 전령>>(Christian Messenger)이란 월간지를 통해서 펼쳤는데, ‘그리스도인 전령’이란 새천년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뜻이다. 알렉산더 캠벨도 7년간 지속됐던 월간지 <<그리스도인 침례자>>(Christian Baptist)를 폐간하고, 그 대신 1830년부터 <<천년시대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란 이름의 월간지를 사후 4년까지 40년간 발행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기독교 본래의 순수성과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새 천년시대를 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서 신약성서교회 운동을 선구자로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처럼 스톤과 캠벨은 자기들 시대에 이뤄질 것으로 확신한 새 천년시대의 전령 또는 선구자를 자임하면서 개혁운동, 곧 신약성서교회로의 회복운동을 펼쳤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거룩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 희망
아브라함이 나이 일흔 다섯에 가나안 땅을 희망한 이후 그 첫 번째 희망을 가시적으로 성공시킨 인물이 모세였고, 다윗왕국이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을 빼앗긴 이후 예언자들이 가나안 땅의 회복을 희망한 이후 그 두 번째 희망을 가시적으로 성공시킬 인물이 그리스도이신데, 그 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라는 것이 복음서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희망의 시작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 1장 1절이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복음이란 기쁜 소식을 말한다. 왜 기쁜 소식인가? 그것이 다윗왕국이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을 빼앗긴 이후 612년간이나 오래 묵은 두 번째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브라함이 나이 일흔 다섯에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을 품은 이후 출애굽까지에 걸린 시간이 짧게는 430년, 길게는 645년이었다. 유대인들은 짧은 430년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시작이란 새로운 시작, 다가올 좋은 세상의 시작, 새천년의 시작을 말한다. 그 시작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시대였다. 그리고 복음은 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의 주인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눈물과 고통의 세월을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가나안 땅에로 인도하시겠다고 선포한 기쁜 소식과 같고, 모세의 영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첫 번째 희망인 가나안 땅의 시대, 즉 새천년시대를 활짝 연 것과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란 바로 새 희망 곧 두 번째 희망의 시작을 말한다.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등장 시점은 다윗왕국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가나안 땅의 희망이 처참하게 짓밟힌 지 무려 612년만이었다. 모세가 이집트에 등장한 시기처럼 예수님의 등장시기역시 흑암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모세 때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노예였던 것처럼,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 이 압제는 바벨론제국, 페르시아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에로 6백년이 넘도록 대물림되어 온 것이었다. 실로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다(마 4:16). 또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이었다(마 9:36). 특히나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시기는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붕괴된 후에 왕과 백성이 유배지로 끌려갔듯이, 그로부터 656년만인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붕괴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던 시기였고, 동시에 로마에서는 극심한 기독교 박해가 네로에 의해서 저질러지던 시기였다. 이뿐 아니라, 당시의 세계는 끊임없는 전쟁과 혼란과 가난과 전쟁노예들로 인해서 가정이 붕괴되고 도덕과 윤리와 기강이 무너진 시기였다. 이런 당대의 로마시대를 다루고 있는 영화가 <로마>라는 시리즈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마가는 로마의 기독교박해 현장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고,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이 예수님의 등장은 실로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희망의 빛이었고, 복음의 시작이었다.
희망의 시작
이어령 박사가 나이 일흔이 넘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것과 그가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한국의 지성사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이어령 박사는 젊은 날 날카로운 펜촉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앞세워 니체와 같은 무신론을 주장했던 지성인이다. 그랬던 그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갔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도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 있었고, 그 속에서 구원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불어 닥친 시련은 오히려 그의 인생에 새로운 희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었다.
이어령 박사는 세례를 받은 후 변화에 대해서 “과거 오류로만 보였던 성경이 지금은 구슬을 꿰듯 새롭게 읽힌다.”면서 “그동안 누군가에게 몸을 맡겨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외로운 삶인가. 혼자 바들바들하면서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 불쌍했다. 가장 사랑하는 내 딸도 얼마나 쓸쓸했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면서 세례 받을 당시의 심경을 고백하였다. 그는 또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예로 들면서 “세례 받기 전까지 나는 토끼 인생이었다. 나는 잘났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 나는 거북이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고 얼마나 많은 것이 부족했었는지... 인간의 오만을 버리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큰 변화다”고 말하였다.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어령 박사를 변화시킨 딸 이민아 씨는 지금은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지만, 원래는 미국의 변호사였다. 1992년에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고, 수술을 했지만 1996년과 1999년에 두 차례나 암이 재발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 아들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로 판명나면서 이민아 목사는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자신의 몸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아들에게까지 문제가 생기자 그녀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이주하였는데, 이번엔 그녀가 망막이 손상돼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하와이로 달려간 이 박사부부는 눈이 안 보여 설거지도 못할 정도가 된 딸을 보고 마음이 타들어 갔다고 한다. 이때 이 박사는 한 교회에 엎드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후 이민아 변호사는 병 고침을 받았고, 이 박사는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세례 받은 지 3주 만에 이 변호사의 큰 아들인 25세 된 유진 씨가 돌연사하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시련을 극복하고 목사가 되어 LA에서 청소년 치유사역을 하고 있다. 시련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란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어령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기적은 구제의 표시이지 목적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이다’라고 떠들면서 믿으러 오는 사람들을 아주 슬픈 눈으로 쳐다보셨습니다. 진짜 ‘만나’를 보라고. 영원히 죽지 않는 빵을 보라고 말입니다.”고 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복음의 시작이다.
3. 희망의 열매(요한복음 1:1)
희망을 이루게 하는 믿음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의 말씀은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의 말씀이다.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꾸는 변화의 말씀, 기적의 말씀이다. 태초의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독생자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인류가 의지할 궁극적인 희망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Logos)를 번역한 말이다. 요한복음은 이 로고스가 사람에게 빛을 주고, 생명을 주는 독생자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믿는 믿음이 만들어내는 변화,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변화를 일곱 개의 표적들로 설명하였다.
첫째,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2:1-11). 이 표적은 유익한 변화, 건설적인 변화, 부족을 채우는 변화, 분위기를 쇄신하는 변화,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는 변화였다. 모친 마리아에게서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나타난 다음, 물이 맛좋은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가 나타났다.
둘째,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셨다(4:46-54). 특히 유대인 니고데모, 사마리아인(절반 유대인) 여성, 이방인 왕의 신하한테서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나타난 다음, 구원에 이르는 중생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 세 인물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남녀노소, 민족, 신분의 차별이 없음과 그것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5:1-18). 이 표적은 복음적 사고(思考), 유신론적 창조사고, 살림과 열림의 사고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병자에게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나타난 다음, 38년이나 된 고질병이 낫는 변화가 나타났다.
넷째,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빈들에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셨다(6:1-15). 이 표적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영생을 얻는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민중에게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나타난 다음, 그들의 굶주린 배가 채워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다섯째,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6:16-21). 이 표적의 특징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이면 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는다는데 있다. 제자들에게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나타난 다음, 제자들을 밤새도록 괴롭힌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여섯째, 예수님은 타고난 맹인을 고치셨다(9:1-7). 예수님은 흑암에 빛을 주시는 분이시다. 맹인에게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나타난 다음, 타고난 맹인의 눈이 떠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일곱 번째,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11:17-44). 나사로의 가족에게 변화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나타난 다음, 무덤에 묻힌 나사로가 살아나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은 우리의 희망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다.
희망의 꽃
아브라함이후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희망은 가나안땅이다. 유대인들이 노래하는 희망(Ha-Tikvah)은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이다. 천사도 믿고 부활도 믿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종교색채를 강하게 띠기 때문에 그들이 노래하는 희망에 영적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들의 희망은 지상의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 점에 의문을 품고 근본에 접근한 것이 기독교이다. 떠돌이와 노예로 시작한 유대인들은 안정된 주거를 보장하는 땅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아브라함이후 가슴에 품었던 가나안땅의 희망을 이뤘고, 다윗 때는 통일왕국의 위용을 세웠지만, 영원하리라 믿었던 다윗왕국은 무너졌다. 이후 아주 오랜 세월동안 유대인들은 많은 제국들의 흥망성쇠의 부침의 역사를 보아왔고, 그 속에서 웃고 울었다. 그런 중에서도 유대인들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가나안땅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400만 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 유대인들이 전 세계 수십억 인구가 믿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수용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세속적인 희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희망을 다르게 해석하였다.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의 실체와 근본으로 보는 헬레니즘의 영향도 있었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본 것은 이 지상에는 영원한 안식처가 없다는 것이었다. 영원한 평화, 영원한 왕국, 영원한 안식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영원히 지속될 다윗왕국의 회복을 희망하는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觀)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 즈음에,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예수님이 나타나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영원한 평화, 영원한 왕국, 영원한 안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짧은 기간에 그분을 추종하는 작은 세력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비로소 왜 그분이 그리스도이신지, 왜 그분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희망했던 메시아였는지를 숙고하였다. 그들은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등장한다 해도 팔레스타인을 통치했던 셀류키드 헬라왕조(312-64 BC)가 248년 만에 붕괴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땅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결국 알렉산더와 같은 영웅을 희망하는 유대인들이 꺼려하고, 빛의 세계에 이르는 길(지혜 또는 지식)을 찾는 헬라인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생명과 영생을 얻는 길이요, 희망을 참되게 꽃피우는 길이란 것을 전파하였다.
요한복음에는 ‘믿고’와 ‘믿는’이란 단어가 ‘생명’과 ‘영생’이란 단어와 함께 대단히 많이 쓰이고 있다. 요한복음이 쓰인 목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과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3:15-16, 20:31). 인류의 궁극적인 희망은 영원한 생명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 희망을 꽃 피우고, 희망의 열매인 영원한 생명과 영생을 얻는 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의 길임을 요한복음은 밝히고 있다.
희망의 열매
인간의 희망에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요한복음에서 희망의 열매는 생명 곧 영생을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믿음’에 관련한 단어가 포함된 구절이 85절이나 된다. ‘영접’이 7절, ‘생명’과 ‘영생’이 합해서 35절, ‘구원’이 6절, ‘하나님’이 68절, ‘그리스도’가 18절, ‘세상’이 56절, ‘나라’가 4절이나 된다.
56절에나 포함된 ‘세상’이란 단어는 영생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 즉 유대인들이 희망하는 나라를 말한다. 이 나라는 예수님이 가르친 천국과 크게 차별되는 나라이다.
이 세상은 빛의 세계에 반대되는 어둠의 세계이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빛을 배척하는 세계이다(3:19). 빛을 배척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다(8:12).
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고 하셨다(15:19). 그러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고(5:18),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19:15-16). 그러나 그들이 죽인 예수님은 육신덩어리에 불과하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고 하셨다. 또 빌라도에게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18:36)고 하셨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의 가나안땅은 지상의 땅이 아니라, 히브리서나 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저 천국에 있는 가나안땅을 말한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1:12)이라야 한다. 또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17:3) 자들이어야 하고, 믿는 자들이어야 한다(3:16, 6:47).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11:25-26)고 하였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20:29)고 하였다.
다른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1-33)고 하셨고,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희망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4. 희망의 능력(누가복음 1:1)
나그네의 희망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인들의 이집트탈출과 광야생활 그리고 가나안 입성이 누가문서의 역사기술방법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만일 연관성이 있다면, 누가는 예수님의 짧은 생애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이집트탈출의 관점에서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모세의 실체가 되고,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인들의 실체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 이르러 가나안땅에로 가는 행진(여행) 혹은 나그넷길의 원형이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 겪었던 고난의 행군, 이집트에서의 배척은 물론이고, 광야생활 중에 이웃 민족들로부터 받았던 배척, 또 그들과 싸워야했던 투쟁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세상을 떠나 천성에 들어가기까지 겪어야하는 사단의 유혹과 불신자들의 배척 또 그들을 싸워 물리쳐야하는 투쟁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이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부터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면서 만나를 먹고 반석의 샘물을 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성막예배를 드렸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세상을 떠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아 40년으로 상징되는 일생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 주의 만찬을 먹고 마시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의 광야생활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지시한 양식대로 이동성막을 짓고, 하나님이 지시한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던 광야교회시대와 하나님의 성령님의 상징인 불기둥과 구름기둥(Shekinah, 하나님의 현현)의 인도를 밤낮으로 받아 가나안땅에로 향한 시대는 누가가 현시대를 교회시대로, 성령님의 시대로, 은혜시대로, 천성을 맛보고 즐기는 종말론시대로 설명한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교회시대란 마치 히브리인들이 노예의 사슬과 속박에서 벗어나 홍해건너편의 광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받던 광야시대요,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가나안땅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즐기던 히브리인들의 종말론시대의 원형과 실체를 말한다.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쉐키나(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와 타민족의 배척과 두려움과 의심과 유혹과 싸우면서 가나안땅을 향해 중단 없는 전진을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성령 충만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며 그 어떤 무서운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서 하늘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하늘 가나안땅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즐기면서 중단 없이 전진하는 순례자들이 될 것을 강조한다.
히브리인들은 끝내 가나안땅의 희망을 이뤘고 다윗왕국 때는 그 영광이 최고조에 달했으나 불행히도 다윗왕국은 망했고 예언자들이 빼앗긴 가나안땅의 회복을 희망한 이후 그 두 번째 희망이 교회시대를 통해서 이뤄졌으며, 이를 은혜시대, 성령시대 혹은 종말론시대라 일컫는데, 교회시대야말로 인류에게 활짝 열린 새 천년시대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누가복음 1장 1절이며, “우리 중에 이뤄진 사실”이다.
희망의 능력
히브리인들의 희망의 능력은 하나님이셨지만, 보이지 아니하심으로, 계시의 형태 즉 성막 법궤뚜껑(보좌) 위로 쏟아 오른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대신하셨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현현 또는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이었다. 민수기 9장 15-23절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양식대로 성막을 세운 날로부터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머물렀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히브리인들이 구름이 앞서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텐트를 치고 머물렀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을 인도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바로 이 하나님의 구름 또는 쉐키나 영광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먼저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였고, 나중 것은 하나님의 종을 통한 지시였다. 이 쉐키나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님이시다. 광야에서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행진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쉐키나가 희망의 능력이었듯이, 교회에서 하늘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행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이 희망의 능력이다. 이점을 간파한 분이 누가였다. 그래서 누가는 광야시대가 쉐키나시대였듯이, 교회시대를 성령시대로 보았고, 광야시대가 하나님의 은혜시대였듯이, 교회시대를 하나님의 은혜시대로 보았다. 광야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듯이, 교회 역시 박해와 환난을 극복해야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광야의 길이 가나안땅을 향해 행진하는 순례의 길이었듯이, 기독교 신앙의 길 역시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 행진하는 순례의 길임을 누가는 그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고난의 행진을 해야 하는, 가시밭길을 걸어야하는 신앙의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희망의 능력이 되신 성령님의 지시를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임을 누가는 권면하고 있다. 성령님의 지시를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 성령 충만의 조건이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조건이다.
이들 조건이 갖춰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의 삶을 나그네의 삶 즉 타향살이로 보게 되고, 세상의 것을 천상의 것의 그림자와 모형으로 여기게 된다. 세상에서 보는 것은 동굴 속에 갇힌 죄수가 벽면에 비춰진 희미한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행진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참 세계, 빛의 세계, 영원한 본향세계를 바라보고 행진한다. 돌아갈 본향세계가 있기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에 험난한 나그네의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견딜 수 있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삶은 짧을수록 좋다는 믿음이 있다. 지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천상에 희망을 두고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상 나그네의 희망이다. 시인 천상병은 ‘귀천’(歸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희망의 성취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선교비유가 14개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교란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의 히브리 노예들이 홍해를 건넌 후 자유인으로서 새롭게 시작하는 떠돌이 광야생활과 같고, 험난한 떠돌이 광야생활을 끝낸 후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땅에서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삶은 노예로서의 삶이다. 두 번째 삶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지만, 삶의 터전이 없는 떠돌이의 삶이다. 세 번째의 삶은 자유인으로서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축복의 삶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이 세 가지 삶을 위해서 두 개의 물을 건넜다. 홍해를 건넜고, 요단강을 건넜다. 따라서 물은 가진 것을 이편에 다 내려놓고 더 나은 저편 세상을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할 경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60년에 율리우스 시저(BC 102-44)가 폼페이우스와 결탁하고 원로원에 대항하고 있을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을 평정하였다. 명성이 높아지자, 기원전 49년에 폼페이우스는 시저를 배신하고 원로원과 결탁하여 시저를 소환한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는데, 시저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갔고,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의 일인자가 되었다. 여기서 루비콘(Rubicon) 강은 라틴어로 '붉은 강'이란 뜻으로,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시저가 붉은 강을 건너 천하를 얻은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붉은 바다 홍해를 건넌 후 가나안땅을 얻은 것과 비교된다. 아무튼 희망을 이루기위해서는 버릴 것을 버리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이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런 결단도 없이 그런 결의와 실천도 없이 희망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누가복음에는 돌아온 탕자(눅 15:11-32)와 거지 나사로(눅 16:19-31)의 비유가 있고, 세리장 삭개오(눅 19:1-12)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 이들 이야기들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희망의 성취와 나눔, 둘째로 처음 것의 상실, 셋째로 새 출발을 말하고 있다. 먼저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전 재산을 다 날리고 거지가 되어 돼지먹이조차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처참한 신세에서 아버지의 집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내 회개하고 돌아가 아버지의 품에서 새 출발함으로써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이다. 거지 나사로는 부와 건강을 잃고 가난하고 병든 거지로 살았지만,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을 보면 그가 천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삭개오는 탐관오리로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지만,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죄인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속인 것에 대해서는 네 배로 갚겠다고 하였다. 이들 이야기들에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들을 이편에 다 내려놓고 더 좋은 저편 세상에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 어떤 배척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함과 쉬지 않는 기도로써 천성을 향한 행진을 쉬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