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희망’에 관한 신약성경의 이해(2)
New Testament scriptures' Understandings on Jewish Hope
소광(素光)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5. 희망의 발전(행 1:8)
우주적 교회시대의 개방
사도행전의 중요성은 이 책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관에 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로마가 천하를 호령하던 당대를 교회시대(광야시대)로 이해하였다. 당시 교회는 이단시 취급될 뿐 아니라, 탄압을 받던 아주 작은 공동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를 이 겨자씨와 같은 공동체의 시대 곧 교회시대로 조망(眺望)하였다. 놀라운 것은 누가가 내다본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10여 차례의 대 환란을 겪고서도, 주후 30년 예루살렘 교회가 출범된 지 360여년 만에,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로마제국을 기독교왕국의 새천년시대로 만들어버리는 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새롭고 놀라운 새천년시대의 출범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어떻게 불법종교로써 박해를 받던 작은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는가? ‘가톨릭’(우주적, 보편적) 교회라는 호칭을 문서에 등장시키고, 이 호칭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인물들이 있었다.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기에 죽었던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들이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7 혹은 340-397)는 본래 밀라노에 주재했던 집정관이었으나 삼위일체를 믿는 정통교회와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주교직 경합 때 중재를 맡았다가 추대되어 374년 30대 후반에 침례 받고 일주일 만에 주교에 임명된, 말 그대로 급조된 주교였지만, 주교로 재임했던 20여 년간 정치 종교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기독교의 위상을 크게 높였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켜 침례를 베풀어 성인이 되게 한 인물이다. 암브로시우스의 활동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와 이교에 맞서 싸웠고, 원로원에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을 세우려한 심마쿠스 황제에 대항하였으며, 두 개의 대성당을 아리우스파에게 넘기려 했던 황제의 군대를 격파시켰다. 또 양민들의 대학살을 명령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47-395) 황제를 굴복시켜 참회시킨 일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390년에 그리스 데살로니가에서 주민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를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7천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암브로시우스는 즉시 서한을 황제에게 보내 공개적인 참회를 요구하면서 참회 때까지 예배당에 오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를 묵살한 황제는 부활절 날 예배당에 행차하였고, 암브로시우스는 출입문을 가로막고 황제의 입당을 저지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단호한 저항에 막혀 테오도시우스는 발길을 돌렸고, 8개월이 지난 성탄절에 다시 예배당에 행차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제지하며 데살로니가에서 자행된 주민학살을 참회토록 하였다. 결국 황제는 자신도 인간에 불과함을 깨닫고 주교의 명령에 굴복하여 맨머리에 베옷을 입고 참회하였다. 그 후에야 그는 주교로부터 주의 만찬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2년만인 392년에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용기 있는 행동과 테오도시우스의 국교 선포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모두 우주적 교회시대를 활짝 열고자한 희망 즉 가나안땅의 희망을 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새천년의 교회시대
테오도시우스는 원래 동로마제국의 황제였으나 4개월에 불과했지만 서로마제국까지 함께 다스렸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 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리가 고착되어 다시는 통일되지 못했다.
379년경 테오도시우스가 통치하던 동로마 제국 내에는 삼위일체론(니케아 신조)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 사이에 적대 관계가 고조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심한 병에서 회복된 뒤 380년 침례를 받았고, 그 누구의 자문을 구하지도 않고 모든 로마시민들이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라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삼위일체론을 믿는 신자들만 우주적 혹은 보편적(가톨릭)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인 381년에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케 하여 주교 150명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확정케 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가 로마 교구와 버금가는 명예와 위신을 갖게 하였다. 385년부터 테오도시우스는 동물제사를 엄격히 금지시켰고, 391년에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시켰으며, 392년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후 로마제국에서는 비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그 어떤 비기독교적인 진흥이 나오지 못하였다.
이 무렵인 391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 354-430년)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장로(목사)로 장립되었고, 4년 후인 395년부터 공동주교를 거쳐 400년부터 단독 주교가 되어 430년 죽을 때까지 북아프리카의 교회들을 섬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년시대의 끝과 새로운 천년시대의 시작을 경험한 행운아였다. 그의 시대에 교부시대가 끝나고 중세시대가 시작되었고, 기독교 박해시대가 끝나고 국교시대가 열렸으며, 자신의 영향권아래서 393년과 397년에 신약성서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었으며,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로마제국이 망하고 하나님의 도성(神國, De Civitate Dei)이 열린 종말론시대였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의 광야시대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는 종말론시대였다. 동시에 광야시대는 하나님의 세키나(구름기둥)가 인도하던 이동성막교회시대였다. 이 광야교회는 기독교회의 예표였다. 기독교회시대는 하늘 가나안땅을 바라보는 종말론시대이다.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희망했던 교회시대가 바로 새천년시대였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서 순례하는 자들이었다. 암브로시우스와 테오도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희망했던 교회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광야시대와 가나안땅 시대 사이에 요단강 말고는 별도의 새천년시대가 없었듯이, 또 광야시대가 메시아의 예표였던 모세시대였듯이, 교회시대와 하늘 가나안땅사이에 별도의 천년왕국시대나 메시아시대가 있을 수 없다. 교회시대가 곧바로 메시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이다. 이것을 믿었던 인물들이 누가요, 암브로시우스요, 테오도시우스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교회시대를 새천년시대 곧 메시아왕국시대로 보았다.
광야의식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가 4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신약성서의 저자들처럼 이 세상을 가나안땅으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자연재해에 흔들리고 무너지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가치들을 뛰어 넘어 영원불변한 세계를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순례자들의 광야의식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히브리민족 그리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녀들은 그 약속이 다름 아닌 가나안땅 곧 하나님의 도성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약속 또는 이 희망을 바라보고 이 희망을 향해서 끊임없이 순례하는 떠돌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런 의식이 곧 순례자들의 광야의식이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순례자의 모범으로 설명하였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특히 바울을 순례자의 모범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님과 바울은 순례자들로서 광야의식이 충만했던 분들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현 위치 또는 현주소는 광야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온 죄악세상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이 떠나온 죄악세상 고대이집트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자녀들은 이미 죄악세상을 사이에 둔 붉은 바다 홍해를 건너버린 뽑힌 자들이다. 율리우스 시저처럼 붉은 강 루비콘을 건너버린 하나님의 군대의 용사들이다. 이미 주사위를 땅에 던진 사람들이다. 돌이킬 수 없고 돌이켜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다. 오직 전진만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를 외칠 일만 남겨놓은 사람들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그랬고, 율리우스 시저와 그의 용사들이 그랬듯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일만 남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쉐키나(구름기둥)를 신실하게 좇았던 것처럼, 성령 충만하여 신실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하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며 하늘 가나안땅을 정복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마 11:12)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다”(히 10:39).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며, 모세의 노래,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할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광야를 걷고 있다. 목적지 가나안땅을 향해서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기독교 역사는 광야의식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곧 가나안땅시대, 새천년시대를 희망하는 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음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발전을 가져왔던 시기들은 대개가 새천년 가나안땅의 시대에 대한 희망이 충만했을 때였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기술한 역사가 바로 이것이었다. 누가의 강력한 메시지는 우리가 광야에 있고, 하늘 가나안땅을 향해서 행진하고 있는 순례자들이며, 성령 충만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면 새천년 역사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게 될 그 순간까지 전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6. 희망의 상속(롬 4;13-16, 고후 5:1-5, 엡 3:1-13)
로마서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기쁜 소식)은 희망을 상속받는데 차별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가나안땅)에 차별이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희망을 상속받는데 차별이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바울은 민족 신분 성별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 한 가지 제약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2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하였다. 또 10장 12절에서는 구원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선포하였다. ‘차별’의 반대말은 ‘선민’이다. 따라서 차별과 선민이란 단어는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뽑힌 민족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분뿐이고, 그 한분뿐인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신(神)이므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란 결국 무신민족(無神民族)이다.
바울은 ‘기업’(가나안땅)과 ‘상속자’(후사)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였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3748년 전 가나안땅의 희망을 최초로 품은 이후 지금(2010년)까지 이 희망을 꺾지 않고 있다. 유대교용어로 기업은 ‘올람 하바’(다가올 세상)이고, 상속자는 이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 살 자들이다.
아브라함은 3748년 전 가나안땅의 희망을 품었던 최초의 선민(이 희망을 품은 자가 선민이다)인데, 바울은 그의 행위와 믿음의 성격을 로마서 4장에서 설명하였다. 행위를 율법과 할례로 연결시켰고, 믿음을 의로움과 무할례로 연결시키면서 율법과 할례로 연결되는 행위가 구원에 무용함을 설파하였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집착하는 문자적인 지상의 가나안땅과 그 땅의 주인이 유대인들이라고 믿는 배타주의 그리고 율법에 매인 유대교 믿음의 한계와 문제점을 파헤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얻는 차별 없는 구원을 설파하였다. 로마서 4장 13-16절이 이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또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는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가나안땅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을 받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늘 가나안땅을 희망하며, 하늘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하늘 가나안땅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는 영광을 받으신 것과 같다.
고린도후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기업’(가나안땅)과 ‘상속자’(후사)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고린도후서 5장 1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바울은 지상에서의 집을 “장막집” 즉 천막집이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뿐만 아니라, 히브리 민족이 40년 광야생활에서 사용했던 임시거처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 장막집을 우리 몸의 육체에 빗되어 사용하였다. 이 땅에서의 삶이 유한하고, 임시적인 나그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장막집에 반대되는 더 좋은 집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또는 “영원한 집”이라고 하였다.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또는 “영원한 집”은 유대인들이 희망하는 지상의 가나안땅에 있는 집이 아니라, 하늘 가나안땅에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광야를 떠돌던 히브리 민족이 가나안땅을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땅의 것들보다 ‘더 좋은 육체’와 ‘더 좋은 세상’이 예비 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상속받을 자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5절에서 기업이란 말 대신에 ‘장차올 것’이란 표현을 썼다. 우리말 성경 5절은 “이것을(영원한 집)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로 번역하였지만, 영어성경은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성령님은 ‘장차올 좋은 것’ 즉 하늘 가나안땅에 대한 ‘약정’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설명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고린도후서 1장 22절은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늘 가나안땅에 대한 약정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성령님을 언급한 것은 성령님의 실수 없고 오류 없는 확실한 인도를 말한다. 그것은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히브리 민족을 가나안땅에로 인도한 것과 같다. 교회는 성령님의 보증과 인감 찍음으로 가나안땅(구원)의 약속을 받고, 그 축복을 함께 나누며 누리는 공동체이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약속에로 나아가는 나그네 공동체이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 신앙인들이 현실에 안주하여 광야생활에 만족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도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땅이기 때문이다. 또 낙심하거나 희망을 포기하거나 고난의 길을 피하려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은 우리에게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하였다. 이 땅은 우리의 마지막 삶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낡아지는 것이고, 고난의 삶이며, 보이는 것이고, 잠깐에 불과한 것이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희망은 새로워지는 것이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며,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에베소서
에베소서 3장 6절은 놀랄만한 선언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희망하는 가나안땅,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 바울의 시대까지 무려 1800여 년 동안 기다려왔던 약속의 땅을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천인공노할 망언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그런 엄청난 선언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바울의 이 선언은 지상의 가나안땅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늘 가나안땅을 두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지상의 가나안땅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땅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 하늘 가나안땅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모든 사람들, 모든 민족, 모든 남녀, 모든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상속받을 수 있는 땅이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상도 해볼 수 없는 엄청난 복음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7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바울 자신을 복음의 일군으로 삼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8-9절)고 하였다.
바울의 깨달음은 이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가나안땅의 적통 상속자가 아닌 외국인이었던 우리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적통인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아브라함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눠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이 우리 이방인에게는 엄청난 복음의 기쁜 소식이요, 만세 전부터 감추었던 하나님의 비밀이며, 하나님의 경륜이란 것이다. 골수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복음이 바로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온갖 영적인 복을 주시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우리는 다 죄의 삯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이며, 세상풍조를 따라 살았고,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따라 살았으며,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던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품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전에 우리는 육신적으로 이방인이었고, 유대인들로부터 할례 받지 못한 자란 소리를 듣던 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도 없었으며, 선민의 약속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아무런 희망 없이, 하나님도 없이 황야의 늑대처럼 살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 덕분에, 그분이 흘리신 보혈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까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늘 가나안땅의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집의 가족이라는 것이다. 이 땅의 가나안보다 더 좋은 하늘 가나안땅의 상속자라는 것이다.
7. 희망의 실상(히 1:1-2, 11:1)
예수님에 대한 믿음
희망의 실상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신실하게 따르는 믿음이다. 히브리서 11장 1장은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광야에서 40년을 떠돌던 히브리인들이 간절히 희망했던 것은 가나안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희망했던 가나안땅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그들의 후손인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의 희망을 품은이후 지금까지 3748년 동안 가나안땅을 간절히 희망했고, 예루살렘과 시온에서 자유민이 되기를 희망하였지만, 3748년 가운데 3000년 정도는 그것이 그들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의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이 “보지 못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보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희망을 포기할 사람이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으면 포기할 사람이 생긴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노예 신분으로 처참하게 지내던 히브리인들에게 희망하던 것을 실현시켜주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준 하나님의 사람이 모세였다. 따라서 모세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제1 대구원사건을 실상으로 만들어낸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바벨론유배이후 유대인들은 제2 대구원사건을 실상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렸다. 히브리서는 그가 바로 예수님이란 점을 설파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이 사막의 모래바람과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와 의심의 구름과 불신의 그늘과 싸우며 모세를 믿고 따라야했던 것처럼, 또 기어코 가나안땅에 들어갔던 것처럼,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라야만 희망하는 것들을 실상이 되게 하고, 보지 못하던 것들을 증거가 되게 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희망의 증거가 된 자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망의 증거가 된 자들은 구약시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는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 그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믿음,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신실한 믿음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갈렙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모세를 보좌한 것과 같다. 그런데 옛적 즉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브리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다고 하였다(1:1-2). 그러므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12:1-2)고 하였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모범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장차 받아 누릴 영광을 위해서 달게 받으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는 보상을 받으셨다.
장차 올 기업의 상속
히브리서에는 상속자란 말이 몇 번 나온다. “만유의 상속자”(1:2), “구원 받을 상속자”(히 1:14), “의의 상속자”(히 11:7)가 그것들이다. 기업이란 말도 몇 번 나온다. “이름을 기업으로”(히 1:4),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히 6:12,17), “영원한 기업의 약속”(히 9:15),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히 11:8),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히 12:17)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서 기업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올람 하바,’ 장차 올 좋은 세상을 말한다. 히브리인들이 애급을 탈출하여 광야에 이른 것은 최종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달해야할 목적지는 가나안땅이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따로 불러냄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최종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도착해야할 목적지는 하늘 가나안땅이다. 히브리서 12장 18-28절을 보면,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 도달할 곳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란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오름의 행진과 방향은 저 팔레스타인 땅의 시온산과 예루살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시온이다.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희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장차올 좋은 것’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는데, 6장 9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좋은 소망’(7:19), ‘더 좋은 언약’(7:22), ‘더 좋은 약속’(8:6), ‘장차올 좋은 일’(9:11), ‘장차 나타날 좋은 것’(10:1)을 연이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11장에서는 역사를 수놓은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더 좋은 것을 사모’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였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시고, 미리 세워둔 ‘더 좋은 계획’에 따라(40절) 그들을 위한 ‘한 도시’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마련해 주셨다(16절)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았다’(35절)고까지 말한다.
‘장차올 좋은 기업’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신실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은 게으르지 말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고(12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확실하게 받게 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다”(17절)고 말씀한다. 또 11장은 허다한 성도들이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만 의지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서 나아갔다고 말씀한다.
참 안식의 땅
유대교사상 가운데 중요한 테마가 안식이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의 땅은 가나안이다. 그래서 히브리 떠돌이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땅에 진입한다. 그들의 후손들이 애급에서 탈출하여 진입한 곳이 가나안땅이다. 가나안땅은 오랜 떠돌이와 노예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얻는 안식의 상징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흩여져 사는 유대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땅이 아닌 곳은 그곳이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일지라도 자유를 빼앗긴 유배지에 불과하다. 이방인들의 눈에 가나안땅은 불모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의 눈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희망의 땅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영원한 안식처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 밤이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고 희망을 노래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국민은 국가를 통해서 “동쪽 끝자락을 향해서 시온에로 눈은 향하고,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천년을 간직한 희망은 우리 자신의 땅에서 시온과 예루살렘 땅에서 자유민이 되는 것”이라고 희망을 노래한다.
이런 간절함 때문에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 거침없이 향한다. 이것을 ‘알리야’(aliyah)라 부르는데 ‘오름’이란 뜻이며, 예루살렘과 시온에로 오르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 희망이 이뤄질 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믿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가나안 땅에 오름, 이것은 분명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자 원형이며, 끈질긴 집념이면서 절대 신앙이다. 이것이 그들을 유대인이 되게 하는 조건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 안식에 대한 희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시각이다. 유대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토지 중심적이며, 현세적이다. 이런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내세적이며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신약성경이다. 이 땅에는 그 어떤 곳에도 진정한 안식이 없다. 이 땅에는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없다. 이 땅에서는 갈등과 전쟁과 질병과 자연재해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세상의 가나안땅에서는 결코 젖과 꿀이 흐를 수 없다. 이 세상의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 결코 될 수 없다. 이 땅의 요단강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넘칠 수 없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영원한 안식, 참 안식을 이 땅 가나안에서 찾지 않고 하늘 가나안땅에서 찾으며, 이 땅 예루살렘에서 찾지 않고, 하늘 예루살렘에서 찾는다. 이 땅 요단강에서 찾지 않고, 하늘 생명수강에서 찾는다. 유한한 것, 일시적인 것, 불완전한 것, 지엽적인 것에서 안식을 찾지 않고, 무한한 것, 영원한 것, 완전한 것, 근본적인 것에서 안식을 찾는다.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을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막힌 담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과 오직 믿음과 은혜로 법적인 속죄는 물론이고 양심까지 깨끗케 사함 받는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복을 풍성히 채워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주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확실하게 가져다주실 우리를 위한 우리의 편이신 구세주이시다.
8. 희망의 완성(계 21:1-4)
하늘 가나안땅(천국)
계시록이 말하고자 한 것은 희망의 완성이다. 계시록에는 두 가지 가나안땅이 나온다. 한 가지는 하늘 가나안땅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가나안땅이다. 여기서 하늘 가나안땅은 임시적이고 유한한 제1차 희망의 완성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가나안땅은 영원한 제2차 희망의 완성이다. 하늘 가나안땅은 낙원세계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가나안땅은 말 그대로 신천신지의 세계이다. 하늘 가나안땅이 임시적이고 유한한 이유는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때까지, 즉 주의 재림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 가나안땅은 지상세계가 존재할 동안만 필요한 곳이고, 지상세계가 끝나는 주의 재림이후에는 하늘 가나안땅과 지상세계가 통합되게 된다. 그 때가 되면 지상과 낙원의 구분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만 존재하게 된다.
계시록은 주님 재림이전 세계인 하늘 가나안땅과 지상세계의 대 환난과 대 구원에 대해서 1장부터 19장에서 설명하고 있고, 주님 재림이후 세계인 신천신지와 불 못에 대해서는 20장부터 22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계시록 이해의 핵심은 지상세계 특히 가나안땅과 예루살렘과 시온에 있는 것이 하늘 가나안땅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반대로 하늘 가나안땅에 있는 것이 지상 가나안땅에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록에서는 천국에도 가나안땅이 있고, 예루살렘이 있으며, 시온이 있고, 성전이 있으며, 보좌가 있고, 장막이 있으며, 제단이 있고, 등대가 있으며, 향로가 있다. 이런 것들은 다 히브리민족의 가나안땅에 있었던 것들이다. 땅에 있는 것이 천국에 있는 이유는 땅의 것들은 천국의 것들의 그림자요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을 잘 알려면 구약성경을 잘 알아야하고, 하늘의 것을 잘 알려면 땅의 것을 잘 알아야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계시록에 ‘보좌’란 말이 35개의 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지성소이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이동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 서편에 언약궤(법궤 혹은 증거궤)가 있었다. 당연히 천국에도 성전이 있고, 지성소가 있고, 언약궤가 있다. 계시록 11장 19절을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는 지성소의 보좌를 말한다. 언약궤가 곧 보좌이다. 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시은소이다. 언약궤 속에는 하나님의 토라 즉 율법의 말씀이 들어있기 때문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엄을 상징한다.
광야시대의 이동성막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한 대로 만들어졌다. 하늘의 것을 모형과 그림자로 지상에 보여주신 것이다. 광야시절 이동성막의 언약궤 위로 구름기둥이 솟았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준 계시였다. 땅의 것을 보고 하늘의 것을 알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땅의 것(유한한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영원한 것)을 이해한 지혜와 영감은 예수님이후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졌다.
하늘 가나안땅의 중심
구약성경에 하늘 가나안땅(천국) 개념이 없다. 보이는 땅의 것에 희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이다. 39권의 구약성경은 페르시아제국시대에 기록이 끝났고, 적어도 동시대까지는 지상의 가나안땅이 유대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안식처였다. 보이는 땅의 것(유한한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영원한 것)을 이해할 지혜와 영감이 그때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이 지상 가나안땅을 희망하는 것만큼 하늘 가나안땅을 희망하였다. 그곳이 더 좋은 세상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하늘 가나안땅 개념으로 가득하다. 하늘 가나안땅(천국)에는 지상 가나안땅의 좋은 것들이 다 있지만, 지상 가나안땅의 나쁜 것들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면, 사랑, 기쁨, 평안, 안식, 감사는 물론이고, 각종 좋은 보화와 먹을거리가 풍부한 반면, 미움, 슬픔, 번뇌, 노동, 불평은 물론이고, 배고픔과 각종 질병과 자연재해는 하늘 가나안땅에서 찾아 볼 수 없다.
하늘 가나안땅의 중심은 성전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중심의 신정국가를 희망하고 있다. 하나님은 히브리민족이 광야에서 장막을 칠 때는 이동성막을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진을 치도록 지시하셨다(민 2:2). 이 지시대로 하늘 가나안땅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지성소에 하나님의 보좌(언약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네 생물(케루빔 천사)이 있으며, 보좌 앞에 하나님의 일곱 영과 보좌를 둘러선 24장로들이 있고, 네 생물과 24장로들 사이에 어린양 예수님이 있으며,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수를 셀 수없는 천사들과 또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계 5:13)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하늘 가나안땅은 예배중심이다. 계시록 4장에서는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양과 경배를 돌려보내고 있고, 5장에서는 네 생물과 24장로뿐만 아니라, 그들을 빽빽하게 둘러선 수를 셀 수 없는 천사들까지 합세하여 ‘어린양’에게 찬양과 경배를 돌리고 있다. 그리고 5장 13-14절은 종합적으로 온 우주만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 모두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돌리고 있다.
찬양의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시고(계 4:8), 만물을 지으셨으므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계 4:11). 또 그리스도께서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들 가운데에서 믿는 자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바치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아 땅에서 왕 노릇하게 하셨으므로(계 5:9-10),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계 5:12). 이것이 우리가 하늘 가나안땅에서 부를 찬양의 내용이다.
지금 우리가 바치는 예배와 찬양은 하늘 가나안땅에서 드리는 완전한 예배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또 현재 우리의 삶은 하늘 가나안땅의 삶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의 성전과 보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는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을 수도 있고, 가정과 교회에 있을 수도 있다. 어디에 있든 간에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경배와 찬양이 되어야 한다.
신천신지(영원한 통합세계)
계시록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희망의 성취이다. 왜 희망이 성취될 수밖에 없는가와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희망이 성취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주신 분이 오류나 실수가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신천신지라는 영원한 세계를 마련해 놓고 계신다.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계시록 7장, 21장, 22장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사는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성도들과 함께 하셨지만, 인간들이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지존하신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모든 인간은 거룩한 몸으로 변형된 완전한 모습을 갖춘 깨끗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이 성도들의 집과 함께 있게 되며,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살게 된다(계 21:3-4).
둘째,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친히 빛을 비추는 곳이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밤이 없고, 해와 전기가 필요 없는 곳이다(계 22:5).
셋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계 22:1),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리는 곳이다(계 22:2). 새 하늘과 새 땅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는 곳이다(계 7:16). 정리해고나 부도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넷째,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사 65:18). 새 하늘과 새 땅은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곳이다(계 21:4).
다섯째, 새 하늘과 새 땅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해함이 없고 상함이 없고(계 22:3; 사 65:25), 질병이 없고, 죽음이 없는 곳이다(계 21:4).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놀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곳이다(사 65:25).
여섯째, 새 하늘과 새 땅은 깨끗하고 건전한 생각만 하는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실수나 잘못이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 곳이다(사 65:17; 계 21:4).
일곱째,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성도들이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 하는 곳이다(계 22:5). 새 하늘과 새 땅은 남에게 지배를 받거나 고용 당하지 않는 곳이다. 이밖에도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튼튼하고,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고, 보석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으로 임한 새 예루살렘성에서 보호받으며 안식하게 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좋은 곳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무나 막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돈 많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머리 좋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잘났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 들어가 땅을 차지할 상속자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이며, 최후까지 믿음을 지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린 자이다. 또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이다.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궁극적인 희망의 시작과 완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 거대한 역사의 주인공들로서 희망을 성취할 하늘 가나안땅의 상속자들인 것이다.
나가는 말
이상의 글들을 통해서 신약성경이 유대교 ‘희망’(Ha-Tikvah)에 관해서 유대인들의 기존이해와 어떻게 다른 이해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희망했던 지상 가나안땅보다 더 안전하고 완벽하며 영원한 하늘 가나안땅에로 교회(광야)시대의 성도들을 인도하여 들이실 참 그리스도 즉 그림자 모세의 실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로마서, 고린도후서, 에베소서)과 히브리서와 계시록의 각기 다른 해석을 통해서 일관된 주장,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늘 가나안땅임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명쾌하게 유대교와의 차이를 특징짓고 있는가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