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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1-12 07:22
예수님의 윤리적인 삶을 추종한 일곱인(2)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442  

예수님의 윤리적인 삶을 추종한 일곱인(2)
Seven Followers of Jesus Christ's Ethical Lives

소광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5. 디트리히 본회퍼(마 8:18-22)

본회퍼의 경험

디트리히 본회퍼(1906.2.4~1945.4.9)는 명문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로서 베를린 대학의 교수였다. 친가는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였고, 외가는 목회자와 신학자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잘 쳐서 음악가로 대성할 것이라 예견되었으나 군에 입대한 형이 제1차 세계대전 때 부상을 입고 죽자, 부모님이 크게 상심하는 것을 본 12살 때 이후로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고, 15살 때 히브리어를 선택과목으로 택하여 공부하였으며, 17세(1923) 때 튀빙겐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고, 21세(1927) 때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4세(1929) 때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25세 때 루터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본회퍼가 27세 때인 1933년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섰는데,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뤄졌고, 독일의 모든 교회들을 제국감독이 지배하는 제국교회로 통합하려는 음모를 꾀하였다. 이 당시 독일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면서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보내셨고, 경제 사회적 구원을 위해서는 히틀러를 보냈다면서 히틀러를 우상시하였다. 이때부터 본회퍼는 히틀러정권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독일교회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뿐 아니라, 전쟁에 몰두하는 살벌한 히틀러 정권아래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근거를 둔 평화주의를 외쳤다. 그런 그가 부득불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하였고, 폭탄이 터지지 않아 거사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서 37세(1943) 때 체포되어 갖은 옥고를 치렀고, 히틀러가 항복을 선언하고 자살하기 15일 전 1945년 4월 9일 새벽에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았다. 수감생활에서조차 시종일관 남을 위해서 살았던 그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쓰고, 신앙은 모름지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또 그대로 실천했던 목사요 신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할 수 있었느냐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정신을 잃은 운전자가 인도를 덮치려고 한다면 나는 기다렸다가 차에 치인 병자를 병원에 데려가고 뒷수습하기보다는 제정신을 잃은 운전자를 차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그 차를 향해 뛰어 들것이다.”

본회퍼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세계교회일치운동에 힘썼고, 영국에서 목회까지 했었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었다. 또 초청을 받고 미국에 갔을 때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남아 평안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초청해준 라인홀드 니버 교수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나는 우리 민족사의 힘든 시기를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이 시대의 시련을 나의 민족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복구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독일의 패전에 동의하여 기독교 문명을 더 향유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에 동의하여 우리의 문명을 파괴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섬뜩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안정된 삶을 산다면, 내가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값싼 은혜

본회퍼는 암울했던 시기를 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힘썼던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마 8:21)는 결단을 미루는 제자가 아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를 나를 따르라”(마 8:22)는 주님의 말씀에 즉시 결단하는 참 제자로 살려고 힘썼던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산상수훈을 연구하였고, 평화주의를 성찰하였으며, 날마다 성구를 묵상하고,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엄격한 경건실천에 힘썼다. 본회퍼는 예수님 중심의 신학을 하면서 예수님을 본받는 일에 가치를 두었으며, 교회도 그리스도를 본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평가하였다. 그는 “교회는 늘 참인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참인 계명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늘 참인 것이 오늘 참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늘 오늘의 하나님이시다.”고 하였다.

본회퍼는 교회를 개혁하고 목사의 처우를 쇄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목회자 후보생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핑켄발데 신학원(1935-37)을 세워 원장을 맡아 가르쳤는데, 개신교가 중독되어버린 값싼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값비싼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이 무렵 제국교회는 생일을 맞은 히틀러에게 “목회자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바쳤다. 이로써 히틀러에 불복종했던 고백교회 목회자들조차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따라서 상당수의 목사들이 안수 때 했던 서원을 저버렸다. 이에 본회퍼는 “무죄한 자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 절규하건만 교회는 외쳐야할 자리에서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폭력과 불법이 자행되는 것을 수수방관하였다.”고 한탄하였다.

본회퍼의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는 1937년에 출간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담겨 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 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이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감싸줄 값싼 덮개를 값싼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의 독을 받아마셨다. 그 결과 예수를 본받는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은혜에 관한 교리가 비할 데 없이 신격화되어 그 교리가 하나님 자체, 은혜 자체가 되어 버렸다.... 한 민족이 기독교인이 되고 루터교도가 되었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고 가장 싼값을 치러서 된 것이다. 결국 값싼 은혜가 이긴 것이다.... 오늘날 헐값에 얻은 은혜의 필연적인 결과로 제도권 교회가 붕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치러야할 대가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본회퍼는 자기 자신과 자기시대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지속해서 물었다. 그가 연구한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그것이 본회퍼가 던진 필생의 물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만인가, 아니면 따름의 대상만인가, 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이자 또한 따름의 대상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만의 대상인가, 아니면 순종만의 대상인가, 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이자 또한 순종의 대상인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죽고 안 계신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세상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실 수 있는가?

본회퍼와 동시대의 인물이자 선배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서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 대신 설 자로 선택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 범한 인간에게 영생의 축복을 마련하시고, 자기 자신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저주와 죽음을 예정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몫을 당신께서 받는 대신에 당신의 몫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정한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가 본받고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죽고 안 계신 것 같은 세상,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세상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는 사람들의 주님이 되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신론자인 포이에르바흐는 종교를 인간의 자기분열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신들을 만든 것은 인간인데, 오히려 인간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비방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흙과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우상에 부여된 신율에 지배를 받는다는 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값싼 은혜의 신학을 우상으로 만들어놓고 그 논리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본회퍼는 되묻고 있다.

만일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값싼 은혜에 만족하고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신론자였던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고통당하는 인민의 한숨을 대변하는 것이고, 무정한 세계에 주는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또한 아편처럼 인민을 중독에 빠지게 하는 독약이라고 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값싼 은혜는 아편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안락의 중독에 빠지게 할 독약일 수 있다. 값싼 은혜의 중독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본회퍼는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그리스도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6.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사 40:3-5)

마르틴 루터 킹의 생애

1982-8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스보로 시(市)에서 느꼈던 인상은 꽤 충격적이었다. 아브라함 링컨이 1863년 노예해방을 선언하지 120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십 수 년 전인 1960년대 이후 미국 남부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민권운동의 흔적들에 적의 놀랐던 것이다. 노예해방선언에 따라 자동적으로 모든 흑인들이 자유를 누렸을 것으로 알았지,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노예해방이 선언된 지 100여년이 넘도록,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해봤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1980년대 미국에서 직접 경험했던 당시 흑인들의 노예근성이 노예해방선언이후 120년이 넘도록, 왜 그토록 오랫동안, 근절되지 못하고 있었는가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종차별을 불법화 시키고, 공공장소와 공공시설에서의 인종차별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 것, 괄시와 천대를 받던 흑인들을 각성시켜 마침내 백인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한 것은 비폭력주의로 흑인민권운동을 펼친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의 공적이었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그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토록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은 노예해방선언 일백주년기념 워싱턴평화행진 행사 때 수도 워싱턴 광장에 운집한 25만 참가자들과 수백만 텔레비전 시청자들 앞에서 34살 때 행한 연설이었다. 마르틴 루터 킹의 열정과 신념, 호소력 넘치는 언변과 화려한 수사, 그의 예언자적 면모에 힘입어 미국 민권운동은 비로소 그 절정까지 치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68년 4월 4일 투쟁을 펼치던 멤피스 시 로레인 모텔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서른아홉의 나이로 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29년 1월 15일 생으로써 15세 때에 대학을 입학하였고, 22세에 신학대학원을 마쳤으며, 25세에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의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 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26세 때인 1955년에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1일 로자 파크스 흑인 부인(당시 42살)이 버스 안에서 흑인은 뒤쪽으로 가야한다는 흑백분리법규에도 불구하고 백인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체포되자, 마르틴 루터 킹은 파크스 부인의 공판날짜인 12월 5일부터 버스승차거부를 전개하자는 성명서를 내고 수많은 위협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381일간 승차거부를 진행시켜 관련 시조례가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냈다. 이 와중에 자택이 괴한에 폭파 당했고,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후부터 1968년 암살당하기까지 13년 동안 민권운동기구인 남부 그리스도교지도자회의 의장으로서 수없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좌절과 또 언젠가는 암살당하고 말 것이라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흑인들과 무산계급인 백인들의 아픔과 고통의 십자가를 영웅적으로 짊어지고 가시밭길 그 험한 투쟁의 길을 걸었고,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과 미래의 희망과 비폭력의 힘으로 흑인대중을 이끌어 평등과 자유의 나라 가나안 땅에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모세처럼 그가 꿈꿨던 가나안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가 죽고 18년이 지난 1986년에 미 의회의 결정에 따라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킹 목사의 탄생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밀어붙이는 힘(pushing power)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짧은 생애 부분 중에 갈릴리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에로 향하는 여정을 주요내용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누가는 복음서 9장 51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글을 적고 있다. 여기서 “승천하실 기약”이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다. 누가는 19장 44절까지 통틀어 10장, 전체 내용의 42퍼센트를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에로의 여행에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순례의 목적지, 또는 어떤 목표지점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하는 예수님이 도달해야할 정점은 골고다였다. 그러다보니까 공관복음서 모두가 예루살렘에로의 여행과정에서 예수님이 겪는 죽음에 대한 번민과 짊어져야할 십자가의 과중한 심적 무게를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 곧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때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 14:34)라고 하실 만큼 번민이 가득하셨다. 그리고 여러 차례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이 잔칫집에 즉 세속적인 성공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기지 못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 역시 제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고린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올 때,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따라붙고 있음을 여러 채널들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그렇지만 바울도 예수님처럼 죽음이 매복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에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생애와 사도행전에 실린 바울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박해자들의 탄압이 그들을 죽음에로 몰아붙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해자들의 탄압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푸싱파워’(pushing power)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박해자들의 탄압이 예수님을 여지없이 골고다로 몰아붙여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함으로써 그들을 죄에서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처럼, 또 초대교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탄압으로 흩어지게 하시고, 탄압으로 바울을 도시에서 도시에로 계속해서 도망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시고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게 하시어 복음이 땅 끝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푸싱파워’ 즉 박해와 탄압이 죽음의 사자처럼 예수님과 바울의 삶에 따라붙었고, 그로 인해서 비록 그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짓눌렸지만,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게 하시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마르틴 루터 킹도 탄압으로 인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번민에 시달렸고, 여러 번 동지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지만, 오히려 자기를 죽음에로 몰아붙이는 그 힘을 민권운동에 역이용하여 여러 번 목적을 달성하였다. 마르틴 루터 킹에게 있어서 백인들의 탄압은 불더미에 기름을 끼얹듯 그의 민권운동에 불을 더 크게 키웠다. 그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그를 탄압하는 이 푸싱파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간디에게도 만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을 불살라 억울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큰 뜻을 이뤘다.

마르틴 루터 킹의 신앙과 사상

마르틴 루터 킹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뒤 독기 서린 전화 세례와 자신을 살해하려는 흉계가 모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에 빠져 밤이 맞도록 식탁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여기 이 낮은 데서 옳은 일을 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여, 비틀대며 머뭇거리는 중입니다. 용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제 모습을 보게끔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저 혼자서는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르틴 루터, 공의를 위해 일어서라. 정의를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그리하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하겠다.” 그 후로 마르틴 루터 킹은 10여년 세월의 죽음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당당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 킹은 비폭력 사랑의 힘으로 백인들을 끝내 이기게 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경찰들이 풀러놓은 사나운 개들과 곤봉세례와 소방호스에 또는 백인 자위대의 야구 방망이와 쇠사슬세례에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찢기고 터지고 부러지고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와중에서도 마르틴 루터 킹은 끝까지 비폭력의 힘을 믿으며 다음과 같이 역설(力說)하였다.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증오의 세력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부에 사는 모든 백인 형제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견뎌내는 힘으로 고통을 가하는 당신들의 힘과 겨룰 것이라고.... 우리 집 안에 폭탄을 던지십시오.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당신들 가슴과 양심에 호소합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우리는 당신들을 끝내 이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였다. “승리를 거두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너무나 큰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승리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또 “저는 (죽는) 그날이 오면 마르틴 루터 킹은 자신의 인생을 남을 돕는 데 바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마르틴 루터 킹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일생 동안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일생 동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역시 간디나 본회퍼나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편하게 살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엘리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위해 제 몸을 불사르게 내주었던 그의 생애는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숭고한 열정을 가진 한 인간의 힘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7. 도로시 데이(눅 10:25-37)

자발적 가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특징은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되레 고통당하는 자를 돕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고, 그렇게 살기가 쉽지도 않고,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것을 축복이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라 생각하는 ‘가난’이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빈(貧)은 저주요, 부(富)는 축복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렇게 배워왔으며, 부(富)를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과 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왜 그들은 부(富)를 말하지 않고 가난을 말하는가? 가난이 축복이 아니련만, 왜 그들은 가난을 주장하는가?

알로이스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해방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영성은 가난한 사람이 되겠다는 신념과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겠다는 신념이라고 하였다. 진정한 영성은 가난해지려는 싸움과 가난한 자를 위한 싸움이라고 하였다. 첫 번째 싸움은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려는 자신과의 싸움이고, 두 번째 싸움은 가난을 강요하는 자들과의 싸움이다. ‘종교사회주의’를 지향한 피어리스는 “가난은 가난으로 치유된다”고 말한 보프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발적인 가난이야말로 기독교의 아가폐적 영성이라고 믿었다.

가난이 복이란 신념을 갖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진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 수도자였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서 물려받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수도회를 만들어 청빈의 가치를 실천하였다.

아미쉬 그리스도인들은 자동차, 전기, 전화기, TV, 라디오, 컴퓨터, 핸드폰 등을 일절 금하며, 마차를 타고, 말과 쟁기로 밭을 갈며, 패물착용을 금하고, 검정색이나 회색으로 소박한 옷차림을 한다. 또 외부의 공격과 폭력에 보복하지 않으며, 법적소송을 금한다. 아미쉬 그리스도인들은 “Jesus first, Others next, Yourself last” 곧 예수님을 가장 먼저, 상대방을 그 다음, 자기 자신을 맨 마지막에 놓기를 힘쓴다. 그것이 JOY 곧 기쁨이라고 믿는다.

개신교의 한경직 목사,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춘선 목사와 강순명 목사도 같은 부류에 속한 분들이었다. 최춘선 목사는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을 위해서 다 쓰고 나서 맨발로 30년이 넘도록 거리의 전도자로 살았다. 강순명 목사는 광주에서 병들고 버려진 노인들을 돌봤다. 외국인들로서는 간디, 톨스토이, 도로시 데이, 테레사와 같은 분들이 자발적 가난에 속한 분들이었다. E. F.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은 창조적 가난이고, 자유를 얻기 위한 성스러운 가난이다. 가난에 대한 공포는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최악의 도덕적 질병이다. 버리면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많은데도 쥔 것을 놓지 않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자발적 가난은 빈곤이 아니라 나눔이며,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려는 신념이다. 자발적 가난은 돈에 얽매이지 않고, 돈을 탕진하지 않으며, 돈에 휘둘리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신앙의 발견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년)는 자발적 가난과 비폭력을 실천한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통해서 배고픔과 서러움에 지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에 헌신한 성녀였다.

도로시 데이는 1897년에 태어나 17살에(1914년) 대학에 들어가 사회당에 가입하였고, 20살 때부터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사들에서 기자로 활동하였다. 27살에(1924년) 자전적 소설 <열한 번째 처녀>를 써서 영화 판권으로 해변에 작은 집을 마련하였는데, 그 집에서 29살 때 무신론자며 무정부주의자였던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 딸을 낳았다. 이 무렵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재발견하면서 딸에게는 영아세례를 받게 하였다. “나는 대가를 얼마나 치르든 내 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할 생각이었다. 나는 비록 신앙을 의심하고 망설이며 규율도 없고 도덕관념도 없이 여러 해를 버둥거렸지만, 내 딸은 절대 나처럼 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인 것 같았다.”고 당시의 일을 회고했다. 곧이어 자기 자신도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무치게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을 각오한 다음에 또 그토록 달고 부드러운 인간의 사랑을 포기한 다음에 이뤄진 일이었다. 헤어지거나 딸과 함께 홀로 남겨지기가 정말 싫었지만, 또 그가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죽을 것처럼 가슴이 아팠지만,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로 덧입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감미로운 율동이 충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받고 있는 고문을 영원히 끝내야 한다는 내 결심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가출하여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여자가 자연보다는 초자연,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열중하는 것에 대해서 몹시 화를 냈던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신(神)을 인정한 이상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노선의 급진운동과도 결별해야 했다. 그녀는 여전히 가톨릭이 사유재산과 부와 국가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여타의 모든 반동세력과 한편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이상 급진운동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32살 때인 1929년에 미국에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932년 12월 대공황의 절정기에 일어난 ‘굶주림의 행진’을 취재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가 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야만적인 취급과 그들을 그토록 힘들게 만든 현실 상황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분노했지만,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가톨릭 교인이 되었으므로 그들과 함께 시위에 가담할 수 없다는 씁쓸한 생각을 하면서, 취재 직후에 한 성당에 들어가 눈물과 고통으로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보잘것없는 재주오나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고,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뉴욕에 돌아오자마자 평생 영적 스승이자 동지가 될 피터 모린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시작하였다. <가톨릭 노동자> 신문을 발행하였고,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환대의 집’을 열었으며, 농촌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지금도 미국에는 120여 개의 가톨릭 노동자 공동체가 존재하며, 해마다 많은 환대의 집들이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오랜 외로움

가톨릭 노동자 소유의 환대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무료로 따뜻한 점심을 먹고 가는 곳이었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은 환대의 집에서 부랑자들과 똑같이 먹고 잤다.

도로시 데이는 55세 때인 1952년에 <오랜 외로움>(The Long Loneliness, 우리말 제목은 ‘고백’)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 책의 제목을 ‘오랜 외로움’이라 정한 것은 우리 인간들이 숙명적으로 겪는 고통을 표현한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이 외로움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뿐이고, 함께 살고, 함께 일하며, 함께 나누는 공동체밖에 없다고 믿었다. 도로시 데이는 자서전 <오랜 외로움>의 후기에서 친히 체험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거기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사람들이 줄지어 서기 시작했고,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서 배를 채울지어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능력이 없었다. 작은 빵 여섯에 물고기 몇이라도 있으면 그들과 나누어야 했다. 언제나 빵이 있었다. 우리가 거기 앉아 이야기하는 동안 사람들이 거처를 찾아 우리에게 왔다. 살겠다면 살게 하자. 더러는 떠나갔고 그 자리를 더 많은 이들이 채웠다. 어떻게든 방은 넓어졌다.

도로시 데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모든 가정은 그리스도를 위한 방을 가져야 한다. 당신의 옷장에 걸려 있는 외투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만일 이웃이 굶주리면 즉시 먹여야 한다. 국가기관이나 자선기관으로 달려가면 안 된다. 당신 자신이 즉각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년에 그녀를 방문한 하버드대의 학생들이 “어떠한 일과 관련해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그들에게 맛있는 커피와 수프를 대접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답하였다. “하루하루 그들을 알아가는 일이 즐거웠지요. 그들은 훌륭한 선생이었답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알게 됩니다. 그들이 겪어 온 고통을 들어 보면, 다음 한 주를 더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여기 와서 커피와 수프나 훌쩍이는 처지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진정 놀랍도록 훌륭했지요. 내가 그들의 존경을 얻을 만한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그녀는 정말 저 책들을 사랑했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디킨스나 톨스토이, 오웰이나 실로네를 읽으라고 말하지요. 내 비록 이러한 소설들을 뛰어나게 분석하지는 못해도 여러분의 선생이 되려고 하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되기보다는 이 소설들이 말하는 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의미입니다.... 나 죽을 때 사람들이 내가 한 노력을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그분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 살고자 애썼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삶을 어떻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에 일생을 예수님을 생각했던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소설과 무엇보다 성경책에서 또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치유자요 방랑설교자였던 예수님에게서 찾았다고 한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했던 도로시 데이의 삶이 지나치게 평범하기만 한 우리의 삶에 자극제가 되었으면 한다.

8. 마더 테레사(요 19:28, 마 25:31-46)

테레사의 소명체험

테레사는 191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 수도인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가톨릭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다. 12살 때(1922년) 고향에서 처음으로 인도에서 활동하는 크로아티아 예수회 선교사들의 설교를 듣고 자기도 인도에서 선교를 하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18살(1928년)에 인도 선교를 위해 더블린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했고, 그 다음해부터 인도 북부 다르질링에서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테레사는 해발 2천 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이곳 다르질링에서 수련 수녀로서 인도생활법과 벵골어와 힌두어를 배웠다. 그리고 27살(1937년)에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했다. 그리고 36살 때인 1946년 9월 10일 매해 받는 교육을 위해 기차를 타고 다르질링으로 가는 도중에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한 상황에 처한 빈자들을 미어질 듯 가득 실은 기차 안에서 그녀는 아주 분명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내가 목마르다”(I thirst). 테레사는 이 주님의 말씀, “목마르다”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뭇 영혼들 즉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갈망하신 것으로 가슴 속 깊이 인식하였다. 이 체험 후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모시겠다고 결심하였다.

38살 때인 1948년 4월 2일 테레사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회 수녀로서 살아도 좋다는 교황 비오 12세의 허락을 받고 콜카타 길거리에서 아이들에게,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노숙자와 병자와 쇠약한 자와 장애인과 기형아들에게 다가갔다. 콜카타의 도시환경이 어느 정도 나쁜가하면, 아침에 새 셔츠를 입고 신문을 사려고 잠깐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면 셔츠의 옷깃이 새까매질 정도로 공기가 더럽다고 한다. 더위, 습기, 먼지, 자동차 매연 그리고 수많은 쓰레기 더미들이 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끔찍할 정도라고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봉사하는 수녀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숙제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씻기고 청소하는 것이며, 집에 돌아오면 곧장 입었던 옷을 벗어서 빠는 것이라고 한다.

테레사가 1997년 9월 5일 콜카타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극빈자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5개 지회에 592개의 분원들로 이루어진 사랑의 선교회를 남겼다. 지금은 이 분원들이 750개로 불어났고, 수녀들도 5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테레사는 생의 후반기 35년 동안 평균 삼일에 한 번꼴로 분원이나 국가나 심지어 대륙을 옮겨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2003년 10월 19일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으로 시복을 받았다.

테레사는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서 수많은 상을 받았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삶이 끝날 때 얼마나 학위를 받았는지,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혹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지에 따라 평가되지 않는다. 삶이 끝날 때 우리는 다음에 의해서 평가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는가?’”

내가 목마르다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모시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이었다. 그녀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또는 현현(계시)으로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극빈자들에게서 또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테레사의 확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행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께 행하는 것이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그들 속에 계신 예수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빵이나 치료보다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끔찍한 가난은 고독이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가장 심각한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나 에이즈가 아니라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느낌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빵에 대한 허기보다 사랑과 가치 평가에 대한 허기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돈이나 빵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저들의 이 깊은 사랑에 대한 갈망을 달래 줄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거기에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는 천국이 어떨지 확실히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심판을 받을 시간이 되면,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얼마나 많이 좋은 일을 했는지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번은 수행 신부에게 왜 양로원의 사람들이 입구 곁에 앉아서 모두 문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커다란 허기, 곧 사랑에의 허기를 느끼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비록 양로원이 물질적으로는 모두 갖춰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자녀들에게 잊혀진, 자녀들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의 가족들안에도 이런 가난, 이런 허기를 느끼는 분들이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라고 했다.

테레사의 좌우명은 ‘행동하는 사랑’(love in action)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테레사는 말했다. 또 “그대가 하는 일을 나는 하지 못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그대는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라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커다란 일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커다란 사랑으로 하기를 기대 하신다.”라고도 했다. 또 “하나님은 가난을 만들지 않았어요. 우리가 서로 나누지 않아서 가난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테레사는 극단적 빈곤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을 예수님에게 합치하고자 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아가기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완전히 신뢰하기로 결심했고 또 그대로 실천했다. 가난이 무엇인지, 가난한 사람들의 허기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녀가 일생동안 실천한 행동하는 사랑이었다.

테레사의 신앙과 삶

테레사는 수녀원 규칙대로 생활했다. 미사와 아침 기도 후에 청소를 했다. 우선 사리를 빨고, 다음에는 화장실과 바닥을 닦았다. 매일 그렇듯이 그녀는 모범을 보이며 함께 일했다. 대개의 경우 화장실 청소를 맡았다. “제가 이 분야는 전문가지요. 아마도 화장실 청소는 세계 최고일 거예요.”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한 수녀가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방문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여행에 테레사를 수행했다. 그녀는 이상한 관찰을 했다. 테레사가 처음에는 비행기 앞쪽의 비즈니스 클래스의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오른쪽 화장실을, 그 다음에는 왼쪽 화장실을 이용했다. 그 다음에는 비행기 뒤쪽에 있는 다른 화장실들로 갔다. 이 수녀는 테레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화장실을 이곳저곳으로 다니십니까?” 테레사는 “액막이하는 거예요!”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테레사는 비행기 안의 화장실을 모두 청소했던 것이다. 마치 화장실 청소가 혹시 생길지모를 오만의 싹을 미리 꺾는 처치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고 했다.

테레사를 비롯해서 그녀의 수녀들은, 첫째 사랑하는 신뢰, 둘째 온전한 순종, 셋째 쾌활함을 신조로 삼았다. 주님이 무엇을 주시더라도 받아들이고, 주님이 무엇을 가져가시더라도 드리고, 이 두 경우에 있어 늘 활짝 웃으면서 행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그분의 사용하심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뜻한다. 무엇을 위해서건, 어떤 방식이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이 미리 상의하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며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성공하도록 사명을 내리시지 않고, 충성하도록 사명을 내렸다고 말한다.

테레사는 매일 아침마다 영성체(성찬)를 했다. 영성체 후에 즉 미사가 끝난 후에 모든 분원의 수녀들은 공동기도를 드리는데, 테레사는 뉴먼 추기경의 기도를 좋아했다고 한다.

좋으신 주님, 저희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 영혼을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저희의 전 존재를 온전히 소유하시고, 저희의 전 존재에 온전히 스며드시어, 저희의 삶이 당신 삶을 순수하게 비추게 하소서. 저희를 통해 빛나시고 저희 안에 머무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저희 영혼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소서. 저희를 보는 사람이 저희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을 보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저희의 모습을 통해서 열매 맺는 힘을 통해서, 우리 지성을 끌어당기는 힘을 통해서, 저희 가슴에 가득하게 살아 있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아멘.

테레사는 하나님 없이 그들을 돕기에는 너무나 가난하지만, 기도할 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테레사는 “침묵의 열매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라고 했다. 우리의 열매는 어디까지인가? 침묵의 열매까지인가, 기도의 열매까지인가, 믿음의 열매까지인가, 아니 더 나아가 사랑의 열매까지인가, 봉사의 열매까지인가? 과연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펼쳐 보이는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도록 하자. 그리하여 그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

나가는 말

예수님, 마하트마 간디, 정약용, 레오 톨스토이, 디트리히 본회퍼,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도로시 데이, 마더 테레사는 모두 편하게 살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엘리트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위해 제 몸을 불사르게 내주었던 그들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인 삶을 추종했던 그들의 삶은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숭고한 열정을 가진 인간들의 힘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