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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2-08 20:08
정의란 무엇인가?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806  
   http://kccs.info/justicems.htm [898]

정의란 무엇인가?

조동호 목사

아래의 세 편의 글은 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Public Philosophy: Essays on Morality in Politics)와 <정의는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s to Do?)를 읽고, 그 내용을 기독교 사상에 비춰서 세 편의 설교문으로 작성한 글이다.

1. 도덕적 가치기준(미 6:6-16)

영혼의 무게

현대인들은 집안에 체중계를 놓고 거의 매일 체중을 달아본다. 체중을 관리하여 적정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중이 불어나는 것을 걱정한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팔린다. 우리가 매일 빠뜨리지 않고 재고 있는 이 체중은 그러나 죽으면 흙 속에서 썩고 말 육신의 무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않고 살아남게 될 영혼의 무게에 대해서는 정작 소홀히 한다. 우리가 썩어 없어질 육신의 무게를 재는 것은 너무 많이 먹어서 영양과다로 체중이 오르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우리가 너무 먹지 않아서 체중이 한참 미달되고 영양실조에 걸려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영적 건강상태를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천칭저울을 손에 든 여인>이란 제목의 명화가 있다. 이것은 1662-63년에 네덜란드인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그린 유화이다. 이 그림을 보면, 부드러운 빛이 왼쪽 창을 통해 여인의 얼굴과 앞면을 비추는데 그 얼굴이 경건하고 자애롭다. 탁자 위에는 보석함이 열려있고, 보석류들이 흐트러져 있다. 여인의 손에는 작은 천칭저울이 들려 있는데, 마치 보석의 무게를 달아보려는 듯이 저울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여인의 배는 만삭이 된 듯이 불러 있고, 여인의 오른쪽 벽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린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다. 최후의 심판을 그린 이 그림은 미켈란젤로나 아드리엔 콜레르트가 그린 <최후의 심판>과 동일하게 상중하 삼면, 즉 천국과 지상과 지옥으로 나뉘어져 있고, 중앙에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왜 베르메르는 천칭저울을 손에 든 여인 옆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그림을 삽입하였을까? 가톨릭에서는 미카엘 천사장이 최후의 심판의 날뿐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지, 혹은 지옥으로 보낼지를 저울에 달아 결정한다고 믿고 있다. 베르메르의 <천칭저울을 손에 든 여인>에서 여인의 저울이 바로 미카엘 천사장의 저울과 같은 것은 그녀의 저울에 아무것도 올려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은 미카엘은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뭇 영혼들을 저울에 달아보지만, 이제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이 저울에 달아봐야할 차례란 것이다. 그녀의 저울이 비어있는 것은 그녀가 지금 자신의 영혼을 달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탁자 위에 널려 있는 보석들은 영혼의 무게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질없는 것들이므로 저울에 오르지 않는다. 저울에 올라 무게를 내는 것은 경건한 생활로 살찌운 영혼이다. 그리고 그 몸에는 이미 생명이 잉태되고 있다. 영원한 새 생명을 위해서 지금 이 여인이 제일 시급하게 해야 될 일은 자신의 영혼을 저울에 달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속세의 물욕에만 눈을 돌리지 말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오르게 될 날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체중감량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저 하늘에서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체중을 늘리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도덕적 가치

도덕적 가치란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 즉 정직, 용기, 선, 의, 덕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우리 국민은 정의(옳음), 선(좋음), 정직, 미덕과 같은 것들에 과연 얼마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까? 지난 대선 때 우리 국민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표를 던져 대통령으로 뽑은 가치기준은 무엇이었는가? 경제였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사람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그 어떤 다른 것보다 돈과 재물 즉 부유하게 사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우리 기독교인들조차 돈과 재물 즉 부유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비해서 미국 국민들은 지난 2004년 대선 때 다른 어떤 현안보다도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투표권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테러리즘이나 이라크 전쟁, 경제 등과 같은 주요 현안을 제치고 도덕적 가치가 표심을 좌우했다고 한다. 조지 W. 부시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의 80퍼센트가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국민과 미국 국민의 의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근자에 한국의 대형교회들에서 여러 가지 불미스런 사건들이 여러 건 있었다. 폭행사건, 고소고발사건, 헌금 유용사건, 성추행사건 등 많은 사건들이 사회에 노출되고 있어서 기독교가 존경의 대상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모두가 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가치의 붕괴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도덕적 가치를 재고해야할 때이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Public Philosophy)를 보면, 미국 국민은 개인의 자유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공정성과 공공선이란 도덕적 가치 즉 공정한 사회와 공동체의식을 중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도덕이나 정의와 관련된 이야기는 애써 피하고 정책과 정부 프로그램에만 매달렸던 민주당이 대선에 번번이 패배했다고 분석한다. 그나마 민주당에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정직과 도덕성을 회복시키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고,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정치의 종교적 정신적 중요성에 대한 예리하고도 본능적인 포용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도덕적 가치 또는 사람의 가치가 정보화지식산업사회의 새로운 경쟁력이자 최후의 경쟁력이라고 하였다. 판매망의 예를 들면서 “단순히 친절하고 가격이 우월하다는 것으로 판매망이 유지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자기 양심을 파는 것이다. 물건을 주고받고 대가를 지불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그 인간의 양심을 사는 것이다. 양심을 판다는 의미는 이제 양심적이지 않으면 물건도 팔 수 없다는 그런 의미이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물건을 얹어서 파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관계가 곧바로 판매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용교환과 생활연관의 시스템, 그것이 미래적 마케팅 시스템일 것이며 커뮤니케이션 마케팅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커뮤니케이션 마케팅의 궁극적 지점은, soul marketing-영혼마케팅으로 전이 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미래사회 특히 선진사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덕성이 얼마나 고가의 가치를 지니는가를 우리 모두가 인식할 때이다.

기독교적 가치기준

세상이 아무리 선진화되고,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게 된다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적 가치 또는 기독교적 가치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분별하지 못하면 세속적 가치에 휘말리게 된다. 민주사회일수록 정부는 충돌하는 가치에 대해 중립원칙을 지키게 되고, 상반된 의견을 가진 진보보수 좌파우파 사이에는 가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세속주의자들은 생명을 인간이 만든 창조물로 여기면서 인간의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삶을 살거나 죽음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그 생명을 가진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낙태나 자살이 개인의 선택사항 즉 개인의 권리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은 의무감을 갖고 그 생명을 기키는 청지기라고 믿는다. 또 인간은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신성한 선물이므로 함부로 낙태를 하거나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지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속주의자들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사생활보호권, 자율권, 자기결정권 등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런 요구 속에는 동성혼과 안락사도 포함된다.

현대사회에서 도덕적 가치나 윤리의식은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의술 등 모든 분야가 도덕적 가치의 기반에서 출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우리나라도 제반 분야에 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활동하게 하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해야할 것은 도덕적 가치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준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치수를 속인 잣대나 용량을 속인 됫박과 같아서 한번 기준치수가 잘못되면 언제나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로 옳음과 좋음을 말하고 윤리와 도덕을 말한다할지라도 바른 기준을 갖지 못하면 기만하고 기만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적 가치기준 또는 기독교적 가치기준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부가 평등하게 다시 분배된다할지라도 거래가 시작되는 동시에 평등은 끝난다는 말이 있다. 운 좋게 혹은 환경적인 영향에 의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거래를 잘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능력과 욕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평등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철학자 왈저는 복지는 궁핍한 사람에게, 명예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정치적인 힘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에게, 직책은 적임자에게, 사치품은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신의 은총은 독실한 신자에게 돌아가야 공정한 분배라고 주장하였다. 정치철학자 롤스는 타고났거나 물려받은 재능은 운이 좋았을 뿐이지 자신의 공이 될 수 없으므로, 개인의 노력부분은 인정한다할지라도, 운동선수, 기업가, 주식중개인, 학자, 전문가 등에게 부여하는 포상과 명예를 우수한 미덕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전관예우를 받아 월 1억 원의 월급을 받았던 사람이 감사원장에 임명되거나 대기업의 회장직과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을 그의 자녀가 낙하산승계하는 것이 부도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옳고 좋음의 판단기준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록 해석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언제나 성경에 둬야 한다는 점이다.

2. 기준(규범)의 중요성(롬 7:1-25)

관점의 차이

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를 보면,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362쪽)고 하였다. 그의 이 말은 가치관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관이란 값을 매기는 관점을 말한다. 그런데 이 값을 매기는 관점이란 것이 일정치 않아서 마치 색안경과 같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색깔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관점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기준이 달라서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기준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예 기준이 없기도 하다. 기준이 있으면 객관성이 높아지고, 기준이 없으면 주관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그 기준이란 것이 종류가 다양해서 과연 무엇이 믿고 따를만한 것인가를 알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아무튼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 관점을 갖고 있고, 그것에 따라서 가치에 대한 판단을 다르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기 다른 기준을 하나로 통일시킬 방법은 없을까? 통일된 기준, 통일된 관점, 통일된 가치관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통일성에 관심을 갖는가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다양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각기 다른 기준, 다른 관점, 다른 가치관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중립적인 사람들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다양성은 인정하되 그 속에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전부터 토라(율법)를 기준으로 삼고 있어서 아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민족적 통일성과 연대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과 모슬렘교인들도 유대인들처럼 규범적인 경전을 갖고 있다. 경전은 규범적인 판단기준을 제공한다. 경전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판단의 엄격한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인끼리는 상당한 통일성을 갖는다. 그러나 경전들 사이에도 질적 차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공공선, 공동체의 행복, 사람들의 미덕에 끼치는 영향이 어떤가에 따라서 그 가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밖에도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주의나 주장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들이 있다. 절대주의, 공리주의, 실용주의, 자유지상주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경전은 규범을 제공함으로 경전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절대주의가 되지만, 공리주의, 실용주의, 자유지상주의 등은 사실상 규범이 없으므로 유용성(principle of utility)이나 실용성과 같은 결과가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믿음의 내용(교리)으로 삼는다. 여기서 믿음의 내용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의 신념이고 관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소유권이 창조주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 몸의 결정권조차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삶, 나의 노동, 나의 가족, 나의 소유, 이 모든 것이 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나의 것이 아니며, 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 즉 성경적 가치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낙태, 자살, 안락사 등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공리주의

세속주의 가운데 한 가지가 공리주의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자연신론의 영향아래 제러미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여기서 최대 행복은 가치나 질에 상관없이 쾌락의 크기를 말한다. 이 쾌락의 크기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쾌락이 크면 선이고, 고통이 크면 악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에는 보편적인 기준(규범)이 없다. 동기나 수단에 상관없이 결과가 기준이다. 결과란 쾌락(행복)을 극대화시키고 고통을 극소화시킬 수 있는 유용성(실용성)을 말한다. 추가될 것이 있다면, 쾌락의 지속성, 강렬성, 확장성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의 양을 키우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성경적 가치, 개인의 권리와 인권 혹은 존엄성이 무시된다는 약점이 있다. 예를 들면, 담배회사인 필립 모리스는 체코정부가 흡연에 따른 의료비 증가를 우려해 담배에 부과하는 세금을 높이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 흡연이 체코의 국가 예산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비용과 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에 매달렸다. 그 결과 흡연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는 정부의 의료비 예산을 높이지만, 상대적으로 일찍 죽기 때문에 노년층을 위한 의료 연금 주거 부분에서 막대한 예산이 절감됨으로 흡연이 오히려 국가에 막대한 이익을 준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또 포드 자동차가 1970년대에 ‘핀토’라는 소형차를 만들어 대량 판매하였는데, 추돌사고 때 연료탱크가 쉽게 폭발하는 결함이 있었다. 실제로 500여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화상을 입었다. 그런데 회사는 이미 이 결함을 알고 있었고, 안전장치를 새로 부착하는데 대당 11달러가 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이를 방치했다. 차량 폭발로 입게 되는 인명과 재산의 손실가치보다 팔려나간 전체 ‘핀토’에 안전장치를 부착하는 비용이 훨씬 더 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기업이윤의 창출수단(도구 혹은 기계)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유용성(결과)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처럼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도덕성의 문제까지 야기한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 성경적 가치가 배제된다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가 무시되는 실용성, 즉 도덕적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란 기준으로 저울질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례이다.

천재로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양적 공리에 반대하여 질적 공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론>에서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하며,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공동체의식이란 미덕, 즉 국가나 이웃에 대한 의무에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야기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이 타인의 행복, 즉 공동체를 위한 행복의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오직 내게만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식이다. 내가 자살을 하든, 낙태를 하든, 마약을 하든, 매춘을 하든, 동성애를 하든, 콩팥을 떼어 팔든, 대리모를 사든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다. 내 몸의 결정권은 내가 가졌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낙오자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능력위주의 자유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거의 모든 수단을 배제하는 권한축소지향 정부, 합의에 의한 것이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마저 상관없다는 무서운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자율과 타율

임마누엘 칸트는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은 철학자였다. 칸트가 사용한 용어에는 이성, 자유, 목적, 동기, 자율, 타율 등이 있다.

칸트는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고 하였고, 오늘날의 인권개념에 막강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만일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면 그 자체로써 목적이어야지,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인간을 존중하면 인권이 신장되지만, 인권신장 때문에 인간을 존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존중받지 못하고 인권신장의 도구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리주의는 인권신장이란 공리(결과)가 커지기 때문에 인간이 도구가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본다. 그러나 칸트는 동시대 사람인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공리(결과)를 따지는 것은 지나치게 계산적이기 때문에 동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동기가 불순한 공리성(유용성)은 옳고 그름의 기준(규범)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또 만일 인권신장이 인간이 얻고자하는 욕구라면, 인권신장을 위해서 인간을 존중하는 행위는 타율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된다.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인 이성적 존재가 순수한 본래적 목적이 아닌 타의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인간은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성령의 법을 자율로 율법을 타율로 보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면, 우리는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 5-6절을 보면, 우리를 얽매였던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타율)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자율)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타율)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하였다. 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자율)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타율)이 내 마음의 법(자율)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타율)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자율)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타율)을 섬기노라”(21-25절)고 하였다. 여기서 “영의 새로운 것,” “하나님의 법,” “내 마음의 법”은, 칸트의 의견을 빌리자면, 순수 실천이성에 지배를 받아 본래적 목적을 따르는 자율이고, “죄의 정욕,” “율법조문의 묵은 것,” “한 다른 법,” “죄의 법”은, 칸트의 의견을 빌리자면, 본능이 갖는 죄의 성질에 지배되는 타율이다.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은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여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으려 하기 때문에 동기가 순수하지만, 율법을 따르는 것은 아직 받지 못한 것을 받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적이고 계산적이므로 동기가 불순하다. 동기가 순수한 것이 자율적인 것이고, 동기가 불순한 것이 타율적이다.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본래적 신앙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하나님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이웃을 섬김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질에 따라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믿음으로 회복한 영적 본래성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래성마저 상실하게 된다. 결국 자유를 잃고 공허한 성공주의의 속박에 묶여 살게 되는 것이다.

3. 정의란 무엇인가(눅 10:25-37)

정의

15세기 말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 ‘정의의 여신’(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디케)은 천으로 눈이 가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 손은 칼을 치켜들고 있고, 왼손은 천칭저울을 들고 있다. 그리고 여신의 뒤에서 광대차림을 한 사람이 여신이 보지 못하도록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본래 이 그림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소송을 일삼고 사법 기관의 업무를 마비시키는 브로커들을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법기관의 공평성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것은 사법기관이 공정성을 져버린, 즉 정의를 멀리한 부패의 상징일 수도 있고, 정의실현을 위해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공평무사한 태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른 손의 칼과 왼손의 천칭저울은 모두가 법의 심판을 상징한다.

정의에는 보복정의와 분배정의가 있다. 보복정의 가운데는 구약성경에도 나오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란 것이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출 21:23-25)갚는다는 이 법은 피해자의 손해와 동일한 손해를 가해자에게 입힌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아직도 이 법이 종종 시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기독교신앙의 등장으로 그 힘을 잃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막의 계율이 사랑의 법으로 바꿨다.

최근의 관심사인 복지는 분배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능력위주의 자유경쟁사회에서는 빈부격차가 큰 문제이다. 미국의 경우, 상위 1퍼센트의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소유하는데 이는 하위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그리고 상위 10퍼센트 가정이 미국 전체 소득의 42퍼센트, 전체 부의 71퍼센트를 소유한다고 한다.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부자세의 신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부자세는 일과 투자의욕을 꺾게 되어 생산성이 감소되고 경제이익이 줄며, 그로 인해 재분배의 양도 줄어든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부자세를 반대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규제에 반대하는데, 그 명분이 경제의 효율성에 있지 않고, 인간의 자유 즉 기본권과 소유권에 있다. 또 일부 공리주의자들은 부의 재분배 즉 부자세가 소수의 가진 자들의 행복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대신, 부자세로 인해서 얻게 되는 가난한 자들의 행복은 상대적으로 훨씬 커진다고 본다.

부자세 논쟁은 마이클 조던이나 빌 게이츠, 삼성의 이건희나 현대의 정몽구와 같은 부자들의 성공이 자신의 것이냐, 아니면 사회 공동체의 것이냐는 데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소유권이 그들 개인에게 있으므로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 평등을 옹호하는 전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 존 롤스는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발 더 전진해서 성경은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개인주의(정)와 공동체주의(반)의 변증법적 합이 복지의 관건이다.

차등원칙

인간사회가 계약 공동체란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대인(對人)관계뿐 아니라, 신인(神人)관계에서조차 계약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인간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의 경우, 부부가 결혼서약으로 시작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보다 큰 조직인 교회의 경우도 침례서약으로 이뤄진다. 이보다 훨씬 큰 이스라엘 역시 토라(율법)를 내용으로 하는 시내산 서약을 통해서 맺어진 공동체란 것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토라를 언약법, 계약법, 증거법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 법이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규범, 잣대, 원칙, 기준이 되고 있다. 비단 이스라엘뿐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국가들은 헌법을 비롯해서 각종 민법, 상법 등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17세기에 존 로크는 시민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위해서 사회계약에 따른 국가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법은 국민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법이다. 18세기에 임마누엘 칸트는 사회계약의 대안으로 가언적(조건적, 가설적) 합의를, 20세기에 존 롤스는 협상에서 어느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 즉 원초적 평등의 위치에서 이뤄지는 가언적(조건적, 가설적) 합의를 사회계약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롤스는 합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계약 그 자체가 도덕적이다, 공정하다, 혹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수행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친 거래는 상호이익과는 거리가 멀어서 자발적인 거래라고 할지라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애초에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출발하더라도 출발과 동시에 이내 그 평등은 깨진다는 것이 롤스의 주장이다. 능력의 차이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더라도 출발선이 다르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가족의 도움을 받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 막대한 밑천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유리하다. 그래서 롤스는 차등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차등원칙이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부요한 가정에서 자란 학생과 동일한 기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층이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능력위주의 사회에서는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부의 분배가 결정되기 때문에 불평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차등원칙을 통해서 줄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롤스의 차등원칙은 공산주의처럼 평등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재능과 소질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이익을 공동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을 공동자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을 활용해 생긴 이익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익을 혼자서 누리게 해서는 안 되며,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재능과 자격은 다르다.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그럴만한 자격이 있거나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할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람의 행운이 사회구조의 조정을 통해서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쓰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이론이 국가정책에 반영되면, 복지정책이 세워지게 된다.

공동선의 추구

기독교의 박애정신은 자율적이고 자발적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행한 것이 곧 하나님께 행한 바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께 행하는 것과 사람에게 행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잊고 지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4:20)는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박애정신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강제성이 없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박애정신에만 의존해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시킬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조세정책과 복지정책이 필요하다. 존 롤스의 차등원칙은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정책, 즉 소외계층에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우대정책과 복지정책을 펼쳐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의롭고 선하다는 철학적 윤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존 롤스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자격이 있다거나 애초부터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샌델도 성공을 우리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줄어든다.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믿음은 단순한 오해이며, 버려야 할 그릇된 통념이라고 말한다.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은 부와 건강과 명예와 권세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고, 가난과 질병을 죄 때문으로 여겼다. 따라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요, 가난과 질병은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정 반대였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들이 누리는 행운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셨다(마 23:23).

우리가 정의의 원뜻을 생각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좋은 결과와 성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자들과 능력과 재능을 숭배하고 사유재산권을 엄격하게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란 개념을 통해서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행운이 정의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갖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더블어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혼자는 아니다. 혼자서는 부든 명예든 권세든 누릴 수가 없다. 개인이 누리는 부와 명예와 권세는 모두가 사회와 국가가 있음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인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도, 그가 속한 공동체가 무너지면, 그도 함께 무너지게 된다. 공동체가 발전하면 개인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발전은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고, 공동체의 발전은 개인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