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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11 07:16
새 언약 백성을 위한 사도행전의 새 땅과 새 나라 이야기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787  
새 언약 백성을 위한 사도행전의 새 땅과 새 나라 이야기

“주께서 주신 결말”

성서는 ‘땅’과 ‘나라’이야기이다. 구약은 지상 가나안땅과 이스라엘 나라의 출범, 발전, 쇠퇴, 희망에 관한 것이고, 신약은 하늘 가나안땅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성취, 발전, 완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땅과 나라들을 싸고 있던 주변국들의 이야기이다. 신약은 구약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해석하면서, 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인류구원에 유일한 대안인가를 설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기와 새 여호수아서이다.

땅과 나라를 희망했던 아브라함은 아들도 낳지 못하던 떠돌이 유목민이었다.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 들어가 작은 민족을 이루지만, 노예 신세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을 ‘침노’하기까지 최소한 430년(최장 645년)이 걸렸고, 절정기에 이르기까지 4백년이 더 걸렸다. 그러나 이 영화는 1백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눈을 세계로 향하고 경계를 넘어 도전(진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쪼개지고, 국력은 쇠하여져 도전(진군)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신생 제국들에게 차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조상 때부터 떠돌이였고, 노예였기 때문에 자기 땅이 너무나 절실하고 절박하였다. 그래서 땅은 그들의 ‘희망’(Ha-Tikvah)이자 ‘다가올 세상’(Olam Ha-Ba)이었다. 그리고 이 땅에 대한 간절함과 이 땅을 지켜내고자 한 절박함의 산물이 율법준수의 엄격함이었고 배타적 선민사상이었다. 가나안땅이 보존되느냐 마느냐의 관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얼마나 충실히 지켜내느냐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배타적 영토주의와 선민사상은 민족주의를 낳았고, 민족주의는 세계를 보는 눈을 어둡게 만들었으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세계 열방에 하나님을 알게 하라는 제사장직의 사명을 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야훼를 자기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알지 말았어야 했다. 가나안땅이 그들에게 참 안식과 평안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았어야 했다.

유대인들은 땅을 얻고 난 때로부터 그 땅을 유지하기 위해서 4백여 년간 피땀 흘리며 싸워야했고, 땅을 빼앗기고 나서 6백여 년을 속주민의 처지로 살아야했으며, 1948년 건국 때까지 무려 1878년간 땅과 나라가 없는 떠돌이와 노예로 살아야했다. 그렇다고 비극만이 유대인의 모든 것은 아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행동하였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아삽의 고백처럼,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시 79:13)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자신을 “온 백성의 태양이며 온 나라의 군주”로 선포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로 인해서 주전 612년에 바벨론에 망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주전 609년부터 주후 1846년까지 2455년간 6미터 깊이의 토사 속에 묻혀 지냈지만, 이스라엘은 비슷한 시기에 망하고서도 무려 2534년 만인 1948년에 건국에 성공하여 작지만 막강한 나라로 발전하고 있다. 하나님을 주인과 목자로 섬긴 이스라엘과 백성의 태양으로 군림한 앗수르에게 “주께서 주신 결말”(약 5:11)은 이토록 극명하게 달랐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의 결말

조병호 목사는 <성경과 5대제국>에서 고대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이었던 이집트 경영의 키워드가 ‘자연,’ 즉 치수와 농업의 진흥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제국이 만든 생산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1960년대에 하비 콕스는 <세속도시>에서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관리와 보존의 대상임을 강조하면서 출애굽사건을 자연의 마력, 인간의 권력, 유한한 가치를 절대시하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난 사건이라고 하였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면, 유대인의 조상들을 노예로 부리며 문명의 피라미드를 쌓았던 이집트가 지금은 오히려 한때 자신들이 노예로 부렸던 자들의 후예들에게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에서 수모를 겪고 있다.

조병호 목사는 이집트를 무너뜨린 앗수르 경영의 키워드가 ‘경계’였다고 말한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려 혼혈족들을 만들어 각 민족의 독특성을 말살함으로써 반란의 근원을 도려내 제국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야 하는 것은 제국의 말발굽이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복음)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의 연설에서 말하기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6-28)고 하였다. 앗수르가 취했던 정책에 반대되는 말씀이다. 비록 민족 색깔 언어 경계는 달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계는 군권에 짓밟힐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네트워크에 연결돼야할 대상이라고 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아테네가 고집한 ‘혈통’이 로마가 강조한 ‘정신’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민족주의 바벨탑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복음’으로 ‘경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정신을 통일시킨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였다.

조병호 목사는 앗수르를 무너뜨린 바벨론 경영의 키워드가 이데올로기 ‘교육’이었다고 말한다. 바벨론의 엘리트 교육정책은 유다에서 끌고 간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영재들을 한곳에 모아 교육시킴으로써 세계지배의 발판으로 삼으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식 교육과 북한의 주체사상 및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이미 실패한 것에서 보듯이, 또 칸트가 말했듯이, 인간을 목적으로 삼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교육이 아닌, 인간을 지배와 통치수단으로 삼는 교육은 반드시 패배한다. 또 유대인들의 율법교육은 약소민족이요 소수민족인 그들 자신을 배타적 선민사상과 민족주의로 묶는 데는 여전히 성공적이지만, 그로 인한 대가가 나라를 잃고 2천5백년이 넘는 세월을 떠돌이와 노예로 살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주께서 주신 결말”은 명백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성별 빈부귀천 언어경계에 관계없이 값없이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인류를 그리스도의 나라의 평등한 시민과 형제자매로 삼으신다는 기독교 복음에 복을 주셨다. 지난 2천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페르시아, 헬라, 로마, 그리스도의 나라의 결말

조병호 목사는 가장 너른 영토를 지배했던 페르시아 경영의 키워드가 ‘숫자’였다고 말한다. 다리오가 그리스 원정에 30-40만의 대군을 동원한 것이나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가 70만 대군을 동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알렉산더가 이끈 4만의 군사 앞에서 붕괴되었다. 세계대전을 겪었던 세대들이 거의 유명을 달리한 지금 우리 주변의 열강들은 패권주의경쟁에 이미 돌입하였다. 군비증강과 자본지배로 권력과 명예와 재물을 독식하려는 지배구조는 반드시 망한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 경영, 약자를 돌보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경영, 사람이 사람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민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요 고귀한 권리이다.

조병호 목사는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헬라 경영의 키워드가 ‘융합’이었다고 말한다.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으로 제국을 영속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앗수르가 강제 결혼방식으로 민족경계를 허물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헬라는 세계동포주의로 민족경계를 해체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힘써 세우려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민족성별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나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생명을 살리는 나라, 하나님 앞에서 만민이 평등한 나라, 개체가 거대한 조직의 톱니바퀴나 부품으로 천대받는 나라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주체가 되는 나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병호 목사는 헬라를 무너뜨린 로마경영의 키워드가 ‘관용’이었다고 말한다. 로마의 많은 황제들은 화폐를 만들 때, 앞면에는 자기의 옆얼굴을 새기고, 뒷면에는 ‘관용’이라는 글자를 새기기를 좋아했다. 여기서 조병호 목사가 말하는 ‘관용’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말한 ‘정신’의 공유와 상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관용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정신인 아가페사랑, 십자가사랑, 하나님사랑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로마제국을 갈릴리 어촌 출신의 예수님의 복음사상에 무너져 내리게 한 “주께서 주신 결말”에서 보듯이, 진실로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인간답게 만들며, 안식과 행복을 주는 기독교복음이야말로 다시금 조명 받고 인정받아야할 인류의 유산이요 가치이다.

성서는 ‘땅’과 ‘나라’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도 역대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땅의 ‘침노’(마 11:12)를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그 땅은 이 지상의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의 땅이다. 하나님이 아닌, 자연지배, 혈통통합, 이데올로기교육, 숫자의존, 문화통합, 정신공유에 의지하여 영원한 제국을 꾀한 나라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에 지상에서의 삶을 최종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끊임없이 궁극적이고 영원한 가치, ‘장차올 더 좋은 것’을 위해서 도전(진군)하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하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나라이다. 제국의 황제들이 신성을 찬탈하고, “짐(朕)의 나라”임을 주장한 것과 달리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예수님조차도 우리의 형제요 일군이다. 이에 감동하여 바울은 자기결정권이 없는 노예로서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섬겼다. 사도행전의 새 언약 백성의 새 출애굽 이야기는 이 방식으로 주의 재림으로 완성될 새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