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알렉산더 캠벨의 "전쟁에 관한 연설"은 실제에
있어서는 웅장한 "평화에 관한 연설"이다.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던 멕시코
전쟁(1846-48/ 1845년 미국이 텍사스를 병합하면서 발생한 전쟁으로 미국이 승리)이
끝나고 3개월 가량 지난 1848년 버지니아주 휠링(현재 웨스트버지니아)의 회관에서
행하여진 이 연설은 교회 안팎에서 전쟁에 관한 광범위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주(州)들의 권리와 노예문제 그리고 경제개발의 국가적 이슈들을
해결하는 한 수단으로써 무력군대를 주창하고 있었던 때에 또한 행하여진 이 연설은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남북전쟁이 발발하였고, 캠벨이
우려했던 대로 전쟁의 사악함이 드러났다. (From Popular
Lectures and Addresses, pp. 342-366).
전쟁에 관한 연설
한 기독교 국가가 다른 기독교 국가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를
권리를 갖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게 또 한층 더 여러분, 곧 나의 존경받는 청중 여러분에게
물은 이 자리에서의 물음은 우리 자신의 나라와 기독교 세계의 명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운명에 관련된 것이어서, 본인은 만족할만한 결정에 매우 필수적인 그 지성과
평정을 가지고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본인의 능력의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에
접근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의 조사로부터 움츠려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여러분의 넒은 아량으로, 그 문제를 결정하려 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나 자신과 같이 강렬한 관심으로, 전쟁이 있거나 있었던 곳에 언제나 따르는
인명의 희생과 유족들의 고통, 엄청난 국민재산의 손실, 그리고 공공도덕의 불가피한
붕괴가 지적된 대로, 전쟁의 황폐함과 공포들에 관해서 가끔씩 성찰해오신 분들을
협조하도록 할 것입니다.
중략.
이들 서두에 꺼낸 내용들을 오늘 저녁 제기한 물음에 적용하려면,
본인이 표명한 유명한 말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주목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 즉: - "한 기독교 국가가 다른 기독교 국가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를 권리를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국가라는 말에 형용어구를 붙였지만, 전쟁이나 권리에는
어떤 형용어구도 붙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전쟁을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것으로
규정짓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권리를 인간이나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관례를 따라, 국가에 기독교(Christian)란 말을 붙이기로
하였습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국가 앞에 붙인 말 기독교(Christian)의 적합함을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를 그렇게 나란히 사용하는 것이 대중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표명되었든, 암시되었든, 요즘 이 나라에서 때때로 행해진 것으로써,
그 논쟁은, 한 기독교 국가가 다른 기독교 국가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를 권리를 갖고
있는가?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으므로, 중요하고
다소 깜짝 놀라게 할 물음, 즉 세상에 기독교 국가가 있는가? 혹은 우리는 기독교
국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는가? 고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일개의 국가로써 미국 국가가 정신에 있어서 기독교 국가가
아닌 것은, 마치 사도가 고린도와 아테네 또는 황실 가족을 포함한 로마제국의 수도에
교회들을 세웠을 때에 그리스나 로마가 기독교 국가들이 아니었던 것과 같습니다.
로마제국의 정책, 용맹, 용기, 용감, 기사도가, 그것들이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
시저 시대에 이방세계의 바로 그 중심에서 찬양과 흠모와 영광을 받을만했던 것만큼이나
워싱턴과 런던에서도 그렇습니다.
중략
그러면, 어떤 기독교(Christian) 국가도 또 다른 기독교 국가를
대항해서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문제는 좀더 이성적이고 단순한 형식에로
줄어듭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것을 일개 국가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 혹은 교회가 또 다른 국가 속에 있는 그의 왕국 혹은 교회에 대항해서
전쟁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이 형식 속에서 여전히
좀더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략
그러나, 본인은 그 물음에 대한 이 형식이, 매우 많은 선량한
사람의 양심을 지금 울릴 만큼 그 사례의 상태에 정확하게 부응하지 않는다고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언급된 대로, 그들은 그 물음에 강한 어조로 아니오 하고 반박하는
한편,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어려움을 또 다른 형식으로 제시할 것입니다. "영국이
우리나라를 대항해서 전쟁을 선포하거나 우리나라가 영국을 대항해서 전쟁을 선포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로써 우리들은 지원하거나 입대하거나 또는 징집된다면,
영국에 대항해서 싸울 권리를 갖습니까? 우리들의 표어가 '우리의 국가, 옳은가 나쁜가?'이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정부는 우리들에게 강제로 무장하게 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까?" 고 그들은 말합니다.
중략
이것은 그 물음을 단순화하고 모두의 판단에 맞춰 그것을
평평하게 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기독교 종교를 세운 설립자께서 전쟁을 법령화하셨습니까?
또는 그분이 그분의 정부의 국민이 서로를 대항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을
합법적이고 정당화시키셨습니까? 또는 그분이 그들이 어떤 나라와 싸우기 위해서,
어떤 국가의 목적을 위해서, 기독교세계에 있는 어떤 국가의 현재 실재한 정치당국자들의
명령에 따라서, 전쟁에 나가는 것을 정당화시키셨습니까?
그 물음은, 우주의 새로운 관리아래서, 기독교 공동체들이
다른 공동체들을 대항해서, 전쟁의 흔한 기술적 의미에서, 다른 공동체에 대항해서
전쟁을 수행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한 기독교
공동체 또는 그 공동체의 일원들이, 어떤 국가전투에서, 그들 개별 능력에 따라서,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결국 무장을 해도 좋은가? 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우리들은 호전적이든 방어적이든 말없이 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문법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법적인 궤변은, 마치 개인취향의 일시적 기분과 변덕 또는 흥미처럼,
호전적이든 방어적이든 어떤 전쟁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큰 물음은, 공무원인 아닌 한 개인이, 그가 그
자신의 경우에서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것을 그의 정부에 복종해서 도덕적으로
행할 수 있습니까? 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정부와 우리와의 정치적
관계들에서, 한 얽매인 종이 그의 주인을 향해서 유지하고 있는 것보다 적어도 열등한
위치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들로써 위대한 왕, 우리의 군주이시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문법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어떤 것
속에 있는 권세들에
정당하게 복종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만약 그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들은 매우 안전하게
한 발 더 앞으로 전진할 것이며, 한 그리스도인이 주(州)정부를 위해서, 주(州)정부의
권리들을 지킴에서, 그가 자기 개인의 권리들을 지킴에서 혼자 힘으로 정당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을 결코 정당하게 억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중략
위대한 교사요 최고의 박애주의자의 말씀들은 이 큰 물음에 대한 최종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입법자께서 두 가지 매우
분명한 측면, 첫째, 그분에 대한 그들의 의무들과 그들 자신의 직업에 관련해서,
그리고 둘째, 그들 시민의 권리들과 의무들과 책임들에 관련해서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수행자들로써 그들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어떤 경멸을 받거나 어떤
처벌을 당한다해도, 그들은 결코 그것을 원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시민의 권리들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민법보호의 이점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 목적 때문에 그들에게 모든 그들의 정치적 세금들의 지불과 그분에게 그들의 책무들로
방해가 되지 않게, 순수한 민간 성격의 다수의 모든 법령에 복종하도록 그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중략
그러나, 한 군인의 독특한 생명이나 한 정치전쟁의 실행에
관해서는 그들이 계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그들은 그들의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국가들의 왕이신
그들의 통치자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불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그리스도인 군사가, 그의 "방패"가 믿음이었고, 그의 "투구"가
구원의 희망이었고, 그의 "흉배"가 의(義)였고, 그의 "허리띠"가
진리였고, 그의 "발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겼고," 그리고 그의
"검은 성령"과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군사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이 시저와 한니발과 티무르(타메를랑)와
나폴레옹 또는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의 전쟁들에 나가 싸우기 위해서 입대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종교를 지지하기 위해서
검을 가지는 모든 자는 그것에 의해서 망할 것이라고 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단순히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보편적인
역사서적들에 묻지 않아도 되지 않겠으며, 모든 국가들이 그것에 의해서 결국 망할
검으로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만약 어느 누가 "그들 가운데 몇몇 나라들은 아직도
서 있습니다."고 말한다면, 이미 망한 모든 나라들 역시 한동안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저들 나라들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의 과잉 투구에 비틀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칼에 의해 세워진 국가와 주(州)들은 칼에
의해 망하게 될 것이 종국에 가서는 입증될 것임을 우리는 의심치 않습니다.
중략
기독교의 정신과 기풍이, 그것의 서신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것을 모든 방면에서
인정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담고 있는 책을 일찍이 읽었던 사람에게는 증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어느 누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쟁의 기풍을
대조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큰 전투를 앞둔 군인들에게 전날 밤에 그들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군목이라고
가정하게 해보십시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또 우리 시민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군목이라고
가정하게 해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가 그와 같은 때에 적절한 본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실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령관은 그의 설교를 어떻게 들었겠습니까? 어떤 정신으로 그의 설교를 들은 군인들은
전투에 즉시 투입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대답해야 문제들이요,
모든 사람이 표명보다는 훨씬 더 좋게 느낄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중략
아무 것도, 전쟁들이 비롯된 원인들과 수행되어야할 목적들에
관하여 상기시키기보다는, 더 양심적인 군인의 용기를 약화시키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것들은 언제나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많은 전쟁들이 수행되어져
왔고, 몇몇 전쟁들은 길고 오랜 노력 끝에, 양군의 군인 대다수가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전에 종전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국가에서조차도, 이런 종류의 사례가 매우 최근에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대부분의
전쟁의 참되고 적절한 원인들이 명확히 이해되어지고, 그 전쟁들이 수행되어진 참
목적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해도, 그 전쟁들은, 대개의 경우,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효율적인 수단의 결핍으로 실패할 것입니다.
중략
전쟁은 지금도, 과거에도, 정의를 이루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진리의 시금석, 즉 옮음의 판단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기회를
노리는 게임이거나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폭력적 침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정들의 개선과 정의의 결정 또는 국가 사이의 논쟁들을 수습하는 적절한 수단으로써의
전쟁을 어떠한 경우에도 지지할 수 없다는 더 이상의 다른 증거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 . .
그러나, 본인에게 그럴싸하게 생각되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으로도,
그리스도인이 군인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전쟁의 원인이
심사숙고되어지는 한, 그가 무죄한 사람-무죄한 사람 말입니다-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사실에서 나올지도 모릅니다. 싸우는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치가들과 상인들과 기사들 그리고 왕들이 전쟁에 원인을 제공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개인과 가족 강화의
계획들을 좌절시키려고, 상대편에 고용되었을 자들을 죽이게 합니다. 양군대의 군인들은,
서로간에 다툼이 없기 때문에, 상대편의 군인들에게 적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시민복 차림으로, 전장이 아닌 다른 어떤 들에서 만났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서로의 행복을 묻었을 것이고, 요청을 받는다면, 그들의 도움을 피차에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중략
본인의 입장을 말씀드리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닙니다, 본인은 전쟁의 도덕적인 황폐함이 전쟁의 공포들을 심지어
능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들 중에서, 본인은 상스런 신성 모독과 야만적
행위 그리고 단순한 군인, 즉 직업으로 승인된 인류의 백정의 방탕함을 가장 높은
위치에 배정하지 않습니다. . . 그리고, 만약 여론의 심취와 인기 많은 박수갈채가
없다면, 그가 왕좌에 뜻을 품은 사람을 도와주었거나 천하고 낮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그 자신의 피선의 길을 닦아왔기 때문에, 그의 나라를 위해, "옳거나 그릇되거나",
영광으로 자기 자신을 덮어줄 준비를 갖춘 칭송하는 대중의 어리석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서둘러 전쟁의 극장에로 달려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거만한 지원자에 못지
않게, 저주받을 자로, 본인은 그를 배정할 것입니다,
중략
그 설교강단은 망상을 소중히 하는 데에 그것의 원조를 또한
제공하여야 합니다. 죽은 영웅들을 위한 몇 번의 교회예배에서 몇몇 타락한 영웅들의
찬사가 자주 들립니다. 따라서, 교회예배를 전쟁의 하녀로 섬기도록 함으로써, 평화의
왕의 종교를 속되게 합니다. 양군 모두의 전장에서 급여를 받는 군목들의 기도들이,
심지어 무기들의 소음 속에서조차, 드려질 뿐만 아니라, 해들이 거듭되는 동안 연이은
안식일마다 바다나 강가와 적군 군대들의 성공을 비는 기도들로 메아리치는 반대편에서도
강단들에서 말씀이 선포됩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들 모두의 기도를 들으시며, 검들과
총알들을 그들의 상대편 적들의 머리와 심장에로 이끌어 명중하도록 위임하여 각각의
군이 적군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게 하실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략
그러나, 모든 국가의 논쟁들이 어떻게 수습되어져야 할까요?
철학, 역사, 성경은 모든 논쟁들, 오해들, 소원감들이 해결되어져야 하고, 소리내야하고,
시도되고, 이해관계가 없는 중재자들에 의해서 공평하게 판결되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중재자도 자기 자신의 사건에서는 적당한 재판관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전쟁들은
결코 우호적인 화해들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드물게, 만약 있었다면, 문제를 보는
관점들의 공정한 결정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마침내 평화를 위한 사전준비들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들의 대표자들은 만나야 하고, 규정하고, 재규정하고,
듣고, 답하고, 비교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중략
현대시대에서 우리들은 평화조약으로 적대감들을 끝냅니다.
우리들은 화약과 총알로 화평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성과 반성과 협상에 의해서
수행됩니다. 왜, 이것들을 처음부터 도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쟁은 오랫동안
있어왔고, 언제나 . . . 무력으로 그것들의 마지막 주장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수세대 동안 한 아버지 조사관은 정통교리를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빛은
해외로 가버렸고, 그는 권세를 잃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인간의 마음을 또한
밝게 하고, 좀더 이성적이고 인정 있는 여론을 일으키고, 그리고 멈추십시오.
중략
그러나, 모두가 이성과 정의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요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유일하게 강제적인 척도가 아니겠습니까? 합법적인 강요는
없을까요? 모든 사적인 오해들이 칼에 의해서 해결되어져야 합니까?
중략
합법적인 조정관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연방법원만큼 편리하고, 실천 가능한
국제연합법원이 만들어질 수는 없을까요? 평화를 주창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주
제안되고, 웅변적으로 능숙하고 자비롭게 논의된 것처럼, 모든 부정들과 불만들을
판결하고, 가식을 끝내고, 고치기 위해서 나라들의 국회와 나라들의 최고법원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중략
우리가 주장한 전체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살인자의 생명을 취하는 권리가, 그 경우에서 유죄한 자들
이외에 아무도 고통받지 않은 한, 스스로 전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전쟁에서는 무죄한 사람들이, 유죄한 자들과 함께는 물론, 종종 유죄한 자들 없이도,
고통을 받습니다. 유죄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며, 무죄한 자들은 그
전쟁의 결과들로 인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2.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전쟁을 수행할 권리는 다른 어떤
국가에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정통치 아래 있었고, 국가들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보안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그리스도인도
정당하게 혹은 기독교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들의 정상을 참작해서 유대인들의 전쟁들로부터
주장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훈계와 권위를 가졌습니다. 현존하는 어떤
국가도 그러한 보증서를 내보일 수 없습니다.
3. 예언들은 메시아 그분이 "평화의 왕"일 것과
그분의 통치아래서 "전쟁이 그칠 것"과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4. 천사들에 의해서 처음 선포된 대로, 복음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를 만드는 결과를 낳는 메시지입니다.
5. 싸움과 다툼이 사람들의 정욕과 사악한 열정으로 좇아
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명령함으로써, 기독교의 훈계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금합니다.
6. 그리스도의 팔복은 애국자들과 영웅들 그리고 정복자들에
관하여 선포되지 않고,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해서 선포되었습니다.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계급과 지위가 주어집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7. 전쟁의 어리석음은 다음의 독특한 내용들에서 표명됩니다.
첫째, 그것은 결코 정의나 옮음의 입증을 위한 판단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그것은 결코 논쟁의 만족스러운 끝일 수 없습니다.
셋째, 평화는 항상 협상의 결과이며, 협약들은 그것의 보증과
서약입니다.
8. 전쟁의 사악함은 다음의 독특한 내용들에서 설명됩니다.
첫째,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형제들을 살해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군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인 도발의 이유를 갖지 않는다.
둘째, 그들은 좀처럼 혹은 결코 전쟁의 옮고 그릇됨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심의 허가 없이 행동합니다.
셋째, 모든 전쟁에서 무죄한 자들은 유죄한 자들과 함께 화를
당합니다.
넷째, 그것들은 군인으로 하여금 국가를 위해서, 그가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한다면, 국가법에 의해서 그의 생명을 빼앗길, 일을 하도록 억지로
시킵니다,.
다섯째, 그것들은 사회에, 도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다른
모든 악행들의 선구자들입니다. . . 그러므로, "결코 좋은 전쟁이나 나쁜 평화는
없었습니다."고 말한 프랭클린 1세의 말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주후 2-3세기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기 드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 저스틴, 타키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틀리안, 오리겐 등이 그렇게 증언합니다.
이 모든 고려들에 부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만일 본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자라 할지라도, 심지어 본인은 이 근거를 내세울
것입니다. 인간성의 단순한 요구들을 떠나서, 건전한 국가 정책의 근거에서 그것을
재촉할 것이다.
전쟁들에서 낭비한 돈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면, 본인은 세계에
있는 매 에이커의 개간되어야 땅을 개간할 것입니다. 습지를 배수하고, 모든 사막을
정복하며, 모든 산과 언덕을 비옥하게 하며, 전 지구를 일련의 지속적인 작업으로
기름진 들판들, 푸른 잎이 무성한 초원들, 아름다운 저택들, 촌락들, 읍들, 도시들로
바꾸어 놓겠습니다. . . . 본인은 전 인류를 교육할 만큼의 많은 학교들과 아카데미들과
대학들을 세우고, 설비하고, 기부할 것입니다. 또 교회들, 공개홀들, 문화회관들을
짓고, 그것들에 수십 억 인류의 필요를 채우는 도서관들로 설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칼들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여러분의 창들을 쳐서
낫을 만들며, 여러분의 군함들을 개조하여 선교사들의 짐을 운반할 배들로 만들고,
여러분의 병기고들과 전쟁의 군수품들을 성경들과 문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의 모든
설비들로 바꾸십시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본인은 남은 돈을 몇몇 새로운
기획들을 위해서 의심할 바 없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중략
우리 모두는 그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우리들은 이 주제에 관한 여론을
조성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평화주의자 정신을 고취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전쟁에 반대하는 중요한 일들을 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손을 일하는데 쓰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때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군대가 군대와 더불어 마주치지 아니하며,
살해된 자들의 군중이 애도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회관에 나팔을 매달 것이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참고서적: McAllister, Lester G. Ed. An
Alexander Campbell Reader. St. Louis, Missouri:
CBP Pres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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