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1월 초순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이 사망한
후, 알렉산더의 건강은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매우 긴밀하게 동역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캠벨의 주된 일은 미국성경연합(American
Bible Union)을 위해 사도행전에 관한 그의 저술을 마치는 것이었다. 캠벨의 전기에서
로버트 리차드슨(Robert Richardson)은 캠벨이 이 저술에 쏟은 집중적인 노력과 1855년
거의 대부분을 오랜 시간동안 연구실에서 지냈던 것이 그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진술한다. 그의 친구들은 캠벨의 정신력의 쇠퇴와 과거 사건들에 관한
혼동 그리고 {밀렌니얼 하빈저}(Millennial Harbinger)에
실은 그의 기사들에서 이상한 불일치들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캠벨은 자신이 주로 쓰는 글의 시한을 맞추지 못했다. 비록
그가 {밀렌니어 하빈저}지의 관리를 계속했지만, 그 월간지에 관한 중요한 편집작업은
점차 리차드슨과 그의 사위 윌리암 K. 펜들톤(William K. Pendleton) 및 캠벨과 공동
편집자로 일했던 몇몇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캠벨은 베다니 대학의 본관건물 신축에 마지막 시간을 쏟으면서
활기찬 노력들을 보였다. 1857년 12월 10일 이른 아침에 발생된 처참한 화재로 본관건물과
도서관과 실험실들이 완전하게 소실되었다. 강의들은 단 하루만 휴강되었고, 신축계획들이
즉각 수립되었다. 캠벨과 펜들톤이 신축기금마련을 위한 책임자들로 이사회로부터
임명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기금마련을 위해서 동부를 순회하였다. 동부순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수일 이내에 다시 남부와 서부로 순회하였다. 1858년 여름에 훌륭한
신축본관을 위한 초석이 놓였으나 앞선 수개월 동안의 집중적인 모금 노력으로 캠벨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소진되고 말았다.
1860년 4월 22일, 남북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폴트
숨터(Fort Sumter)가 공격을 받았다는 뉴스가 캠벨에게 도착하였다. 이 때 캠벨은
버지니아주 샬로츠빌(Charlottesville)에서 일정기간 설교를 맡아 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베다니에 있는 집으로 향했고, 도처에서 전쟁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밀렌니얼 하빈저}에서 남북사이의 이슈를 해결할 적절한 방법으로 중재방안을
촉구하였고, 냉정과 이성에 호소하였으나 달라지지 않았다. 1861년에 캠벨은 부모님을
기리기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여 {제인 캠벨의 짧은 회고록이 담긴 토마스 캠벨 장로의
회고록}(Memoirs of Elder Thomas Campbell, Together
with a Brief Memoir of Mrs. Jane Campbell <Cincinnati:
H. S. Bosworth, 1861>)이란 제목의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전쟁 중에 캠벨은 불가불 베다니에 묶여 지냈으나 때때로
인근 마을들에 가서 기독교 신앙에 관련된 주제들을 가지고 공개강연을 하였다. 그는
건강악화로 윌리암 K. 펜들톤(William K. Pendleton) 부학장에게 업무를 맡기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학생수가 격감하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학장직을 수행하였다. 1866년
3월 4일, 그는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섬긴 것과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그가 알고 있던 방법을 다해서
충실하게 사역했던 것을 만족해하면서, 베다니에 있는 그의 집 침실에서 임종하였다.
참고서적: McAllister, Lester G. Ed. An
Alexander Campbell Reader. St. Louis, Missouri:
CBP Pres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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