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창 장로
본문
신현창 장로는 의사였다. 상해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일정 때 고국에 돌아와 이북 철산리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철산에서 진료를 할 때에 늘 형사들이 와서 감시했다고 한다. 이유는 신현창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왔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었다.
신현창은 많은 신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여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신현창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 일을 지속하기 어려워 청주로 내려와 이한상 집사가 경영하던 양약방 옆에 병원을 차려 진료하면서 기독교라는 간판을 붙였다. 한편 부강에서는 김규상 목사가 12세 때에 부친께서 돌아가심으로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신현창이 그 집을 구입하여 부강으로 이사하여 병원을 개업하였다. 부강에서 신현창은 1945-6년경 김은석 목사를 만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충청과 전라 지역에서 교회들을 개척하였거나 섬긴 수십 명의 그리스도의교회 목회자들이 1950년대 말까지 지속된 이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통해서 배출되었다.
신현창은 1945년에 몸이 약간 불편하여 수양 차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왔다가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정철의 집에서 모임을 갖게 하였다(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 1950년에는 교회사택을 지으셨다. 그리고 1951년 6.25사변 중에 교통사고로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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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저는 예장 통합 소속의 최유신 목사라고 합니다.
목회자 보다는 문화사역자로서 활동을 해왔습니다.
제가 교파와 교단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찾던 중 목사님의 연구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들어왔던 그리스도의교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저의 외할아버지 되시는 신현창 장로에 대한 기록도 발견하게 되어 반갑고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의 외조부에 관한 기록에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1964년에 소천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었는데, 실은 1951년 6.25사변 중에 교통사고로 소천하셨습니다. 외조부님께서 말년에 그리스도교회 깊이 관여하신 것은 어머님을 통해 들어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만, 목사님의 글을 통해 교회 역사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니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외조부님은 딸만 8형제를 두셨고, 그 자손이 한국과 미국, 캐나다 등지에 130여 명이 모두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외손 중에 목사나 선교사가 된 사람이 9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80년대 주찬양선교단이라는 팀을 만들어서 청소년 선교에 한 축을 담당했었습니다. 함께 사역했던 동생 최덕신은 한국 CCM에 유명한 작곡가로 현재는 일본 동경에서 선교사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귀한 연구와 사역에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늘 주의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하면서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2023. 11. 23. 0:36
최유신 드림
신현창 1892년 1월 7일 논산 부적면 안천리
51년 8월13일 소천
평북 철산 손녀 최소영 님
신현구 형님도 독립운동가입니다.
어제 교회에 방문하신 선교사님께서 외할아버지께서 평안북도 철산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다니셨던 기억을 말씀하셔서 혹시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있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혹시 다른 자료가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연세 드신 장로님들 중에 이 분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는지 여쭈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인물사전에는 독립운동가로 소개 되고 있는데 신앙적인 부분은 찾아 볼 수 없고 단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옥고를 치르셨던 것으로 미루어 신앙생활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청과 철산이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닌듯 하고 동석기 할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하실 당시 30세 중반 정도 되는 년배여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준 목사)
이명: 없음
출생-사망: 1892-01-07 - 1951-08-13
본적: 충청남도 논산 夫赤 顔川 166
훈격(서훈년도): 애국장(1990)
운동계열: 임시정부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1918년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졸업하였으며, 다음 해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동년 3월 단장인 신현구(申鉉九)의 명에 의하여 군자금을 지참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밀파되어 전달한 후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한 후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1921년 임시정부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가 조직되자 그는 양하창(梁瑕彰)과 함께 간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9월에 "태평양회의 선언서"를 발표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 25일에는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가 개최됨에 그는 동회의 상의원(常議員)에 뽑혀 활동하였다.1922년 10월 28일에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여 이사를 역임하였는데, 그해 말에 만주 독립군이 노·중 국경지대에서 추위와 식량난에 굶주린다는 소식이 상해로 전해지자 노병회에서는 성금을 모금하여 급원금(急援金) 50원을 독립군부대장 김규식에게 송금하는 등 활동하였다.또한 김 구(金九)·이유필(李裕弼)·여운형(呂運亨)·손정도(孫貞道)·나창헌(羅昌憲) 등이 중심이 된 노병회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고, 군인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조직되어 무장항일투쟁의 결의를 굳게 하였다.1929년에 귀국한 그는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사상을 초월하여 민족독립 의지로 뭉쳐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였으며, 동년 7월 21일에는 신간회 서울지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전북 전주, 평북 철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병원을 개업하여 의료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묘역 407
본 관 평산(平山)
출신지 충남 논산(論山)
생몰년월일 1892. 1. 7 ~ 1951. 8. 13
운동계열 임시정부
관련 단체 대한독립애국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 한국노병회, 흥사단, 신간회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주요활동
1919년 대한독립애국단 결성 주도, 1921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 1921년 8월 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 간사로 활동, 1922년 한국노병회 이사로 활동, 1929년 신간회 서울지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
본문
1892년 1월 7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부적면(夫赤面) 안천리(顔川里)에서 신지균(申智均)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큰형은 독립운동가 신현구(申鉉九)이다.
고향 논산에서 진광학교(眞光學校) 교사로 재직하다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이후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에 참여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이화학당 부속학교 교사이던 형 신현구의 주도로 1919년 4월부터 결성이 추진되어 5월 초 지방까지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다. 주요 활동으로는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모집과 전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국내에서 임시정부 선전 및 통신 연락 등을 전개하였다.
형이자 단장인 신현구의 지시로 상하이에 파견되어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병원에서 얻는 수익금을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특히 연통부(聯通府)가 설치되지 못한 중부 이남지역에서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이 일제에 발각되어 와해된 후에는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홍진(洪鎭)·김원식(金遠植)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충청남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 간사로 선출되어 의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또 해춘의원(海春醫院)을 개업하여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였다. 1921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상의원(常議員)에 뽑혀 국내외 동포 구휼활동에도 참여하였다.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한 회원들의 건강증명서 발급 등의 업무도 담당하였다. 이어 1922년 10월에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여 이사를 역임하며 자금을 모집해 만주에 있는 독립군들을 후원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0년대 후반 귀국 후에는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7월 신간회 서울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전주(全州)지역 유력인사로서 전주지회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 전주에 전주의원을 개원하여 대중을 대상으로 위생 강연을 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명망을 얻었다.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29년 1월 정재달(鄭在達)·방두환(方斗煥) 등과 함께 붙잡혀 고초를 겪었고, 1930년 8월에는 전주에서 일제 경찰에 수일간 조사받기도 하였다. 이후 평안북도 철산(鐵山) 등지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입당하여 임시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였다. 1946년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에서는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과 준비위원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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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4권, 197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7·9·14, 1973·1975·1978.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8·10·11·32권, 2006·2009.
「미주흥사단 흥사단 진단서」, 독립기념관.
장석흥, 「大韓獨立愛國團 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사진
신현창이 발급한 흥사단원 이영학 건강진단서(1923.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