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강한 자와 약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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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성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과 이길 것을 권면하고 있고, 또 그들에게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회개한 배교자를 물리치지 않으신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한 자에게나 고문과 죽음이 무서워 배교한 자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고, 용감한 자와 비겁한 자가 있다. 강한 자는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다. 하지만 약한 자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고문을 이기지 못한다. 오늘날처럼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라면 배교자가 되지 않아도 좋았을 신자들이 무서운 고문 앞에서 배교의 탈을 쓰게 되는 현실에 배교자뿐만 아니라 순교자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이란 냉엄한 현실 앞에서 고뇌하며 괴로워하게 된다. “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외마디 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는 각기 다른 이유들로 배교한 두 주인공이 나온다. 한 사람은 지극히 약하고 겁이 많은 자여서 배교를 거듭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인 신부를 관가에 고발한 기치지로이며, 기치지로에게 배신당한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자기가 지키려는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당하는 농민 신자들의 고통만 아니라면 끝까지 신앙을 지켰을 뛰어난 신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예수님일지라도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배교했을 것이란 점, 무엇보다도 배교행위는 단지 형식과 절차에 불과할 뿐 실은 지금까지 누구도 행하지 못한 위대한 사랑의 행위란 설득에 굴복되어 성화판 위에 발을 올려놓게 된다. 저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 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닭이 울고 동이 튼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닭의 울음은 동터오는 새 날에 대한 전령의 외침이요, 그 외침에 눈을 뜨고 통회하는 자는 부활의 새 날을 맞게 된다. 수탉의 외침에 눈을 뜨고 귀를 여는 자,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만이 환희의 아침을 맛볼 수 있다. 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닭이 울다”란 제목의 그림 밑에 이렇게 썼다. “닭이 우는 시간은 통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의 시간이다.”
신부는 배신자 기치지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그는 또 주님이 자기에게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하였다.
성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과 이길 것을 권면하고 있고, 또 그들에게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회개한 배교자를 물리치지 않으신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한 자에게나 고문과 죽음이 무서워 배교한 자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고, 용감한 자와 비겁한 자가 있다. 강한 자는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신앙을 지켜낼 수 있다. 하지만 약한 자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고문을 이기지 못한다. 오늘날처럼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시대라면 배교자가 되지 않아도 좋았을 신자들이 무서운 고문 앞에서 배교의 탈을 쓰게 되는 현실에 배교자뿐만 아니라 순교자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이란 냉엄한 현실 앞에서 고뇌하며 괴로워하게 된다. “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외마디 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는 각기 다른 이유들로 배교한 두 주인공이 나온다. 한 사람은 지극히 약하고 겁이 많은 자여서 배교를 거듭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인 신부를 관가에 고발한 기치지로이며, 기치지로에게 배신당한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자기가 지키려는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당하는 농민 신자들의 고통만 아니라면 끝까지 신앙을 지켰을 뛰어난 신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예수님일지라도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배교했을 것이란 점, 무엇보다도 배교행위는 단지 형식과 절차에 불과할 뿐 실은 지금까지 누구도 행하지 못한 위대한 사랑의 행위란 설득에 굴복되어 성화판 위에 발을 올려놓게 된다. 저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 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닭이 울고 동이 튼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닭의 울음은 동터오는 새 날에 대한 전령의 외침이요, 그 외침에 눈을 뜨고 통회하는 자는 부활의 새 날을 맞게 된다. 수탉의 외침에 눈을 뜨고 귀를 여는 자,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만이 환희의 아침을 맛볼 수 있다. 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닭이 울다”란 제목의 그림 밑에 이렇게 썼다. “닭이 우는 시간은 통회와 고통 그리고 환희의 시간이다.”
신부는 배신자 기치지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그는 또 주님이 자기에게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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