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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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미래
르네상스를 시점으로 산업혁명과 근대과학기술문명을 겪으면서 인간의 삶의 질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지만, 행복지수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재는 척도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행복지수를 경제력, 생활환경, 교육수준과 같은 물량적 측면에서 잰다면,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순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가족, 친구, 이웃과 같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정신적 측면에서 잰다면, 방글라데시, 네팔, 남태평양의 바누아투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대부분 순위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행복이란 것이 기대치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큰 것을 기대할수록 불행지수가 높아지고, 작은 것을 기대할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C. S. 루이스(Lewis)는 인생의 행불행은 인생을 호텔로 보느냐, 포로수용소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인생을 호텔로 생각하면 너무 불편한 곳이 될 테고, 포로수용소로 생각하면 너무 편한 곳이 될 것이다.
㰡”지나간 미래㰡•(Vergangene Zukunft)의 저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한철 옮김, 문학동네)은 역사해석의 도구로 ‘지나간 미래’란 개념을 차용했다. 코젤렉에 의하면, ‘내일은 좋아질 거야’라는 미래 인식이 일반 대중 속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근대문명이 시작된 18세기부터라고 한다. 코젤렉은 경험과 기대치 사이에서 경험이 줄어들고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대, 즉 미래로 파악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평생을 시골마을에서 산 사람에게 내일은 어제의 경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로 오면서 어제까지의 경험으로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일에는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어떤 신기술이 발표될지, 또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이전시대의 미래란 과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근현대이후에는 미래가 과거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현대인들에게 미래란 점차 알 수 없는 어떤 괴물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대인들에게 돈에 의지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되고 있다.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돈’이기 때문이다. 근대문명은 미래 인식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 미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한 혹은 불행한 요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 (쌍용차 사태와 용산 철거민 사태에서 보듯이, 미래가 사람들에게 불안과 불행의 요소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미' 잡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기가 그토록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조차 미래가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간 미래는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척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민족의 역사 속에서 미래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흑암과 절망 속에서 노예와 떠돌이로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광복(光復)이라는 빛을 비치고, 사막에서조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게 했던 모세와 바빌로니아제국에 망하여 유배로 끌려간 처참한 현실에서조차 회개운동과 회복운동을 펼치며, 다가올 세계를 선포했던 예언자들의 미래 인식과 다가올 세계를 미래로만 인식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 속에서 삶 속에로 끌어들여 변화를 경험하게 할뿐 아니라, 그 힘으로 미래를 향해서 힘차게 전진하게 만든 바울의 미래 인식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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