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요20:15-18]
본문
본문 말씀 요한복음 20장 15-18절 가운데서 특히 17절,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 말씀을 가지고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주옥같은 많은 말씀들을 남기셨습니다. 복음서에 실린 그 많은 명언들 가운데서도 특히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후, 삼일 째되는 부활 주일 아침에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행하신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말씀이 아마 가장 훌륭한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구절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독생자' 즉 '외아들'이란 점입니다. 그런데 같은 책 20장 17절에서 외아들 예수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굉장한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엄청난 선언입니다.
예수의 이 대 선언은 역대 유명 인사들이 말한 그 어떤 명언보다도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록들 가운데 몇 가지만을 상기시켜 본다면, 아브라함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 윈스톤 처칠의 "승리를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내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뿐이다." 맥아더 장군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마르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다."와 같은 유명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아무리 유명하다할지라도 예수의 위대한 선언,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의 이 대 선언 속에 담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함께 찾아보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이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외아들 예수로 하여금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게 하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이 뿐아니라,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를 죽게 한 원수인 우리들을 오히려 자녀로 삼으시고 축복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손양원 목사가 여수 순천 반란 때 자신의 두 아들 장남과 차남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아들로 삼고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여덟 가지 내용으로 감사를 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외아들로 대신 죽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 되며, 희생적이며, 헌신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였고,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고,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은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하면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고 하였습니다.
'외아들'과 '맏아들'이란 말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외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들이 하나 뿐이라는 뜻이고,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여러 아들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외아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히브리서,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맏아들'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장 23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장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요한일서 3장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한일서 3장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둘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예수의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자와 양녀이면서도 서자들과 같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거나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우리 나라에서 첩의 자식은 서자라 하여 좌족(左族), 반사(半士), 사점박이 등으로 천대받고 과거도 보지 못하고 제사에서도 소외 받으며 가계(家系)상속에서도 소외 받기가 다반사였습니다. 19세기 초엽 천주교 신자가 비신자를 전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컸던 고충이 다름 아닌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은 계급으로 인식하는 기독교의 평등사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당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같다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큰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 데 동원된 선교 도구가 바로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 1839년에 순교(殉敎)한 베드로 신대보(神大輔)가 샤스탕 신부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적혀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자와 양녀이면서도 서자와 같이 차별 받지 아니하고, 지극히 사랑스런 자녀로 대우를 받습니다. 외아들 예수를 죽일지언정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천지에 이만한 아버지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양자와 양녀에게 상속을 물리지 않기 위해서 호적을 파내어 버리는 세상 인심에 비추어 볼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있듯이 드러난 부분보다 숨겨진 부분이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소유하시고 만물을 경영하시는 큰 부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 이런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미국 시카고의 한 호텔에 노신사 한 분이 찾아와 접수원에게 말했습니다. "이 호텔에서 가장 값이 싼 방을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인을 쳐다본 순간 접수원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노신사는 다름 아닌 가장 돈이 많다는 록펠러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록펠러 씨가 아니십니까?" 하고 접수원이 물었습니다. 노신사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접수원은 "당신의 아들은 우리 호텔에 오면 언제나 가장 비싼 방을 쓰시는데 어떻게 해서 당신은 제일 싼 방을 찾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록펠러는 "내 아들에게는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지 않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우리가 비록 지금은 근심 걱정 속에 살지만, 이 다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갔을 때 우리에게 주어질 상속이 적지 않다는 것과 우리가 받게될 축복은 이 세상의 어떤 복과도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예수의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롬 8:15)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부르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도나이'입니다. '아도나이'는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돈'의 복수 명사이면서도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어서 '엘로힘'과 함께 삼위일체 교리를 입증하는 아주 중요한 어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도나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한편,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낮추어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 혹은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우리를 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 혹은 "주님!" 하고 부르는 것과 "아바 아버지!" 혹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부르는 것과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르는 말속에는 친밀감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어서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부르면 부를수록 다정다감하고 친근감이 더하지만, "주인님!" 하고 부르는 말속에는 알 수 없는 깊이와 거리감이 느껴지고 넘을 수 없는 상하주종관계의 무거움이 더하게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철학자(Cynicist) 디오게네스가 '개 같은 인생'(Cynicos Bios)이라 했듯이, 우리 같이 천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주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같이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은혜를 아무나 입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를 통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을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나의 아버지 되신 사실과 우리 모두가 다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인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주옥같은 많은 말씀들을 남기셨습니다. 복음서에 실린 그 많은 명언들 가운데서도 특히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후, 삼일 째되는 부활 주일 아침에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행하신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말씀이 아마 가장 훌륭한 말씀일 것입니다.
성경구절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독생자' 즉 '외아들'이란 점입니다. 그런데 같은 책 20장 17절에서 외아들 예수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란 굉장한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엄청난 선언입니다.
예수의 이 대 선언은 역대 유명 인사들이 말한 그 어떤 명언보다도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록들 가운데 몇 가지만을 상기시켜 본다면, 아브라함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 윈스톤 처칠의 "승리를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내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뿐이다." 맥아더 장군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마르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다."와 같은 유명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아무리 유명하다할지라도 예수의 위대한 선언,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의 이 대 선언 속에 담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함께 찾아보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이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외아들 예수로 하여금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게 하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이 뿐아니라,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를 죽게 한 원수인 우리들을 오히려 자녀로 삼으시고 축복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손양원 목사가 여수 순천 반란 때 자신의 두 아들 장남과 차남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아들로 삼고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여덟 가지 내용으로 감사를 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외아들로 대신 죽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 되며, 희생적이며, 헌신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였고,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고,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은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하면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고 하였습니다.
'외아들'과 '맏아들'이란 말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외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들이 하나 뿐이라는 뜻이고,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여러 아들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외아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히브리서,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맏아들'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장 23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장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요한일서 3장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요한일서 3장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둘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예수의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자와 양녀이면서도 서자들과 같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거나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우리 나라에서 첩의 자식은 서자라 하여 좌족(左族), 반사(半士), 사점박이 등으로 천대받고 과거도 보지 못하고 제사에서도 소외 받으며 가계(家系)상속에서도 소외 받기가 다반사였습니다. 19세기 초엽 천주교 신자가 비신자를 전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컸던 고충이 다름 아닌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은 계급으로 인식하는 기독교의 평등사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당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같다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큰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 데 동원된 선교 도구가 바로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 1839년에 순교(殉敎)한 베드로 신대보(神大輔)가 샤스탕 신부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적혀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자와 양녀이면서도 서자와 같이 차별 받지 아니하고, 지극히 사랑스런 자녀로 대우를 받습니다. 외아들 예수를 죽일지언정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천지에 이만한 아버지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양자와 양녀에게 상속을 물리지 않기 위해서 호적을 파내어 버리는 세상 인심에 비추어 볼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있듯이 드러난 부분보다 숨겨진 부분이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소유하시고 만물을 경영하시는 큰 부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 이런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미국 시카고의 한 호텔에 노신사 한 분이 찾아와 접수원에게 말했습니다. "이 호텔에서 가장 값이 싼 방을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인을 쳐다본 순간 접수원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노신사는 다름 아닌 가장 돈이 많다는 록펠러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록펠러 씨가 아니십니까?" 하고 접수원이 물었습니다. 노신사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접수원은 "당신의 아들은 우리 호텔에 오면 언제나 가장 비싼 방을 쓰시는데 어떻게 해서 당신은 제일 싼 방을 찾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록펠러는 "내 아들에게는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지 않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우리가 비록 지금은 근심 걱정 속에 살지만, 이 다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갔을 때 우리에게 주어질 상속이 적지 않다는 것과 우리가 받게될 축복은 이 세상의 어떤 복과도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예수의 엄청난 선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롬 8:15)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부르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도나이'입니다. '아도나이'는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돈'의 복수 명사이면서도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어서 '엘로힘'과 함께 삼위일체 교리를 입증하는 아주 중요한 어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도나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한편,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낮추어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 혹은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우리를 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 혹은 "주님!" 하고 부르는 것과 "아바 아버지!" 혹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부르는 것과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르는 말속에는 친밀감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어서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부르면 부를수록 다정다감하고 친근감이 더하지만, "주인님!" 하고 부르는 말속에는 알 수 없는 깊이와 거리감이 느껴지고 넘을 수 없는 상하주종관계의 무거움이 더하게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철학자(Cynicist) 디오게네스가 '개 같은 인생'(Cynicos Bios)이라 했듯이, 우리 같이 천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주기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같이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 중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은혜를 아무나 입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를 통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을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나의 아버지 되신 사실과 우리 모두가 다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인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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