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삶 설교

KCCS Digital Archive의 자료와 게시판을 분류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료 기독교 삶 설교 KCCS Digital Archive

기독교 신앙과 삶[창1:1-5, 롬10:9-10]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조동호
댓글 0 조회 6,791 2002.09.14 16:57

본문

조지 워싱톤 카버가 한번은 미 상원에서 땅콩에 관한 설명회를 갖게 되었다. 카버의 설명을 듣고 난 한 상원의원이 물었다. "박사께서는 어디서 그 많은 것을 배웠습니까?" "책에서 배웠습니다." "무슨 책에서 배웠습니까?"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성경이라고요? 하지만 성경에는 땅콩에 관한 언급이 없지 않습니까?" "예, 없습니다. 성경은 땅콩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카버는 흑인 농부들을 가르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동식물과 광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우리들은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동시대 사람으로 지동설의 주장은 물론이고 태양을 도는 행성들이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점까지 발견한 요한 케플러(Johann Kepler, 1571-1630)는 그의 책 {우주의 신비}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우연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발견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만일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것이 참이라면 내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또 케플러는 "우리들 천문학자들은 우리들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엇인가 찾도록 허락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 특히 케플러는 "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였고, 하나님은 자연이란 책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케플러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사랑하는 것' 또 카버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선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며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기독교 신앙과 삶'이란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요한 케플러는 가세가 기우는 가난한 가정에서 조산아로 태어나 매우 허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케플러는 이런 신체적 악조건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덴마크 황제의 수학 담당관이 되어 천문학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조지 워싱톤 카버는 남북전쟁 중이던 1864년에 흑인 노예의 몸에서 태어났다. 카버의 삶은 자연법칙에 따라 처참하게 버려진 흑인의 삶일 수밖에 없었다. 카버의 아버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는 백인 밑에서 하녀로 있었는데, 백인 무장 폭도들에게 납치되어 어디론가 팔려가게 되었고, 보자기에 쌓인 채 버려졌던 카버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지만, 주인은 그 사람에게 말 한 필 값을 치른 후에야 카버를 데려올 수 있었다.
그후 카버는 온갖 멸시와 천대를 무릅쓰고 흑인을 받아 주는 학교를 찾아다니며 혼자 힘으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마쳤고, 아이오와 농과대학을 마쳤다.
1896년 32살의 카버는 앨라배마주에 터스키지학원을 세워 흑인들을 교육하던 부커 워싱톤으로부터 "타락하고 가난하며 버려질 운명에 처해있는 우리의 동족 흑인들을 구출하여 떳떳한 인간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고 돈과 명예를 버린 채, 이때부터 흑인 농민들을 위해서 헌신하기 시작했다. 57세 되던 해, 카버는 토마스 에디슨 연구소로부터 98년으로부터 77년 전이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인 연봉 10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도 뿌리친 채 32살 때부터 받기 시작한 연봉 125 달러에 만족하며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가난과 멸시와 천대 속에 버려진 흑인들을 위해서 몸을 바쳤다.
조지 워싱톤 카버는 흑인이란 어둠과 혼돈과 죽음을 딛고 빛과 질서와 생명으로 일어선 위대한 창조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던 흑인이란 악조건을 창조적 삶의 방식으로 극복한 위대한 사람이었다.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혼돈에서 질서를,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해 내신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또 로마서 10장 9절에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며 또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어둠에 빛을 비추시며,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며, 없는 것에서 생명을 창조하신 것처럼, 창조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 존재하시며, 부정을 긍정으로, 타락을 회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재창조의 정신이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기독교인의 삶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중의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삶의 방식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도 법칙이 있다. 이 믿음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과는 정반대이다. 자연의 법칙은 모든 것이 망가지는 죽음의 법칙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내버려두면 무엇이 됐든지 간에 다 망가지고 만다. 이것이 제2열역학 법칙이요, 엔트로피 법칙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없다. 오히려 좋았던 것이 나빠지고, 새 것이 헌 것이 되고, 살아 있던 것이 죽어 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의 법칙을 거슬려 사는 모순을 갖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란 내버려두면 망가지는 자연의 법칙에 거슬려 망가지는 것을 막고, 망가진 것을 고쳐나가는 것, 즉 재창조하는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이 처음 만든 에덴동산의 법칙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타락이후에 생겨난 법칙이다. 그래서 성경은 궁극적으로 미래에는 하나님께서 이 타락한 자연을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시겠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타락이후의 것을 타락이전의 것으로 되돌리는 성령의 능력이다.
있음이 없음이 되는 것, 생명이 죽음이 되는 것, 빛이 어둠이 되는 것, 질서가 무질서해지는 것, 바로 선 것이 넘어지는 것, 새 것이 헌 것이 되는 것, 정의가 불의가 되는 것, 평화가 분쟁이 되는 것, 일치가 분열이 되는 것, 진실이 거짓이 되는 것, 선이 악이 되는 것, 사랑이 미움이 되는 것, 믿음이 의심이 되는 것, 희망이 절망이 되는 것, 기쁨이 슬픔이 되는 것, 긍정이 부정이 되는 것, 능동이 수동이 되는 것, 열림이 닫힘이 되는 것, 건설이 파괴가 되는 것,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의 법칙을 거슬려 사는 모순을 갖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는 것,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것,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것, 넘어진 것을 바로 세우는 것, 헌 것을 새 것으로 바꾸는 것,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씻는 것, 타락한 것을 거듭나게 하는 것, 병든 것을 고치는 것, 불의를 정의로 바꾸는 것, 분쟁을 평화로 바꾸는 것, 분열을 일치로 바꾸는 것,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것, 악을 선이 되게 하는 것, 미움이 사랑이 되게 하는 것, 의심이 믿음이 되게 하는 것, 절망이 희망이 되게 하는 것, 슬픔이 기쁨이 되게 하는 것, 모순을 조화롭게 하는 것,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 부정이 긍정이 되게 하는 것, 수동이 능동이 되게 하는 것, 닫힘이 열림이 되게 하는 것, 파괴가 건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요 삶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의 참 뜻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으며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인간에게 '플러스'가 되게 하시는 분으로 믿으며 예수의 플러스식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숫자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표기하는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성경에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숫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6,7,8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소개하겠다.
고대 시비린 신탁에서는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하고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숫자 7로 표기한다. 7을 완전수와 거룩한 수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6일째 날에 만드셨다고 해서 숫자 6으로 표기한다. 6이란 숫자는 묘한 숫자이다. 6은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수인 7에 가장 근접한 숫자이면서도 단지 1이 부족한 숫자이다.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6이란 숫자를 마이너스 1이라고 부르겠다. 마이너스 1, 이것이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이다. 인간은 그 능력이 무한해서 무엇이든지 해낼 것 같으면서도 신의 능력에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못하는 그래서 교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자신의 부족과 죄만 깨닫게 될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플러스 1의 존재로부터 남는 1을 얻어다 부족한 마이너스 1을 채우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누가 플러스 1인가?
고대 시비린 신탁에서 예수를 8로 표기했었다 라는 말씀을 드렸다. 왜,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했을까?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초기교회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용어 가운데 '제8일째 날'이란 것이 있다. '제8일째 날'이란 '주님의 날' 또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말한다. 이 날이 기독교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일요일이다.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주 첫날' 또는 '안식 후 첫날'이란 용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8일째 날'이란 용어를 썼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오,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오, 또 교회가 시작한 날이란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 미가서 5장 5절에 "그는 그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앗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을 침략하여 우리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올 때에, 우리는 일곱 목자, 여덟 장군들을 보내서, 침략군들과 싸우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쓰인 '일곱 목자'와 '여덟 장군' 즉 숫자 7과 8은 완전한 승리를 상징한다. 특히 숫자 8은 '넉넉히 이긴다 혹은 이기고도 남는다' 즉 '플러스 1'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 마태복음 5장에는 그 유명한 8복에 대한 말씀이 있고, 13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8개의 비유가 나오며, 22-25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관련된 8개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비유들에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 '씨앗 비유', 맨드라미 씨와 같이 아주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 관한 비유' 등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예수야말로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며, 우리를 풍성하고 넉넉하게 복 주실 '플러스 1'의 존재이시다. 또 예수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데 후하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실 수 있는 '플러스 1'의 하나님이시다. 비록 우리 인간이 부족한 '마이너스 1'의 존재일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데 필요한 '플러스 1'의 요인으로 작용하실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존재일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큰 나무로 자라는데 필요한 '플러스 1'의 요인으로 작용하실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밀가루 반죽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여러 종류의 맛좋은 빵으로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누룩이 되실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가 표시가 플러스 기호인 점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 같다. 예수는 우리에게 '더하기'가 되신다. 기독교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하기'가 된다. 조지 워싱톤 카버나 요한 케플러는 이런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지 않았나 믿어진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