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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기'의 복음과 '빼기'의 율법[마5: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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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6,831 2002.09.14 16:58

본문

신약 성경 27권은 처음 쓰여질 당시 그 글을 받아 보는 정해진 수신자들이 있었다. 이들 수신자들은 개인인 경우도 있었고, 교회와 같이 특정 집단인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신약성경은 무특정 다수를 향해서 쓰여지지 않고 반드시 정해진 독자를 향해서 쓰여졌다. 이 가운데 몇 권의 책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쓰여졌다. 마태복음과 히브리서가 그렇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히브리서에는 예수를 모세에 견주어서 설명한 부분이 많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믿고 있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전해준 십계명과 율법서인 모세오경을 가장 훌륭한 성경책으로 믿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에 개종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들이 자칫하면 기독교의 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마태는 마태복음 곳곳에서 예수와 모세를 유형적으로 비교해가면서 예수가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는 점과 예수께서 전한 복음이 모세가 전한 율법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점과 예수께서 행한 기적들이 모세가 행한 기적들보다 훨씬 긍정적이다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의 우월성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예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다. 마태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참 예언자로 보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크신 분(마 3:11), 유대인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었던 성전보다 더 크신 분(마 12:6), 물고기 배속에서 살아 나온 요나보다 더 크신 분(마 12:41),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마 12:42)으로 강조하고 있고, 의미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했던 다윗 왕보다 더 크신 분(마 22:41-46), 그리고 너희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이런 저런 명령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44)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소개함으로써 예수를 모세보다 더 큰 분으로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도 마태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는 역대 어느 선지자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이시며(히 1:4),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이시며(히 1:5-2:18), 모세보다 뛰어난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다(히 3:1-6). 이뿐 아니라, 예수는 믿음의 최고 목표이시며(히 3:7-4:16),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대제사장이시며(히 5:1- 10:39),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히 11:1-13-19)이시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예수의 권위 있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5-7장에 실린 주옥같은 산상수훈과 마태복음 19-22장에 실린 천국 비유와 예루살렘 입성이후에 많은 사람들과 나눈 변론에 대해서 마태는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랬다."(마 7:28; 22:33 )고 민중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고, 마가는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 1:27)고 무리의 놀람을 소개하고 있고, 누가는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눅 4:32)고 민중의 충격을 소개하고 있다. 민중들이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한결같이 '놀라워' 했고, '새 교훈'이라고 했고, '권세'가 있다고 했다.
예수의 권위는 그 분의 행동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마태와 누가는 각각 20개씩의 예수의 기적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10개의 기적을 마태는 8-9장에서 몰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마태복음 8장 27절과 누가복음 8장 25절에는 바람과 바다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5), 또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 8:25)고 적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의 권위에 다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이를 두고 누가는 9장 43절에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다."고 했고,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그만큼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서 나타난 권위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둘째, 예수가 전한 복음은 모세가 전한 율법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은 살리는 것이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율법은 죽이는 것이며, 죄를 깨닫게 하여 곤궁에 빠뜨리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더하기'가 되지만, 모세의 율법은 모든 인간에게 '빼기'가 된다. 예수의 복음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지만, 모세의 율법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이고,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파괴적이고, 소극적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다.
모세가 전해준 율법서 가운데 '고엘 하담'이란 용어가 있다. 이 말은 '피의 복수자'란 뜻이다. '피의 복수자'는 자신의 친인척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을 잡아 동일한 상해를 입힐 복수의 의무를 지닌 사람을 말한다. '피의 복수자'는 상해 당한 자와 가장 가까운 근친 가운데서 뽑힌다. 이 사람의 복수는 합법적인 것으로 죄로 인정되지 않는다. 고대 근동세계의 법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동해상해법이었다. 가해자에게 동일하게 해를 입히는 처벌법을 말한다. 모세가 전한 율법에는 도피성에 관한 규정이 있는데 이는 과실 치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피를 피로 갚으라는 사막의 계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꾸어, 피를 용서로 갚으라고 가르쳤다. 마태복음 5장 38-44절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가르치셨다.
세상에 어느 누가 감히 '빼기'의 율법을 수정하여 '더하기'의 복음으로 바꿀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며, 예수의 말씀만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복음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숫자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성경에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숫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6,7,8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말씀드리겠다.
고대 시비린 신탁에서는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하고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숫자 7로 표기한다. 7을 완전수와 거룩한 수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6일째 날에 만드셨다고 해서 숫자 6으로 표기한다. 6이란 숫자는 묘한 숫자이다. 6은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수인 7에 가장 근접한 숫자이면서도 단지 1이 부족한 숫자이다.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6이란 숫자를 마이너스 1이라고 부르겠다. 마이너스 1, 이것이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이다. 인간은 그 능력이 무한해서 무엇이든지 해낼 것 같으면서도 신의 능력에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못하는 그래서 교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자신의 부족과 죄만 깨닫게 될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플러스 1의 존재로부터 남는 1을 얻어다 부족한 마이너스 1을 채우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누가 플러스 1인가?
고대 시비린 신탁에서 예수를 8로 표기했었다 라는 말씀을 드렸다. 왜,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했을까?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초기교회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용어 가운데 '제8일째 날'이란 것이 있다. '제8일째 날'이란 '주님의 날' 또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말한다. 이 날이 기독교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일요일이다.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주 첫날' 또는 '안식 후 첫날'이란 용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8일째 날'이란 용어를 썼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오,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오, 또 교회가 시작한 날이란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 미가서 5장 5절에 "그는 그들의 평화가 될 것이다. 앗시리아 사람이 우리 땅을 침략하여 우리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올 때에, 우리는 일곱 목자, 여덟 장군들을 보내서, 침략군들과 싸우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쓰인 '일곱 목자'와 '여덟 장군' 즉 숫자 7과 8은 완전한 승리를 상징한다. 특히 숫자 8은 '넉넉히 이긴다 혹은 이기고도 남는다' 즉 '플러스 1'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 마태복음 5장에는 그 유명한 8복에 대한 말씀이 있고, 13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8개의 비유가 나오며, 22-25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관련된 8개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설명하는 비유들에서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 '씨앗 비유', 맨드라미 씨와 같이 아주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는 '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 관한 비유' 등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를 숫자 8로 표기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예수야말로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며, 우리를 풍성하고 넉넉하게 복 주실 '플러스 1'의 존재이시다. 또 예수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데 후하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실 수 있는 '플러스 1'의 하나님이시다. 비록 우리 인간이 부족한 '마이너스 1'의 존재일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는데 필요한 '플러스 1'의 요인으로 작용하실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존재일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큰 나무로 자라는데 필요한 '플러스 1'의 요인으로 작용하실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밀가루 반죽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는 우리가 여러 종류의 맛좋은 빵으로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누룩이 되실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가 표시가 플러스 기호인 점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 같다. 예수는 우리에게 '더하기'가 되신다. 기독교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하기'가 된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나다. 그렇다고 모세와 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준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세계 최고의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모세와 모세가 전한 율법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빼기'의 율법을 전해 받고도 세계 최고의 민족이 되었다. 하물며 '더하기'의 복음을 전해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선민이다. 우리가 만일 복음을 잘 이해하고 그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세계 최고의 예수의 민족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으며 하나님의 창조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인간에게 '더하기'가 되게 하는 분으로 믿으며 예수의 더하기식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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