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천주교인들의 순교영성(2)[히11:33-38]
본문
앞글에서 기독교 박해의 정황설명과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영성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조선 기독교인들이 당한 박해방법과 피난생활에 관해서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885년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대략 103년 동안 '사학죄인'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천주교인이 무려 1만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기록에 남은 숫자가 5천여 명이고, 무명의 순교자도 5천여 명에 달해서 일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았던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의 정치싸움에서 비롯되었다.
한국교회는 정치집단인 남인 시파(時派)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사도세자를 동정했던 사람들로써,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또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했던 정조와 영의정 채제공 시대에는 노론 벽파( 派)인 홍낙안의 공격으로부터 그럭저럭 보호를 받았다. 그러다가 1799년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고, 정조마저 1800년에 죽자 반대파인 순조의 섭정 정순왕후와 홍낙안이 남인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정순왕후와 홍낙안은 교회를 박멸하고자한 이유를 기독교의 비인간성과 비국민성, 그리고 체제도전에서 찾았다. 기독교인들은 죽기를 무릅쓰고 임금의 명령이나 국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제사를 배척함으로 유교적 질서를 거부하고, 비밀집회를 통해서 나라안전을 위협하며,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로 반상체제를 위협하는 국가의 원수 집단이며, 인륜과 충의를 저버린 짐승의 무리라 하여 그 씨까지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정순대비와 벽파의 무리들은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는 기존의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연대책임을 강화하여 기독교인 적발에 이용하였고, 체포된 기독교인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한 다음 처형하였다.
조선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던 장소는 주로 강변이나 군사훈련장에 위치하는 곳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한강 당산철교 북쪽 끝 지점에 있는 절두산과 용산의 새남터였다. 새남터는 노들(또는 사남기)이라고도 불리던 조선의 군사훈련장이었으며 중죄인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전주에서는 전주천변의 초록바위와 서천교 밑이 처형장소였다. 그밖에 서울에서는 조선시대 도성 안의 시체를 밖으로 내갈 수 있는 출구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용산전자상가 부근의 당고개가 기독교인을 처형했던 장소였다. 서울외 지역에서는 전주감영의 군사훈련장이었던 숲정이와 해미읍성, 공주감영, 보령 갈매못, 여산동헌, 원주감영 등이 기독교인들을 많이 처형했던 곳들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36-38절을 보면, 성서시대에 신앙인들이 받았던 악형들에 대해서 설명해 놓고 있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조롱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칼에 맞아 죽고, 양과 염소가죽을 입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맹수에 찢기고, 곤장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도 하였다.
조선 기독교인들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잔학한 박해를 당하였다. 그들이 당한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간추려서 말씀드리겠다.
첫째, 배고픔이다. 신자들은 체포되면 갖은 방법으로 고문을 당한 후에 멀리 외딴 곳으로 귀양을 가거나 처형당했는데, 살아남은 신자 또한 집과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또 박해 가운데 신자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배고픔이요, 목마름이었다. 다른 형벌은 잘 이기고도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진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에 두 번씩 주먹만한 조밥 한 공기밖에 먹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더러운 볏짚 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옥안에 기어다니는 이를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홍성에서 순교한 박취득은 8일 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해 기절하기도 했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에 있는 대아리 저수지에 있었던 속칭 고산 널바위에 살았던 김성철은 아들을 포함한 가족 6명과 마을사람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여산으로 끌려와 신문을 받고 나이 62세 때에 교수형을 받았다. 구전에 의하면, 이들은 얼마나 혹형과 굶주림에 시달렸던지, 옷 솜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풀밭인 처형지로 끌러 나오자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었다고 한다.
둘째, 귀양살이다. 다산 정약용과 그 형제들을 비롯해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심지어 배교한 교인들까지도 귀양을 보냈다. 또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자녀와 처는 노비로 삼으며, 시집가기로 약속된 여자는 친정으로 보냈고, 그 밖의 식솔들은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가산을 몰수했다. 예를 들면, 전주에서 육시형을 받았던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은 동생 문석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고, 유항검의 처 신희는 함경도 경원부로, 여섯 살 난 아들 일석은 흑석도로, 세 살 난 일문은 강진 신지도로, 그리고 아홉 살 난 딸 섬이는 거제도로, 며느리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으로, 조카 중성은 함경도 회령으로, 유관검의 처 이육희는 평안도 위안으로 각각 보내져 노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셋째, 고문이다. 교인들이 체포되면 제일 먼저 당하는 것이 매질이었다. 해미에서는 교인들의 머리채를 묶어 나무(회화나무)에 매달아 매질하고, 활을 쏘았고, 커다란 돌다리 위에서 머리채를 잡고 팔다리를 들어 돌에 메치어 가슴이 터지도록 머리가 부서지도록 자리갯질을 했다.
원주감영에서 순교한 최해성은 어찌나 맞았던지, 다리뼈가 부서져 뼛조각 두 개가 땅에 떨어졌고, 등과 배에 구멍이 나서 창자가 빠져 나왔다.
13년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옥중수기를 낸 신태보는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하였다. 주리란 두 팔은 둥 뒤로 묶고, 등과 팔 사이에 긴 막대기를 끼운 다음 그 막대기의 다른 절반에 양 무릎과 발목을 묶은 다음, 두 개의 굵은 몽둥이를 열 십자로 두 정강이 사이에 끼워 넣고서 두 사람이 몽둥이 끝을 타고 앉는 무서운 형벌을 말한다. 결국 신태보는 다리뼈가 으스러지고 손발을 쓸 수 없게되어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은 1839년 기해년 박해 때에 체포되어 그가 재상에게 써 바친 한국 최초의 기독교 변증서(상재상서)를 트집잡는 관헌들에게 몽둥이 끝으로 찔리고 톱질을 당한 끝에 뼈가 드러나는 고문을 당하였다.
합덕 사람 손자선은 공주감영에서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고 얼굴에 인분까지 덮어쓰는 고문을 당했다. 그때마다 그는 늘 웃는 얼굴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포졸들이 때리다가 지쳐 "무엇이 고마우냐?"고 물으면, 그 때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나와 같은 큰 죄인을 위하여 피를 많이 흘리시고 목이 말라 가래침을 잡수시며 돌아가셨거늘, 나를 이 모양으로 대접하여 주니, 이제야말로 내 죄를 보속하게 되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네 이빨로 네 살을 물어뜯지 않으면 배교한 것으로 여기고 놓아주겠다"라는 꼬임에도 "만 번을 죽어도 배교는 못하겠다!"면서 양팔을 한 입씩 물어뜯어 기절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넷째, 죽음이다. 순교자들 가운데는 참수형을 당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교수형으로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거나 옥사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자들은 우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다른 많은 방법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 동원되었는데, 그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백지를 여러 차례 붙여 질식시키는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된 사람들이 있었다.
전주천변에 있는 초록바위터에서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홍낙민의 손자 홍봉주의 아들이 15세 때에 수장되었다.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는 전라감사로부터 "너마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니 배교하라"는 권고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천지의 대군주이시고 대부모이신데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801년 10월 24일 46세의 유항검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시형을 당했다. 육시형이란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는 최대 극형으로서, 죄인을 일단 처형한 후에 그 시신을 머리,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몸통의 순서로 여섯 토막을 내어 전국 각지로 보내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형벌이다.
해미 여숫골에서는 많은 신앙인들이 한꺼번에 생매장 당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유해가 하나같이 선 채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열살 되던 해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목격했던 이주필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옛날 우리 신앙선조들은 처형이 늦으면 혹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포졸들이 밀어 넣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구덩이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홍주관아에서 원시장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에 결박된 채로 물세례를 흠뻑 받고 성밖에 내버려져 얼어죽었다.
충청북도 연풍에서는 돌구멍에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기독교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혀 죽게 하였다. 이 돌의 크기는 지름이 1미터, 둘레가 5미터이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뚫린 구멍의 크기는 앞의 것이 지름 20센티미터, 뒤의 것이 6센티미터로 원추형이다.
히브리서 11장 38절을 보면, 성서시대에 신앙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로마에서는 성도들이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 숨어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깊고 험한 산 속으로 피난하여 강원도, 전라북도, 충청도 일대 깊은 산골에 수많은 교인마을들을 형성하였다. 피난처의 특징은 도경계 지역 또는 군 경계지역의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알려진 수리치골은 산 하나만 넘으면 충청남도 청양군과 예산군에 닿을 수 있는 공주시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고, 김대건 신부가 묻힌 미리내성지 역시 경기도 용인군에 가까운 안성군 경계에 위치하고 있고, 배론성지 역시 강원도 영월군에 가까운 제천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속 군청의 군사들이 교인들을 잡으러 오면 쉽게 다른 군으로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인들이 숨어있는 관청에 체포령이 떨어지면 군사들은 먼길을 걸어서 잡으러 오기 때문에 군사들의 움직임은 교인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교인들은 급히 산을 넘어 피신했던 것이다.
교인들은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옹기를 만들어 구어 내다 팔면서 교인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바깥세상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망을 보다가 수상한 사람이 지나면 불을 지피는 척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굴속에서 안심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또 옹기를 등에 지고 길을 나서면 아무 집에라도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가족을 찾거나 흩어진 교우들을 만나고 교회 소식을 전하기에도 편리했다. 진천 근교 명암리에 있었던 교우촌 사기장골에서는 엉겨 붙은 옹이 그릇들이 발견되었는데, 옹기를 굽다 말고 포졸들에게 잡혀갔거나 도망갔을 절박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예전의 우리 조상들은 물리적인 박해로 인해서 피를 흘리는 순교를 통해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대신에 정신적 또는 문화적인 면에서 세속의 온갖 유혹들이 널려 있다. 이런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이 어쩌면 현대적인 순교일지 모른다.
1885년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대략 103년 동안 '사학죄인'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천주교인이 무려 1만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기록에 남은 숫자가 5천여 명이고, 무명의 순교자도 5천여 명에 달해서 일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았던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의 정치싸움에서 비롯되었다.
한국교회는 정치집단인 남인 시파(時派)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사도세자를 동정했던 사람들로써,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또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했던 정조와 영의정 채제공 시대에는 노론 벽파( 派)인 홍낙안의 공격으로부터 그럭저럭 보호를 받았다. 그러다가 1799년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고, 정조마저 1800년에 죽자 반대파인 순조의 섭정 정순왕후와 홍낙안이 남인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정순왕후와 홍낙안은 교회를 박멸하고자한 이유를 기독교의 비인간성과 비국민성, 그리고 체제도전에서 찾았다. 기독교인들은 죽기를 무릅쓰고 임금의 명령이나 국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제사를 배척함으로 유교적 질서를 거부하고, 비밀집회를 통해서 나라안전을 위협하며,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로 반상체제를 위협하는 국가의 원수 집단이며, 인륜과 충의를 저버린 짐승의 무리라 하여 그 씨까지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정순대비와 벽파의 무리들은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는 기존의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연대책임을 강화하여 기독교인 적발에 이용하였고, 체포된 기독교인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한 다음 처형하였다.
조선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던 장소는 주로 강변이나 군사훈련장에 위치하는 곳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한강 당산철교 북쪽 끝 지점에 있는 절두산과 용산의 새남터였다. 새남터는 노들(또는 사남기)이라고도 불리던 조선의 군사훈련장이었으며 중죄인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전주에서는 전주천변의 초록바위와 서천교 밑이 처형장소였다. 그밖에 서울에서는 조선시대 도성 안의 시체를 밖으로 내갈 수 있는 출구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용산전자상가 부근의 당고개가 기독교인을 처형했던 장소였다. 서울외 지역에서는 전주감영의 군사훈련장이었던 숲정이와 해미읍성, 공주감영, 보령 갈매못, 여산동헌, 원주감영 등이 기독교인들을 많이 처형했던 곳들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36-38절을 보면, 성서시대에 신앙인들이 받았던 악형들에 대해서 설명해 놓고 있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조롱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칼에 맞아 죽고, 양과 염소가죽을 입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맹수에 찢기고, 곤장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도 하였다.
조선 기독교인들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잔학한 박해를 당하였다. 그들이 당한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간추려서 말씀드리겠다.
첫째, 배고픔이다. 신자들은 체포되면 갖은 방법으로 고문을 당한 후에 멀리 외딴 곳으로 귀양을 가거나 처형당했는데, 살아남은 신자 또한 집과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또 박해 가운데 신자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배고픔이요, 목마름이었다. 다른 형벌은 잘 이기고도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진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에 두 번씩 주먹만한 조밥 한 공기밖에 먹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더러운 볏짚 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옥안에 기어다니는 이를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홍성에서 순교한 박취득은 8일 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해 기절하기도 했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에 있는 대아리 저수지에 있었던 속칭 고산 널바위에 살았던 김성철은 아들을 포함한 가족 6명과 마을사람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여산으로 끌려와 신문을 받고 나이 62세 때에 교수형을 받았다. 구전에 의하면, 이들은 얼마나 혹형과 굶주림에 시달렸던지, 옷 솜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풀밭인 처형지로 끌러 나오자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었다고 한다.
둘째, 귀양살이다. 다산 정약용과 그 형제들을 비롯해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심지어 배교한 교인들까지도 귀양을 보냈다. 또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자녀와 처는 노비로 삼으며, 시집가기로 약속된 여자는 친정으로 보냈고, 그 밖의 식솔들은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가산을 몰수했다. 예를 들면, 전주에서 육시형을 받았던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은 동생 문석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고, 유항검의 처 신희는 함경도 경원부로, 여섯 살 난 아들 일석은 흑석도로, 세 살 난 일문은 강진 신지도로, 그리고 아홉 살 난 딸 섬이는 거제도로, 며느리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으로, 조카 중성은 함경도 회령으로, 유관검의 처 이육희는 평안도 위안으로 각각 보내져 노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셋째, 고문이다. 교인들이 체포되면 제일 먼저 당하는 것이 매질이었다. 해미에서는 교인들의 머리채를 묶어 나무(회화나무)에 매달아 매질하고, 활을 쏘았고, 커다란 돌다리 위에서 머리채를 잡고 팔다리를 들어 돌에 메치어 가슴이 터지도록 머리가 부서지도록 자리갯질을 했다.
원주감영에서 순교한 최해성은 어찌나 맞았던지, 다리뼈가 부서져 뼛조각 두 개가 땅에 떨어졌고, 등과 배에 구멍이 나서 창자가 빠져 나왔다.
13년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옥중수기를 낸 신태보는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하였다. 주리란 두 팔은 둥 뒤로 묶고, 등과 팔 사이에 긴 막대기를 끼운 다음 그 막대기의 다른 절반에 양 무릎과 발목을 묶은 다음, 두 개의 굵은 몽둥이를 열 십자로 두 정강이 사이에 끼워 넣고서 두 사람이 몽둥이 끝을 타고 앉는 무서운 형벌을 말한다. 결국 신태보는 다리뼈가 으스러지고 손발을 쓸 수 없게되어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은 1839년 기해년 박해 때에 체포되어 그가 재상에게 써 바친 한국 최초의 기독교 변증서(상재상서)를 트집잡는 관헌들에게 몽둥이 끝으로 찔리고 톱질을 당한 끝에 뼈가 드러나는 고문을 당하였다.
합덕 사람 손자선은 공주감영에서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고 얼굴에 인분까지 덮어쓰는 고문을 당했다. 그때마다 그는 늘 웃는 얼굴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포졸들이 때리다가 지쳐 "무엇이 고마우냐?"고 물으면, 그 때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나와 같은 큰 죄인을 위하여 피를 많이 흘리시고 목이 말라 가래침을 잡수시며 돌아가셨거늘, 나를 이 모양으로 대접하여 주니, 이제야말로 내 죄를 보속하게 되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네 이빨로 네 살을 물어뜯지 않으면 배교한 것으로 여기고 놓아주겠다"라는 꼬임에도 "만 번을 죽어도 배교는 못하겠다!"면서 양팔을 한 입씩 물어뜯어 기절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넷째, 죽음이다. 순교자들 가운데는 참수형을 당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교수형으로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거나 옥사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자들은 우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다른 많은 방법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 동원되었는데, 그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백지를 여러 차례 붙여 질식시키는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된 사람들이 있었다.
전주천변에 있는 초록바위터에서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홍낙민의 손자 홍봉주의 아들이 15세 때에 수장되었다.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는 전라감사로부터 "너마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니 배교하라"는 권고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천지의 대군주이시고 대부모이신데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801년 10월 24일 46세의 유항검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시형을 당했다. 육시형이란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는 최대 극형으로서, 죄인을 일단 처형한 후에 그 시신을 머리,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몸통의 순서로 여섯 토막을 내어 전국 각지로 보내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형벌이다.
해미 여숫골에서는 많은 신앙인들이 한꺼번에 생매장 당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유해가 하나같이 선 채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열살 되던 해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목격했던 이주필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옛날 우리 신앙선조들은 처형이 늦으면 혹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포졸들이 밀어 넣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구덩이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홍주관아에서 원시장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에 결박된 채로 물세례를 흠뻑 받고 성밖에 내버려져 얼어죽었다.
충청북도 연풍에서는 돌구멍에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기독교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혀 죽게 하였다. 이 돌의 크기는 지름이 1미터, 둘레가 5미터이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뚫린 구멍의 크기는 앞의 것이 지름 20센티미터, 뒤의 것이 6센티미터로 원추형이다.
히브리서 11장 38절을 보면, 성서시대에 신앙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로마에서는 성도들이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 숨어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깊고 험한 산 속으로 피난하여 강원도, 전라북도, 충청도 일대 깊은 산골에 수많은 교인마을들을 형성하였다. 피난처의 특징은 도경계 지역 또는 군 경계지역의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알려진 수리치골은 산 하나만 넘으면 충청남도 청양군과 예산군에 닿을 수 있는 공주시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고, 김대건 신부가 묻힌 미리내성지 역시 경기도 용인군에 가까운 안성군 경계에 위치하고 있고, 배론성지 역시 강원도 영월군에 가까운 제천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속 군청의 군사들이 교인들을 잡으러 오면 쉽게 다른 군으로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인들이 숨어있는 관청에 체포령이 떨어지면 군사들은 먼길을 걸어서 잡으러 오기 때문에 군사들의 움직임은 교인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교인들은 급히 산을 넘어 피신했던 것이다.
교인들은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옹기를 만들어 구어 내다 팔면서 교인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바깥세상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망을 보다가 수상한 사람이 지나면 불을 지피는 척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굴속에서 안심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또 옹기를 등에 지고 길을 나서면 아무 집에라도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가족을 찾거나 흩어진 교우들을 만나고 교회 소식을 전하기에도 편리했다. 진천 근교 명암리에 있었던 교우촌 사기장골에서는 엉겨 붙은 옹이 그릇들이 발견되었는데, 옹기를 굽다 말고 포졸들에게 잡혀갔거나 도망갔을 절박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예전의 우리 조상들은 물리적인 박해로 인해서 피를 흘리는 순교를 통해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대신에 정신적 또는 문화적인 면에서 세속의 온갖 유혹들이 널려 있다. 이런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이 어쩌면 현대적인 순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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