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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개신교인들의 영성(1)[벧전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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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6,438 2002.09.1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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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는 각 시대마다 민족의 영성을 지배해온 종교들이 있다. 크게 보면, 삼국시대 이전에는 피조물 세계를 영으로 숭배하는 주술적이고 기복적인 무교가 지배하였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피조물 세계에 부정적이며 탈세속적인 불교가 지배하였고, 조선시대에는 관료적이고 형식적이며, 조상신을 섬기는 유교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피조물 세계에 긍정적이며 진취적이고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기여한 공은 참으로 지대하다.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개화를 주도한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18세기 말 조선에 발달된 서양학문과 천주교를 들여온 이들이 실학파였고, 19세기 말 조선에 민주주의를 비롯한 서양학문과 기독교를 들여온 이들이 개화파였다. 그래서 19세기는 실학파 천주교인들이 순교의 피를 뿌리면서 진보적이고 희생적인 기독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20세기는 개화파 개신교인들이 심한 탄압 속에서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기독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한국 천주교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순간부터 가혹한 박해를 받아 순교의 피로 거름하기를 100년에 걸쳐했고, 일만 명이 넘는 많은 순교자를 냈다. 그러한 한국 천주교가 40여 년에 걸친 일본의 탄압과 수탈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순교는, 한편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목숨 바쳐 지켜내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순교는 수동적이고 무저항적이기 때문에 악의 세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한국 천주교가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義士)와 같은 개인들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침략과 수탈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유가 순교의 이 부정적인 면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국 천주교는 실학파 이승훈이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1784년 이후부터 100년의 긴 세월동안 참으로 가혹한 박해를 받았으며, 일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내는 동안에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천주교보다도 훨씬 늦은 1860년에 세워진 천도교 역시 탄압과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피동적으로 당하기만 하지 아니하고, 한반도에서 외세의 패권쟁탈이 절정을 향해서 달려갈 때인 1894-1895년에 동학도들은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고 의를 세운다'는 뜻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다섯 자를 새긴 깃발을 날리면서 혁명을 일으켜 양반사회와 공무원의 부패 그리고 외국의 침략에 저항했는가하면, 일제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싸우기도 하고, 개신교가 주도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도 가세하였다.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무려 100년이나 늦게 박해가 끝난 다음에 이 땅에 전래되었기 때문에 천주교가 겪어야 했던 그 엄청난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 올 당시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들어내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때에 한국 개신교는 비록 이제 막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려 싹을 내던 단계였지만, 일만 여명의 순교자를 낸 탓으로 피해의식이 컸던 천주교가 침묵으로 일관하며 움츠려든 그 때에, 분연히 일어서 민족운동과 애국운동을 일으켰으며, 민중을 계몽하며, 항일투쟁과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는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한 구교회로, 한국 개신교는 민족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신교회로 이 땅에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초기 한국개신교인들의 영성을 찾아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초기 한국개신교인들은 이 땅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국가를 이루기 위해서 헌신하였다. 이런 일을 한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월남 이상재 선생이다. 이상재는 1850년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열 여덟 살 때에 실학파인 박정양의 밑에 들어가 13년간 심부름을 하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박정양의 도움으로 벼슬을 얻기도 하였고, 개화된 일본을 시찰하였으며, 초대 주미공사가 된 박정양을 따라 서기관으로 1년간 미국생활도 하였다. 비록 청국의 간섭과 훼방으로 박정양과 이상재는 미국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이상재가 미국에서 보고 느낀 것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이상재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그들의 발전된 문명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캐기 시작했는데, 한 청국인 관리가 서구문명의 근원은 성경에 있다고 일러주면서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을 한 권 주었다. 처음 그는 군사 육성법이나 무기 제조법과 같은 비결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그가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것은 군사 육성법이나 무기 제조법과 같은 것이 아니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었다느니, 죽은 사람이 부활하였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미국의 발전된 문명의 기초라는 사실 때문에 성경을 손에서 떼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1902년 감옥에 수감된 이후, 성경을 다시 여러 차례 읽게 되었고, 비로소 깨닫게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데에는 함께 수감되었던 개화파 기독교인들의 도움도 컸을 것이다.
한편 1884년 12월에 개화파 인사들이 주도한 정치 구데타,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다음,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1년만에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왔다. 미국시민권까지 얻었던 서재필은 조선에 돌아와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문을 세우며,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서구 민주주의 도입과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하였다. 이 독립협회의 영향으로 고종은 국가의 명칭을 대한제국으로 고쳤고, 황제란 칭호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3년 만인 1898년에 독립협회는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였고, 독립협회의 간부들에게는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 때 이승만을 비롯한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상재도 그의 아들 승인과 함께 1902년에 체포되어 한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곳 감옥에는 1901년경에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이 주선하여 도서실을 개설하였는데,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헐버트와 같은 선교사들이 책을 마련하여 주었다. 이들이 넣어준 책들 가운데는 일반서적은 물론이고, 성경을 포함한 기독교 서적들도 섞여있었다. 이들 기독교 서적들을 읽고 또 먼저 기독교인이 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상재를 비롯한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이 한성감옥에서 기독교에 개종하였다. 이 때에 기독교에 개종한 사람들은 이승만과 이상재 말고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쓰신 남궁억을 비롯하여 유성준,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이승인, 신흥우와 같은 분들이다.
이들 개화파 기독교인들은 일본이 1904년에 일어난 노일전쟁에서 이기고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냄으로써 명실상부한 한반도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면서 석방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연동교회로 모였다. 그러다가 일부 인사들이 묘동교회와 안동교회를 세웠고, 또 YMCA를 창설하여 청년운동을 펼쳤다. 이들 개화파 인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이상재는 YMCA 신앙강좌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로 의식화된 많은 청년들을 길러냈다.
둘째, 초기 한국개신교인들은 곳곳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이다. 이승훈은 태어난 지 팔 개월만에 어머니를 잃었고, 열 한 살 될 때까지는 할머니와 아버지까지 모두 잃은 고아 출신의 장사꾼이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민족운동가로 변신하여 이름을 남긴 오산학교 설립자이다.
이승훈은 1907년 기독교인이자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그 이튿날로 상투를 자르고 개화인이 되었으며, 즐기던 술과 담배를 끊고 신민회에 가담하여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기까지 4년간 국권의 회복을 위해서 힘썼다.
이승훈의 민족운동은 동네 길을 쓸고 풀을 뽑는 것으로 시작하여,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을 계몽하였고, 신민회에 가담하여 동지들을 모았는데, 그가 속한 서북지역의 신민회 회원들은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 한일합방이후 이승훈은 1911년에 발생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과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셋째, 초기 한국개신교인들은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인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서 서명자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독립선언문의 내용 역시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유, 평등, 독립이었다.
민족독립운동에 힘쓴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많지만, 그 가운데서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한 상도파 독립지사 구연영 전도사, 전덕기 목사, 그리고 이준 열사를 소개하겠다.
구연영 전도사는 1895년 민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해서 을미의병(乙未義兵)을 일으킨 의병장 출신이었다. 구연영은 유생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을미의병이 실패로 끝나자, 민족 운동에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1897년 2월 스스로 남대문에 위치한 상동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후에 목회자가 된 전덕기 속장과 더불어 엡윗(Epworth)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특히 친일파인 일진회를 규탄하는 강연을 자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군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이천에서 미루나무에 묶인 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아홉 살 때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다음, 숯장수를 하던 작은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17세 때인 1892년에 제발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을 찾아가 수년간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후에 목사가 되었고, 남대문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크게 민족운동을 펼치다가 1911년 데라우치 암살 음모 사건 때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39세의 나이로 순절한 사람이다.
전덕기 목사는 독립협회, 엡윗 청년회, 신민회 등 구한말 민족 운동 단체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1905), 헤이그 밀사 사건(1907),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1911)과 같은 항일 구국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가 만든 엡윗 청년회, 공옥학교, 상동 청년학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도파의 주요 멤버 가운데는 주시경, 이승만, 헤이그 밀사로 활동했던 이준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비록 상도파는 아니지만, 전덕기와 더불어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을 함께 펼쳤던 인사 가운데는 진남포 감리교 청년회 총무 김구도 포함되어있다.
마지막으로 전덕기 목사와 더불어 구국활동을 했던 헤이그 밀사 이준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다.
이준은 세 살 때 부모를 잃고 친척들의 손에서 자란 고아였다. 이준은 민영환을 중심으로 이상재 등과 함께 1902년 개혁당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1904년에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공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철도(鐵島)라는 섬으로 잠시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이 전덕기 목사가 시무하는 상동교회에서 열었는데, 이준은 김구 등과 함께 적극 가담하여 상소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의병운동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의 항일운동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고 하였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는 미국, 영국, 러시아를 비롯한 40개국 대표 2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아무런 힘이 없었던 고종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헤이그에 비밀특사를 파견하였는데,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뽑혔다. 특사들의 임무는 을사보호조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적 근성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 그들의 후원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숙소를 정하고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대표들의 온갖 훼방이 있었으나 특사들의 불굴의 노력으로 일제의 만행이 신문지상을 통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대표들은 끝내 만국회의에 초청 받지 못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항의했던 이준은 그가 묻고 있던 호텔에서 돌연히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기독교식으로 네덜란드에 묻혔다가 56년 만인 1963년 9월 30일에 고국으로 돌아와 수유리 한신대학원 뒷산에 다시 묻혔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분들은 초기 한국개신교 신앙인들 가운데서 특히 집안이 가난했거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나 예수 믿고 변화되어 국가가 외세에 짓눌려 있을 때에 구국운동에 몸바쳐 헌신했던 위대한 분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개신교 신앙인들의 신앙족보에 실린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신앙족보에는 그 어떤 민족의 기독교인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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