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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개신교인들의 영성(2)[행1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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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6,537 2002.09.1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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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선교사들의 간접적인 도움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인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조선 땅에 외국인 신부가 첫발을 디딘 것은,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서 요청하기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한 것처럼, 조선 천주교인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천주교보다 100년 이상 늦게 조선 땅에 전래된 개신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땅에 개신교복음의 씨가 최초로 뿌려진 것은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조선인들이 능동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전파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1885년 개신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 이 땅을 밟을 당시에만 해도 평안북도 의주와 황해도 소래에 교회가 있었고, 서울에서만도 이미 70여명의 세례 지원자들이 있었다. 이 모두가 서상륜이란 사람의 전도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이 당시에만 해도 조선에는 아직 신앙의 자유가 없었던 때이다. 기독교는 천주교 또는 야소(예수)교라는 이름으로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서학에 반발하는 동학도들에게도 배척을 받았던 때였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번역된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쪽복음서 번역 팀의 한 사람이자, 판매원이이었으며, 뛰어난 전도인이었다. 또 그의 동생 서경조는 형 서상륜보다는 늦게 예수를 영접하였지만,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황해도 소래에서 목회하였다.
서상륜은 1849년생으로 평안북도 의주 사람인데, 14세 때에 부모님을 잃고, 동생을 데리고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그는 한문을 공부한 잘생긴 양반집 자제였지만, 부모도 아니 계시고, 또 홍경래의 난(1811)에서 보듯이 반체제 정신이 강한 평안도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차별 때문에도 정치적으로 출세할 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그래서 서상륜은 이미 십대의 나이에 만주를 넘나들며 무역을 했다. 그러나 그는 경험부족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고, 고향 친구들과 함께 홍삼을 수출하는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개신교 복음을 처음 받아드린 조선인들이 바로 이 서상륜과 같은 국경지역에 사는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양반출신의 국제 보따리 장사꾼들이었다. 천주교와 서학을 접하고 받아드렸던 최초의 사람들이 조선의 선비들이었던 것처럼 개신교를 접하고 받아드렸던 최초의 사람들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양반출신의 상인들이었다.
이 때 중국은 아편 전쟁(1842) 이후 서방에 문호를 열고 있었고, 만주에서는 영국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교회와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이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의 섭리로 만주에 진출한 조선인 양반출신의 국제 보따리 장사꾼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쓴 것은 복음을 받아드렸던 몇몇 양반출신의 국제 보따리 장사꾼들이 먼저 위기를 만난 후에 영국인 선교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 글인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동참했던 이응찬은 의주 사람으로 만주에서 처음으로 선교사와 접촉한 사람인데 장사꾼이었다. 그는 1876년에 만주에 내다 팔 물건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다가 그만 물건을 강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응찬이 밑천을 모두 잃고 상심하고 있던 차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를 만나 그의 어학선생이 되었고, 그를 도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응찬은 1879년에 의주의 하급관리의 아들이었던 백홍준과 함께 역시 영국인 선교사 매킨타이어(J. McIntyre)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우리 나라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홍삼을 가지고 중국에서 장사를 하던 중에 만주 봉천성 요령현의 항구도시 영구에서 장질부사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남의 나라의 주막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독과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영국인 선교사 매킨타이어에게 어학을 가르치고 있던 고향 친구 이응찬이 서상륜을 매킨타이어에게 소개하였다. 이응찬의 소개로 서상륜을 찾아본 매킨타이어는 곧바로 서상륜을 자기 집으로 옮기고 극진히 보살폈으며, 영국인 의사를 불러 매일 두세 차례씩 진찰하게 하고 약을 써서 치료하여주었다. 물론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의 보살핌이었다. 그 결과 서상륜은 두 주일만에 죽음 직전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일로 서상륜은 크게 감명을 받았고,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소명을 주신 것으로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이 유교의 가르침을 따랐던 조국의 친구와 친척들은 자기를 인물 좋은 도적놈이라고 흉만 보고 상대도 하지 않는데, 생전에 보도 듯도 못하던 외국인이 기독교의 복음과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죽을 목숨을 살려 준데 대해서 서상륜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서상륜은 친구 백홍준의 가르침을 받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독교에 관해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여전히 기독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탄압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특한 부름의 섭리를 따라서 서상륜은 "옛일을 다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의 출발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 온지 일년만에 서상륜은 장사하던 일과 집안 일을 모두 정리해버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선교사를 찾아서 만주 영구로 되돌아갔다.
이 때, 만주 영구에는 2년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1881년 5월에 돌아온 스코트랜드인 선교사 로스가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우리말 성경 번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인쇄기를 설치하여 성경 인쇄에 착수하던 때였다. 이뿐 아니라, 로스는 의주 출신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었다.
이 로스 선교사를 영구에 간 서상륜이 만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서상륜은 로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복음을 깊이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외모로는 공자와 맹자의 도를 섬기고, 스스로 문벌을 신뢰하고, 안으로는 교만과 궤휼과 거짓과 간음과 탐냄을 품어 남의 생명을 해하고 재물을 속이며 남을 얕잡아 보고 나만 잘 생겼다고 자랑하였고, 주위 사람이 흠잡아 말하기를, '면주자루에 개똥'이라고 하여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의 지혜를 자랑하고 다녔으니,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진실로 한심하고 무섭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면주자루에 개똥'이란 말은 '비단자루에 개똥'이란 말로써 성경에 나오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말이다. 겉모양은 멋진데 속에는 냄새나는 개똥이 담겼다는 뜻이다.
철저한 자기 반성이자 회개였다. 양반 집에서 태어나 가문을 내세우며 자만했던 나날들, 남을 속이며 생명까지도 빼앗았던 지난 날, 인간의 모든 악한 행실을 직업 탓으로 돌리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개였다. 이런 회개와 반성이 있고 난 후인 1882년 봄에 드디어 서상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로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고 로스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개신교 개척자의 첫발을 딛게 되었다.
서상륜은 세례를 받고 대략 6개월 정도를 만주에 머물면서 로스의 성경번역을 도왔다. 그러나 서상륜은 자신의 사명이 성경번역보다는 번역된 성경을 조선에 반입하여 사람들에게 팔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882년 10월 6일,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복음젼셔}를 봇짐 속에 감춰 메고 반입을 시도하던 중에 의주국경검문소에서 검색을 받고 금서인 야소책을 소지한 혐으로 체포되었으나, 너그러운 검사관의 도움으로 책은 압수 당하였지만, 무사히 풀러날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서상륜이 검문소를 나와 의주에 잠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상륜을 검색했던 관리가 찾아와 압수했던 책들이 매우 좋은 책들이라며 그 자신이 바지 속과 소매 속에 감춰서 가져온 그 책들을 내놓으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서상륜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고 담대하게 활동하였다.
한편 로스 선교사는 서울에 정착한 서상륜에게 성경을 전달하려고 애셨다. 평양출신의 인쇄공을 통해서 4백여 권의 쪽복음서를 1883년 5월에 비밀리에 전달하였고, 서상륜은 이것을 가지고 힘써 전도하여 그해 말에 13명의 세례 지원자가 있음을 로스에게 알렸다.
1884년 로스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상해와 제물포간 항로를 통해 쪽복음서와 한문서적 {德惠入門} 등의 신앙서적을 서상륜 앞으로 보냈는데, 세관에서 발각되어 문제가 되었다. 이 때 조선정부의 독일인 관리 뭴렌도르프가 그 부인의 간청으로 개입하여 그 책들을 무사히 서상륜에게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 일이 있었던 1884년 말에는 세례 지원자가 7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들 세례 지원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수 있는 사람이 국내에는 없었다. 아직 국내에는 선교사나 목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상륜은 그동안의 전도성과에 대해서 로스에게 알리면서 입국하여 세례 지원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갑신정변이 발생하여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이 더욱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해인 1885년 4월에 언더우드와 7월에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그리고 서상륜이 언더우드 목사를 만난 것은 1886년 말이었다. 서상륜은 언더우드에게 황해도 소래에 내려와서 그곳 신앙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선교사들에게는 여행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서상륜의 요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 다음해인 1887년 1월에 서상륜이 황해도 소래에 있는 세례 지원자 4명을 인솔하여 서울로 올라와 세례를 받게 하였다. 세례를 받은 4명 속에는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가을에 가서야 비로소 북부 지방을 여행하면서 서상륜과 백홍준이 전도하여 생겨난 신앙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 9월 27일에는 서울 정동에 있던 언더우드의 자택에서 세례 교인 14명으로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가 형성되었는데, 이 가운데 1명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상륜과 백홍준의 전도를 받아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는 만주에서 온 로스 목사도 참석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쳐 파송한 서상륜과 백홍준의 활동성과에 매우 감격해 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 한국개신교 전도인 서상륜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한국 기독교인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뿌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또는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들이 아닌 우리 자신의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을 통해서 그들의 위대한 정신과 신앙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개신교 전도인 서상륜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이 있다.
첫째, 조선 기독교는 조선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앞글에서 말했듯이 한국의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 또한 선교사들이 아닌 조선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인의 기독교이어야 한다.
둘째, 조선 기독교는 우리 글, 한글의 발전과 반포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 또한 언문으로 천시되어 질그릇에 불과했던 순 우리 글에 하늘의 보배를 담아 전달함으로써 한글의 발전과 한글을 깨우치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국 최초의 신앙인이자 유학자였던 광암 이벽이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나이 26세 때에 지은 [천주공경가]를 시작으로 교리서, 기도문, 성경 등을 순 우리 글, 한글에 담아서 전달하였고, 까막눈이 돼놔서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깨우치는 일까지 해냈던 것이다.
셋째, 서상륜 자신이 영국인 선교사 매킨타이어가 베푼 선행을 통해서 복음을 접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복음전도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돌보는데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초기 한국개신교 전도인 서상륜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순간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긍휼을 베푼 그리스도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의 가르침을 따랐던 친척과 친지 그리고 동족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애와 희생적인 사랑이 서상륜에게 전달되었을 때, 서상륜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넷째, 의미 있는 삶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회개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서상륜은 복음을 받아드린 후, 옛일을 떨쳐버렸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며, 과거의 삶을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한 후에는 평신도로써 전도인의 삶을 살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는 참으로 많은 순교자들과 위대한 선배들을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이다. 천주교는 천주교대로, 개신교는 개신교대로 세계 어느 나라의 기독교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자랑스런 선배들을 많이 배출했다. 후배들인 우리들은 그분들의 업적과 전통을 자랑스럽게 이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상륜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삶을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하며, 잘못된 습관을 떨쳐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되며,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명주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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