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는 대로 거둔다[갈6:7]
본문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그의 {권력의 이동}이란 책에서 인류는 근육질에서 나오는 힘(Muscle)과 돈(Money)의 권력시대를 지나 이제는 정신(Mind) 또는 지식의 권력시대를 맞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의 조상들이 경험했던 시대는 힘센 장사가 대우받았던 시대였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시대는 돈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시대는 폭력이나 부(富)가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지식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교수는 "21세기 정보사회의 마인드"란 주제의 강연에서 근대문명을 가능케 한 개미와 같은 조직중심 시대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며, 앞으로 오는 시대는 거미와 같은 멀티미디어 시대라고 예견하면서 21세기는 정보마인드를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생각의 패턴이나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것뿐이다.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절대성에서 '다른 것도 있다. 다를 수도 있다.'는 상대성에로, 획일성에서 다양성에로, 하드웨어 몸체중심에서 소프트웨어 브레인중심에로, 생명이 없는 조화 같고 온정이 없는 기계적인 세계관에서 생명이 있고 향기가 있고 끈끈한 정이 있는 유기체적이고 생태학적인 세계관에로, 인간중심의 가치관에서 생명중심의 가치관에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존의 신앙생활의 패턴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 이 분이 미국인 오랄 로버트 목사이다. 이 분은 자신의 이름, '오랄'이 뜻하는 바와는 달리 지독한 말더듬이였다. 또 폐병으로 사경을 헤매었던 사람이다.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목사로 또 오랄 로버트 대학교의 창설자로 성공했다. 그는 {씨앗 신앙의 기적}이란 책에서, 인간을 의지하던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로, 열매만을 추구하던 생활에서 씨뿌림의 생활로, 소극적인 믿음생활에서 기적을 믿는 적극적인 믿음생활로 신앙생활의 패턴을 바꿀 것을 권하고 있다. 그래서 오랄 목사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삶의 세 가지 원리를 말씀드리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원천과 도구의 원리이다.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에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원천이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하나님이라는 생각에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공급원이시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람들이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사람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주인이시며, 사람은 관리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공급원은 주인이지, 관리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공급의 원천이시며, 사람은 도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공급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직장이나 부모나 후원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생활비의 공급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유일한 공급원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인간을 의지하고 직장을 의지하는 한 근심과 걱정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기대 이상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며,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원리가 부모나 회사의 사장이나 후원자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들에게 깊은 감사와 성실함으로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을 공급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쓰시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어떤 농부가 밭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재배에 성공했다. 그가 재배에 성공한 나무는 엘베르타(Elberta)라는 크고 맛좋은 복숭아가 열리는 품종이었다. 사람들은 그 복숭아를 사기 위해서 원근 각처에서 찾아왔다. 복숭아 농사는 성공적이었다. 수확도 좋았고 수입도 짭짤했다. 그러나 이 농부는 나무보다는 열매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자기에게 돈을 벌어 주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공급원은 복숭아나무가 아니라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농부는 나무에 열리는 열매에만 정신이 팔려서 나무를 돌보지 않았다. 수확이 줄기 시작했다. 수확한 열매도 전보다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입이 줄었다. 농부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복숭아나무를 살펴보았다. 나무마다 벌레가 먹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서야 농부는 서둘러 약을 치고 병든 나무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늦은 헛수고였다.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과실수는 한 해만 정성 들여 돌보지 않아도 쓸모가 없게 된다. 결국 농부는 나무를 잘라내고 다시 심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를 경험한 이 농부가 혹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삶의 공급원과 도구를 바꾸어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공급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삶의 공급원은 부모도 회사의 사장도 후원자도 아니다. 이 분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공급원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해야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한다. 빌립보서 4장 19절의 말씀대로 우리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
둘째, 심음과 거둠의 원리이다. 받는 것에서 주는 것에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열매만을 추구하던 생활에서 씨뿌림의 생활로 신앙생활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또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 앞에서 계산적인 인간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 않고 어떻게 거두겠느냐는 말씀이다. 뿌린 것이 없이 어떻게 열매를 따겠느냐는 말씀이다. 심지 않고 거두겠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엄하게 말씀하신다.
성서에는 자신의 헤아림으로 오히려 헤아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반대로 적은 것으로 심고 크게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자신의 헤아림으로 오히려 헤아림을 당한 사람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그리고 예수의 달란트 비유 가운데 마지막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처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땅을 팔았다. 그러나 땅을 팔아서 돈을 손에 쥐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전 재산을 털어서 헌납해 버리고 나면 살길도 막막했고,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부분만 헌금하기로 결정을 하고 나머지는 감추었다. 사실 그들은 이 돈을 전혀 감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말대로 땅을 팔기 전에도 그들의 땅이었고, 판 후에도 그 대금을 임의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뻔한 거짓말로 교회와 하나님을 속인 데 있다. 농경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웃 집 수저가 몇 개라는 것까지 다 외우고 살았다. 누구네 집 땅이 몇 마지기이고 값은 얼마라는 것까지 다 알고 살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뻔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헤아림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았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갈라디아서 6장 7절의 말씀대로 그들은 거짓으로 심었고 죽음으로 거두었다.
예수의 달란트 비유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크다. 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각자의 능력대로 그 돈을 장사에 투자했다. 투자한 만큼 이 사람들의 열심도 남달랐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은 그가 투자한 돈의 액수가 컸기 때문에 이익이 많았던 것이 아니다. 크게 투자한 만큼 손해도 클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의 노력은 남보다 컸을 것이다. 이 사람에게 한 달란트의 보너스가 주어진 것은 결코 불공평한 혜택이 아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공정한 원리가 적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헤아렸다. 속된 말로 통박을 굴린 것이다.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마25:25) 생각했다. 죽도록 벌어봐야 주인의 몫으로 빼앗길 것이기 때문에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받은 것을 투자하지도 심지도 않았다. 받은 대로 잘 간수했다가 되돌려 주면 그만 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이자는 생각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심지 않고 거두려 했던 게으른 종은 받은 것까지도 빼앗기고 말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성서에는 적은 것을 심고 크게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3년 6개월의 가뭄으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기로 작정을 하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이 때 역시 몹시 굶주린 엘리야가 나타나서 이 불쌍한 과부에게 간청을 했다. "배가 몹시 고프니 밥을 좀 주십시오." 이 때 여인이 대답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만, 나는 밥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음식을 만들어 나와 내 아들이 먹고 죽을 것입니다"(왕상17:12).
절박한 순간이었다. 배고파 죽어 가는 아이를 둔 과부의 심정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매정하게 엘리야는 음식을 가져오도록 요구했다. 도대체 남의 생각은 조금치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게는 배고파 죽어 가는 아이가 있답니다. 선생님께 나누어 드릴 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간곡히 부탁한다. "걱정 말고 가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세요. 그 다음에 남는 것으로 당신과 당신의 아들을 위하여 만들어 드십시오.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은 결코 소모되지 않을 것입니다"(왕상17:13-15).
상식을 초월한 매정한 요구였다. 그러나 이 과부는 순종했다. 마지막 남은 약간의 식량으로 음식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통의 가루가 소모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여러 날을 먹어도 통의 가루가 줄어들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소모되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말씀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한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작은 것을 심고 큰 것을 수확한 것이다. 적게 심고 많이 거둔 것이다. 이것이 심고 거둠의 법칙이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는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요 6:1-13).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빈들에 모인 민중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말 그대로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상식을 초월한 요구를 하셨다. 그 숫한 민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몹시도 가난했던 제자들 역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도 없으려니와 그 많은 음식을 구해온다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어린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든 도시락을 예수께 내어놓았다. 소년으로써는 결코 작지 아니한 희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적은 음식은 수천 배로 불어나는 기적을 창출했다. 이것이 심고 거둠의 법칙이다.
셋째, 믿음과 기적의 원리이다. 소극적인 믿음생활에서 기적을 믿는 적극적인 믿음생활로, 절망에서 희망에로, 불가능에서 가능에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믿음으로 반죽될 때에 기적의 빵이 산출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믿음으로 공급될 때에 수천 명을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산출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있는 한 기적은 오늘날에도 일어나다. 성서시대에 발생했던 기적과 반드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도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만일 우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마 17:20)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도 산을 옮기는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막 10:27)는 소박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의 삶은 달라 질 수 있다. 만일 우리에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눅 12:28) 순박한 믿음이 있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면(눅 12:31) 우리의 삶은 기적이 넘쳐나는 삶으로 바꿔질 수 있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기존의 신앙생활의 패턴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 이 분이 미국인 오랄 로버트 목사이다. 이 분은 자신의 이름, '오랄'이 뜻하는 바와는 달리 지독한 말더듬이였다. 또 폐병으로 사경을 헤매었던 사람이다.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목사로 또 오랄 로버트 대학교의 창설자로 성공했다. 그는 {씨앗 신앙의 기적}이란 책에서, 인간을 의지하던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로, 열매만을 추구하던 생활에서 씨뿌림의 생활로, 소극적인 믿음생활에서 기적을 믿는 적극적인 믿음생활로 신앙생활의 패턴을 바꿀 것을 권하고 있다. 그래서 오랄 목사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삶의 세 가지 원리를 말씀드리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원천과 도구의 원리이다.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에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원천이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하나님이라는 생각에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공급원이시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람들이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사람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주인이시며, 사람은 관리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공급원은 주인이지, 관리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공급의 원천이시며, 사람은 도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공급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직장이나 부모나 후원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생활비의 공급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유일한 공급원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인간을 의지하고 직장을 의지하는 한 근심과 걱정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기대 이상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며,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원리가 부모나 회사의 사장이나 후원자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들에게 깊은 감사와 성실함으로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을 공급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쓰시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어떤 농부가 밭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재배에 성공했다. 그가 재배에 성공한 나무는 엘베르타(Elberta)라는 크고 맛좋은 복숭아가 열리는 품종이었다. 사람들은 그 복숭아를 사기 위해서 원근 각처에서 찾아왔다. 복숭아 농사는 성공적이었다. 수확도 좋았고 수입도 짭짤했다. 그러나 이 농부는 나무보다는 열매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자기에게 돈을 벌어 주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공급원은 복숭아나무가 아니라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농부는 나무에 열리는 열매에만 정신이 팔려서 나무를 돌보지 않았다. 수확이 줄기 시작했다. 수확한 열매도 전보다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입이 줄었다. 농부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복숭아나무를 살펴보았다. 나무마다 벌레가 먹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서야 농부는 서둘러 약을 치고 병든 나무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늦은 헛수고였다.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과실수는 한 해만 정성 들여 돌보지 않아도 쓸모가 없게 된다. 결국 농부는 나무를 잘라내고 다시 심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를 경험한 이 농부가 혹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삶의 공급원과 도구를 바꾸어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공급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삶의 공급원은 부모도 회사의 사장도 후원자도 아니다. 이 분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공급원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해야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한다. 빌립보서 4장 19절의 말씀대로 우리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
둘째, 심음과 거둠의 원리이다. 받는 것에서 주는 것에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열매만을 추구하던 생활에서 씨뿌림의 생활로 신앙생활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또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 앞에서 계산적인 인간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 않고 어떻게 거두겠느냐는 말씀이다. 뿌린 것이 없이 어떻게 열매를 따겠느냐는 말씀이다. 심지 않고 거두겠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엄하게 말씀하신다.
성서에는 자신의 헤아림으로 오히려 헤아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반대로 적은 것으로 심고 크게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자신의 헤아림으로 오히려 헤아림을 당한 사람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그리고 예수의 달란트 비유 가운데 마지막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처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땅을 팔았다. 그러나 땅을 팔아서 돈을 손에 쥐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전 재산을 털어서 헌납해 버리고 나면 살길도 막막했고,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부분만 헌금하기로 결정을 하고 나머지는 감추었다. 사실 그들은 이 돈을 전혀 감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말대로 땅을 팔기 전에도 그들의 땅이었고, 판 후에도 그 대금을 임의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뻔한 거짓말로 교회와 하나님을 속인 데 있다. 농경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웃 집 수저가 몇 개라는 것까지 다 외우고 살았다. 누구네 집 땅이 몇 마지기이고 값은 얼마라는 것까지 다 알고 살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뻔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헤아림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았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갈라디아서 6장 7절의 말씀대로 그들은 거짓으로 심었고 죽음으로 거두었다.
예수의 달란트 비유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크다. 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각자의 능력대로 그 돈을 장사에 투자했다. 투자한 만큼 이 사람들의 열심도 남달랐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은 그가 투자한 돈의 액수가 컸기 때문에 이익이 많았던 것이 아니다. 크게 투자한 만큼 손해도 클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의 노력은 남보다 컸을 것이다. 이 사람에게 한 달란트의 보너스가 주어진 것은 결코 불공평한 혜택이 아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공정한 원리가 적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헤아렸다. 속된 말로 통박을 굴린 것이다.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마25:25) 생각했다. 죽도록 벌어봐야 주인의 몫으로 빼앗길 것이기 때문에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받은 것을 투자하지도 심지도 않았다. 받은 대로 잘 간수했다가 되돌려 주면 그만 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이자는 생각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심지 않고 거두려 했던 게으른 종은 받은 것까지도 빼앗기고 말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성서에는 적은 것을 심고 크게 거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3년 6개월의 가뭄으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기로 작정을 하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이 때 역시 몹시 굶주린 엘리야가 나타나서 이 불쌍한 과부에게 간청을 했다. "배가 몹시 고프니 밥을 좀 주십시오." 이 때 여인이 대답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만, 나는 밥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음식을 만들어 나와 내 아들이 먹고 죽을 것입니다"(왕상17:12).
절박한 순간이었다. 배고파 죽어 가는 아이를 둔 과부의 심정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매정하게 엘리야는 음식을 가져오도록 요구했다. 도대체 남의 생각은 조금치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게는 배고파 죽어 가는 아이가 있답니다. 선생님께 나누어 드릴 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간곡히 부탁한다. "걱정 말고 가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세요. 그 다음에 남는 것으로 당신과 당신의 아들을 위하여 만들어 드십시오.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은 결코 소모되지 않을 것입니다"(왕상17:13-15).
상식을 초월한 매정한 요구였다. 그러나 이 과부는 순종했다. 마지막 남은 약간의 식량으로 음식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통의 가루가 소모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여러 날을 먹어도 통의 가루가 줄어들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소모되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말씀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한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작은 것을 심고 큰 것을 수확한 것이다. 적게 심고 많이 거둔 것이다. 이것이 심고 거둠의 법칙이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는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요 6:1-13).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빈들에 모인 민중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말 그대로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상식을 초월한 요구를 하셨다. 그 숫한 민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몹시도 가난했던 제자들 역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도 없으려니와 그 많은 음식을 구해온다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어린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든 도시락을 예수께 내어놓았다. 소년으로써는 결코 작지 아니한 희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적은 음식은 수천 배로 불어나는 기적을 창출했다. 이것이 심고 거둠의 법칙이다.
셋째, 믿음과 기적의 원리이다. 소극적인 믿음생활에서 기적을 믿는 적극적인 믿음생활로, 절망에서 희망에로, 불가능에서 가능에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이 믿음으로 반죽될 때에 기적의 빵이 산출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믿음으로 공급될 때에 수천 명을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산출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있는 한 기적은 오늘날에도 일어나다. 성서시대에 발생했던 기적과 반드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도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만일 우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마 17:20)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오늘날에도 산을 옮기는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막 10:27)는 소박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의 삶은 달라 질 수 있다. 만일 우리에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눅 12:28) 순박한 믿음이 있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면(눅 12:31) 우리의 삶은 기적이 넘쳐나는 삶으로 바꿔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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