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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고전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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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6,235 2002.09.14 17:03

본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 가장 위대한 예언자, 가장 훌륭한 대제사장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훌륭한 예언자였을 뿐이지 실제로 왕이나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분은 짧은 36년의 생애를 통해서 진정한 왕이 어떤 사람인지, 또 참 예언자는 어떤 사람인지, 또 훌륭한 대제사장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셨다. 그분은 실제로 왕이었거나 대제사장이 아니었으면서도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 또 가장 뛰어난 대제사장으로서 또 가장 훌륭한 예언자로서 지난 2,000년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배해왔다. 그분은 실제로 왕이었거나 대제사장이 아니었으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또 가장 많은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가장 위대한 왕이요, 가장 위대한 예언자요, 가장 훌륭한 대제사장이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실제로는 왕이거나 예언자이거나 제사장이 아닐지라도 예수처럼 왕 노릇할 줄 알아야 하고, 예언자노릇 할 줄 알아야 하고, 제사장노릇 할 줄 알아야 한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옳은 일에 홀로 설줄 알고, 정의의 편에 설줄 알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칠지라도 하나님 편에 설줄 아는 사람이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본능과 욕심과 죄를 다스리고 불의를 다스리는 사람이지,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 아니다.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 편에 서서 가진 자의 독재와 횡포를 견제하고 각종 부조리와 죄악상을 고발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죄로 인해서 썩고 캄캄한 곳에 소금을 뿌리고 빛을 비추는 사람이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사람 편에 서서 사람의 입장을 하나님께 대변하는 사람이다. 고난의 시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앞장서는 사람이다. 투쟁의 시기에는 정의의 용사들을 응원하는 사람이다. 평화의 시기에는 죄인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사람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씨조선 마지막 100년, 다시 말하면, 19세기를 산 천주교인들 가운데 10,000여명이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고 있다. 이들 순교자들이 우리 민족의 제사장들이었다.
20세기의 처음 절반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제에 항거하여 싸웠다. 이 일에 앞장섰던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교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일제로부터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받고, 더러는 순교하고 있다. 이들 애국지사들이 우리 민족의 예언자들이었다.
한국천주교는 일제시대에 안중근과 같은 소수의 독립지사들을 제외하고는 예언자노릇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던 그들이 유신독재와 군사독재 때에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민주화 투쟁에 힘써왔다. 명동성당이 민주화 투쟁의 성지처럼 굳어진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유신독재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기는 개신교의 진보세력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당시 보수세력으로부터 빨갱이라는 비판까지 받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예언자교회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박해시대도 아니고, 왜정시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재시대도 아니다. 따라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할 일도 없고,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제와 싸울 일도 없고,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칠 일도 없어졌다. 그렇다면 시민으로서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노릇이나 제사장 노릇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도 할 일이 많다.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각종 시민단체에 가입해서 물질로 후원도 하고 직접 참여도 하면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사회복지운동, 부패추방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등에 힘을 쏟는 '참여연대'라든지, 부동산투기근절운동, 부동산실명제실시운동, 금융실명제실시강화운동, 우리농업살리기운동, 시민의 알권리보장과 행정민주화운동을 펼치는 '경실련'과 같은 시민단체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예언자들이다. 또 심각한 환경파괴로부터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환경운동연합'이라든지, 생명체복제반대운동, 핵폐기물수출반대운동 등을 펼치는 '녹색연합'과 같은 단체들이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다. 또 이런 단체들을 후원하거나 직접 참여하는 일이 예언자노릇 하는 것이다.
또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나 보호자가 없는 아동들을 돌보는 복지시설들, 기타 여러 사회복지법인들, 각종 선교단체들, 기타 자원봉사단체들이 바로 이 시대의 제사장들이다. 또 이런 단체들을 후원하거나 직접 참여하는 일이 제사장노릇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치 경제 종교 제반 분야에서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다. 나라의 경제붕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민족의 개화와 민주화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기독교마저 오늘날에 와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두가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위치에서 예언자노릇 잘하고, 제사장노릇 잘하고, 왕 노릇 잘했으면 지금과 같은 이런 불행한 일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 같다.
대한민국 시민으로서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포기한 채 평화를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정의를 포기한 채 평화를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적당한 상벌 없이 용서와 관용으로 일관해서는 정의로운 사회나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면 그것도 일종의 불신행위이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39-42를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였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오른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편 뺨까지 대주고,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동행을 강요하는 사람의 청을 두 배로 들어주면, 그 사람이 과연 이 쪽의 착한 마음에 감동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인지, 또 믿고 돈을 빌려주거나 남의 빚 보증을 서줘도 요즘 같은 IMF시대에 별탈이 없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동부지역 여러 곳에서는 재침례파에 뿌리를 둔 아미쉬(Amish), 후터라이츠(Hutterites) 또는 메노나이츠(Mennonites)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문명세계를 거부하고 원시농경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돌려대는 평화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평화주의자들은 주변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범죄대상이 되고 있다. 악한 사람들은 그들을 고의적으로 괴롭히고 조롱한다.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어하는 나쁜 사람들 때문에 평화주의자들은 고통받기 일수이고 때로는 살해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평화주의자들의 이상적인 삶은 아름답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다.
매맞아줘서 때리는 사람의 버릇을 고칠 수 있다면 맞아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매맞는 사람들의 고백을 보면, 맞아주면 줄수록, 때리는 사람의 성격이 광폭해지고 사디즘(sadism)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매맞는 사람도 자주 맞다보면 마조히즘(masochism)에 빠질 수 있다. 매맞지 않으면 되래 불안하고, 매맞고 나야 안도되는 경우를 말한다.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있는 매맞는 부인들의 고백이나 집단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해자들은 대개 약자에게 강한 면모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태복음 5장은 올바로 해석되어야 한다. 마태복음은 모세의 율법을 최고로 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이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권위 있고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세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사람에게 재앙이 되는 일들을 많이 행하였지만, 예수는 사람에게 복이 되는 일들만 행하셨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을 죽이고 넘어뜨리고 억압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복음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 5장 39-42절의 말씀들은 용서하고 돕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복음정신 또는 기독교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복음정신이 용서하고 돕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라고 해서 범법행위를 눈감아주고 강도를 놓아주고 빚 보증을 함부로 서주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가 이뤄지지 않는다.
올바른 기독교정신은 십자가에 농축되어 있다.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이자 곧 정의의 표시이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자, 인간의 죄 값에 대한 저주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주보다는 사랑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하나님이 대신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은 정의와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
고사성어 가운데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말이 있다. 송 나라가 초 나라를 상대로 싸우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이 밝자 초 나라 군사가 배를 띄워 강을 계속 건너기 시작했다. 송 나라의 공손고가 송양공(宋襄公)에게 이르기를, "초군이 날 밝기를 기다려 강을 건너는 것은 우리를 심하게 깔보기 때문이옵니다. 그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를 기다려 공격하면 초 나라 군사를 무찌를 수 있습니다"고 했다. 공손고의 말이 끝나자마자 송양공은 출전할 때 갖고 나온 큰 기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 눈에는 저 인(仁)과 의(義), 두 글자가 보이지 않소? 과인은 정정당당하게 싸울 것이오. 어찌 비겁하게 적이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겠소!." 공손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탄식만 했다. 그사이에 초 나라 군사가 순식간에 강을 건넜다. 초군 대장 성득신이 긴 채찍을 손에 들고 군사를 지휘하여 동서로 진을 펴는데 초군의 기상이 하늘을 찌를듯했다. 공손고가 다시 양공에게 간청했다. "적은 아직 진을 치지 못했나이다. 이때 북을 울려 적을 무찌르면 그들은 정신을 못 차릴 것이옵니다." 이에 양공은 공손고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그대는 적을 공격하는 일시적인 이익만 알고 만세의 인의(仁義)는 모르는가! 어찌 진도 치지 못한 적을 공격하겠는가!" 이 싸움에서 송군이 참패를 했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바로 '착하기만 하고 어리석다'는 뜻으로 쓰이는 고사성어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유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월드컵 시합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왕 노릇, 예언자노릇, 제사장노릇 잘해야할 이유가 마치 월드컵국가대표팀이 시합에 나가서 잘 싸워야할 이유와 같다.
축구시합은 이기기 위해서 한다. 절대로 지기 위해서 하지 않는다. 시합에 이기려면, 강한 투지와 개인기 및 팀웍이 있어야 한다. 투지는 승부근성이자 정신력이요, 개인기는 기술이자 실력이며, 팀웍은 전술이자 전략이다. 이 세 가지가 잘 갖추어져야 시합을 이길 수 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스포츠 경기에 출전한 사람들은 모두가 월계관을 쓰기 위해서 경쟁한다고 말하면서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한다"고 했다. 이 말은 목표 없이 뛰지 아니하고, 헛스윙을 하기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월드컵 대표팀은 1무2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돌아왔다. 1-2차 전에서 멕시코와 네덜란드에 참패당한 이유는 투지, 개인기, 전술전략 모두에서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3차 전인 벨기에와의 경기에서는 개인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특유의 투지와 승부근성을 십분 발휘하여 좋은 경기를 펼쳤다. 그리고 우리 나라 월드컵 대표팀은 이번 월드컵에 출전한 것만으로도 20억 원의 순수익을 올렸다.
한국인들은 실리보다는 명분, 현실보다는 이상,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착실한 투자보다는 결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번 월드컵농사를 망친 이유를 여기서 찾고 있는 것 같다.
또 전문가들은 우리 선수들의 개인기가 부족한 이유를 기술교육이나 기반시설투자 없이 체력과 투지만을 이용한 손쉬운 승리에 만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일본은 전용구장을 건설하고, 유망한 어린 선수들을 외국에 축구유학 보내고, 값비싼 세계적인 스타들을 영입해서 J리그를 국제 수준으로 높여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린 선수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코치나 감독에게 촌지를 건네지 않고서는 경기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벤치만 지키다 선수생활을 끝내야 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소년 스포츠의 산실인 학원 스포츠의 현실이자 관행이란 점이다.
대한민국 시민으로서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승부근성도 가져야하고, 실력도 쌓아야하고, 전술전략도 갖춰야한다. 내일 당장 예수가 재림하신다해도 경쟁에서 이기려는 투지와 실력향상을 위한 피나는 노력과 포부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마냥 져주고 무조건 양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과 다른 점은 정직한 플레이를 한다는 점이지, 승리를 양보한다는 점이 아니다. 이 땅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역군이 되기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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