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및 기타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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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각오, 계획, 노력[욥기 23:10; 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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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6,763 2002.08.31 01:39

본문

학생의 신분은 전장터에 나가기 위해서 훈련을 받고 있는 군인과 같습니다. 군인은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학생도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학생을 군인의 신분에 비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예수의 군사로 표현한 것 같이 학생도 군인과 같은 정신 무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기본적인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첫째, 군인에게는 점령해야 할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 목표를 반드시 점령하고 말겠다는 각오와 집념이 있어야 합니다. 세째, 치밀한 계획과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군인은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훈련 중에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은 전장터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매우 상식적인 것이어서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목표를 설정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굳센 각오와 신념으로 자신을 절제하며 훈련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낫기를 소원하여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나면서 부터 소경된 두 사람이 지나 가는 예수를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예수님을 소리치며 불렀을 때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들은 성경 여기 저기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서가 말하는 신유의 기적들이 환자의 믿음과 염원 때문에 일어 났다는 것입니다. '낫고 싶다', '나을 수 있다'는 염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치유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간절한 바램은 큰 일을 해내고야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말하기에 앞서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라는 강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염원하고 꿈을 꾸게 될 때에 우리는 소원을 이루게 됩니다.

강한 바램과 소원은 목표를 갖게 합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이 동기를 부여하여 행동을 유발합니다. 사람에게는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고 싶다', '해야 한다', '할수 있다' 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질 때에 그리고 설정된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약진할 때에 인간의 잠재력과 영력은 크게 발휘됩니다. 같은 시간에 출발선을 떠나도 목표와 꿈이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 집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토끼는 빨리 달릴 수는 있었지만, 목적의식이 없었고, 거북이는 비록 느리긴 했지만, 정복해야 할 목표가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거북이의 목적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정복해야 할 목표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성공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아니 하고, 성실과 노력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을 탓하고 주저 앉아 버리는 한 달란트를 받은 악한 종이되어서는 안됩니다.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은 것은 그들이 재능이 많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상업의 목표가 있었고, 이윤을 남기겠다는 신념과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심판치 아니 하시고, 인간의 노력의 결과를 가지고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에 아들 하나를 둔 거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매우 착하고 평화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대째 거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지 생활을 면해 보자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졌더라면 3대째 거지 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생활이 편안하고 좋다는 생각이 대를 물려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3대째 계속 거지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구두 수선을 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평생 다른 직업을 가져 보지도 않고 이 일만을 계속 해왔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수선 기구 몇 가지가 궤짝 하나만 있으면 그럭 저럭 밥은 먹고 사니까 별 불만 없이 그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6.25 후에 그 분의 친구 한 분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그 할아버지 옆에서 조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배운 구두 수선하는 기술도 없고 해서 옆에서 보따리를 펴놓고 비누나 칫솔 같은 일용품을 팔는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장사가 잘 되자 구멍 가게를 차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자기의 구두 궤짝이 고맙기도 하지만 이 궤짝이 없었으면 자기도 보따리 장사를 해서 친구와 같이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손해를 본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이들 에피소드에서 우리들은 사람의 꿈과 신념과 의지와 노력의 중요성을 봅니다. 무언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구두 궤짝이나 거지 생활과 같은 적은 만족에 도취해서 그것에 안주해 버림으로서 의미없이 살아 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위대함을 가진 우리는 훨씬 위대한 꿈을 가지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빛을 주면서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던가요?.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던 소년은 기필코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나단니엘 호오돈의 짧은 소설의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의 소년과 같이 꿈이 있고, 각오가 있는 사람은 시련을 당하여 좌절하거나 낙심치 아니 합니다.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성숙해지며, 목표에 도달합니다. 성서 속에 나타난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여행을 주제로 삼아 '순례자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향인 갈릴리 지방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 가시는 선교여정과 그 곳에서의 수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실 곳은 예루살렘이였습니다. 그 곳에 도착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표였습니다. 이 후 예수님은 굳은 각오로 많은 환란과 십자가의 형틀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마라톤 코스의 골인 지점과 같은 곳입니다. 그곳은 월계관을 받아 쓰는 승리의 단상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민중의 환호와 영접을 받으시며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의 수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으로서 입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서 화려한 대관식 대신에 심문과 조롱과 매맞음과 십자가의 사형선고를 받고 순교를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이루어야 할  큰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에 대해서 기록하는 목적은 당대의 성도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아픔과 수고와 시련이 있다 할지라도, 또 그것이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성도는 월계관을 받아 쓰기까지 반드시 목적지를 향해서 올라 가야 한다고 교훈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사례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본보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게될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실망하여 그런 일이 결단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를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유혹으로 보고 단호하게 물리쳐 버렸습니다. 목표를 향해서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은 시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참아야 하지, 그것을 회피하거나 주저 앉아 버려서는 안될 것을 가르칩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워 질 수록 예수님의 마음은 매우 무겁고 괴로웠습니다. 그곳에서 발생될 여러 가지 불길한 일들을 예측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잡히시기 전 날 밤, 예수님은 안락과 평안의 유혹을 뿌리치시고 죽음으로서 예루살렘성을 정복하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정대로 체포되셨고, 다섯 번의 재판을 받으시고, 살점을 찢는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선교여행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모범자이신 것처럼, 바울은 성도의 모범자가됩니다.

누가는 바울이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유럽의 교회들을 순방한 후에 오순절에 맞추어서 서둘러 예루살렘에 올라 가는 바울의 여정을 적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 가는 바울의 심정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면서 가졌던 심정과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그의 아픔과 고난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행 20:22-24).

바울 일행이 팔레스틴(가이사랴)에 도착하였을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붙들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지 말도록 말렸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들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지 말도록 말렸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말려 예루살렘에 올라 가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고 단호하게 평안과 안일의 유혹을 뿌리쳐 버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결국 잡혀서 예수님 처럼 다섯 번의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인 예루살렘이 고난과 죽음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 교회상황이 박해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올 크나큰 영광에 참여키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함께 동참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롬 8:17-18).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은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는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18)고 하였습니다.

크나 큰 시련을 겪었던 바울 사도나 욥의 신앙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바 소망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시련을 통해서 단련하신다고  말했고, 욥은 순금을 뽑기 위해서 광석을 뜨거운 용광로에 녹이고 단련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갈 길을 미리 아시고 시련을 통해서 자신을 단련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고생과 역경을 이기고 체력과 기술을 단련한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여 메달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24-27의 말씀에서, 메달을 다투는 선수가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같이 자신도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련은 메달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이룬다"(롬 5:4)고 산 체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난은 축복을 기약하는 연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이 시련 후에 전보다 두배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고난은 축복에 대한 시샘과 같은 것이며, 햇살이 있기 위해서 한바탕의 비바람과 천둥이 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소나기를 맞은 식물은 더욱 푸르게 자랍니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고난은 소나기처럼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소나기 몇번 맞고 나면 모든 것이 싱싱해 집니다. 계시록이 고난의 기간을 매우 짧은 기간인 삼년 반으로 표시하고 있는 반면, 축복의 기간을 무려 천년으로 표시하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대학 생활의 짧은 기간을 목표를 세우고, 각오를 굳게 하여,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노력 한다면, 우리에게는 긴 축복된 삶이 약속될 것입니다. 성서를 기록한 신앙인들은 어떠한 환경과 시련에 처해서도 결코 승리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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