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서(1911-1994)목사
 


구광서 목사(사진 가운데)는 한국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교회와 불과 32킬러미터 떨어진 동군 낙도면 마유리에서 개신교 선교 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여 4개처 교회를 개척한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런 연유로 구광서는 어린 18세에 집사로 피택되어 교회를 섬겼다.

구광서의 선친은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시고 난 후 소천하였다. 그 일로 구광서의 개인생활은 물론 진학의 길도 막혀 부득히 농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구광서는 동창 3인과 협력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운동회 때 내건 만국기에 미국기가 포함되었다는 죄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또 신사참배 문제로 투옥되었다가 조선인 경찰에게 화형을 받고 풀려 나와 부득이 종교망명객이 되어 만주 길림에 가서 일본 유학생으로 3.1운동을 하던 한철수 장로와 선교사 최혁우 목사를 돕다가 1943년경 귀국하여 1945년에는 교계활동을 시작하였다.

구광서는 황해도 청년연합회 소년부장으로 일하며, 공산치하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김구주석을 모신 한국독립당 지하조직을 가지고, 상해 임정시 애국운동을 하던 장만리와 함께 활동하였다.

1947년 38선 문제로 미소위원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 기독청년 5도 연합회 임원들도 회원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때 체포령이 떨어져 월남하게 되었다.

월남 후 경기도 옹진에서 상해임시 국무위원장이었던 도연권 감리교회 목사를 만나 그분의 소개로 김구 주석을 만나 지도위원 임명장을 받고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대법원 특별 재판부 서기관으로 발령받아 대법원에 근무하였다.

대법원에 근무하던 중 고향에서 같이 월남한 자매 한 분이 힐 요한 선교사의 집에서 일하였는데, 이 때 우연히 힐 요한 선교사와 최상현 목사를 만나게 되어 환원동지가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초대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유무악기 통합 때에 유악기에서 서기겸 회계직을 맡았었고, 1965년에는 대한 기독교 신학교에서 부교장을 지냈으며, 1967년 대한 기독교 신학교와 대전 성서신학교의 통합이 거론될 때에 대한 기독교 신학교 대표로 활동하였다. 구광서 목사는 돈암동 그리스도의 교회,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도원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거치며 목회 활동하시다가 1994년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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