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석기 전도자(1881-1972)
 


동석기 전도자는 1881년 4월 6일 함경도 북청에서 유교집안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일찍이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7세에 결혼하였다. 1904년 23세 때에 우연한 기회로 미국 하와이로 이민하였고,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과 게레트 신학교(Garrett Biblical Institute)에서 공부하였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1913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4년간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죄로 복역한 바 있다. 그는 귀국 후 원주지방 순행 목사로 교역을 시작하였고, 이듬 해에 인천 내리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당 안팎과 목사관 등을 수리하고 부속학교의 운동장을 확장했으며, 열성적인 목회로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17년에는 서울 마포교회, 1919년에는 수원의 남양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이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와 수원지역 독립운동 책임자였던 김세환과 친분을 맺고 자주 조선의 독립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특히 동석기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경력으로 영국과 미국의 외교관들과 친분을 맺고 있었고 세계 정세에도 밝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민족자결주의 물결이 일어나는 상황 등을 박희도 등에 전달하는 구미 소식통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당시만해도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 많지 않았던 터라 동석기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 동석기는 자신의 관할 지역인 사강, 비봉 등지를 순회하며 교회 발전을 위해서 힘쓰는 한편, 교인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가 목회하였던 수원지방이 3.1운동의 성역이 된데는 그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이다.

동석기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3.1운동 민족대표로 서명하였으나, 이후 33인의 일원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는 3월 1일 상경하여 오후 2시에 회집된 파고다 공원의 학생대열에 참가하였고, 선언식을 마친 다음에는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으로부터 의주로, 정동 미국 영사관 앞, 대한문 앞,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프랑스 영사관등지를 돌며 시위를 하였고, 미국 총영사관에 가서 당시 일어나고 있는 민족자결운동의 상황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전을 의뢰하다 검거되어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고 복역을 하였다.

동석기는 3.1운동의 참가로 1920년 부득이 남양교회를 사임하고 충남 청양교회에서 1922년까지 시무하였고, 자유로운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가서 봉천의 영고탑교회에서 1년간 목회하였다.

1927년에 다시 도미하여 순회하던 중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었고, 신시내티 성서 신학대학원(Cincinnati Bible Seminary)에 입학하여 연구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에 관한 교리를 명확히 파악코자 노력하였으며, "미국 환원운동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를 연구하여 1929년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그는 거기서 대오각성하고 1930년 11월에 귀국하여 자기 고향 북청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여러 개 개척하였다(초리 함전교회, 덕성면 시흥리 교회, 수동리 교회, 수서리 교회, 하거서면 임자동 교회, 맹경시 교회, 증산리 교회 등).

그는 1935년 재차 도미하여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모금운동을 벌였다. 귀국 후 1939년 9월 서울 내수동 106번지에 작은 가정 집을 교회로 마련하였다. 이것이 현재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이다. 해방 후 이북에 개척하였던 교회를 모두 잃자 남한에서의 환원운동과 교회 설립에 주력하였다. 6.25사변 이후에는 부산지방에서 활동하였고, 그밖에 지역의 교회들을 후원하였다. 

한편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최초로 1954년 5월에 데일 리차드슨(Dale Richardson)이 내한하였는데, 이 사람이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내한한 선교사였다. 그 다음으로 10월에는 헤스케일 체시얼(L. Haskiel Cheshir) 선교사가 내한하였는데, 이들은 다 동석기 목사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은퇴 후 말년에는 미국에서 거주하다가 1972년 90세의 고령으로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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