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성 목사(1910~1957)
 


정찬성 목사는 충북 반능이 고향이다. 친구인 이학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집배인이었다. 낮에는 편지를 돌리고 저녁에 교회를 다녔는데, 당시 일제는 정찬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정찬성은 신앙에 맞지 않다 하여 가미사마에 요배하는 것을 피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편지를 돌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리가 부어올라 쓰지 못하게 되었고, 병을 고치려고 수소문 끝에 청주송립 병원을 알게 되어 찾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동안 병원에서 성경책을 주며 읽도록 권하였다. 마친 교회를 다니고 있던 터라 기도하기를, "내가 여기서 병을 낫게 되면 사도 바울과 같이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습니다."고 했는데, 기도를 마친 순간 아픈 다리가 낫게 되었고, 나중에 김용선 자매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김용선은 정찬성이 다리를 조금 저는 것을 보았고, "아, 내가 다리 저는 사람과 결혼했구나."고 걱정하였다고 한다.

이후 정찬성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노방전도를 다녔는데, 왜경들이 추적하였다. 그는 믿는 사람들(목사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청주 남조동, 대전 신탄진, 충주로 이송되면서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처형이 계신 만주로 가 복음을 전하였다. 만주에서는 산에 올라 나무뿌리와 열매를 따먹어 가며, 구둔하우시통(구두수리하는 통)을 만들어 왜경의 눈을 피해가며, "모든 사람은 일본 가미사마를 믿지 말고 주 앞에 빨리 나와 구원을 받으라."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면 일본 사람이 오또상 오또상하며 또하라고 격려를 해주기도 하였다 한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던 때, 인자(목사 사모), 용기(충주 순복음교회 목사), 형기(금촌 순복음교회 목사)가 태어났고, 해방이 되어 고향인 반능으로 돌아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심방리 연못골이라는 자기 집에서 반능교회를 하다 다시 왜정시대 때의 사립학교를 구입해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쯤에 만주에서 만난 적이 있는 김은석 목사와 서신왕래가 이루어져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처럼 일하기로 약속하고 부강에서 만났다.

이후 삼정골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부강에서 김은석 목사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정찬성은 부강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제1기생이었다.)를 하였는데 그 때가 1946년 정초였다. 이 때 부강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1948년 충남 대덕 신탄진으로 가 복음을 전하다가 6.25동란을 만났다. 동란 중에 장인 김정만 목사가 사는 충북 송정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1950년 겨울 북한군에 잡혀 밤새도록 고문을 당하였다. 북한군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자 밤새도록 총대로 구타하였다. 아침에 북한군은 예수 믿지 않을 사람은 이쪽으로 나오라고 말하고, 남은 사람들을 향해서 난사하였는데, 당시 정찬성은 기도를 하느라 머리를 들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총알이 살짝 빗나가면서 구사일생하였다. 총알 세례를 받고 난 후, 눈을 뜨고 자기 몸을 꼬집어보니,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북한군이 후퇴한 후 가족이 정찬성 목사를 찾아 나셨는데,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을 찾으려면 신체적인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마침 정찬성은 남달리 곱슬머리였고, 옥니였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보고 더듬었는데, 마침 정 목사의 머리가 발견되어 일으켜보니, 온몸이 새까맣게 되어 있었으나 죽지 않고 눈을 뜨고 있었다. 치료를 받고 회복된 후, 충남 부여를 거쳐 충주에서 환원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김은석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1957년 4월 25일에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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