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강 장로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된
배경
일제시대 때부터 부강 오데골에 장로교회가 하나 있었다. 1936년
김교인 장로가 부강으로 이사 올 당시에는 교회가 너무 작아서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였다.
그래서 1945년 가을에 김은석 목사를 담임으로 모실 때까지 김교인 장로가 부강교회를 이끌고 인도하였다. 당시에 교인은 5-6명
정도였다(김교인 장로가족, 김규상 목사 모친 구 집사, 작은 어머니).
1944년 김교인 장로 집안에 어려움이 발생하여
부인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지방에서 노회가 열려 노회에 참석하였다가 광고시간에
서울에서 훌륭한 목사님이 오셨는데, 모실 교회는 모시라는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부인과 상의하였다. 김교인 장로의 부인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살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안건을 교회에 부처 승낙을 얻고, 1945년 가을에 청주노회로부터
김은석 목사를 모셨다.
김은석 목사는 부임 첫 날 사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교회로 들어갔으며, 부임 첫날부터 100회 집회를 선언하고 부흥집회를 열었다. 김은석은
부흥회 기간 동안 항상 금식으로 준비하였다. 김은석은 첫날 "모든 문제는 나한테
있다. 내 죄를 생각하고 내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주제로 설교하였다. 그런데
그 시간부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교회가 놀랍도록 부흥하였다.
그 당시에 교회는 한옥 초가였는데, 많아야 15-20명
정도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 년도 채 못되어 100여명으로 식구가 늘었다. 부흥회
4일째 되던 어느 날 철야기도 중인 새벽 4시경에 성령의 불이 쏟아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곳에 모였던 70여명이 큰 은혜를 받았으며, 잠시 용변을 보고 들어오다가
문고리를 잡았던 황집사라는 분은 그 순간 성령의 불을 받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새벽에 성령의 불이 타는 것을 보고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다고 전하니 얼마나 놀라운 역사인가?
이처럼 교회가 성령의 불로 뜨겁게 달구어지는
가운데 김은석은 요한 계시록을 풀어 전하였고, 성도들은 모두 다 아멘으로 화답하며
거듭나고 중생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녹골, 황골에도 교회가 개척되었다.
한편 이 소식은 인근 마을들에 퍼져 나갔고,
노회에도 알려져 노회에서 두 세 번 자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은석은 자신의
부흥운동이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사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부흥운동을
지속하였고, 결국 노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일부 교인들(박오덕, 김집사, 황집사,
민명옥 전도부인, 장집사)을 제외한 나머지 김교인을 비롯한 교인들은 김은석 목사와
함께 나와 김규상 목사의 모친 구집사의 집 대청마루로 예배처를 옮겼다. 이 때 정찬성,
장주열, 김명석 같은 분들이 찾아왔으며, 그후로 수 개월 동안은 구집사의 집에서
모이다가 현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터로 옮기게 되었다.
이 터는 당시 일본인 장번의 집으로 누에를 치던
잠실자리였다. 이 집은 당시 적산이었는데, 건물이 무려 150-200평에 달해 아무도
사지를 않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일제 때 시집 안간 처녀가 이 집에서 목메어 죽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건물이 쓰러져가는 형편이었다. 이 건물을 싸게 불하받아 60평 크기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 때 김규상 목사의 부친께서 목재를 대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 예배당은 인근에서 가장 잘 지어진 큰 교회로 알려졌었고, 교회 이름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부강교회였다. 이 때부터 이 교회당은 충청 이남지역의 환원운동의 산실이 되었고,
침례와 매주 성만찬을 지켰다.
2.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통한 복음전도

예배당이 세워지고 난 다음부터 인근지역에서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성경으로 잘 가르칠 목적으로 경천학(經天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들에게 성경과 한글과 별곡 찬송을 가르쳤다.
이 당시 부강에는 장로교회와 성결교회가 더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 같다. 대한청년회 단장하는 모교회 목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김은석 목사를 시기하고 중상모략하여 지방에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로 그는 감찰실로부터 2명을 매수하여 김은석 목사를 구타토록
하였다.
하루는 김은석 목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찾아보니, 맞아서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건강을 되찾은 김은석은 전도가방을 들고 자기를 구타한
사람을 찾아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니, 이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실토하기를, "목사님께서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맨 정신으로는
구타할 수 없어서 하지 않자, 그가 두 번째 찾아와 술을 먹이며, 김은석 목사가 빨갱이라고
하자, 술김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였다. 당시 부강은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세북청년당과 대한청년단 빨갱이들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후 날이 갈수록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갖게 되었고, 여기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가
자기 교회를 신약성경의 교회로 환원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고, 김은석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도 일부 지역의 교회들이 이
성경연구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교수로는 김은석, 정찬성, 신현창, 동석기 목사였고,
가끔씩 김문화 목사가 요한 계시록을 강의하였다. 학생으로는 후에 목회자가된 김명석,
장주열, 김재순, 최요한, 김정만, 박점상 등이었다.
6.25를 맞아 김은석과 성경연구회는 전남 광주로 피난하였다.
피난지 광주에서도 역사는 일어났다. 서울 수복 후에는 다시 충청지방을 중심으로
환원운동을 펼쳐 나갔다. 김은석 목사가 주축이 된 이 환원운동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이 충북에 수리, 수룡, 노은, 탁동, 소태, 의진, 반능, 방서리, 부강, 황청,
양촌, 문암, 송정, 남주동, 영운동, 가좌, 충주 교회등이었고, 충남에 연산, 황골,
녹골, 충곡리, 신탄진, 대전교회등이었다. 전남지방에도 교회들을 세웠다.
또 1952년 김은석, 함창현, 이신, 김재순 목사 등은 광주에서
충청남도 부여군 귀암면 부여교회로 옮겨 성경연구회를 개교하였는데, 이 때 함창현
목사는 신교리에 복음중학교를 세웠고, 이신 목사는 교회를 담임하였다. 여기서 성경연구회는
약 1년후 전남 목포로 잠시 옮겨갔다.
1953년 힐 선교사의 내한으로 서울로 옮겨 힐이 재개한 장충동
신학교를 개교하였는데, 9월 16일이었다. 이 곳의 학생으로는 김종기, 최홍철, 김규상,
최순국 등 24명이었다. 여기서 서울 송월동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와 합병하였다.
한편 힐 선교사는 가정문제로 신학교를 태일러에게 맡기고
귀국하였다가 재혼 후 1959년 한국으로 돌아와 대전에서 김은석, 존 힐, 심영진,
김태수 목사 등과 협력하여 한국 성서신학교를 개교함으로써 중부 지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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