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

☜ 앞으로...                                                                                                                                      최 윤 권 목사


* 이글은 최윤권 목사가 1996년에 쓴 글로 후반부의 한국 그리스도의교회 역사와 교회 상황은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현재와는 상이한 부분이 많을 수 있음을 밝히며 자세한 교회의 현황은  http://www.cco.or.kr 그리스도의교회 협의회 사이트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환원운동의 시작     
   초기 환원운동
   푸리세리(PRISCILLIAN) 
   네스토리어스(NESTORIUS)     
   바울徒 (PAULICIANS) 
   보고밀宗(BOGOMILES) 
   카타리(CATHARI)와 알비겐(ALBIGENCES)
   중세 환원운동  
   종교개혁시대
   개혁이전
   종교개혁 
   제2의 종교개혁   
   미국의 환원운동
   바톤 스톤과 스프링휠드 노회의 유서
   토마스 캠벨과 "선언"
   알렉산더 캠벨  
   합동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초기 환원운동 지도자들
   성낙소(成樂紹)목사 
   최상현(崔相鉉)목사 
   동석기목사
   초기 선교사들 
   해방된 교회  
   합동 선언문
   모여 오는 인물들 
   전화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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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의회
   해외진출 및 교회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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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원운동의 원칙
   우리가 믿는 것은
   새로운 시작  
   신학교 통합
   교회성장 
   유무악기 합동을 위한 노력
   교회 연합운동 및 교단  연합운동 전개 
   현황
   평가와 전망  
   참  고  도  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시작한 교회이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이름도 거부하며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는 다른 어떠한 헌장도 신조도 갖지 아니하려 한다.  명실 공히 그리스도가 머리요, 기초요, 몸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초대교회로 환원하자고 외친다.  

  이 환원운동(還元運動)의 역사도 결코 어디서 누가 시작하였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 창립이래 교권과 교회의 부패에 대해 싸워온 꾸준한 투쟁의 핏줄기이다. 이는 종교계내의 흉한 싸움판에 눈살을 찌푸리고 십자가만을 붙잡고 부르짖은 2000년의 외침의 산울림이다.  그런 고로 교회에 모순이 존재하는 한, 인위적 권위가 횡포하는 한 환원운동은 있었다.


I.  환원운동의 시작

  기독교 교회사상(史上)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교회의 개혁과 환원을 부르짖은 역사는 주후 4세기로부터 나타난다.  그 시대에 분명한 기록도 없고 또한 억울하게 이단으로 몰릴 때에는 기록자체도 다 불태워 없애 버렸는 고로 자세한 연대도 있을 수가 없으나 역사에 나타난 주요 인물들을 연대별로 정리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1.  초기 환원운동      

      1)  푸리세리안 (PRISCILLIAN)

   4세기에 살았던 교부로서 380년에는 아빌라(AVILA)감독직도 가졌으나 "성경말씀에 따른 개혁"을 주장함으로서 교황과 타 감독들의 미움을 받아 383년 죽임을 당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그의 글들과 가르침도 다 소각되어 별로 기록이 남은 것도 없지만 그의 사망 후 암브로스(Ambrose), 투어의 마틴(Martin of Tours)등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명예회복을 위하여 제소한 재판기록이 1886년에 발견됐다. 그 기록에 의하면 그는 교회가 교권과 형식에 치우쳐감을 경고하여 성경연구와 성만찬 준수를 강조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순수히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렀다.

      2)  네스토리어스 (NESTORIUS)

   5세기 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마리아 신모설(神母說)등을 반대하고 예수 양성론(兩性論)등을 주장하다가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정죄(定罪)되어 시리아로 추방당하였으나 그곳에서 순수한 성서적 교회를 시작하고 퍼져갔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들은 선교열이 대단하여 인도에 교회를 세웠고   6-7세기에는 멀리 중국 당(唐)나라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여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한때는 교인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불교와 같은 동양종교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도 시리아에 있는 교회들은 아무 대교파(大敎派)와도 관계없이 신약성경대로 순수한 예배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3)  바울徒 (PAULICIANS)

   7-8세기에 있었던 사도적 순수신앙을 지키고자 애썼던 무리로서 성경을 유일한 "진리의 열쇠"라 믿으며 마리아숭배 성수(聖水)등을 반대하였으며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 회개, 침례만을 주장하였고 이 사람들은 "참 크리스찬"이라 불리었다.  755년부터 주목받기 시작하여 844년에는 대대적인 핍박으로 몰살당하다시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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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보고밀宗(BOGOMILES)

   8-9세기에 성경연구운동으로 시작된 이 사람들의 기록도 대부분이 재판기록뿐이다.  그러나 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은 나레크의 그레고리(Gregory of Narek)라 불리었으며 역시 무서운 핍박을 받아 죽었고 세상은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벗(Friends of God)이라 불렀다.  이 사람들이 특히 반대한 것은 성모 마리아나 베드로 등 우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5)카타리(CATHARI)와 알비겐(ALBIGENCES)

   분명히 어느 시대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순수한 신앙을 외치며 역시 무서운 핍박을 견뎌갔다.  그 지도자의 이름이 남은 것도 없고 "카타리"나 "알비"도 지역 이름일 뿐이다.  한때는 어거스틴도 같이 일하였다고 한다.  11세기에 이노센트4세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였으나 숨어서 꾸준히 전도하였다.

   이 외에도 역사에 남아 있던지 없던지 교회의 개혁과 환원을 외치는 수많은 무리, 교회 혹은 운동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교회들의 공통된 특색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호소한 것과 특별한 한 사람의 지도자를 갖지 않았다는 것과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무저항주의여서 무서운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억압할 수 없다. 사람이 안 외치면 돌이라도 외친다.  특히 11세기 이후에는 이와 같은 운동들이 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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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중세 환원운동

       그중 몇 사람 혹은 무리들을 추려보면;

      1)  브러이스의 베드로(Peter of Bruys)는 성경에 없는 유아세례, 화체설(化體說), 죽은 자를 위한 기도등을 반대하여 "단순한 교회로 환원"하자고 외치다가 약 1104년에 죽임을 당했다.,

      2)  로잔느의 헨리(Henry of Lausanne)는 역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부패상을 공격하다가 1116년에 목 베임을 당하였다.

      3)  브레샤의 아놀드(Arnold of Brescia)는 외치다 못하여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로마를 공격하다가 붙잡혀 1139년에 교수형을 당하였다.

      4)  영국의 베드로 왈도(Peter Waldo)는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당시 교회전통에 반대하여 말씀을 전하여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가로(街路)전도하다가 잡혀가기도 하고 맞아 죽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정신은 꾸준히 계승되어서 그후 요한 위클립(John Wycliff)의 운동으로 이어졌고 드디어 종교개혁까지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보통 왈도徒(Waldensians) 혹은 "Poor men of Lyon"이라 불리었는데 어떤 조직도 없었고 신조도 없었으며, 다만 세례, 성찬, 구원을 주장하며 성경 그대로를 믿고 전도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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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종교개혁시대

      1)  개혁이전

      14세기부터는 그 개혁의 봉화들이 여러 곳에서 겉잡을 수없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사실은 루터나 칼빈 이전에도 종교개혁자는 많이 있었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들면;

       (1)요한 위클립 (John Wycliff 1320-1384)  영국 옥스포드 대학 교수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기성 교회보다 성경이 최종 권위라고 주장하다가 파문당하였고 로마카톨릭은 그가 죽은지 2년후 시신을 끌어내다가 화형하였다 한다

       (2)  요한 허스 (John Huss 1369-1415)  위클립(Wycliff)의 영향을 받아 보헤미아에서 개혁운동을 시작하였고, 드디어는 교황에게 속아 붙잡혀 화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에 붙은 불은 드디어는 온 유럽에 종교개혁의 불을 붙혔다.

       (3) 사보나롤라 (Savonalora 1452-1498)  이태리 후로렌스의 종교개혁가로 처음에는 전 도시국가가 호응하였으나 나중에는 역시 교황에게 속아 교수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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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종교개혁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Wittenberg) 교회문에 95개조 항의문을 못박은 때로부터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15세기의 종교개혁의 흐름을 대체적으로 다섯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마틴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2)  쯔빙글리와 쥬리히의 종교개혁

       (3)  요한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

       (4)  재침례파 운동

       (5)  영국의 종교개혁

이 모든 개혁운동들이 외친 것은  비슷하였다.  특히 그들이 공통으로 주장한 것은 주로;

          가.  행위(行爲)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信仰)으로 구원받는다.

          나.  교회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 전통(傳統)이 아니라 성경이다.

          다.  범사제직(汎司祭職) 즉, 주교나 신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다는 교리였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생명을 바친 것이다.  그리하여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따른 새로운 문제도 또한 많이 생겼다.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종교적 개인주의가 성황했고 성서의 개인해석의 자유가 존중되는 나머지 여러가지 교파가 생겨났다.  마틴 루터는 자기가 죽은 후 결코 자기 이름으로 교파를 만들지 말라고 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루터 교회가 생겨났고 칼빈의 개혁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머리만 바뀐 개혁이어서 진정한 성경적 개혁 성경으로의 완전한 환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뜻에서 환원운동은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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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2의 종교개혁

       이러한 제2의 종교개혁을 호소하는 목소리들도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하였다.  17세기의 스틸링프리트(Stillingfleet)는 "기독교는 그리스도 그 자신 이외는 있을 수 없다"고 외쳤으며 호프만(Hoffman)도 "원시(原始)기독교의 부활"을 주장하였으며 칠링워쓰(Chillingworth)도 "성경만이 신교의 종교이다"고 설득하였고 루쏘는 "기독교를 단순화하고 재현시키는 것이 소망이다"라고 호소하였고 요한 로크는 "진실한 기독교는 단순히  상식과 기본윤리"라고 주장함으로서 "구원받기 위한 단순한 명령과 순종"을 제시했다. 리페리터스 멜데니우스(Repertus Meldenius)는 기독교 단합의 원칙으로서 "Unity in essentials, Liberty in non-essentials, Charity on everything" 즉 "기본적인 것에는 통일, 비 기본적인 것에는 자유, 모든 것에는 사랑"으로 하라는 표어를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18세기부터는 부분적이나마 그리고 지역적이나마 이 원칙을 실행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스코틀랜드의 죤 글라스 (John Glas)목사는 교권 혹은 국권과 상관없이 성서적인 교회를 세워 성경에 있는 대로 매주마다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로버트 센디맨 (Robert Sandeman)은 그와 같은 신약교회를 12곳에 세웠다.  당시 인도로 파송된 유명한 형제 선교사 로버트와 제임스 홀데인 (Robert & James Haldane)은 그와 같은 독립교회들을 인도에 많이 세웠고 그들이 저술한 "A View of Social Worship and Ordinances of the First Christians"란 책에 의하면 아무 교파조직도 갖지 않고 이름도 단순히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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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미국의 환원운동

   이와 같은 환원운동이 꽃을 핀 것은 역시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이었다.  감리교회에서 제임스 오켈리 (James O'Kelly), 침례교회에서 엘리아 스미스 (Elias Smith), 아브나 죤스 (Abner Johns)등이 교권과 교파를 버리고 단순히 "Christian"이라 불리며 독립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시작하였고 성경만을 그 신조와 헌장으로 삼았다.  

     1)  바톤 스톤과 스프링휠드 노회의 유서

         특히 장로교의 배경을 가진 바톤 스톤 Barton W. Stone(1772-1844)의 활약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열었다.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을 정착시킨 분이었으며 그가 여섯 동지들과 더불어 조직한 스프링휠드(Springfield)노회를 해산하면서 기록한 "스프링휠드 노회의 유서(遺書)"는 환원운동의 중요한 문서가 되였다. 그는 18세기초 캔터키, 테네시주를 휩쓸었던 케인 리지 (Cane Ridge)부흥 캠프의 주역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순수한 성경 말씀만을 가르친 미국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한 분이었다. 또한 그가 일생동안 집필한 "크리스찬"잡지도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눈부신 부흥의 일익을 담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 최윤권목사 저 "깨어진 십자가"에 요약 수록된 "Springfield노회의 유서"를 인용한다.

    켄리지에 위치한 스프링휠드 노회는 외형적 및 정신적으로는 건강하나 이 생애가 불완전하며 이러한 몸이 한 번은 죽을 것을 인식하고
    아래와 같이 유언한다.

    첫째 우리는 이 몸이 죽고 분해되며  그리스도의 몸 속에 함께 용해될 것을 유언한다.

     1. 우리는 우리의 교직명 및 존칭을 없애버리며 한 교주와 그의 이름만이 남게 될 것을 유언한다.

     1.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치리하는 일체의 권한과 대외  적으로 교회를 대표하는 특권을 없앨 것을 유언한다.

     1. 앞으로 목회를 지망하는 자는 철저한 성경연구와 기도 및 순종하는 생활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를 유
         언 한다. 그리고 참으로 아론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 외에는
         이 명예를 갖지 못할 것을 선언한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그 목회자를 시험하고  선출하는 원래의 권리가 회귀되기를 유언한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각개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개 교회를 연보로 유지하며 교인을받
         아 드리며 치리하고 이 치리권을 어떤 일 개인이나 일개 단체에 결코 넘겨주지 말 것을 유언한다.

     1. 우리는 앞으로 모든 그리스도 인이 성경을 구원의 한  길로 채택하고 그 외의 모든 교리서 및 규칙
         서는 불  에 태우기를 유언한다.

     1. 우리는 교역자와 교인들이 상호간 더욱 협조정신을  기르고 더 기도하며 덜 싸울 것을 유언한다.

     1. 우리는 스프링휠드 노회나 혹은 그와 같은 일체 단체를 왕으로 삼고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앞으로
         는 만세반석 위에 서서 그리스도만 좇을 것을 유언한다.

     1. 우리는 켄터키 총회가 하루 속히 모든 성경만으로 살려는 자들에게 대한 일체의 핍박을 중지할 것
         을 유언한다.

     1. 우리는 우리를 찬성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가 모두다  철저히 우리의 입장을 검토한 후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바른 태도를 취할 것을 유언한다.

     1.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자매단체들이 성경을 주의깊게 읽고 늦기 전에 그 영혼을 구원
         하기를   유언한다.

                         1804년 7월 28일

        스프링휠드 노회

             증인:  로버트 마샬     바톤 스톤   죤 던레비

                    죤 톰슨 리쳐드 맥내마 데이빗 퍼비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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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토마스 캠벨과 "선언"       

   그러나 미국 환원운동의 주역은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19세기 초에 건너온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 부자(父子)을 아니 들 수 없다.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은 원래 장로교 목사로서 1803에 건강관계로 미국으로 건너와 침례교와 함께 일하였고 북미주 래드스톤 협회 규약과 헌장을 쓰는 중에 느끼는 바가 있어 "The Declaration and Address" 즉 "선언과 호소"(이후 "선언"으로 약칭함)를 썼는데 이 문서가 실로 미국의 환원운동에 불을 붙인 문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의 단합을 호소하고 단순한 기독교로 돌아가는 길을 명시한 이 소책자는 지금 읽어도 피를 끓게 한다.

역시 "깨어진 십자가"에 요약 수록된 "선언"의 서론을 인용한다.

     1. 지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계획적으로 및 구조상으로 하나이다. 이는 어느
        곳에 있거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에 가르친 모든 것을 순종하며 생활 급 행위로서 이를 표시하는
        모든 사람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2. 신도들 간에 분파나 파괴 분열이 있어서는 아니 되며 교회는 같은 법칙 밑에 생활하며 같은 것을 말
        하여야 한다.

     3. 성경에 문자로나 혹은 공인된 선례로서 가르쳐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신앙의 기준으로 삼거나 친
        교의 조건으로 요구되어서는 아니 된다.

     4.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성지의 완전한 계시이며 신약성경은 신약교회의 예배, 질서 및 치리 전반
         에 걸친 완전한 헌장이다.

     5. 인간은 주의 말씀 이외의 새로운 법령 혹은 포고를 할 권한이 없으며 신약성경 이후의 것은 어떤
        것이라도 신앙 급 교회 예배에 받아 드려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인 간의 친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6. 신앙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는 것이며 인간의 지혜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구절을 전제
        로 하여 추론된 것은 분명히 말씀의 교리로서 시인될 수 있으나 그 타당성을 인정하는 이상으로 그
        리스도인의 양심을 구속치 못한다.

     7. 성경진리에 의거한 신학적 학설도 그리스도인 친교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8. 교회가입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깨달아 그를 간증하고 그에게 순종하
        는 자가 할 수 있다.

     9. 모든 교인은 타 교인들도 하나님의 성도임을 항시 기억하며 천부의 자녀들로서 분쟁없이 지내야
         한다.

    10.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파는 무서운 죄이다.  이는 반 그리스도인 적이며 반성경적이고 그리스도인 사
         이의 사랑을 파괴한다.

    11. 계시된 성지의 부분적 무시와 그리스도인 친교에 인위적 조건을 만들려는 스스로 만들어낸 권한
         이 분열의 근본 원인이다.

    12. 교회 의식은 신약성경에 계시된 초대교회의 모범에 따라 경건히 시행되어야 한다.

    13. 결코 인간적 편의성에 순응하거나 이것이 교회의 분열을 조장토록 허용하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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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알렉산더 캠벨   

   환원의 원리를 목숨을 걸어 실천하려고 하고 또한 성공한 지도자가 그 아들 알렉산더 캠벨 (Alexander Campbell)이라 하겠다. 그는  비록 환원운동 자였을 뿐 아니라 신학자로서 교육가로서 혹은 문필가로서 미국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존재이다.  그가 그라스고 (Glasgow) 대학을 나와 목사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와 아버지와 "선언"의 초고를 두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한 것이 1809년, 그 후 최초의 교회 브러쉬 런 (Brush Run) 교회를 시작하고 1930년까지는 침례교회와 함께 일하였다.  특히 1816년 침례교 총회에서 행한 캠벨 목사의 기조연설 "Sermon on the Law"는 우리의 성경관과 지표를 확고히 하였고 1820년에 있었던 침례와 유아세례에 관한 장로교목사 죤 워커 (John Walker) 와의 토론, 1922년에 있었던 윌리암 맥칼라 (William McCalla) 와의 토론, 1829년에 있었던 유명한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 (Robert Owen) 과의 유신론토론, 그 외에도 1837년 퍼셀 (Purcell) 주교와의 천주교에 관한 토론, 1843년의 라이스 (Rice) 토론 등은 캠벨을 유명하게 만든 요소 중 하나이다.  그는 또한 그가 집필하고, 인쇄하고, 출판하고 우체국장으로 우송한 정기간행물 "Christian Baptist" 혹은 "Millenial Harvenger"등을 통하여 그의 주장과 사상을 널리 알렸고 유능한 동지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월터 스콧 (Walter Scott) 같은 신학자 및 조직가, "너구리" 죤 스미스 (John Smith) 같은 부흥사 등은 캠벨의 환원운동에 없어서는 안될 힘이 되었다.  

     4)  합동     

   이와 같은 환원사상에 뭉친 캠벨을 중심으로 한 약 300명의 교역자들이 침례교를 탈퇴하고, 스톤을 중심으로 한 약 200명의 교역자들과 역사적인 합동을 한 것이 1930년이였다.  그후에 이 운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19세기말에는 교인 수 150만으로 불어났고 Bethany대학, Transilvania대학, Chicago대학, Butler대학, Phillips대학들과 같은 유명한 학교들을 세워 나갔다.  

   물론 문제도 없지 않았다.  1860년때서부터 선교조직을 가질 것 인가 안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제자파 (Desciples of Christ) 가 생겨 났고 그후에 제자파는 신신학으로 흘렀으며 예배에 악기를 쓸 것인가 안 쓸 것인가 하는 문제로 무악기파도 생겨 났지만, 그리스도의 교회 세계대회등을 통하여 계속 교제가 있었고 합치고자 하는 노력도 끊임 없었고, 현재는 그 세 흐름을 합하여 미국에 약 5만교회가 기록되어 있다.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대회는 3년에 한번 북미 그리스도인 대회는 매년 5-6만명이 모이고 있다.

   그 외에 선교활동도 활발하여서 영국을 위시하여 호주, 캐나다, 러시아, 필리핀, 일본등 수 많은 선교사들을 내어 보냈고 또한 이미 그 나라들 독립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환원운동이 회오리 바람처럼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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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그리스도의 교회는 순교자의 피가 그 거름이 되었다"고  어느 역사가가 평하였다.  어떤 운동이던  그것이 사회에 혹은 교계에 새로운 개혁을 가져오려는 운동이면, 그곳에 해산의 고통과 피흘림이 없는 곳이 없겠지만, 특히 한국의 환원운동사는 그 걸어온 길이 남달리 가시 돋친 길이였고 또한 눈물의 골짜기였다. 또한 그 곳에 그렇게 눈물과 피흘림이 많았기에 그 면류관이 더욱 빛날 것이며, 이 땅에서 이 운동이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다.

   환원운동이란 결코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운동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에 한국의 환원운동도 누구로부터 또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기 어렵겠지만, 성서로 돌아가자는 많은 개별적인 외침과 노력이 있은 후에 실제적으로 이 운동이 표면화되었을 때에 세 사람 혹은 네 사람의 위대한 인물을 들지 아니할 수 없다.  

1.  초기 환원운동 지도자들   

   1)  성낙소(成樂紹)목사:  원래 구세군의 사관으로 기성교회들의 모순성에 가슴이 아파 충남 부여에 순수히 "기독의 교회"라고 하는 교회를 시작하고 형제주의로 목회하던 중 1930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어 당시 동경에서 선교하고 있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 커닝햄 (Cunnin- gham) 목사 및 체이스 (Chase) 목사와 연락되어 환원정신에 동감되어 요코하마 (橫濱) 에서 한국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목회하였고 1931년 귀국하여 계동, 공덕동, 청파동, 내수동 등을 중심하여 목회하였다. 그후 내수동 교회를 필운동으로 옮겨와 현재의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현재 오수강목사 시무)를 시작하였다.
   일생동안 한의사로서 의료사업과 신학교 교수로 후배를 가르치던 중 1964년 노환으로 그가 개척한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소천하였다. 그 직전에 필자도 잠시 강의를 들은바 있는데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세례, 성찬을 강조하는데 큰 감명을 받았다.  

   2)  또 한 분은 최상현(崔相鉉)목사로서 연희 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교계로나 독립지사로나 특히 기독교 문학계에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찍이 삼숭학교, 숭실 중학교 및 연희 전문학교를 나와 조교수 및 동문회장을 하면서 그의 후배 조병옥 박사, 이윤영(대한민국 초대 사회부장관)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번역하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후 중국으로 망명 연경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미국으로 가다가 다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귀국, 감리교 신학대학(단시 협성신학교)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아 체부동 교회,  동대문교회 등을 목회하면서 최남선, 방인근, 전영택, 이은상 제씨들과 더불어 문학활동을 계속하였다. 당시 집필한 서적으로는 "경험의 종교" "근대의 위인(전3권)" "조선청년의 활로"등이 있고, 주로 감리교기관지 "신학세계"의 주필을 오랫동안 맡았다.
   일면 성서공회 총무일을 보면서 서적판매도 하였는데 1936년 서적관계로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죤 체이스 (John T.Chase) 선교사와 맞나 오랜 토론 후 뜻이 같음을 알고 환원운동에 함께 일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38년에 돈암동에 그리스도의 교회 (현재 삼선 그리스도의 교회로 개명 황한호 전도사 시무)를 설립하였고 그후 왕십리, 산동암동 등에 개척하였으며 체이스 선교사와 더불어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교역자 양성에 주력했다.  2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자 친구들도 다 떨어지고 선교사도 축출되고 교회는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이를 거절하여 지하로 들어갔고 집에는 "요시찰 인물"로 항시 일본형사들이 드나들었으며 4남5녀를 거느리고 그 생활이 말이 아니었으나 꾸준히 전도를 계속하였다.  
   1945년 조국이 광복이 되자 당시 미 군정청 초청으로 국무장관 고문을 하였고 얼마동안 공보과장 일도 맡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사상은 그로 하여금 다시 모든 관직을 버리고 목회와 신학교 교수일에 전념하게 하였다.  6.25사변이 나자 가족들 때문에 피난을 못 가고 드디어는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9.28수복 때 북쪽으로 끌려 간 후 소식이 없다.  
   그 장남 최윤모 장로는 돈암동 교회 시무, 차남 최윤권 목사는 대한기독교 신학대학 (현 서울기독대학교) 설립자 및 명예학장, 3남 최윤환 목사는 미국 알렉산드리아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3)  또 한 분은 동석기 목사로 1904년 미국으로 이민가 게렛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귀국 후 목회하면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붙잡혀 복역한 바도 있다.  1927년 다시 도미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신학교 (Cincinati Bible Seminary)에 다님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정신을 알게 되고 그후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 및 형제들과 친교하게 되어 그들의 협조로 1930년 귀국하여서는 함경도 일대에 7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1940년대에는 서울에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도 시작하게 되었다. 조국이 해방이 되자 그는 다시 도미하여  한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혹은 선교사 파송을 위하여 둥분서주 하였고  그 결과로 최초의 무악기 그리스도의 선교사 리처드슨 (Richardson) 목사가 한국에 오게 되었다. 노년에는 1972년 미국에서 소천하였다.  

   그 외에도 1936년경 미국에서 환원운동에 감화되어 벤더빌트(Vanderbilt)대학 등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울산, 경주 및 서울 신당동 등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가 1944년에 과로로 별세한 강명석 전도자 등 숨은 환원운동자들이 우리가 알았던 몰랐던 여러 곳에 여러분이 계셨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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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초기 선교사들

   외국에서 한국교회와 한국의 환원운동을 돕기 위하여 내한한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는  아마 1932년경에 내한한 마이클 쉘리 (J. Michael Shelly)부부로서 한국에 정착하려고 왔으나 9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고향인 오리건 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아들과 더불어 목회하였다.  쉘리 부인은 오래 살아 "말 박물관"도 운영하였다.

   실질적으로 한국에 선교하러 온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는 존.체이스 (John T. Chase)선교사 부부라 하겠다.  체이스 목사는 신시내티 성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곳에서 목회하다가 전미국 선교대회(National Missionary Convention)도 조직하였고 일본으로 건너와 커닝햄 (Cunningham)선교사와 함께 일하다가 한국에 뜻을 품고 1936년 내한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확신에 찬 분이었으며 말씀 한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처음 성낙소 목사 최상현 목사 등과 접촉되어 성경연구회를 시작하고 서대문구 송월동에 큰집을 영국 성서공회로부터 사들여 거기에 본부를 두어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때에 함께 일하던 분들로 김요한 목사 박판조 목사 김문하 목사같은 분이 있다.  김요한 목사는 신당동에서 개척을 하던 분으로 퍽 인텔리였던 기억이 난다.  1937년에는 신학교도 시작하였다.  이름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였다.

    당시의 한국의 상태는 한국을 점령통치하고 있던 일본이 차차 동양제패의 야욕을 들어내고 중국을 잠식해 들어 갈 뿐 아니라 만주에 괴뢰정권을 세우고 석유확보를 위하여 동남아로도 발을 뻗치며 중국을 후원하고 있었던 미국 영국 러시아와도 일전을 획책하고 있던 때이어서 교회와 선교사에 대한 감시와 압박이 심하여 지고 선교사와 목사들에게 대한 시찰이 심하여져 창시(創氏)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는 때였던 고로 선교하기가 쉽지 않았고 일본 관리들과의 마찰도 비일비재하였다.  실제로 일제와 타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한 장로회 총회도 있었지만 또한 목숨을 걸고 투쟁한 교역자들도 수없이 있었다.   

   1939년에는 힐 요한(John J. Hill)선교사가 내한하였다. 그는 죤슨 성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목사로서 한국인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또한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그리하여 교회 수가 하나 둘씩 늘어나게 되어 필운동, 돈암동 그리고 함경도의 교회들 외에도 청량리, 왕십리, 신당동, 산돈암동 등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학교 학생 수가 늘어갔다.  1937년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조선기독교회"로 등록되어 있고  김득종 저 "한국종교사"에 보면 1943년 12월말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가 6교회이고 교역자 6명 신도 수 909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일본 정부는 교계 통제를 목적으로 권력으로 교회를 강제로 통일시키려는 계획을 세워 "일본 기독교단"이란 단체를 탄생시켰고 거기에 조선교구를 두어 물론 이에 동조하지 않는 교회나 교파는 지하로 들어가거나 무서운 핍박을 당했다.

   1941년 미국과 일본의 사이가 악화됨에 따라 일본경찰은 신학교육을 중지시키고 교회들에게 압력을 넣으며 드디어는 선교사들을 강제로 축출하였다.  서울역에서 떠나가는 선교사들에게 손 흔들며 애석해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해 12월 일본 비행기들에 실은 폭탄이 진주만을 불바다로 만듦과 동시에 이들 한국교회들도 핍박이 극심해지고 그들이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신앙상  순응할 수 없었던 이들 목사 및 교인들은 경찰에 수없이 불려가 곤욕을 치르며, 교회도 지하로 산 속으로 스며들었으나 몇 교회들은 결국 핍박을 견디지 못 하였고, 돈암동과 필운동은 교회당을 수없이 바꾸어 가면서 꾸준히 예배드렸다. 그때에 일본경찰들의 발자국 소리와 호령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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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해방된 교회

   1)  합동 선언문

   1945년 8월 15일 세계 제2차 대전 종료와 함께 우리의 조국은 오랜 어둠 끝에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었다. 교회도 해방되었다. 해외에서 망명갔던 지사들과 교역자들이 돌아왔다.  

   해방 후의 한국교회들이 당면한 큰 숙제가  두어 가지 있었다.  하나는 신사참배를 한 교회나 교역자들을 어찌하랴 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기성교단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교회 혹은 교단을 이루는 일도 많이 생겨났다. 재건교회 혹은 재건파(고신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물론 이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몰려오는 자유신학, 혹은 신신학의 물결이었다. 이것이 드디어 많은 교파들을 갈라놓고 장로교에서는 예수교 장로회 기독교 장로회가 갈라졌다.  

   또 하나의 물결은  일본 기독교단이 한국에서는 해방과 동시에 해산되고 많은 소(小) 교파의 물결이 들어 닥쳤다.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들은 이 때야말로 환원운동을 외쳐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교회의 합동 선언문"을 기초 발표했다.  그 일부를 옮겨 본다.  

   그리스도의 교회 합동선언문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신 교회로 돌아와서 각각 분열된 기독교에게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로 같이 돌아오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를 순응하여 합동 통일운동을 선언하노라.  신자는 말씀(요17:11, 21, 22, 고전1:10, 12:13)에 비추어 각각 교파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데, 각 속한 단체의 헌법, 규칙을 존중시하고  분열됨으로 다투고 있으니 성 바울이 기록한 성경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구구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중략)...다시 조선교회의 실정을 살펴  보면 우리 조선 각 교파가 악마 왜정시대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통일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마귀의 명령으로 합동하여 신사참배하는데 통일공작 중심이 되었다. 그러면 악마에게 굴복하여 신사참배의 합동통일은 하면서도 주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각 교파신도의 통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만일 부인한다면 성경말씀인 주님의 성지를 반역하는 일이다. 삼가 조심하라. 그런즉 합동 통일함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이냐? 아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  신약시대의 교회를 찾으려면  신약성경에서 찾자.  

     1. 교회 창립자와 머리를 찾자 -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마16:18, 엡5:23)
        각 교파의 창립자와 머리는 누구일까?  카톨릭은 저스테니안이요 성공회는 헨리8세요 루터교는 마틴 루터요
        침례교는 코날드 그레벨  이요 장로교는 존 낙스요 감리교는 요한 웨슬레요 구세군은 윌리암 뿌드요 성결교
        는 카우만이다.

     2. 교회 명칭과 터를 찾자 - 그리스도의 교회, 닦아  둔 터, 그리스도. (롬16;16, 고전3:11)
        각 교파의 명칭은 성경에 없음.

     3. 교인 명칭을 찾자 - 그리스도인. (행11:26, 갈2:24)
         각 교파교인의 명칭은 성경에 없음.

     4. 교인이 되는 방법을 찾자.  믿고 침례받음, (마  28:19, 막16:16, 행2:38; 8:38, 롬6:4, 요3:5)
        약식 세례는 성경에 허락이 없음.  주후 755년에 로마교황 스티븐 2세가 애돌퍼스의 집에서 약식세례를 시작
        하였음.

     5. 침례는 누가 줄 수 있는가 -목사, 집사, 평신도도 침례 받은 자는 줄 수 있음. (행2:38-42, 8:38, 9:17-18)
         집사 빌립, 평신도 아나니아도 침례를 주었다....(이하 생략)

                                         주후 1946년 8월
                                         경성 사직공원 내
                                         경성 돈암동 204
                                         그 리 스 도 의  교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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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모여 오는 인물들

   체이스 선교사와 힐 선교사가 해방 이듬해 다시 내한하였다. 그들은 일제에 의해서 압수되어 또한 어떤 민간인에게 불하된 선교부 건물을 찾기 시작하였으며 우선 성낙소 목사, 최상현목사 등과 더불어 필운동 교회 건물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때에는 월남한 교역자들이 많이 있었고 교회의 부패와 파쟁에 싫증이 난 신앙중심 교역자들이 많이 있어서 비단 건물은 없었지만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가르친 구광서 목사라던가 강병천목사 이종만목사 정희건목사 (전도자) 이흥식 전도자등이 그때 신학생으로서 공부하였다.  

   구광서 목사는 월남한 교역자 및 교육자로서 신학교 졸업 후 돈암동 교회 중앙교회 도원동 교회 등에 시무하였고, 1965년에는 최윤권 목사와 더불어 대한기독교 신학교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부교장으로 수고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1994년에 소천하였다.

   강병천목사는 일제시대 중국에 선교사로서 파송되었던 분으로서 해방 후 귀국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집회 다니며 중앙교회 등을 목회하던 중 역시 대한기독교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쳤고, 1993년에 미국에서 소천하였다.

   이종만 목사는 인천 숭의동 교회와 인천보육원을 설립하였고, 1996년 현재 미국에서 원로목사로서 활동중이며 정희건 목사는 서대문교회를 설립하여 전도사 시절부터 문서활동이 많았고, 1955년에 "인류문제와 성서" 라는 책을 발간하였으며,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경통신학교 초창기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현재도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다. 이흥식 전도자는 역시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 원로로서 청량리 교회 등을 시작하였다.

   이 때에 또한 환원운동에  뛰어 들은 중요한 인사들이 있다.  한 분은 오현팔 목사로서 경북 영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로서 1923년에 연희전문학교 신학과에 수학하여 목사가 되었고 목회와 독립운동과 의료사업을 병행하던 중 해방 후 영양그리스도의교회를 설립 목회하다 1972년 소천하였다.
   또 한 분은 김은석 목사로서 해방 후 일본에서 건너와 환원동지들과 뜻이 맞아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하여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고, 또한 집회한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져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충북 소수(수리)교회 (현재 배흥옥 목사 시무, 김길홍 장로의 공로가 크다), 수룡 교회(현재 김종기 목사 시무)등 90여개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환원운동의 용사이다.  이분들 외에도 6.25때 순교한 백낙준 목사, 6.25를 전후하여  처음에는 서울에서 "성경원" 및 "공명학교"란 이름으로 교육사업에 헌신하고 6.25후에는 전남,북도에 많은 교회를 개척한 강순명 목사도 있다. 교회는 물결처럼 전국으로 메아리쳐 갔으며 우이동, 김포, 미아리, 신탄진, 부강, 광주, 목포, 부산등에 개척됐다. 특히 목포지방에는 오순절교회에서 환원한 최요한목사가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어 이 교회는 장차 한국 유수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발전하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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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전화 속에서

   그러나 한국교회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쇠가 쓸만한 쇠가 되려면 물 속에서 혹은 불 속에서 단련되어야 하듯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또 한번 시련을 겪어야 했다. 6.25의 포화는 삽시간에 한국전체를 뒤엎었고, 수많은 교역자들을 앗아갔으며, 특히 최상현 목사가 공산군에게 납치당하고 백낙준 목사가 순직하였다. 1963년에 크리스챤 신문에 실린 최윤권 목사의 "최상현목사 회고록"의 일부를 인용한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다른 어느 길보다도 좁은  길이었다. 2차 대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그에게는
       먼저   경제적 타격이 닥쳐 왔다. 이때에 그는 슬하에 3남4녀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 많은 입들에게 먹일 식
       량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항상 요 시찰  인물로 일본경찰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고 또한 신사참
       배 문제로 숨어 다니는 신세로 취직을 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역장수, 새우젓 장수등 행상까지도 하였으나 밥은 굶기가 일수였고  죽은 맑아만 갔다.
       그때에 일년에 두 세 번씩  셋방에서 셋방으로 이사를 다녔고 단벌신사인 그의 옷은 수없이 기운 자리가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백결 선생이란 별명까지 받았다.
       한때는 공부하고 있던 우리들을 모아 놓고 학교를 그만 두게 될지도  모른다고 선언할 때에 그의 눈에 번쩍이
       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중략)...그러다가 해방이 왔다. 그는 우선 호구책을 위해 군정청에 취직했고 군정
       장관 고문을 하던 중 사회부 차관 등 말들이 많았으나 환원운동의 신학교가 세워짐을 안 그는 다시 모든 것을        집어 치우고 광야에서 외칠 자들을 가르치기에 전력을 쏟았다. 물론 그 때 에 북한 괴뢰군이 남침하였던 속도        도 속도이거니와 그가 많은 가족들을 버리고 홀로 피난가지 못하였다는 것이 아마 그가 너무나도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할까 하여간 그는 방안에서 성경 연구와 기도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불행히도 그의 둘째
       아들 곧 내가 먼저 공산당에게 잡혀갔다. 이것을 안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인민위원회에 찾아가 나
       를 위해 탄원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주목을 끌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내가 도망쳐 나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갔었고 마지막에 그가 지냈던 20원이 봉투에 들어 돌아와 있었다.
         친구의 얘기에 의하면 그가 공산당에게 취조를 받을 때 취조관의 초조한 얼굴 빛에 반하여 그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떠돌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속으로 딤후 4장을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 그의 소식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혹은 그가 감방에서 전도하는 그를 보았다고 하며 혹은 그가 공산군이 남기고 간 새까맣
       게 탄 시체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슬퍼하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가 어디 있던지 끝까지 복음
       을 전파하였을 것을 알며 이제는 하늘 나라에서 주님의 품안에 평안히 안겨 있을 것을 안다.

   그러나 굳은 철로도, 폭탄으로도 마음의 물결을 막을 수가 없다. 환원운동의 전차 앞에 불길이 무슨 힘이 있는가!  6.25의 포화를 겪고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피난 보따리를 짊어지고 각지로 흩어져 나갔다. 이 보따리 속에는 성경책과 말씀대로만 살려는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불과 수년 안에 9개의 교회가 70여 개의 교회로 늘어난 것이다. 큰 교회로서는 또한 대전시 도마동에 심영진 목사가 개척한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도 있다 (현재 편무해 목사 시무). 서울의 교인들은 피난가서 지방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위탁하여 살았고, 또한 피난가는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전남지방, 경남지방, 제주지방의 교회들은 이때에 생겨난 교회들이 많았고, 특히 김은석목사, 최요한목사, 구광서목사, 강병천목사, 임명진장로, 김현숙전도사, 김학실권사등의 공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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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황터 위에서

   수복 후의 서울에는 산더미처럼 쌓여진 새로운 과제가 있었다. 교리적 단합, 교회당 건축, 고아 사업, 신학교 운영등 그 하나 하나가 전화를 겪은 교회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과제들이었다. 실지로 송월동에 있는 선교부 건물이 폭격을 맞아 일부가 무너졌고, 몇 달에 걸쳐 필자가 박정훈 장로와 더불어 흙을 파낸 기억이 난다. 우선 무너지지 않은 선교부 한구석에 일본으로 피난갔다 돌아온 힐 요한 선교사가 성수경 목사와 더불어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이 때에 미국에서는 체이스 선교사가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한국 교회당 건축헌금을  모금하여 보내주었다. 돈의 분배 등으로 인하여 선교사와 한국교회사이에 여러가지 잡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돈암동, 필운동, 홍제동 등 많은 천막교회 혹은 임시 건물들이 이때에 최초의 건물들을 짓게 되었다.

   인천에도 이종만 목사가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신학교도 필운동, 장춘동, 송월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계속하였다. 성낙소 목사, 김동수목사, 이신 목사, 김동열 목사 등이 교수로 수고하였다.(또한 김태수 목사, 최순국 목사, 최윤권 목사 등도 통역으로 혹은 영어강사로 수고하였다). 이신 목사는 원래 철학과 미술에 뛰어난 신학자로서 후에 네브라스카 기독교대학 및 벤더빌트대학교 등에 수학하여 목회학 박사학위까지 획득하였으나 아깝게도 신병으로 1981년 일직 별세하였다. 김동열 목사는 그 교리가 특이하고 교수법이 독특하여 인기를 끌었으나 유아독존식으로 몇 교회들을 단결시켜 이끌어 나가 이단소리를 자주 들었다. 지금도 광주에 김동열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몇 교회들은 "그리스도 님의 교회"라 부르며 따로 모이고 있다.

   1955년에는 "서울성서신학교"란 교명으로 그 동안에 공부하던 학생들을 학점을 정리하여 제1회로 졸업시키니 그때의 졸업생이 조국형 목사, 성수경 목사, 이종균목사, 함창현목사, 정희건목사, 최병권 목사(외발산동 광명교회 설립자) 김태수목사, 김현숙전도사 등등이다 (김현숙여사는 후에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이우열장로와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교회들을 도왔다.)  또한 당시 수원에 교회와 학교를 개척한 이기구전도사라던가(후에 안식일교회로 넘어 갔다) 맨발 노방전도로 유명한 최춘선목사도 잊을 수가 없다.

    이 때에 많은 외국인 교역자들 혹은 선교사들이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내한하여 복구사업을 도왔다. 힐 요한(John Hill)목사,  톰슨(Thompson)여사 (주한미군과 결혼하였으나 백혈병으로 일찍 소천), 반힐 여사(후에 힐 선교사와 결혼함), 케넷 여사, 테일러 (H.P.Taylor)목사, 빌스 (Bills)목사 (부산을 중심하여 기독교방송국을 개설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협조자를 구하지 못하여 귀국), 엘리스 (Elis)목사, 세겔키(Seggelke)목사 등이다.
   힐 선교사는 가정적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타 선교사들도 선교사들 간의 심각한 반목으로 제대로 일을 못하다가 결국 서울 선교회는 테일러 선교사가 맡게 되었고 한국 교역자들과의 반목도 계속되었으나 1957년에는 제2회 졸업생(설하운 목사, 채원석 목사, 강순덕 집사) 1958년에는 제3회 졸업생(박병후 목사, 이성학 목사, 신성우, 김정희, 강경자, 조춘자전도사 등), 1959년에 제4회 졸업생 (조충연, 김규상, 김진문, 박재관 목사 등)을 내 보냈고 송월동 건물을 팔고 은평구 신사동으로 이전하기 위하여 1959년에 휴교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원래 중국으로 선교하려 갔던 분인데, 중국이 공산화 한 후 일본으로 건너와 일하던 중 체이스 선교사의 소개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제2회 졸업생 중 설하운 목사는 서울 도원동교회 등에서 목회하였고 부평 보육원과 교회를 맡아 오랫동안 봉직하였고 1981년 소천 후 사모님이 유치원을, 장남 설상문 목사가 교회를 계속 목회하고 있다. 제5회 졸업생 중 조충연 목사는 현재까지 홍제동 교회에서 김규상 목사는 도원동 교회에서 충성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장등을 지냈으며 김진문 목사는 남산교회 필운동 교회 등 목회를 거쳐 미국 임마뉴엘 신학대학원 등에 유학하였으나 지병으로 일찍 1985년 소천하였다.

    이 시절에 선교부에서 일하게 된 몇 인물로는 최순국 목사(유학 후 대한기독교 신학교 기성회장 및 제2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다시 도미하여 제자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음) 최윤권 목사 (서울기독대학교 설립자) 안재관목사(유학 후 대한기독교신학교 이사장등 역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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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

   이 때에 또한 미국에서 악기를 쓰지 않는 선교사들, 리처드슨(Richardson), 최수열(Haskell Chesshir)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효창동에 본부를 정하여 교회, 고아원 등을 시작하였으며 고등공민학교, 신학교(현재 그리스도 신학대학) 성경통신강좌 등을 시작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또한 한국의 환원운동이 갈라졌음은 애석한 일이었다. 정희건 전도자 등은 통신강좌를 발전시키는데 심력하였고, 이흥식전도자, 공삼열전도자 등은 김진건전도자와 더불어 신학대학을 키우는 데 노력하였다. 그 후 통신강좌는 많이 발전하여 BCC라 불리었으며 신학교도 1965년 신학대학 인가를 받아 꾸준히 발전하였으나 교내문제, 재산문제 등으로 한 때는 관선이사가 관리하기도 하였다. 이지호박사, 기준서박사 등이 학장을 지냈고 대학원도 1996년에 신설되었다. 1997년에 대학교로 체재를 바꾸었고 김진건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의 공동 문제인 교회간의 유대 문제, 선교사와 한국 교역자들간의 부조화 등은 심각하였고, 새로운 개혁과 도약의 계기가 기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분명히 태동하고 있었다. 60년대를 향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7.  퍼져가는 불길     

   1956년에 초교파적 기독교 통계를 기록한 "기독교연감"에 실린 그리스도의 교회 수는 51개 교회, 교역자수 38명, 신도 수 1,905명으로 아직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서울에 돈암동 (구광서 목사), 필운동 (성낙소 목사), 서대문 (정희건 목사), 우이동 (성수경 목사), 서울(이신 목사), 아현(유호성 목사)등  6개 교회였다.  성수경 목사는 성낙소 목사의 장남으로 단국대, 경희대를 나온 한의사였고 후에 염리동교회, 시흥교회등을 개척하였으며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개요"등 신학서적도 집필하였으나 아깝게도 일찍 소천하였다(1978).  현재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오수강 목사는 그의 사위이며, 영양교회 오현팔 목사의 손자이기도 하다.  

   경기도에는 인천(이종만 목사), 숭의(이흥래 목사) 광명(최병권 목사)등 3교회가 있었다. 이종만목사는 인천보육원도 운영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갔고(아들 이성도 목사가 LA에서 목회), 최병권 목사는 광명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을 위하여 애 많이 썼으나 과로로 아깝게도 일찍 소천 (아들 최태희목사가 미국에서 목회)하였다.

   충청북도에는 청주(김흥경), 청주(이한성), 부강(김은석목사), 가좌(전봉산), 노은(임혜숙), 충주(강신규), 수리(김주일) 반능(이증식) 등 8교회가 있었다. 특히 부강교회는 김은석목사의 노력으로 많은 개척교회를 시작하였고 피난 중 교역자양성을 위한 성경연구회도 개설하여 중부지방의 중심교회 역활을 하였다.

   충청남도에는 대전(전문오), 판암(이제천), 신탄진(김동열목사), 충곡(김규상목사), 신교, 갈산(김상호) 등 6교회가 기록되어 있다.

   전라북도에는 학동(이제천), 영광(김영철목사), 함평(김제순목사), 궁산, 영흥(장주열목사), 용성(안정숙), 평산(임춘봉목사), 상월(이제균), 방축(방종식), 연화(임남규목사), 화당(황태복), 장성(고광석목사), 동리(임남규목사), 강진 등 16교회가 있다. 김영철목사는 후에 오끼나와 선교, 미국 선교등 선교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교파를 초월한 해외동포 복음화운동의 본부장으로 오랫동안 수고하였고 장주열목사는 그 후 안양교회를 개척하였으나 일찍 소천하였다. 학동교회는 강순명목사가 원래 장로교에서 환원하여 해방 후 서울에서 성경원, 유치원 등을 운영하였고 부산으로 피난가서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다시 광주로 넘어와 김은석목사, 서병열목사등과 더불어 성경연구원을 개설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 양로원도 개설하였다. 전주그리스도의 교회는 1961년 함태영목사가 개척하였고 현재 김용철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동란 중 1951년 봄 광주에서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으로 김은석목사를 선출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이신, 최요한, 김제순, 장주열, 함창현 제씨의 목사안수를 거행하였다. 그후 신학교는 부여로 이사하고 전남에서는 최요한목사를 중심으로 환원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경상북도에서는 대구(조국현목사), 청도(박태섭), 금전, 관하 등 4교회가 등록되었고 경상남도에서는 부산(김봉섭목사), 영도, 통영(변성택), 가야동, 팔성, 길선, 구포 등 6 교회가 있었고, 제주도에도 제주읍에 한 교회가 등록돼있다. 부산으로 피난 온 강순명 목사는 당시 집사였던 장성만 목사집에서 대교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장목사는 그후 미국 신시나티신학교로 유학하고, 부산에서 레쉬선교사와 더불어 동서실업학교를 설립하여 이 학교가 그후 경남공업전문학교, 동서대학교등으로 발전하게 되고 장 목사도 국회로 진출하여 한때 국회 부의장까지 지냈다. 최윤권 목사는 한국전쟁때 군 장교로 복무 후 제대하여 신학교에서 영어강사, 한길 잡지 편집 등 일을 하다가 1956년 미국 산호세 성서대학으로 유학하였고, 링컨신학대학원 등을 수학한 후 1962년 귀국하였다. 그 동안에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4.19혁명을 거쳐 5.16 군사혁명으로 나라가 급변하고 있었고 아직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는 혁명의 극약처방에 다시 움츠리고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디인지 모르게 새로운 봄기운이 싹트고 있었고 막연한 소망이 어느 구석에선가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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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새로운 바람

   60년대에 들어 그리스도의 교회에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선 그리스도인 대회가 시작되었고 교역자회가 생겼다. 신학교도 3개나 개교했다. 정기 간행물들도 생겨났다. 대외적인 활동도 시작됐고 선교사도 보내기 시작하였다.  

우선 테일러 선교사 외의 불화로 갈라져 있던 힐요한선교사가 1959년에 대전시 가장동에 한국성서신학교를 개강했다. 처음에는 이신 목사, 심영진 목사, 임춘봉 목사, 김태수 목사 등이 교수하였다. 심영진 목사는 당시 한참 자라나고 있었던 도마동 교회를 개척했고, 그후 서울 돈암동 교회에서 목회한 후 은퇴하였다. 도마동 교회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교회 중 유수의 교회이다. 임춘봉 목사는 글도 쓰는 분이었는데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국성서신학교는 그 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김찬영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한성신학교로 개명하였고 학교 교사를 충남 연산에 이전 신축하였다.

   1)  신학교 개강       

   테일러 선교사는 은평구로 이사간 자리에 2층 교사를 짓고 서울성서신학교를 1963년에 개강하였다.  교수는 테일러 선교사 외에 최윤권 목사, 미국에서 1962년에 들어 온 패튼 (Gorden Patten)선교사, 빅두진 교수 등이었다. 그러나 테일러 선교사와 한국교회간의 골은 여전하여서 학생모집도 제대로 안되었고 교수들간에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많았다.  그 때의 학생이 김연신목사, 함명덕목사, 오덕근목사, 유봉연목사, 김수자전도사 등이었다. 이들은 64년도 졸업생이었고 함명덕목사는 대전, 성남 등지에서 목회하면서 후에 협의회장, 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유봉현목사 역시 필운동, 성동교회목사를 하면서 1996년도 협의회장이 되었다. 1965년도 졸업생인 현기원장로는 현재 대한기독교신학교 이사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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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출판

   최윤권목사는 귀국 후 도원동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통신신학을 개설하였고 "환원"잡지도 시작하였다. "환원"지 창간호 "창간사"를 옮겨 싣는다.      

       주님의 십자가가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의 생각과 고집과 분쟁으로 그의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리고 또 갈라졌다.  그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십자가를 사람들이 다시 한번 깨트린 것이다.

       환원! 환원이란 돌아가자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물들여지지 않은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교권투쟁
       에 멍들지 않은 초대교회로  찾아가자는 것이다. 까운 자락에 가려지지 않은 그리스도를 찾아가자는 것이다.
       이 작은 잡지는 이 돌아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다.  갈라진 한국교회의 살길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고
       자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에 대답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잡지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어떠한 교파, 어떠한 교단하고도 어떠한 관계도 없다. 구태여 관계를 따지자면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 그의       교회와 관계가 있다. 그의 십자가와 관계가 있다.
      마음 속속마다 산산히 분산된 십자가의 조각을 하나 둘씩 모아 보자고 이 작은 잡지를 내어놓는 것이다.

  1966년에 최윤권목사의 첫째책 "깨어진 십자가"가 나왔다. 영어 저서 "My dear American Friends"도 나와 미국인들간에 많이 읽혔다. 그 결과로 호주 및 영국 그리스도인 대회에서 초청받아 강연차 갔다온 적도 있다. 여기 "깨어진 십자가" 제1권 부록으로 실린 "우리의 주장"을 옮겨 싣는다.

     우리의 주장

     믿는 것           

     1. 우리의 신조는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이상도 아니며 그 이하도 아니다.
     2. 우리는, 구원의 계획이 사도행전에 계시되었으며 그 계획은 사도시대나 지금이나 다름 없음을 믿는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매장 및 부활의 복음이 이를 듣고 순종하는 모든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는다.
     4. 우리는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믿는다.  그런고로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함을 얻는다.
     5. 우리는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회개에 따르는 침수세례는 죄인을 구하는 구원의 중요한 단계임을
         믿는다.
     6.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약성경이 완전한 계시임을 믿는다.
     7. 우리는 사죄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죄인의 마음에서 되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의 감정은 믿을 수 없다.
     8. 우리는 믿음의 문제에 관하여 성경이 한말, 안 한말을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의견에 속한 것이며 의견에 속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친교를 끊을 수
         없다.
     9. 우리는 하나님이 그 자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든 자 들로 구성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를
         인정하심을 믿는다.
    10. 우리는 교회에 있어서의 교육, 예배, 의식, 봉사 등 일체의 문제에 대하여 신약성경만을 그 기준으
         로 삼는다.

    안 믿는것

     1. 우리는 구교의 카톨릭주의, 신교의 교파주의 및 모  든 종파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열
        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모든 인위적인 신조 및 학설을 비판 없이 믿지 않는다.
     3. 우리는 성경에 없는 약식세례 및 유아세례를 믿지 않는다.
     4. 우리는 신약성서에 계시되지 않은 여하한 교회도 믿니 않는다.
     5.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어떠한 인간의 생각도 믿지 않는다.
     6.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여하한 도덕률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그의 피 없이는 아무 것도 우리
         를 구원할 수 없다.
     7. 우리는 사람이 "믿음만" "회개만" "세례만" 혹은 "행위만"으로 구원받음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
         님이 신약성경에 가르치신대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이룬 자와 끝까지 이 관계를 유지하는 자를
         구원하심을 믿는다.

   우리는 이 환원운동이 적절히 이해되고 또한 적절히 실행될 때에 교회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환원시킬수 있으며 신약성경에 계시된대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아직까지 신약교회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였으며 물론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 우리의 목표와 길이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인위적 신조, 명칭, 교리 및 의식을 버리고 성서를 연구하며 바른길을 찾기를 호소한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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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기독교신학교 (현 서울기독대학교  *편집자 주)

   일년 후 테일러선교사와 갈라진 최윤권목사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더불어 대한기독교대학 기성회를 조직했다. 기성회장은 최순국목사가 맡았고  1965년 3월 18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 교사를 마련하여 대한기독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최윤권목사가 교장을 맡았고 구광서목사, 강병천목사, 성수경목사, 심영진목사, 이신목사, 김진문목사, 최윤환목사, 김규상목사 등이 교수하였다. 물론 이 학교가 개교되기까지 선교사들로부터, 혹은 반대하는 교역자들로부터 핍박과 방해공작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협박장과 신체적 위협까지 느꼈다.  그러나 학생들은 모여들었고 교수들은 보수없이도 열심히 가르쳤다. 그리하여 공백되었던 교회와 교회없던 농어촌들을 메워줄 훌륭한 인재들이 양성 되었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을 도와줄 여러가지 행사들이 계획되고 준비되고 실행되었다. 1965년 여름에는 최윤권목사 소유 가옥과 최윤희권사 소유 가옥을 팔아 효창동에 전 철도청 관사를 사들여 교사를 만들었으며 최윤권목사도 아주 그곳에 이주해서 살았다.  

   교역자회도 생기를 찾기 시작하였고 그리스도인대회도 시작되었다. 제2회 그리스도인대회 및 교역자회는 신탄진에서 있었고 제3회 및 제4회는 서울 임마누엘수도원에서 있었다. 제3회에는 최윤권목사가 대회장을 하였고 제4회는 최순국목사가 하였다.  이 때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환원운동의 진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던 때도 없다.  이때에 수고한 동역자들중에는 4.19때 국회의원을 지낸 정인소 박사도 있다.

    이 때에 또한 한국 환원운동에 도움을 준 인사 가운데 라시득(Richard Lash)선교사가 있다. 강원도 원주에 자리잡고 강릉교회, 주문진교회, 병산교회(63년 개척 현재 전주섭목사 시무)등을 개척해 나갔다. 나중에는 부산에서 장성만목사와 더불어 동서실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경남공업전문대학과 동서대학교의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김정만목사, 감리교 부흥사였다가 환원한 백성찬목사등이 꾸준히 환원운동을 지속시켜 나갔다.    

    대한기독교신학교는 계속 성장하여 1966년에는 7명의 졸업생 67년에는 5명의 졸업생 68년에는 10명의 졸업생을 내었고 69년에는 정식 4년 졸업생으로서 20명의 졸업생을 내보냈다.  그들의 대부분은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 중진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장을 지낸 최홍철목사, 편무해목사라던가 제7대 대한기독교신학교 학장 문언식 목사, 김용우목사, 백무길목사, 신조광목사, 유근희 목사, 전주섭목사, 정동기목사, 박희한목사, 심한우 목사, 김명성목사, 김춘국목사, 우심언목사, 육윤식 목사, 이복원전도사, 한정웅목사 등이 다 이 때 졸업생들이다. 특히 한정웅목사는 맹인학자로 오랫동안 맹인교회목사 및 점자 통신신학 책임자로 수고하고 있으며, 이복원전도사는 교도소 전도에 헌신하여 재소자들과의 거리가 멀어진다고 목사안수도 안 받고 있다. 유근희목사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제자파본부에서 국내전도 책임자로 수고하고 있고 신조광목사는 선교회 총무로서 또한 한길사 편집장으로서 수고하고 있다. 60년대 졸업생 중 김일엽 목사, 박희한목사등 아깝게도 일찍이 소천한 주의 종들도 있다.  제2대 이사장으로 안재관목사가 선출되었고 그후 신영순장로가 수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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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보육원

   이때 특기할 것은 지온보육원(어린이집)의 시작이었다. 이 일은 원래 계획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원래 최윤권목사가 도원동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그 곳은 빈민동네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도 많았고 버려진 아이들도 있었다. 교인들 가운데 정신적 장애를 갖게 된 어머니가 있어 아이가 넷이 있는데 굶어 죽게 되어 집에 데려다가 기르던 것이 소문이 나 아이 수가 차차 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때에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또한 지속하게 된 원동력은 1981년에 별세한 민지온여사이었음을 특기한다. 그래서 지금도 지온보육원이란 이름은 그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이들 가운데 심한 화상(火傷)을 입은 아이들이 있어 미국 병원에 가서 수술 받게 도와주는 이들도 생겼다.  처음에는 신학교 한구석에서 기르던 것이 차차 그 숫자가 늘게 되어 할 수 없이 행주대교 근방 개화동에 땅을 사 보육원을 지었다. 서울 근교이면서도 수풀이 많은 곳이라 그후에 그곳에서 여러 번 교역자회도 가졌고 청소년 캠프도 가졌다. 처음에는 민지온여사가 오랫동안 원장을 하였고 1981년 소천 후 최윤권목사가 그후 박국자여사가 책임을 지고 있다. 부원장으로는 최윤모장로, 총무로는 김병복목사, 한호창전도사, 한준희목사, 김상영목사, 이수영목사등이 수고 하여 왔다. 1995년에는 사회복지법인 그리스도의 집이 설립되어 최윤권목사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최윤권목사는 이 일과 관련되는 사회사업 공적으로 인하여 1997년에 국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한 바가 있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최목사사모 박국자여사가 원장 일을 맡아 원사 교회당 신축등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논산 연무에는 일찌기 노봉욱장로가 에덴보육원을 세워 많은 아이들을 훌륭히 양육하여 왔으며 노장로는 또한 보육교사 훈련원도 경영하고 크리스챤 미션 이사장도 겸하고 있다.

    5)  방송

   원래 1955년도에 미국에서 알렉스 빌스(Alex Bills)목사가 한국에 기독교방송국을 설립할 목적으로 계획 모금하여 장소를 부산으로 정하고 건축도 시작하였으나 동역자들과의 불화로 드디어 포기하고,  70년대 가서는 기독교방송을 통하여 최윤권목사, 최순국목사, 김일엽목사등이 "이형과 더불어"라는 방송 프로그램도 시작하였고 그후 최윤권목사가 단독으로 계속하여 기독교방송 혹은 극동방송을 통하여 "저높은 곳을 향하여""그리스도의 교회 아워" "성서로 돌아가자" "기쁜 소식"등 을 방영하고 있고 특히 1990년대에는 심야에 대북방송을 시작하였고 1988년부터 90년대까지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생활 속의 성경"이라는 텔레비전 종교 프로그램도 방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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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신학교의 발전

   신학교도 문교부에서 학교법인설립 및 각종학교 인가를 받아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다.  84년에는 대학 학력 인정과 86년에는 사회 복지과도 개설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97년에 교육부로부터 정식 4년제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70년대 졸업생 중에는 박시래목사, 이부의목사, 장성우목사, 조의환목사, 김탁기목사, 김현부목사, 이강평목사, 이은무목사 등이 있다. 박시래목사는 성악을 한 사람으로 필운동교회 목사를 거쳐 오랫동안 혼혈아 입양관계일을 하고 있고  조의환목사는 1995년도 협의회장, 김탁기목사는 총무, 이은무목사는 오랫동안 동남아 선교에 헌신하는 목사로 선교협력기구 선교사회장도 겸하고 있다. 이강평목사는 미국유학, 체육학 철학박사를 받고 귀국 한양대학교 교수, 비서실장, 체육대학장 등을 하면서 영동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유수의 교회로 성장시키고 있다. 이부의목사는 신학교 교무과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가 현재 은평구 초원교회를 맡고 있고 71년도 졸업생 공창선목사는 임마누엘교회를 맡고 있다. 71년도 졸업생중에는 박은철목사, 이상은목사, 최상호목사, 최태시목사, 윤용현목사등이 있는데 이상은목사는 호주, 뉴기니아 등에 선교사로 갔었고 최상호목사는 성남 산성교회, 서울 산돌교회,광명교회등을 목회하면서 오랫동안 교단일을 맡고 있다.  

   7)  협의회   

   70년대 들어가 교역자회의 명칭이 협의회로 바뀌고 그 성격이 친목, 협조로부터 협의, 통할로 바뀌어 간 것은 대정부 (政府)교섭관계로 필요하였다고는 하나, 또한 교파화(敎派化)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실지로 조직을 어느정도 강화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총회라고 부르기도 하고 연합회라는 조직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래도 오늘날까지 협의회의 성격이 교파교회를 따라가지 아니하고 환원정신을 이어 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다행으로 생각한다. 협의회장으로 최윤권목사, 김규상목사, 조충연목사, 김찬영목사, 함명덕목사, 고재윤목사, 최홍철목사, 편무해목사, 조의환목사, 김용순목사, 유봉현목사 등이 수고하였고 1997년에는 최윤권목사가 다시 선출되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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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해외진출 및 교회 성장

   대한기독교신학교 72년도 졸업생들로부터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미국 산호세의 우남수목사, LA의 최상건목사, 최태희목사, 엄규장 목사, 호주의 어윤각목사, 영국의 차수장목사, 러시아의 김병복목사 이외에도 연홍기목사, 최선준목사, 김종대목사 등이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특히 김순명목사는 LA에서 기독교서점을 하며 미주 "크리스챤"지를 발행, 많은 교역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다가 과로로 94년 소천되었다. 국내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역자들 중에는 이찬우 목사, 송경언목사, 한정웅목사, 김종만목사, 김용웅 목사, 최은용목사, 장성영목사, 김운철목사, 최병춘목사, 최복태목사, 공진봉목사, 이재석목사, 홍순문 목사, 목원봉목사, 배흥옥목사, 민대훈목사, 이병하 목사 등이 있다. 이들 중 장성영목사, 최복태목사,민대훈목사 등은 80년대에 들어 신학교 교수로 수고하게 된다. 이때의 졸업생 중에서 서규석목사는 목포근방에서 농어촌 선교센터를 세워 농어촌과 외국선교에 힘쓸 교역자 재교육 등에 초교파적으로 활동하고 또한 세계선교에도 진력하고 있다. 1972년에 장성만목사가 시작한 부산 진영그리스도의 교회는 현재 이병우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신학교 졸업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교회 수도 늘어나게 되고 1970년도 기독교 연감에는 92개의 그리스도의 교회와 39개의 악기를 쓰지 않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록되어 있다. 1976년도 기독교연감에는 106의 교회와 51개의 무악기(73년 참빛지자료)가 등록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그리스도의 교회 기관들도 늘어난다. 전기 3개의 신학교는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부산의 실업전문대학과 실업고등학교, 고등공민학교, 재건학교 등이 전국 여러 곳에 세워졌고 보육원도 부평, 대전판암, 인천 그리고 지온어린이집 등 여러 곳이 생겨났다.   

   9)  출판

   70년대에 들어가 환원운동에 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된다. 배도은선교사가 운영하는 태광출판사에서는 주로 미국의 환원운동에 관련된 번역물들이 많이 나왔고 최윤권목사도 계속하여 "깨어진 십자가" 제2, 제3권을 써냈다. 제2권에 실렸던 "환원운동의 원칙"을 인용한다.

     환원운동의 원칙

   환원운동은 초교파운동이 아니다. 너나 나나 무엇을 믿던지 무엇을 하던지 다 뭉치기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환언하여, 신앙을 불문 혹은 초월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환원운동이 외치는 것이 결코 새로운 것도 아니다. 성경이 2000년이래 불변하던 것처럼 환원운동의 원칙 역시 2000년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온 것이다.  어렴풋이 알면서도 교파의 신조의 안개 속에서 분명히 포착치 못하던 사실들을 정리한 것이다. 교권과 이해관계에 얽매여서 외쳐보지 못한 사실들을 소리내어 절규하는 것이다. 생명이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적어도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믿어야겠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 최소한도의 기본적 믿음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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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믿는 것은;

     1. 하나의 교회이다.  즉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다.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가 아니면 그 교회당이 아무리 장
        엄하고 그 조직이 아무리 세도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다.
     2. 하나의 책이다.  즉 성경이다.  이것외의 신조도 헌장도 규약서도 강령도 필요없다.  물론 성경외의 여하한
        책도 계시서도 경전도 수양서도 기도문도 우리의 신앙을 구속치 못한다.
     3.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간증이다. 이외의 여하한 신
        앙고백도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4. 성경에 있는 이름이다.  우리는 성경 그대로 신자, 크리스챤, 제자, 성도 혹은 형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결코 장로교인, 감 리교인, 성결교인 혹은 어떠한 교파교인으로 불리기를 거절한다.
     5. 성경에 있는 의식이다.  즉 우리는 세례와 성찬을 그리스도나 그의 사도들이 실천한 형식과 목적 그대로 순
        종한다.
     6. 성경에 있는 정신 및 생활이다.
     7. 성경에 있는 목적 그대로이다. 즉 하늘나라가 하늘에서 이름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려함이다.    

     이상의 원칙을 좀더 구체적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즉 우리의 주장은

     1.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준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다.
     2. 그리스도밖에는 신조가 없다.
     3. 성서만이 믿음과 행실의 유일의 율법이다.
     4. 고로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로써 해결한다.
     5. 개인적 의견에 관한 것은 자유이다.
     6. 신약성서에 기초한 기독교의 단합이다.
     7. 성서에 관한 것은 성서의 이름으로 부른다.
     8. 일체의 인위적 명칭 및 신조를 배격한다.
     9. 성서에 명령된 의식을 명령 그대로 실천한다.
    10. 각개 교회는 독립적 존재이다.

  
한마디로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신약성서에 계시된 그대로의 이름, 신조 및 조직만을 갖고 성서의 명령을 의식과 생활에 있어 순종함으로써 하나되기를 우리는 호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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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새로운 시작

   1)  신학교 통합:  80년대에가서는 또한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대한기독교신학교와 서울성서신학교가 합친 것이다. 최윤권목사와 배도은목사 간에 꾸준한 대화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리하여 1982년 3월학기로부터 신사동 캠퍼스에 대한기독교신학교란 이름으로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사진은 양측 이사들을 가능하면 그대로 합치고 이사장은 배도은목사가 되었으며 학장은 그대로 최윤권목사가 됐다. 합동 후 초기 이사는 이사장과 학장외에 이강평목사, 박점상목사, 샤론 패튼 선교사, 김용주장로, 워너선교사, 이술연집사, 신조광목사, 최윤희권사, 김경옥 원장, 현기원장로였다. 물론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방해공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합동후에도 문제는 많았지만 전체 교회를 위하여 이는 잘된 일이라 생각되며, 또한 그 결과로 문교부로부터 사회복지학과 신설과 대학학력인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1985년부터 최윤권목사는 미국 산호세기독교대학에서 가르치게 된 관계로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어 권인원목사가 교장, 이강평목사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그후 이영창장로가 학장, 현기원장로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94년에 최윤권목사가 다시 2년간 학장을 하였으나 1996년에는 본교 출신인 문언식목사가 취임하였다. 1996년에는 부속으로 신사사회복지관을 인수받아 박국자관장 지도로 운영중이다. 효창동 캠퍼스는 현재 이광실업고등학교(교장 신학철장로)가 사용하고 있다. 1997년에는 환원교육관 6층을 건축하고 교육부로부터 4년제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2)  교회성장 : 1980년 졸업생 중에는 조동현목사, 김점용목사, 김재희목사, 최병춘목사, 조광구 목사, 길지환목사, 구제홍목사등이 활동이 많았으며 특히 김재희목사는 미국유학, 호주유학 등을 거쳐 현재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선교중이다. 81년 졸업생중에는 한준희목사, 이훈구목사, 엄규서목사, 장휘연선교사(비율빈선교사)등이 활약중이며 82년 졸업생 중에는 김양수목사, 이정식목사, 엄만동목사, 설상문목사, 김광준목사, 박윤석목사, 김명국목사, 김종관목사, 최재운목사, 김상영목사, 이수영목사, 정남용목사, 이순장목사, 최연기목사 등이 활약중이며, 박윤석목사는 아프리카 케냐 등에서 선교 중이다. 84년, 85년 졸업생인 방종석목사, 김병승목사, 강나루목사, 김생수목사, 조규상목사, 김도성목사, 박원준목사, 강성진목사, 지계환목사, 한영희선교사, 채진구목사 등도 1996년 현재 국내 국외 목회일선에서 맹활약중이다. 특히 케냐의 강성진선교사, 비율빈의 한영희선교사는 본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에서의 활약상은 과연 놀랄만하다.  

   이렇게 유능한 교역자들이 양성됨에 따라 교회수도 꾸준히 늘어났다. 1975년도 참빛 잡지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유무악기를 통틀어 153개 교회가 기록되어 있는데 1983년 그리스도의 교회통계에는 256교회가 나와있고 1985년도 통계에는 강원도 새하늘교회(심상종목사 시무) 서울 연남교회(윤억중목사시무) 대구 목양교회(유정득목사 설립 김광준목사시무) 인천 성문교회(김운철목사 시무)  경기 평화교회(권오정목사 시무) 충남 벧엘교회(지철희목사 개척 시무)  제주 옥토교회(고봉환목사 시무)등이 이때에 시작되었으며  283교회가 나와있다. 90년대에는 또한 청주 시온교회(백성찬목사 개척시무)  인천 삼천리교회(백순기목사 개척시무) 강원 북일교회(심삼종목사 개척 조영태목사 시무) 경남 진영교회(이병우목사 시무)등이 시작되었다. 유정득목사는 청일전문대학교목 제주전문대학 학장 등을 한 학자로서 교육목회를 위하여 많은 책을 저술했다. 80년대로부터 호주에서 뮤어(Muir)선교사가 내한하여 주로 농아인 상대로 선교를 시작하여 대한기독교신학교에서 수학한 교역자들과 더불어 많은 농아인 교회들을 새웠으며 대전에 농아 재활원 및 로뎀 복지 선교회가 설립되였고 1992년에 로뎀 그리스도의 교회(김운규 전도사 시무)가 시작되었다. 1997년 4월에 3명의 농아인목사(염병복, 오세황, 김 한)가 안수 받았다.

   3)  유무악기 합동을 위한 노력 : 1983년에는 유무악기교회의 합동을 촉구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리하여 양측에서 150여명의 교역자들이 모여 합동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협의회장에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임낙풍목사가 수고하게 되었다. 이 합동이 그대로 지속되었으면 한국교회에 큰 서광이 되었겠으나 불행히도 이 합동운동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고 그 후에 다시 대전지방에서는 총회(총회장 정일호목사, 현총회장 최금생목사)라 하여 일부가 또한 갈려 나갔으니 합치자는 환원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합쳐야 한다. 합쳐야 산다. 합치는 것이 환원운동이다.  

   4)  교회 연합운동 및 교단 연합운동 전개 :  타 교단과의 연합운동도 활발하여졌다. 기독교 지도자 협의회, 보수교단 협의회, 부흥사 협의회, 교회와 경찰 협의회 등에서 주요 맴버로서 뛰고 있고  세계 복음화 대회, 한민족 복음화 협의회, 성령화 성회, 부활절 연합예배 위원회 등 연합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80년대 후반기에는 장로 협의회(1997년도 회장 김문태장로)가 조직되었고 여전도회, 사모회(1997년도 회장 조성숙사모) 학생연합회등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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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현황:   

   현재 (1996년) 통계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로서 등록된 교회 숫자가 약 203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총회로서 (중복이 많이 있으나)로서 등록된 숫자가 약 104교회, 그리고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등록된 숫자가 약 100교회 그 외에도 아무 곳에도 등록 안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합치면 한국에 400여 개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학교가 3개, 고등학교 하나, 중학교 하나, 또한 관계있는 것으로 부산 장성만목사가 설립한 동서대학교 및 경남공업전문학교를 합치면 신학대학 2, 신학교 1, 대학교 1, 전문대학 하나가 된다. 정기 간행물은 3이며 보육원도 3개가 있다.

   한국선교 50년에 이것은 결코 자랑할만한 숫자는 못된다. 그러나 꾸준히 성장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한국선교는 한국선교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다. 감정적인 것과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에게 차분히 앉아서 성경말씀만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 토양에서 성장에 어려움이 있을 것도 상상할 만하다. 우리는 또한 겉모양을  중요시하고 조직을 중요시한다. 이것도 그리스도의 교회의 어려움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또한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교회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때때로 독재가 성황한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말씀은 반드시 승리한다. 아니 말씀위에 선 교회가 역사상 한번도 후퇴한 적이 없다. 사실 이제는 한국내에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메아리 치고 있다. 성서로 돌아가자는 외침을 어느곳에서나 들을수 있다. 성찬식을 일년에 한 번 하나마나 하던 교회들이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은 꼬박 꼬박 실행하고 있다. 이것이 성장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것이 환원이 아니고 무엇이냐!

 10.  평가와 전망     

   우리는 여기에서 그 동안의 역사를 돌아보며 비판할 것은 비판해 보고 앞으로 나갈 길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환원운동이 미국에서 성공한 이유 몇 가지를 들어본다. 물론 첫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경에 계시하신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이다. "내가 이 땅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6)" 하였다. 그만을 의지하며 그의 이름만으로 모이는 교회다. 하나님께서 아니 돌아보실 리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라나게 하신다" 하였다. 우리는, 자성(自省)은 항상 있어야 되지만 자학적(自虐的)이어서는 아니 된다.  진짜 적은 패배주의(敗北主義)이다. 요는 외적(外的)인 부흥이 중요하냐 내적(內的)인 부흥이 중요하냐가 문제이다. 진리아닌 교회가 크면 무엇하냐.  그 교회가 단지 사람의 모임이면 조직이 아무리 큰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러나 미국 환원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그 외에 또한 몇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1)  이 운동이 어디까지나 운동이라는 점이었다. 즉 어떠한 노선과 조직이 결정되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서로 돌아가는, 계속해서 성서적인 것을 찾아가는, 계속하여 초대교회적인 것을 찾아가는 움직이는 교회이었다는 것이다.   

      (2)  미국에서나 호주에서는 타 교파교회와 시작이 비슷했다. 18세기말 혹은 19세기초로 말하면  모든 교파들이 미국이라는 개척지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때였다. 장로교도 그리했고 감리교도 그리했고 루터교도 침례교도 자리잡을 때였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넓은 땅에 아무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교파가 없었다.  

      (3)  개척정신에 맞는 직선적 교회이었다.  미국의 정신 자체가 개척이요 독립이었다. 교회들도 다 독립하려고 애썼다. 특히 영국 본토의 영향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4)  시대적 요구였다.  진화론, 성서비판, 자유주의 등이 사람들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을 때였다. 실증주의, 실용주의가 미국의 정신을 만들어 갈 때였다. 그래서 환원운동이 먹혀들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황이 좀 달랐다. 환원운동이 한국에 들어 왔을 때는 지리적으로나 사람의 마음속에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이미 정착한 뒤였다. 다시 말하면 같은 시작을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국가적으로 세계 제2차 대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제가 극도로 마비되어 있었다.  그 때는 서로가 의지하면서 살아야지 독립적인 정신은 들어갈 틈이 없었다. 환원운동은 신앙의 독립정신이다. 이러한 뜻에서도 환원운동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와 같은 점 외에도 한국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에는 남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1) 다른 교파와는 달리 선교에 통일성이 없었다.  (2) 그러니까 장기적인 계획을 하기 어려웠고 자연히 사람중심, 돈중심이 되어 그 때 그 때 상황과 사람에 따라 선교방침이 변해갔다.  (3) 선교사의 자질문제가 있었다. 선교사 훈련과정 혹은 선출과정의 결여(缺如)로 많은 선교사들이 왔다 갔지만 서로간의 협조가 없었고 오히려 반목, 방해가 많았을 뿐 아니라 한국 교역자와 교회들과의 협조도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환원운동은 불멸의 운동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 못하는 것을 누군가가 반드시 하게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하게 되어야한다. 그런고로 앞으로

      (1)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신학교의 목회자 양성에 주력하여야 한다. 좋은 교역자, 충성된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를 길러 내는
            데 전력을 다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2)  협력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서로간에 뜯어 내리지 말고 밀어 주어야 한다.  인간이라 좀 흠이 있어도 용서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나"만이 옳다고 할 것이 아니라

      (3)  "그리스도"만이 옳다고 하여야 한다.  "성경"만이 옳다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4)  자랑해야 한다.  선전해야 한다. 이 운동을 한국 땅에 전염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한국에서는 환원운동의 (1) 기계화(機械化)를 막아야 한다. 도식화(圖式化)하여서는 아니된다. 어디까지나 운동이어야 한다. 초대교회를 배우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신선하여야 한다. (2) 결정화(結晶化)하여서는 아니된다. 나만이 옳다 하여서는 아니된다. 이것만이 환원운동이다 라고 못을 박아서는 아니된다. 이러한점에 있어서 나는  헌법제정을 언제나 반대하여 왔다. 교파의 울타리를 반대하여 온 우리들이 새로운 울타리를 만들어서는 아니된다. 네편 내편하여서는 아니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교회에 식물(食物)문제가 났을 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롬14:15). 그런고로  (3) 가짜 교제조건과 진짜 교제조건을 분별하여야 한다. 어떠한 문제가 정말 형제의 관계를 끊을만한 문제인가 아닌가 잘 판단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악기(樂器)사용이 형제의 관계를 끊을만한 문제인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합동하여야 한다. 합치는 것이 환원운동의 살 길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선배는 "기본적인 것에 통일을, 비 기본적인 것에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 사랑을"하고 외치지 않았던가!

   때는 무르익었다. 많은 교회들이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오늘의 교회들은 이 운동을 갈망하고 있다. 세계는 이러한 교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같이 저들도 하나되게 하여주옵소서"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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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고 문 헌 -

김익진
안병호
최윤권
-----  

신약교회 운동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성장사  
깨어진 십자가  
교회가 하나되는 길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4권

참빛출판사
석사논문
금성사
홍익재 
기독교문사

1986
1979
1965
1992


 - 그리스도의 교회 및 환원운동에 관련된 한국도서 목록 - 

권인원
기준서
김익진
김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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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컨(역본)
드왤트(역본)
-------   
-------   
맥가비(역본)
미리간(역본)
부라운로(역본)
성수경
오수강
-----
-----
이상호
왤시머(최재운 역)
장성만
-----
장성영
-----
장성우
-----
정희건
조동호
-----
최윤권
-----
-----
----- 최순국 김일엽
최윤권
-----    
-----    
-----    
-----    
-----    
-----    
-----    
최재운    
캠벨(최재운 역)
턱카(역본)
편무해 et al
호븐(역본)

 

그리스도의 교회
신약교회론
한국 그리스도의교회 환원운동사
한국 그리스도의교회 초기역사
예배에 대한 이해
반석위에서
성경에 있는 교회
성령의 능력 (1)  
 ---------  (2)
사도행전
구원의 계획
왜 나는 그리스도의교회 교인인가
그리스도의교회 기본교리
영혼의 새아침
이렇게 믿고 행하고 증거한다    
십자가를 내가지고
히브리어 완전분해 및 강해성경
제자행전  
신과 사랑과 나  
뜻이 있는곳에 길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원리
그리스도교 신학개론
환원교리와 역사
일곱촛대의 비밀
인류문제와 성서
성만찬 예배  
기독교 신앙의 본질
깨어진 십자가 I  
 -----------  II  
 -----------  III  
 이형과 더불어
 기독교 기본교리
1년 52주 설교집
최윤권 목사 칼럼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교회란 무엇인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교회가 하나 되는 길
신앙의 의미
개신교신학
그리스도교 체계
환원운동의 역사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그림자와 실체

 

문연사      
출판부     
진일인쇄소  
태광출판사  
미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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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사      
신우인쇄사   
도서출판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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