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건 장로의 신앙 체험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글 : 오재건


<책 머리에>

제Ⅰ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다
열/여/섯/살/에/입/교
제/사/거/부/하/는/예/수/쟁/이
가/난/과/싸/우/는/소/년
야/학/에/서/공/부/하/다
예/수/믿/고/생/긴/담/대/함(1)
예/수/믿/고/생/긴/담/대/함(2)
군/대/를/이/긴/신/병/의/믿/음
가/정/구/원/이/이/뤄/지/다
어/머/니/의/사/랑
어/머/니/의/입/교

 

제Ⅱ부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다
서/낭/당/나/무/잘/라/땐/일
땔/나/무/사/러/갔/다/생/긴/일
변/소/터/옮/겼/던/일
나/무/가/리/쌓/다/생/긴/일
피/로/가/풀/리/는/체/험

허/리/다/쳤/다/가/고/침/받/은/일

동/생/의/장/파/열
교/통/사/고/났/던/일

 

 

 

제Ⅲ부 내 마음 한 켠을 차지한 모교회
모/교/회/사/랑 
내/몸/에/난/흔/적 

장/례/식/후/교/회/부/흥 

모/교/회/건/축
믿/음/의/형/제/들/과/나/눈/시/간/들 
버/스/정/류/장/에/서/의/전/도 
추/수/때/일/군/이/부/족/함 
게/으/르/고/나/태/할/때/보/여/주/신/것
소/망/이/없/는/자/들/과/다/닐/때
그/릇/대/로/채/워/주/심
기/독/교/는/이/땅/에/발/전/의/밑/거/름

 

제Ⅳ부 물질의 축복을 받다
부/동/산/중/계/업
부/동/산/임/차/인/의/축/복
먼/저/그/의/나/라/와/의/를/구/하/라

 

 

 

제Ⅴ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다
대/전/그/리/스/도/교/회/의/시/작
대/전/그/리/스/도/교/회/의/부/흥 
교/회/의/소/유/권/등/기/문/제

충/주/그/리/스/도/의/교/회
부/강/그/리/스/도/의/교/회 
상/원/그/리/스/도/의/교/회

성/화/그/리/스/도/의/교/회/설/립 
주/민/들/의/교/회/건/축/반/대
 
성/화/교/회/개/척/당/시/본/계/시/들 

성/경/학/교/행/사/때/발/생/한/사/고

 

제Ⅵ부 사랑의 터치로 선교하다
터/치/를/배/우/게/된/동/기  
문/경/영/신/중/앙/장/로/교/회/에/서/있/었/던/일
가/양/동/충/성/교/회/터/치/전/도
터/치/봉/사/로/체/험/한/이/적/들 
우/즈/벡/타/쉬/켄/트/단/기/선/교
필/리/핀/단/기/선/교/(1)
필/리/핀/단/기/선/교/(2)
미/얀/마/단/기/선/교
미/국/단/기/선/교

 

 

 

제Ⅶ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분/열/의/원/인
따/돌/림/의/시/련
시/련/으/로/인/한/번/민
개/척/교/회/실/패/원/인
어/느/목/사/님/이/안/겨/준/실/망
어/떤/형/제/의/배/신
장/로/사/칭/사/기/꾼

 

 

<책 머리에>

욥기서 8장 7절에 있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가 16세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47년간 믿음생활을 하면서 받은 은혜와 복을 헤아려 보면 말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변의 권유도 있고 해서 드러내놓을 만한 이야기들이 못되고 또 보잘 것 없는  신앙체험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만 있다면 무슨 부끄러운 일인들 못할 것인가 라는 용기로 지난 47년간의 신앙생활을 더듬어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시련 중에서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들, 헌신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봉사했던 일들, 신앙생활 중에 겪었던 실망과 좌절들, 그리고 최근 수년동안 사랑의 터치를 배워 하나님의 도구로 크게 쓰임 받게 된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적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끝으로 이 책자가 나오기까지 애써주신 사랑하는 조동호 목사님과 이승복 군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1999년 10월
오  재  건

제Ⅰ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다

열/여/섯/살/에/입/교

저는 1938년 5월 15일(음력 1938.4.5)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6살 되던 해인 1953년 이른봄부터 대전시 서구 내동에 있는 어느 가정집에 개척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그곳에 가려면 산 두 개를 넘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몇 개월 다니다보니 교우가 일곱 사람으로 불어났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신 분은 권창림 씨였습니다. 그분은 말씀을 전하고, 그의 부인은 최직순 씨였는데 그분은 찬송을 인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예배드릴 때 방언, 통회, 예언, 입신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권창림 씨는 신학공부를 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큰일 날 것 같고 죄를 짓는 것 같아 열심히 기도하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너희 동네에서 일곱 사람이 나오는데 먼 곳에서 다니기가 힘들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우리 동네에 개척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면서 시작한 교회가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는 1953년 가을에 손중심씨 집 안방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몇 주간 모임을 갔다가 그 집 옆에 있는 사랑채를 얻어 창립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세 칸 집이었는데 마루 끝은 나무 피쪽을 사다 대고 종이로 벽을 바르고 해서 교회를 꾸몄습니다. 저는 창립멤버가 되어 교회 설립을 돕게 되었습니다.


사진 1
▶ 1955년도 대전교회의 천막교회 시절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18세 시절의 필자

제/사/거/부/하/는/예/수/쟁/이

저희 집안은 아버님이 제가 14살 먹었을 때 세상을 뜨셔서 그 때부터 가정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 졌습니다. 그래서 제사 때가 되면 집안 어른들이 쌀도 가지고 오시고 제사 지낼 제물도 준비해 오셔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어머님께서는 "14대 종손인 네가 집안 어른들의 도움으로 제사를 지내는 마당에 제사까지 빠질 수 있느냐?"며 야단이 대단하셨습니다. 어머님 입장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님이 난 자식이었지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늘 미워하시고 말 한마디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해 주고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내게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을 때면 예수 믿는 놈이 그러냐고 하시며 예수님을 들먹일 때 가슴이 가장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안 들으려고 어머님의 말씀은 무엇이나 순종하고 "아니요"란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동네에서는 예수쟁이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예수 믿고 부모에게 순종 잘 한다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도마동 노인회의 추천으로 효자상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면서도 동생들과 우애하고 부모님께 잘한다고 동민들에게 칭찬 받을 수 있던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주님의 은혜로 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난/과/싸/우/는/소/년

우리 집은 정말 가난했습니다. 선친께서는 왜정시대 보국대(報國隊)에 뽑혀 이북에 있는 광산에 가서 일하시다 다쳐서 일을 못하게 되자 차비도 안주고 집에 가라고 해서 걸어서 오다 더러는 차를 얻어 타기도 하면서 여러 날만에 집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굶주림과 피로로 온몸은 뚱뚱 부으시고 병이 들어 오셨습니다. 해방 직전에도 흉년이 들고 해방되고서도 흉년이 들어 정말 먹고 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활이 너무 어렵게 되어 논 한 섬지기가 있었는데 그 논을 한 마지기씩 한 마지기씩을 쌀 몇 말을 받고 팔아 먹다보니 6·25 때는 땅은 한 평도 없이 다 팔아먹고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선친께서는 1952년 11월경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때 내 나이는 15세이었고 6·25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전역 앞에 가서 피난민들이 열차에서 내려오는 짐 보따리를 져다주는 지게품팔이로 나섰습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보따리 져다주고 하면 돈 몇 푼을 받아 보리쌀이나 좁쌀 한두 되를 팔아 지게 뒤에 메달고 역에서 도마동까지 6㎞ 되는 길을 밤늦게 돌아오곤 하는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늘 주님을 생각하면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였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다 생각하니 마음이 항상 기뻤습니다. 나는 그때 불만이나 부모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고 남이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믿고 첫 신앙이라 늘 주님을 찾고 길을 가면서도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 생각하니 세상 모든 것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나 같은 부자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또 두려움도 없어졌습니다. 밤중에 산길을 가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예수님이 나와 같이 동행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교회에서 혼자 자는데 밤 1시쯤 되어 도둑이 교회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좋은 괘종시계가 있었는데 제가 자는 방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그 시계를 훔쳐가려고 밤중에 교회로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교회에 값나가는 것은 시계뿐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것을 노리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살금살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조금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담대한 힘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순간 큰기침을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은 깜짝 놀라서 줄행랑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에 제 나이는 17세였는데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생겼는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야/학/에/서/공/부/하/다

1955년경에 대전시 인동에 있는 모 교회에서 미 진학한 자나 혹은 피난 와서 학업을 중단한 자를 위한 야간학교를 개설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선생님들이 각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쳤고 후원은 대흥동에 있는 모 교단 선교사님들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6km나 되는 그 곳을 걸어다녔는데 그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자라도 배우고자 하는 욕심으로 참고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더구나 보수도 안 받고서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하시고 저녁에는 야학으로 쉬지 않고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힘들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자들을 선별하여 선교사님께서 미국으로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일년에 몇 명씩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도 잘 못하고 성적도 썩 좋지 않은 제가 미국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자로 선정이 되었다며 선생님께서는 저를 불러 행운아라고 하시며 좋아하시고 미국에 갈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꿈같은 일이고 기쁘기 짝이 없었지만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면 내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러한 형편이었습니다.

어머님이 하루하루 광주리를 이고 벌어야 동생들을 먹이고 학교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매일 지게 품팔이도 하고 남의 집일도 하며 조금이라도 보태야 어머님이 덜 힘들기 때문에 어머님 곁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차후 문제요 고달프게 사시는 어머님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아쉬웠지만 미국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내 일생의 기회로 한 번 뿐이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보니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만약 내가 눈 딱 감고 어머님을 외면하고 선생님의 의도를 따랐다면 제 운명은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더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때 미국에 가서 공부한 사람들은 다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자리잡아 다들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믿/고/생/긴/담/대/함(1)

제가 예수 믿고 처음 교회 다닐 때 내가 이 땅에서 남들 같이 잘 살 수 있다는 소망이나 꿈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워낙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 그날그날 굶지 않고 밥이라도 먹고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에 간다는 그것만이 가장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너무 없고 빈천한 삶을 갖다보니 염세주의자와 같이 이 땅에 대한 소망을 못 갖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유능한 자들 틈에 사는 못난 것을 주님이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나를 지목해 주셨다는 그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때로는 하늘을 쳐다보며 감사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한가지도 없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마음이 뿌듯한 힘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난리가 난대도 흉년이 든다해도 전염병이 번진다해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믿음으로 나의 마음은 항상 기뻤습니다. 산길을 가도 두렵지 않고 밤중에 공동묘지를 가도 그렇게 무섭지 않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한번은 공동묘지 골짜기로 기도하러 세 형제들과 갔습니다. 움막같이 만들어 놓고 일주일동안 성경도 보고 기도하자고 갔는데 첫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었는데 능구렁이 우는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어둠의 세력이 몰려오는 것같이 마음이 억눌리고 몸이 조이는 것 같아 금방 무엇이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님을 부르며 찬송을 크게 부르고 큰소리의 기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얼마동안 기도하고 나니 어둠의 세력이 걷히고 공동묘지 골짝이 우리 집 안방 같이 아늑한 자리로 변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믿/고/생/긴/담/대/함(2)

제 나이 20 살이었을 때 한번은 계룡산 제일 높은 봉우리로 기도하러 학생들과 청년이 함께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여럿이 모여 밤중에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하나가 갑자기 목말라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산의 제일 높은 곳이었습니다. 옆부분은 너무도 가파른 곳 이어서 한번 발을 헛디디면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져 죽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물을 먹으려면 계곡에 내려가야 하는데 우거진 숲 속 컴컴한 계곡에는 갈 엄두도 못내는 곳입니다. 처음에는 거리를 띄어 앉아 기도를 했는데 밤이 깊어가며 두려움이 에워싸 한 곳에 모여 기도하던 차에 목말라 죽겠다는 학생과 같이 계곡에 내려간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이 있는 계곡은 적어도 300m이상을 내려가야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자원하여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더듬더듬 깊은 계곡으로 나무 사이를 헤치고 계곡을 찾아 물을 마시고 왔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같이하시니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은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려움이 떠나고 평안함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힘을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했습니다.

군/대/를/이/긴/신/병/의/믿/음

저는 군대 영장을 받고 계룡산으로 일주일 간 작정 기도를 들어갔습니다. 3일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를 군 복무 중에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꿈을 잘 꾸었습니다. 앞으로 될 일을 꿈으로 보여주곤 해서 재미있는 생활을 하며 확신을 갖고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의 작정 기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 같은 미물을 주님이 버리셔도 할 수 없지요' 하면서 입대하고 수용연대로 가면서도 기도하고 부대에 배치되어 각 내무반에 배정 받고 나서도 나의 기도는 계속 응답해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점호가 끝나고 취침하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첫 번째 불침번을 서게되었습니다. 10에서 11시까지 한 시간 불침번을 서고 다음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고는 침구에 들어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군대는 돼지입니다. 주인의 환갑잔치나 애경사가 있을 때 잡아먹기 위한 짐승과 마찬가지로 유사시 한번 써먹으려고 연마하는 군인이 돼지 떼나 같지 아니할까요' 하면서 '주님! 군복무를 마치는 시간까지 주님이 인도해 주옵소서!' 하면서 기도하는 순간 저에게는 이상한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살던 집이라는데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먼데서 보니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 같은 아주 아늑하고 따뜻하고 행복해 보이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나타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머님께서 저 집을 보라고 하시며 한쪽에 있는 다른 한 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집은 울도 담도 없으며 종이로 바른 문인데 다 낡고 다 찢어졌고 천장은 그을음이 잔뜩 끼여 있고, 너무도 흉한 부엌과 변소는 구더기로 뒤덮인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집하고 이 집하고 바꿨다고 하시면서 저 집을 수리하여 잘살라고 말씀하시기에 기가 막혀서 "예?" 하는 소리에 깨어보니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었습니다. 비몽사몽간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꿈이 순간 해명되면서 위로부터 큰 힘이 오는 것을 깨닫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환상의 내용은 안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군대가기 전 생활은 아늑한 좋은 집이었으나 군대생활은 흉가와 같다는 것입니다. 울도 담도 없는 집 같이 불안전한 곳이 군대 생활이고 편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 군대 생활이 편치 않다는 내용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신 것 그것은 엄청난 힘이요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 그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환상을 처음 보게됐고 나 같은 미천한 것을 함께 하시니 그 순간 군대 3년을 다 마친 기분이었습니다. 나에게는 한없는 힘이 솟구쳤습니다. 너무 기뻐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감사의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 후 환상내용은 일치하여 고달프고 어려운 일이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군 훈련소 중에 모범연대 모범대대 모범소대에 떨어졌고 훈련을 마치고 부대배치를 받았는데 험악한 곳이었습니다. 독립 중대에 떨어졌는데 소대장 중대장 선임하사 모두 예수 믿는 일에 반대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예수 믿는 사람 보면 원수 같고 자기 아버지 죽인 원한 있는 것 같이 예수 자만 들어도 밥맛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가게된 일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부대에 배치된 후 첫 주일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계통을 밟아 교회 가는 외출증을 신청했습니다. 연대에는 교회가 없기 때문에 영외 민간인 교회로 나가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출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번하사를 거쳐 주번사관인 전창구 상사에게 교회에 보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새로 들어온 신병이 사역이나 청소를 하기 위해서 내무반에 대기하고 있어야지 교회는 무엇 하러 가느냐" 며 어디서 이런 농땡이를 바라는 놈이 들어왔다며 야단만 맞고 물러 나왔습니다. 내무반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서 대기하고 있는데 속에서 이번에 교회 못 가면 이 부대에서는 예수 믿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외출신청서를 갖고 주번사관 앞에 나가 '교회에 보내 주십시오' 하고 재신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기를 두다가 장기판을 내치고 나의 멱살을 잡고 땅에다 내쳤습니다. 나는 꽝하고 뒤로 넘어졌고 군대정신이 안 들어갔다며 사정없이 구둣발로 짓밟았습니다.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주번사관이 괜찮냐며 그냥 누워 있으라고 해서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맞았는데도 아픈 곳이나 상처 난 곳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몸이 날아갈 것 같이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주번사관은 내게 네 신앙을 몰라보고 그랬다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 부대에 있는 한은 교회 나가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부터 중대에 알려지어 교회 갈 사람 나오라고 저는 외쳤습니다. 그때 7명이 나와서 외출증을 오재건 외 6명이라고 끊어 가지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부대에 비상이 걸려도 저는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도전했을 때 이렇게 길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대에서는 제대하는 그 날까지 목사님이라고 별명이 따라다녔으며 후에는 모르는 상관이 전임 와서 여러 차례 기압도 받고 교회 보내달라고 했다고 빳다를 맞은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대하기 전 나를 핍박했던 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비참하게 병들어 후송되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번은 부대에 큰 도둑을 맞아 부대전원이 빳다를 맞을 때 선임하사가 피하라고 해서 매를 맞지 아니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순간을 면케 해주는 일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집에 가고 싶어서 외출증을 끊어 가지고 위수지구를 벗어나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인데 대전을 향해 오는 길에 기차 안에는 방첩대 헌병이 기차에 올라와 양쪽 끝에서 군인을 몰아 한가운데 칸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곳에서 적발되면 부대에 알리게되고 위수지구를 벗어나 군벌에 회부된다고 해서 예수 믿는 자가 왜 법을 어겼느냐 며 부대에서 하나님께 욕 돌릴 것 같아 마음 조이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곳에서 아무 일 없이 벗어나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기차 한 칸에는 여러 명의 군인들이 양쪽에서 한 사람씩 검문을 받으며 적발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어느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이 몇 사람을 거쳐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집으로 오게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헌병들의 눈을 가리워 주어 통과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진 2
▶ 1962년 군대시절 신병막사를 지을 때 맨 오른쪽이 필자

군에 있으면서 영광장로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에 참여해 제대하는 날까지 봉사한 일이 있고 성가대에 참여해 많은 교우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군복무 중 신형 막사라는 큰 건물을 짓는데 나는 군대가기 전 교회를 지었던 경험이 있어 외부기술자 대신 그 일을 도맡아 지음으로써 댓가로 중대회식도 하곤 했습니다. 그 후 중대장이 특별휴가도 보내주고 부대에서 인정도 받았습니다. 제대하고는 군속으로 와서 일하라는 중대장으로부터의 제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하고 바로 집으로 왔습니다.

가/정/구/원/이/이/뤄/지/다

저는 우리 집안에 14대 종손입니다. 제가 예수 믿기 시작한 때는 1953년부터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믿는 분들이 적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던히 핍박하고 '예수꾼 예수쟁이' 하고 놀려대며 주는 것 없이 미워하며 훼방을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가 밥 먹여 주느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나는 동네 사람들한테 많은 놀림과 핍박을 받았고 때로는 술 먹고 와서 술주정하는 사람도 여러 명 있었습니다. 어머님을 비롯해 집안 어른들은 장손이 예수 믿어 집안 망한다고 야단들이었고 예수 믿으면 조상도 몰라보느냐며 핍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에 다니러가도 우리 집에는 오지도 말라고 냉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집안 일에 참례하였습니다.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하고 집안의 모든 분들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어른들은 귀신을 열심히 섬기고 술 먹고 노름하고 싸움질 잘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집안 어른들 사는 동네는 항상 떠들썩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집안 어른들이 술주정 하고 싸움질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예수 믿는다고 가장 많이 야단치고 하시던 분의 집에는 우환이 떠나지를 않아서 머리가 아파 수건을 늘 동이고 매 달에 한번씩은 푸닥거리를 하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 가보면 섬기는 신이 여러 가지였습니다.

뒷곁에는 칠성당 신에게 물 떠놓고 빌고, 부엌에는 조왕신, 방에는 성주신, 동구 밖에는 고목나무신, 돌무더기신, 산신령 등 많은 신을 섬겼지만 병은 낫지 않고 우환이 끊어지질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라면 듣기 싫어했지만 나는 끈질기게 예수 믿으면 우환도 떠나가고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온다고 전도하며 기도한 결과 나중에는 예수를 믿었는데 섬기던 모든 귀신들을 정리하고 예배드리는 순간 병은 떠나가고 머리 아픈 병도 예배드리는 도중에 나았습니다.

그 집에서부터 믿기 시작하여 저희 집안은 제가 믿고 9년만에 온 집안이 다 믿게 되었고 집안 모두 저보다 잘 믿는 분들로 변했으며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 다니시며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는 분들이 되었습니다.

당숙모님께서는 글도 모르는 분이었는데 성경 찬송을 사드렸더니 열심히 기도하고 믿음 안에서 사시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글을 깨우치시어 성경도 찬송가도 잘 보시게 되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분은 문맹인 줄  알았는데 신문도 읽고 무슨 책이든 척척 읽으시는 것을 보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여 동네가 변화되었습니다.

술 먹는 분이 하나하나 줄어가고 싸움질하는 분들이 줄어드니 동네가 조용하고 술집이 없어졌으며 새로운 동네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옛날에는 빈촌이었는데 지금은 부자 동네로 변해 잘사는 마을로 변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가면 집안 어른들이 고마워하시며 우리 집안은 장손 때문에 잘살게 되었다고 칭찬과 감사의 말씀을 하십니다. 저희 집안 가운데 예수 잘 믿는 형제들이 많이 생겼고 목회 잘 하는 목사 그리고 잘 믿는 중직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안 믿는 가정이 없고 우애하며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사/랑

나는 어머니를 유난히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어머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가기를 좋아했습니다. 못 오게 해도 야단맞으면서 따라가곤 했습니다. 우리 형제는 누님 하나 남동생 둘 그리고 막내 여동생까지 5남매가 어머님 소생으로 태어나 아버지 어머니 일곱 식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8·15 해방을 거쳐 6·25를 겪고 어려운 시대를 겪고 살아가는 중 아버님이 병환으로 고생하시다 1952년 11월 13일에 이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누님은 1948년도에 시집가고 내 나이 15세 때 아버님을 여의고 동생 셋과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 뜨실 때 남겨 준 재산은 아무 것도 없고 빈털터리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아무 것도 없는 형편이지만 강인한 정신으로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남의 집에 가서 품팔이도 하시고 광주리를 이고 채소 같은 것을 받아다 팔기도 하고 떡 장사도 하시는 등 갖가지 역경 속에서 어려운 나날을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이웃사람도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워낙 어려운 시대라 이웃을 도와주고 할 여유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 굶지 않고 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저도 동생들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없는 형편에 겨우 국민학교를 마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동생들은 공부도 항상 5등 안에 들어 선생님께서 중학교 진학을 권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일찍이 일자리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저도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며 갖가지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지게 품팔이도 하고 냇가에서 자갈도 치고 나무장사도 하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갔습니다. 품팔이를 하며 긴 봄날 종일 무거운 등짐거름 져 나르는 일, 인분 퍼내는 일, 흙을 져 나르는 일 등입니다.

어머님은 제가 이런 중노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시며 항상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논 다섯 마지기만 있어도 남의 집에가 품팔이는 안 할 터지만 논 다섯 마지기가 없어 이렇게 고생한다"고 늘 애석해 하시고 저녁에 집에 오면 내 어깨를 만지시며 어깨 안 아프냐고 물으시곤 하셨습니다.

밥이라도 안 굶고 살려면 품팔이해서는 어렵고, 남의 논 병작이라도 해서 보리라도 심어 보리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었으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보리논 병작을 하겠다고 농토 있는 분에게 사정하여 논을 얻어 보리를 병작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논에다 보리를 심어도 품값이 안 나온다고 보리를 심지 않는데 저 같이 보리논 병작하는 사람은 들내에서 없던 일입니다. 어떤 집은 보리 심어 먹으라고 거저 주기도 한다는데 저는 누가 보리논 거저 주는 분도 없어 병작이라도 해서 반반 나눠 갖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보리를 심어 놓고는 보리밭에 거름을 줘야 농사가 잘 되는데 비료를 줄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 열심히 풀을 베어다 썩혀 거름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비료는 농사거리가 있는 사람에게만 배급을 주어 사유지 농토가 없는 사람은 비료를 살 수 조차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시내에 가서 인분을 퍼다 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농사짓는 곳은 시내에서 6km 되는 곳이라 지게로 져다 주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소구르마로 실어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소구르마를 빌려 퍼와야 하는데 소를 가진 분에게 2마차 주고 우리는 한 마차 차지하는 걸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추운 동절기에도 쉬지 않고 인분을 퍼 날라 보리농사를 지어보았습니다. 어떤 해는 너무 거름을 많이 해서 보리가 다 쓰러져 한해 농사를 망쳐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인분을 푸러 마차를 끌고 용두동 피난민 수용소의 공동변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마차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마차를 받쳐놓고 골목으로 얼마쯤 올라가는 비탈길에 변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인분을 두통 퍼서 지고 내려오는데 겨울철이라 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을 그만 발을 헛디뎌 인분지게를 엎어버리고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곳은 공동 샘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새벽이라 새벽밥하시는 분들이 쌀을 씻고 물을 길어 가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온몸에 인분세례를 받고 공동 우물은 인분 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네 분들이 야단칠 것 같아 당황하여 온몸에 인분으로 뒤덮인 것도 잊은 채 엎지른 인분을 바가지로 담아냈습니다. 그때 나를 지켜보던 분들이 야단도 치지 않고 똥 치우는 일을 거들어 주고 연탄재를 갔다 덮어 주고 옷도 물로 씻어주는 등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오늘날 그런 일이 있다면 동네 버렸다고 야단치며 원성이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 분들은 인정이 메마르지 않아 나를 동정의 눈빛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인분 한 마차는 큰 통으로 24통, 지게로는 12지게를 퍼다 날라야 한 마차가 됩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생활하면서 삶을 불평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한 일밖에 없고 나보다 더 못한 자를 생각하면 더 없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인분 구르마를 몰고 가면서도 늘 콧노래가 나오고 늘 찬송했습니다. 그때 생각은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도 감사했습니다.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예수도 못 믿고 하나님도 모르고 살았을 텐데 하며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동네에 살만한 집치고 예수 믿는 분이 한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인분마차를 끌고 가다보면 앞에 오는 분들이 고개를 돌리고 먼 곳에서부터 코를 막고 갑니다. 옛날에는 버스가 없어서 걸어다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가끔 초등학교 동창들이 학교 가다 만날 때도 있습니다. 모두가 외면하고 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걸어오지만 그렇게 자존심 상한 일도 없고 그들을 부러워 해본 일도 없습니다. 내 본분이 인분 구르마를 끌 복이니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군에 갈 때가 되어 군 영장이 나왔습니다. 저는 영장 통지를 받고 어머님께 알리지 않고 산에 가서 며칠 기도하고 올 테니 허락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러 계룡산에 가서 삼일 금식하며 일주일만에 와서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은 그 동안 살면서 저에게 잘하신 것은 다 잊으시고 잘못한 것만 생각하시고 마음 아프셔서 제가 군대 있는 3년 동안 겨울철에도 추운 방에 요도 깔지 않고 지내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핍박도 많이 하시고 내가 맏이라 동생들에게 조금만 잘못하면 모진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님 마음은 저를 늘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추운 바닥에서 3년을 지내신 것입니다. 제가 시간이 나는 대로 "어머님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기쁨을 찾으시라"고 한 것에 감동되어 제가 제대한 후 꿈꾸시고 나서 예수를 믿으신 후로는 늘 찬송하시면서 "진작 예수 믿었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은 평생 사치를 모르고 사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옷도 해 입지 않고 보약은 물론 아프셔도 약을 잡수시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면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속이 좋지 않으시면 소화제를 잡수시는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하셨습니다. 보약을 해 드려도 죽을 때 바로 죽지 않고 고생한다며 보약을 한 첩도 잡수시지 않으셨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은 잡수시지 않으시고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먹이셨습니다.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사느냐고 하시며 오래 사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이 건강해야 한다며 좋다는 것은 자식들에게 돌리셨습니다.

저의 큰 동생은 생업으로 농사를 조금 짓고 짐승도 조금 키우며 생활을 했습니다. 농토가 많지 않아 남의 논밭을 삯 토지를 주고 채소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머님은 우리 집에 계시지 않고 동생 집에 가 계셨습니다.

농사짓고 바쁘게 사는 것을 보시며 무슨 일이라도 도와주시고 거들려고 한시간도 쉬지 않으시며 청소도 하시고 밥도 지으시고 밭에 가서 밭도 매시고 채소 다발도 묶으시고 하시며 힘에 부치도록 일을 하셨습니다. 동생이 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늘 염려하시고 우리 집에 오시면 한나절을 편히 못 계시고 동생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76세로 생을 마감하시면서도 세상 떠나시기 이틀 전 날도 동생 집에 다녀오신다고 하룻밤을 지내시고 오셔서 2일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교회 일로 어려울 때에는 늘 눈물 흘리시며 주야로 기도하시고 나에게 바로 살 것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우리를 키우실 때 아무리 없이 살았어도 남의 집에 잔치 일을 도우러 가셔서 음식이 산같이 쌓인 것을 볼지라도 주인 몰래 밥 한 톨도 숨겼다가 우리를 먹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믿지 않으실 때도 양심에 가책 받는 일은 평생에 안 하시고 사셨다고 저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남의 궂은 일을 잘 돌봐주셨습니다. 옛날에는 산부인과 병원이 없어 집에서 출산을 했을 때 어머님은 찾아가 산파 일을 돌봐주시고, 힘들지만 와 달라고 하시면 밤이나 낮이나 사양치 않고 가셔서 봉사하는 하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늘 길에 떨어진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주어 와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남의 과일밭이나 참외 수박밭에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며 양심을 속이고 살지 말라는 교훈을 밥상머리에서 하신 적이 많습니다. 너희들은 커서 남의 말을 하지 말고 살라고 누님한테 당부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누구에게나 그 집에 보탬이 되는 말씀을 하셨고 모든 동네 분들에게는 여중군자라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이웃집 고부간에 뜻이 맞지 않아 불화하고 시집살이를 하는 분들이 여러 집 있었는데 우리 어머님께서 그 집에 몇 번 드나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좋아져서 우리 어머님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어머님이셨는데 저는 어머님께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돌이켜보니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 세상에서 지켜보시는 어머님께 죄송할 뿐입니다.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하소서.

어/머/니/의/입/교

우리 집에는 돼지 한 마리를 사다 키워 25관(100kg)쯤 되면 돼지 장사에게 연락해서 팔아 가용에 보태 쓰고 양식도 사다 먹고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누구나 농가에는 돼지 한 마리 정도는 먹이는 시절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나오는 뜨물이나 구정물을 남에게 주지 않고 돼지나 소를 먹여 부업을 삼았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서 먹이던 돼지가 25관쯤 컸을 때 마침 돼지 장사 박씨가 동네에 들려 팔 돼지가 있는지 집집마다 다니며 알아보니 팔 돼지가 몇 마리가 되어 다음 날 잡아가기로 약속을 하고 다녀갔습니다.

돼지 잡는 날 돼지 장사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돼지 잡아가는 시간은 아침 일찍 동트기 전인데 돼지가 아침을 안 먹고 무게를 달아야 돼지고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해가 뜨고 아침 조반 먹을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기다리다 못해 오늘은 안 되겠다 해서 돼지에게 아침밥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도 같이 아침밥을 먹는데 어머님께서는 지난 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하시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는데 무서운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뭐가 무서웠는지를 여쭈어보니 어머님께서는 꿈에 어제 돼지장사가 네가 다니는 교회 밖에서 어떤 흉측하고 잔인하게 생긴 검은 옷 입은 사람 둘이서 돼지 장사 박씨를 무자비하게 내리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다시 그들이 쇠돌이깨로 때려죽이려고 해서 박씨가 교회를 돌며 도망 다니는데 두 사람이 좇아 다니며 내리치는데 한번 내리치면 살이 터지고 피가 나 유혈이 낭자한 그는 교회 문을 흔들어 대는데 교회 문이 안으로 걸어 잠겨서, 들어가면 산다는데 들어가지를 못하고 교회를 돌며 그 사람들에게 수없이 맞고 있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다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 마침 마당에 누군가가 찾아와서 문을 열어보니 아랫집 집사님이었습니다. 집사님께서는 자기네 돼지를 잡아간다고 해서 기다리다 연락을 해보니 돼지장사 박씨가 어젯밤에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신 어머님께서는 사람이 죽을 때 저승사자가 때려서 잡아가는구나 하시며 죽으면 그만이 아니요 무서운 저승사자에게 잡혀가 지옥에 가는가 보라고 말씀하시며 "나도 예수 믿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산다는데 교회 문이 안으로 걸어 잠겨 못 들어가더니 잡혀갔나 보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9년 되던 해 하나님이 우리 어머님께 환상인지 꿈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을 보여주시고 예수 믿게 하신 간증입니다.

어머님께서는 그때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고 성경도 보시며 공식적인 모임을 한 번 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진작 더 일찍 예수를 믿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시면서 총명하던 젊었을 때는 안 믿고 나이를 먹어 믿으니 기억력도 없어져서 성경을 읽어도 머리에 기억되지 않으니 후회스럽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어서는 소설책을 한 번만 읽으시면 빼놓지 않고 다 이야기하시고 한 번 들으신 것은 다 기억하시고 심지어는 동네 분들의 생일날 제삿날도 다 기억하시던 어머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늙으니 성경 윗줄 읽고 아랫줄 보시면 먼저 본 것이 기억되지 않는다면서 젊어서 못 믿은 것을 못내 아쉬워 하셨습니다.

제Ⅱ부 주께서 함께 역사 하시다

서/낭/당/나/무/잘/라/땐/일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엌에서 쓰는 연료는 나무를 해다 땔 때였습니다. 교회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낭당이 있었습니다.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조금 내려오면 사거리가 있는데 그곳에서 가수원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서낭당이 있던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오래 묵은 나무가 서있었는데 수령이 오래되어 거의 다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서낭당의 그 나무는 국도 변에 있었는데 그 길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전 서부지방인 가수원, 진잠, 신도안, 두계, 흑성리, 벌곡, 정림동 ,관저리 등의 수많은 주민들이 지나며 돌을 던지고 나무 가지를 던지고 재수 좋게 해달라고 빌고 가는 곳이요, 정월달은 산내기를 꽈 동여매고 제물을 차려놓고 매년 매달 섬기는 나무로 가지만 주어다 때도 동티가 나서 앓던지 눈이 먼다고 해서 손도 못 대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동내 이장한테 이 나무가 죽었는데 베어 버리면 어떠냐고 물으니 "죽으려면 무슨 짖을 못하겠어?" 하면서 베어 갈 테면 베어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베어간다고 말하고 톱과 도끼로 그 나무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날이 대전 장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장에 가면서 이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 어쩌려구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섬기는 나무를 겁도 없이 베다 동티나면 어찌하려고?" 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지골 맞어 죽는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내가 톱으로 켜고 도끼로 탕탕 찍고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마다 큰일난다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침부터 오정 때까지 나무를 베었는데 아무도 나뭇가지 하나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나무를 베어다 우리 교회에 실어다 놓았습니다. 한해 겨울을 난로에도 때고 사택에서도 때고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에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아무 동티도 나지 않고 잘만 지냈습니다. 안 믿는 분들이 이일을 보고 예수 믿으면 동티도 나지 않고 귀신도 안 들린다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땔/나/무/사/러/갔/다/생/긴/일

우리 누님이 목사님 댁에서 무보수로 식모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물물이 멀어 200m나 되는 곳에 공동우물이 있었습니다. 매일 물을 길어다 먹고 사택 연료는 나무를 때는데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때고 있었습니다. 산들은 벌거숭이산이라 동네 가까이에 있는 산에는 나무 뿌리까지 다 뽑아다 때고 잔디뿌리도 다 캐다 땔 때였습니다. 그 때는 나무하러 가려면 새벽에 일어나 먼 곳을 가야 땔감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님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어느 집사님의 소를 빌려 우마차를 끌고 16㎞나 되는 먼 산에 벌목하는 곳으로 땔나무를 사러갔습니다.

그곳은 평지를 지나서 험한 계곡에 임시로 길을 닦아 벌목나무를 실어 나르는 길을 4㎞쯤 더 가야 있었습니다. 그 길은 계곡 낭떠러지를 끼고 있어서 우마차가 다니기에는 위험천만한 길이었고 인적도 없는 깊은 산중이었습니다.

땔나무를 마차에 부풀게 싣고 험한 길을 소를 몰고 내려오는데 길이 하도 험하고 비탈길인지라 마차가 심하게 뒤뚱거리더니 뚝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짐이 옆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뭇짐이 계곡 쪽으로 넘어지지 않고 언덕 쪽으로 넘어져 다행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짐을 마차에서 풀고 원인을 살펴보니 마차 바퀴 위에 있는 방틀이 부러져 내린 것입니다.  방틀을 고쳐야 나무를 싣고 올 수 있는데 연장이 없어서 고칠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 지역은 인가가 없는 곳이라 연장을 빌리려해도 4㎞이상 가야 빌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낮선 곳에서 누가 연장을 빌려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비까지 오려고 사방이 캄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어 우마차를 살짝 매놓고 나무 파는 산막 복상한테로 달려갔습니다. 2㎞도 더되는 곳에 연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산막 목상한테 달려갔습니다. 마침 톱과 도끼를 빌려주어서 그것을 가지고 와보니 소마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산 속에 소가 혼자 있으니 겁이나 살짝 매놓은 고삐를 풀고 오던 길로 되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계곡 옆으로 난 험한 길이어서 혹시 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졌나 염려스러워 계곡을 살피면서 허둥지둥 오던 길로 달려갔습니다.

그 당시 소 한 마리 값은 우리 집 전 재산의 몇 배였습니다. 만약 소마차가 잘못되면 우리 집은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계곡을 살피며 4㎞를 더 달렸지만 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이는 가슴을 안고 달려갔습니다.

그 계곡에서는 오르막 길이 있었는데 짐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그곳을 올라가지 못해 멈춰 서있는 그 뒤에 소가 마차를 맨 채 그대로 서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멍에도 메지 않고 배만 동여져 있었는데 그대로 마차를 끌고 안전하게 소가 혼자 6㎞정도를 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이었습니다. 황급히 소를 메어 놓는 바람에 잘 메어놓지 않아 소가 고삐를 풀고 도망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소를 몰고 다시 그 계곡으로 가 소마차를 고쳐 나무를 싣고 연장을 산막에 다시 갖다 주고 온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지금도 그때 일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나를 지켜 주신 것이 드러났습니다. 나무를 싣고 올 때 방틀이 계곡 쪽에 있는 것이 부러졌으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큰 사고가 났을 것을 산쪽에 있는 방틀이 부러진 것이 다행한 일이요 감사한 일이었고 연장 빌리러 갈 때 소가 계곡 험준한 길을 마차를 끌고 계곡에 굴러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6㎞정도 간 것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아무 탈 없이 집에 돌아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물론 내 자신이 어려운 과정은 있었으나 너무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변/소/터/옮/겼/던/일

우리 집은 변소가 북쪽에 있었습니다. 방에서 멀리 떨어져 불편해서 가까운 서쪽에 변소를 옮겨지었으면 했는데 그 해 서쪽에는 대장군 방위여서 그곳에 변소를 옮기면 동티가 나서 큰일난다고 안 믿는 분들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변소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변소를 뜯고 서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때는 미신들을 거의 믿는 때라 동네 분들이 지나가며 금년이 대장군방위가 서쪽인데 변소를 옮기다니 하며 지나가는 분들마다 염려스럽다며 큰일난다고 한마디씩 하시며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하는 분들께 저도 한마디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동티나는 것은 없고 아무 일 없다고 담대히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다 돼지막도 짓고 닭장도 짓고 닭도 치고 돼지도 길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동티도 안 나고 닭도 돼지도 잘 커서 새끼도 잘 낳고 모두 잘되었습니다. 동네 안 믿는 분들이 예수 믿으면 대장군방위에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저는 믿고부터는 주일날 일을 안 했습니다. 품팔러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안 믿는 자들이 비방을 합니다. 예수가 밥 먹여 주느냐고 비웃어댔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까지 굶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날 놀지 않고 일하는 분들 더 많이 쌓지 못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저와 같이 동네에 살며 일하는 분들이 나는 주일날 일 안하고 그분들은 일하지만 똑같이 시작해서 저보다 더 쌓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지금에 와서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자기네 입으로 시인들 합니다.

나/무/가/리/쌓/다/생/긴/일

저희 동네에 손중덕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집에 나무가리 쌓는 일을 하러갔습니다. 옛날에는 나무를 해다 때는 시기였습니다. 가을철에 겨울에 땔나무를 해서 저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산에서 나무의 가지치기를 해서 말려 놓았다가 옮기어 쌓는 일이었습니다. 솔나무 가지와 아카시아나뭇가지를 베다가 나무가리를 쌓는 일이었습니다.

나무를 언덕배기에 있는 큰 나무에다 기대어 나무가리를 쌓았습니다. 나무가리를 높이 쌓고 비가 새지 않게 위에다 풀과 소나무 가지를 덮어 해이고 마지막 새끼줄로 바람에 날리지 않게 동여매는데 갑자기 큰바람과 함께 높이 쌓은 나무가리의 윗 부분이 옆으로 넘어져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나무단 위에 서서 손에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내가 날아가는 쪽은 언덕 밑이었습니다. 높이가 10m도 더되는데 그 밑에는 아카시아 나무를 낫으로 베어 놓아 삐죽삐죽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분들은 비명소리를 지렸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서서 30m도 더 되는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면서 주님을 찾는 순간 아카시아 등걸 사이로 사뿐히 내려섰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서는 것 같았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하나님께서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게 지켜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 믿는 분들도 저를 하나님이 지켜 주셨다고 떠들며 신기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는 말을 저들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피/로/가/풀/리/는/체/험

1960년대에 저는 농사도 조금 짖고 남의 일도 하며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종일 일하고 삼일 저녁예배에 참석하려면 손 씻을 시간도 없이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저녁밥도 못 먹고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교회가 1.5km쯤 떨어져 있어서 15분 동안 논둑길로 달려가야 하는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온 종일 일하고 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에 가서 지친 몸으로 앉아 있으면 얼굴에서는 열이 나고 눈이 충혈 되었고 눈이 저절로 감겼습니다.

사 진 3
필리핀 선교사역을 마치고 주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며
그곳은 마치 우리나라의 1960년대를 보는 듯 정겨웠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간절히 기도하고 힘을 내어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나면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피곤이 사라졌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몸이 상쾌하고 가볍고 날아갈 것처럼 변하였습니다. 내가 언제 피곤했었나 하는 맘으로 집에 돌아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잘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허/리/다/쳤/다/가/고/침/받/은/일

1970년대에 도마동 침례 교회를 개척한 최봉구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와 이종 동서간이었습니다. 그분은 처가의 조그만 홀에다 교회 간판을 붙여 놓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목사님은 국수로 끼니를 이으며 어렵게 지내고 있었지만 저로서는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사님께서는 부지런하고 열심히 전도하며 주의 일만 하기에 바빴습니다. 교우들이 아프고 힘들어 할 때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가 기도해 주시고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교회 대지를 80평을 마련하여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할 일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짓는데 협력하였습니다.

그때는 가을로 한창 논에 벼 베기로 바쁠 때였습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시멘트 200 포를 실어 왔는데 느닷없이 소나기가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덮을 포장도 없고 시멘트를 나를 일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저는 옆집의 빈 창고를 빌려 시멘트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에서 이제 막 나온 시멘트라 얼마나 뜨거운지 만지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해서 겨우 나르게 되었습니다.
시멘트가 높이 쌓아지고 거의 다 끝날 무렵 아주 높은 곳에 시멘트를 올린다고 번쩍 들어올리자마자 갑자기 허리가 뜨끔하더니 그 자리에서 철썩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얼마동안 앉아서 쉬었지만 오금이 쓰리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습니다. 며칠간은 용하다는 약국을 찾아다니며 약을 계속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 남모르는 고통을 1년 6개월 동안 겪으며 어려움을 당했지만 어느 날 교회에서 철야 기도하는 동안 아픈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나도 모르는 순간 허리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때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침례교회에 인연이 닿았을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제가 그리스도 교회에 몸담게 된 것 같습니다.

동/생/의/장/파/열

우리 큰 동생은 시내변두리에서 농사짓는 농부입니다. 농토가 적어서 농사만 져 가지고는 생계를 끌어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업으로 양돈을 몇 두 먹였습니다. 양돈 먹이로는 시내 공장의 식당에서 나오는 짬뽕 찌꺼기를 가져다 먹였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는 어김없이 음식 찌꺼기를 운반하는 일을 거르지 않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생이 어느날인가부터 아랫배가 아프다고 약을 사다먹고 시내를 다니며 주사도 맞고 했지만 차도가 없어 날마다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무게가 160kg이나 되는 짬뽕통을 경운기로 실어 나르고 내려야 하는 고된 일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짬뽕통을 경운기에서 아래로 내리던 중 배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그만 아랫배의 약해진 장이 파열되면서 피를 뒤로 쏟으며 기진해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급히 근처 내과로 택시를 타고 갔더니 피 압력기로 테스트 해본 결과 위험해서 자기네 병원에서는 감당 못한다고 빨리 큰 종합병원으로 가보라고 소견서를 급히 써주더니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없이 동생을 데리고 큰 병원으로 차를 타고 갔습니다. 종합병원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데 벌써 동생의 눈이 흐려져 앞이 안 보인다고 하며 몸을 가누지 못하며 손발이 비틀어지고 있었습니다. 즉시 응급실로 갔지만 동생은 정신을 잃은 채 힘든 호흡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동생 옆에서 급한 마음에 누구 바늘 없냐고 하면서 황급히 바늘로 혼미해져 가는 동생의 손과 발을 막 찔렀습니다. 동생이 혹시 죽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 의사에게 물었더니 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장이 파열된 사람이 사는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응급실에 들어가니 몸에 피를 보충해야 된다고 해서 급히 피를 수혈은 했지만 워낙 피가 다 빠져 피를 흡수하지 못하여 피가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도 안되겠다고 말하며 대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몸에서 바로 빼어 뜨거운 피로 수혈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해보자고 해서 식구들을 동원해 같은 혈액을 수혈했습니다. 무려 7명중 4명이 헌혈을 해서 겨우 동생이 살아났습니다. 생기가 돌은 후 동생은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저는 집으로 왔습니다. 저는 동생을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지 얼마가 지나 병원에서 아직은 피가 출혈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의사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동생의 장 파열 된 곳을 주님이 막아주셨습니다."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성도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열심히 기도를 해주셔서 동생은 일주일만에 중환자실에서 곧바로 병원 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속성으로 치유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만 해도 장 파열된 것은 수술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이를 외면하시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동생을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교/통/사/고/났/던/일

이세상의 막다른 골목에 섰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저의 앞에는 선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의 이쪽은 이 세상이고 선 저쪽은 저 세상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에 다가가 한발은 이쪽에 있고 한발은 저쪽에 넘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쪽 발을 땅에서 떼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고 저 발은 저쪽에 디뎠다가도 이쪽으로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쪽 발을 떼는 날이면 영원히 현실로 오지도 못하고 이쪽 분들과는 대화도 안되고 영원히 이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무엇이 생각났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재물도 자식도 친구도 어떤 귀중품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생각나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간다"는 그 일을 알리고 가는 일이었는데 아무도 내 말을 들을 사람이 없었고 지켜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을 떼어놓는 것을 그치고 내가 지금가면 부활 때나 만날 것인데 내가 간다는 그 말을 전해 줄 사람이 없어 아내에게 '내가 가니 부활 때나 만납시다' 라는 말을 전해 주려고 넘겨 놓은 발을 옮기는 순간 잠에서 깼습니다.

그 날 저는 집에서 나와 이천섭 집사님 댁에 갔는데 그 집사님께서 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에게 하는 말이 "장로님 자동차 안 사세요?"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내차가 있는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으니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얀 백차를 타고 어디를 간다고 차를 세워 놓고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군산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외각도로의 교차로에서 15톤 트럭과 충돌하여 승용차의 앞부분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는 망가졌지만 저와 우리 집사람은 다치지 않고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차는 300만원 이상의 견적이 나와 보험처리를 했습니다. 만약 15톤 트럭이 세게 달려 충돌했다면 우리 부부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아직 저희들을 쓸 일이 있어 큰 사고로 죽을 저와 아내를 살려 주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인생길의 종말이 이렇게 순간에 닥친다는 것을 꿈으로 현실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미룰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것으로 주님이 정하여 놓은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제Ⅲ부 내 마음 한 켠을 차지한 모교회

모/교/회/사/랑

나는 자나깨나 내 신앙의 첫사랑인 모교회를 그리워하며 그 옛날 신앙 생활하던 시절을 아쉬워하며 꿈을 꾸어도 그 교회에서 늘 맴돌고 잊으려해도 내 마음 속에는 그 교회가 마음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8년 동안을 그 교회에 몸담은 탓인지 내 손때가 묻은 그 교회는 내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둘기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있다더니 저도 개척교회를 하여 새로운 식구들과 생활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그 교회에 가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잊을까 주님께 늘 모 교회를 잊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모 교회가 잘 되기를 늘 기도 드렸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큰사랑으로 차고 넘쳐 그 교회 다니며 상처받고 나간 자 들을 위로해 주고 좋은 유대를 갖고 화합하는 교회로 그리고 교회를 더 넓혀 크게 일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질 때도 많았습니다.

잔뼈가 굳은 교회, 어려서부터 같이 신앙 생활하던 분들이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성장해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요?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자기 신앙의 뿌리를 찾지 않는 교인이 없을 것입니다. 저희 집에는 모 교회 개척당시 성도들의 명단과 죽을 쑤어먹고 어려운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교회대지를 구입하기 위해 없는 형편에 하나님의 교회를 짓기 위해 전심을 다해 헌금해서 대지를 구입했던 그 명단이 저희 집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때 충성하던 형제들이 현재 남아 있는 식구들 중에는 있지 않습니다.  

사  진 4
1956년 모 교회인 대전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시절

항상 모 교회를 잊지 못하고 첫사랑을 그리워하고 지내던 어느 날 꿈에 제가 큰 나무 밑에 편히 기대어 누워 바라보는 쪽에 저희 모 교회가 가깝게 보였습니다. 웅장한 건물에 성탑이 높이 솟아 있는 교회가 한눈에 보였습니다. 그때 높은 성탑 위에 그 교회 장로님 일곱 분과 안수 집사님들 교회 중직들이 높은 성탑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은 성탑 꼭대기에 마무리 공사로 시멘트 콘크리트를 비비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꼭대기에서 일을 하는데도 일이 끝나지 아니하고, 시간이 걸렸는데도 일을 끝내지 못하고 다들 그냥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박길남 장로님이 제가 비스듬히 누워 쳐다보고 있는 쪽으로 저에게 다가오시더니 교회 성탑 마무리가 아니 되어 저에게 어떻게 하면 끝맺음을 할 수 있느냐며 와서 보고 묘안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하는 말이, 다들 일 잘하시는 분들이 올라갔는데 안 되느냐고 하면서 요청에 못 이겨 장로님을 따라 성탑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성전을 살펴보니 놀랄 일이었습니다. 먼데서 보기에는 웅장한 돌로 쌓아 견고하게 지은 교회 건물로 보였는데 중간쯤 올라가는데 교회가 흔들렸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집으로 쌓은 집가리 교회였습니다. 집가리를 쌓고 겉에다 인조석으로 발라서 돌로 쌓은 것 같았습니다. 성탑에 올라가는데 너무 흔들려서 올라가지 못하고 저는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그때 제가 내려와서 장로님과 집사님들에게 말하기를 집을 지으려면 기초를 든든히 하고 콘크리트를 하고 벽돌로 쌓아서 지어야지 집가리가 왠 말이냐 하면서 집을 다시 잘 지으시라고 말을 하고서 나의 갈 길로 가다가 깼습니다.

그때 저에게 깨닫게 해준 교훈은 인간의 일이란 사람 눈으로는 웅장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집가리 라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끝을 못 맺었는데 그것을 보여주던 당시 교회는 산산히 쪼개져 몇 갈래로 나뉘어 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튼 그 뒤로부터는 꿈에도 잘 보이지 않고 교회에 대한 미련도 덜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5절 말씀처럼 불로 시험할 때 타지 않는 재료로 지은 교회가 되어 주님 앞에서 세운 공력에 따라 모두들 큰 상을 받으시는 모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내/몸/에/난/흔/적

흙벽돌을 찍어 교회를 지었는데 기초가 부실하여 비만 오면 기초 밑이 팽기고 흙으로 바른 담벽은 비에 젖어 팽겨 나갔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임시방편으로 함석을 가지고 가리었지만 비만 오면 교회가 무너질까 바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일을 생각해보니 시멘트로 기초를 덧붙여 보수하고 벽을 시멘트로 발라야 벽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추진하는 분도 없고 그 일을 염려하는 분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 일을 책임져야 할 것 같아 시간이 나는 대로 혼자서 곡괭이를 들고 산에 있는 돌을 파내어 교회 기초 옆을 파서 뜰을 만들고 벽 아래 부분을 조금씩 보수해 나가면서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구하나 거들어 주는 사람 없이 여러 날이 걸려 일을 마쳤습니다.

그때 돌을 망치로 깨다가 돌파편이 튀어 제 왼팔에 박혔습니다. 살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피가 나오지 않도록 끈으로 동여매기만 해서 상처가 다 나은 후 보니 살 속에 돌파편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나았고 부작용이 없어서 수술도 하지 않아 지금 근 사십 년이 넘도록 그 돌파편이 제 살 속에 박힌 채 있습니다. 그 파편을 만져 볼 때마다 옛날에 혼자서 산에 올라가서 돌을 떼다가 교회 기초를 보수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던 증표이자 선물로 생각하고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내 몸에 지니고 살렵니다.

장/례/식/후/교/회/부/흥

교회를 창립한지 십여 년이 넘어도 교회는 약하고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여자들만 나오고 남자 장년들은 극히 수가 적었습니다. 그 무렵 장로라고 하시는 노부부가 교회에 오셔서 신앙생활을 같이 하시고 기도도 같이 했습니다.   그 장로님은 교회와 1.5km나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연로하셔서 아무 일도 못하셨고 사모님이 산에서 나무를 해다 때며 지냈습니다. 생활비는 그 장로님이 젊은 시절 목회 생활을 하시며 구제 활동을 했을 때 도움을 받았던 분들이 조금씩 보태주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장로님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뜨셨습니다. 새벽기도를 나온 나는 그분이 간밤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들려 보니 자식도 없이 사모님 한 분만이 외로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교회에 알리고 장례준비를 하였습니다.

행여는 제가 만들고 꽃은 교우들이 만들고 수의는 입던 옷으로 만들고 해서 많은 성도들이 참례한 가운데 아름답게 만든 행여로 운구하고 앞뒤로는 흰 소창으로 줄을 매어 많은 성도들이 줄을 붙들고 3km나 되는 거리를 찬송을 부르며 가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소문이 나기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교회에서 장례를 잘 치러 준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노인들이 교회에 몰려들었습니다. 노인들이 교회를 많이 찾으니 교회는 자연히 부흥이 되었습니다.

모/교/회/건/축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는 흙담집에서 흙벽돌집으로 그 다음에는 시멘트 블록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제가 군대에 갔다가 오던 그 다음 해였습니다. 온 교우들이 흙벽돌 집에서 시멘트 벽돌집으로 확장하여 나가기를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가운데 건축 헌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다들 어려워서 성전 건축헌금을 하는 분들이 적어 잘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유천동에서 나오는 자매님 한 분이 시집가려고 준비한 혼수비용에서 시멘트 200 포 값을 건축 헌금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헌금이 큰 힘이 되어 건평 33평의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역사로 하나님은 제일 연약한 처녀의 희생적인 헌금으로 하나님의 대업인 교회를 짓고도 남았습니다.

지금 그 자매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결혼하여 잘살고 있으며 남편은 장로님이 되고 그녀는 권사님으로 교회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짓는 일에 참례하신 분들은 누구나 못 사시는 분이 없고 물질적으로도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형/제/들/과/나/눈/시/간/들

저희 집은 믿는 형제들이 자주 모여드는 장소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저희 집에 형제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루동안 살면서 있었던 일과 신앙생활에 관한 점을 토론하며 성경말씀들을 상고하며 이야기하다 보며 금방 밤 12시가 되었습니다. 다음날을 위해 각자 집으로 가는 그런 시간들이 항상 이어졌는데, 그때 한 주일 동안 성경 보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는 제안이 나와 교회의 묵은 사택 빈방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때가 겨울 방학 때였습니다. 특별한 시간이라 먹을 것도 많이 준비해 놓고 집에 가는 분도 없이 성경 보며 토론하며 기도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첫날 아침부터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저녁까지 또 밤중까지 성경에 파묻혀 각자 성경을 내리 읽으면서 자기가 느낀 점 깨달아진 부분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잠잘 시간이 없었습니다. 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그런 시간이 계속되어 6일동안 잠도 자지 않고 철야 기도회가 계속되었으나 피곤치 않고 졸리지도 않고 머리는 더 초롱초롱한 그런 신기한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주일은 전도하러 나서기로 하여 10km 되는 산내면 목달리 라는 동네로 전도하러 각자 자전거를 타고 전도하러 갔다 온 일이 있습니다.

그후 저는 전북 익산시 용살리에 있는 동네에 새마을 지붕 개량하는 곳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이상 잠도 자지 않고 또 하루 종일 전도하러 갔다 쉬지도 않고 일하러 왔는데 피곤치도 않았습니다.

낮에는 하루종일 일하고 저녁에는 용살리 동네 분들에게 성경 말씀을 밤중까지 전하였는데 밤 한 두 시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또 일주일동안 그곳에서 공사하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말씀을 전하고 성경토론을 하며 신바람 나게 재미있는 시간을 갖은 일이 있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의/전/도

언젠가 제가 대전서 논산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연산을 거쳐 논산으로 가는 중 버스 안에서 옛날 우리 교회에 다니던 손중신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하며 가는 도중 그분의 집은 현 논산시 부적면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그분이 그곳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자기 집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집도 알고 싶고 그분의 어머님 아버님이 계시다 하기에 그분들도 뵙고 싶은 생각에 버스표는 전북 익산군 용안까지 끊었지만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내렸습니다. 그 집에 가서 점심을 대접받고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 그의 동생이 저를 배웅했습니다.

행길 가에 이르러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른 분은 다 잘 가라고 작별인사를 하고 들어가셨고 그분의 동생은 저의 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그곳에 남아 있었는데 그 동생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님이 항상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마침 버스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신앙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을 지켜보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말하며 예수 믿을 것을 권했습니다.

그는 대전에서도 깡패클럽에 연루되어 있어 어머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분에게 전도한 시간이 15분 정도였는데 버스가 늦어진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 같습니다. 전도가 끝난 후에 버스가 도착해 그와 헤어져 떠났습니다.

그 순간 그분의 마음이 변화되어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겼습니다. 2년 후에 그분을 다시 만났는데 교회 청년회 회장이 되고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여 주일학교 부장이 되었노라며 나를 만나 반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확실한 신앙인으로 변하여 있었습니다. 장남도 아니고 차남인데 부모님을 모시고 극진히 섬기며 살고 있으며 부적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중직으로 교회밖에 모르는 분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부적에서 제일 큰 집을 갖고 잘 살고 있으며 동네에서도 모범가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추/수/때/일/군/이/부/족/함

저는 어떤 농장에 품꾼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그 농장 주인은 나에게 추수할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들에 가서 벼를 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저에게 낫을 한아름 가져다 내 앞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낫 한가락을 들고 보니 무딘 낫이었습니다.

그중에 날선 낫이 있나 골라보았지만 누가 썼던 낫이라 다 무디었습니다. 무딘 낫으로는 벼를 베기 힘들 것 같아 낫을 갈려고 숫돌을 찾았는데 마침 숫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다가가 앉자 낫을 갈려고 앞을 쳐다보는데 서쪽 햇빛이 눈에 비쳤습니다.

사 진 5
모스크바 선교 중 간증집회를 하며…
하나님은 부족한 저를 들어서도 추수 때 일꾼으로 삼으시니
받은 바 은혜를 생각하면 감격스러울 뿐이다.

해를 쳐다보니 해가 서산에 기울어져 한 뼘밖에 남지 안았습니다. 그 때 들을 쳐다보니 군데군데 추수하지 않은 벼가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당황했습니다. 낫을 갈자니 해가 저물어 가겠고 그렇다고 무딘 낫으로 추수한대도 얼마나 하겠냐 하는 생각에 잠길 때 꿈을 깼습니다.
나는 꿈을 깨고 마음에 추수할 것이 많은데 해가 서산에 걸친 것을 생각하니 시대적인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고 내 자신의 종말도 이러한 상황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수꾼은 예리한 낫을 들어 곡식을 거둔다고 했는데 무딘 낫을 가졌다는 것은 말씀의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세에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먹을 것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한 기근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많건마는 생명수가 말랐다는 찬송도 있듯이 세계도처에서 일꾼을 부르는 이때 모든 교회는 힘있는 일꾼을 뽑아 보낼 때라고 생각됩니다.

그/릇/대/로/채/워/주/심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동절기에 농촌교회에 전도 집회를 하러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 집회를 위해 한 교회를 선정해 놓고 그곳 교회에서 준비기도를 시키고 저희들은 그곳 동네 가구수가 몇 가구인가를 알아 가지고 동네 가구수 대로 수건과 과일을 준비했습니다. 그곳에 갈 때 점심식사는 가는 도중 먹을 때도 있고 저녁식사는 보통 그 교회에서 대접받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교회 안을 둘러보고 목사님이나 그 교회에서 충성하시는 장로님, 집사님, 사모님한테 교회 안의 전체를 담요나 카페트 등 깔 수 있는 것은 다 갔다가 강대상까지 다 깔아 놓으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 있는 방석만 다 깔아도 된다고 말을 듣지 않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준비를 하셔야 채워주신다고 말씀드립니다. 듣지 않는 교회도 여러 번 간곡히 권하면 이만하면 됐는데 하며 교회전체를 다 깔아 놓게됩니다.

그렇게 준비해 놓고 전도 집회를 위해 같이 가신 분들과 그 교회 성도들과 조를 짜서 동네별로 전도하러 나갑니다. 각 가정을 돌며 오늘 저녁 교회에 꼭 나오셔서 좋은 말씀을 듣고 찬양단이 와서 성가 부르는 것도 구경하시라고  선전하였습니다.

전도한 후 저녁식사를 일찍 마치고 저희교회에서 갖고 온 봉고차 3대로 동네 분들을 실어 나릅니다. 낮에 꼭 나오겠다고 약속하신 분들도 저녁에 가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연속극에 심취되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 동네 분들을 앞세워 교회로 모셔옵니다. 저녁 집회시간이 되면 그 교회의 크기대로 50평 짜리 교회면 50평  안이 꽉 차고 70평 짜리 교회면 70평이 꽉 찹니다. 이렇게 그릇대로 채워 주시는 것을 가는 곳마다 보았습니다.

동네 분들이 올 때에는 억지로 끌어오지만 한 시간동안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간증을 하면 감동 받는 이들이 많아 시간이 지나도 집에 가려고도 아니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교회가 이런 곳이냐 며 밖에서 볼 때와 다르다고 하시면서 교회 밑에 살면서도 교회 한번 다녀보지 않았던 분들이 인식을 바꾸고 그 자리에서 다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들을 하십니다.    또 그 교회 다니다가 실족하고 다니지 않고 쉬던 분들도 그 기회에 다들 오셔서 다시 교회에 나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준비한 만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으/르/고/나/태/할/때/보/여/주/신/것

이웃집 논에는 모를 심어 벼가 잘 자라 새순이 나오는데 우리 논에만 모도 심지 않았 뿐 아니라 논 갈이도 하지 않은 광경을 꿈으로 보여 주신 적이 있습니다. (잠 6 : 6 - 11)  넓은 들녘을 바라보니 여기저기 밀을 다 거두지 않아 고스라지고 바스라져 있는데 우리 논이 길 옆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한마디씩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남들은 제때 밀을 거두어 타작이 모두 끝났는데 우리 밀밭만 거두어 들이지 않은 것을 보고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던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런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며 교회도 살펴볼 때 교회는 항상 제자리를 맴돌고 농어촌 선교와 지역 전도도 게을리 하며 안일하게 있는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장로라는 나 자신부터가 게으르니 누구에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을 면하려면 열심히 전도하고 주님의 일에 게으르지 말며 때를 놓치지 말고 주어진 사명을 잘 이행해야 될 것 같습니다.

소/망/이/없/는/자/들/과/다/닐/때

돼지막에서 흘러나오는 오줌과 똥이 시커멓게 섞인 똥 구덩이에 빠져 이리저리 허둥대며 깊은 데에 안 빠지려고 높은 땅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옷은 옛날 거지들이 입고 다니는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상과 벗이 될 때 주님이 입혀주신 흰 예복을 벗어 던지고 거지 신세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요. (계 3:24 ,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로다.)

기/독/교/는/이/땅/에/발/전/의/밑/거/름

우리나라는 일제 36년 동안에는 알맹이는 일본 사람들이 모두 빼앗아 가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값진 유물들을 모두 뺏어갔고 심지어는 수저 놋그릇 등 쇠붙이가 되는 것은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농사를 지으면 벼 한 톨 남기지 않고 모조리 가져가고 집집들이 찾아다니며 혹시 벼이삭을 숨겨놓지 않았나 꼬챙이로 온 집을 쑤시며 찾았습니다.

저는 일제 때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한국 학생들이 몸 건강히 지낼까봐 운동도 못하게 학교 운동장을 모두 괭이로 삽으로 파서 농작물을 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말도 못하도록 모든 학생들에게 딱지 10장씩 나눠주고 한국말 한번 하다 들키면 딱지 한 개를 빼앗고 딱지 10장을 모두 빼앗기면 교무실 복도로 끌려가 벌을 받았습니다.

여름에는 건초를 학생들에게 몇 kg씩 말려 묵혀오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엄청난 벌을 가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산에 가서 소나무 광솔 가지를 톱으로 베어오라고 해서 학교 갔다오면 학생들은 풀을 베고 솔을 따러 다니느라고 바빴습니다. 그 송진기름으로 연료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재수 좋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상으로 운동화를 타서 신을 때도 있었습니다. 모두 빼앗아 가고 대신에 겨우 식량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콩깨묵 피쌀 강냉이 따위를  배급하였습니다. 콩깨묵은 지금에는 짐승들에게도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일제 말기에는 어느 집을 가봐도 밥 한 공기 배불리 먹고사는 분이 없었고 국민 대다수가 굶기를 밥먹듯 하며 멀건 죽과 쑥을 뜯어다 먹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쑥을 가득 심고 그것을 뜯어먹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8·15 해방을 맞고 흉년이 들어 어려운 가운데 6·25 전쟁이 벌어져 또 한차례 수난을 겪게 되어 온 나라가 초토화되고 많은 난민과 고아 과부가 발생하였고 죽은 자만도 통계에 의하면 200만 명이 넘는다 고 했습니다. 그때 세계 각국에서 한국에 관심을 자지고 많은 구호품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 미국과 유럽일대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와 병원 고아원을 짓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후진국으로 쳐져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높은 건물은 대부분 교회로 선교사들은 교회를 짓기 위해 그들 나라의 달러를 가져왔습니다.

그 돈은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자금이 되고 많은 학생을 교육시켜 국외로 보내는 등 국민의 질을 향상시켰습니다. 거의 모든 학교가 교단에 속해 있었고 그 외 많은 공공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국민의 질을 향상시킨 것에 교회가 큰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6·25 사변 직후 생겨난 수많은 고아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그들이 그곳에서 공부하여 훌륭한 인재가 되어 세계 선진국에 분산되었는데 박정희 정권시절에 많은 고급 두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산업을 발전시키고 많은 것을 연구하여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모해 지금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회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국민들이 알아야 될 것입니다. 정부에서 많은 진료 시설을 못해나가는 것을 교회가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어 교회의 혜택을 안 본 사람은 없을 정도입니다. 그처럼 어려울 때 미국과 유럽의 믿는 형제들이 의복과 밀가루 우유 등 많은 구호물자를 보내주어 전 국민의 의식주를 담당케 했습니다.

나라의 어려움을 교회가 밑거름 역할을 해낸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 믿고 더 잘 사는 국민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제Ⅳ부 물질의 축복을 받다

부/동/산/중/계/업

1977년부터 저는 부동산 소개업을 하며 지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생활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안하고 살기로 결심하고 누가 찾아와도 솔직히 사실 그대로를 일러드리고 땅이나 집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말을 해도 잘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거나 말거나 솔직하게 나쁜 부분은 내가 느낀 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때때로 저를 아는 분들이 찾아와 제가 솔직하게 하는 말을 의심할 땐 실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이 찾아오시면 다른 곳에 가보시라고 미리 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모르는 분들이 저에게 많은 돈을 맡기고 차용증이나 현금 보관증 등의 영수증도 받지 않고 거액의 돈을 맡기는 사례가 있어 저는 그분들에게 어떻게 저를 믿고 돈을 맡기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믿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들에게는 후에 많은 땅과 집을 사 드렸는데 모두 잘 되어 많은 이득을 남겼습니다.

부/동/산/임/차/인/의/축/복

1978년부터는 임대업 영업 감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 세를 놓을 때 믿는 가정은 모두 잘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때때로 우리 집에 와서 사시는 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육신적으로도 잘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믿는 형제는 모두 잘 되었는데 믿지 않는 자는 잘 안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집에 이사 와서 새로 믿은 자도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1 구역에 모이는 분들이 우리 집에 살았던 분들입니다. 우리 집에 와서 돈을 벌어 새로 열두 가정이 집을 장만하였습니다.

그중 몇 분은 지금도 친척같이 지내고 있고 먼 곳에 이사간 분들 중에는 시간이 있을 때면 우리 집에 찾아오시고 명절이나 경사 애사에도 찾아오시고 선물도 사서 보내주곤 하였습니다. 성실히 노력하고 믿음 안에서 사시는 분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화 교회가 세워지고 제가 맡은 구역에는 사글세 사시는 분들도 많았는데 몇 년이 지나 모두 집을 장만하고 잘 살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늘 구역식구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먼/저/그/의/나/라/와/의/를/구/하/라

돈같이 더러운 것을 사람들은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저는 물질이 나가고 들어올 때 수 차례 하나님께서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1978년경에 저는 남의 명의로 두 채의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집을 다 짓고 준공을 맡고 나니 집의 명의를 가진 자가 그 집이 자기 집이라고 돌아다니며 말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혹시 그 사람이 집을 잡혀 돈을 빼가든지 하는 사고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그 땅에 큰 변소가 있는데 거기에서 제가 인분 두통을 펐는데 끈이 없어 들고 가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꿈에서 깨고 난 후 그 이튿날 명의 이전을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한번은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을 주식에 전부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식 값이 날마다 곤두박질하는 바람에 경험도 없는 저는 많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 앞에 인색하여 큰돈을 손해보게 된 것을 깨닫고는 주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또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똥구르마에 똥을 한 마차 실어다가 큰 탱크에다 퍼 붇고 있었습니다. 그 통은 큰 공설 운동장만 했는데 통 안에는 말간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실어온 똥을 다 넣고 저었는데 역시 멀건하였습니다. 그 똥이 거름이 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 꿈에서 주님은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 똥이 거름이 되는 즉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때 주식을 사서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들은 주식 값이 올라가 많은 이득을 보았습니다. 그 꿈을 통하여 똥은 더럽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면 곡식에 좋은 밑거름이 되듯이 저는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랜 기다림을 통하여 좋은 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Ⅴ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다

대/전/그/리/스/도/교/회/의/시/작

대전시 서구 내동에 있는 가정집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던 권창림, 최직순 씨 부부가 저를 포함하여 그 교회에 다니던 우리 마을에 사는 교우 일곱 사람을 데리고 우리 동네에 세운 교회가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1953년 가을에 손중심씨 집 안방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몇 주간 모임을 갔다가 그 집 옆에 있는 사랑채를 얻어 창립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세 칸 집이었는데 마루 끝은 나무 피쪽을 사다 대고 종이로 벽을 바르고 해서 교회를 꾸몄습니다. 강대상은 궤짝 같이 짜서 놓고 교회 종은 6.25 전쟁 때 불발탄인 포탄의 속을 뺀 것을 메달아 놓고 망치로 때려 소리를 내어 종으로 사용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저녁에는 싸늘한 교회에 불도 피우지 않은 방에서 철야기도를 하며 교회에서 혼자 자는 때가 많았습니다. 새벽종은 항상 내가 치곤 했습니다.

대/전/그/리/스/도/교/회/의/부/흥

나는 교회를 우리 집보다 더 좋아하고 더 사랑했습니다. 어디서 좋은 나무 한 그루나 꽃나무 한 송이라도 생기면 교회에다 갔다 심고 과일나무도 우리 집에는 심지 않았지만 교회에는 갔다 심어 교회 가꾸는 일에 즐거움을 가졌습니다. 17살 때 교회를 이전했습니다.

대전시 도마동에 있는 지금의 대전그리스도의교회 그 자리인데 산언덕의 흙을 파 가는 흙구덩이였습니다. 그곳에 정리작업을 하고 토담을 쌓고 군대 천막 반장을 사다 지붕을 만들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태 난 곳은 떼를 떠다 입히고 나무를 심고 좋은 동산으로 꾸며서 셋방살이하던 교회가 천막교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토담을 늘려 쌓고 군대 천막 반장을 쳤던 지붕은 왼 장을 치게되고 일년 후엔 흙벽돌을 찍어 교회를 다시 짖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청년들과 전 교우들이 참석해 흙벽돌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마르기도 전에 비가 오곤 해서 논밭에서 일하다 말고 교회로 달려가 흙벽돌을 덮고 모으고 다시 널고 했습니다. 덮었다 벗겼다 하며 벽돌을 어렵게 말려 교회 벽을 쌓았습니다.

나는 벽돌 쌓는 것은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들보다도 더 반듯하고 예쁘게 벽돌을 잘 쌓았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깡통으로 만든 함석으로 덮개를 했습니다. 벽 바르는 일도 한 번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벽이 잘 발라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흙담교회에서 흙벽돌교회로 발전했습니다. 사택도 흙벽돌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군대 갔다와서 26살 때는 시멘트 벽돌로 교회를 다시 짓게 되었습니다. 마침 군복무 기간 중에 사역병으로 막사 짓는 일에 참여하여 벽돌 쌓는 것을 배웠는데 우리 교회 지을 때 그 기술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지었습니다.

지붕은 슬레이트로 했는데 나는 헌금도 많이 못하니 몸으로도 봉사한다고 작정하고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나는 주일학교를 7년간 맡아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교회 사택을 시멘트 벽돌로 해서 현대식으로 짓고 교회 꾸미는 일과 화단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택을 짓고 나서 교회당 윗쪽 축대 쌓는 일에 80일을 봉사했는데 일이 다 끝나고 일 개월이 채 안되어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일은 교회 일을 했는데 품삯은 하나님이 딴 곳을 통해 백 배로 주셔서 우리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땅이 도로 계획에 뒤 땅에 붙어 있었는데 도시 계획과에 있는 분이 도로 앞의 땅값으로 줄 테니 팔라고 해서 팔았는데 뒤 땅값의 세배를 받아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땅에서 돈이 솟아난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합법적인 절차로 땅을 팔아 이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 일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품값은 백 배로 주셨음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도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또 다시 교회를 신축하게 되었는데 내가 전담한 것은 교회 문 일체와 교회 전면에 돌 붙이는 것 그리고 화장실 짓는 것 및 정원수를 옮겨 심는 것 등이었습니다. 목사님 사택 짓는 것도 두 달 동안 아내와 함께 일을 했는데 보수는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교/회/의/소/유/권/등/기/문/제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임대로 있던 대지를 우리의 힘으로 매수하게 되었습니다. 평수는 정확히 모르나 약 230평 이상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에 재단법인이 없어서 성도들 대표 6명을 선정하여 6인의 공동명의로 등기를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신축하던 중 목사님께서 교회명의를 법인으로 하지 않고 자기 단독 명의로 해놓아야 일하시기가 쉽다고 교회 대표로 등기명의가 있는 형제들에게 등기 이전 서류를 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매도 증서에 도장을 찍고 인감을 해오라고 성화였습니다.

동료 집사님들은 성화에 못 이겨 다들 매도증서에 도장을 찍었는데 저는 교회소유권을 개인 명의로 하면 세금, 재산세, 등록세, 취득세 등 갖가지 많은 물질적 손실도 있지만 그보다 교회재산을 개인명의로 한다는 것에 저는 이해가 안 되어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온 교우들에게 광고해서, 동의하면 이전등기에 도장을 찍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절대로 단독명의로 하는 것은 용납 못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원인을 공개하지 않고 하나님 종이 하는 일을 반대하면 저주받는다고 단에서 외치며 말씀전할 때마다 갖가지 성경말씀을 적용시켜 저에게 듣기 어려운 말을 전했습니다. 자기 추종자 성도들을 동원 몇 차례 우리 집에 몰려와 등기를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주동 집사가 와서 법으로 하면 지니 일찍 도장 찍는 것이 좋다고 공갈협박까지 몇 차례 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나는 힘없고 세상 법에 매어 있으니 판사가 도장찍으라면 찍을 것이니 법으로 하자면 법정에서 만나는 일이 있어도 단독명의는 절대로 찬동하지 않겠노라고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이렇게 갈등 속에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창립 멤버로 총각 때 집사가 되고 20년 이상 구역예배를 인도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교회의 궂은 일과 성도들 가정에 애사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 참례하였습니다. 그리고 젊은 나이지만 입관식에 참석해서 제 손으로 40명 이상 염을 한 경험이 있고 하관식에도 항상 참례하여 저를 아는 노인들은 항상 제 손으로 염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고, 많은 성도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의도를 따르지 않는다고 장로 추천을 받았는데 장로는 물론 집사직까지 제명 받았습니다. 목사님 마음을 괴롭혔으니 교회에 나오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종용받고 10년을 많은 괴로움과 갈등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목사님이 미워서가 아니고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 라는 것을 목사님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목사님 집 짓는 일을 아무런 보수도 없이 지어드렸습니다.

그러나 사택에서 26년을 무보수로 봉사하고 있는 우리 누님을 시켜 등기 이전서류를 받아오지 않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누님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님의 청을 들어줄 그런 마음이 아니고 내 목이 붙어있는 한 도장은 안 찍겠다고 하자 누님은 울면서 동생네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 대치 속에서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밤중에 집사님 한 분과 함께 기도를 드리는데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이 지라고 하시면 져야지요' 하면서 그 다음날 매도증서에 도장을 찍고 인감을 내어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대전그리스도의 교회는 개인명의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목사님이 주일 낮 예배 시에 선포하시는 말씀이 오재건이는 목사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3개월 동안 근신하라는 근신처분을 내렸습니다. 교우들 중 목사님을 추종하는 분들한테 말로는 옮길 수 없는 욕설과 눈총을 먹고살던 저는 드디어 교회를 못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 주일이 돌아왔는데 목사님께서 다시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오재건이는 우리 교인이 아니니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소식을 우리 집사람이 아직 그 교회에 나가고 있었으니 듣게된 것입니다. 그 후 목사님을 길에서 만났는데 인사를 드렸더니 고개를 돌리시고 인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또 길에서 교우들을 만났는데 인사를 하니 인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꿈에도 늘 보이고 28년 동안 몸담아왔던 교회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손중심씨 안방에서 시작하여 흙담교회를 거쳐 흙벽돌로 성전을 짖고 지붕을 함석으로 이은 교회지만 그렇게 기뻤고 사랑했던 교회, 또 부흥회 때 시멘트로 된 현대식 건물을 지어 봉헌할 때 기뻤던 일, 집에서 그렇게 혼나면서도 교회가 좋아 매일 교회에서 자던 일, 크리스마스 때면 2주 전부터 교회에서 자면서 등을  만들어 주어 새벽송 돌 때 사용하려고  밤을 지새며 등을 만들던 일, 형제들과 저녁 밤 12시 15분전까지 성경 보며 토론하고 교제했던 일, 초창기 때 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흙벽돌을 찍어놓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밭에서 일하다 말고 교회로 달려가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제 손으로 교회를 네 번 지었습니다.   제 손때가 묻은 교회. 제 첫사랑인 교회를 등지고 산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주룩 나올 것만 같았고, 지난 일 하나하나가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추억을 뒤로한 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못되어 목사님은 그곳에 계시지 못하고 떠나게 되셨고 교회는 분열되어 500명되던 교회가 몇 갈래로 갈라져 흩어지고 남아 있는 중직들이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교회의 소유권등기가 들려있었습니다. 목사님을 제일 추종하는 분들이었고 모두 교회의 중직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또 교회등기를 교회명의로 법인등기를 해 가지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다며, 저에게 교회에 들어와서 장로 노릇도 하고 교회를 이끌어 가자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제직회에서 통과됐다고 말하며 들어 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왕 주님이 내보냈으므로 내 일을 할 것이니 당신들은 그 교회를 위해 충성할 것을 부탁하며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서 연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교회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어 도마동 그리스도의 교회, 한밭 그리스도의 교회로 80명 정도로 갈라져 나갔고 개인적으로 순복음, 감리교, 장로교 등 여러 교회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는 250명 가량이 남았습니다. 남아있는 성도들 대부분이 하는 말이 오재건이는 10년도 참으며 교회가 어려운 중에도 남아 있었는데, 우리도 교회가 갈라져 힘들어도 참고 견디자는 여론이 돌아 남은 자들이 많았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참 기뻤습니다.

또 한가지는 저를 통해 성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려는 뜻이 있는 것을 늦게서야 깨닫고 다시 감사했습니다. 나 같은 무능한 것을 장로로 세워 주시려고 연단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 더욱더 감사했습니다.

제가 지내온 이 '교회의 소유권 문제'는 분명히 개인명의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교회들 중 소유권을 개인명의로 해놓은 교회는 문제가 있음을 제기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교우들의 피와 땀으로 헌금한 것을 교역자 자신이 마음대로 낭비하는 일은 막아야합니다.

무슨 낭비요 할지 모르지만 첫째 교회 이전등기를 하려면 등록세와 취득세를 내어야 하고, 개인명의로 해놓으면 재산세를 해마다 내야합니다. 땅 평수가 많은 대지는 그 액수가 수 백만 원 혹은 수천만 원 되는 돈을 내야합니다. 그러나 '교회법인등기'로 하면 한푼도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개인등기'로 하여 수백만 원의  세금을 낸다면 그것은 성도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땅 등기 건물 등기 재산세 등 교회는 아무 세금도 내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명의로 해놓은 교회는 언젠가 문제가 발생할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뻔합니다. 교단 재단 법인에 넣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교회자체 법인등기를 해서 감면 받을 수 있으니 재단에 넣기 싫다고 개인등기 하시는 분은 성도들이 막아야 하고 목사님 교역자 자신이 자진해서 법인등기로 혹은 교회 명의로 등기하시고 마귀 올무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모 교회와 같이 안 된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탐욕은 자신도 망하고 교회도 망합니다.

충/주/그/리/스/도/의/교/회

1977년도 봄 어느 날 갑자기 친구인 정일호 목사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으니 충주 교현동에 있는 조그마한 집 이층에서 개척 교회를 시작했는데 마침 교현동 산등성이에 대지 60평, 건평 25평되는 집이 싸게나온 것이 있으니 돈이 있으면 매수했으면 하지만 돈은 없고 놓치고 싶지 않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래서 제 사업 자금 중 일부를 떼어 매수해보라고 제의했습니다. 현재도 그 집이 교육관으로 밤에는 기도하고 성도들이 잠자는 방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적은 정성이 충주그리스도의 교회 성장에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사랑의 터치 집회로 95년도에 처음으로 그 교회를 방문하여 삼일 저녁예배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후 사랑의 터치 봉사를 하면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창대의 축복을 교회에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몸이 아픈 분 100명을 밤12시까지 일행 4명이 터치 봉사를 하고 돌아온 일이 있습니다. 정일호 목사님은 초저녁부터 밤12시까지 앉지도 않으시고 서서 교우들을 격려하고 우리가 터치 봉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그날저녁 성도들이 헌금하신 헌금을 봉투도 열어보지 않고 전부 선교헌금으로 주셨고 우리는 넘치는 대접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많은 환자들의 병이 나았고 소아마비로 40년 전 몸이 마비된 한 자매님은 한쪽 다리가 짧아 절뚝거리는 분이었는데 등뼈가 구부러진 것이 펴지면서 다리가 펴지어 절뚝거리는 것이 많이 나았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부/강/그/리/스/도/의/교/회

1976년부터 1977년 사이에 김태수 목사님(현 미국 LA)이 대전 그리스도교회를 방문하여 부강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도와달라고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는 김태수 목사의 선친께서 대지 500평을 하나님께 바쳐 부강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담임 목회자로 오신 분들 수십 명이 거쳐가면서 교회대지를 여러 명목으로 조금씩 매도하여 1976년경에는 147평이 남았는데 담임으로 오신 분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교회를 쇄신해 보겠다고 어떤 건축업자에게 매도하였는데 중도금까지 받아서 나머지 잔액을 받고 등기이전을 해주어야 하는데 교회 땅 명의가 그때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김태수 목사님(대한신학교 교수재직)명의로 있어서 등기를 못 넘기고, 매수자가 고발하여 판결등기로 등기가 넘어가고 매도자인 교역자는 형사고발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태수 목사님 앞으로 판결문이 전해와서 법원에 항소하여 땅 등기가 원위치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소송비를 부담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승소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부강교회 등기가 김태수 목사님 앞으로 있는 것을 이전등기 서류를 해서 내게 맡기고  목사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1977년 두 분을 찾아가 교회 등기관리를 나에게 맡긴다고 허락 받아 제게 서류를 넘겨주고 떠났습니다.

그 후 제가 김재중 전도사를 그곳에 보내 목회를 해보라고 하여 김재중 목사님이 그곳에 부임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 예배당이 낡고 초라하여  교회를 다시 신축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147평 중 27평을 떼어 팔아 교회 신축하는데 보태어 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윤 집사님, 조 권사님의 동의하에 대지 27평을 팔아 건축금에 사용하였습니다. 지붕은 제가 담당한다고 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김재중 목사님은 충북 양촌 그리스도의 교회로 가시고 부강교회는 김평수 전도사님이 새로 부임하셨습니다. 그 후 한명호 목사님이 오셔서 대지를 더하여 현재의 교회를 건축하신 것입니다.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는 김재중 목사님이 대지 27평을 떼어 판다고 해서 27평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주고 인감을 떼어 주었는데 매수자가 그 서류를 갖고 147평 전체를 자기 앞으로 등기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법적으로 고발한다고 내용증명을  몇 차례 보내었으나 듣지 않아 나중에는 그 문제로 인해 제가 청주법원과 부강교회를 여러 번 오가며 속썩은 일이 있습니다.   교회 대지를 관리할 분이 없어 크리스천 미션 재단에(이사장 노봉욱 장로) 넘겨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부강교회가 그리스도 교단의 장자 교회로서 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음을 보며 참으로 감사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원/그/리/스/도/의/교/회

상원 그리스도의 교회는 경북 영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우리 성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전도하러 가서 그곳에서 전도대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허름한 고가의 방 두 칸을 얻어 김광호 전도사님이 개척을 시작해 몇 몇 분이 모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을 회관을 빌려 하루동안 전도집회를 했는데 여러 동네의 사람이 모여들어 마을회관이 꽉 차고 밖의 마당까지 차게 되여 성황리에 전도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대전에서 5시간 넘게 차로 가야하는 거리입니다. 전도대회 할 때 동네 분들이 교회만 지으면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교회 짓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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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 그리스도의 교회 건축할 당시의 모습

그후 제가 주선해서 땅 200평을 구입하고 집 지을 때는 성화교회 구제남 목사님 이용섭 집사님과 함께 2주 동안 있으면서 우리 손으로 교회와 사택의 벽을 쌓았습니다. 그 후 헌당식에 참석하여 감사패도 받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후 김광호 목사님은 전남 달래도 교회로 가신 후 현재는 어찌 되었는지 소식을 잘 모릅니다.

성/화/그/리/스/도/의/교/회/설/립

저는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를 28년 동안 섬기다 나왔습니다. 사랑하던 교회에서 밀려나온 아쉬운 마음에 나는 교회의 적을 두지 않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며 걸식 신앙생활을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나와 첫 번째 주일은 대흥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복음교회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 옷을 입고 책을 들고서 집을 나셨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복음교회를 가려면 집에서 서쪽으로 가서 차를 타야 하는데 동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다보니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서 100m도 더 되는 곳에서야 깜짝 놀라 섰습니다. 졸음도 아니 오는데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까 생각하는 동안 옛날 일이 생각났습니다. 대전그리스도의 교회에서 9년 전 나온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기로 하고 그 모임에 가보니 전에 나온 분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약간의 언성을 높였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도 보이지도 않고 9년 동안 자기네끼리만 모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를 모시고 자녀들도 교회에 나오게 해서 교회를 제대로 세우자고 말했으나 다 듣지는 않고 세 가정만 제 말을 들었습니다. 방봉권, 임춘자, 정삼규 씨(당시는 집사였음)는 저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습니다. 저희 집 2층에 탁구장을 했었는데 탁구장을 치우고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초대 교역자는 신희철 전도사로 그 당시 대한신학교에 재학 중이였습니다. 주일학교 학생을 주축으로 어린 주일학교가 잘되면 그들이 커서 중 고등부가 되고 그들이 크면 청년 장년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시작했습니다.

대전지방회를 통해 전국에 알리고 성황리에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2년 후 신희철 전도사님은 자기 아버지 신두수 목사님의 지시에 따라 감리교회로 갔습니다.

후임으로는 82년 가을에 최병춘 목사님이 오셔서 83년 5월 20일에는 3층으로 확장 이전해서 올라가고 2층은 사택 20평 교육관 20평으로 쓰고 3층 40평을 본당으로 꾸미고 입당예배를 드리며 장로, 권사 취임식을 했습니다. 권사로는 김해숙, 이도희, 이기윤, 장로로는 정삼규, 방봉권, 오재건, 이렇게 세분이 취임식을 갖었습니다.

그 당시 주일 대예배 출석 인원은 장년 95명 정도였습니다. 84년 12월경 최 목사님이 사임하시면서 교우 30명 가량이 함께 나가 대신그리스도의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삼일 빌딩(당시 향우 자동차 중고 판매소 맞은편) 3층에 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최 목사님이 가실 무렵 교회는 파괴되어 다 흩어지고 몇 가정만 남았습니다. 그때 최 목사님과 뜻을 같이하여 나가서 교회 개척하러 가신 분들이 여럿이었는데 교회는 지속되지 못하였고 최 목사님은 선화동 교회로 들어가시고 나머지 분들은 다 흩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주동해서 가신 분들 중 네 가정이 7년만에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1985년 1월에는 제 3대 교역자로 구제남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구 목사님은 소탈하고 검소하신 성품으로 친화력이 있어 교회가 곧 안정되었고 지금까지 능력의 종으로서 교회를 잘 이끌고 계십니다.

성화 교회는 창립 11년만에 현 위치에 교회를 신축하고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건평 약 250평을 하나님의 은혜로 완공하고 1992년 6월 20일 헌당식을 가졌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몇 가정이 성화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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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31일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우들과 함께 한 조촐한 파티

세운 교회가 성민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저는 교회 일은 완벽한 것은 없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나아 키우다보면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대로 몸에 맞는 옷을 해 입히는 것이 원칙인 것처럼 교회도 그 교회의 형편에 맞게 교회를 짓고, 더 성장하면 또 성도들의 힘이 닿는 대로 더 크고 더 좋게 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은혜 받은 성도들이 충성할 일감이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역량대로 최선을 다하다 가는 것이 성도의 임무요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민/들/의/교/회/건/축/반/대

교회의 건축 허가를 받고 교회 건축을 시작하려고 기공예배를 성대하게 도마동 139의 25번지에서 드렸습니다. 그 후 착공식을 하려고 현 교회 터인 도마동 86의 26번지에 목수들과 성도들이 와서 공사를 시작하려고 모였는데 15통 16통 주민들이 일제히 나와 공사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대지 한가운데다 15통 16통 주민이 '공사 절대 반대'라는 현수막을 세워 놓고 목수 한사람 당 3명 내지 4명이 달라붙어 아무 일도 못하게 붙들고 늘어지고 도면을 펴면 도면 위에 올라앉고 각목 야리가다를 매려는데 나무 위에 죽 앉아 공사 방해를 계속하였습니다. 일해보려고 일꾼들만 나타나면 일제히 주민들이 나와 반대시위가 계속되어 3개월 동안 공사를 시작하지 못한 채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제일 적극적으로 반대하신 분들은 아무래도 교회 근처에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동네 분들에게 떡도 해서 먹이며 반대를 계속하였습니다. 반대하는 분들이 서구청 건축과장에게 가서 왜 건축허가를 내주었느냐고 항의하며 서구청까지 가서 농성을 하였습니다.

급기야 교회에서는 진정서를 낸 명단을 확보하여 경찰서장을 찾아가 건축방해를 못하게 막아달라고 진정서를 냈습니다. 합법적으로 허가를 내어 짓는 집이니 반대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파출소 소장을 찾아가 말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야지요' 라고 말하는 경찰서장이나 법을 수호해야하는 경찰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법원에 건축방해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결국 공사하려고 온 목수들을 가로막고 실랑이 하는 장면을 사진 찍어 가처분 심사를 받고 법원으로부터 경고장이 전달되자 주민들이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지하실을 파내려고 쇠말뚝을 박는데, 아이들이 소음으로 놀라 경기를 한다며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소동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주민들 가운데 노인들을 출동시켜 일하는 곳에 와서 욕설을 하며 앞에 와 밀치고 농성하면서 스스로 뒤로 벌떡 넘어지고는 우리 목수나 교우들이 떠밀어 넘어졌다고 이유를 달며 적극 반대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공사는 어렵게 진척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그들과 맞서 싸우며 일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준 꿈이 있었습니다.

꿈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 건물이 있는데 한가운데에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 괴물은 거북이 같이 갑옷으로 둘러 싸여 있고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었습니다. 제게는 쇠로 만든 절구대 같은 쇠몽둥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묵직한 쇠몽둥이로 그 괴물을 마구 때려 부셔 죽였는데 그 속에서 그보다는 작은 괴물이 속에서 또 나왔습니다. 그래서 또 때려 부셔 죽였습니다.

                사 진 8과 ---- ( 8-1)
2장을 한꺼번에 , 그러나 (8-1)은 사진8 속에 삽입 요망.
성화그리스도의 교회 전경

그 이튿날 적극 반대하던 자에게 제가 그 집으로 찾아가서 합법적으로 짓는 집이니 잘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뜻하지 않게 그러면 집이나 아름답게 잘 지어 보라고 하는 반가운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아서 무사히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역사 하셔서 반대하는 장소에 교회를 건축하게 하신 것은 이곳에서 노아 방주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하신 것으로 믿고 사명감과 함께 감사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화/교/회/개/척/당/시/본/계/시/들/(1)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높은 평지가 있는데 그곳에 개간을 하면 큰 밭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곳은 한번도 쟁기로 갈아 본적이 없는 생땅이었습니다. 나무 등결 이 군데군데 있고 돌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땅이었는데 그곳에서 소로 밭을 가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산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 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하나님의 밭이라는 뜻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임 집사님은 씨나락 백마지기 분량이 그릇에 담겨져 있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많은 씨나락을 언제 다 뿌리느냐고 물으니 여기저기 뿌릴 곳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시냇물이 남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물이 흐르며 합치다보니 그 사이는 삼각형이 되는 땅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곳 좋은 옥토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 개간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현재에는 좋은 옥토로 혹 안 보일지 모르나 삼각형의 땅은 성부 성자 성신을 상징하는 삼위일체로서 시냇가에 물이 흘러 마르지 않는 좋은 옥토교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30배 60배 100배로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적인 옥토교회로 되어질 날을 마음 속에 그려봅니다.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며 충성을 다할 때 반드시 옥토교회가 될 것입니다.

성/화/교/회/개/척/당/시/에/본/계/시/들/(2)

성화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설립되고 발전을 거듭하여 오던 중 큰 어려움에 직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우들의 절반 가량이 서로 나뉘어 어려움을 겪고 교회는 곧 무너질 것 같은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음부의 세력이 이것을 이기지 못하게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는 줄을 믿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교회를 염려하며 기도하던 중 꿈을 통한 계시를 보고 확실한 믿음 위에 서서 교회에 충성할 수 있었던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곳 상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남쪽은 평평하고 아늑한 묘자리 같은 땅인데 어느 분이 나타나서 이 땅을 개간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지런히 땅을 파 업고 거름을 쳐서 좋은 땅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그 땅에 곡식은 이팥을 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더 좋은 곡식은 없을까 하고 우물주물 망설이다 그만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없었습니다. '만년 이팥 천년 메밀'이란 말이 있습니다. 만년동안  변질되지 않는 곡식을 주님은 이 옥토에 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자들의 교회이건 서민들의 교회이건 영원 불변이신 우리 주님이 계신 교회가 아니라면 그것은 얼마가지 않아 곧 무너질 교회요 하늘의 열쇠를 갖지 못한 교회일 것입니다. 만년동안 변치 않으시는 아니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이 계신 교회라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씨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주의 말씀을 믿고 오늘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성/경/학/교/행/사/때/발/생/한/사/고/

성화 교회를 다 짓고 나서 헌당식을 마치고 교회는 평온한 가운데 한해를 보냈습니다. 교회를 지을 때 미지불한 건축비도 전부 지불하고 이제는 재정적으로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1994년 여름에 하기성경학교를 교회에서 개최하는 주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93년부터 사랑의 터치 봉사단에 발을 디뎌놓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 많은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매주일에 한 번 꼴로 다른 교회에 가서 사랑의 터치 치유 및 전도집회를 다녔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을 믿게 하고 갖가지 병들이 치유되어 정신이상자, 소아마비, 중풍병자, 귀머거리, 15년 된 앉은뱅이가 낫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으로부터는 자기 교단 교회를 다니며 터치 전도 집회를 해주면 좋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에서도 정일호 목사님 및 교단 목사님들이 터치를 배워 전도의 도구로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충주그리스도의 교회를 기점으로 여러 목사님 내외분 50여명이 저희 교회에서 개최한 터치 세미나에서 교육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본교회에서는 농어촌 전도 집회를 다니겠다고 해서 상탄, 황금, 상삼, 부강, 충곡, 힌두실, 수룡교회 등 몇몇 농어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 교회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유는 본 교회에서는 일하지 않고 밖으로만 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주체로 하는 사랑의 터치 치유 전도 집회는 막을 내리게 되고 저는 서울, 부산 팀과 합류하여 매주 터치 봉사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부산에서 사랑의 터치 세미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박 3일 초청을 받아 부산 사직동에 있는 서문 장로교회로 떠나는 날이 바로 우리 교회 주일학교 하기 성경학교를 여는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떠나 부산가는 열차로 출발하여 부산에는 낮 12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서문교회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융숭히 대접받고 그곳에 찾아온 많은 환자들을 터치하고 있는데 박 선교사와 김은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동안 여러 교회를 다니며 터치하느라고 고생들 많았으니 이번 세미나와 터치 봉사가 끝나면 오후 시간에 생선회도 먹고 시내 구경도 하는 등 좋은 시간을 갖자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3시쯤 되었는데 갑자기 제 마음이 이상하게도 2박 3일 있기로 하고 그곳 집회에 왔는데 자꾸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한시도 늦출 수 없는 불안한 심정으로 터치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제 마음을 알 수 없이 집에 가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생겨 터치를 하다말고 집에 간다고 박 선교사님과 김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왜그러시냐고 하며 저녁 먹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세미나 끝나고 저녁이나 먹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집에 가겠다고 급히 일어나 새마을 열차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 30분이었습니다. 집에는 불도 켜 있지 않고 캄캄하였습니다. 이상해서 주의를 살펴보았지만 집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갔더니 교회 현관에 불이 켜져 있고 거기에 집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주일학교 학생들이 물놀이를 갔는데 학생하나가 옷을 맡겨 놓은 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교사들과 전도사님들은 아이가 누구를 따라갔나 보라고 해서 물놀이를 했던 그 지역 동네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못 찾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없어진 곳은 교회에서 4km도 더 되는데 다들 교회 주변에서 찾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물놀이 한 곳을 혼자 찾아가 캄캄한 시냇가를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보이질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시 와보니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손전등을 준비해서 다시 물놀이한 현장으로 찾아가 성도들 전체가 합심해서 어두운 냇가를 발로 더듬으면서 찾아내려 가고 있는데 김주원 청년이 발에 걸리는 것이 있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을 끌어 내보니 찾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죽은 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빳빳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꺼내 안고 모두들 소리쳐 울었습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하면서 어린아이를 봉고차 안에 눕혀 놓고 가슴을 문지르고 코를 빨고 등을 두드리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좋을지요" 하면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어머니 아버지가 찾아와서 아이 죽은 것을 보고는 교회 책임자가 누구냐고 하면서 아이를 어루만지며 제 멱살을 잡고 어린아이를 살려내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린아이를 살려놓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린다고 하며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아이를 붙들며 몸부림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독자인데다가 어렵게 얻은 아이이고 그 집의 유일한 후사인데 아이가 이렇게 되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에 충대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으나 5시간도 넘게 물 속에 있던 아이가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응급실에서 바로 영안실로 옮겨졌습니다. 그 아이 할머니를 비롯해서 어머니까지 울다 절도를 하고 아버지도 교회 책임자 나오라며 어린아이 안 살려 놓으면 교회 나오는 사람들 다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고 하여 그들과 씨름하기를 날이 새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할 도리를 잊은 채 그들의 심정을 생각하니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싶었습니다.

교회 교사들과 책임자들의 부주의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우리 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이일을 어떻게 해결하나 하는 염려 가운데 밤을 지샜습니다.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헤쳐나갈 묘안이 없어 주님만 부르며 "주님! 도와주십시오. 저들을 대신 위로해 주십시오" 하며 주님께 울부짖었습니다.

날이 새고 아침 출근시간이 되니 먼데 있는 아이의 친척들이 왔습니다. 친척들 가운데는 다행히 믿는 형제들이 있었고 우리를 염려해 주시는 집사님들이 있어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중간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을 드리니 상황이 어떠한가 알아보고 시간이 지난 다음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무능한 제가 아무런 대안도 없이 그들과 만나 사태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논산의 모 감리교회에 다니는 권사님과 집사님이 죽은 아이의 친척으로 우리 교회의 입장을 대변해 주어 그 날 오후 3시쯤에 타협을 보았습니다.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하게 되어 교회는 천만 다행으로 평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린 생명 하나를 어른들의 부주의로 과오를 범케 되었지만 주님께서 용납하시고 우리들의 울부짖는 기도를 긍휼히 여기사 용서하시고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어린이 프로그램에 물놀이 부분을 없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도 또 다시 물가에 데리고 가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어른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수수방관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저는 지금도 주님께서 멀리 부산에 터치 봉사하러 간 나를 불러 올린 것을 생각하면 꿈 같은 일로써 나 같은 것을 주님께서 필요로 하셔서 문제를 해결케 하신 것이 정말 너무도 감사하고, 또한 생각하고 싶지 안은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아이의 부모들과 원한 없이 지내게 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선교 목표 중에 네 번째가 농어촌 선교라고 목표를 정했지만 실제로 농어촌 선교의 길이 열렸을 때에 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므로 물질도 막히고 어려운 수난이 오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님은 모두를 아실 것입니다.

제Ⅵ부 사랑의 텃치로 선교하다

터/치/를/배/우/게/된/동/기

성화 교회 건축 중에 밤에 경비 서시는 분이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목수가 거푸집을 떼어내면 야방 보는 분이 못을 빼곤 하였습니다. 그때가 12월이어서 날씨가 매우 추운 날이었습니다.

북풍이 몰아치는 음산한 날이었는데 북풍받이에서 못을 빼는 것을 지켜보다 북쪽을 합판으로 좀 막아주면 덜 추울 것 같아서 합판으로 북쪽을 막아주다 합판을 잘 못 다루어 내 무릎에 조금 부딪혔는데 무릎이 상당히 아팠습니다. 저녁에 집에가 연고를 바르고 싸맸는데 그 이튿날 나을 줄 믿었는데 차도가 없고 상당한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주사도 맡고 약도 먹었지만 통증이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병원을 다녀도 안 나아 한의사한테 가서 침 맡고 찜질하고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고 수개월이 지나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약국 침쟁이 다 찾아 다녀도 아픈 것이 낫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내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주님께서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닌가해서 기도하며 기도원을 찾게되었습니다. 이 기도원 저 기도원을 찾아 기도를 해 보았지만 낫지를 않았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이 젊은 기도원 원장님한테 고개 숙이고 기도 받는 것이 쑥스러워 아내와 함께 가서 기도부탁을 하게 되었는데 낫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교회에 김미숙 자매님의 소개로 사랑의 터치 봉사하는 분들이 오셨습니다. 온 교우들을 다 터치하기 때문에 5분에서 7분 정도 터치를 받았는데 신기하게도 무릎의 아픈 통증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터치가 끝나고 차 대접하는 시간에 그분들에게 당신들만 하지 말고 나도 좀 가르쳐 주어 같이 다니며 봉사하게 해 달랬더니 전화번호를 적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터치 세미나 때 와서 배우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93년도 여름에 교육을 받고 수료증을 받은 그 시간부터 터치 봉사에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터치 교육을 제가 2회 때 받았는데 지금 110 차가 되었습니다.(1993년 5월 10일∼98년 12월까지 110차) 저는 세미나가 있을 때마다 가서 오시는 분들에게 터치 봉사를 해드리고 그 동안 터치를 통해 역사한 일들을 간증 할 때가 많았습니다. 93년부터 국내의 여러 지역을 돌며 터치 봉사를 하면서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고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소경이 눈을 뜨고 각색 병이 다 낫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 진 9
1995년 타쉬켄트 단기선교 중 노인병원에서
아내와 함께 터치를 하며

 터치 봉사는 전도하는데 참 유익한 도구가 됩니다. 93년도에 저희 성화교회에서는 전도대회를 했는데 제가 일등을 했습니다. 하게된 동기는, 모든 성도들이 전도대회를 위해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쁜 일이 생겨 전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열심히 전도하는데 장로라고 하는 자가 한 명도 전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지 명함을 만들어 돌려보았는데 받아 가지고는 읽어보지도 않고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니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도대회 날 한번 오셔서 우리 교회 구경도 하시고 좋은 말씀도 들으시고 준비된 선물도 받아 가시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며 전도지를 돌렸지만 잘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지만 돌리지 말고 선물 하나를 첨부해드리면 읽어보고 버리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고는 손톱깍기 500개를 주문해 포장을 해서 전도지와 함께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전도지를 내버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손톱깍기를 다 돌리고 터치 기계를 갖고 아픈 분들을 찾아가 봉사하고 경로당 몇 군대를 돌며 터치를 해드리고 그들을 초청했을 때 모두가 오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 날이 되었습니다. 누가 초청한 분이 많이 오실까 궁금했습니다. 일등 하는 분에게는 금반지 두 돈 반을 선물로 주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날 첫 시간에는 사람들을 데리러 갔다가 일부 예배 끝날 때쯤 교회에 오게 되었는데 교회 안을 쳐다보니 교회 안이 하얀했습니다. 노인 분들이 많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명함을 점검한바 제가 전도한 노인들이 제일 많이 오셨습니다.

손톱깎기를 주며 전도지 500장을 돌렸는데 한 분도 오지 않고 터치로 병을 치유해 주고 위로해 주며 전도한 분이 90명 가량 오셨습니다. 열매는 몇 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터치로 봉사하다 보면 마음 문이 열려 대화의 문이 열립니다. 열심만 있으면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아주 좋습니다.

문/경/영/신/중/앙/장/로/교/회/에/서/있/었/던/일

사랑의 터치 팀 문한식 목사님 김용중 전도사님 그리고 저까지 세 사람이 그 교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여러 날 전부터 준비기도도 많이 하고, 동네 이장님까지 나서 '누구든지 무슨 병자든지 영신중앙교회로 오면 무료로 치유해준다고 며칠 전부터 방송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3년 전 사조리 마을에 세웠는데 안동권씨만 200호 되는 마을입니다. 목사님이 일억 정도의 모금을 하셔서 90평 짜리 교회를 짓고 개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 안동권씨 들을 3년간 전도했으나 나오지 않고 그 인접 마을에서 학생들까지 포함해서 25명 가량만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형편에 있는 교회에 우리일행이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 마을에서 중증 병을 앓고 있는 분 5명만 교회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중풍 걸린 분 두 분이 업혀 왔습니다. 그분들의 손과 발을 만져보니 혈이 통하지 않아 쇠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분들을 볼 때 제 마음은 벽에 딱 부딪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을 치유하지 못하면 전도집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터치하는데 환자들이 아프다고 손도 못 대게 하며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깜짝깜짝 놀래고 펄쩍펄쩍 뛰며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는 듯 했으나 어거지로 붙들고 터치를 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므려진 손과 다리가 펴지고 싸늘한 몸이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가서는 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렇게 그분들을 돌려보내고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더니 저녁에는 몸이 안 좋다고 안동 권씨 마을에서 오신 분이 135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앉혀 놓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이 병은 안 고치고 예수 이야기만 한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그 중풍병자를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불평하는 자는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지 않는다고 얘기를 했더니 모두 잠잠해졌고, 우리들은 새벽 2시까지 터치 봉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135명 모두가 병이 치유됐다면서 2시까지 가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앞으로 교회에 나오시라고 전도했습니다. 그 후 그 교회에 결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목사님이 3년간 기도하시며 울부짖던 소원을 주님은 우리 사랑의 터치 팀을 통해서 응답 받게 하셨습니다.

가/양/동/충/성/교/회/터/치/전/도

1999년 3월경 대전 가양동 충성 교회(송영진 목사님 시무)에서 사랑의 터치 치유 전도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부여에 사는 한 분이 교회에 업혀 왔는데 그는 앞을 못보고 걷지도 못하는 일급 장애자로 부여군수의 확인 증명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아파서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서는데 한발자국만 떼어놓으려고 해도 힘이 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터치를 해서 눈이 맑아지고 지팡이를 던지고 걷게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는 제가 터치를 함으로써 낫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실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즈벡 타쉬켄트에서 100리 떨어진 곳에 터치 봉사를 갔을 때도 30분 정도 말씀을 전하고 환자들을 터치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허리가 아픈데 아예 허리가 구부러져서 무릎을 짚고 다니는 환자가 왔습니다.

우리는 뒤늦게 그 노인을 발견하고는 "왜 노인을 먼저 하게 하지 제일 나중에 하게 하느냐"고 말하며 그 노인을 빨리 이리로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빳빳하던 무릎도 짚지 않고 잘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그 노인은 '아까 예배를 마치고 터치하는 것을 쳐다보며 속으로 기도하던 중 머리 위에 뜨거운 불이 임하더니 그 불이 등으로 해서 아픈 허리부분에 내려가 허리가 뜨끈뜨끈하더니만 허리 아픈 통증이 없어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반듯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도 신기하고 기뻐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나은 것을 믿고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고 가려고 이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기적의 역사는 주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셔서 환자들을 치유해 주실 때 일어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며 단순히 내가 터치해서 낫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병이 제일 잘 낫는 때는 전도하러 갔을 때입니다. 오늘날 많은 환자가 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병이 낫는 줄 저는 믿습니다. 병을 이기려고 노력하며 주님께 울부짖어 기도할 때 주님이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터/치/봉/사/로/체/험/한/이/적/들

사랑의 터치 봉사를 하며 6년 동안에 있었던 많은 역사 가운데 몇 가지만 간증하려고 합니다.

대전 서구 월평동의 서월심 자매는 평소에 심장병이 있는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다투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농약을 마셨는데, 병원에 가서 위를 세척했으나 전신이 마비되어 손끝하나 까딱 못하고 반듯이 누워 미음만 간신히 받아먹고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배는 점점 부풀어 오르고 가슴과 윗머리 부분만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손발 및 하체는 싸늘하고  배출도 잘 못하여 죽은 목숨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정 외삼촌이 저에게 허리 아픈 것을 치유 받고 신기한 일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질녀를 살려달라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죽기 일보직전인지라 목소리도 개미소리만 하게 숨 넘어 가는 목소리를 내어 대화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그를 보고 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서 간단한 터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이튿날 그 노인이 아침 일찍 찾아오셔서 어젯밤에 큰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며 한번 더 가자고 하였습니다. 찾아가 보니 동산만하던 배가 다 꺼지고 손이 움직이고 얼굴에도 생기가 돌고 목소리도 훨씬 쾌활한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날도 기도하고 터치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앉고 또 서서 걸어보라고 했더니 걷기까지 했습니다. 동네 분들이 구경하러 여러분이 오셔서 이런 기적은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일이라며 다들 놀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는 그 후 일어나 걷게되고 몸이 회복되어 저희 교회를 3주 동안 다니다가 자기가 다니던 교회가 유성 성결교회인데 그 교회로 다닌다고 해서 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신 역사로 죽기 일보 직전인 그분이 살아나는 광경을 저는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신탄진 그리스도의 교회 당회장이신 김용순 목사님의 경우에도 사랑의 터치를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신 분 중의 하나입니다. 1995년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회장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단의 전국에 있는 교회 행사에 참석하시며 여름 하기수련회를 준비하시느라 김 목사님은 심신이 피로하신 상태였나 봅니다. 고달픈 일정 속에서 분주히 일하시는 가운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얼굴이 마비되고 눈꺼풀이 한데 붙고 혀가 말리고 입이 돌아가는 안면 풍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상이 두 번째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왔을 때는 병원에 여러 달 다녀서 치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름 세미나의 큰 행사를 앞두고 이런 일이 일어나 장로님들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터치로 봉사하러 다닌다는 소식을 어떤 장로님이 듣고는 전화를 하셨습니다. 빨리 신탄진 교회로 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목사님이 편찮으시다 고해서 찾아가 보니 알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터치를 했는데 거의 완치되어 여름 수련회 전국세미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상황에는 말씀을 전하신다는 일이 어려운 정도였는데 사랑의 터치를 통하여 건강을 되찾으시고 무사히 사역을 마치셨던 일이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교회 장로님 전도사님 집사님 열 분이 터치 교육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룡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주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수룡교회는 장성우 목사님의 처남 김종기 목사님이 목회 하시던 교회였습니다. 장 목사님의 요청으로 수룡교회로 터치 전도집회를 갔습니다.

장 목사님의 차를 타고 그 교회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온 동네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환자를 모셔오라고 했더니 82살 된 노인을 모셔왔습니다. 그분은 10살 때 그네 타다 떨어져 허리를 다쳤는데 허리가 구부러지기를 유자형으로 구부러져 머리 부분이 발등 위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 기도하면서 내 마음이 벽에 부딪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하나님이 허리를 펴 주실 것을 믿으세요" 하면서 구부러진 허리뼈에 터치를 하면서 머리를 일으켜 보시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분은 허리가 굳어 있는데 펴지겠냐고 반문했습니다. 큰 소리로 "위로 일으켜 보세요" 하며 허리가 아픈가를 물을 때 아프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머리를 들어 올렸는데 펴지기 시작하여 85도로 굽어 있던 허리가 펴져서 뒤만 보던 그가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여러 목사님과 성도들 그리고 동네 분들이 지켜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진 10
수룡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터치사역을 마치고 나서

달리도 교회에서도(김광호 목사 시무) 기적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동네 사람이 다 아는 환자 몇 분을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데려 온 분은 중풍으로 잘 걷지 못하시는 두 분이었습니다.

한 분은 15년 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앉아서 생활하던 앉은뱅이와 같은 환자였는데 오래 누워 계셔서 피부가 약해 터치 플러그를 대기만 해도 살로 파고드는 약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중풍으로 고생하던 다른 한 분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한 걸음씩 발을 떼어놓는 분인데 기도하고 터치한 결과 잘 걷게되어 지팡이를 내어 던지고 교회를 빙빙 돌며 기뻐했습니다.

15년 동안 일어서 보지 못하던 분이 일어나 서게 되자 온 동네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 친척 되는 분들을 전화로 연락해 그 섬으로 불러들여 목포지방 영광지방 등 먼 곳에서도 환자들을 데려와서 그 날밤 새벽 2시까지 터치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즈/벡/타/쉬/켄/트/단/기/선/교

비금도에서 두 번째 순회 터치 전도집회를 하게 되었을 때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7개 교회가 연합으로 비금 중앙교회에서 집회를 가졌을 때 많은 환자가 고침 받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문한식 목사님이 우즈베키스탄에 자기 형님이 미국 남침례교회 소속 선교사로 가 계시는데 그곳에 많은 환자들이 있고 어려움 당하는 자가 많다며 그곳에 한번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즈벡 타쉬켄타에 단기 선교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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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선교 중 모스크바시내 관광을 하며
좌로부터 박용주선교사님 김은호목사님 필자

1993년 가을 추수할 무렵 문한식 목사님과 그곳에 가서 13일 동안 터치봉사를 했습니다. 타쉬켄타 수도의 근교 농장 6곳을 돌며 터치 봉사를 했는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고 정신이상자가 나았으며 중풍병자 등 각색 환자 300명 이상이 나았습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한지 6개월 7개월 혹은 1년 된 교회들을 방문해서 환자들을 치유해 주고 가면 그 다음주에는 70∼80명되던 교회가 180∼200명으로 불어나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선교사 한 분은 허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허리치료를 받으러 고국으로 가려고 비행기표를 사 놓고 다음날 떠나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분은 허리가 아파서 앉아 있지를 못하고 누워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터치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잘 걷게 되었고 치유  받아 그 뒤 미국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 선교사님의 인도로 이 지역 저 지역을 다니며 최선을 다해 쉬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11일을 계속 터치만 했습니다. 그곳에 계신 선교사님은 우리가 좀더 오래 있으면 했습니다. 교회들이 배로 불어나는 역사가 일어나 굉장히 좋아들 하셨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에 찌들은 그들은 창의적인 삶이 아니라 단지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습성으로 발전이 없고 그나마 남아 있던 러시아인들이 모두 떠나 모든 공장은 문을 닫고 공장 마당에는 풀이 수북하게 나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35세 된 청년과 대화를 나눴는데 여기는 대부분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누구냐고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공산주의는 70년 동안 하나님 말살정책을 써서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지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다소 의아한 생각을 갖고 있음을 대화 속에서 느꼈습니다.

말로는 아무리 전도해도 듣지 않던 그들이 의학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병들을 기도하고 터치하는 순간 병이 낫는 역사를 체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증거 할 때 믿는 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 후 94년도에도 사랑의 터치 팀 7명이 가서 선교사님과 그곳의 현지인 사역자 35명에게 2주간 터치 교육을 시켜 1,300여명의 환자가 치유되고 많은 교회들이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필/리/핀/단/기/선/교/(1)

우즈벡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시는 문 다니엘 목사님께서 그곳 선교 연합회 회장으로 계실 때, 한국에서 많은 선교 팀이 그곳을 방문하여 많은 약과 의료품 그리고 생활 필수품 등을 나눠주고 갔지만 그 성과는 생각보다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한식 목사님과 저 두 사람이 와서 터치로 많은 환자가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나 교회가 배로 늘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한국의 선교 팀들에게 우리들의 활동과 성과를 전화로 홍보하시면서 필리핀에서 터치선교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침 필리핀 바기오 시에 있는 D.F.C (제자들 선교회) 선교 센타에서 저희를 초청하여 2박 3일을 있는 동안 단기 선교사 교육 중인 30명에게 터치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연합하여 바기오에서 14시간 버스를 타고 본도 라는 곳을 지나 갈린가아파야유 라는 곳에서 2박3일 동안 터치 전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바기오'라는 도시는 해발 1500 ~ 1700m나 되는 고산지대라서 열대지방이지만 기후가 선선하고 풍경이 좋아서 필리핀 갑부들의 별장이 많은 휴양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또한 필리핀의 북부 산악지역으로 가는 갑문과 같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바기오에서 갈린가로 가는 길은 해발 2700 ~ 3000m 되는 높은 산 준령으로 길이 나 있어서 위험하기가 이를 데 없고 차가 구름 속을 헤치고 갈 때도 많고 산 아래 구름 위에 떠서 갈 때도 많이 있습니다.

버스 안에서 산 아래로 구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비행기를 탄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천길만길이나 되는 절벽 위로 도로가 나 있는데 도로 폭은 좁고 고산지대라서 간간이 비가 오는데 산사태가 나서 도로가 유실된 곳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의 버스 운전자들은 구불구불한 도로를 시속 40 ~ 50Km로 달리다가도 갑자기 산사태가 난 곳을 만나면 끽하고 차를 세워 간담이 서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면 30㎝ 밖으로는 천길 낭떠러지 위에 차가 서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일행이 가는 곳은 갈린가 아파야유 지방으로 바기오에서 새벽 4시 30분 버스를 타고 14시간 정도를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필리핀으로 오는 날 아침에 모처럼 막내 동생인 오재석 목사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갑자기 간밤에 무슨 일이 없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자 '그럼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필리핀 단기선교로 집을 비운다고 하자 동생은 그제서야 간밤에 제가 죽을 고비를 맞는 꿈을 꾸었다며 잘 다녀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여행 짐을 챙기는데 어느 집사님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간밤에 장로님에 대한 하도 이상한 꿈을 꾸어서 이렇게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짐을 다 챙기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막내딸한테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어젯밤 꿈에 아빠가 어려움을 당하는 꿈을 꾸어 조심해서 다녀오시라고 인사차 전화를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른 일도 아니고 선교하러 가는데 무슨 일이 있겠느냐는 심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서 평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은 새벽에 버스를 탔기 때문에 잠이 부족하여 버스를 타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갑자기 차가 쾅하고 서더니 한쪽으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약간 내리막길에서 버스의 브레이크가 파열되 버스 기사가 재빨리 차를 언덕 쪽으로 붙였는데도 차가 가속도로 인하여 아래쪽으로 기울어 미끄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운전수가 경험이 많아 살아난 것이지 만약에 반대편으로 차가 기울었다면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들 머리털 하나 상치 아니하고 무사했습니다. 그런데 싱거운 것은 이쪽 지방의 운전자들은 모두들 이런 사고를 대비해서 브레이크 파이프를 하나씩을 예비로 갖고 다녀서 손쉽게 고치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방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긴 여행을 마치고 갈린가 마을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해가 넘어가면 칠흑같이 어두워 앞뒤를 전혀 분간할 수 없는데  우리 같은 초행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간 그 곳은 우리를 초청한 분의 고향집이었는데 저녁에 도착하여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향하여 약간 비탈진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를 인도하던 청년이 희미한 후레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 누군가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필리핀은 총기 휴대가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일제시대 징용으로 이곳에 끌려온 조선 군인에 의해서 자기 가족이 희생당했는데  조선 사람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앙갚음하려고 술을 마시고 나와서는 조선 사람이냐고 확인하고는 방아쇠를 장전하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제가 제일 앞장서서 가고 있었는데 피하라는 소리에 언덕 아래로 뛰어 내리니까 뒤따라  오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다들 언덕 밑으로 뛰어내려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 청년이 그 사람과 실낭이를 하는 동안 그 청년의 집으로 들어가 여자들은 방에서 자고 남자들은 현관에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에 주저앉아 이부자리도 없이 시멘트바닥에서 하루 밤을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사    진 12
필리핀 선교 중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짐을 나르며

그 지역은 해발 2,200m 정도의 고산지대인데 워낙 골짜기가 깊고 교통이 불편해서 정부에서도 통제를 잘 못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사고가 나도 속수무책이라고 했습니다. 길가에서 마약 재배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누가 나와 단속을 하다가는 언제 죽는 줄도 모르게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관광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그 지역 출신의 초청을 받아 복음을 들고 가게된 것입니다. 이곳은 마닐라에서 고속버스로 6시간을 달려 바기오에 도착한 다음 다시 산악행 버스로 10시간을 가면 본도라는 곳이 나옵니다. 본도에서도 이곳 갈린가아파야유라는 곳까지는 버스는 없고 지프니를 대절하여 4시간을 더 들어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길이 너무 험하여 산에서 돌들이 무너져 내리면 치워가면서 가야하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봉변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밤을 지새고 그 다음 날은 그곳 동네에 결혼식이 있어 초대를 받아 갔는데 매우 특이하였습니다. 신랑은 발가락에 끼는 슬리퍼를 싣었고 와이셔츠는 입었는데 넥타이는 메지 않았으며 바지는 우리나라 예비군복 같은 얼룩무늬의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신부는 면사포를 쓰지 않고 간단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예식은 신부님을 모셔다가 천주교 식으로 치렀습니다.

음식은 물소고기 요리에다가 진기가 하나도 없는 밥이 나왔는데 그곳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꼭꼭 쥐어 먹었는데 다행히 우리에게는 프라스틱 수저를 갖다주어서 그것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음료수로는 콜라 2박스가 있었는데 우리 일행에게 한 박스를 주어 최고의 귀빈 대접을 받았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여흥을 즐기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꽹가리 같은 악기 하나와, 징보다는 적고 꽹가리 보다는 조금 큰 악기를 연주하며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춤추고 나중에는 신랑신부도 함께 춤을 추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날 거기에서 내일 사랑의 터치 치유집회를 갖겠다고 광고를 했더니 그 다음날 그곳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인근의 환자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터치 사역 전에 30분 동안 말씀 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영어와 필리핀 공용어인 따갈로어도 통하지 않아 현지 방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내세워 이중통역을 하며 말씀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곳 현지인 220명이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놀라운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조그만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담임 목사님은 없고 집사님인 평신도 사역자가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전도하여 결심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1,000여명 가량이나 되는 마을에 목회자 한 명 없는 것이 안타가운 일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에도  필요한 일꾼들을 찾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사진 13
▶1996년 3월 5일 필리핀 단기선교 때 사랑의 터치를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도 또 한번의 위험한 고비가 있었습니다. 장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되기 때문에 버스를 기다리며 소변 볼 곳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어떤 허름한 막사 같은 곳이 있어 화장실인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역 헌병대의 숙소였다고 합니다. 이상한 간첩이라 여기고 총을 갈겨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곳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상황을 여러 번 만났지만 주님이 고비 때마다 지켜 주시어 무사히 전도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바기오로 돌아와서도 UCCP 교회, 트리니다드 교회, NBDC 교회, 바기오 성경교회 등지를 순회하며 터치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필/리/핀/단/기/선/교/(2)

사랑의 터치팀 우리 일행은 1996년 8월 5일 밤11시에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마닐라 공항은 밤인데도 불야성을 이루어 대낮 같이 환했으나 공항 건물을 빠져 나오자마자 열대의 고온 다습한 기후로 인하여 확확 숨이 막혔습니다. 마닐라는 워낙 교통체증이 심하여서 밤에 이동하는 인구가 많다고 합니다.

마닐라에서 신학대학 학장으로 계신 최창환 목사님 댁에서 여장을 풀고 그 다음날 아침에 먼저 목사님 가족에게부터 사랑의 터치를 했습니다. 최 목사님은 탈홍으로 수년동안 고생하고 계셨는데 장거리 여행을 못하시고 항상 기저귀를 차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터치를 받으신 후로 완케 되어 중국도 다녀오시고 한국에도 오실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들었습니다.

다음날엔 '안길레스'에 도착하여 윤순중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현지 교회들을 순방하며 터치 치유집회를 가졌습니다. 싼타모니카 교회, 산오제 교회, 풀룽카오둥 교회, 싸방우아 장로교회, 라모스가페스 순복음교회 등 십여군데의 교회를 순방하며 터치 치유집회를 가졌습니다.

또한 우리는 필리핀에 있는 동안 교회 신축에 가담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싸방우아 교회'는 피나보트 화산에서 조금 떨어진 산지마을에 있는 교회인데 건물이 매우 낡고 협소하여 신축하려 해도 건축비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진 14 (2장을 한꺼번에)
▶97년 8월7일 필리핀 싸방아우 장로교회 헌당식과 입당식에서 기념 테이프를 끊으며

그래서 김천에 있는 저의 친척 오재성 씨와 연락이 닿아 서로 합력하여 건평 30평의 새 건물을 짓고 97년도에 헌당식을 가졌습니다. 그날 6쌍의 현지 주민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거행했으며 그곳에 선교원도 개설하였습니다.

이렇게 필리핀에서는 사랑의 터치 사역을 통하여 중풍병자 및 온갖 환자들이 나았으며 현지 목회자 300명에게 터치 교육을 하고 사랑의 터치 기구를 증정하여 지금도 많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터치팀이 활동하면서 기도원 한 곳의 대지를 마련하고 그 곳에 전기를 끌어오고 지하수 관정 시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는 박용주 선교사님의 피나는 기도와 헌신이 밑거름이 되었고 그리고 김은호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열정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으로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안질레스에 있는 장로교회는 신축 중에 자금이 모자라 벽을 세우고 지붕에 슬레이트만 올려 놓은 채 중단한 교회였습니다. 제가 어떤 분과 다리를 놓아 그분의 선교헌금으로 건평 100평의 새 예배당을 준공한 적이 있습니다.

마닐라 근교에 있는 '가벳트인당교회'는 우리 그리스도 교회의 젊은 사역자가 선교하는 지역인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애쓰고 있었습니다. 가베트인당교회는 우리 성화그리스도의 교회와 연결이 되어서 교우들이 선교헌금 1,000만원을 모아서 교회를 신축하였는데 지금도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단/기/선/교

1996년 10월 어느 날 저희 사랑의 터치 팀의 박용주 선교사님 김은호 목사님 문한식 목사님 그리고 저까지 네 사람은 열대 우림의 땅 미얀마의 양곤 공항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황명주 선교사님의 영접을 받으며 중국계인 차이 푸싱 목사님 댁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날씨가 무덥고 후덕지근하여 호흡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숙소는 연립주택으로 되어 있었는데 방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곰팡이가 피었고 도마뱀이 벽과 천장에 여러 마리가 붙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께서는 도마뱀은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해충을 잡아먹는 이로운 짐승이라 어느 집이나 쫒아 내지 않고 같이 산다고 했습니다.

양곤에서 만달리로 가려면 19 시간 차를 타야 했습니다. 그 길은 중국 운남성으로 가는 길인데 미얀마 남쪽에서 북쪽 운남성까지의 도로가 한 길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길로 모든 화물을 실어 나르고 모든 생활필수품은 중국에서 수입해다 쓰고 원료는 중국으로 가져가는 중요한 산업도로인데 대부분 비포장 도로였고 더러 포장된 곳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기라서 하루에도 여러차례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강둑이 금방 무너질 듯 범람 직전까지 갔다가도 날씨가 더운 관계로 금세 물기가 말랐고 , 열풍이 불어 한낮에는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양곤에서 두 교회를 방문해서 전도 터치 집회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려고 어떤 식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더러운 손으로 물 컵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들고 와서는 잔을 각자 우리 앞에 놓았는데 물 잔에 시커먼 손자국이 나있어 물을 따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차이푸싱 목사님은 잔을 다시 닦아 물을 따라 먹었습니다. 상을 닦는 행주도 시커멓고 식당 곳곳이 너무도 불결해 보였습니다. 그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받고 배탈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찜찜하였습니다.

양곤에서 '만달리' , '만짠' , '라쉬오'로의 일정이 잡혀 차를 타러 가는 도중 목이 말라 어떤 찻집에 들어 갔는데 찻집의 홀 바닥에 비가 새어 시궁창 같이 더러운 찻집이었습니다. 찻잔도 더럽고 찻잔 닦는 행주도 시커먼고  차를 담아오는 주전자도 때로 찌들어 있었는데 차의 색깔도 검은색이었습니다. 그때도 차이푸싱 목사님 혼자만 화장지로 잔을 다시 닦고 차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도로 곳곳이 움푹움푹 패여 차가 달리지 못하고 빨리 달려도 40km 이상은 속도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화물을 실은 차량이 뒤뚱거리며 가다가 넘어져서 짐을 풀고 다시 일으켜 세운 후 다시 짐을 싣고 있는 광경도 목격했습니다. 그 도로는 세계에서 제일 험한 도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만달리에서 나수오까지는 12시간이 걸리는 곳입니다. 가는 도중 저는 목이 말라 콜라 한 병을 마셨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차안에서 설사가 나오려고 해서 꾹 참고 정유소에 도착하여 화장실로 달려가 볼일을 보고 차에 올라탔는데도 배는 계속 아팠습니다. 나중에는 온몸에선 진땀이 나고 설사는 계속해서 나오려고 해서 손으로 틀어막고 4시간동안 사투를 벌여가며 간신히 목적지에 이르러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힘든 여행을 하여 간신히 '만짠'에 도착하였습니다.

'만짠'에 있는 교회와 정신병 환자 수용소와 그리고 신학교에 들려 하루를 보내고 다음 목적지인 라쉬오에 가야 하는데 그곳에 가려면 검문소를 3개 통과하여야 하는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곳은 미얀마 북부지방으로 외국인들은 육로로는 못 가고 '랭군'에서 비행기로 가는 곳인데 , 비행기가 손님이 없으면 결행하여 표를 사도 가지 않는 때가 허다하다 고 합니다. 그래서 비행기로 못 가면 육로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검문소에서 걸리면 되돌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통과하게 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가기로 했습니다.

사 진 15 (2장을 한꺼번에)
미얀마 선교 중 터치사역을 하며

우리 일행은 변장을 하고 가기로 하고 미얀마 사람의 복장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곳 미얀마 사람들은 아래는 모두 치마를 입고 있으며 특히 예식장에 갈 때와 여행 갈 때는 반드시 치마를 입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차이푸싱 목사님이 미리 치마를 4사람 입을 것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치마를 모두 입고 옷으로 변장을 했으나 얼굴이 그들보다 희기 때문에 모자를 다시 덮어쓰고 안경도 벗었습니다. 그리고 각자 버스 안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가는데 첫 번째 검문소에 이르렀습니다. 검문소에서 모두 내리라고 해서 내렸는데 그때 우리 일행은 재빨리 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고 차가 떠날 쯤에 다시 재빨리 올라탔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통과됐으나  까다롭다는 두 번째 검문소를 통과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드디어 검문소에서 차가 멈추었을 때 우리 일행은 모두 자는 척하였습니다. 차안에 권총을 찬 군인 두 사람이 들어와 살피더니 우리 네 사람 중 세 사람을 지목하여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두 분의 목사님을 툭툭 치며 깨워도 눈을 뜨지 않고 자는 체 하는데 저는 웃음이 나와서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에게 증명서와 여권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권을 내주고 두 분 목사님도 일어나 여권을 내주었습니다.  한 분 선교사님은 얼굴이 조금 검고 코가 오똑하여 미얀마 사람들하고 비슷하여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여권을 가지고 내려가서 높은 상관에게 보였는데 상관이 말하기를 골치아픈 사람들이니 그냥 내보내라는 말을 하였다고 차이푸싱목사님이 전해주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그곳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역사로 무사히 목적지인 라쉬오에 도착하여 성도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라쉬오는 소수민족이 분포해사는 지역인데 예수 믿는 분들이 많고 교회도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영접한 집은 중국계 분들인데 집의 규모가 크고 종을 3 사람이나 두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분을 서로 대접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고산지대라서 여름에도 추운 곳이데 목욕을 하려면 물을 데워야 할 정도로 추웠습니다. 우리가 2층에 머물고 있는데 그 집 종이 아래층에서 물을 데워 통으로 올려다 화장실에 갔다 놓았습니다. 그 지역 몇 교회를 돌며 터치 전도집회를 가졌는데 그곳은 마약을 농사 짓는 곳이라 한집에 한사람 정도는 마약에 중독 되어 고통을 당하는 가정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한집에 5대가 사는 집이 있고 대다수가 한집에 뭉쳐 살고 있어서 식구가 30명에서 35명 정도가 같이 사는 곳도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종을 두고 사는데 할아버지 아버지 시어머니 며느리 모두 종이 각각 있어 한 집에 종이 5명에서 7명까지 있는 집도 보았는데 생각보단 정답게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설사병이 나서 탈수상태에 이르러 힘이 없고 머리가 아파 앓고 있었습니다. 황명주 선교사님이 오시더니 터치 봉사하러 와서 이렇게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며 많은 분들이 교회에 몰려오고 있는데 감당하기 어려우니 일어나지도 못하는 저에게 빨리 일어나 터치하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종일 앓다가 오후에 기도하고 난 후 주님이 힘을 주셔서 저녁 집회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셔서 하루에 500명 이상의 환자가 치유를 받고 많은 사람이 예수 믿기로 결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소수민족 대표의 집에 초청 받아 갔는데 그분의 누이동생이 여권 담당자이고, 그곳 검문소 소장도 그분과 친분관계로 잘 아는 사이라 검문소를 통과할 때 그분의 도움으로 집에 무사히 올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라쉬오에서의 사역을 무사히 마치고 '만들라'까지는 택시로 8시간을 타고 와서 다시 비행기로 2시간을 더 타고 와서 드디어 양곤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13박14일의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미얀마 언어
밍글라나바 - 안녕하십니까?
재팀바래 - 감사합니다.
베니야라래 - 어디 아푸십니까?
예수용도라 - 예수 믿으십시오.
파파야 빠긴핀구칩니 -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비록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생활방식은 달랐으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소중한 선교 경험이었습니다. 미얀마 언어는 한마디도 몰랐지만 사랑의 터치는 문자 그대로 터치로써 서로에게 전류가 흐르는 도구라서 언어소통에 큰 불편함 없이 여러 곳에서 치유전도집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밤 12시까지 터치봉사를 하고 많은 미신행위들을 타파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은 말세에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수 있도록 역사하신 섭리로 믿고 있습니다.

미/국/단/기/선/교
 
미국에서 19일 동안 있으면서 사랑의 터치를 통하여 많은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우울증, 불면증, 전신 마비 등 병원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던 식물인간이 깨어나고, 뇌성마비로 인하여 24년 동안 발가락 끝으로만 걷던 청년이 발뒤꿈치가 땅에 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몸에 경련이 일어나 오그라지던 흉한 모습의 환자가 치유되는 놀라운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많은 대접을 받았으며 분에 넘치는 대접으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곳에 서독에서 온 어떤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독에서 근로자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장애 80%로 독일에서 장애자 연금을 받고 사는 자였습니다. 그는 일어서서 걸을 때면 발바닥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하다는 병원을 찾아 유럽일대를 돌며 여러 번 수술도 하며 고쳐보려고 애를 쓰는 중에 시카고에서 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어느 변호사집에서 만나 게 되었는데 터치를 받고는 발바닥을 찌르는 통증이 그 자리에서 바로 사라져 기쁨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단기 선교 12차에 걸쳐 많은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고 가는 곳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또 성지순례 및 터치봉사 등으로 15개국을 방문하였고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갈망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형편상 다 찾아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는 주의 일꾼을 부르고,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선교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편지를 받고도 베풀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할 뿐입니다.

제Ⅶ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분/열/의/원/인

1970년경 저는 대전그리스도의 교회를 다닐 때 김영란씨 현금자 씨 그리고 저까지 세 사람이 교회의 회계를 맡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헌금을 정리해서 목사님께 갔다드리는 것으로 수입과 지출에는 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개척 당시부터 내려오는 습성 때문이었습니다. 개척 당시에는 교회재정이 형편없는 살림이라 교회에 나오는 헌금 전액이 목사님 사례비도 안되고 목사님 생활비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매주 헌금이 나오는 대로 거두어서 드리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이것이니 받으시라며 드리곤 하던 내력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해서 많은 헌금이 들어와도 같은 방식으로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살림은 목사님이 알아서 하시니 그런 전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로 타 교회에서 전입한 교우들로부터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헌금에 대해 언급하실  때 목사님께서 '주의 종이 알아서 쓸 것이니 관여치 말라'고 하셔서 이것에 대하여 이의 제기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의 집에 애사나 경사 때 교회에서 축의금이나 부의금 같을 것을 하는 법이 없었고  참례하는 분들이 각자 조금씩 거두어 교회의 이름으로 드리곤 했습니다. 교우들 중에 어려운 일을 당해도 교회에서는 도움을 주는 일이 전혀 없고 개인 자신이 감동을 받으면 살며시 도와주고 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좀 도와주자는 여론이 나오면 목사님께서는 '도와주면 의타심이 생겨서 잘못된다'며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려운 가정이 생겼습니다. 임자춘 자매가 결혼해서 오월선 씨 옆방에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임자춘 자매가 첫 아이를 출산했는데 자연 분만이 안되어 성모병원에서 제왕절개를 하여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군속으로 일을 다니며 한달 월급이 8천원 할 때였는데 4천 원은 고향 시부모님께 보내고 4천원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원비가 1만 5천 원이 되서 그 가정으로서는 벅찬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형편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며, 오월선 씨가 교회에서 좀 도와주자고 목사님께 말씀드려 본다는 것입니다. 산모는 피를 많이 흘려 피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피 주사를 맞을 돈이 없어서 못 맞고 있다면서 제게 어려운 실정을 거듭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 진 16
성화교회 교우들과 함께 했던 농촌교회
터치봉사를 마치고 나서

그래서 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광고하시기를 각자 도와줄 수 있는 분은 각자가 알아서 도와주라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적은 돈을 가지고 병원에 찾아가서  도와주기는 힘든 일이니 함께 걷어서 단돈 1,000원이라도 도와주자고 해서 저와 김형근 형제가 같이 모금을 하였는데 12,000원이 걷혔습니다. 그 돈은 우영신 형제에게 건네며 목사님께 드리고 나머지를 더 거두어서 보태어 주라고 하며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병천에 있는 김순철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빨리 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그곳으로 가서 교회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성탑을 올리고 교회와 사택 페인트칠, 마루 놓는 일 등 여러 가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제가 없었던 동안에 교회에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위급하다며 형제를 돕자고 선동하는 것이 교회에 관례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저에 대한 좋지 않은 평을 내고 마귀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교우들이 좋지 않게 생각하고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모금한 돈은 사택의 난방비로 썼다는 말을 또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교회는 안 좋은 분위기가 되었고 저도 목사님에 대한 갈등이 생기고 해서 특별기도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옛 사택에 큰방이 비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달 동안 저녁으로 모여서 성경보고 기도하는 모임을 갖았습니다.  성경을 돌아가며 읽으며 각자 깨달아지는 것을 발표도 하는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열심히 모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낮에는 나가서 전도를 하고 밤에는 다시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모임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그때 한달 동안 모임을 가져도 한번도 들여다보지도 않으시던 목사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성경을 너무 파고들면 잘못되고 신비를 좇다 보면 이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우리가 잘못될까봐 노파심에서 하시는 염려의 말씀으로 잘 받아드리고 그 날은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우리가 '교회의 제직 선택 문제'를 토론하며 성서적으로 볼 때 안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을 하고 사도행전의 일곱 집사에 관한 토론을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목사님께서 우리말을 엿듣고 계시다가 "순 사탄이들, 사탄의 소리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우리가 토론한 것을 몇 번을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보아도 사탄이 될 말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형제들은 실망하고 그 모임은 폐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모였던 형제들이 일부는 죽고 일부는 타락하고 일부는 주의 종으로 현재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분위기는 평생 잊지 못할 그런 진지한 분위기였습니다.

그 후 형제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현재 대전그리스도의 교회 내에 그곳에 참석했던 형제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은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할 것 같았는데 일꾼을 키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기 전날 밤 저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가 모여 기도하던 방에서 둥글게 모여 앉아 성경을 읽고 기도하려고 하는 그 시간이었습니다. 형제들이 눈을 감고 엎드리려는 순간 나는 천장에 이상한 물체가 보여 눈을 뜨고 쳐다보니 천장에는 큰 뱀이 붙어 있었습니다. 천장색깔과 같은 하얀 뱀이었는데 천장에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형제들에게 "형제들, 성경도 좋고 기도도 좋지만 천장에 붙은 뱀을……." 하는 순간 큰 뱀이 번개같이 절반이 구부러져 내 얼굴 앞에 내려오더니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뱀이 하는 말이 "오재건이는 나의 원수다 내가 너를 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평소 같으면 그런 큰 뱀이 나타나면 무서워 놀래 넘어질텐데 내가 하는 말이 "너는 내 손에 죽으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에  뱀은 혀를 날름거리고 나를 해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 뱀의 꼬리를 묶어 천장 한쪽에 붙들어 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그 큰 뱀을 죽이려고 무기를 가지러 갔는데 간 곳이 바로 몇 년 전 세상을 뜨신 이 집사님네 집으로 큰칼과 낫으로 그 뱀을 잡는다고 연장을 가지러 갔는데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꿈 내용은 모르나 사탄의 역사로 교회가 분열되고 좋은 모임이 폐회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도를 많이 못한 원인도 있겠지요.

 따/돌/림/의/시/련

내가 제일 의지하고 제일 좋아하는 곳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따돌림받고 인정 못 받을 때 제일 큰 시련인 것 같습니다. 나를 교회에서 내보내려고 갖은 모략을 다하며 교회전도 부인을 내세워 5년 동안 각 가정을 방문하고 나와 교우들간에 유대를 끊으려고 나쁜 평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는데 꿈에 내가 군인이었습니다. 군복을 입고 완전 무장을 하고 실탄을 장전한 총을 메고 소대장을 따라 보초 배치하는 곳에 갔습니다.

그 시기는 전시였습니다. 적진을 향해 부대가 배치해 있고 부대 주위로 보초를 배치해고 자기 앞을 경계보초를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대장은 하필이면 나에게 제일 안 좋은 곳에서 보초를 서게 했습니다.

추운 겨울  북풍이 몰아치는 곳이었습니다. 높은 고지에서 조금 내려와 북쪽이 확 펼쳐져 있는 평평한 계곡인데 나무 한 그루나 바위 한 개가 없어 바람막이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평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초소가 지어져 있어 움막 속에서 위병소 같이 바람막이가 되어 있는 곳에서 보초를 서는데 나는 은신할 곳이 없는 북풍이 몰아치는 곳에서 2시간 이상 보초를 서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조금만 서 있어도 몸이 오그라지는 것 같고 발이 시려워서 옮겨 다니며 발을 굴러야 살 것 같아 양발을 탕탕 구르니 쟁쟁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북쪽을 향해 보초를 서는데 추위 때문에 몸이 오그라지는 것 같아 그 괴로움은 입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두 시간을 서 있는데 수십 시간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보초를 서고 나서 다음 사람에게 인계하고 내무반에 들어갔더니 따뜻한 난로를 피어놓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을 뻔한 혹독한 추위에 2시간을 서 있다 왔지만 누구하나 '너 추위에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추운 북쪽에서 보초를 서게 했다고 불평을 하거나, 만약 그곳이 힘들다고 초소를 이탈하여 갔다가는 전시상황이라 총살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저에게 보여주신 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요 섭리였습니다 나의 입장에 맞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곳에서 연단 받으라는 깨달음으로 알고 저는 참았습니다.

세월을 지나며 생각해보니, 우리는 아직도 주님이 배정해주신 곳에서 이탈했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배정해주신 교회에서 배정 받은 직책은 사명입니다. 또 우리가 배정 받은 곳은 우리의 가정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삶에 터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참고 끝까지 견디면 주님이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셨지요. 불만 불평 버리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 충성하라고 보여주신 줄 믿고있습니다.

시/련/으/로/인/한/번/민

사람은 참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고민하게 됩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덮어씌우고 애매한 소리를 들을 때 화가 납니다. 나는 양심 것 했는데 나를 의심하고 모해할 때 참기 어려운 것은 누구나 동일할 것입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희생했는데 은혜로 갚지 않고 악으로 대할 때 더 참지 못할 괴로움인 것 같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 주님이 보여주신 환상은 내가 높은 절벽 위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삼면이 절벽이고 뒤쪽은 천 길도 더 되는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높이는 수 천 길이나 되는 곳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이 개미같이 작아 보였습니다. 이런 높은 절벽 위에 서서 나는 이곳을 내려가야 되겠는데 내려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다 갔다 해보았지만 내려 갈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내려간다는데 그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간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그 엄청난 절벽을 자전거를 타고 순식간에 내려가 아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줄도 없고 자전거도 없이 맨손으로 있는데 내 마음속에서도 믿음으로 내려간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떨어져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그 절벽 끝으로 가서 절벽 끝에 매달려 믿음으로 눈을 꼭 감고 양손을 놓았습니다. 순간 나는 한참 떨어지다가 돌에 부딪혀 가루가 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탁하고 발이 땅에 닿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절벽 위에서 볼 때는 천길 만길 되는 것 같았는데 발이 땅에 닿아 눈을 떠보니 내 키로 한길밖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겁에 질려 고민을 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한길밖에 안 되는 내 자신이 살아서 겁나고 무섭고 힘든 고민을 하는 것이지 내 자신이 죽으면 어떤 어려움도 모욕도 다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자아가 살아서 체면 때문에 못하는 것도 많고 일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제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정하며 주님을 좇아야 주님이 받아주시지, 자아가 살면 절벽 위에 선 자 같다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개/척/교/회/실/패/원/인

1976년 봄에 저는 윤모 목사님을 담임으로 모시고 유천동에 어느 집 2층을 얻어 '유천동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전세금은 제가 단독으로 내고 생활비는 일년동안 매월 제공하기로 하고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이 찾아주셨고 자주 모여 집회도 가졌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열심히 기도하시고 사모님도 열심히 전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모 교회 목사님이 협의회 회장을 맡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 분이 도마동에서 너무 가깝게 교회를 개척하였다고 하시며 교회 간판을 떼라고 담임목사님과 저에게 늘 얘기를 하셨습니다.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을 자리잡고 있던 모교회와는 약 2km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판을 떼라고 성화였습니다. 담임목사님께는 압력을 가하여 '그리스도 교회에서 일하려면 교회를 그만두라'고 여러 차례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잘못된 사람과 교회를 하면 안 된다'며 그 돈을 자기에게 가져오면 자기가 적당한 곳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왕 교회를 시작했으니 열심히 해보자고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님은 교단적으로 압력이 거세서 안되겠다는 입장이어서 제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일년동안 목사님이 열심히 전도하시고 기도하셔서 교회가 부흥되어 성도가 많아지면 교회를 지속하는 것이고 만일 일년동안 교인 10명을 넘지 못하면 교회를 정리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목사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교회 간판은 떼지 않고 저는 일년동안 목사님 생활비를 매월 제공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일년이 돌아오는 어느 날 밤 저는 꿈을 꾸었고 아침밥을 먹으며 저의 아내와 꿈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누가 찾아왔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이었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교회문제 때문에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일년동안 열심히 개척교회를 했는데 교인이 7명 정도 되는데 교회가 뜻대로 부흥이 안 된다며 교회를 그만두겠다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본 것은 '제가  친구와 같이 고기를 잡는데 비늘 있는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고 비늘이 없는 미꾸라지 7곱 마리를 잡아 그릇에 담는 것'을 꿈에 보았습니다. 사모님의 말씀에 교인이 7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쓸만한 고기를 잡지 못했으니 목사님이 교회를 그만 둔다고 해도 그렇게 안타깝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해서 또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그만둔다고 해서 그럼 그렇게 하시라고 쉽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회전세금을 찾아 목사님에게 어디를 가시든지 집이라도 얻어 사시라고 전세금 일부를 떼어드렸는데 개척교회는 하지 않으시고 집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척교회는 하지 못하고 끝을 맺고만 일이 있습니다.

어/느/목/사/님/이/안/겨/준/실/망

대전 그리스도 교회의 세 번째 교회당을 짓고 나서의 일입니다. 어떤 형제가 교회 근처에서 단칸방을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사글세도 못 내고 먹지도 못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이으며 굶기를 밥먹듯 하는 젊은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우리 교회에 나왔는데 알고 보니 그는 고아로 크다가 남의집살이를 하고 살며 전전긍긍하다가  이제는 갈 곳도 없고 취직할 데도 없고 있는 돈도 다 떨어져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그는 목사님께 사정을 말하며 교회에서 좀 도와주면 자기가 일하여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옆에다 방 한 칸을 만들어 주고 그를 교회로 데려왔습니다. 그에게는 기술이 하나 있었는데 관광 기념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뜻밖에도 우리 교우들 가정에 고아를 데려다 키운 처녀가 있어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냐 며 중매를 섰습니다. 곧 결혼식이 거행됐고 그때 신부의 손을 제가 잡아주었습니다.

얼마 지나 그들은 교회를 떠난다고 하여 이사를 가게되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천안에 가서 산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것도 얼마 안 되어 그는 우리 집에 찾아와 대전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 옆방으로 오라고 했더니 곧 이사를 왔습니다.

그는 우리 집에 이사를 와서 자기가 만들던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무 뿌리를 다듬고 그 옆에 조그만 원통을 세우고 칠을 해서 연필꽂이를 만들었는데 그 기념품들이 잘 팔리어 각지에서 주문이 밀리었습니다. 그래서 공장의 규모를 키워야했습니다. 처음에는 방안에서 조금씩 만들던 것이 이제는 뜰을 차지하고도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집 마당이 넓으니 그곳에 공장을 지어 보라고 했습니다. 곧 공장을 지어 일을 하였지만 역시 공간이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하더니 관저동에 땅을 400평 사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그 형제에게 자네는 기념품만 만들 것이 아니라 돈도 벌었으니 주님의 일을 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하며 앞으로 목회자가 되면 어떻겠냐고 하였더니 제 말에 순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종교서적을 사들이고 원어성경 일람표 사전 등 많은 서적을 박스로 사들였고 일을 하며 야간에는 신학교를 다니고 시간 나는 대로 산에 기도하러 다니는 등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종이 되기를 준비하며 마침내 관저동에 집을 짓고 이사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는 신학교를 다니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가 목사안수를 받는다고 해서 참석하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세월은 또 흘러 어느 날그 목사님께서 날 찾아왔습니다. 반갑게 맞아 드린 데 반해 목사님은 그렇게 하기냐하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한 말이 목사님께 잘못한 일이 있냐고 물으니,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왜 안 도와주냐?' 며 자기가 지금 어려운데 안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동안 잘 사시는 줄 알았지 어려운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고 말하며 형편이 어떠시냐 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살면서 빚을 80만원을 졌는데 융자를 얻으려고 해도 보증을 설 사람이 없어 돈을 못 빌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은 못 도와드리지만 내가 보증을 설 테니 서류를 해 오라 하여 보증을 서주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 소식을 들으니 내가 못되었다고 동네를 다니며 비방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당신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왜 교회를 당신 집에다 세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와 너무 가깝다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이었습니다.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700m도 더 되는 거리이고 그 중간에도 교회가 여러 개가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대전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오재건이가 정말로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생각하며 참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그 목사님께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니 위암에 걸려 꼬챙이처럼 말라서 죽게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나는 더 못살게 되었는데 자식 3 남매가 불쌍하다고 하며 우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 드리시라 고만 말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목사님은 세상을 뜨셨습니다.

어/떤/형/제/의/배/신

나는 한 교회에 다니며 가까이 지내던 어떤 형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도 신임을 받았고 집사 직분까지 받아 같이 교회를 섬기는 제직이었습니다. 자주 만나서  성경도 같이 보며 성경말씀에 대한 토론도 하고 앞으로의 꿈도 서로 제시하며 주의 사랑으로 한 형제같이 지냈습니다.

나보다 많이 배우고 악의가 없는 모습이어서 나의 변변치 못한 정이지만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도 나도 농어촌 선교에 뜻이 같아 같이 기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프라스틱 원료를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하는 일이 화학재료를 취급하는 일이라서 몸이 좋지 않고 눈이 나빠지는 증상이 온다고 해서 직장을 바꿨으면 하는 의향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대전에 공장도 없고 마땅한 직장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형제에게 새로운 일을 해보라고 제시하였습니다. 그 일은 바로 집장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생각도 못하던 나의 제안을 듣고 건축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집을 지어 집장사를 하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집장사를 하면 직장 다니는 것보다 힘들지 않고 분명 잘 될 것이라고 말하며 집 짓는 일에 경험이 없지만 한다는 결심만 하면 내가 아는 데까지 가르쳐 준다고 말하여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장사로 직업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조금 갖고 있는 땅을 정리하여 집 지을 땅을 구입하고 집짓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집 설계의 초안부터 완공하기까지의 모든 공정을 일일이  가르쳐주었고 드디어 집을 완공하여 준공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집을 다 짓고 준공검사가 끝나자마자 그 집은 곧바로 매도되었습니다. 그 집을 팔았는데 본전을 제하고 이익금이 공장에서의 1년 봉급보다 더 많았습니다. 50일만에 1년 동안 직장에서 고생한 보수보다 많은 것을 얻고 나서 무척 기뻐하며 나에게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많은 집을 짓게 되었고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큰 공장을 사서 보세공장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서 그를 만나보았더니 사실이었습니다. 대지가 1,500평, 건평이 500평되는 공장을 사서 보세공장을 운영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잘 된 것 같은 기분이고 얼마나 좋은지 공장에 찾아가 기도도해 주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공장이 잘되면 십일조는 농어촌 선교하는데 내놓겠다는 말을 하며 공장이 잘되게 기도해 달라고 해서 나는 여러 번 찾아가서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그는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찾아가도 만나지 못할 때가 많아서 혼자서 기도하고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잘되던 집장사도 집어치우고 공장 사장이 되어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하루는 그가 나에게 찾아와 공장운영을 하다보니 어렵게 되어 부도가 나게 생겼는데 어디서 갑자기 돈 빌릴 곳이 없다고 하면서 돈을 3일만 빌려주면 부도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땅 60평 판돈이 있었는데 형제가 어렵다고 해서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3일만 빌려주면 어음 받은 것이 돌아온다고 하더니 며칠을 더 기다려도 돈을 갖고 오지 않고 공장을 찾아가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공장이 부도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법망을 피하며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우여곡절로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며칠을 더 기다리면 돈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 지나도 돈 갚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돈이 없어 일도 못하고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돈 만원 짜리 한 장도 꿀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그에게 집장사를 해보라고 말하였더니 무슨 돈으로 다시 집을 짓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땅은 외상 땅을 얻어 줄 테니 집은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하는 방향으로 일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을 지어 팔아 돈이 손에 들어오니까 딴 생각이 들었는지 땅값은 갚지 않고 한탕 더하고 준다는 것입니다. 집 값은 중도금까지 받아 딴 곳에 투자하면서 그곳에서 땅 값을 갚지 아니하여 땅 임자가 하는 말이 '집은 지었는데 왜 땅값을 주지 않느냐'며 저한테 전화하여 나오라 하여 욕설을 퍼붓고  또 술 먹고 우리 집에 찾아와 술주정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 형제는 가양동에 어떤 대지를 또 샀는데 사기 땅을 사 돈을 날리게 되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 형제는 많은 서민들이 평생 모아 연립주택이라도 근근히 장만한 집인데 이전 등기나 준공 같은 것을 갈무리하지 않아 여러 사람을 눈물 흘리게 했습니다. 겨우 그 형제를 붙잡아 땅을 원상복귀하고 분양 받은 자들에게 중도금은 되돌려주었으나 잔금을 못 받아서 그 땅을 정리하느라고 근 3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하였습니다. 그 형제를 믿고 마음 준 죄로인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땅 60평 대지 팔은 돈을 떼이고 217평 가운데 74평 값은 내가 물어주는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부인과 결별하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술 먹고 운전하다가 충돌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를 장사지내는 날 참례하여 하관 기도와 하관을 해주었습니다.

장/로/사/칭/사/기/꾼

교회 터를 얻어 흙담을 치고 천막을 덮어 어렵게 지내던 어느 날 교회에 신사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서울의 모 교회 장로인데 지방출장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가 천막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교회 상황을 알아보고 둘러보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자신이 사업을 하는 사장인데 나이도 들고 해서 자신을 돌아보니 하나님 앞에 무엇하나 뚜렷이 해 놓은 것도 없고 해서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마음 속에 늘 염원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이 교회를 하나 잘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막교회를 보니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곳에 자기가 교회를 독단해서 지어드리면 어떻겠느냐고 목회자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웬일로 이렇게 쉽게 교회를 짓게 되나 하고 흔쾌히 승낙을 하였습니다. 그 장로님은 교회를 어떤 형태로 지으면 되는지 전도사님과 만나서 설계사를 찾아가 초안을 잡고 교회를 지을 서류와 허가 맡을 준비를 하는 가운데 주일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대표기도를 시켰는데 기도도 청산유수같이 잘하여 모두들 은혜스러운 기도였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틀림없는 장로인데 교회도 거창하게 진다고 하니 교우들은 너무 갑작스럽게 교회를 짓게 되어 흥분에 들떠 있었고 전도사님은 그분과 자주 만나 교회 내부와 외부 설계 및 초안 잡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설계도도 아직 안나왔는데 건축업자를 데려와 거푸집 등 각목과 자재를 실어다가 풀어  놓고 자갈 모래도 한 차씩 실어왔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교회가 이제 곧 지어지게 되겠구나 하고 좋아들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 교우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교회 재정 형편은 천막교회를 헐고 흙벽돌 집이라도 지어 보려고 어려운 살림 가운데 전도사님은 사례비도 안 받으시고 교회로 오는 구호물자는 교우들이 나누어 갖지 않고 시장에 내다 팔아 얼마의 현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장로님께서 갑자기 지방출장으로 집을 나서다보니 현금이 많지 않아 설계비와 건축업자와의 계약금 등의 돈이 필요하다면서 교회에 돈이 있으면 며칠만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서울에 갔다와서 바로 갚겠다고 해서 전도사님은 서슴지 않고 교회에서 준비한 돈을 몽땅 그분에게 내어드렸습니다.

돈을 받아든 그는 설계사와 건축업자를 시내 모 처에서 만나기고 약속했다며 급히 갔는데 그 후로 그와는 소식이 두절되고 교회는 근근히 모아 놓았던 헌금을 모두 털리고 말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업자들이 찾아와 골재 값 각목 실어온 운임비 등이 있으니 교회에서 책임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건축 빙자 사기사건에 말려든 우리 교회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공짜로 교회를 짓는다는 들뜬 기쁨은 근심으로 바뀌어 흙벽돌집이라도 지으려고 준비한 헌금까지 다 털리고 말았습니다. 많은 교육비(?)를 지불했지만 다시는 이런 술수에 넘어가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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