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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아 매
주일마다 성만찬을 행하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말씀의 선포와 성만찬 의식,
이것은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이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 공동체였으며,
말씀을 통해서 성장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말씀은 성만찬 의식을 통해서 성도들의
시각, 후각, 미각, 청각, 그리고 촉각을 통해서 그들의 몸에 체험되었고, 그 말씀이
그들의 생활 속에서 육신화되었다. 그러나 역사상에 나타난 교회들은 말씀의
선포와 성만찬 의식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치중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나 동방 정교회는 형식과 교의에 치중한 나머지
성령의 인도에 따른 자유로운 말씀의 선포를 봉쇄해 왔고, 종교개혁이후 개신교회들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하심에 치중한 나머지 신앙의 개인주의와, 편의주의를 초래하였으며,
공동체험과 교회전통인 성만찬 의식을 경시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개신교회의
움직임은 성만찬 의식의 부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기독교인의 신앙은 주의
만찬의식에 의해서 심화된다는 인식이 깊어가고 있다. 성만찬 의식을 통해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어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성도들의 생활속에서 육신화
되어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자주 행하여 져야
한다는 인식이 깊어가고 있다. 요즘 한국 교계는 물론 세계에 불고 있는 바람은 때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1982년 남미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모였던 세계 교회
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 총회를 위해서 마련된 {리마 예식서}와 그 총회에서
베풀어진 세계교회의 공동 성만찬 이후 최소한 한 달에 한번만이라도 성만찬을 행하자는
각성이 온 세계에 일고 있다.
이 글은 세계 교회 협의회(WCC)가 전개하고 있는 성만찬 중심
예배로의 환원을 통한 교회 일치 운동을 적극 환영하는 입장에서 이미 이 운동을
200여년 전 부터 전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매주 성만찬 예배의 중요성을
재 인식하고, 하나님의 나라 샬롬의 맥락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재고해 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으로, 성만찬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연대를 위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로
설명되어 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 샬롬을 위한
교회 일치 운동이며, 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의 샬롬을 위한 축복된 잔치에 선취적으로
참여하여 먹고 마시는 친교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의 일치, 성서의 권위회복, 그리고
정치의 회중성을 표방한다. 이들은 강제성을 띄지 않는 일종의 운동(movement)이며,
몇 개의 구호도 가지고 있다. 교회 일치운동에 관련해서 구원에 '본질적인 문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는 자유를, 모든 일은 사랑으로!' 라는 슬로건을 사용하고
있고, 성서의 권위문제와 관련해서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것에 우리도 침묵하자!'라는 슬로건을 사용하고 있다. 회중성과 관련해서는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들 슬로건들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 운동이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이다. 이 운동은 성서로 돌아가 성서위에
특히 신약성서 즉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개혁(reformation)이나 혁명(revolution), 또는 혁신(renovation)과는
성격이 조금 다른 원상회복(restoration)의 의미를 갖는다. 쉽게 말해서 이 운동은
첫째가 하나 되자는 운동이요, 둘째가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요, 셋째가 회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적인 교회정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원상회복이나 성서로 돌아간다는
관점에서 보수적인 반면, 교회연합이나 회중이 주체가 되는 교회정치 운동의 관점에서
진보적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개방과 일치라는 긴장감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은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미래에 나타날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통해서 이미 이 지상에 세워졌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점차
그 완성을 향해서 한 거름씩 전진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anticipation), 즉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된 삶을 미리 맛보고 체험하고 누리는
신앙 공동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례 안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 개개인이 누리는 행복한 삶과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가정의 화목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의 연합된 일치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앞당겨져 우리 앞에
전개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회의 일치운동과 성서의 권위회복운동 그리고 교회정치의
회중주의 운동은 교회의 주인인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서, 즉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일치된 명칭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앞당겨 끌어들이는 운동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 세계의 교회가 하나임을 믿는다. 그리고
이 교회의 믿음과 실천을 위한 헌법은 오직 성서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단이 되기를 거부하고 교회연합과 성서의 권위회복에 힘쓰는 일종의 운동이기를
원한다. 이 운동을 환원운동이라고 말한다. 환원운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고
또 사도들이 지향했던 교회와 인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아래서 하나되는
운동이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운동이다. 하나는
모든 것의 시작이요, 출발점이기에 개혁이나 혁명이나 혁신이 형편에 따라서는 필요하겠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환원인 것이다.
중세 천주교회가 인위적인 교리와 행실로 성서에서 몹시 이탈하여
타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 마르틴 루터나 요한 칼빈과 같은 개혁가들이 나타나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했던 그 운동의 연장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이다.
성서로 돌아가는 운동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될 수 없는 지속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자체가 교회를 찢는 운동이었기에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의 모습은
아집과 교파주의에 치우친 분열과 분쟁의 연속이었다. 종교개혁의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시정하고 고쳐 나가는 운동이 환원운동이다. 따라서 환원운동은 지속적으로
성서에 돌아가는 운동이요, 성서에서 만나는 운동이다. 성서가 말하는 바를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바를 침묵함으로서 모든 것에 사랑으로 하나되는 운동이다. 성서에서
만나 하나되는 운동, 이 운동은 비단 교회의 일치에만 국한되는 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성이 회복되는 운동, 가족 구성원이 하나되는 운동, 인간 공동체가 하나되는
운동,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운동, 민족과 민족이 하나되는 운동까지도 포괄한다.
하나 됨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운동, 즉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이다.
위와 같은 환원의 정신으로 전개되고 있는 운동의 하나가
성만찬 중심의 예배이다. 성만찬의 성서적인 원형과 그 참된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
성만찬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재발견하여 실천하는 일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형성할 수 있는 참된 예배의 핵심이 되는 요건이다.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식사를 미리 앞당겨 맛보아 체험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고, 교회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도 결속과 연대의식을 쌓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계 교회 협의회(WCC)는 최근에 이러한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 운동이 {리마문서}[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111, World Council of Churches, Geneva, 1982.]에 한 교회일치 운동이다.
1982년 1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천주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개신교회의 대표들이
모여서 교파간에 이해를 달리하는 침례, 성만찬, 그리고 교역에 대해서 조정된 합의를
이루어 냈다. 이는 이들 침례, 성만찬, 그리고 교역에 대해서 교파간에 상호이해와
일치를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바로 {리마문서}이다.
이 책을 {BEM 문서}라고 칭하기도 하는 데, 이 문서가 채택된 이후 침례 성만찬에
대한 성례전의 인식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새로와 지고 있고, 그 의미도 선명해지고
있다. 또 이 문서에 의한 교회일치 운동으로 인해서 매주 성만찬의 중요성과 침례의
원형회복에 대한 인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학계에서 활발하게 강조되고 있다. 타
교단에서 이제야 서서히 일고 있는 이러한 운동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환원운동이라는
이름아래 이미 200여 년 전부터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사도행전 2장 42절의 말씀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
속에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다. 말씀과 교제와 성만찬과 기도(찬양)가
이들이다. 한 때 천주교회는 말씀이 빠진 성만찬 중심의 미사를 드려왔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개신교회는 성만찬이 없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림으로서 절름발이 예배를
드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개신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만드셨고,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이 말씀 위에 교회를 세웠다는 고백 때문에 기독교
예배를 말씀중심의 예배 즉 유대인의 회당예배로 퇴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천주교회가 강론을 시작하면서 말씀과 성만찬이 함께 있는 예배로 회복되어
가고 있고, 개신교회에서도 몹시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매주 성만찬 운동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난 200여 년 동안 주장해왔고 실천해
왔던 말씀과 성만찬 중심의 균형 있는 예배가 참 예배의 모습이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한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종교 개혁가들이 성서에서 멀리 벗어난 중세 천주교회로부터
성서로 돌아가는 개혁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환원운동의 기수인 알렉산더 캠벨은
개신교회의 분열로부터의 일치와 천주교회에 대한 과잉반응에서 비롯된 잘못된 성례전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에 심혈을 쏟았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전혀 교회의
분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요인으로 인해서 갈라진 동서방교회와
이단들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양상과 같은 정통교회들의 심각한 분열의 양상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토록 분열된 교회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알렉산더 캠벨은
긍정적인 면에서 종교개혁가들이 추구했던 성서의 권위회복의 정신을 계승했고, '성서가
말하는 곳에서 우리도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도 침묵한다'는 칼빈의
성서중심주의를 환원운동의 정신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그는 종교개혁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배타주의적인 독소로 야기되는 개신교회들의 분열주의를 지양하여 교회일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종교개혁가들이 중세기 천주교회로부터 탈퇴함으로서
회복하고자 했던 성서의 권위문제를 캠벨은 역으로 성서의 권위를 회복함으로서 분열된
교회의 연합을 시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와 알렉산더 캠벨은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문제들로 개혁을 추구하고 노력했지만, 개혁되어야 할 문제점으로 침례와 성만찬을
중요하게 거론한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16세기 중엽
천주교회의 잘못된 성례전을 성서적으로 회복하는 데에 그 뜻이 있었고, 알렉산더
캠벨은 19세기 초 개신교회들의 잘못된 성례전을 성서적으로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성서적인 매주 성만찬과 침례를 통해서 교회일치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만찬 중심 예배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성서적 예배의 원형임을 인식하고 전개해 나가야 할 운동의 과제로
삼고 있다. 많은 개신교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고, 매주 예배 중에 성만찬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 형식성, 예배시간의 조정 등, 개선의 필요성과 함께 자주 해야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는 각 교회의
전통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고 또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못되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 되는 일에 가장 큰 장애물로 남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리마문서}는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함에 있어서 성만찬 때의 그리스도의 임재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의 임재설에 대한 각 교회들의 입장들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에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리마문서}를 근거로 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임재설에 관한 고찰
성만찬 때의 그리스도의 임재설과 관련해서 중세 천주교회와 루터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임재를 주장했고, 칼빈과 쯔빙글리는 이를 부정하였다.
로마 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체가 빵과 포도주안에 실제로
진실로 현존한다고 트렌트 종교회의(Council of Trent) 이후에 믿어왔다. 이를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이라고 부른다. 화체설은 사제의 축사 후 빵과 포도주의 본질(essence/ substance/
invisible inner nature)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뀌어 진다(be transformed) 고
믿는 설이다. 물론 사제의 축사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겉모습은 바뀌어 지지 않는다.[Andrew
Paris,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Lord's Supper(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1986), pp. 62-89.]
루터교회는 루터의 전통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체가 빵과
포도주안에 함께 공존한다고 믿어 왔다. 이를 '공존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물질적 요소 안에(in) 혹은
함께(con/ with) 혹은 아래(under)에 있다고 믿었다. 루터는 성만찬 때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하신다고 믿으면서도 화체설을 부인하였다.[Ibid., pp. 90-110.]
일부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칼빈의 전통을 따라 우리의 영혼을
먹이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에 영적(spiritually)으로 임재하신다고 믿어
왔다. 칼빈은 성만찬의 목적을 영적 삶의 영양공급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를
'역동설'(dynamism)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의 살과 피의
역동적인 힘 혹은 생명을 부여하는 에너지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경건한 행위
속에서 신자들에게 전달된다고 믿었다. 이 하늘로 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효능(virtue)이
영혼을 살찌운다고 믿는다.[Ibid., pp. 110-114.]
그리스도의 교회는 쯔빙글리의 전통을 따라 상징설(symbolism) 혹은 기념설(anamnesis)을
성서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언제나 영적으로 임재해 계시므로
성만찬 때에도 영적으로 임재하심을 믿는다. 그러나 빵과 포도주 그 자체에 임재하심을
믿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만찬 제정의 말씀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기"(고전 11:26) 위한 것으로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3-25) 하신 말씀에 초점을 둔다.[Ibid., pp. 141-147]
이상으로 간략하게 각 교단의 전통에 따른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설을 살펴보았다. 이들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시비는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이어서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성만찬의 신학적인 의미
성만찬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성례이다(고전 11:23-25; 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15). 성만찬의
뿌리는 최후의 만찬에서뿐만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와 부활 후에 민중들과 함께 나누신
나눔의 식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리마문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성만찬은 인류의
구속을 이루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이며(Eucharistia),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과 십자가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이며(Anamnesis), 성령의
임재를 비는 제사이며(Epiklesis),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연대하고
수평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연대하는 교제의 시간이다(Koinonia).
성만찬은 대신(對神), 대인(對人), 대물(對物)관계에서 교제와 친교를 통해 서로
연대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를 쌓기 위해 마련된 화해와 나눔의 시간이다. 또한
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은총을 미리 맛보고 누리는 종말론적 식사이다(Anticipation).
이렇게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으로서 전개되는 환원운동이
성만찬 중심의 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매우 값진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리마문서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는 {기독교사상}
1991년 11월호에 실린 글에서 한신대의 박종화 교수는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고백적 행위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몸에 동참하는
기념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행위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현재화하는 경험임과 동시에 종말에 이루어질 궁극적 구원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선취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취와 현재화는 정치, 경제,
사회적 삶을 포괄하는 구원의 체험인 동시에 온갖 불의, 인종차별, 분열, 부자유
등으로부터 참 해방을 선포함으로서 맛볼 수 있는 축복이라고 말한다.[박종화,
"리마문서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 사상} 1991년 11월호, p. 63.] 그러므로
성만찬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식탁을 오늘의 우리의 삶 속에 현재화시키는 일이며,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하시면서 이들과 연대하는 밥상공동체를 세우심으로서
종말론적 식탁공동체를 선취하신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와 연대하고 동일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만찬을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환원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이기 때문에 침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이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식탁에 동참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누리게 된다.
이 축복된 잔치를 통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참 삶의 방법인 십자가의 정신을 배우게 되고 또 이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된 삶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과 참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된다. 또 인간
구원의 문제는 관계성의 회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인간끼리의
관계회복, 자연과의 관계회복은 오직 십자가의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침례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성만찬에 동참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필수조건인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식의 중요성을 터득하게 된다. 이 연대의식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사는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성육신 하심으로서
자기를 포기(renunciation)하셨고, 인간들과 동일화(identification) 혹은 연대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 당하셨다. 그는 또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시대에 소외당하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과 세리 또는 창녀들과도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시며, 가난한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셨고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본을 보여 성만찬을 제정하셨고 그 정신을
본받도록 성만찬을 행하여 지킬 것을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침례를 수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연대하는 결속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김용복, "민중과
연대하는 교회," {신학사상} 68집, 1990년 봄호, p. 198.] 또 하나님과
화목(연대)하는 일회적 의식으로 본다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 즉
화해와 나눔과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수평적으로 인간끼리의 공동체의식 또는 연대의식을
넓혀 가며, 자연과도 연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연대의식 또는 공동체의식은 인간들의 식음문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만찬은 먹고 마시는 예배행위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먹거리
문화, 특별히 고대 근동지방, 유대교, 쿰란 공동체, 그리이스-로마, 그리고 우리
민족의 식음문화 속에서 성만찬과 관련된 의미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만찬 의식과는 매우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조상들의 희생제사와 관련된 공동식사의 의미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제사와 음식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에게 바치는 모든 제물이 인간들의 먹거리라는 점이 그렇고, 제물을 바치고 난
후에 사람들이 신의가 깃든 제사음식을 공동으로 나누어 먹음으로서 그들이 신의
백성임을 확인하고,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다지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특히 이
연대의식은 쌍방간의 계약의 성립 속에서 이루워지는 것이며 대부분 제사와 그 제사상의
음식의 분배와 관련되고 있다.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행위는 쌍방간에 계약이 형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방법이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공동식사를 통해서 협정이나 협약
또는 계약체결을 인준하는 규정관습이 있었다. 이삭과 아비멜렉(창 26:30), 야곱과
라반이(창 31:54) 그러했고, 다윗과 아브넬이 그러했다(삼후 3:20).[William Barclay,
The Lord's Supper(Phil.:
The Westminster Press, 1982), p. 95. See also I. Howard Marshall, Last Supper and Lord's Supper(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0), pp. 18-20.]
창세기 31장에 의하면, 라반과 야곱이 상호불가침 협정을
맺고 언약의 음식을 나누고 있다. 야곱은 라반을 위해서 20년간 종살이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심으로 야곱은 거부가 된다. 이를 본 라반이 시기함으로
야곱은 두려워 두 아내와 재산을 이끌고 라반 몰래 고향을 향해 떠난다. 삼일 후
야곱의 도주를 알게된 라반이 그의 형제들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일주일만에 야곱에게
도달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라반은 야곱을 해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야곱에게 계약의 증거로 돌무더기를 쌓고 협정을 맺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돌을 모아 경계의 표시로서 돌무더기를 만들고, 기둥을 세운 후 상호불가침 협정을
조인하는 언약의 음식을 함께 먹는다. 또 야곱은 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
그 음식을 대접하고 그 날 밤을 지낸 후에 라반을 떠나 보낸다. 여기서 제사와 음식의
나눔은 언약을 체결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절차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상호 쌍방간의 합의를 뜻하였기 때문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야훼 한 분만을
섬길 것과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될 것을 약속한 후에 모세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출 18:12; 24:9f.).[박재순,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과 교회," {신약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 p. 87.] 이같이
쌍방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그것이 수용되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공포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던"것이다(출 24:11).
가나안 정착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마셨으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다. 신명기
12장 6-7절의 말씀에 의하면,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擧祭)와 너희 서원제(誓願祭)와 낙헌(樂獻) 예물과 너희 우양(牛羊)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하였고, 역대상 29장 21-22절에 의하면, "이튿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수양이 일천이요,
어린양이 일천이요, 또 그 전제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이
날에 무리가 크게 기뻐하여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더라"고 적고 있다.
또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행위는 친교와 연대감에 대한
표현이 되고 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식탁에 불청객을 받아 드리는 것은 언제나
친교의 표시였다고 한다. 시편 23:5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신다"는 말이 있다.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해 광야로 도주하다가 식탁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한 천막에 도착했다고 하자. 그가 문이 열린 천막 앞에 서서
머뭇거리며 무언의 애원을 보낼 때, 만약에 천막 안에 있던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에게
음식과 빵과 소금을 제공하면 그는 무사하다. 왜냐하면 그는 천막 안으로 영접될
것이며 필요하다면 끝까지 보호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천만 안에 있는 사람이
돌아서 그를 거절하면 그는 홀로 적을 맞이해야 한다. 따라서 음식을 주고받는 행위는
주인과 손님이 마음을 서로 주고받는 친교의 표시이며, 음식상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곧 연대성를 표시하는 것이다.[William Barclay, p. 95.]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제물을 전부 화제(火祭)로 드리는 번제(燔祭)가 있었지만, 화제라고 해서 반드시
제물을 모두 불 태워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곡식이나 가루를 통해서 드리는 소제(素祭)의
경우는 기념될 만한 것만 화제로 드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었고, 속죄제(贖罪祭)의
경우는 피를 가지고 성소에서 속하게 한 고기를 제외하고는(이 경우는 모두 불사름)
내장과 기름만을 불살라 화제로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었으며, 속건제(贖愆祭)
역시 속죄제와 마찬가지로 제육은 제사장들이 먹었다. 그러나 화목제(和睦祭)만은
내장과 기름만을 불사르고 제육은 제사 후에 제사를 드린 자와 그의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레 1-7장). 하나님과의 화목은 곧 인간 공동체의 화목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 화목제물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인간이 마련한 희생제물을 뜻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화목제물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말한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평화,
가정의 평화, 지역사회의 평화, 더 나가서는 국제사회의 평화를 도모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할 수가 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고(고후 5:17-20), 성만찬 예식을 통해서 이 십자가의
정신을 언제나 다시 상기토록 하셨다.
우리는 고대 근동 지방의 제사와 제사상의 음식의 공유는
계약성립의 의미와 친교 또는 연대성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이 하나님과 인간사이 또 인간과 인간사이에 가로놓인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의 계약성립의 매개물로서 희생된 어린양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예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상징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 인간과 인간과의 화목 또는 연대를 위해서 십자가에 제물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예식이 성만찬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식음문화는 종교적인 특성을 많이 띠고 있다. 특히
유대인의 공식식사와 유월절 식사 그리고 쿰란 공동체의 식사는 많은 종교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이들 식음문화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기독교의 성만찬
예전과 유형적인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유월절 식사에 대해서만큼은
좀저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A. 유대인 식사의 종교적인 측면
평상시 유대인들의 공식식사는 종교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특히 손님이
초대된 경우에는 포도주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기도가 필수적이다. 감사기도는 식전과
식후로 나누어 하나님께 드린다. 가장(家長)이 빵조각을 들고 다음과 같은 식전 감사기도를
드린다. "복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 하나님, 세상의 왕이시여, 당신은 세상에
빵을 가져오시나이다." 그리고 나서 빵을 떼어 배석자들 사이에 나누어준다.
이와 같이 식후에도 주인은 소위 '축복의 잔'이라고 불리우는 포도주 컵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배석자들은 이를 마신다. 이는 빵이나 포도주 자체에 신의가 깃들어 있다기보다는
식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나눔의 표시로서 의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I. Howard
Marshall, p. 19.]
유대인의 종교적인 식사 가운데 키두쉬(kiddush)라는 식사가
있다. 이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특별한 유대인의 의식이다. 가장이 포도주
잔을 들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한 자는 복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한다.
만약 식사가 안식일로 이어진다면, 해가 져서 안식일이나 축일이 되기 전에 이 축사가
행하여진다. 또 만약 식사가 이미 끝났다면, 특별한 의식 때 행해진다. 그리고 이
축사는 가족 구성원들에 의해서 한 컵의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수반되는 단순한 축복이며
혹은 식사 순서의 일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이 키두쉬 식사도 다른 유대인의 공동식사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Ibid., p. 20.]
B. 유월절 식사
기독교의 성만찬은 유대교의 유월절 식사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과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와 기독교의 성만찬과의 관련성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긴 노예생활로 고난과 역경을 겪었던
일들을 상기하고 또 해방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가족공동체의 연대는
물론 민족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고취하였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의
성만찬 예식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구원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신앙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높인다는 점에서 유월절 식사와 관련하는 것이다.
유월절 식사는 양력으로 3월 혹은 4월중에 해당되는 히브리력의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계속되는 무교절 첫 날 저녁에 먹게된다. 무교절이 시작되기
직전에 먹는 이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 축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된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준비기간을 갖는다. 14일 정오까지는 집안에서 모든 누룩을 제거한다.
그리고 같은 날 정오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준비된 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준비한다.
일단 양이 준비되면 그 양을 성전으로 가져간다.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양을 잡고
그 피를 하나님께 바친다. 왜냐하면, 양의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비된 식사는 오후 여섯 시부터 자정사이에 먹는다. 그러나 오후
여섯 시 이후는 유대인들에게 15일 금요일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유월절 어린양은
14일 목요일 오후에 제사장에 의해서 성전에서 도살되고 유월절 식사는 15일 금요일
저녁 오후 여섯 시부터 자정사이에 끝내게 된다.[유대인의 하루는 오후 해질 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오후 세시 경에는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같은 날 아침 즉 15일 금요일 아침부터 무교절이 시작된다.[William
Barclay, pp. 18-20]
유월절 식사에는 여섯 가지 음식 즉 어린양, 무교병, 소금물,
쓴 나물, 반죽 떡, 그리고 네 잔씩 마실 수 있는 포도주가 반드시 준비되어야
한다.[William Barclay, pp. 20-21. See also Andrew Paris,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Lord's Supper(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1986), pp. 33-36.]
(1). 어린양(출 12:21-23) - 유월절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은 양고기이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린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감으로서 모든 처음 난 소생들이 죽음을 모면한(passover)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어린양은 하나님의 구원을 웅변적으로 묘사한다.
양은 특별한 방법으로 조리되었다. 날로 먹거나 삶아 먹을 수 없었다.
물이나 요리 냄비조차도 만질 수 없었다. 반드시 꼬챙이로 양의 입에서 항문으로
찔러 모닥불 위에서 구어 먹어야 했다. 심지어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어야 했다.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되었고, 먹고 남은 것은 곧 소화(燒火)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서 유월절 식사 때는 최소한 12명 이상이 모여서 먹어야만 했다.
만일에 식구가 부족하면 다른 가족들과 합류해야 한다.
(2). 무교병(출 12:, 15-20; 신 16:3-4; 민 9:11)) - 무교병은 효소로
부풀리지 아니한 빵을 말한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루를 효소로
부풀러 빵을 만들어 먹을 시간적 여유가 없이 급히 먹고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3). 소금물 - 성서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후대의 유대인들은 그릇에
소금물을 준비하였다. 이것은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과 홍해도하를
상기케 하기 위함이다.
(4). 쓴 나물(출 12:8; 민 9:11) - 이것도 역시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생활의 슬픔과 비애를 상기케 하기 위함이다. 유월절 식사 중에는 신명기
15장 15절의 말씀이 기억되었다. "너는 애급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리라."
(5). 당과(糖菓/Charosheth 혹는 sweet paste) - 이것 역시 성서에 언급이
없다. 이것은 샤로쉩(charosheth)이라고 불리는 달콤한 반죽을 말한다. 이것은 사과,
대추야자, 석류, 밤 등을 섞어 만든 것으로서 꼬챙이를 꽂아 만든 일종의 과자이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straw)과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던 노예생활을
상기케 하기 위함이다.
(6). 네 잔의 포도주 - 이것 역시도 성서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다.
각 잔에는 포도주와 물이 3대 2정도로 희석된 포도주가 반 컵 정도씩 담겨져 있다.
이 포도주는 이 의식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가난해서 포도주를
구할 수 없다면, 성전에서 품을 팔게 하던지, 겉옷을 저당 잡혀서라도 포도주를 준비케
하였다. 이 네 잔의 포도주는 출애굽기 6장 6-7절에서 나타나는 네 가지 약속을 상징한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여섯 가지 음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식사가 기념의
축제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로부터 구원과
해방을 얻고 자유를 찾게 된 것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이 식사에는 18가지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William Barclay, pp. 22-25. See
also Andrew Paris, pp. 36-41.]
(1). 성별의 잔 즉 키두쉬 컵(kiddush/
consecration cup)을 마신다.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로 시작한다.
(2). 사회자가 자기 손을 세 번 씻는다.
(3). 예배자들은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 먹는다.
(4). 빵을 뗀다. 세 덩어리의 네모진 모양의 빵이 차곡차곡 포개져서
사회자 앞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다. 이 빵들은 누룩을 넣지 아니한 것들이다. 사회자는
가운데 놓인 빵을 집어들고 여러 조각으로 나눈다. 이들 빵 조각들은 이집트에서의
고난과 가난을 상징한다. 그들은 결코 온 덩어리의 빵을 소유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자는 빵 조각을 건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먹었던 고난의 빵입니다. 누구든지 굶주린 사람은 와서 먹게 하십시오.
누구든지 필요하다면 와서 우리와 함께 유월절을 먹도록 하십시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다음과 말한다. "금년에는 우리가 여기서 이것을 먹지만,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먹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5). 유월절 식사의 유래와 그 의미를 설명하는 말씀 선포가 따른다(출
12:26-27; 13:8). 이것은 아버지가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 앞에서 그 아들에게 해야할
중요한 의무이다.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출
12:26-27)고 명령되어 있다. 이 명령에 따라서 이 시점에서 아들이 먼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왜 오늘밤은 다른 날들의 밤과 다릅니까? 다른 날 밤들에는
우리가 누룩으로 부풀린 빵을 먹기도 하고, 누룩 없는 빵을 먹기도 하는 데, 오늘밤에는
오직 누룩 없는 빵만 먹지 않습니까? 다른 날들 밤에는 우리가 아무 종류의 나물이라도
먹는 데, 오늘밤에는 오직 쓴 나물만 먹지 않습니까? 다른 날들 밤에는 구운 고기도
먹고, 찐 고기도 먹고, 삶은 고기도 먹는 데, 오늘밤에는 오직 구운 고기만 먹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버지는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인으로서"(신
26:5)라는 말로 시작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형성과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역사를 설명한다.
(6). 참석자들은 시편 113-114편을 노래한다. 이를 '할렐'(Hallel)이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을 찬양하라'이다. 그리고 이 할렐은 시편 113부터 118편까지
7장으로 되어 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7개의 시편을 모두 암기하고 잊어
버려서는 안 된다.
(7). 두 번째 잔을 받는다. 이 잔을 '선포의 잔'이라고 부른다. 말씀의
선포 후에 마시는 잔이기 때문이다.
(8).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손을 씻는다. 식사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9). 사회자는 다음과 같은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복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 하나님, 지상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고, 당신의 명령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고, 우리들로 누룩을 넣치 아니한 작은 빵 조각들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빵 조각들을 먹는다.
(10). 좀더 쓴 나물을 먹는다.
(11). 두 조각의 빵 사이에 약간의 쓴 나물을 넣고 당과(charosheth)에 찍어서
먹는다(요 13:26절 이하, 마 26:23; 막 14:20 참고).
(12). 유월절 양을 먹는다. 이 식사를 굶주린 사람들의 축제라 부른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을 때부터 즉 정오부터 이 때까지 아무 것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기는 모두 먹어 치워야 한다.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되고, 다른
목적으로 먹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먹고 남은 것은 곧 소화(燒火)시켜야 한다.
(13). 식사 후에 다시 손을 씻는다.
(14). 나머지 빵들을 쪼개어 나누어 먹는다.
(15). 사회자가 전체 식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메시아의 전령으로서 엘리야의 오심을 간청한다.
(16). 세 번째 잔인 '감사의 잔'을 다음과 같은 기도와 함께 마신다. "복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17). 마지막 네번째 잔이 채워진다. 그리고 나머지 할렐, 시편 115-118편이
찬송되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으로
된 큰 할렐인 116편이 찬송된다. 그리고 포도주 잔을 마신다.
(18). 두 번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는 하나님께 대한 큰 외침과
찬양의 기도로 끝을 맺는다. 두 번째 기도는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모든 자의 호흡은 주의 이름,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할찌어다. 모든 육체의 영혼은 당신의 기념물,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왕께 계속해서
영광을 돌리며 높일 것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당신 이외에
우리는 왕도, 구원자도, 구세주도 없습니다.
이 유월절 식사의 특징은 기념과 찬양과 희망으로 축약될
수 있다. 이 식사에서 기독교의 성만찬이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헬라의 신비교에서 채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기독교
자체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배의식 자체가 회당예배에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이나 성만찬의 기원을 이 유월절 식사에 두어도 좋을 것이다.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속에서 민족의 결속과 연대를
다져 왔다. 쓰라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무교병을 먹고 쓴나물을 먹는다.
먹음으로서 그들은 민족의 공동체의식을 진작시키고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성만찬을 통해서 상호간에 결속을 다지며,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미래의 희망인 종말론적인 식사를 현재적인 삶 속에서 미리 맛보고 누리게 된다.
C. 쿰란 공동체(엣센파)의 식사
수도원 형태의 공동생활을 했던 쿰란 단체에는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진작시킬 만한
식사문화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그 당시 유대교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광야의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했고, 율법을 연구하고 지킴으로서 다른 유대인들과는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제사장들도 있었지만 희생제사를
드린 흔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요세푸스는 엣센파의 교리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물을 성전에 보낼 때에도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더 순수한 정결의식(more pure lustrations
of their own)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이라고 적고 있다. 또 엣센파 가운데
제사장들은 다른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이들 공동체의 수입을 맡아 관리하거나 타
지역에서 찾아오는 교인들을 돌보는 청지기로 임명되었다고 적고 있다(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18.1.5 and Wars of the Jews, 2.8. 3-4).] 그들은 또 태양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음력을 사용하는 유대교의 절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그들이 공동식사를 했다는 점이다. 발견된 자료들에 의하면, 이들이 종교적인
단체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데, 이들이 만일 엣센파였다면, 이들이 모이고 함께한
공동식사가 쿰란에서 만은 아닐 것이다. 엣센파의 공동식사에 관한 기록은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타나 있고,[Josephus, Wars of the Jews, 2.8.2-13. See also William Barclay, pp. 96-97 and I. Howard
Marshall, pp. 23-26.] 쿰란 공동체의 공동식사에 관한 기록은 사해사본에[William
Barclay, pp. 96-97, cited from G. Vermes, The Dead
Sea Scrolls in English, p. 121 and I. Howard Marshall,
pp. 23-26, cited from A. Dupont-Sommer, The Essene
Writings from Qumran(Oxford, 1961).] 설명되어
있다. 이들의 공동식사는 일종의 성례와 같은 친교식사로서 그들 공동체의 삶의 중심적인
것이었다.
엣센파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엄격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일 년간 지원자는 엣센인들의 절제와 불굴의 생활방식을 따라 흠없이 살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 이 수습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조그만 손도끼와
흰옷과 띠를 받게 되고 정결수의 참여자(a partaker of the waters of purification)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정식 회원은 아니다. 정식회원이 되여 공동식사에 참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2년간의 기질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리고 자격이 있다고 판명이
되면, 대단한 서약을 해야한다. 서약의 내용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윗사람과
모든 사람에 대한 신실함과 정의와 진리를 사랑함과 엣센 소유의 책과 천사의 이름들을
보존하고, 절도와 강도와 교리누설과 회원들에게 숨기는 일은 생명의 위협이 있더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된다.[Wars of
the Jews, 2.8.7.] 만일 이들을 어기게 될 때에는
공동체에서 추방됨은 물론이고,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되는 데 심지어는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Wars of the Jews, 2.8.8.]
회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수도원 같은 곳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거처없이 어느 도시에서나 살 수 있다. 그들은 힘써 일하여
생계를 이어 가지만 그들의 삶에는 자기 것이라는 소유개념이 없다. 언제나 검소한
생활 속에서 회원 상호간에 함께 나누어 쓰고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에 여행 중이라
할지라도 도적에 대비한 무기를 지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지니는 일이 없었다.[Wars of the Jews, 2.8.5.]
그들은 해 뜨기 전에 일어나 불경건한 언사를 행함이 없이
경건하게 기도를 올린 후에 상사의 지시에 따라서 제 5시가 될 때까지 대단한 열심으로
맡은 일에 열중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인다. 흰 천으로 몸을 감싼
후에 그들은 냉수로 목욕을 한다. 그들이 몸을 정결케 한 후에는 성전에 들어가듯
경건한 모양으로 식당으로 들어간다. 회원이 아닌 사람은 이곳에 들어 갈 수 없다.
자리를 잡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빵 굽는 사람이 순서대로 빵을 놓아준다. 그리고
요리사가 각 사람 앞에 한 접시에 한 종류의 음식을 가져온다. 그리고 나면 한 제사장이
식전의 기도를 올린다. 기도 전에 음식에 손을 델 수 없다. 식후에 같은 제사장이
다시 기도를 올린다. 그들은 식전과 식후에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이다.
식후에 그들은 그들의 옷을 벗어놓고 저녁까지 다시 일터에서 열심히 일한다. 일터에서
돌아온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저녁을 먹는다.[Wars
of the Jews, 2.8.5.]
사해사본에 나타난 쿰란 공동체의 공동식사도 엣센파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사해사본에는 식사 때에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언급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제사장에 의해서 식전 기도가 드려지는 것을 볼 때, 쿰란
공동체는 제사장적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쿰란 공동체의 식사 기도도 평상시 유대인들의
식사 기도처럼 빵과 포도주에 대한 각각의 축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쿰란 공동체의 식사가 이집트의 테라퓨태(Therapeutae)라
불리는 유대인 종파의 성스런 식사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공동체의
식사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진설병을 먹는 것과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진설병을 먹는 의식은 포도주를 마셔야 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쿰란 공동체의 식사가 테라퓨태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쿰란 공동체와 엣센파가 행한 식사 예전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성서를 연구할 뿐만 아니라, 소유를 공동으로 관리하였고, 절대로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지 않았다. 옷이나 신발은 반드시 완전히 닳아 떨어질 때까지
입고 신어야 했다.[Wars of the Jews, 2.8.4.] 따라서 이들이 함께 참여한 공동식사는
절대적인 결속과 연대감 속에서 진행된 친교를 위한 예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종교들 가운데 특히 헬라의 신비종교들
가운데는 제례(祭禮)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8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신의 식탁에 참여해도 좋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노크(A. D. Nock)는 그와 같은 중요한 세 가지
형태의 음식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 단순한 친교모임으로서 특정 종파의 구성원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었다. 이 때 함께하는 식탁은 특정 집단의 창설자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식사이다. 성만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임과 다를 바
없다. 둘째, 신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식사가 있었다. 2세기경의
파피루스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식사에 초청하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체어레몬(Chairemon)
주 사라피스(Lord Sarapis)의 식탁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주의 식탁'이라든지, '귀신의 식탁'이라고 한 말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전 10:21).
세째 형태의 식사는 디오니수스(Dionysus)의 종파에서 황소의 생육을 먹는 것이라고
노크(Nock)은 말한다. 여기서 황소는 신의 대표로서 간주되어졌다. 그래서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그 자신의 신을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I. Howard Marshall, pp. 27-2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느 민족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신에게 드려진 제물은 그 구성원 공동체가 그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고 마셨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들은 화목제를 드린 제물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리스-로마의 식음문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희생제물
전체를 화제로 바치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제물의 일부분 즉 머리카락 몇 개 정도만
상징적으로 태우는 일도 있었다. 살코기는 제사장이 일부 가져가고, 일부는 예배자가
가져간다. 예배자는 성전구내에서 친지들을 위해서 그 고기로 잔치를 베설하기도
한다.[William Barclay, p. 98.] 이점은 우리 민족의 제사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제사상의 음식을 그 구성원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는 것은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결속시키는 종교적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성만찬과 비슷한 형태의 종교의식은 원시종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20만년 전 제 3빙하기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발
3,000여 미터에 위치한 알프스의 동굴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비슷한 내용의 벽화는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 나라의 동굴에서도 확인된다고 한다. 어느 문화에나
비슷한 종교의식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박근원, "그리스도교 예배의 한국 문화적
표현," {기독교 사상} 1991년 11월호, p. 194.] 우 민족은 제의적인 민족으로서,
언제나 하눌님께 제사를 드려온 민족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제의적 표현을 통해서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예로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이 있었고, 특히 우리 민족의 유산으로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서는 마을 공동체의 축제인 '당굿'이나 '도당굿'이 남아 있다.[Ibid., pp. 197-198.]
특히 성만찬에 비교될 만한 우리 민족의 먹거리에는 해원떡(解怨餠)과
대폿잔이 있다. 해원떡은 화목의 개념인 관계회복의 뜻이 담겨있고. 대폿잔은 연대의식이나
강한 공동체의식과 관련된다. 이런 우리민족의 습속으로 보아 성만찬의 토착화의
가능성도 있다고 보아진다.
우리 민족의 세시민속(歲時民俗) 가운데 대보름 민속으로
원을 푸는 떡(解怨餠)이라는 게 있다. 한 해를 살다보면 이해(利害)에 얽히건 오해에
얽히건 간에 누군가와의 사이에 원망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 마을에 살면서 불편한
관계를 갖는다면 피차에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대보름 명절에 그 불편한
관계를 말끔히 씻기 위해서 해원떡을 만들어 산사(山寺)의 스님을 통해서 주고받음으로서
지난해의 불편했던 관계를 깨끗이 씻고 새로운 출발을 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떡을 통해서 원수된 관계를 풀고 서로 화목하는 길을(解怨相生) 모색했던 것이다.[이규태,
{막걸리의 한국학} (서울: 기린원, 1990), pp. 151-152.]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께서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고, 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 또 자연과
불편했던 관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 친히 해원떡이 되셨고, 이 떡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또 우리 민족이 한솥밥을 먹고 정리(情理)를 다지듯이 한잔술을
나누어 마시고 의리(義理)를 다졌으며, 그 공동체 운명을 확인하는 의식용(儀式用)
술잔이 대포요, 대포에 담는 의식용 술은 막걸리이게 마련이다. 옛날 육조(六曹)
삼관(三館)을 비롯한 각 관아나 향촌에서 한 말들이 큰 대폿잔에 술을 담아 차례로
돌려 마시는 공음례(共飮禮)가 의식화되어 있었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한
잔술을 나누어 마심으로서 동심일체와 공생공사를 다지는 인화문화를 발전시켰다.
사헌부(司憲府)의 대포는 아란배(鵝卵杯), 교서관(校書館)의 대포는 홍도배(紅桃杯),
예문관(藝文館)의 대포는 벽송배(碧松杯)란 대폿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사이를 대포지교(大匏之交)라 불렀다.[Ibid., pp. 12-13, 162-163.] 이러한
우리민족의 대포문화는 인화(人和)민속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잡히시던 밤에 잔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다 함께 잔을 들어 마시며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공동체임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이 성만찬은 공동체의 운명을 확인하는 의식이요,
동심일체를 다지는 예식이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 . .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고전
12:2-13)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연대감 속에 단결을 과시했던 단체로 보부상(褓負商)이
유명하다. 일사불란한 단결력과 조직력이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활용되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에 피난간 임금과 일선과의 통신 및 군수품 수송을
맡은 것이 바로 보부상이라고 한다. 생판 낯이 선 보부상이라도 오다가다 만나면
반드시 입었던 바지를 바꿔 입고 갈 길을 간다. 같은 옷을 더불어 입음으로서 해서
동포의 정을 돋우는 결속의 습속인 것이다. 음주 습속인 대포라는 것도 보부상들의
결속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보부상들은 모였다 하면, 술을 마시는 데 반드시 큰 바가지에
술을 가득 담아 돌려 마셨던 것이다. 한 잔술에 더불어 입을 대어 돌려 마시는 것은
원시적인 결의 습속으로서 일심동체를 다지는 의식인 것이다.[Ibid., pp. 174-175.]
어느 집안에나 제사를 지내면 음복(飮福)이라 하여 제주(祭酒)와
제사음식을 나눠 먹는 습속이 기필 수반되는 데 각종 공동제사 때도 소나 돼지 등
신에게 바친 희생물을 제사 후에 반드시 한 점씩이라도 나눠먹는 습속이 있었다.
음복과 희생음식을 나눠먹는 것은 제사가 끝났으니 나눠먹자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 제사음식에 신의(神意)가 깃들어 있으니 그 신의를 자기 속에 나눠 갖자는 상징적
주술(呪術)행위인 것이다. 그러기에 제사가 끝나면 분량의 크고 작음이나 질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떡 한 조각, 밤 한 톨이라도 나눠 먹어야 했으며, 그것을 먹으면
병에 안 걸리고, 액(厄)도 사라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을의 당제(堂祭)는
공동체의 평안을 비는 것이기에 신(神)의 평안의 뜻이 담긴 제사음식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나눠먹을 의무와 권리가 주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서 공동적 운명을 다짐하였고, 그 주술의 분배적인 공유로 집단의 운명을
같이하는 한편 공동체 의식의 정도를 높여 온 것이다.[이규태,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인은 누구인가?} 상권(서울: 문리사, 1977), pp. 99-110.]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인류의
대속제물로 삼으셨다.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음으로 그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은 이제 우리 모두의 의무요 권리인 것이다.
우리말의 선물(膳物)이란 말 자체가 제삿상에 올린 음식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음식은 곧 어떤 공동체의 공동의식을 결속시키는 신통력을 가진
음식이며, 그것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에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선물로 전환한 것이라고 한다.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복덕방(福德房)이란
바로 이 선물을 나누어주던 제물 분배소를 의미하였다고 한다. 요즈음은 이 말이
토지나 가옥 소개업소란 뜻으로 변해 버렸지만, 옛날의 복덕방은 각종 부락제 때
제사상에 차린 음식이나 희생되었던 짐승의 살코기를 마을로 옮겨와 한 곳에 차려
놓고 그것을 나눠먹던 장소가 바로 복덕방이란 것이다. 곧 음복(飮福)과 음덕(飮德)의
신성한 장소가 복덕방이었던 것이다. 이 신성한 어휘가 소개업으로 전락된 것은 사람이
모이고 모이면 거래와 흥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신성인간의 집합소가
경제인간의 집회소로 전락한 것이다. 선물이란 바로 신의의 분배행위요, 그 분배행위로
어느 한 집단의 공동체의식을 신명(神命)으로 보장받는 행위였던 것이다. 바로 어느
공동사회를 또는 어느 집단을 강하게 결속시키고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시키는 그
접착제 노릇을 선물이 대행했던 것이다.[Ibid.]
여기서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의
성만찬의 중요성이 바로 우리 민족의 음복, 음덕의 습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공동체의식인
것이다.
또한 농경정착 민족의 특성인 가족과 촌락의 공동체의식은
우리 민족의 특성이기도 하다. 한 가족이 운명체로서 그 공동운명에 자기 개성이나
욕심이나 기호를 희생하면서 순응하는 것이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한국의 밥상은
이 가족이란 집단의 공동체의식을 유대시키는 근본이요, 기틀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의
밥상은 그 가족이란 공동체를 대상으로 차려진다. 개인상이 아니라 공동상인 것이다.
한국인의 식사문화는 이와 같이 가족 공동체의식에의 자기소멸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상에 동참하는 한 가족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는 먼저 자기소멸의 희생정신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을 받고, 또한 공동체
운명의 충실한 일원이 되기를 다짐한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한 피를 나눈 한 형제자매이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나마 환원운동에 대한 정의와 환원운동과
성만찬 중심 예배의 회복, 성만찬의 신학적인 의미, 그리고 식음문화와 공동체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특히 식음문화와 공동체의식에서는 성서 시대의 여러 나라는
물론, 우리 민족의 먹거리 문화 속에서도 화해와 일치를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과
일체감을 결속시키는 음복 음덕의 습속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런 문화가
기독교의 성만찬 예식을 통해서 나눔의 차원으로 승화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한 장소에서 한 덩어리의 빵과 한 잔의 포도주를 나눈다는 것은 구성원들간에 일치와
연대를 나타내는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성만찬의 나눔과 실천의 예식이 안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에로 연대할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이웃과 자연과 연대하게 되어야
한다. 즉 기독교 공동체의 성만찬의 나눔은 형식적인 예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모든 영역에서의 삶, 즉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불편했던
관계를 회복시키고 참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시키는 실천의 삶으로 연결된다.
하나님과 나사이의 연대, 남편과 부인사이의 연대, 부모와 자녀사이의 연대, 고용주와
고용인과의 연대, 동료와 동료사이의 연대, 이웃과 나사이의 연대, 인간과 자연과의
연대를 통한 신뢰의 회복과 정치, 경제적 불의의 척결과 불평등 해소, 분배정의의
실현, 지역적, 인종적, 성적 차별 등이 이 공동체의 의식과 연대 속에서 척결되고,
생태계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이 사라지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선취적인
역활로서의 성만찬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안선희, "성만찬에 관한 신학적
이해 연구," {기독교 사상} 1991년 11월호, pp. 85-104참고.]
환원운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운동을 구체화 시켜 나가는 한가지 방법이 성만찬 중심의 예배라고 믿는다.
성만찬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식탁을 오늘의 우리의 삶 속에 현재화시키는 힘이며,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하시면서 이들과 연대하는 밥상 공동체를
세우심으로서 종말론적 식탁공동체를 선취하신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와 연대하고
동일화 시켜 나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예배에 환원시키는 사명을 감당하는 선구자적 지도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용복. "민중과 연대하는 교회." {신학사상} 68집.
1990 봄호. 한국신학연구소.
박근원. "그리스도교 예배의 한국문화적 표현." {기독교사상} 1991년 11월호.
박재순.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과 교회." {신약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 .
박종화, "리마문서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사상} 1991년 11월호.
안선희. "성만찬에 관한 신학적 이해 연구." {기독교사상} 1991년 11월호.
이규태. {막걸리의 한국학} 서울: 기린원, 1990.
이규태.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인은 누구인가?} 제 상권. 서울:문리사, 1977.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111, World Council of Churches, Geneva, 1982.
Barclay, William. The Lord's Supper. Phil.: The Westminster Press, 1982.
Marshall, I. Howard. Last Supper and Lord's Supper.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0.
Paris, Andrew.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Lord's
Supper. Joplin: College Press, 1986.
Whiston, William, trans. The Works of Josephus. Lynn,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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