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소 목사(1890-1964)의 생애와 업적
 


김종기 목사(성낙소 목사의 자서전을 풀어 쓰고 서문을 씀)

    성낙소 목사님의 자서전은 연구 목적이외에 무단 사용될 수 없으며, 다른 홈페이지에 옮겨 복제되거나 허락없이 유인물이나 책의 형태로 출판될 수 없음을 밝혀둡니다.

    <아래의 소개한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은 조동호 목사가 김종기 목사의 도움을 받아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 올린 자료입니다. 이 자료와 화수리 담사내용을 아무런 연락도 없이, 책 내용에서조차도 일언반구 없이 자신의 이름만으로 책을 엮어 출판한 사람이 있음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면서 이 글을 읽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그 사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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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제1장 성낙소의 출생과 가정 및 교양

제12장 선교사 내한과 신학교 제2회 시작과 6·25 전쟁

제2장 자각적으로 신약교회의 명칭을 사용

제13장 공산정치 3개월간의 위험

제3장 실인(室人)의 병보(病報)와 귀국

제14장 환도와 신학교 개강과 사태갱위(事態更危)

제4장 박해와 위험 백인(白刃)

제15장 피난과 전도

제5장 본국에 포교 임명(1931)

제16장 수원과 부산 피난

제6장 포교관리자와 동지 김상준 목사 결탁

제17장 영남지방 순회와 환경(還京)

제7장 기독의 교회 선교사와 신학교 시작

제18장 태극리 교회당 낙성식과 수정동 교회 소송 건

제8장 교회 명칭을 성서 중에서

제19장 제주도순회와 고아원 직원선출과 구포교회 설립

제9장 대동아 전쟁과 교회 박해

제20장 신학교 학생등록과 개강 및 고통 당한 일

제10장 자급적 전도와 조선해방

제21장 두 선교사 귀국과 신학교 휴교와 유무악기 합동

제11장 각파 합동통일 운동과 교파고집을 한탄

제22장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당 건축과 고통

서문

성낙소(成樂紹) 목사는 1890년 5월 16일에 태어나 1964년 11월 30일 74세로 소천 하였다. 그는 일찍이 구국의 일념으로 홍주성 의병군에 가담하여 왜적을 물리치려 하였으나 기회를 놓치자, 구세군에 가입하여 이를 실현하려 하였으며,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영동지방의 유지와 청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왜경에게 쫓겨다녔던 애국지사였다. 그는 또 1927년 이 땅에 최초의 자생 기독의 교회를 탄생시킨 분이요, 1940년 일제가 모든 신교 교파들을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아래 통합하려 할 때에 모든 교단들이 이에 가입하고 신궁참배까지 하였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하신 분이요, 이에 모진 고문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의 가입과 신사참배로부터 건져내신 분이요, 한국동란 중에는 목숨을 걸고 공산군의 기독교민주동맹 가입강요를 물리치신 분이요, 남한의 한국기독교연맹에 조차 가입을 막음으로써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치권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고 신약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내신 분이다. 1946년 8월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합동선언문을 작성하고 발표함과 동시에 남한 각 교회에 발송하여 20여 개 교파의 30~50여명의 교역자들을 회집하여 6개월 동안 합동통일운동을 펼친 한국의 토마스 캠벨이요, 발톤 스톤이며, 신약교회의 순수성을 고수하고 지키고자 함에는 한국의 알렉산더 캠벨이라 할 수 있다.

성낙소 목사는 일찍이 한문과 역리학을 습득하신 분으로 육효(六爻), 사과(四課), 삼전(三傳), 기문(奇門), 태을(太乙), 홍기(洪奇), 골상학(骨相學), 한의학 등에 통달하였고, 뛰어난 의술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사상의학에 능통하였다. 그는 환자의 표정과 음성, 눈빛, 외모와 성격을 통하여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며, 처방한 약을 약국에서 조제해 먹으면 영락없이 낫곤 하였다.

그는 찾아온 환자들을 천천히 진맥하는 동안 열심히 전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예수님 이야기로 시작해서 교회 이야기, 일정 때 동방요배나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교계 지도자들이 버젓이 교권을 쥐고 휘두르는 반면, 이를 거부하다가 고문당하고 투옥되었거나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한 우국지사들은 오히려 소외당한다는 비판의 말씀을 하셨고, 구원을 받으려거든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성낙소 목사는 성품이 강직하고 불의를 용납지 않는 정의로운 분이었으며, 작은 체구에서 품어 나오는 단단함이 있었고, 날카로운 눈매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보기 드문 달변가였다.

성낙소 목사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가족보다는 성도들을 더욱 사랑하였다. 먹을 것이 없어 궁하고 어려웠던 시절에는 약국을 부업하셨고, 식구를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성도들을 염려하시면서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성낙소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도 역임하였다.

이렇게 성낙소 목사는 독립지사로, 한의사로, 자선가로, 교회개척자로, 환원신학자로, 목회자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그분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일선에서 물러나 앉고 있으니, 이 어찌 그리스도의 교회로써 크나큰 손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본인이 그분의 자서전을 필사하여 소장하고 있던 차에 장성우 목사와 조동호 목사의 권유와 협조로 그분의 자서전을 풀어 쓰고 정리하여 이번에 인터넷 홈페이지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에 올리게 되니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감개가 무량하다.

본인은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낙소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자랐고, 그리스도의 교회 최초의 신학교인 송월동 신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육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예편한 후에도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장로로 섬겼다. 따라서 성낙소 목사는 본인의 은사이시며 신앙의 길잡이였고, 본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날 수 없도록 강력한 교훈으로 이끌어 주셨던 잊을 수 없는 스승이시다.

본인이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을 소장하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80년이다. 그 해 어느 날, 고 성낙소 목사의 장손되는 성기천 형제(당시 미국에 거주)가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청하였더니, 원본을 복사하여 보내었는데, 너무 희미하고 조잡하며 지워진 곳이 더러 있어서 그대로 보관하기가 곤란함으로 이를 다시 노트에 필사한 후 보관하였다.

그러나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은 많은 한자와 오늘날 쓰이지 않는 옛말로 되어 있어서 원본 그대로는 현대인들이 해독하기 쉽지 아니한 글이다. 따라서 원본(copy)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원본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자를 더러는 한글로 고쳐 적기도 하였고, 해독이 어려운 곳은 풀어쓰기도 하였다.

성낙소 목사의 이 자서전이, 비록 그분의 고귀한 생애 가운데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련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하나, 그분이 남긴 이 유작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를 재확인할 수 있게 되고, 그분으로부터는 큰 용기와 자긍심을 얻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동역자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1999년 7월  일
만목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김종기 목사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 : 기독의 교회(基督之敎會)와 성낙소(成樂紹)와의 관계

제1장 성낙소의 출생과 가정 및 교양(사진은 1959년 11월 9일 69세 때의 모습)

부친은 성도영(成度永)씨요, 모친은 파평 윤씨인데, 두 분은 조선시대의 소위 양반의 자녀로서 상혼(相婚)하고 농가생활에 빈궁치는 않았으나 자녀를 낳으면 사이불양(死而不養=쉽게 죽으므로 키우기 어려움)하여 부부의 심정이 조상의 후사가 없을까하여 염려로 지내오던 중에 도영씨의 나이 40세가 되는 경인년(1890) 5월 16일에 생산득남한바 이 아이가 곧 성낙소였다. 그러나 부모는 과거에 자녀를 양육치 못한 소감으로 항상 심불안정(心不安定)하시면서 답빙의 심리(踏氷之心理=얼음을 밟듯 조마조마한 마음)로 희중유의(喜中有疑=기쁨 중에도 의심이 있음) 하다가 불행히도 그 모친 윤씨는 득남 5세인 갑오년(1894) 12월 26일에 별세하시고 다음 해인 을미년(1895) 봄에 그 부친께서 과거(寡居=홀로 사는 과부) 하시는 전씨(全氏)를 얻어 55세 되는 5월에 둘째 아들 성낙철(成樂哲, 1905)을 낳으셨다.

성낙소 8세인 정유년(1897)에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8~9년간 수학하고 한제(韓帝)말기라 국가 정세가 불안한 중인데, 그때는 을사보호조약(1905) 후 2년인 정미년(1907)에 사전(師傳)되신 호(號)에 평곡(平谷)이란 신씨(申氏) 선생님은 갑오년(1894) 혁명난에 전봉준 대장의 모사(謀士)로 투쟁하시던 분으로 의기가 있으신 고로 성낙소에게 권유하시되 남아가 출세하여 유사시에는 제세민안(濟世民安)의 도량이 있어야 하거늘 경서(經書)만 읽을 것인가? 추수(推數=앞으로 닥쳐올 운수를 미리 아는 것)하여 천지운명과 인간의 길흉화복을 추측하는 역리를 습득하여 시기가 오면 활용하여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심으로 유쾌히 순종하여 역리학을 습득하는 동시에 육효(六爻), 사과(四課), 삼전(三傳), 기문(奇門), 태을(太乙), 홍기(洪奇), 골상학(骨相學), 한의학 등을 통달하여 중국 삼국시대에 후한조의 제갈공명 선생을 대한 듯한 자신과 의용 자부심이 불타는 중에 내종형 되시는 김진사 재철씨가 최익현 선생에게 집례수학(執禮修學) 하신 바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과 같이 최 선생님을 봉공(奉供) 하신 바, 이때에 침략하는 왜적을 물리치려고 오시는 최익현 선생을 후원하시며 거대한 재산을 제공하는데 자기 외종 성낙소가 연소하나 공명에 비하겠느냐고 최선생에게 소개하여 길일을 택하여 충남 홍주성내 의병본영(義兵本營)을 향하여 일일행정도중(一日行程途中)에 보도를 접한바 홍주성(洪州城)이 왜적에게 함락되었다 함으로 탄식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주야로 도술을 훈련하되 최고 술객 홍통정(洪通政)이라는 83세 되시는 노련한 선생을 초빙하여 신기한 도술에 취하였다.

제갈공명 선생이 초당에서 춘수중(春睡中)에 대몽(大夢)을 작성함과 같이 성낙소 자신도 산촌괴정(山村槐亭)에서 제세민안(濟世民安)할 포부로 혈작이후(血作以后)에 최익현 선생의 충남 홍주성 의병이 함락을 당하고 그는 생포되어 대마도에서 별세하시고 조정에는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왜정의 침략정책인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통감이 되어 한제(韓帝)의 운명은 시간문제였던 때인 경술년(1910) 초봄에 하루는 의외에도 영국에서 구세군이 상륙하여 경성 서대문 외평동에 병영을 설치하고 각도에도 지방병영을 설치한다고 하모로 지방유지와 협의하고 충남 지방병영을 설치하려고 구세군 총사령관 대령(정령) 허가두(許嘉斗)씨를 초청하여 논산군 강경읍에서 충남 각군 각지 병영병사들이 회집하여 총사령관 정령 허가두씨의 환영회를 개최하고 한국민족을 구원할 방침을 토의한 결과 우선 병사가 되려면 구세군 군가와 신약전셔를 준비하라고 하며 군복은 차차로 하게 하고 충남지방영은 홍주 갈산에 설치한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사령관은 상경하였다.

이제 구세군 병사가 되어 임천읍에 지영(支營)을 설치하고 활약하는데 의병으로 패잔병들을 입대시켜 구세군 병사로 편입 훈련하는데 경성본영에서 사관 참위를 파견하여 각 지영을 순회훈육하고 구세군 군가를 교습하며 신약전셔를 교습하는 중 천신에게 기도하며 애국적 의사로 구세의 목적을 강조함으로 성낙소 자신은 의지에 합당하기에 감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단체가 아닌가 의심은 있으나 구세군이라는 이름아래 병사와 사관은 계급적으로 참위, 부위, 정위, 참령, 부령, 정령, 참장, 부장, 대장이 있어 틀림없는 군대라 영국 구세군을 통하여 한제(韓帝)를 구원하겠다는 결심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더니 사관학생 시험을 보라고 해서 준비 중이던 경술년(1910)에 하잘것없이 한일합방이 되어 버렸으니 낙심천만으로 한때는 휴식상태로 있었다.

사관이 된 성낙소 참위는 열심히 근면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용기를 내었다. 구세군 사관이 되어 민중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겠다는 각오로 사관학교에 입학·졸업 후에 사관 참위가 되어 노방전도에 대중을 향하여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정치학대중에서 구출한 역사를 통하여 애족운동하며 영문내에서도 기도와 설교는 고사하고 사상운동만 하였다. 그런즉 신앙은 무엇인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으로 세인과 같이 할 짓은 다하였다. 이때는 세계 제 일차 대전이 휴전이 되자 미국 대통령 웰슨(Woodrow Wilson)씨가 평화강화 취지는 민족자결주의로 선포하자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한국독립을 선포하시고 국내로 연락하는 등 당시에 한폐제 광무황제(韓廢帝 光武皇帝)께서 돌아가시어 전 국민이 울적한 심정에서 일정의 엄중한 경계가 상설(霜雪)같았지만, 이승만 박사의 독립선포에 의하여 기미년(1919) 3월 1일에 대표자들이 독립선언문을 선포하고 독립만세를 전국적으로 호창할 때에 성낙소 자신도 때가 왔다고 하면서 활동을 개시하려고 할 때에 전주 지방령 구세군에서 영동지방령 영국인 쏘세벨 보로 영전되어 영동읍으로 이동하고 지방유지와 청년들을 망라하여 영동에서 독립만세를 전 시민들이 호창한 바 일병에게와 경찰대에게 사망한 사람이 21명이요, 중상자가 수십 명이었다.

그 후에 경찰서에서 조사한 결과 선동자 중의 한 사람이 성낙소 자신임을 눈치챈 일경을 피하여 즉시로 구세군 복장을 벗고 변장하여 야간 급행열차를 타고 경성 수창동 어느 과부 집에 잠복하여 만주와 상해로 몇몇 동지와 함께 가려고 하다가 동지 중 한 사람이 체포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지고 피신책으로 향촌에서 은거하면서 성경을 수양겸 숙독하는 중에 급기야 신앙의 싹이 나고 과거 생활을 회고한 즉 선악을 양심적으로 비판하면 선과악다(善寡惡多)하여 인격적으로나 종교도덕으로나 탐욕적인 동시에 신앙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죄악의 장지성중(將止城中) 시민으로 생활한 것을 대 각성하여 성서적으로 신앙생활하기로 결심하고 그 전에 진정으로 인도하려던 곽재근 목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즉시로 기차를 타고 대전 사택을 방문, 성서학원으로 입학하고자 추천서를 얻어 입학지원서를 제출하였더니 1개월만에 입학통지서를 받고 즉시로 상경하여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수양을 마쳤다.

그러나 성낙소 자신은 양심적으로 생각한 즉 신앙의 생활과 신성한 교역자의 생활을 하는 동시에는 명랑한 신분으로 출발하기 위하여 과거 구세군 교역생활의 부족과 신분상 결점을 원상 회복하는 것이 성경상으로나 신앙적으로 진선진미(眞善眞美)로 알고 구세군 단체에서 다시 신앙생활로부터 최하로 시작하여 하사관을 경유하여 완전한 복직으로 정사관이 되어 신분을 회복한 후에 당당한 교역자인 것을, 상제(上帝)전에는 신앙으로 철저한 회개자복을 하여 죄를 사유함 받고, 단체적으로는 복직함으로서 신분이 보증되었다.

 

제2장 자각적으로 신약교회의 명칭을 사용

1927년 정월 초에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에서 성낙소 자신이 기독교계를 시찰한바 기독교 각파가 기독 정신의 골자인 박애(博愛)로 속죄구령의 목적을 충각(忠覺)하고 각기 자파(自派)의 교세만 확장하려는 동시에 자파가 아닌 교회는 이단시할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심이 농후함으로 상대하는 입장에 소원(疏遠)함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성서 중 에베소서 4장 3~6절 말씀과 같이 칠종(七種)을 통일하자는 신앙으로, 첫째 몸도 하나요 하였으니, 몸은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킴이라(엡 1:23; 골 1:24). 교회의 명칭을 기독의 교회라고 통일하기 위하여 기독의 복음으로 동민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은 구습이 상존하고 소위 양반의 신분을 가진 연로자(年老者)들이 불찬반대(不讚反對)함으로 잘되지 않기로 남녀 청소년을 상대로 전도하여 점차적으로 효과가 발생되어 남녀 3·40명이 집회하는 농촌일우(農村一隅)에 광명의 서광이 어두운 심령들에게 밝게 비취어 기독교회가 창설된지 3년에 일본 동경에 있는 전일에 청년신자 한 사람을 동경신학교에 입학키 위하여 송치(送致)하였던 이 학생이 지급서신을 발송해 왔다. 개봉하여 본 즉 동경에는 30여년 전에 미국 선교사 커닝함씨가 기독의 교회라는 명칭으로 일본동경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데, 상면하고 이야기할 때에 어느 교회의 신자인가라고 묻기에 나는 조선에 있는 기독의 교회의 신자라고 한 즉 조선에도 기독의 교회가 있는가? 전도자는 누구인가? 청년 학생의 대답이 성낙소란 분이 구세군 사관을 사임하고 자신이 기독교회를 창설하였다고 하니, 그러면 성낙소 씨를 만나 볼 수가 있는가 하기로 서신으로 우선 의사를 물어보기로 하고 이 서신을 보내오니 일차 와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성낙소 자신도 동경에 가기를 원하는 차에 좋은 기회로 알고 즉시 회답하기를 도항증(渡航證)을 보내주면 속히 도일(渡日)하겠다고 하였더니, 얼마 후에 도항증과 선차 임금까지 보내주었다.

1930년 5월에 동경에 도착하여 커닝함 선교사와 면회한 즉 동지자(同志者)로 환영하고 자기가 안식년에 의하여 내일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니 요코하마시 미야다죠 조선인 교회(橫浜市 宮田町 朝鮮人 敎會)를 자기가 다시 올 때까지 일 년만 맡아서 전도하여 주면 감사하겠다고 하며 자기의 대리자인 선교사 J. T. 채이스 씨가 각 교회와 각 교역자들을 도울 것을 언급하고 명일(明日) 요코하마 출항부두에서 상봉하기로 하고 요코하마 조선인 교회로 부임하였다. 일야(一夜)를 숙박하고 다음날 선교사 커닝함 씨가 동경으로부터 요코하마 출항부두까지 도착하여 환송하였다.

성낙소는 요코하마 교회에서 재외동포들에게 열심히 전도하며 빈민굴에 심방하기와 요코하마시 시립 십전병원(橫浜市 市立十全病院)과 기타 각 병원에 입원한 동포 환자들을 방문하며 그리스도에게 대접하는 정신으로 위안과 성경말씀을 설명하고 기도함으로 환자들이 환희와 위안을 받으며 신앙 중에서 퇴원하고 교회에 출석하시는 분이 다소 있었으며, 교회가 재미있게 되어 대리 선교사도 매우 기뻐하며 잘 도와 주었었다.

 

제3장 실인(室人)의 병보(病報)와 귀국

1931년 4월경 하루는 야몽(夜夢)이 불쾌하여 본국에 처자가 불안한가? 의혹 중에 전보배달부가 현관문을 열고 전보요 하였다. 급히 수취하고 본 즉 실인병급속래(室人病急速來)라 하였다. 즉시로 교회제직을 소집하고 내환급보(內患急報)를 선언하고 귀국의 뜻을 표하였더니 쾌히 허락하고 여비를 지출하여 그 날 오후에 직행특급열차로 하관역(下關驛)을 경유하여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즉시 승선하여 귀국한 즉 실인(室人)의 병은 부종(浮腫)인데 난치병으로 위독하였다.

성낙소 자신이 의학자인 동시에 최선을 다하여 침약(針藥)으로 주야를 불구하고 1개월 간을 치료한 결과 완치되었다. 1년 간을 돌보지 못한 교회가 진실된 신앙에서 다시 돌아오신다는 서신을 통하여 위안을 받고 여전히 열심히 집회함을 칭찬하면서 1개월 간 인도한바 더욱 은혜를 감수하며, 기갈의 심령은 하시(何時)던지 진리의 말씀을 갈급하는도다. 그리스도의 인애와 은혜로 결합된 남녀 신자들을 다시 작별하고 반년 후에 귀국할 것을 약속하고 다시 일본 요코하마시 미야다 마찌 기독의 교회로 돌아가서 그간 귀국의 경과 보고를 하고 동시에 실인의 중병을 성심치료한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베푸사 주님이 일으키신 은혜를 감사하며 본국 교회에 교역자가 없어서 심령들이 기갈 중에 있는 것을 설명하고 기독의 교회에 교역자가 없는 것이 유감이라 하였다.

 

제4장 박해와 위험 백인(白刃=시퍼런 칼날)

1931년 5월경 1개월 간 휴가의 약속대로 본국에 임복(任復)하고 요코하마 교회에서 계속 역사하는데, 어느 분이 와서 교회 내에 불온분자(不溫分者)로 인하여 신자들의 심리가 혼돈 상태이니 잘 조종하라는 권유가 있으며, 그간의 경과 보고를 하는데, 성목사님이 귀국할 때에 주일예배 설교를 친우되는 주일학교 강의소 선생에게 위임한바 그분이 교파에서 집사가 된 호칭의 여자 집사 중 유력한 분에게 감언이설로 유혹하여 성낙소는 본국에 돌아갔으니 다시 돌아오기에 쉽지 않을 것은 실인의 병위(病危)라 하니, 만일 별세하면 자녀 양육문제로 자연 본국교회에서 사역할 것이니, 요코하마 교회의 교역자가 문제라. 우리가 예정치 않고 있다가 선교사가 누구를 임명하면 할 수 없으니, 제직이 자기로 결정 보고 하면 순조롭게 된다고 하므로 제직회를 소집하고 토의한바 남집사 1인이 언급하기를 교회에서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전 교회가 기도하고 연구하여 신성지(神聖旨)와 덕의(德義)로서 신앙적으로 합치되도록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며, 또는 지금 성낙소 씨가 귀국한 후에 아직 서신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차차 보아서 하는 것이 옳다 하고, 남자 1인이 말하기를, 만일 성목사님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과거에 구세군에서 동역한 관계로 친분이 많은 장 선생을 장차 교역자로 사용하려고 주일학교 강의소 선생으로 선교사에게 추천하여 외지(外地)에서 생활을 하는데, 성목사 후임은 장선생이 될터이니, 미숙한 과실은 지적하지 마시고 수일 후에는 성목사님의 서신이 오면 내환(內患)의 병세와 동향(動向)의 기세(氣勢)가 있을 것이니, 유찰(留察)하자 하였으나, 여자 집사가 여자 반에게 미리 계획한 기정방침을 진행하려고 한즉 남자 집사들이 교회의 말썽은 여자 집사인고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성경에 명령한 것이 이 까닭이라 하며, 여집사와 장씨의 행동이 신앙상 불온할뿐더러 배은망덕하는 악질적이라 하므로, 여집사는 자기 입장이 곤란하게 되어 불안한 감정으로 교회출석이 불량할 뿐 아니라, 남자 집사들을 비난하며 원망하므로, 교회가 자연 소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자애성(慈愛性)이 없고 집회 중에 불쾌의 공기가 충만하므로, 제직회에 여집사 경질이 있었다. 그 여자는 자기의 부족을 깨닫지 못하고 반감이 폭발하여 자기 척의자(自己 戚義者) 중에 남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수년 전에 경성 성경학원 양성생(養成生)이었었다가 중도 퇴학하고 일본에 가서 신앙의 타락으로 음주 방탕 생활하는 자에게, 교회 내에서 여자인 자기를 면직 또는 고독중(孤獨中)에 임(臨)한다 하며, 여자는 약하다고 멸시 천대하니, 원통하다고 하며, 교회에서 가련한 과부를 박대한다고 하소연 한 즉 그 남자가 기회를 보아서 혼지껌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니, 성목사님에게 혹 박해가 가지 않을까 함이라 하며,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격으로 그 여자를 방문하고 평화적 권유로 지혜롭게 하십시오 하였다.

성낙소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갱환(更環)한 동시에 그 계획은 몽상이 되었으니, 무관심하게 생각하고 여전히 교역을 계속하는 동시에 남녀 제직에게 매 금요일 야간에 성경을 공부하도록 하여 교수하는 중에 어떤 취객이 들어와서는 성가 놈을 죽여버린다고 하며, 성목사의 뒷면에서 착립(着立)하여 일본 단도로 성목사의 후두부를 찌르려는 찰나에 성낙소 자신도 교수에 정신을 집중하여 태연자약하게 열심히 설명할 때에 어느 여인이 아구머니 웬일이여 하며 벌떡 일어서며 취객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 순간에 칼이 전등광선에 반사하여 빛나며, 성낙소의 어깨와 턱밑으로 통하여 설상(雪霜)같은 백인(白刃=시퍼런 칼날)이 섬출(閃出)하였다. 성낙소는 깜짝 놀랐다. 좌중 남자가 그 취객을 밖으로 끌어내었다. 이 취객은 여집사의 친척으로 전일에 박해할 계획을 한 사람이었다. 그 후에는 남녀가 더욱 합심하여 신앙이 견고하여 지게 된 것이다. 성낙소는 동족에게 위험을 당한 후에 성서 중에 바울 사도의 본국인에게 위험을 당한 것을 생각하고 나 같은 것이랴?(고후 11:26).

 

제5장 본국에 포교 임명(1931)

선교사 대리 채이스 씨는 교역자를 성의를 다하여 방조호위(幇助濩慰)하는 중에도 여하한 생각인지 성군에게 더욱이 애호하는 표정과 장래 유망하다는 관념을 가졌다. 동시에 동경 삼하도(三河島) 기독교회 조선인 예배소에 교역자가 없었다. 선교사는 상당한 자격자를 소개하라는 표시를 조선인 교역자에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시로 조선 본국에서 장감성파(長監聖派)에서 각 교회 부흥강사로 활약하시는 김상준(金相濬) 목사를 소개하여 동경 삼하도 교회에 부임한 후에, 미국으로 안식하러 갔던 커닝함 선교사가 동경으로 돌아 온지 즉시로 피서지 경정택(輕井澤)으로 피서하러 출발하고, 우리는 동경과 횡빈(橫浜)에 있는 교파를 막론하고 조선인 교회는 연합적으로 삼하도(三河島) 기독교회에 집회하여 김상준 목사와 각 교회 목사들이 잠심(潛審=몰래 심사하는 것)하여 2주간을 연합부흥회를 하고 김상준 목사가 사경회를 인도하여 대 성황을 이루었다.

1931년 9월 중순경에 선교사 커닝함 씨와 채이스 씨에게 약속한 1년이 지나고도 반년이 되었으니, 본국에 있는 기독의 교회가 매우 약하여 귀국해서 전도할 의사를 표시한 즉 채이스 선교사가 1년 반 동안 성낙소의 교역한 경과 보고를 커닝함 선교사에게 진술한 후 일일이 사열검토하고, 성씨를 조선 전 지역에 포교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경성(서울)에 주재하면서 각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는 동시에 부여지방에 기설(旣設)된 교회(주: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2구 290번지에 1927년 1월 1일 화수리 基督之敎會를 세움)는 매월 순회하도록 하며, 각 지방에 순회하는 경비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커닝함 선교사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로서 선교사가 되어 일본에 선교하는 동시에 양 선교사가 상의 합의하여 조선 포교 책임자로 성낙소에게 안수파견(행 13:2-3) 하였다.

성낙소는 1931년(신미년) 9월 하순경에 귀국하여 본가에서 1개월 간 휴양하고, 그 해 11월 15일에 경성에 도착하여 계동에 거주하며 포교를 하려고 한 즉, 일제정책에는 포교하려면, 조선 총독부 종교과에 포교계를 내어 등록된 후에야 하는 고로 포교계를 내는데, 교회 명칭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매우 지연된 것은 기독의 교회라 함은 각 교파도 기독의 교회이니, 기독의 어떤 파라고 하라 하므로, 성낙소의 답은 우리 교회는 교파가 아니고 초대의 교회가 기독의 교회이며, 기독의 각 파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니, 제출한대로 등록하여 주기를 원한다고 수삼 개월을 힐난하다가 관리들도 어찌할 수 없으니, 성목사의 임명장을 휴대하고 출두하라고 하므로 지참하였더니, 열람한 결과 동경 요츠야 선교회(東京四谷宣敎會) 기독의 교회 선교사 커닝함이라고 싸인한 것을 보고는 이와 같이 증정(證正)하여 제출하라고 하기로 동경 사곡 선교회 기독의 교회라는 명칭으로 제출하였더니 즉시로 등록되어 포교를 활발히 하여 계동, 공덕동, 청엽동, 내수동, 인천 송현동 외 2곳과 평북 구성(平北 龜城)에 기독의 교회를 1년 반 동안 7개 교회를 설립하였고, 부여 지방에는 기성(旣成)한 교회였다.

재미있게 발전도중에 동경 심천교회(東京深川敎會) 교역자 이인범(李寅範)이 고향인 황해도 곡산을 방문하는 중에 조선에 귀환하려던 전일에 욕망하였던 것을 재차 발전(發展)키 위하여 동경으로 가서 선교사에게 그럴듯한 모략을 하되, 성군이 본국에서 자기가 포교관리자가 되어 교파를 조직하였다고 보고 한즉 커닝함 선교사가 즉시로 성에게 해직통고서를 발송한 후에 모략자가 후임하였다.

 

제6장 포교관리자와 동지 김상준 목사 결탁

일제 관하인 조선 총독부 종교과에 포교계를 제출 등록한 후에야 비로소 포교를 하므로 상술한 바와 같이 임명 사령장과 함께 동경 요츠야 선교회 기독의 교회라는 명칭으로 제출 즉석 등록 동시에 동경 요츠야 선교회 기독의 교회 조선 포교 관리자 성낙소로 승인되어 조선 내에는 각 지방 전도 및 교회를 설립할 때에는 관리자가 포교계를 제출하도록 종교법령이 성립되어 있어서 대 교파의 관리자나 동등의 권위를 행사하므로 모략자가 이에 대하여 명예욕이 발생하여 커닝함 선교사에게 모략한 사실이 있었다.

이 사람은 성씨의 후임이 되어 조선 선교회 기독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였으니, 동경 요츠야 선교회 외의 이름으로 하는 양심은 무슨 양심일까? 성군 후임자의 장래는 어떨까? 불과 수년에 이인범은 그 단체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명목하에 합류하여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하고, 해방 후에 장로교파 전북 여산읍 교회에서 가련한 처지가 되어 폐병으로 장구한 세월을 고통받다가 사망하였다.

성군이 포교 관리자로 있을 때에 한일합방의 성공자 이등박문사(伊藤博文寺)를 장충단에 건축하고, 일본 총리대신이 출장하여 낙성식을 거행할 때에 각 단체와 종교단체 수뇌자를 청첩하여 참관하면서 한시절구(漢詩絶句)를 지어서 읊었다(作吟).

奬忠壇上奬忠蹟, 爲國忠心同一義
韓賊和忠是博文, 安君何事不惱動

성군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도를 전파하던 중에(딤후 4:2) 전일 동경에서 귀국할 때에 김상준 목사님과 내약하기를 성낙소 자신은 먼저 귀국하여 경성에서부터 각 지방까지 교회를 설립할 테니, 김목사님은 추후로 귀국하시어 신의주로부터 부산까지 전 조선 각 교회 중 200명 이상 집회하는 곳에 교파를 막론하고 부흥사경회를 하도록 기독신보와 활천잡지(活泉雜誌)에 광고하여 김상준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자 고한 후 전 조선을 통과하여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매 1인당 1원씩을 헌금하도록 하여 경성부근에 야지(野地) 만평 가량을 매수(매 평당 가격 3전)하여 우리 손으로 신학교를 건축하고(왕하 6:14), 김목사님이 교장이 되시고, 동지자들을 청하여 교수하고 기타는 신학교 선생을 강사로 시간 교수하도록 하며, 양계, 양돈, 양봉, 양어, 야채농, 과수원, 화초재배, 우유목장 등을 신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실습하여 기숙, 식사하도록 하여 졸업 후에는 각지 농촌교회를 교역하되 농촌개량운동에 정말국(丁抹國)과 같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토지를 사랑하고, 셋째 가정을 사랑하는 기독의 교회가 되어 영적 신앙과 육적 생활을 보존하여 삼천리 강산을 복음화합시다 한즉, 김상준 목사님은 희색이 만면하면서 감사한 뜻과 감격한 어조로 "나의 평생소원과 포부의 복안을 발생하시니, 나는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성목사님이 선차 귀국하시어 착수하시면 오역종차 거의(吾亦從此 去矣)하리라 하시며 우수로 성의 우수를 견고한 약속의 표시로 유력(有力)하게 착수(着手)하시고 작별하였다.

성은 김상준 목사를 신앙의 동지로 신뢰하고 이상의 약속을 성취키 위하여 분투하던 중에 의외에도 모략으로 인하여 선교사의 후원이 중단되어 단독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뜻밖에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해가 저물어 귀가 한 즉, 어떤 신학생이 명함을 주고 갔다 하여 실인이 명함을 주기로 취견(取見)하니, 동지 김상준 목사의 명함이라. 내용은 명일 9시에 성서학원으로 오시어 나의 신병이 위중하니 성형이 진찰 처방하여 귀가하는 대로 치료해 주시오 라 하였다.

다음날 1시간 전 8시에 달려갔다. 명함을 전달한 학생 최집사라는 형제를 찾아 김상준 목사님의 숙소를 물으니, 오계 동제(五階 東齊) 7호실이라 하여 올라가 본 즉 빈방이었다. 누구에게 묻고자 하나 그 시간은 성결교회 연회중이라 대 강당에 모여있어 한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아래층에 내려와서 누구에게 물은즉 "네. 김목사님의 병증세가 야간에 악화 위급하시어 7시경에 경성역으로 갔는데, 8시 급행차로 귀가하신다고 하셨는데, 조금 전에 발차 기적성이 들렸으니, 이제는 멀리 가셨을 겁니다."라고 한다. 성은 낙심천만으로 귀가하였다.

김상준 목사님은 가자마자 본댁에서 별세하였다. 그 후 소식을 듣건대 동경에서 성과 결탁한 약속을 실현할 용기를 가지고 귀국하여 기독신보와 활천잡지에 부흥강사 초빙광고를 내고, 안동현(安東縣) 조선인 교회에서부터 신의주 선천, 정주까지 쉬지 않고 계속 부흥회를 하신 바, 노쇠한 몸으로서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하모로서 신체는 부지중에 극도로 쇠약하여 초기에는 소변색이 적황이더니, 얼마 후에는 소변 출혈이 되어 기력탈진으로 즉시 상경하여 성목사의 의학의 특수기술을 알고 진찰하려는 것과 적회(積懷)를 설화(說話) 하고자 한 것. 병세가 급전악화(急轉惡化)함으로 자기 생명이 시간문제임을 자각하고 이날 급행차로 귀가치 않으면 객사할 것 같아서 귀가한 것이다.

얼마 후에 경성 무교동 성결교회당에서 고 김상준 목사 추도식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정각에 참석하였다. 그 교회는 고 김상준 목사님이 창설한 것이요, 성결교회를 조선에 시작한 원로자 중 1인인 고로 이 단체에서 이 교회당에서 추도식을 하였다. 성군은 말석에서 무언의 추도와 추억을 하면서 부지중에 뜨거운 눈물이 쏟아짐을 금치 못하였다.

동경 약속은 중대하지만, 그렇게 무리하게 노력한 것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기독의 교회 신학교 설립할 동지자를 상실한 것이 더욱 애닲아서 낙망 중에 빠졌다. 얼마간은 무위적(無爲的) 상태로 지내다가 묵상과 기도 중에 하나님이 상사(喪事)라면 낙망할는지 모르거니와 김목사가 상사한 것으로 낙망하는 것은 생존하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각이 생겨 하나님이 동역하심을 견고히 신앙하고 용기를 회복하고 용전분투하였다.

 

제7장 기독의 교회 선교사와 신학교 시작

1936년 4월경 어느 날에 김문화(金文和)군이 내방언급하기를 기독의 교회 선교사 채이스 씨가 성목사님을 월여전(月余前)부터 두루 찾고 있다고 하며 명일 9시에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다음 날 동반하여 서대문 밖 송월동 32-6번지에서 채이스 선교사를 상봉하니 7~8년 전에 동경에서 작별한 친우였다. 수년간 헤어져 지낸 이야기를 나누고 즉시로 선교사가 권고하기를 기독의 교회 교역자가 기독의 교회 신학을 하지 않으면 허사이니 오늘부터 신약시대의 교회를 찾는 신학교에 입학하라고 하므로, 이 날부터 신학교를 설립하려던 자가 신학생이 된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모든 일이 합동하여 유익하게 되나니(롬 8:28) 하셨으니, 자신이 기독의 교회 신학을 수료하고야 교역을 할 것이요, 신학교를 설립할 것이다. 신학에 수양하는 동시에 우리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은 심령(엡 2:1)이 중생부활의 은혜 곧 구원의 방법인 믿고 회개하고 구중고백하고 침례 받아야(막 16:16; 행 2:38; 8:37) 성서적 구원을 받는 동시에 성신을 선물로 받아 영혼이 중생하였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이처럼 오묘한 구원을 얻은 것이 자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이라. 과거를 회고하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하는 줄 알고, 열심히 전도하되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는데, 얼마나 부족한 전도인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에게 최종적으로 사명을 주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5-16) 하였으니,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하지 않고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한 것은 믿음과 침례는 주님의 구원 방법이요, 최후 명령이니 전등의 양 선과 같이 침례만으로도 아니요, 믿음만으도 아니요, 신앙과 침례로서 구원한다. 이와 같이 기독의 교회 신학을 4년 간 졸업을 하고 신약교회 교역자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졸업일자는 1940년 3월 25일(51세)이다. 기독의 교회 신학을 수료한 자가 5인이다. 성함은 다음과 같다. 김요한(金約輪/與範), 최상현(崔相鉉), 김문화(金文和), 성낙소(成樂紹), 박판조(朴判祚) 등이었다.

 

제8장 교회 명칭을 성서 중에서

당시에 강문석(姜文錫) 형제와 긴밀한 교제를 하였다. 이 형제는 한국에서 감리교 신학을 마치고 목사로 수년간 교역하다가 미국 감리교 고등신학을 수료하고 미국 각 지방 교회를 견학하다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참여하여 설교를 듣고 신약시대의 교회와 현대교회의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성서 중에서 분석하는 동시에 사죄 구원 방법을 깨닫고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복음을 전하는 형제로서 동일한 신앙동지로 수년간 밀접한 교제 중에 기독의 교회 신학과 신약 중 근본적 교리를 학론(學論)하며, 그 형제를 청하여 집회하고, 성낙소 목사가 강형제가 관리하는 교회에 가서 집회하며, 유일(唯一)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지역에 실현하는 중 선교사들과 우리들이 회합하여 조선에서도 교회 명칭을 성서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마 16:18; 롬 16:16)로 하기로 택정 하였다. 교회의 터도 그리스도요(고전 3:12), 교회의 몸도 그리스도요(엡 4:4) 하였다.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우리들이 각자의 의견이나 사상은 다 버리고 성서 그대로 신약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기로 내외국인이 일치결정하고,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신약시대 교회 환원운동하기를 토마스 캠벨 씨와 불변적으로 환원운동을 계승하기로 하였다.

 

제9장 대동아 전쟁과 교회 박해

1940년 12월 8일 미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모처럼 그리스도의 교회 통일 운동이 전개되려는 때에 공중의 집권자인 정치적 통일운동의 전쟁 계획이 싹이 나더니 마침내 세계 제1차 대전이 발생하였고, 또한 소위 대동아 전쟁 곧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려 함에 따라서 일본 제국 정권을 대동아에 집행하려는 동시에 일본제국 국민 통일운동을 일본 대마신(日本 大魔神)으로 숭배상(崇拜像)을 삼도록 엄명을 발표하는 동시에 조선은 일본의 영토인고로 총독부에서 강제적 시행령을 내려 매우 삼엄하였다. 기독교 각파를 종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명칭으로 통일시키고 대마신(大魔神)을 숭배하도록 하려고 각 교파에게 통합명령을 하모로 경진년(1940) 가을에 각 교파 수뇌들을 경성 서대문 2정목(현 신문로 2가) 피어선 성경신학교 내 장로교 총회장 사무실에 집회함으로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대표자 김문화, 최상현, 성낙소 3인이 초청에 의하여 참석하였다.

개회한 후에 각 교파별로 합동 가입 승낙을 요청하므로 타 교단은 모두 가입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파가 아니요 신약시대의 교회로서 교파들과는 합할 수가 없다고 성낙소가 강변하였다. 그 때에 회중은 순간에 조용하였다. 그런데 어떤 자가 말하되 교회를 유지하려면 가입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포교활동을 못하게 될지도 모르오 하였다. 그러자 각 교회 대표자들이 여출일구(如出一口)로 그렇다는 표시로 다시 권하였다. 우리는 총의를 존중시하는 표정으로 더 생각한 뒤에 통지하겠습니다. 하고 다 퇴장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서 경기도 경찰부에서 성낙소를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성군은 묵상하는 중에 얼마 전에 한 교역자가 경찰부에서 심문을 받다가 얼마나 지엄(至嚴)하였는지 귀가 3일만에 사망한 사실을 목견하지라 나도 물론 그런 심문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도하면서 내 생명은 하나님께 위탁하나이다 하고 출두하였다. 당무자가 엄격한 안색과 어조와 냉정 또는 맹렬한 눈초리로 질시하면서 왜 국가의 명령인 교단에 가입을 거절 반대하였는가 고 심문하였다. 성군은 평범스런 어조로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여 서기 30년에 예루살렘에서 3,000명으로 시작한 그리스도의 교회인고로 연대와 장소와 설립자가 상위한 교파와는 상합(相合)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죄가 되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당무자가 말하기를, 그러면 관청의 명령에 불복종한 죄는 알고 있는가? 성군은 다시 말하되, 발령 공포한 신문에 본 즉 각 교파들이 연합하여 통일목적으로 한 교단을 이루도록 권유한 것 뿐이요, 가입치 않으면 죄벌이 없는 동시에 죄로 생각지 않습니다. 또한 예를 들면, 캐도릭 교회는 연합 가입하라는 명령이 없으니 우리는 캐도릭 교회에 비할 바가 아니로소이다. 당무자가 말하기를 캐도릭 교회는 구교요, 기타 교회는 열파(列派)인 신교이니 신구교파를 합하라 할 수 없으니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성군은 용기가 생하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기원 30년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시어 예루살렘에서 창설하였고, 캐도릭 교회는 기원 166년경에 제스테니안(166년에 로마에서 순교한 저스틴Justinus Flavius를 두고 한 말로 여겨짐)이란 자가 로마에서 시작하였으니 캐도릭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교회로서 우리 교회는 구교의 구교이니 신교파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으니 양해하심을 바랍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함이요, 우리 단체의 의사가 아니니 당국에서 관대한 처분하시기를 원합니다. 당국자 왈, 이유와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므로 할 수 없으니 그 대신 포교권의 폐지를 명한다 하기로 당국의 처분이지요 라고 해서 심문은 끝나고 그들의 사무에 의하여 얼마간 묵묵히 있어 생각하니 주님의 말씀이 뇌수에 떠올랐다.

사람이 너희를 끌고 가서 가둘 때에 어떻게 말할 것을 미리 염려치 말고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대로 말하라. 대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니라(막 13:11) 하신 말씀이 오늘 나에게도 응하시었다고 심중에 감사하며 회감적(悔感的)이었다.

양구(良久=조금 있다가, 한참 뒤에)에 당무자가 오늘은 돌아가라 하기로 즉시 환가하여 이번에는 난관을 돌파하였으나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있을는지. 그럭저럭 수일이 지난 뒤에 종로 경찰서 고등형사가 방문하여 친절히 말하기를 서에서 잠깐만 오라고 하시니 함께 갑시다 하면서 동반을 요청하였다.

그때에 성군은 심리가 매우 눌리었다. 그러나 기도 중에 힘을 얻고 고등형사실에 출두하였다. 일본인 고등형사가 심문하기를 경기도 경찰부에서 포교계를 취소하였는데 어찌하여 일요일 주야와 수요일 야간에 여전히 집회하였는가라고 물었다. 성군이 대답하기를, 조선 총독부 종교과에 포교계에 7가지의 포교방법을 제출한바 있는데, 그때 승인한 것을 취소한 것이니, 그 7가지 중에는 주일예배와 수요일 밤 기도회는 기입한 일이 없는 고로 신자들의 예배와 포교 종목과는 무관한 것이며, 신자들의 예배하는 것은 어느 나라의 법령에도 자유인 동시에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별안간 빰을 치는데 안구에서 불빛이 번쩍하며 정신이 혼미하던 중 재차 여러 번 강력하게 타박하여 안구가 노출하는 듯 하였다. 혼돈하여 의식 없이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짐으로 발길로 몇 번을 찾다. 앞정갱이에서 피가 나왔다. 감각이 없었다. 얼마 후에 의식이 돌아오니 다시 의자에 앉게 하고 욕설로 미국 놈과 상종하는 악질놈이라 하였다. 이것은 일미전쟁(日美戰爭)의 내용을 암시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이놈아 비행기로 미국 가서 살라 하였다. 성군이 그 말을 듣고 분기가 충천하여 조선은 우리 조국인 국토이다. 국토를 버리고 어디로 가라 하느냐 하였다. 형사는 무엇이 어째 (난다 고라) 하면서 난타하모로 일시 혼돈 질식하였다.

그 때에 고등형사계 부장이 조선인인데, 이 사람은 전일에 폐병으로 근무상 불능한 때에 성군의 의학적 기술로 진찰 처방하여 치료 득효 출근 중이었다. 그런 은혜를 생각해서인지 용서한다는 의사로 유치장에 집어 넣으라는 것을 노인이니 특별히 귀가하라고 하였다.

그 당시 각 교파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에 가입하여 합동 통일시킨 후에 일본 대마(大魔)인 천조대신(天照大神)에게 봉헌참배(奉獻參拜)하는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교단에 가입치 않은 것이 성서적 신앙에 입각한 것을 알지 못하고 반일적 사상자로 지목한 까닭에 무조건 구타 치상한 것이다.
오호라 조선 교단이여, 일세기간(一世期間) 기독교 선교 사업이 하루아침에 일본 대마신의 자녀가 되어 버렸으니, 아마도 성신의 말씀대로 타신 우상을 경배하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경계하였으며, 이 민족에게 불원한 장래에 필연적으로 대환난을 면치 못할 때가 오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제10장 자급적 전도와 조선해방

대동아 전쟁과 함께 선교사는 본국으로 귀국하여 경제적으로 빈궁할 뿐 아니라, 국가 체제에 의하여 신궁참배(神宮參拜)로 교회들은 박해를 받아 미약할 대로 미약하였다. 그런고로 성군은 경제적 타격을 극도로 받아 여하한 도리가 없었다. 차제에 전일의 상근자(相近者)가 내방하였다.

비상한 전시체제에 신앙의 박해와 경제문제로 생활의 빈궁에서 노래(老來)에 감당치 못할 것이니, 의학에 능숙하신 기술이 있으니 의약업을 하시면 생계는 될 것이니 그리하시오. 성군은 문재지승격(聞齊之僧格: 마음에 구수한 말을 듣고 달려가는 사람을 비유함)으로 희미(喜眉)가 선용(先聳)하여 적당한 말이지만, 자본이 있어야 설국(設局)을 하지요. 방문자 왈, 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소자본은 대여하겠으니, 우선 일천 원을 제공하리다 함으로 그 날부터 방매약국(放賣藥局)을 구하여 일천 칠 백 원으로 설국하여 의약업을 시작하니 다수 환자가 운집하여 상당한 특효를 내어서 명성이 선양(宣揚)되는 동시에 생계도 자연 면궁(免窮)이었었다.

내인거객(來人去客)에게 주님의 복음을 선전하며 교회를 충성으로 봉사하며 박해 중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보존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에 가입치 않고, 일본 신궁참배에도 불응하였고, 매 주일에 성스러운 주님의 만찬을 성의를 다하여 신령하게 행하였으며, 진리로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스러움을 가시밭에 한 떨기 백합화와 같이 결백과 향기를 무궁화 동산에 발휘하였다. 각 교파는 자파 명칭을 취소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였다.

공중의 집권자의 사자인 정치자의 권세로 합동통일이 실천되었다. 그로부터 3년 반이되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패배 항복하는 동시에 조선은 자연 해방되자 각 파, 종파, 교회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존속하기 위하여 옥중타살 또는 아사자(餓死者)가 다수요, 아직 옥중에서 신앙 사수자가 다수인 동시에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으나 각 파에서 신궁참배자들이 교권을 잡고 있는 터라, 그 직위를 빼앗길 가봐 그러는지 출옥 동역자들을 환영키는 고사하고 도리어 반대하는 현상이었다.

오호라. 오, 주여 살인 죄수 바라바는 석방하고 의인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하던 바리새교인이 현대에도 양적음적으로 계속 됨을 보오니 어찌 하오리까. 회개하고 바른대로 돌아와 너희 죄를 없이함을 받으라(행 3:19) 하신 명령과 너희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선물로 성령을 받으리니(행 2:38) 하신 말씀에 순종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호소하였다.

 

제11장 각파 합동통일 운동과 교파고집을 한탄

조선이 일제의 학정에서 해방하자, 기독교계 각 교파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단체에서 자연 해방되어 각각 자파 명칭으로 간판을 내거는 동시에 상술한 바와 같이 신궁불참으로 투옥되었거나 숨어서 지낸 남녀 교역자 및 신도들은 교회에서 불환영으로 인하여 할 수 없이 자파 중에서도 각기 집회를 따로 하고 이름하기를 재건교회라 하게 되었다.

성낙소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일의 교회요, 성서 중에 명기되었으니,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자와 교회는 이 때에 각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통합하자는 합동 선언문을 발표한바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리스도의 교회 합동 선언문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창립하신 교회로 오늘날 각각 분열된 기독교 각 교파는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도록 주 예수의 성지를 순응하여 합동 통일 운동을 선언하노라.

요한복음 17장은 주 기도문인 것을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아시는 바인 동시에 11절 하반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사람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사 하나이 되기를 우리가 하나이 됨 같이하게 하옵소서" 하시고, 21절에 "저희로 하여금 다 하나이 되게 하사" 하시고 또 23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화를 내가 저희에게 주어 하나이 되게 하기를 아버지와 나와 하나이 된 것 같이 하오니." 이와 같이 3차나 모든 신자 성도들이 하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적으로 기도하실 줄 믿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한가지 말로하고 상호 분쟁하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완전히 합하라." 하셨고, 또 12-13절에 "이는 무타(無他)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속한 자요,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 자요, 나는 게바에게 속한 자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여럿이 되며, 바울이 어찌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하시었으니, 이는 신약시대부터 교회분열이 생길 위험성을 경계함이다. 지금은 모든 신자들이 각각 말하되, 나는 희랍교에 속한 자요, 나는 카톨릭에 속한 자요, 나는 성공회에 속한 자요, 나는 장로교에 속한 자요, 나는 감리교에 속한 자요, 나는 성결교회에 속한 자요, 나는 구세군에 속한 자요, 기타 각 교파에 속한 자라하고 그 단체의 헌법과 장정 규칙을 존중시하고, 성서는 그 다음으로 생각하여 분열됨으로써 분쟁하는 것은 사실이 증명되고 있으니, 성 바울이 기록한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구분 설명이 요하지 않는다. 만일 교파 자체로나 신자 자신으로서 합동 통일을 반대하거나 부정한다면, 주님의 기도를 무시하는 자요, 성 바울 사도의 합동 교훈을 부인하는 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생각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부인할 신자나 교파는 없을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기약이 왔은즉, 다 통일하여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기약이 찰 때에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통일하여야 한다" 고하였으니, 이제 기약이 찬 때가 왔다. 만물도 통일할 것인데, 그리스도 신자가 통일치 못하면 만물들에게 부끄럽지 않는가? 다시 조선교단의 실정을 살펴보면, 우리 조선의 각 교파나 교회가 악마 왜정시대에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日本基督敎 朝鮮敎團)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통일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마귀의 명령으로 합동하여 신사참배하는데 통일 공작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즉 악마에게는 굴복하여 신사참배의 합동 통일은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대로 각 교파 신도의 통일을 부인할 수 있을까? 만일 부인한다면, 주님의 성지인 성경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삼가 조심하라. 그런즉 합동 통일을 함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인가? 덮어놓고 합동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면, 신약시대의 교회를 찾아야 한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신약성경 중에서 찾아야 한다.

1. 교회 창립자와 머리를 찾자 -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마 16:18; 엡 5:23). 각 교파의 창립자와 머리는 누구인가? 카톨릭은 저스테니안, 성공회는 헨리 8세, 루터교는 마틴 루터, 침례교는 코날드 그레벨, 장로교는 존 낙스, 칼빈교는 칼빈, 감리교는 요한 웨슬레, 구세군은 윌리암 뿌드, 성결교는 카우만이다.

2. 교회 명칭과 터를 찾자 - 그리스도의 교회가 바른 이름이며,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다(마 16:18; 롬 16:16; 고전 3:11). 그러나 각 교파의 명칭은 성경에 전혀 없다.

3. 교인의 명칭을 찾자 - 오직 그리스도인이다(행 11:26; 갈 2:24; 벧전 4:16). 그러나 각 교파교인의 명칭은 성경에 없다(장로교인, 감리교인 등 . . . ).

4. 교인이 되는 방법을 찾자 - ㄱ)믿고 침례받음(마 28:19; 막 16:16). ㄴ)회개하고 침례 받음(행 2:38). ㄷ)신앙을 고백한다(행 8:37). 그런즉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 받으면 사죄 구원하는 동시에 성신을 선물로 받는다. 침례는 죄의 몸이 죽고 부활과 신생을 얻는다(롬 6:4; 골 2:2). 물과 성신으로 중생한다(요 3:5). 약식 세례는 성경에 없다. 이는 기원 75년에 로마법왕 스티분 2세가 애돌프스의 집에 시작된 것이다.

5. 침례는 누가 행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찾자 - 목사, 집사, 성도들이다. 침례 받은 자는 누구나 행할 수 있다(행 2:38-41; 8:38; 9:17-18). 이상은 사도 집사 빌립이, 성도 아나니아가 시행하였음. 목사만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은 교파들의 주장이다.

6. 그리스도인이 되면, 첫째로 하나님께 예배한다. 예배일을 찾자 - 칠일 중 첫날은 주일이요, 일요일이 아니다(행 2:41-42; 20:7). 이 날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일곱째 안식일 다음날인 오순절 날 성령 강림하신 날이요,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 침례 받아 제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날이 주일이요, 유대교에서 지키는 안식일이 아니다.

7. 신약시대 교회에서 주일을 예배 일로 지켰는가? 주님의 부활과 십자가를 기념하는 주의 만찬을 위해 모였다(행 2:41-42; 20:7). 주일에 주의 만찬을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안식일을 지켜 유대교인 율법으로 돌아감이 어떨까?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교가 아니다.

8.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성경만 믿는다. 성경 이외에 헌법이나 규칙은 죄가 된다(계 22:18).

이상에 대하여 더 알고자 하거나 깊이 연구하시려면 성경에 나타난 신약교회로 오시면 됩니다. 여러 교파와 교인들이여 우리 모두 교회의 합동 통일 운동을 위하여 힘을 합칩시다. 다른 교파에서 신학을 마친 교역자들은 우리 신학 별과를 단기로 수양하니 같이 합시다. 환영합니다.

서기 1946년 8월 일
서울 사직공원 내 그리스도의 교회 성낙소 선언서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 합동선언문을 남한 각 교회에 발송하고 각 교역자는 상면하는 대로 전도하고 설명하여 다소 동의가 있는 분을 회집한 즉 30여명 교역자로 각자 소속 단체는 20여 교파 교역자라. 중앙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회합하여 토의한 결과 교회명칭을 성경대로(롬 16:16)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기로 가결하였고, 침례와 주의 만찬에 대하여 제안한바 누차 회의하였으나 갑론을박에 가결치 못하고 각 교파 합동 통일의 회의가 자연 유회로 휴회도 아니요, 해산도 아니고 무기 유회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회의에서 각 교파 독신자 청년남녀들을 야간 신학으로 수양하여 교역자를 산출하자는 의견이 일치한바 있었는데, 중앙 기독교 청년회관내에 야간 중앙신학을 설치하였고, 합동통일운동의 모임은 유회하였다.

교회나 교역자는 교파적 신앙으로 굳어져서 성서적 신앙으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뿐인 것을 각성하기는 고사하고 염두에조차 없었다. 일제시대에 교파적 신앙으로도 죄가 되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합동통일하에 신궁참배는 하면서도 신약의 교회로 합동통일하자는 데는 반대하고 비성경적인 교파 신조를 고집함은 신약시대의 바리새파 신자와 사두개파 신자들이 자파를 고집하고 그리스도를 반역한 사실과 무엇이 다른가?

바리새교인들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보다 나은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하였다. 오늘날도 교파 교회신자를 의로 생각하고 성경 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호라! 소위 구교파 중에도 우상과 하나님께 혼합 예배하고, 소위 신교파 중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본 대마 신궁참배 행위야말로 입으로는 주를 부르면서 주님 말씀은 따르지 않고, 신혼(身魂)으로는 우상과 마귀에게 예배하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가증스런 일이 아닌가. 또 다시 말하노니 신구교파들아, 회개하고 자복하며, 아바 아버지 하나님께로 귀환하여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할지어다.

 

제12장 선교사 내한과 신학교 제2회 시작과 6·25 남북전쟁

 1948년 1월에 선교사 채이스 형제가 한국 선교를 복구하기 위해 내한하였다. 선교사의 주택이 일제시대 때 본국 소환에 의하여 귀국 시에 하인(何人)에게 가옥을 보장키 위해 세를 주어 가옥 세금과 수도 전등세 등등을 납부케 하고 입주시킨바 있었는데, 거주자가 일제 정부에 이 가옥은 미국인의 소유이니 적산(敵産)이라 불하하여 방매하도록 하고 거주자가 매수하여 거주하고 있었음으로 한국 정부에 수속을 하여 다시 반환 받았다.

존 제이 힐 선교사도 내한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부를 복구하게 하였다. 채이스 선교사는 1949년 3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를 다시 하되 존 제이 힐 선교사로 교장대리, 최상현 목사로 교감, 성낙소 목사로 교수로 각각 임명하고, 채이스 자신은 본국에 가서 선교자금을 대규모적으로 모금하여 한국 선교 사업을 활발히 하기로 작정하고 동년 3월에 귀국하였고 신학교는 3월 28일에 개학하였다.

1년 간을 진전하여 활발하던 중 1950년 6월 25일에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여 서울 6월 28일 4시에 입성하여 전부 소탕하고 남으로 진격하여 진주와 마산을 점령하고 대구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동시에 미군과 연합군이 상륙 반격하여 낙동강 전투에 공산군이 몰사하고 대패하므로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국군과 U.N.군이 북진 공격하여 신의주와 청진까지 도달하였다.

3개월 간 서울시 치안을 확보하는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인 존 제이 힐도 일본 동경으로 피난하였다가 가족은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만 귀환하여 우리와 같이 신학교를 복구하는 동시에 각 교역자 생사와 행동과 신학생들에게 생사 행동을 조사케 한바 있었는데, 최상현 목사는 불행히도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끌러가고, 김양순(金良淳)은 생사부지(生死不知)요, 행방불명이며 이 모 학생은 전북 익산군 위원장으로 공산당으로 간 사실이 있고, 박 모 학생은 형제간에 형은 인민군 의용군으로 갔고, 동생은 민청위원장으로 대 활약하다가 국군 입성 후 체포되었고, 한 모씨는 방공생활로 은거 피신하였고, 이 모씨는 내무서원에게 2~3차 의용군 모집에 응하도록 강요받았으나 위험 중에서 탈출 무사하였다.

성낙소는 1950년 10월에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 교감에 피임되었다.

 

제13장 공산정치 3개월 간의 위험

1950년 6월 23일에 신학교 하기방학을 하는 동시에 성낙소 회갑일이 임박하여 바쁜 가운데 학생들과 동역자들이 머물러 있던 중에 6·25(일)에 공산군이 38선을 돌격 남침하여 6월 28일 새벽 2시경에는 일부 서울 입성한 즉, 정부는 부산으로 천도(遷都)하고 미처 남하하지 못하고 뒤떨어진 정치요원들을 체포 투옥 혹은 학살하고 기타 청년단체 학살투옥 등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기독교계에도 정치적 마수가 뻗치어 소위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각 교파를 합동 통일시켜 정치적 앞잡이로 사용하려고 교회마다 민주동맹에 가입하도록 강권하였다.

대동아 전쟁 때에 박해를 당한 것과 같이 또 난관에 봉착하였다. 가맹치 않으면 필히 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일정시대에는 신궁참배 문제로 신앙투쟁과 동일한 입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타 교파들과 합류하지 못할 분명한 이유는 신구교파는 주님이 창설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분열된 고로 교파들이 본 교회와 합동 통일은 원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파와의 합동은 죄로 알기에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제시대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이름아래 합동하라고 하였으나 허락치 않았고,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연맹이란 이름으로 연합하자고 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입하지 않은 이유는 일제시대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합동한 후에 신사참배하였듯이 한국기독교연합회로 연합한 후에 또 무슨 일을 할 것인가 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얼마 후에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무기를 청구하였으며, 시위행렬에 공산당을 때려 부수어라, 죽여 없애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런 운동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였으니(롬 12:19)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 만일 원수가 있다면 우리가 갚으려고 하지말고 원수를 위하여 회개 축복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보수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과거에도 그런 일을 보았다.

대동아 전쟁 때에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신궁참배 하도록 조선교단에 가입하라는 것을 불응하였더니, 우리를 모해하려고 박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대로 우리의 원수를 보수하시되 미국 외 수 개국을 명하시어 원자탄으로 공격하여 우리를 해방하셨다.

그런즉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타 교단과 합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기독교민주동맹에 가맹하라고 하나 우리가 믿는 성경말씀에는 당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가맹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고 한즉 위협하던 자가 어조를 낮추어서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관계치 않겠다는 것이냐 하였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다른 종교 단체와는 일체 관계치 않는 교회이다 고하였다. 이 때에 여차(如此)한 언어수작(言語酬酌)은 성군 자신이 하였는지 일제시대에 심문 당할 때보다 몇 배 이상의 신경이 긴장하여 죽느냐 사느냐 산다면 영생의 삶뿐이었다. 그 후 얼마 후에 인민군 대위가 부하 몇 사람을 대동하고 야간 돌입하여 가택을 수색하며 태극기와 라디오와 기타 몇 가지를 압수하고 오랜 시간을 심문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말만 하고 인민공화국정치에서는 종교와 신앙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가 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앙은 자유라 하기로 경탄적으로 과연 그런가 고하면서 어느 사이 부지중에 전도적으로 변론하게 되었다.

그들을 대하면 공포심의 감정이 앞선다. 매일 황혼 때에 청년 2~3명을 잡아 끌고 사직공원 산으로 가는데 그 뒤에는 멀치감치 떨어져서 뒤따라가는 따발총을 맨 인민군이 있다.

10분 뒤에는 산곡(山谷)에서 총성 3~4발이 고막을 울린다. 심신(心神)은 무어라 할는지 일분일초가 천년같이 고생스럽다. 그리하여 신자 중 청년남녀는 거의 남하시키고 중년층 노년층 신자 남녀만 절반쯤 재경(在京)하였다. 성낙소 자신은 노년인고로 남하하기에 그리 쉽지가 않았다. 화를 면키 위해 신도들에게 전부 남하를 권하였다. 그러나 집집마다 사람 사람의 심리가 부동한 고로 여의치 못하였다. 신도들은 목사님 신변이 위험하시니 피난하라고 하였다. 그런 말을 듣고 나로서는 피난할까 도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요한복음 10장 11절에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했고, 요한복음 21장 15~18절에 주님의 말씀에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하시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희생하시고 삼일만에 부활 승천하시어 우리를 위하여 주야로 대언 하시고 기도하시는데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 말씀을 순종하며 양을 치는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양을 위하여 삼가며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라. 성신이 그 중에서 너희를 세워 감독을 삼으셨으니 이 교회는 자기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은 것이다(행 20:28) 하였으니 나는 누구인가? 나도 성신이 필운동 교회 중에 세워 목자를 삼으셨으니 이 교회를 목양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양 무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느냐? 자경(自警)하고 일체 다른 생각을 버리고 주야로 기도 하였으되 일제 시대의 위험 중에서보다 몇 배나 더 한 듯하다. 그 후로는 정심(定心)이 되어 공포심은 있으나 안심하고 열심히 정례(定例)의 예배를 일제시대와 같이 신령과 진리로 주의 만찬 예배와 삼일 기도회를 계속하였다. 하루는 본교회 집사 한 형제가 의용군 모집시기에 도피하여 매야래숙(每夜來宿)하는데 밤중 영시 경에 인민군과 서원(署員)이 돌입하여 수사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곳에 와서 숙박하고 있다는데 하면서 온 집안을 조사하고 최후에는 이 집에 지하실이 어디냐 하였다. 인공치하(人共治下)에 위험하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죽을 뿐만 아니라 지옥을 면치 못하고 믿음으로 살면 산다는 굳은 마음이 생겼다. 대답하기를 진실한 말로 당신들이 서있는 마루 밑이 지하실이라고 하였다. 그 때 도피하는 집사님은 지하실에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지하실에 가지 않고 이말저말(此言被言)하면서 상언(相言)하다가 즉시로 퇴거하였다. 그 집사는 공포심에서 흑사병자와 같았다. 즉시로 재침(再侵)하면 할 수 없으니 함실 부엌 아궁이를 피신처로 예정하고 있을 때에 얼마 안되어 또 다시 문을 열라고 하였다. 서서히 완보(緩步)로 대문을 열어 주었다. 그 때는 지하실도 변소도 방방이 다 조사하였다. 이 사람들은 동위원과 서원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조금 전에 군인과 서원이 조사하고 갔노라 한 즉 그런가 하고 즉시로 퇴거하였다. 이러한 위험하고 두려운 중에라도 거짓말을 안하고 진실된 말로 하였으모로 하나님이 도와서 그들이 찾아볼 생각을 둔하게 하시어 그대로 가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런즉 우리 신자는 참된 신앙에서 생애로 살지니라.

그 해 9월 26일에는 종로 내무서원 2인이 내방하여 나의 신분과 다단(多端)의 문의와 조사를 하고 가옥구조와 후면과 출입문이 몇 곳인 것과 또한 종로서에서 이곳에 왕래하는 도로선을 평면도에 그렸는데 종로에서 세종로로 서대문에서 영천으로 가는 길을 그렸다.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렇게 오면 밤중이라도 잡을 수가 있지요 하였다. 나는 듣고 말하기를 그렇게 그리면 밤중에 찾으려면 영천 등지에서 헤매게 되니 그렇게 그리지 말고 세종로 사거리에서 지선로(支線路)로 오면 내수동 파출소로 사직공원로로 올라가서 이곳으로(필운동 289) 옵니다 한 즉 그들의 태도는 정직하고 진실되다는 기색을 보이며 언자(言者)인 성(成)은 환자 중 하나라는 듯이 만소기(曼笑氣)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성 자신은 벌써 누구도 모르는 중부하처도피처(中部何處逃避處)를 예정하였다. 오후 5시경에 석반(夕飯)을 하고 황혼 시에 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도피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과 지혜보다 월등하였다. 그 사람들의 계획과 나의 내염(內念)보다도 황혼이 채 못되어 서편산맥 이삼중첩월처(西便山脈二三重疊越處)에서 장거리 대포의 탄환이 중앙청 대광로 좌우편 대건물을 파괴하여 화염이 중천하며 풍진(風塵)에 촌보(寸步)를 진퇴(進退)치 못할 만큼되면서 가로(街路)에 남녀 인간들이 유혈즉사(流血卽死)에 폭탄우박의 각기 입장에서 사경(死境)이니 그 밤에 근처 신자들과 외인들이 예배당으로 가서 죽어도 같이 죽자 하며 다수인사(多數人士)가 운집철야하였는데 나는 종야의창입도(終夜依窓立禱)하였다.

9월 28일 일출 동천시(日出東天時)에 U.N.군과 국군이 입성하였다. 나를 납치하려던 그들은 벌써 의정부 등지로 도주하였다.

 

제14장 환도와 신학교 개강과 사태갱위(事態更危)

1950년 10월 말경 환도와 동시에 각 회사 기관도 환경(還京)하고 상술한 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생도 교역자도 신자도 귀환하였고 동경에 피난한 선교사 힐씨도 환경하여 신학교를 개강하고 기타 각 교회도 수습하였다. 선교부 피해가 막대하였다. 고급자동차 1대, 찝차 1대와 피아노 1대와 기타 중요한 물건을 전부 인민군이 가져갔다.

각 교파들의 교역자들 중에 기독교민주동맹회에 가맹한 자는 거의 납치되었다. 우리 단체 교역자 중 한 사람인 최상현 목사도 군정청시대로부터 한국이 성립할 때까지 공보처 과정으로 근무한 관계로 인하여 누차 심문하고 정치적 관계를 탐색하여 필경에는 납치해 간 것이다. 부산 등지에서 피난하였던 신학생들이 환도와 함께 귀환하여 피난 중에 단체증과 교역자증이 없어서 고생 중에도 더 고생하였다 하여 사태가 불길할 때에는 군목으로 편입 선교사의 소개장을 각득(各得)하여 가지고 군목으로 편입할 의사를 표현하였다.
선교사는 재차 남하할 때에는 군목편입 소개장을 주기로 하였다.

북진한 국군과 유엔군이 또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중공군 수십만이 인민군과 합작하여 재차 남침 공격함으로 다시 사태는 위경에 처하였다. 정부도 다시 부산으로 천도하며 일반 민중도 남하하였다. 나는 교회에 선언하기를 시민전부가 피난하니 우리도 전부 남하합시다. 그러나 신자들이 주저주저 함으로 시기가 급하게 되었다. 선교사는 동경으로 출발하고 교역자는 남하시키고 나는 신도를 전부 양떼처럼 이끌고 빙상(氷上)으로 도강하였다. 때는 1951년 1월 3일(수요일) 밤 7시경에 출발하여 11시경에 노량진에 도착하였는데 인파가 홍수와 같이 되어 능히 행진할 수가 없었다.

 

제15장 피난과 전도

1951년 1월 4일 노량진 노상에서 철야하여 동체(凍體)가 된 몸을 움직여 출발하려는 동시에 실인지요(室人志要)가 위급시에 각슬통(脚膝痛)으로 빙상도강시(氷上渡江時)부터 고통 한바 노상철야에 동결이 되어 극심한 통증이 생겨 일보는 고사하고 기거를 못하모로 수레에 실려서 가는데 수레(荷車)가 인파로 인하여 진행치 못하모로 일일행이 과천읍에 도착하였다. 일야 숙박하고 다음 날은 군포역전에서 해가 저물었다. 그런데 일등대로는 군사 전용인고로 할 수 없이 남양으로 돌아서 수원 평택으로 가게 되므로 군포역전에서 일박하고 1월 6일에는 신도들을 보행으로 철도선을 따라 보내고 강안나 자매 1인만 환처보호(患妻保護)하기로 자원하여 동반하고 수원군 반월면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었다. 하루에 겨우 20리 가량을 걸었다. 우마차, 짐차 등이 인파로 인하여 진행치 못한 연고이다.

이 날밤에 눈비가 소소(小小)히 비하(飛下)하는데 밖에서만 지난 지가 오늘이 5일째였다. 3인이 주의 만찬 예배하고 강안나(姜安羅) 자매가 어제 밤부터 오한발열(惡寒發熱)하여 상비약으로 치료 휴식하였다.

다음 날(일요일)에 병자가 열이 크게 내렸으나 아직도 미열이 남이 있어 더 휴식하고자 하였으나 병자가 야묵이라는 동리에 친척에게 가서 김치와 국을 먹어야 살겠다고 하며 고집하기에 만류하였으나 혼자서 가버렸다. 우리 부부도 수레와 함께 출발하였다. 백설이 대하(大下)하는 중에 수레는 진행이 불능하여 또 얼마 가지 못하고 한 마을에 들어가서 유숙처를 구했으나 가가호호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도무지 유숙처를 구하지 못하고 대문 밖 뜰에서 숙처(宿處)를 정하였다. 백설폭하(白雪瀑下)에 설중노숙(雪中露宿)하고 조기(早起)한 즉 설청운산(雪晴雲散)한데 일기는 명랑하였다. 그러나 적설수척(積雪數尺)에 하차부전(荷車不轉)하여 일일오리행(一日五里行)으로 화성군 비봉면에 도착하여 마루에서 일박하고 출발하려고 한즉, 산  에서 중공군 5명이 백색포건(白色布巾)과 상하의(上下衣)를 피장(被粧)하고 바로 피난민 중에 동반한다. 그러므로 비행기가 올까봐서 출발치 못하고 비봉면 면소 근처 주막에서 일박하고 중공군이 남양으로 간 것을 알고 즉시 출발하여 팔탄면 미급 중간 산촌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에는 화성군 팔탄면 구양리에 도착하여 가가호호를 방문한 즉 피난민이 여산여해(如山如海)로 접족(接足)할 곳이 없어 또 풍천노숙(風天露宿)할 줄로 알고 주저하다가 다시 한 집을 찾았다. 주인은 내가 휴대한 의사 가방을 보고서 의사십니까 하기에 한방의사라고 대답했다. 주인의 안색을 보니 병기가 농후하다. 수일을 유하신다면 방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다음 날이 주일인 고로 쾌히 허락하고 마루 건너 방으로 숙소를 정하고 1월 13일 토요일 석반(夕飯)에서야 비로소 국과 김치를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일박하고 하차인부(荷車人夫)는 귀경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가라고 했다. 주일에 주의 만찬을 행하고 예배하고 주인의 가정을 관찰한 즉 주인과 2의 여식이 병자라 진찰 처방하여 주고 난 즉 가인(家人)들이 좋아했다.

식사가 조금 나아지니 쇠약했던 신체가 생기가 회생하는 듯 했다. 그러자 중공군이 산중으로부터 2인씩 3인씩 출현하여 인가에 수사(收査)하며 식사를 청하며 많은 질문이 있었다. 살펴본즉 산협(山峽)에는 다수의 중공군이 있고 피난민 중에 잠복하여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연락하며 교회 교직 혹은 군경인을 가만히 데려다가 산중에서 살해하였다. 그런즉 나는 교역자이니 신변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출발하려고 하니 평택까지 거의 갔다가 교량을 파괴하여 건너지 못해 도로 온 사람이 있고, 한나루(漢津)에 가서 도강하려고 하니 선박을 압수하므로 도강을 못한다고 한다. 가위 진퇴양난(可謂進退兩難)이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민중이 출애굽할 때 홍해변에서의 난관을 상상하면서 이 때 한시 한 수를 읊었다.

大江橫斷賊追攻 出埃及時今旦同
救朝政策眞正義 防國精神都是忠
共産赤化無法者 泰平王臨信心宮
問君勝利敗何處 承晩一聲喚世雄

이상과 같은 한시를 작음(作吟)하고 하루가 천년 같이 고민 중에서 공포로 지내었다. 하루는 피난 중 한 사람이 내방하여 시국에 대한 담화로 상교(相交)하다가 시국정황을 무운무염(無韻無廉)의 작시를 하였다.

北方肅殺玄武神 朱雀變裝惑世能
海東靑龍平和說 太西白虎勇猛起
天怒逆者用誅刀 人應正義必成功
名高赤色風雲輩 頭掛白晝自由市

避難所感(四韻과 廉作)
漢陽城出向何事 胡騎長驅槿城先
退陣如雲無定後 難民成海不能前
猛襲酷寒人臥雪 爆機盲彈魂飛天
聞道戰形更勝勝 我軍破賊和平家

戰局吟(五韻廉作)
胡兵侵略自中華 聯盟會評反擊加
艦彈射處江山壞 機爆上空霹靂聲
我軍進勢威如海 敵陣退散難合沙
支離徘徊窮困路 風雲一息泰平嘉

夢見槿花發(絶局韻作)
夢見樹高園上睡 無窮花發滿枝枝
百難不落花猶在 風雨當年末盡

이상과 같이 되는 대로 한시를 작지영음(作之詠吟)하던 중에 뜻밖에도 후방군대가 진전행군진과차(進前行軍陣過次)에 지방민사(地方民士)들과 피난민들이 환영도 하였다. 그러나 군인 행동이 대불량(大不良)하였다. 그래서 목전소견(目前所見)을 작시음지(作詩吟之)하였다.

對後方軍人吟(黑白外軍)(無韻無廉作之)
黑白軍人后方處 捕鷄奪女能於戰
民主國家聖戰日 非行黑幕是何
面雖色黑心可白 體己成白裡何黑
先陣善退罪在後 可命令明察命悔

전선지구에서는 육해공 3군이 생명을 걸고 혈전하는 반면에 후방군인은 이상의 한시와 같이 적을 포촉하는 대신에 가축계시(家畜鷄豕)요 국토탈환하는 대신에 부녀탈취에 안중생화는(眼中生火) 불가사의라 아니할 수 없다. 오호(嗚呼)라. 이 세상에 언제나 정의의 세계가 될런지요. 일선후퇴(一線後退)는 죄재후방군인(罪在後方軍人)인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한국 군인도 이와 같다면 한국은 불행이다. 만고역대를 보면, 군대로서 재물과 부녀를 약탈치 않은 사실이 없도다. 그러나 부녀를 약탈한 군대는 망하지 않은바 없도다.

아군은 U.N.군의 육해공 3군이 맹격(猛擊)하모로 중공군과 인민군대는 섬멸 당하고 패배하여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동시에 수원과 서울을 아군이 탈환하였다는 소문이 있다. 이때에야 공포심이 해소되니 피난하던 동리에 교회가 없음으로 기독의 복음을 전할 용기가 생겨 국민학교 교실을 빌려서 전도예배를 시작하여 집회를 계속 주일마다 전도 예배하는 동시에 개인전도와 가정방문 선교와 또한 성경을 가로치며 본 지방인사로 신앙하도록 하여 이씨 가정 몇 집이 결심구도(決心求道)함으로 교회가 되게 하고 집회를 계속하였다. 한국 동란이 속히 종식되고 세계평화가 임하기를 우리 신자의 아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옵고 한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祝 戰勝吟(四韻廉作)
徘徊路上難離間 一朝雲開復見天
胡騎阻絶遼東外 太極揚揚海北邊
無窮花發三千里 檀紀曆新半萬年
應知此日留聯會 民主諸邦溝和宣

이상과 같이 평화 강화회가 속히 전개되기를 바라는 뜻을 첨가하여 축도적으로 영시(詠詩)하였다.

 

제16장 수원과 부산 피난

1951년 3월 18일 피난 도중이던 팔탄면 구장리를 출발하여 수원시내 교동 72번지 빈집을 이웃 사람에게 동의를 받아 입주하고, 다음 날 수원 경찰서에 식량배급 수속을 하고 상경할 방법을 문의한즉 아직 도강불통으로 불능이라 하여 신자와 아는 사람을 상봉키 위하여 매일 시장을 돌아다닌 결과 과연 지인과 신자를 만나게 되어 거주처를 심방 위로하며 기도와 설교로 서로 위로하면서 차일피일 부지중에 1개월을 보냈다.

하루는 팔탄 구장리 신자 이씨가 와서 청하기를 방춘화절(方春花節)에 야외예배하기를 결정하였으니, 목사님이 시작한 교회이니 만큼, 꼭 왕림하시어 남녀 신자에게 주님의 진리를 설교하여 주기를 원하였다. 나 자신이 피난지에다 교회를 시작하였으모로 기쁨이 넘치어 가기로 약속하고 수일 후에 자전거로 구장리에 가서 남녀 구도자들과 산곡화세계(山谷花世界)에서 자연을 통하여 조물주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예배하였다. 야간에는 이씨 가정에서 유쾌히 예배하였다.

다시 수원시 교동 거주지로 와서 상경할까 하였으나 막연하모로 노처(老妻)는 수원에 체재케 하고 화물자동차로 그 해 5월 5일 18시에 출발하여 용인과 안성을 거처 청주시를 야간 영시에 통과하여 다음 날 아침에 안동읍내서 아침밥을 먹고 이곳에서 과연 아는 이를 만나고 난중구생(亂中救生)을 상위(相慰)하고 출발하여 대구시에 도착하니, 오후 3시경이라. 구세군 영에서 유숙하고 사제 낙철(舍弟 樂哲)의 소식을 상문(詳問)하고, 익일 8시발 부산행 여객 버스로 출발하여 부산시 염주동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사 이흥식(李興植) 형제를 방문하고, 피차 환난 중에서도 주님의 은혜로 생명을 보존하심을 감사와 영광을 서로 하나님께 돌리고 기도한 후, 이 날 5월 8일 밤은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다음 날, 유식도일(遊食度日)은 전도자의 자격을 상실함이라 생각하고, 1인이라도 집회를 시작할 결심을 하고, 장로교 항서 교회당에 교역자 수용소로 가서 김동환(金東煥)군을 상면하고 그간 안후(安候)를 묻고, 각 동역자 안부를 문지(問知)하고 그간 동경에 있는 선교사의 서신 거래와 내조여부를 상문(詳問)한 후, 무사함을 알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각처로 통신으로 생존을 통지하는 동시에 가아 원경(家兒 原慶)에게도 통지하였더니, 부여로부터 와서 동거 중 집회 장소를 광구(廣求)한바 1개월을 지나서 천막을 매득(買得)하여 수정동 공원에 건립하고 동년 7월 30일부터 집회를 시작하여 전도한 즉 차차로 수십 명이 집회하였다.

일본 동경에 있는 존 제이 힐 씨와 성원경(성수경)은 동반하여 상경(上京),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수정동 교회인 천막교회를 위하여 대청동과 남포동에서 매일 출근하였다.

하루는 부산 대청동에 있는 숙소에서 두 노고자매(老姑姉妹)를 상봉하게 되었다. 이 두 노고자매는 나 자신이 신임하고 긴밀히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동지였던 고 강문석(姜文錫) 목사의 노모와 빙모였다. 너무도 반가와서 함루상대(含淚相對)하고 감사의 기도를 한 후에 상담통정(相談通情)하는 중에 작년 6·25난에도 성목사님이 부산에 오시는가 하고 아무리 살펴보았으나 알지 못하였었고, 금번 1·3후퇴 피난 중에도 목사님을 찾아보았으나 알 수가 없어 낙망할 지경에, 풍문에 성목사님이 부산에 오셨다고 하모로 찾아 왔으니, 울산으로 금일동행(今日同行)을 요구하였다.

그 내용은 강문석 형제 생시에 성목사님을 청하여 각 지방교회에 사경회와 전도집회를 인하여 정인구(鄭寅久) 노인과 기타 수인을 침례주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시 세우고, 수개월 후에 강목사의 별세 장례식을 성목사가 주례하고 교회를 신앙상 견고히 하시고, 상경하신 후에 신궁참배 문제로 정인구 노인이 고생 출옥 후에 숨어 지내다가 조선해방 이후에 정인구 씨가 크게 활동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되고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교역자 주택까지 택가(宅家)로 건조(建造)하였으니 성목사님이 특별집회와 사경회를 하시고 피난하실 기간만이라도 교회를 인도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상 내용을 자세히 듣고 그렇게 재미있게 들었으나, 나 자신이 항상 주의하는 것은 편안하고 유리한 일에나 유리한 곳을 혹감(惑感)하지 않는 것은 신앙상 유해(信仰上 有害)를 짐작하고, 그러한 다급한 일을 보고 2주일 후 특별집회를 하기 위하여 가기로 약속하고, 두 늙은 자매를 송치(送致)하고, 기일(期日)에 한형수(韓亨洙)를 대동하고 울산읍 교동 강문석 빙모님 댁에 유숙하고, 정인구 노형과 상면하고, 과거의 파란곡절과 교회부흥을 담화 보고를 듣고 강문석 군이 생존하였으면 얼마나 희열의 감이 있으랴 하고, 익일에 교회당이 있는 태화리로 가서 집회를 여는 동시에 동행한 한군이 집회 인도할 기분이 현견(現見)하므로 후생(後生)들을 발전하는 것을 희열하는 고로 쾌히 한 형제에게 부탁하였다. 그런즉 한군은 대만족의 희열을 가지고, 그와 반면에 정인구 노인은 성목사님을 청하였는데 성목사님이 인도하지 않고 연소한 학생에게 시키는 것이 합당히 여기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신앙으로 갈급하는 심령이라. 감화 감동을 주어 집회는 좋은 성적을 보게 되었다.

전 교회에서 교역자를 결정하는데, 성목사님을 볼 때에 부산에서 결정하였으니 이의가 없다는 듯이 속히 동부인 부임을 표시할 때에 성 자신의 생각의 태도는 변태(變態)는 무타(無他)라. 한 군이 필운동 교회에서 고생하였고, 1·4후퇴 시에도 온양에서 피난 중 처자들과 고생이 있었을 것으로 알고, 나 자신의 편리를 후생에게 주는 것이 신앙에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믿고, 나보다도 한형수 형제를 부임시키는 것이 적당하다고 제직에게 누차 권면하였으니, 정인구 노형은 말하기를 연로자가 제직인데 연소자로 교회를 담임하면 불길하다고 하며 노목사님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다년간 사모하는 중에 왕림하시었으니 차시기에 목사님이 꼭 이 교회에서 교역하여 주시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그 외 다른 제직들은 주저하였다. 한군은 역시 부임을 원하였다. 급기야는 한군을 두도록 하였다. 수일 후에 부임하기로 약속하고 부산으로 행하였다.

 

제17장 영남지방 순회와 환경(還京)

신묘년(1951) 9월 중순에 부산 출항으로 통영을 행하는 해협에 남단의 해육지역을 선상에서 관찰하는 동시에 수세기 전에 이충무공 순신 씨의 무공을 추억하면서 어언간 부지중에 통영읍에 당도하여 다소 유람하고 여관에 투숙하고 익일에 진주행 도중인 도산면 오륜리(道山面 五倫里)를 보행으로 20여리를 북방 진주 통로로 좌우산해(左右山海)가 견아상지(犬牙相支)의 격으로 중협(仲狹)과 해중열도(海中列島)의 기국포점(棋局布點)을 보며 혹은 소평야 황도(小平野 黃稻)의 금파(金波)를 피진적(披進的)으로 여행하였다.
촌락 강당에서 청소년들은 애국가로 가절(佳節)을 노래하며, 산상분묘에는 미망인들의 비애의 감이 더욱이 가절에 용출(湧出) 또는 육과(陸果)로 위령제를 올리며, 추성대곡(秋聲大哭)함은 산천초목이 동응상비(同應相悲) 하는 듯하여 여객(旅客)의 심정을 동경(憧憬)시킨다. 차일 여행희비(此日旅行喜悲)의 노정(路程)이었었다. 그러모로 당일 행로 풍경을 한시 일수로 작음(作吟)하였다.

辛卯年八月秋夕節 統營發晋州路中 吟
仲秋佳節統營行 遙意晋州道路長
遠近列島棋局點 東西仲狹犬牙相
哭夫盡日山猶慽 愛國歌人義亦彰
農村風景何時足 萬頃金波野稻黃

어언간에 도산면 오륜리 그리스도의 교회에 도착하여 야간집회에 신주 회개자(信主 悔改者)에게 야간에 침례를 시행하고, 남녀신도에게 성경을 교훈하고, 익일에 고성(固城)을 거처서 진주에 도착하여 최정기(崔正琪) 그리스도인을 방문한 즉 부산 출장 중이며, 미봉(未逢)의 신경(信經)과 교리를 문답하고, 성경을 상고하며, 토론하고, 초대신약교회 환원운동을 권유하며, 장래 한국 기독교 통일운동과 교파심을 배격하고, 성경 그대로 하여야 자연히 통일이 되며, 주님의 기도문 중에서 내가 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거하여 저희들로 하여금 다 완전함을 이루어 하나이 되게 하려(요 17:23) 하심과 기약이 찰 때에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려 하게 함이라(엡 1:10) 하신 성지(聖旨)를 우리 만각자(晩覺者)에게 권세를 주어 성취할 수 있는 줄로 믿고 활동하자는 의미 심각한 말로 상약(相約) 하고, 전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던 동리에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하였지만 보지 못하고, 주수은(朱受恩) 형제도 심방하였으나 상면치 못하고, 섭섭히 부산으로 귀래(歸來)하였다. 진주 최정기와 마산 주수은 양 형제는 고보학교(高普學校) 시대에 경성 그리스도의 교회 신자로서 청년부에 열심자들이었다.

부산에서 제주도에 있는 김진영(金鎭永) 형제를 부산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김형제의 영윤(令胤=남의 아들)에게 부탁하기를 군의 부친이 내부(來釜)하시거든 성목사는 선교사와 동행 상경하면서 김목사님을 위하여 동일한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개하여 염주동 교회 이흥식 전도사와 동행하도록 약속하였으니 내 명함에 소개장을 가지고 이전도사에게 가시도록 하고, 힐 선교사와 11월 초순경에 자동차로 상경도중에 수원시 교동에 머물고 있는 노처(老妻)를 심방 동반하였다. 이 때에 가아 원경(家兒 原慶)은 전화(戰禍)로 인하여 고아가 된 남녀 90여명을 양육하는 중에 신체가 쇠약하야 불가불 요양하여야 할 형편이었다.

서울 시내는 황폐하고 공허하여 파옥괴벽(破屋壞壁)에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인영(人影)이 희소(稀少)하여 적막상태였다. 번영하던 도시가 전쟁에는 초추공허(焦推空虛)뿐이니 생명과 재산이 초토화 하였도다. 그런즉 오호라, 정객들아 여차한 광경을 보고도 전쟁을 하려느냐? 호소하노니, 맙소사!

 

제18장 울산읍 태극리 교회당 낙성식과 부산 수정동 교회 소송 건

울산읍 태극리 그리스도의 교회당 낙성식 초청장을 받고 힐 선교사와 동반하여 울산읍에 도착하여 3일을 집회하고, 예배당 헌당식을 하게 되는데, 고 강문석의 생존시에 시작한 교회인 고로 강목사의 사진과 약력을 교회와 내빈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더니, 담임자가 여하한 의사인지 누구의 유혹을 받아서 인지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 강목사의 빙모와 여식은 작고한 강목사의 유적인 교회 헌당식에 하나의 씨가 되는 업적을 대중 앞에 선포하는 것이 작고 하신 분이 금일 다시 살아난 기분으로 기대 중에 강단 앞에 정좌하여, 식을 마칠 때에야 기대의 낙망 속에서 배분용출(盃憤湧出)하여 불금누하읍성(不禁淚下泣聲)이었다. 이때에 강문석의 빙모는 심중에 무엇을 결정하였다고 추상(推想)하였다.

과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 땅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여 울산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였다.

부산시 수정동 공원 내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자와 제직 및 전 교인들과 분쟁사건이 발생한바, 당 교회에서 치리상 불편하므로 성목사와 선교사를 초청하고, 교회 소송이 제출되어 교회와 교역자 분쟁사건이 분명하여 신앙상 성경에 위반이니, 양자가 범죄인즉 교역자도 회개하고, 교회도 회개 자복하도록 권책(勸責)하고, 피차 자복하는 동시에 피선된 의장은 원고 제직에게 질문하기를 원고 제직과 신도들이 회개 자복하였으니 교역자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교역자도 용서하고 유임을 제시하였다. 의장은 피차 회개 자복하였으니 피차 용서하는 동시에 하나님도 기뻐 용서하실 것을 언명한 즉, 원고와 피고가 각자 사표를 제출하는 동시에 수리하여 수개월간의 내분이 일시에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제19장 제주도 순회와 고아원 직원 선출과 구포교회 설립

성낙소 목사가 힐 선교사와 동반하여 제주도에 도착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3-4일 집회하고, 시간 여유가 있기에 제주 고아원과 해군 병원을 방문하고, 교파교회 현황도 살펴보고,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의 장래 발전에 대한 고려를 하고 무사히 부산을 거쳐서 박정훈(朴貞勳) 가족을 동반하여 상경하였다. 이는 박형제로 하여금 고아원 총무직으로 채용하기 위함이었다.

성원경이 신체가 쇠약하므로 구포 약수처에 요양차 출발하고 박정훈이 부임하여 고아원 사무를 열심근무하므로 원장 힐이 신임하였다. 성수경(원경)은 구포에서 요양 중에도 전도하여 여 의사의 가정에서 집회하여 구포에 기독의 교회를 설립하고 성수경은 건강이 회복되어 상경하여 신학교에 재 등록하고 수업하게 되었다. 성낙소 나는 선교사에게 고아원을 농축(農畜)할 장소를 선택하여 이동하고, 송월동 이 장소는 신학교로 사용하기를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신학교는 장충동 재건 교회당을 임시 사용하게 되어, 그곳에서 신학교를 다시 시작하여 강의하였다.

 

제20장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 학생등록과 개강 및 고통 당한 일

1953년 3월에 신학교 대리교장 존 제이 힐 씨와 교감 성낙소와 양인이 협의하에 교수할 목사와 강사를 확충하기로 하고 일본 동경에 있는 웨스더와 삐일 씨와 컨네트 씨를 청빙하여 장충동 신학교에서 개강하여 학과와 출석에 학점을 득하도록 하고, 장래 신약교회 환원운동 용사로서 각 지방 방방곡곡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고 다수의 심령을 구원하도록 초대교회의 교역자들과 같이 명백한 사명감으로 복음주의에 철저한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나는 중심으로 한국에 신약교회 환원운동이 활발히 추진하도록 기도하면서 자부(自負)의 열감(悅感)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교회 환원운동을 하려면 자연히 초대와 같이 핍박과 곤고와 환난과 검과 적신과 위험과 칼날이(롬 8:35) 있을 것을 확신하는 그런 용감한 사역자가 산출할까? 나는 염려도 하며 자신이 먼저 당할 것을 각오하고 신중하면서 열심히 교수하고 일반으로 교역하는 학생들에게 교역자의 자격과 신앙이 특수적이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사실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실천적인 신앙과 실력적인 자격을 양성하려는 것보다는 이만하면 할 수 있으니,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교회를 핑계하고 양성을 회피하려는 동시에 몇 사람이 우선적으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탈선행위로 교회를 분란케 하고 신학교를 혼돈케 한 사실이 서울 외곽과 부산에서 있는 두 개의 교회로부터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적이 아닌 것을 지적하여 경계 금지하였으나 불응하고 발호탈선적(撥扈脫線的)인 행동은 교파교회에서도 보지 못하는 불량한 일을 감행하고도 선배되는 선생을 반항 및 모략 중상하는 태도는 비 종교자보다도 더욱 심했다.

이러한 사고는 선교사의 불명우둔(不明愚鈍)에서 발생되어 무질서한 흑막이 출현되므로 혼돈 속에서 나의 고통은 비할 데 없이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또 바울의 성경인조(聖經引照)된 것을 생각하였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우리가 잡혀 죽을 양과 같이 헤아림을 받았다(롬 8:36).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하신 말씀으로서 위로하고 힘을 얻어 인내와 단련이 생기고 소망 중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노구(老軀)의 당전(堂前)에 광명이 올 것을 믿고 있다.

 

제21장 두 선교사 귀국과 신학교 휴교와 유무악기파 합동 건

1953년 5월 경에 존 제이 힐 선교사가 안식년에 의하여 귀국하게 되므로 바울 잉그람 선교사에게 제반 사고를 인계하고 1년 후에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힐 선교사 도미 후 잉그람 선교사는 연소자라 경험이 없는 동시에 힐 선교사의 부인과 운전수 왕씨의 비행 관계를 미국 선교회 책임자인 제이 티 채이스에게 또는 개인의 결점을 발설하여 분쟁적 기분이 농후하여 한국 선교에 지장이 있게 되었기로 매우 염려하던 중에 힐 선교사가 1년 만에 한국에 다시 와서는 잉그람과 서로 질투와 모략 중상으로 비신앙, 비성경적이어서 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수수방관할 수가 없어 미국에 있는 선교사 제이 티 채이스에게 서신으로 청빙하였다. 그 결과로 1954년 9월 하순 채이스 선교사가 내한함으로서 회의를 개최하고 양 선교사의 사건을 심사함에 있어서 내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치리법정 의장으로 선출되어 양 선교사 모두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음과 비신앙적 행위에 대하여 질책하면서 증언하고 변명할 것이 있으면 변명하라 하였으나 변명할 것이 없고 사실을 순순히 자복함으로 제이 티 채이스가 요청하고 싸인하고 양 선교사 모두 귀국하기로 결정하여 바울 잉그람은 1955년 1월 8일에 출발 귀국하고, 존 제이 힐은 이한할 의사가 없어서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조를 의심하고 교파적 신앙을 가진 교역자들을 찾아다니며 요청하기를 자기는 귀국할 뜻이 없으니 여러분들이 원유서(願留書)에 날인하여 미국 각 교회에 보내면 여러분 의사대로 신학교를 세우겠다 하기로 방임적 태도로 교파적인 서울성서학원의 허가를 서울시에 제출 학원인가를 득하고 학생모집을 하였는데,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가 아닌 것을 용서할 수가 없어 존 제이 힐이 귀국하기를 기도하며 본인에게 권유하였으나 듣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1955년 7월 5일에 한국을 떠나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어서 귀국한 것이다.

성낙소 목사는 1954년 6월 25일에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의 휴교를 선언하고 유무악기파가 한국에서부터 통일할 계획을 하였다.

과거에(1950년 11월경) 부산에서 동역자 김진영 목사를 무악기계에서 마침 교역자 1인을 요구함으로 전임시키고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를 해교회에 철저히 교수하여 신앙이 일치하도록 한바 있으므로 김목사는 각 교회에 순회하면서 몸인 교회가 하나임을 가르치며 교회통일에 적극적으로 환원운동을 3-4년간 활약하여 신앙이 통일되어짐으로 유악기계와 무악기계가 통합하려던 숙제를 실현시키려 하여 김진영 목사와 합의하여 양계 교역자를 한 곳에 모여 기도와 성서로 수양한 후에 유악기 및 무악기 양계의 통일과 교회 일치와 초대신약교회 환원운동을 단결적으로 하기 위하여 김진영 목사, 성낙소 목사가 전국 교역자들에게 통고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의 은혜와 평강이 귀하와 같이 하심을 기원합니다. 초대신약교회로 환원하기를 기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 오늘날 한 성령 안에서 영감으로 기록된 한 성경을 인하여 그 주장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남으로 교회 자체가 진리에서 벗어나 갈등과 분쟁 및 분열이 속발(續發)하여 있는바, 신앙이 있는 자로 하여금 탄식을 금치 못하게 함으로 한 곳에 회집하여 신앙실천의 일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저 하기의 발안(發案)을 귀하에게 통지하오니 착오없이 이행하기를 갈망하나이다.

기(記)

1. 교회 일치에 관한 건
2. 구원에 관한 건
3. 성서 해석에 관한 건
4. 교회 조직에 관한 건

장소 : 선화 그리스도의 교회(대전시 선화동 2구 35번지)
일시 : 1954년 6월 14일 오후 7시부터 6월 19일 오후 5시까지

여비는 각자 부담하시고 식사는 일체 무료 제공함.

1954년 6월 7일

발기인 : 김진영 목사, 성낙소 목사

이상과 같이 수양회를 마치고 제2차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 원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회집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한국 선교회는 몇 분이던지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직 하나인 동시에 교회와 교역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한국에서 만이라도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들이 통일하기로 가결하고 신학교도 하나만 정식으로 인가 받고 재단법인도 설립하기로 하였든 바 동석기(董錫琪) 목사가 미국에서 환국하여 유악기계와 무악기계가 합치는 일을 부당하게 하는 동시에 교회와 교역자를 무악기계로 하자고 주장하기로 성낙소 목사는 이에 불응한 즉 통일적 계획이 와해되고 유악기계와 무악기계가 각각적으로 되었으니 성경적으로 보아서 불합당한 사실로 성목사 자신이 통탄할 바이다.

그러나 주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화를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이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하신 기도가 언젠가는 꼭 성취할 것을 믿고 활약할지니라. 세계 신구교파로 하여금 신약교회로 환원하도록 운동하는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여 우리들이 먼져 통일합시다.

나는 1947년도에 각 교파 교역자 50여명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6개월간 회의하여 교회 명칭을 그리스도의 교회라 통칭하기로 하고 세례문제와 매주일 성만찬에 대하여 성경대로 통일하자고 하였으나 통일되지 못하였고, 금번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조차 유무악기 양계를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아직 통일치 못하고 있음을 크게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환원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운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를 전적으로 신앙치 않는 불순인자들이 나에게 모략하여 다대한 지장을 주고 있었다.

목사 안수 문제와 성령문제, 북한에 처자가 있는 월남교역자의 재혼문제, 양처자로 집사 선정문제, 여집사 선정 등 기타 교파적 신앙을 가진 교역자들의 배척 등 불가형언(不可形言)의 곤고를 나 자신이 홀로 담당하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나의 주님은 세상의 모든 죄악과 질병과 억울함과 비애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온갖 고초를 당할 것을 예고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심과 성령이 성경에 기록한 말씀으로 교훈하심을 감사히 생각하고 찬송과 기도로서 생활하며 전도자에게 성신이 바울 사도를 통하여 하신 말씀 즉 도를 전파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온전히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 것이며, 인내와 훈계로 경책하며 징계하며 권하라. 곧 때가 오리니(딤 4:2) 하신 말씀의 교훈을 받고 위로하며 찬송가를 호창하면서 위안을 받았다.

주가 인도하는 대로 어느 지경까지든지 기쁨으로 찬미하며 주의 뒤를 따라 가리라.

 

제22장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당 건축과 고통

1956년 1월경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부에 미국으로부터 송금되어 온 교회당 건축 원조금이 예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원조금은 1953년 3월에 제이 티 채이스 선교사가 신학교 제2회로 개교하고 귀국할 때 약속하기를 서울에 제 1,2,3 교회 예배당을 교파 교회당과 같이 큰 건물을 건축할 자금을 미국 각처 교회에서 활동하여 모금하는 대로 송금하기로 교회에 선언하고 귀국 활동한 결과 다수의 자금을 모집한 것을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기관지에 모금현황 보고로 기재한 바 있었는데, 한국에 동란으로 말미암아 잠시 동결상태에 처하였던 것이 지금에야 건축자금이 왔으니 물론 우선권은 서울의 세 곳 교회인 것이 틀림없으니, 우리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제일 먼저 배당 받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지방 각 교회로 분배된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서울에 부당금(附當金)을 제외하고 그 남은 돈으로 지방교회에 조금씩 분배하겠지 하고 인정하였더니, 3월경에 선교부에서 공문으로 필운동 교회당 건축자금 배당이 한국 돈으로 일백십만환정이라고 전달되었다. 유래적(由來的)으로 보아서 잘못하였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교훈에 의하여 다소를 막론하고 주께 감사를 돌리고, 그것이라도 속히 지급하면 기울어져 가는 초가를 철거하고 기공을 준비키로 작정하고 배당금을 청구하였더니, 건축허가증을 받을 때에 지불하겠다고 함으로 교회에서 3만환정을 출금하여 서울시청 건축과에 허가원을 제출한바 얼마 후에 건축허가증을 득하여 그것을 선교부에 제출하고 배당금을 청구한 즉 기타 무리한 의사(意思)가 있기를 교회당을 철거하여야 지불하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배당금을 지불치 않고 묵연(默然)이었다.

신자들은 의견이 백출(百出)하여 다언(多言)이 격동되었다. 나는 말하기를 교회 일은 신앙으로 할 것이니, 너무 격념(激念)하지 말고 주든지 아니 주든지 감사할 것이라고 하면서 더 기도하자고 선언하고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소의 건축헌금을 하기로 하였다.

얼마 후에 선교부에서 근무하는 최순국 형제가 야간에 방문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배당금의 절수표(切手表)를 가지고 오지나 않았는가 기대하였다. 그래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최순국 형제는 의기(意氣)있게 능동적인 언사로 선교사님이 광주 학동 토지를 일백만환정으로 매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소유자 중 1인인 서병렬(徐炳烈) 씨에게 금액을 지불하고 소유권을 이전하였으니 서병렬 씨를 대면하여야 하겠기로, 목사님, 그의 주소 번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였다. 최 형제는 말하기를 그 번지를 알면 찾아가서 그 사람을 데리고 선교사에게로 와서 결정하려고 하는데, 어려우시지만 목사님이 집을 아시니 서병렬 씨를 대동하고 선교부로 오십시오 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명일에 찾아가서 서씨를 데리고 선교부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최순국 형제는 가고 나는 그 일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했다. 백만환도 부족한 돈인데, 그토록 선교비가 풍부하여서 그 토지를 살까 의심하였다. 누구의 말을 듣고 그러한 계획을 하였을까? 아직까지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것이니 무어라고 할 아무 것도 없었다. 익일에 나는 언약대로 원효로2가 서씨 집을 찾아 다가다 미쳐 그 집까지 채 못 가서 300미터쯤 앞에서 출타하는 서씨를 만났다. 그래서 최 형제의 말을 전하였다. 서씨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무로 인하여 그 토지를 조흥은행에 근저당을 하려고 신청하였던 본점에서 광주지점 은행을 통하여 현 시세를 감정한 결과 본점에서 공문이 온지 1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 목사님께 가서 인감증명을 내어서 근저당(4인 명의 소유권의 토지)에 동의서를 작성하려고 하였으나 물론 목사님이 동의서에 승낙 또는 날인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차마 찾아가지 못하였는데, 그러면 선교사에게로 가서 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고, 은행에서 일백삼십만을 주겠다고 한다면서 그 공문서를 보여주는데 저당문서까지 전부 작성되어 있었다. 서씨는 자기가 급한 일이 있으니 명일에 선교부로 가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 말을 전하려고 선교부에 가서 내일 온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때 선교사 태일라는 광주 학동 토지 가치를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서씨 말에 1,400여평인데 400만환정이라고 하였으나 그 사람이 불신앙 생활 중에 있으니 그 말을 신용할 수가 없고, 조흥은행에서 현싯가로 감정한 결과 근저당하면 130만환정을 대차할 수 있다는 공문을 보았으니 저당은 현싯가에 비하여 3분의 1을 준다고 하니 그것으로 비하면 390만환정의 가치는 될듯하나 은행의 일을 알지 못하니 그것인들 믿을 수가 있을는지요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그 토지는 선교부의 것이다. 한국 동란 전에 선교사 존 제이 힐씨가 서병렬 씨에게 속아서 막대한 돈을 주고 매수하여 4인의 명의로 소유권 등록을 한 것인데, 그 토지는 언제든지 선교부의 것이라고 하였다.

선교사 태일라는 기정방침대로 결정적인 태도에서 추진할 경향이 농후하였다. 나는 마음 속으로 백인들은 흔히 기분 나는 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가보다. 그전에 존 제이 힐 선교사도 광주 토지를 서씨의 유혹에 취하여 내가 절대로 안된다고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기분적으로 가격을 지불하였었다. 그때에 서리 교장 힐씨, 교감 최상현, 교수 성낙소 3인이 모여서 결정하는데, 힐 선교사와 최상현 교감 2인은 합의되고, 나는 반대했으나, 나 1인은 무력하여 그들이 금액을 가지고 광주로 출발할 때에 나는 최후로 언급하기를 3인지언(三人之言)에 필종2인지언(必從二人之言)이라는 규칙에 의하여 그 토지를 매수하러 가니, 금전을 주는 조건의 표시적(表示的)으로 선교부 대표로 힐 선교사와 최목사 2인의 명의로 교회 대표명단에 가입하기로 하고 등록 후에 금액은 재판소에 공탁하였다가 지불하려고 하도록 하였다. 돈만 주고 오면 그들이 토지를 매도할지라도 선교부에 하등의 권리가 없게 된다고 언급하였더니, 광주 교인들과 상의하여 교회대표 2인과 선교부 대표 2인으로 결정한바, 힐씨는 외국인이라 국법상 불가능함에 의하여 나에게 문의할 여지도 없이 그들의 뜻대로 성낙소 명단이 가입한 것이었다.

나는 과거를 연상하면서 백인들이 어떠한 감정에서 기분적으로 할 때에는 약간의 충고나 반대를 하여도 듣지 않을 것을 알고 방임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서병렬씨와 150만환으로 결정하고 즉시 수수하였다.
그런 후 1개월여에 토지를 다시 매도하려고 한 즉 가격이 400만환 가치가 못된다고 광주인들이 말한다고 하며, 성목사가 매수하라고 해서 산 것인데, 성목사가불량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그 토지 가금(價金)은 필운동 교회당 건축자금 150만환으로 지불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의하고서 진행하던지, 교회에 조회도없이 필운동 교회 건축자금으로 집권남용이라해도 과분한 일이요, 법적으로 말하면 횡령죄가 구성됨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량해서 권매하였다는 것은 범죄의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다.

아담은 이화에게, 이화는 마귀에게, 이는 성경적 모양으로 신앙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의 하나이다. 신앙심은 고사하고 인간적인 입장에서라도 일을 그렇게 할 수가 없건만 당연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필운동 교회 건축자금을 횡령하고 14개월이 지나도록, 건축허가 받은 지가 13개월이 지나서 허가취소기가 되도록 교회건축 기공을 못하고 있었다. 남녀 신도들은 차언피언에 불가형문(不可形聞: 이 말 저 말 함으로 물어 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용기를 내어 구 교회당을 철거하고 기공하면서 신자에게 헌금을 강조하고, 각처 친우를 방문하면서 건축난관을 말하고 다소의 동정과 혹은 많은 원조를 받아 물자와 인건비를 지불하여 그야말로 난관에서 난관을 돌파하면서 겨우겨우 1959년 12월 성탄절에 미완성이지만 신축당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도록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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