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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의
성만찬 신학의 정립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그
근거는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한다.[Raymond Abba, Principles of Christian Worship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7), p. 73.] 실제로 예배는 하나님과 의식적으로
사귀는 인간의 경험이며 신학은 그 경험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와
신학은 함께 결합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유도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삶을 생동감
있게 해주어야 한다.[Franklin M. Segler, Christian Worship: Its Theology and
Practice. 정진황 역, {예배학 원론}(서울: 요단출판사, 1979), p. 73.]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주의적이고 빈약하게 되며, 예배가 없는 신학은 냉랭하고 그 자체에 생명력을
잃게 된다.[Ibid.] 따라서 예배는 신학에 의하여 검토되어야 하며, 신학은 예배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배는 언제나 신학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며,
신학은 예배의 비판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 예배현장에 가장 큰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 신학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정용섭,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 예배의 경신,"{신학사상
제 14집} 1976. 10 참조.]
말씀의 예전과 성만찬 예전의 불균형, 성만찬의 의미와 신학에
대한 목회자와 회중의 무관심은 성만찬 예전 현장을 어둡게 하는 요인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보다 올바른 성만찬 예전을 거행하기 위해 필요한 신학적
과제는 무엇인가? 종교개혁가들의 실수는 성만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운동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롭게 성만찬 예전의 필요성을 조명하면서 성만찬 신학을 정립해야
하겠다.
성만찬은 초대교회부터 전통적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the
central act)였다. 기독교 예배는 언제나 '말씀과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
요소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말씀만 강조하고 성만찬 예전을
경시하는 풍조는 오늘 한국교회에서 오직 말씀만을 중시하는 예배형태와 의식적인(liturgical)
의견에 대하여는 무조건 배타적 입장을 취해온 것이 한국교회 예배발전에 장애요인이
되어 왔다.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예배에 있어서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을 찾는 일이 시급하다.[정용섭, {교회 갱신의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 213.] 한국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성만찬 없는 설교 중심의 불완전한 예배이다.
칼 바르트(K. Barth)는 "설교의 본문은 언제나 성서에서 나와야 하며, 그것은
곧 성례전과 관련되어야 한다"[Karl Barth, The
Preaching of the Gospel(Phil.: Westminster Press,
1963), p. 28.]라고 주장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예배의 전통적 요소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 예전의 균형과 개신교가 잃어버린 예전의 유산들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 문제는 한국교회가 매주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성만찬 의식에 의하여 심화된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자주 거행되어야 한다."["성만찬,"
{리마문서} 제30항] 한국교회는 성만찬을 연례 행사로 하거나 많아야 연 4회 정도로
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예배에 대하여 극단적 개혁가였던 쯔빙글리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기독교 예배에서 매주 성만찬 예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W.
D. Maxwell, A History of Christian Worship(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36), pp. 73-119.] 그들은 모두
성만찬이 올바로 집례되는 곳에 올바른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정용섭,
op. cit., p. 208.] 그들은 결코 성만찬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기독교 예배에서 배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만찬은 필요에 따라 가끔 갖는 것이고 예배는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 개혁교회 전통처럼 굳어 버린 오늘의 개신교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교회에서는 성만찬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매주 성만찬을 회복하는 것이 주님이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성만찬 예전을 이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목회자의 성만찬에 대한
인식과 회중들의 자세도 성만찬 예전의 갱신의 중요한 요소이다. 목회자는 설교자일
뿐 아니라, 예배의 인도자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제사장으로서의
사제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예전적 신학자"(liturgical theologian)[Paul
Waitman Hoon, The Integrity of Worship(Nashville: Abingdon Press, 1978), pp. 80-86.]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중요성을 깨닫고 성만찬에
대한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세히 알지 못한 자들에게 교육을 통하여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셔서는 안되기 때문이다(고전 11:27).
성만찬의 견해는 개신교가 교파로 분열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한국도 선교 100년 동안 많은 교파로 나누어져 증오와 분열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의 '영적 임재설'의 주장도 실제로는 '기념설'에 가까운 이해를 갖고 있다.
이것은 선교 초기에 신학 교리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한국의 실제의 예배현장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분열의 원인은 대개가 신학 외적인 것이며
성만찬 신학의 대립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경우는 한국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성만찬 이론이 교파의 절대적 존립 근거가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성만찬에 대한
다른 이론들과의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할 가능성을 시사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가들의 성만찬 이론이 전통적인 기독교 성만찬 신학의 부분들만을
택하여 강조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서와 초대 교회 전통에 근거한 성서적 입장이
완전히 수용 될 수 있다고 본다.[이현웅, "현대 기독교 성만찬 예전에 관한
연구", {장로회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1988. 2, pp. 135-141.] 특별히 감사의
의미가 상실된 개신교의 성만찬론과 개념에 대한 본래적 의미의 해석, 성만찬 교제(Communion)의
실현 등은 한국교회에서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례전을 통하여
화해와 일치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다. 예배의 바른 회복운동은 개신교의 성만찬 예전의
회복을 가져 올 수 있다. 예배학자 프랭클린 세글러(Franklin M. Segler)의 "교회는
예배로 건설되고 통일된다. 예배가 없는 곳에 일치는 없다"[F. M. Segler, op. cit., p. 242.]는 말을 우리는
깊이 의미를 새겨들어야 하겠다.
기독교 본래의 예배는 '말씀과 성찬의 예전'으로 구성되었으나,
중세와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한편은 말씀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은 성만찬을 강조함으로서
오늘의 예배는 왜곡 굴절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예배학자들은
초대교회의 예배를 연구하면서 기독교 예배의 본래적 예배의 회복을 재인식하고 오늘의
예배신학에 반응한 예전을 마련토록 했다. 성만찬의 분열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과거를 생각할 때 성만찬의 일치는 교회일치로 치유하는 방법이 되겠다.
오늘 우리는 현대 기독교 성만찬 예전에서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성만찬과 설교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에 대한 기념은 설교와 성만찬의 내용인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 두 요소는
서로를 강화해 주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는 성만찬을 경시하고
카톨릭교회는 말씀을 경시해 옴으로서 기독교 본래의 초대교회 예배를 왜곡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카톨릭 교회의 말씀(강론)에 대한 관심과 개신교의 성만찬에 관심은
기독교 예배의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둘째, 성만찬과 성령에 대한 이해이다. 서방교회 전통에서는
'성령의 임재의 기도'(epiklesis)가 성만찬 예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앞으로 '성령
임재의 기도'를 포함하여 서방신학의 중요한 균형을 회복하여야 한다. 성만찬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은혜의 예전이 되어야 하며
떡과 포도주에 대한 성령의 임재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들이 새로워 질
수 있도록 성령의 임재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성만찬과 일치(unity)의 관계이다. 같은 장소에서 하나의
떡과 공동의 잔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동참한 사람들과도 하나가 됨을 말해준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친교적 일치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지체들 사이에도
일치를 가져와야 한다.
따라서 성만찬 예전을 집행하는 문제이다. 성만찬 예전은
매 주일 집례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교파 교회는 성만찬 예전을 주일 예배에서
분리시켜 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이는 교회 전통에도 어긋나며 종교 개혁가들의
-- 쯔빙글리를 제외한 -- 의도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신교회는 정규
예배에 예전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며, 성만찬 예식의 순서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성만찬은 복음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그 안에서 융합되는
일종의 용광로[J. J. Von Allmen, The Lord's Supper. 박근원 역. {주의 만찬}(서울: 양서각, 1986), p. 7.]와 같은 것이다.
성만찬은 복음이 교회 안에서 창조하는 구심적이며, 또한 교회 생활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성례전이다. 이와같은 성만찬 예전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오늘의
예배현장에 제언을 하고자 한다.[이현웅, op. cit., pp. 148-151.]
첫째, 오늘의 교회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근거한 성만찬
예전을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만찬은 역사적으로 많은
변천과정을 거쳤다. 특별히 종교개혁을 통하여 전통적 성만찬 예전에는 많은 변화가
따랐으며, 그 이후 교파에 따라 성만찬의 신학과 예전은 왜곡되거나 굴절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되었다.
중세 교회의 모순적 현상을 극복하려는 종교 개혁가들의 의지는
높이 평가해야 되겠지만 카톨릭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은 전통적 예전까지도 배격해
버린 자세는 기독교 본래의 예배 유산을 잃어버리게 하는 과오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현대 교회들 중에서 아직까지 자신들의 편견이나 독단 때문에 기독교 예전의
전통적 내용들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활용하는 데 있어 인색한 교파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 오늘의 교회들은 자기 교파의 성만찬 신학(theology)과
실천(praxis)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고집할 수는 없게 되었다.[J. J. Von Allmen,
op. cit., p. 173.]
그것은 바로 성서와 초대교회 예전에 대한 확고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 성만찬에 예전의 본질을 회복하고 전통적 예배 유산을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는 전통적 성만찬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시대와 문화적 상황을 성만찬 예전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예배의 많은 요소들은 "사회적 문화적 활동의 기초"이다.[F. M. Segler,
op. cit., p. 245.]
기독교 예전은 언제나 그 본질적 특성을 보전하면서도 그 시대와 문화를 예전 속에
반영하여 왔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기독교 본래의 성만찬 예전을 회복함과 동시에
거기에 한국의 문화적 특성을 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예전의 토착화적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과제이다. 기독교 예배가 시대적 변화와 문화적 상황에 따르지
못하고 고정된 형식만을 고집하게 된다면 예배는 그 때문에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예배에 대한 새로운 형태는 신학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에서 평가[James F. White, New Forms of Worship(Nashville:
Abingdon Press, 1971), p. 38.]되면서 "시대에 맞는 예전"과 "문화에
적합한 예전"이 요구된다.
셋째, 오늘의 교회는 통일된 성만찬 예전을 통해 교회의 가시적
일치(visible unity)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보편성을 갖는 교회는 또한
예배의 세계성을 가져야 한다. 예배의 일치를 통한 교회의 일치는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요, 시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금세기 기독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식함으로서 성서와 역사적 전통에 근거하여 통일된 예배 예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교회의 일치를 앞당기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현재 개신교에서는 성례전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는 데
한신대의 박근원 교수, 목원대의 박은규 교수, 장신대 정장복 교수, 그리고 본 논문에서
많이 응용하고 있는 이현웅의 주장은 타 교단에서도 매주 성만찬의 회복이 한국예배
신학의 갱신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큰 환영할 만한 일들이다.
성만찬을 매주 시행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례전 연구를
더욱 깊이 있게 하여 현대 교회의 예배 회복에 주도적 역활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 증거되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교회에 의해서 전수된 복음의
전통 속으로 돌아옴으로서 우리의 공동유산을 재발견하고 예전의 통일과 교회의 일치를
앞당겨야 할 것이다. 성령은 이 시점에서 나뉘어 졌던 교회들이 본질적으로 일치케
하기 위한 환원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교회의 책임적
응답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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