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의 성찬론과 그 특징
 


가. 쯔빙글리의 성찬론

1. 중세초기의 성만찬 논쟁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나는 성만찬에 관한 여러 가지 이해는 예전에서도 그 효과를 발휘하였다. 고대의 고올 지방과 스페인 지역의 예전들은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로마의 예전들은 어거스틴에게서 영향받고 있었다.

교리의 실생활에 있어서는, 암브로시우스의 실재주의가 우위를 차지했던 반면에, 신학에서는 보다 강한 어거스틴의 상징주의적 해석을 고수한 것이 당시의 추세였다.
민간신앙은 상당히 많은 이적과 더불어 실재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빵과 포도주가 성직자의 축사를 통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사실은 카롤링 왕가 시대에 이미 일반적인 신앙으로 간주되었었다.

첫 번째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프랑스 코르비 수도원의 한 수도승인 랏베르투스(790-859)의 저작물에 의해서였다. 그의 의견의 새로운 점은 어거스틴의 상징주의적 이해를 널리 퍼져있던 화체에 대한 견해와 접목하려는 것이었다. 랏베르투스는 그리스도와 그의 육신이 신체적인 음식물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신적 음식물이라고 주장했으며, 성찬재료의 형태, 색채와 맛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그 실체는  "내용적으로"변형된다고 했다.

랏베르투스의 적수는 라바누스 마우루스와 라트람누스였다. 라트람누스는 두 가지 점을 제기하였는데 첫째는 성만찬이 신앙의 눈으로만 인지 가능한 신비를 포함하는지, 둘째로 변화로 말미암는 그 성찬재료가 지상의 예수의 몸과 동일한지에 대한 여부였다. 라트람누스는 빵과 포도주는 "상징" 즉 회상의 표징이며 신자가 받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아니며 또한 확실히 빵과 포도주만도 아니라, 오히려 성만찬에서 고차원적인 것, 즉 천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받아들여지는데, 신앙의 영혼만이 이것을 보고 먹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성만찬 이해에 나타난 여러 가지 관점들은 두 가지로 정식화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실재주의적인 화체론, 다른 한편으로는 상징주의적 해석인데, 여기서는 재료의 상징적 특성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베렝가르를 통한 두 번째 성만찬 논쟁은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살펴본다. 11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였던 그는 반 실재론적 상징주의를 주장하면서 본래적인 의미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이며, 그것을 맛보는 것이 바로 구원의 담보가 되는 한, 비본래적으로만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요 피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본래적인 의미에서조차 그것들은 신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편 프란치스코 학파의 대표자격인 홈베르트는 화체설을 지지함으로써 중세의 부각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성찬식 바깥에서의 상체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두 번째 성찬논쟁을 총괄하여보면 첫째, 그 성찬재료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의 변형에 관한 이해가 - 아직도 "화체"라는 개념이 있지는 않더라도 - 이제부터는 확고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가 모든 성체 속에 임재하신다는 사상이 관철되었다.

랏베르투스 이후, 신학의 일반 추세는 성찬재료의 현상이, 축사를 통하여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가 변화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이었다. 실재론적 경향이 상징주의적 경향에 승리를 거두었다.

2. 성찬교리의 계속적인 발전 (중세 후기)

12세기에 위고는 성례전이 은총을 포함한다고 주장했으며, 롬바르두스는 성례전이 하나님의 은총의 상징이며, 부가시적 은총의 형태임을 강조하였다.

성례전 효력에 관한 스콜라주의 전성기의 발전은, 은총의 역사하심을 오로지 성례전에 결합시키려는 쪽으로 기울었다. 성례전이 은총을 포함한다는 사상은 결국 성례전만이 은총을 가져온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도미니끄 학파와 프란치스코 학파는 성례전이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이며, 그 단순한 집행을 통하여 자동적으로 역사한다는 견해에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성만찬 교리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화체설의 의미로 교리화 되었다. 이 공의회에 따르면, 축사의 말을 할 때, 신적인 힘으로 말미암아, 빵의 본질은 육체로, 포도주의 본질은 피로 변한 다음에, 제단의 성례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와 피는,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3. 스위스 종교개혁에서 쯔빙글리의 신학과 그 위치

1518년 쯔빙글리가 취리히의 신부가 되었을 때 쯔빙글리는, 이미 루터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여 있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자신이 루터로부터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단지 자기 개인이 성경연구를 통해 루터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1518년 말기에는, 그가 루터의 저술들을 다소 읽고 있었으나, 1523년 그는 스스로의 독창성을 주장하면서 복음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이 루터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챨스 5세와 교전 상태에 있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스위스 연맹에 대한 파병 요청과 이에 대한 교황의 강압에 의해 취리히는 교황과 갈등을 일으켰고 1522년 웜스 회의가 열린 다음해에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임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취리히의 시의회 정부는 그를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성경적인 신앙과 생활을 복원하고자 했는데, 루터와는 좀 다른 것이었다. 즉 루터는 성경에 상치되지 않는 한, 모든 전통적인 모습을 계속 고수하고자 했으나, 쯔빙글리는 성경의 구체적인 보장이 없는 일체의 관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 원래 모습에 관한 쯔빙글리의 입장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특정 전통에 의해 채색되어 있었으니, 곧 저스틴, 오리겐, 어거스틴,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등 여러 인물들 속에 용해되어 있는 신플라톤적 사고였다. 특히 그는 성찬에 관해서 루터와 상당한 대립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성례야말로 나머지 전체신학과 일관성 있는 흐름을 이루는 일부였기 때문이다.

1529년 필립의 중재아래 종교개혁의 주요 지도자들이 말부르그에 모였지만 성찬의 의미와 효력에 관해서는 합일점을 찾지 못하였다. 성찬론의 문제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이들의 대조되는 견해의 연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곧 하나님의 계시의 성질에 관한 이해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쯔빙글리의 성찬에 대한 일반적 이해

쯔빙글리는 성찬만이, 이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이미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확인하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빵과 포도주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그리스도는 이 지구상이 아니라 천상에 구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좌정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는 1523년 후반부터 자신의 견해를 굳히기 시작하는데 요한복음 6장 63절을 근거로 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초기 스콜라주의자들에 일치하여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존재를 지역적인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성만찬에의 몸의 임재를 배척한다.

그의 이론은 단순하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에서 드려지는 몸과 피의 표징들이다. 성만찬 제정말씀들 가운데 "est"(이다, 존재한다)라는 말은 "significat"(상징한다)라는 말과 동격이 되는 것이다. 오직 신앙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사유할 수 있다.

쯔빙글리는 언제나 두 속성들의 관념상의(추상적인)차이를 전제로 말한다. 그의 신성은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지만, 그의 인성은 하늘의 특별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으며 우리 부활의 예표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육체가 편재할 수 없다는 분명한 이유이다.

루터는 양성론의 교리를 성찬에 적용하여 두 본성의 불가분리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신성이 결코 인성을 삼키지 아니하고, 단지 인성은 신성의 기관과 전달자가 되며, 나아가 인성의 정확하고 철저한 보존이, 예수로 실제 우리에게 계시된 신이 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루터 사상의 배후에는 옥캄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는 이 육체의 편재에 덧붙여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이 하늘나라의 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는 성찬에서, 속성의 교류를 통한 절대적 편재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인성(그의 몸을 포함한)을 지닌 인간 예수로서도 성찬에 임재한다고 보았다. 떡이 실제로 먹혀짐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적 몸이 임재한다. 떡과 몸이 함께 동시에 현존하게 된다.

루터는, 육체적 임재를 영적 임재와 더불어 강조했는데 쯔빙글리는 루터가 전자만을 고집한 것으로 오해한 듯 싶다.

5. 상징설을 위한 쯔빙글리의 논리적 배경

성찬교리는 중세의 중요한 문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혁 전시대의 미신이 다 이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복잡하고 혼미했던, 그래서 가장 시급히 정리될 필요가 있었던 주제였던 것이다.

쯔빙글리는 당시 지배하던 3개의 조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즉 첫째 문자적으로 떡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전통적인 견해, 둘째 떡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견해, 끝으로 떡은 그대로 남아있고 그리스도는 그 안에 그것과 함께 임재한다는 견해 등이다.

그는 이 세 가지 견해들을 비판하면서,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잘못된 확신 속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특히 루터의 공재설은 논리적으로는 옳으나 실재상으로는 틀렸다고 일축하며 상징설을 주장하였다.

6. 왜 상징주의인가?

가장 치열했던 논쟁은 고린도전서 1징 24절의 "This is my body"에 관한 해석이었다. 쯔빙글리는 이 구절이 문자적으로 취해질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요한복음 15장 5,7절과 누가복음 8장 마태복음 13장 등의 예를 들었다. 또한 누가복음 22장 19절에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으로부터, 떡은 성찬에서 단지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육체를 비유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쯔빙글리는 출애굽기 12장 1-11절의 유월절 어린양 자체가 유월절이 아니듯이, 떡이나 포도주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나 피는 아니라고 말했다. 따라서 떡은 그의 몸이 우리를 위해 주어졌다는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This cup is new covenant in my blood 라고 할 때 그 cup은, 그 속에 담긴 피를 의미하는 것이지 용기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창세기 17장에서 할례가 언약으로 불린 것처럼, 포도주는 새 언약이라는 말은, 하나의 말하는 방식이지, 포도주 자체가 언약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말의 방식을 헬라어에서는 metonymia 혹은 catachresis라고 한다.

7. 평가 및 결론

루터는 일찍이 "입으로 먹음"에도 불구하고 이 은사를 수납하는 것은 반드시 영적이어야 한다. 오직 신앙만이 주님의 임재 하시는 몸 안에서 생명과 구원을 이해한다. 이것은 육체적 먹음을 수반하는 영적 먹음이다. "오직 신자만이 그 속에, 그것과 함께 전달되는 축복을 소유하게 된다. 그 몸을 자체로는 잡거나 취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보화를 분별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심령의 신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적어도 쯔빙글리는 어떤 면에서, 루터의 이 부분을 극단적으로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루터는 육체적 임재를 영적 임재와 더불어 강조했는데, 쯔빙글리는 루터가 전자만을 고집한 것으로 오해한 듯 싶다.

쯔빙글리의 주 관심사는 어떻게 임재하느냐였다. 그는 성경 자체가 증거 하듯이 승천 전에는 육체 안에서 지역적으로, 승천 후에는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점에서 그는 루터보다 더 성경근거 인용에 충실하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속에 임한다는 교리는 사도신경(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을 불신한다는 표시이다.

성찬논쟁이 구원과 교회의 참된 시금석으로 직결될 만큼, 신중하고 치열했던 당시 상황에서 쯔빙글리의 긍정적인 영향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나. 쯔빙글리의 성찬론의 특징

쯔빙글리는 성례의 교제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어거스틴을 논박하여 요한복음 6장 53-56절의 말씀들은 영적인 먹고 마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의 유일회적 희생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그 이후 어떤 희생도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는 희생이 아니라, 유일회적 희생에 대한 기념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구원의 보장이다.

쯔빙글리는 1524년 후반에 자신의 성만찬 이해에 본질적인 통찰을 획득하였다. 문제는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 라는 제정의 말씀의 의미였다. 쯔빙글리는 요한복음에 근거하여 성만찬의 영적 성격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제정 말씀중의 "이다"(is)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대신에 이 말은 "표상한다"(signifies)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살과 피를 희생으로 드렸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를 "표상한다"라고 말씀하고자 의도하셨다. 성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구원과 해방을 지시하는 상징들(signs)이지만, 이것들이 그 자체로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쯔빙글리는 성례가 구원의 수단이라는 견해를 배척했다.

쯔빙글리는 루터의 실제적 임재에 대항하여 경험적, 주석적, 교리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만일 "이다"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면, 실제적인 몸과 피가 보여지고 미각으로 느껴져야 할 것이다. 볼 수 없는 육체란 순전한 넌센스다.

둘째 우리들의 지상적, 가시적, 물질적 세상("몸")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영의 담지자일 수가 없다; 세상 속의 모든 것은 - 성찬시의 빵과 포도주는 물론 인간에 의해 발설된 말도 - 그 자체를 떠나 멀리 다른, 더 높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실재("영")를 지시한다. 예수의 제정의 말씀은 은유로 이해되어야 하며, 성만찬은 감지할 수 없는 영적 사건을 대체하는 행위이다.

셋째 쯔빙글리는 "속성의 교류"교리를 배척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 후에 육체적으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그는 육체적으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에 임재할 수 없다. 쯔빙글리는 편재교리를 부정했다: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예리한 구분을 신인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비록 실제적 임재를 배척하기는 했지만, 그는 성찬에 구원의 은사가 현존한다는 것을 단순히 부정해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현존을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회상하도록 성찬식의 거행을 통해 자극 받는 신자들의 마음속으로 이동시켰다. 회상의 측면은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단순히 기억한다는 것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플라톤적으로 이해된 기억 주체와 객체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쯔빙글리의 "회상"이라는 말의 이해 속에 반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특별한 종류의 임재가 그의 이해 속에 도입되었다.

넷째 쯔빙글리는 성찬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와 그의 죽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선포하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의 충실한 회상은 이러한 외적 절차들 뒤에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성찬에 대한 쯔빙글리의 이해를 형성하고 있다.: 회상, 감사, 회집, 고백, 맹세.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시행이나 그 구성요소인 빵과 포도주가 내적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커다란 주의를 기울였다. 빵과 포도주는 성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하고, 이들을 그것들이 지시하는 실재로 인도해 준다. 그런 이유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에 대한 '신앙적 명상'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은 '구원의 극장'이지만, 단지 이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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