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에 대한 소고

저자 미상


I. 서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실은 철저한 신앙고백으로 되어질 때 가능하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내용 중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예배의 대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니게 되고,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영원한 창조주가되시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를 변화시키시는 분으로 우리의 예배 속에 함께 하시는 분임을 발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만찬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이 된다는 사실은 성서적 증언이나 교회 전통 속에서 잘 알려져 있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만찬을 통해 이웃과 하나되는 공동체의 사건으로 함축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성만찬은 예배에 나타난 요소라기보다는 일년에 한 두번 정도 거행되는 형식적 예식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부터 예배에 여러 가지 문화적인 요소들이 첨가되기 시작했고, 중세이후 종교 개혁 당시에는 서방 교회 예배가 심각할 정도로 그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1  어쩌면 오늘날 종교 다원화시대의 신중심주의로 귀착되는 것을 볼 때 이런 현상은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을 상실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따라서 본 소고는 성만찬의 참된 의미를 찾아봄으로써 영성이 충만한 성만찬과 그 사회학적인 관점을 통해 오늘날 희석되어 가는 하나님 찬양-경배와 예배의 대상으로-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성만찬이 처음 기록된 성서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고, 초대교회 공동체에 나타난 성만찬과 변질된 중세의 성만찬,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현대의 성만찬 제도를 간략히 다룬 다음 그 대안으로서 WCC의 BEM문서에 나타난 성만찬 제도와 영성신학적 입장에서 본 성만찬과 사회학적 관점으로 평가하고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이 속에서 나타난 성만찬의 하나님의 찬양이 하나님나라를 위한 공동체적 의식의 발현이라는 사회학적 접근에서 오늘날 형식과 제도에 빠진 한국 교회의 예전을 하나님나라의 회복이라는 대명제를 향한 작은 몸부림이 되었으면 한다.

II. 본론

 1. 성만찬의 성서적 전승

  초기 형태의 성만찬 예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성만찬에 관한 신약성서가 제공하는 자료에는 마가복음 14장 22-25절, 마태복음 26장 26-29절, 누가복음 22장 15-20절, 요한복음 13잘 1-11절, 고린도전서 11장 23-28절이다. 여기에서 마태의 본문은 마가를 따르고 있고, 요한의 본문은 발씻음의 제의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누가는 바울의 본문과 마가의 본문을 자료로 하며 이 둘을 종합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2 최후의 식탁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으로 고린도전서 11장 23-28절과 마가복음 14장 22-25절의 두 본문이 남는다. 이 두 전승은 결국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출발되었다. 결국 이 두 예식문이 후대에 발전되어 '성만찬 제정'으로 고백되어 졌음을 알 수 있다.   

  1) 마가공동체의 성만찬 전승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막14:22-25)  여기에서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라는 도입구로 시작되는데 이 사건은 복음이라는 예수 사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일부로 소개되고 있다.(3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나 기념에 그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와 제자들 간의 공동체적 식사에서 나눔의 관계성을 잘 묘사해 준다. 마가 공동체의 식사공동체는 예수의 행함을 통한 사랑의 만찬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2) 바울공동체의 성만찬 전승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십시오.

  이 전승은 마가 공동체의 성만찬 전승보다 더 오래된 전승인데, 이 전승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행하셨다는 역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의 신비한 카리스마적 계시에 있는 것이다.(4  또한 바울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념으로서 성만찬이 거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 나를 기념하여 ---- 이러한 기념은 예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반복되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26절에서 "선포하라"는 말의 사용으로 바울의 교회에서 선포가 '주의 죽으심(케리그마)'을 전하는 거룩한 언어였던 것 같이 성만찬을 반복하여 '죽의 죽으심을 전하는 거룩한 행위'로 본 것이다.(5 어쩌면 이러한 바울공동체는 비밀히 예수의 복음을 지켜 가는 지하공동체가 아니었나 생각되어 진다.

  3) 두 전승에 나타난 사회학적 의미
  이 두 전승 속에 나타난 식사 공동체는 단순히 말로만 행해지던 공동체가 아니라 실천적이고 생산적인 관계 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공동체의 형제에게 밥을 제공하고, 타인에게 생산의 결실을 제공할 때 그 단계는 실천적이고 생산적인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밥을 나누어 먹을 때',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할 때', '소유물과 재산을 팔 때' 그 모든 것은 정의로운 사랑의 철저함을 가리킨다. 그 사랑은 이상적, 지향적, 비물질적 사랑이 아니었다. 그 사랑은 구체적, 실제적, 효과적, 육적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말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사실로 입증된다. 즉 기도만 함께 바친 것이 아니라 '밥'도 함께 먹었던 것이었다.(6 특히 고린도전서 11장 18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교회공동체가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의 계층이 구분되어 있었기에 부자는 부자끼리, 가난한자는 부자의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갈등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식사공동체의 이러한 폐단을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이는 분열에 대한 지적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공동체의 최대의 적이 '분열'이고, 이런 분열로 인한 공동체의 이탈과 상실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바울공동체의 성만찬은 완전한 연합의 실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같은 실현을 지향해 가는 하나의 수단이 된 것이다.(7 따라서 바울공동체 속에 나타난 성만찬은 공동체를 위한 만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가 공동체의 성만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후 고난에 대한 동참으로 잔의 상징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마가 공동체의 삶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 당시의 환난과 핍박의 절박함을 공동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열둘이 다 이 잔을 마셨다고 기록함을 통해 발견되어 진다. 이는 철저하게 공동체적 삶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의 처참한 공동체의 상황을 예수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던 노력이 엿보인다. 이러한 마가의 신앙공동체는 그들의 수난을 신앙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전기적 예수의 사건을 재건하였다.(8 그리고 마가 공동체의 식사는 하나님나라에서 행해질 종말론적인 잔치의 예표로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식사공동체는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나라 공동체의 전례가 되고, 이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세상가운데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몸에 동참하는 기념 행위로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현재화하는 경험인 동시에 종말에 이루어질 궁극적 구원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성취의 경험으로서,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할 때 이러한 사건은 현실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3. 초대 교회의 성만찬 의식

  1) 디다케의 성만찬 예식에 나타난 사회학적 이해

  9. 이에 성찬에 대하여 언급하면, 다음과 같이 감사를 드리십시오.
   (2) 첫째, 잔과 관련하여 :
      우리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종, 곧 예수를 통하여 당신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당신의 종 다윗의 거룩한 줄기에 대하여
      우리는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으리로다.
   (3) 부서진 빵에 대하여 :
      우리의 아버지여,
      당신의 종 예수를 통하여 당신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생명과 지식에 대하여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으리로다.
   (4) 이 부서진 빵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그 때 함께 모여서 하나가 되듯이,
      당신의 교회도 땅 끝으로 부터
      당신의 왕국으로 함께 모여지게 하소서 :
      영광과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그러나 어떤 사람도 주님의 이름으로 세계를 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성찬을 먹고 마시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것에 대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0. 여러분들이 충분히 먹은 후에, 다음과 같이 감사를 드리십시오,
   (2) 거룩한 아버지여,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심령 속에 거하게 만드신
      당신의 거룩한 이름과
      당신이 당신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신 지식과 믿음과 불멸에 대하여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당신에게 영광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3) 전능하신 주인이여,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우리들이 당신에게 감사를 드리도록
      사람에게 즐길 수 있는 음식과 음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은혜롭게
      영적인 음식과 음료를
      그리고 당신의 종을 통하여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 무엇보다도 우리는 당신이 전능하기 때문에 감사를 드립니다 :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으리로다.(9  

  여기에서 마가나 바울의 성만찬보다 한층 더 발전된 전승들이 나타난다. 감사의 기도문이 나타나고 식사를 통한 감사의 잔치가 펼쳐져 보인다. 또한 이들 공동체 내에서 행해진 의식들이 그들의 실제적인 삶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고, 그들의 생활에 구체적인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또 9장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만찬은 세례 이후의 행사로서 그들의 삶을 세상과 철저히 구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어쩌면 이 공동체는 철저한 공동체생활이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디다케'의 유명한 본문 안에 나오는 성찬의 거행은 우리에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주의나 거짓말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고-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처럼(행5:1-11)-철저하게 공동생활을 하면서,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교회 바닥공동체와 흡사한 예루살렘 기타 다른 장소들의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0 이들에게는 성만찬의 의미가 그들을 묶어주는 거룩하고도 실제적인 예전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지탱시켜 주고, 그들의 삶을 이어가는데 밑받침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2) 저스틴의 성만찬 의식
  저스틴에 의하면 2세기 중반의 교회들은 주일날에 모여서 성서를 봉독하고 집례자로 부터 설교를 들었으며, 설교 후에 떡과 물로 희석된 포도주의 봉헌과 성별의 기도와 분병례와 헌금과 구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변증서』65-67장의 내용에서 살펴보면

 '감화를 받고 가르침에 동의한 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합심하여 기도한다. 이 기도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였고 기도 후 입맞춤의 인사를 한다. 그 다음 성찬식이 거행된다.  이 성만찬에 동참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가름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주일날 설교 후 성찬의 참여와 헌금을 드린다. 이 헌금은 고아와 과부와 병이나 다른 이유들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감옥에 갇혀있는 자나 나그네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집전자는 모든 궁핍한 사람들의 보호자 역할을 한다고 증언하고 있다.'(65-67장 요약)(11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성만찬 의식은 그들 공동체만의 것으로 한정되었고, 그 속에는 철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이 현실화되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들 공동체는 성만찬 축제를 통해 그들 공동체 내의 어려운 자들과 함께 하는 나눔의 식사공동체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가난한 자들과 소외 받는 자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프로그램으로 성만찬 의식이 거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구체적인 물질들을 나눔으로써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실천이 계속되어 진다는 사실은 오늘날 형식화 되어버린 성만찬 의식의 참된 정신이 발견되어질 것이다.

  3) 히폴리투스의 성만찬 의식
  최초의 성문화된 성만찬 예식문은 3세기초(215년경)에 로마의 감독 히폴리투스가 기록한 『사도의 전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만찬 기도문을 만들어 사용한 것 같다.  그의 기도문에서 살펴보면 특히 고난 중에서 구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감사로서 성만찬 의식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12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 공동체에 처한 상황을 성만찬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통한 공동체의 행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에서 언제나 그들은 개인-타자-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일원으로서 참된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지켜갔음을 증거해 준다. 따라서 성만찬은 초대교회를 통해 그 교회 공동체를 지탱시켜주고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방편으로서 거행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4. 중세의 성만찬 의식

  초기의 경우 『그레고리오 성사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평화의 입맞춤이 진행되었고, 초대 교회의 성만찬 예전과 거의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8-11세기에 걸쳐 기독교 복음이 유럽 대륙의 프랑크족과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됨으로서 예전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시대에 실시된 성만찬은 미사 속에 전락되어버린 느낌이 들 정도로 형식화되기 시작했다. 제단이 생겨났고, 신자석과 사제석으로 구별되었고,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성격이 상실되고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에 대한 공경심이 성행하게 되었다.(13  중세에 들면서부터는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성만찬을 하지 않고 일 년에 한 두 차례만 하게 되었다. 이런 습관은 19세기까지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영향으로 12-15세기에는 연출미사 시대로 접어들었고, 물질의 화체설의 신학으로 인해 초와 종을 사용하였으며, 떡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가슴을 치는 행위와 떡을 만진 손가락을 경의의 표시로 계속 맞붙이는 등 외적인 동작이 형식화되어 성만찬이 진행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14 결국 중세의 성만찬은 초대 교회나 성서 전승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예전의 형식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속에는 참된 정신이란 고작 거룩한 예전에 참여했다는 것뿐이고, 그들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나눔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1545년 트렌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뿌리 깊은 전통의 결과 오히려 의식은 중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고정되고 말았다. 이는 나중 종교개혁과도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5. 종교 개혁 이후 성만찬 의식

  종교개혁 당시에 서방교회의 타락상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배가 설교 없는 피 없는 희생제사(미사)로 전락되었고, "그 역점도 떡과 포도주를 나눔에 있지 않고 그 물질의 성체화에 미신적인 요소까지 곁들일 정도가 되었다."(15  이러한 풍토 속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한 신자들은 미사도 행사화되어서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집례되는 등, 참된 성만찬 의식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떡 대신 점차 돈으로 봉헌을 하거나 면죄부를 사도록 강요되어 개혁은 필연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16

  그래서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가들은 공통적으로 카톨릭 교회가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드리는 미사와 성체화의 교리를 거부하면서 성서적인 예배로의 환원과 모국어 예배에 힘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영국 교회는 로마 카톨릭 예배의 많은 부분을 답습하였고, 쯔빙글리와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과의 완전한 단절을 꾀하였기 때문에 쯔빙글리는 오르간, 음악, 의복, 그림까지도 거부하였고, 재세례파는 공중 예배의 형식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칼빈과 마르틴 부처는 이 양자의 입장에 섰다.

  결국 종교 개혁 이후 모든 교파는 성만찬 예식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격감시켰고, 깊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반 카톨릭 적에만 신경을 집중시켜 그다지 성만찬 의식이 발전되지 못한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성만찬은 오늘 우리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것이다.

  6. BEM 문서에 나타난 성만찬 제도(17

  이 문서는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신앙과 직제위원회가 50년 고심 끝에 작성한 Baptism, Eucharist and Minister를 옮긴 것으로 근본 취지는 WCC회원 교회들 상호간에 타교파의 세례와 직제를 인정하고 함께 성만찬적 사귐에 참여하자는 내용으로서 16세기 교회 분열의 원인 제공을 한 성만찬 의식을 다시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문서로 엮어가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먼저 BEM 문서의 내용 중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면  "①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 언제나 말씀과 성례를 포함하고 있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기념하는 것이고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찬양의 대제사이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심과 동시에 이 기념의 의식을 통하여 활동하신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아 있고도 거룩한 제사로 드리게 된다. 이 성만찬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해의 종들이 되기 위하여 사랑으로 성화 되고 화해된다. ③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 성령은 성만찬을 가능케 하시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고, 성만찬의 모든 행위는 '성령 초대의 기원'의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성령은 새 계약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성화 되고 새로워지고, 모든 진리와 정의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하여,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힘을 얻도록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한다. ④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교회의 삶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성만찬적 사귐은 동시에 교회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성만찬은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다. 즉 온 세상을 대신하여 감사와 봉헌을 드리는 대표적 행위로서 신자들을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과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연대성은 기독교인 자신들이 그의 종되심에 동참하는 행위로서 구속사건의 세계 내적 임재를 증거해 준다. 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창조의 궁극적인 갱신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비전을 열어 주며 또 그 통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들은 성만찬을 통해 화해되었고 또, 사람들 가운데서 화해의 종이 되도록, 또 부활의 기쁨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인데 이 참여는 복음선포, 이웃에 대한 봉사, 이 세계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감과 같은 일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성만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유능한 증인이 되도록 하는 새로운 현실을 현 세대에 가져온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앞서 살펴 본 초기의 성만찬의 근본 의도가 되살아난 느낌이다. 이러한 BEM 문서는 오늘 현대 교회에 새로운 성만찬의 의식이 제정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해준다. 특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교회공동체가 해야 할 사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여적 활동이 성만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임재 역시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성만찬 의식은 철저한 세속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7. 영성신학에서 비추어 본 성만찬 예배의 회복

  앞서 살펴본 바대로 성만찬 의식은 그 숨은 본질이 회복될 필요가 있음을 직시한다. 오늘날 교회가 형식적으로 전락하는 것이 마치 중세기의 예전과 같은 느낌을 갖는다. 따서 여기에서는 그 대안으로서 영성신학에서 성만찬 의식의 회복을 다루고자 한다.

  1) 예배의 의미
  예배를 일반적인 종교의 개념으로 본다면 신적인 것에 대한 외경(畏敬)의 표현이라 불 수 있다.(18  그러나 기독교 정신으로 볼 때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응답인 것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와서 은혜와 권능을 베푸실 때에 사람들이 그 은혜와 권능의 하나님께 응답하여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것은 임재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응답하는 인간의 경배요, 찬미요, 감사로 이어질 때(19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더 첨가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즉 성령의 사건이 가미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배는 그분을 진정으로 만났을 때에만 가능하지만, 동시에 예배의 의무를 다하여, 예배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예배하기를 힘쓸 때에 그 예배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20

  2) 영성신학에서의 성만찬
  성례전은 신앙의 징표요, 은총의 표시이다. 우리가 성만찬 상앞에 설 때에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본다. 성만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의 신앙을 소생시키고 굳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성만찬에 참여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요, 주님의 능력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우리의 영성을 개발하는 중대한 기회가 되며, 성만찬에 참여할 때에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성만찬은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성만찬은 하나님이 역사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를 만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떡과 잔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신비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3) 성만찬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언약으로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할 때에 하나님은 언약에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4) 성만찬은 하나님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직접적으로 우리가운데 임재하시는 상징이다.(21

  또한 성만찬은 구강 적인 통합의 성례전이다. 그것은 촉각,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이라는 감각의 양태로 나타난 일종의 행위이다. 인간은 그것이 사람이든 음식이든 다른 것과 감각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성만찬의 행위에서 부활한 주님의 인격은 우리의 음식이 된다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다. 우리 주님이 대표하는 그 모든 것을 우리가 감각적으로 통합하여 어떤 세계를 형성하고 그 세계에 속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22

  영성신학에서의 성만찬 의식은 하나의 초월적 존재의 승화와 함께 세상에 참여하는 과정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초월적 존재의 승화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세상에 대한 참여의 과정을 더욱 중요시하게 설명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네 번째 장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 필요와 위기에 처한 이웃을 봉사하며 도우며,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하여 애쓰는 '참여의 삶'이다. 방어할 힘이 없고 짓밟히는 이웃에 대한 자비는 초대교회 못지 않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중요한 구성요소로 남아 있다."(23

  성만찬은 이와 같이 소외 받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사건이었음을 영성신학에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고통 당하는 자들을 위한 봉사와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 요소였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이러한 성만찬의 영성적 이해를 올바로 함으로써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만찬 의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8. 성만찬의 사회학적 이해

  여기에서는 성만찬 속에 나타난 공동체 회복에 그 중심을 맞추어 다루고자 한다.  정의로운 상호 사랑 안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 공동체 혹은 인간으로서, 공동생활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개인으로서 자유스럽고 충일한 그 구성원들의 애덕 안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생활 전체를 함께 하는 공동체이다.(24

  예수는 경제적인 공동체 이야기 가운데 "내가 굶주리고 있었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나를 배부르게 하고, 옷을 입혀주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 기준에서와 같이 성만찬 공동체의 공동식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까지도 나누어주는 나눔의 공동체 사건으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이는 소외 받는 당시의 하층 계층에게는 두 가지의 희망을 준다. 하나는 당장 필요한 양식을 제공한 것이고 또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영원한 양식을 제공한 것이다.

  여기에서 거룩과 세속의 동시성이 성만찬 의식에서 발생한다. 빵과 포도주라는 세속적인 것을 예수를 통해 거룩의 양식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거룩과 세속의 과정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지는 않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만찬이 중세 이후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것을 분리시킨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성만찬의 사회학적 관점 속에서 "주의 식탁 위에 있는 빵은 가득찬 다른 모든 식탁이 있는 세상을 향해 항의하는 것이다."(25는 브라운의 말처럼 세상을 향한 성만찬이 거행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는 계속해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식탁의 사건을 모든 사람의 해방을 위한 축제로 남겨놓기 보다는 종교적으로 길들이고 순화함으로써 식탁의 사건은 결국 현상유지를 위한 방편이 되고, 외적 변혁보다는 내적 평온을 위한 자원이 되고 말았다."(26고하였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대로 중세 이후 성만찬이 집권자의 예배로 전락함으로써 근본적인 정신이 퇴색되어 버린 결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나눔의 실천으로 성만찬 의식이 진행되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이는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이 거룩한 주님의 피와 살로 되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에서도 모두가 참여하고 나누어지는 공동체의 회복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때에만이 참된 성만찬 의식은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Ⅲ. 결론

  성례전은 우리에게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성례전은 진리의 저 순간들을 재현해 보여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삶의 본질과 공동체의 회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만찬의 거룩함을 퇴색시키는 것은 인간의 죄악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결코 영과 육을 분리해서 성만찬 의식을 거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현존하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부름에 응답하고, 이를 세상의 현장에서 펼쳐내는 참된 성만찬 의식이 오늘 한국 교회에서 새롭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각주

1.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27-31
2. I. Howard Marshall, 『마지막 만찬과 주의 만찬』, 배용덕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3), 47.
3. 조태연, "초기 예수 운동 접근을 위한 서설" 『기독교사상』433, (1995년 1월호): 201.
4. 위의 글, 201.
5. 위의 글, 202.
6. 엔리케 뒷셀, 『공동체 윤리』, 김수복 역, (왜관: 분도 출판사, 1990), 29.
7. 찰스 K. 바레트, 『고린도전서』, 국제성서주석 36,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3), 304.
8. 조태연, '바울의 실천신학과 마가의 예수신학', 『기독교사상』434 (1995년 2월호), 132.
9. 자세한 본문은 이형기교수의 『초대교회의 신앙문서, 속사도 교부들』, (서울: 기독교문사, 1988), 203-18을 참조하라.
10. 엔리케 뒷셀의 책, 29-30.
11. Cyril C. Richardson, "Early Christina Fathers" Volume I,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285-88.
12. 네메세기, 『주의 만찬』, 김영한 역, (서울: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1986), 96.
13. 쯔지야 요시마사, 『미사 : 그 의미와 역사』, 최석우 역, (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91), 131-4.
14. 위의 책, 112.
15.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32.
16. Webber, Robert  E., 『예배학』, 김지찬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92-97.
17.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BEM 문서』, 이형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1993) 의 책중에서 성만찬 부분을 참고하였다.
18. 존 매카이, 『에큐메닉스』, 민경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5), 134.
19. 오성춘, 『영성과 목회』, (서울: 장신대 출판부, 1992), 264-5.
20. 위의 책, 267.
21. 오성춘의 책, 274.
22. U.T. 홈즈, 『목회와 영성』, 김외식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187.
23. 오성춘의 책, 275.
24. 엔리케 뒷셀의 책, 29.
25. 로버트 M. 브라운, 『영성과 해방』, 백상열 역, (서울: 한국신학 연구소, 1990), 110.
26. 위의 책, 111.

참고 도서*

1. 외국도서

Cyril C. Richardson, "Early Christina Fathers", Volume I, (Philadelphia:  Westerminster Press)
Geoffrey Wainwright, "Doxolog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2. 번역도서 및 국내도서

네메세기, 『주의 만찬』, 김영한 역, (서울: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1986)
로버트 M. 브라운, 『영성과 해방』, 백상열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 『새로운 기조의 신학』, 이동준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정한교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87)
I. Howard Marshall, 『마지막 만찬과 주의 만찬』, 배용덕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3)
세계교회협의회, 『BEM문서』, 이형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엔리케 뒷셀, 『공동체 윤리』, 김수복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0)
존 매카이, 『에큐메닉스』, 민경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5)
쯔찌야 요시마사『미사: 그의미와 역사』, 최석우 역,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1)
U. T. 홈즈『목회와 영성』, 김외식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Webber, Robert E.『예배학』, 김지찬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프랭클린 M. 지글러『예배학원론』, 정진황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89)
김광식,『조직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박근원,『오늘의 예배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오성춘,『영성과 목회』, (서울: 장신대출판부, 1992)
이원규,『한국교회의 사회학적 이해』, (서울: 성서연구사, 1992)
이정배,『토착화와 생명문화』, (서울: 종로서적, 1991)
이정성,『이야기로 푸는 조직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3. 논문집
신영춘, 『성례전이 치유에 미치는 영향』,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석사학위
조동호, 『성만찬 기도와 명상자료 개발을 위한 기초 조사 연구』, 한신대학교 목회학 박사원 박사학위  

4. 정기 간행물
 조태연, "초기 예수 운동 접근을 위한 서설", 『기독교사상』433, (1995년 1월호)
------, "바울의 실천신학과 마가의 예수신학", 『기독교사상』434, (1995년 2월호)
 

 


ⓒ copyright    C · C·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