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일찍이 중앙신학교의 정용섭 교수는 주의 만찬이 없는 예배는 불구의 예배요, 불완전한 예배1)라고 했고, 한신대학교의 이장식 교수는 기독교 예배에서 주의 만찬을 제외시키고 나면 유대교의 회당예배로 전락되면서 기독교 예배의 특성이 상실되고 만다2)고 했다. 주의 만찬 예배가 참된 교회의 올바른 예배에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져 있는가를 밝혀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의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예배와 관련해서 주의 만찬 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주의 만찬 예배가 참된 교회의 올바른 예배와 어떻게 관련되어져 있는가를 밝히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에로 회복(A Restoration of the Ancient Order of Things)되어야 할 예배와 그것이 갖는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데 있다.
Ⅱ. 사도성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크다고 참된 교회인가? 역사가 길다고 참된 교회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르틴 루터와 쟝 깔뱅과 같은 개혁가들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친 때에 이미 기독교는 1,500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었고,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온 동․서방세계가 서방가톨릭교회와 동방정통교회를 국교로 하는 거대한 교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시급히 요구됐던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 참된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받고 받지 못하는 열쇠가 교회의 크기나 역사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통과 비정통의 잣대가 교회의 크기나 역사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참된 교회는 사도성에 있다. 사도성은 처음부터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는 잣대였을 뿐 아니라, 정경과 외경을 구별하는 잣대였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하였다.
이들 말씀은 교회와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모퉁이 돌은 이스라엘의 건축에서 방향과 각도를 잡기 위해서 네 모퉁이에 놓이는 커다란 돌이다. 교회를 건물에 비교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명령이 교회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반석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 모퉁이 돌들 사이에 놓이는 기초석들이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들이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의 방향과 각도는 모퉁이 돌이신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서 제한되어진다. 여기서 가르침에는 교리, 전통에는 침례예식과 주의 만찬을 포함한 예배예식 등이 포함된다. 이들 기초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주의 만찬을 포함한 예배예식은 교회의 중요한 기능들을 포함한다. 특히 주의 만찬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매우 분명하고도 심각한 어조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명령이었다. 이 명령이 예배의 네 모퉁이 돌들의 하나가 된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는 말씀이 나온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교회가 세워진 다음에 사도들이 전적으로 헌신했던 일은 이들 네 가지였다. 이 네 가지 일들이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들 네 가지는 모두가 서로 동일하게 중요한 동등한 요소들이다(Things that are equal are equal to each other). 사도들이 어느 것을 더 힘쓰고 어느 것은 덜 힘쓴 그런 것들이 아니라, 동일하고 동등하게 힘썼던 예배의 내용들이며, 이들 네 가지 요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중요한 기능인 예배를 완성시키는 네 모퉁이 돌들이다.
사도행전 2장 42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fellowship.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breaking of bread.
They devoted themselves TO prayer.[NIV]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에 전혀 힘쓰니라.
저희가 교제에 전혀 힘쓰니라.
저희가 떡 뗌에 전혀 힘쓰니라.
저희가 기도에 전혀 힘쓰니라.
이들 네 가지 요소들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신 예수의 가르침에 통제를 받은 제자들의 가르침과 전통이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예배를 완성시키는 네 모퉁이 돌들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들 네 가지 요소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예배에서 소홀히 된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한 주의 만찬이 빠진 예배는 불완전한 예배요,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주의 만찬을 자주 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주 하니까 경건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미국 사람들은 “too common”하다고 말한다. 매주일 설교하면 경건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흔한 일인가? 매주일 헌금하면 경건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흔한 일인가? 매주일 기도하면 경건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흔한 일인가?
Ⅲ. 사도들의 예배전통
사도들의 전통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8-9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했을 만큼 중요하다. 그들의 전통은 지혜와 지식의 영이신 성령의 감독아래 세워진 것이어서 오류의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알렉산더 캠벨은
사도들이 “오류의 가능성 없이 기독교의 전통들을 세울 수 있는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졌다”3)고 믿었다.
그러면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은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가? 신약성경 27권에 보존되어 있다.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정할 때 사도성이 있는가를 보고 결정하였다. 그 성경에 남겨진 주의 만찬과 관련된 사도들의 전통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후 30년경 사도들이 인도했던 예루살렘교회는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가정에 모여 주의 만찬을 행하였다(행 2:46; 5:12, 42; 20:7).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누가는 초대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전하고 있고, 46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는 애찬 혹은 공동식사의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이 시대의 주의 만찬이 아직 애찬과 구분되기 이전임을 감안할 때 누가의 이 보도는 예루살렘교회가 매우 자주 주의 만찬 예식을 거행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 “떡 뗌”에 관한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그것이 하루 세끼 먹는 보통의 식사와 구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주후 57년에 드로아교회는 바울 일행과 함께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는 모임을 가졌다(행 20:6-12). 주님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로 믿었던 이방인교회가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모여 주의 만찬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이다.
셋째, 주후 56년경 고린도교회는 자주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 모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주의 만찬을 질서 있고 성별 되게 행할 것에 대해서 33절에서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 말씀은 주의 만찬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 데, 이 모임은 언제나 “안식 후 첫 날”(행 20:7) 혹은 “주의 날”(계 1:10)에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에 관해 충고할 때에 “매주일 첫날에”(고전 16:1-4)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연보 할 때가 매주일 첫날이라면, 먹으러 모일 때도 매주일 첫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보를 주 첫날에 했다면, 예배가 주일날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넷째,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바울은 헬라어가 아닌 ‘마라나타’(הꚓ אꗺꙜꗪ/ Μαρανα θα: Lord, come: Our Lord is come)라는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말이 주의 만찬 기도문에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어를 말하는 회중에게 완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채 아람어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말한다.4)
‘마라나타’는 계시록 22장 20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헬라어로 번역되어 나타나고 있다. 100년경에 기록된 「디다케」 10장 6절에도 주의 만찬 기도문 마지막 부분에 아람어로 ‘마라나타’가 사용되고 있다. 그 내용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디다케 10:6]--100년경
만일 어느 누가 거룩하면 오고, 거룩하지 못하면 회개하라. 마라나타! 아멘.5)
[고린도전서 16:22]--56년경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마라나타.
[요한 계시록 22:18-20]--96년경
만일 누구든지 이 것들 외에 더하면. . . .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 .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여기서 우리는 “만일 ~ 마라나타”가 주의 만찬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원하는 주의 만찬 기도의 틀 속에 있었던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이란 점을 읽을 수가 있다.
요한계시록은 은총과 평화를 비는 인사말(1:5-6)에서부터 ‘마라나타’라는 끝맺는 기도와 마지막 축사(22:20-21)에 이르기까지 초대교회의 예배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16장 20-24절도 평화의 입맞춤과 마라나타 그리고 축도로 구성된 마지막 인사말로 맺고 있다. 그래서 로빈슨(J. A. T. Robinson), 리츠만(H. Lietzmann), 보른캄(G. Bornkamm), 그리고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같은 학자들은 이를 두고 “최초의 기독교 예배순서의 흔적” 즉 “서신의 결미를 장식하는 상투적인 용법일 뿐 아니라, 한 예배 공동체가 다른 예배 공동체에 보내는 인사, 즉 성찬을 들기 위해 모인 성도들 간의 대화”라고 주장하고 있다.6)
만일 주의 만찬이 매주일 예배순서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56~100년 사이에 기록된 이들 책들 속에 동일한 형태의 기도문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매주일 주의 만찬은 사도들의 전통을 직접 이어받은 교부들의 증언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진다. 1세기 말엽 로마교회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 40장과 44장에서 감독의 임무를 주의 만찬을 집례(ministration)하는 자로 언급하면서 이것이 그의 고유한 임무라고 말하고 있다.7) 이그나시우스도 서머나교회에 보낸 107년경의 편지 8장에서 클레멘트와 동일한 입장을 피력하면서 감독의 고유한 임무가 주의 만찬의 집례라고 주장하고 있다.8) 여기서 주의 만찬의 집례를 감독의 고유한 임무로 정한 것은 주의 만찬이 주일 예배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주후 100년경에 기록된 「디다케」 14장 1절은 “먼저 여러분의 과실을 회개함으로써 여러분의 봉헌물을 정결케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자신의 날에는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감사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다.9) 여기서 봉헌물은 떡과 포도주를 말하며 헌물이나 헌금도 포함될 수 있다. 주후 112년경에 소아시아 비두니아의 로마 지방장관이었던 소(小) 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트라잔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지역의 교회가 정한 날 새벽 미명에 모여 연도형식(alternate verses)의 찬양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며, 십계명과 같은 엄숙한 맹세를 했으며, 흩어졌다가 저녁에 다시 모여 “보통의 흠 없는 음식에 참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10) 여기서도 “떡을 떼며”라든지 혹은 “흠 없는 음식”이 주의 만찬과 애찬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가 애찬 형식의 주의 만찬을 모일 때마다 거행했다는 점이다.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순교자 저스틴(Justin)의 글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저스틴은 그가 쓴 「첫 번째 변증서」 65-67장에서 2세기 중반의 교회들이 주일날 모여서, 성경을 봉독하고, 집례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모두 일어서서 기도한 후에, 집례자에 의해서 빵과 물로 희석된 포도주의 봉헌과 성별의 기도와 분병례와 헌금과 구제가 이루어졌다고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11) 예배 후 노약자들이나 환자들을 위해서 집사들이 축성된 성찬을 배달하였다.
Ⅳ. 주의 만찬 예배의 교회전통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사도들의 예배전통 즉 성경정통이었다. 그러면 이 성경정통이 교회전통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겠다.
성경정통(Biblical orthodoxy)과 교회전통(ecclesiastical tradition)의 차이는 원본(original)과 사본(manuscript)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성경정통(Biblical orthodoxy)은 성경원본(original)에 비교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의 글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저자들의 문서는 원본이란 점에서 정통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성이 입증된 신약성경에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전통(ecclesiastical tradition)은 필사본(manuscript)에 비교될 수 있다. 필사본의 단점은 원본과 상이한 점에 있고, 필사본에서 필사본을 만들게 되면 오류가 축적되어 변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리서들이나 신앙고백서들은 성경해석의 결과물이고 잘못된 해석의 가능성이 없지 않으므로 체계화시킨 교리서나 전통에 의존하기보다는 성경에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전통 또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질 또는 이교문화와의 혼합을 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성경에로 특히 신약성경에로 돌아가야 한다.
매주 주의 만찬(weekly observance of the Lord's Supper)의 전통이 연1~2회 주의 만찬(annual or semiannual observance of the Lord's Supper)으로 바뀐 것은 전적으로 군인이었던 종교개혁가 쯔빙글리 때문이었다. 쯔빙글리는 주일 예배에서 주의 만찬을 분리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주의 만찬을 은총의 채널로 생각지도 않았고, 기독교 예배에 필수적인 부분으로 생각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의 주의 만찬을 주장한 루터나 깔뱅과는 달리 한 해에 네 번 정도로 고정시켜 버렸다.12)
이것이 성경정통(Biblical orthodoxy)과 교회전통(ecclesiastical tradition)의 차이들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전통들이 다 성경정통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사도들의 전통들을 이어 받고 있는 교회전통들도 많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교회전통들이 구원에는 아무런 악영향을 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성경정통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개혁의 여지가 없지 않다.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등의 장엄한 주의 만찬 예배의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들 장엄한 예전들은 상당부분 후대에 첨가된 교회전통이지 성경정통은 아니다. 성경에는 그런 장엄한 의식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성경전통에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들의 예배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신약성경에 예수의 전통, 사도들의 전통, 혹은 초대교회의 전통들이 전해지고 있으면, 그것들이 비록 원시적인 방법들일지라도, 그대로 해야 한다. 그밖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본질적인 문제이면 일치를 추구해야 하고, 비본질적인 문제이면 개 교회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사랑을 가지고 풀어야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푸는 열쇠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점은 신약교회의 문제는 신약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제사장들이 예복을 착용하였고, 유월절에 누룩 없는 떡을 먹었다 해도 그것이 만일 신약성경의 전통이 아니라면,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따라야하는 명령이 아니란 점이다(안식일 예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없고 구약성경에 있어서 그대로 행한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자유를 허용해야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도 없고 구약성경에도 없지만, 교회전통에 있어서 그대로 행한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자유를 허용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념이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기독교 역사도 교회전통도 아니고, 잘 나가는 교회나 교단도 아니고, 오로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예배전통뿐이다. 비록 그것들이 원시적일지라도!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들일지라도, 그것들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것들이라면 철저히 배제시키겠다는 것이 환원정신이다. 미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잘되는 이유가 다름 아닌 바로 이 정신을 제대로 알리고 바로 실천해 가는데 있다. 비록 그것들이 원시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무도 그것을 원시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누구나 그것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Ⅴ.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
이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이 분야의 개척자이자 선봉자였던 알렉산더 캠벨의 도움을 받아 설명해야 옳을 것 같다.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1788-1866)은 1823년 7월 4일부터 1830년 7월 5일까지 만 7년 동안 발행한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지에 1825년 2월 7일부터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A Restoration of the Ancient Order of Things)이라는 제목아래 일련의 기사들을 게재(揭載)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그는 초대교회의 신조(creeds), 명칭(nomenclature), 예배질서(the order of worship), 주의 만찬, 장로직, 집사직, 찬양, 친교 및 징계(discipline) 등에 대해서 논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을 1824년 9월 11일 토요일 훼이에트 군(Fayette country) 타운폴크 교회(Town-Fork Meeting House)에서 개최되었던 켄터키주 침례인선교사협의회의 회의록을 발췌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캠벨은 이 때 침례교 소속 목사였다).
회의록의 내용을 보면 종교상태와 개혁에 관한 주제로 전반적인 협의를 위해서 침례교 목회자들의 모임을 갖기로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기독교와 신약성경교회의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고, 이 결핍이 구성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제되어질 수 있는가 또는 정말 구제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가 발견되어지고 결정되어져야할 요점들인 그 표준에로 기독교와 오늘날의 교회를 가져오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라고 있고, 또 가장 피상적인 관찰자에게조차도 그것은 분명하다.13)
알렉산더 캠벨은 이 부분 가운데 특히 침례교 목회자들이 기독교와 오늘날의 교회를 신약성경의 표준에까지 가져오는 것을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면서 다른 한편 비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어 캠벨은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에 대한 공과(功過)를 평가하면서 신조(human creeds)와 사제(clergy)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의 첫 글을 실었다.
캠벨의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은 부정적인 면에서 버려야할 것과 긍정적인 면에서 회복해야 할 것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인위적인 신조들은 버려야할 것이고, 주의 만찬은 회복되어야 할 초대교회의 질서들이다.
캠벨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 5번에서 예배질서를 논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기독교집회들 안에 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한 기독교예배질서가 있다”(There is a divinely authorized order of Christian worship in Christian assemblies.)는 첫째 입장에 이어서 “기독교집회들 안에 기독교예배는 형식이 동일하다”(The Christian worship in Christian assemblies is uniformly the same.)는 둘째 입장을 밝히고 사도행전 2장 42절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the apostles' doctrine.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fellowship.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breaking of bread.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prayers.[KJV]
위의 영문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 뗌과 기도에 꾸준히 지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배는 예배질서의 다른 어느 요소들보다도 설교에 더 치중하고 있다.14)
이어서 알렉산더 캠벨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 6~9번까지에서 네 번에 걸쳐 “떡을 뗌에 관하여”(On the Breaking of Bread)라는 제목으로 매주 주의 만찬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떡을 뗌에 관하여-제3번” 기사에서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요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집회들 안에 신성하게 제정된(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한) 기독교예배질서가 있다.
둘째, 예배의 이 질서는 형식이(한결같이) 동일하다.
셋째, 떡을 뗌의 본질과 목적은 떡 뗌을 기독교집회들 안에 기독교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드는 것들이다.
넷째, 예루살렘에 차례로 세워진 첫 교회는 다른 어떤 친목예배나 덕을 세우는 행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떡 떼기를 꾸준히 지속하였다.
다섯째, 제자들은 정기적으로 주 첫날에 만났고, 최우선적으로 강조적으로 이 목적(떡 뗌)을 위함이었다.
여섯째, 이 목적을 위해서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교회의 설계 또는 최우선적인 목적이었다고 사도는 선언하였으며, 따라서 그가 차례로 세운 교회들에게 그것을 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일곱째, 주의 만찬 예배를 일년에 네 번, 두 번 혹은 매주일 이외에 다른 시기에 행하는 현재의 방법은 어떤 법도, 규칙도, 이유도, 권위도 없다.
여덟째, 우리는 초대교회가 행한 것에 반대할만한 몇몇 더 월등한 반대들을 고려해 보았고, 제시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반대들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우리는 명시된 전례와 주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서 한 곳에 모이라는 명시된 명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조건들을 수용하는 기고자에 의해서 몇몇 반대들이 제안될 때까지 다른 증거들과 고려들을 유보할 것이다.15)
알렉산더 캠벨은 또한 「기독교 조직」(The Christian System)에서도 「빵을 뗌」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글에서 매주 주의 만찬 예배의 중요성을 체계 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일곱 개의 명제를 설정하고 그 명제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이들 명제들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명제 1,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이라 불리는 한 집이 지상에 있다.
명제 2, 하나님의 집에는 언제나 주님의 식탁(the table of the Lord)이 있다.
명제 3, 주님의 식탁 위에는 오직 한 덩어리의 떡(one loaf)이 필요하다.
명제 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집의 구성원들(members)이며 가족(family)이다. 그들은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 칭함을 얻고 간주함을 받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세주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원하는 만큼 자주 기쁨을 가지고, 주의 식탁의 떡과 잔에 두려움 없이 참여할 축복된 자들이다.
명제 5. 이 제정을 위해서 ‘떡을 쪼갬’(breaking the loaf)이란 칭호를 얻은 한 덩어리의 떡은 성도들이 그것을 먹기 전에 쪼개져야(broken) 한다.
명제 6.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명제 7. 언제나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고 불리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한 덩어리의 떡을 떼고, 주의 잔에 공동으로 동참하는 행위는 기독교 회중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행하는 제정된 예배와 덕 세움의 일부분이다.16)
명제1에서 ‘하나님의 집’(ho oikos Theou=the house of God)은 히브리서 10장 21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말하고,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집’(oikos Theou=a house of God)은 개 교회들을 말한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지상에 하나밖에 없었던 것처럼,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하나님의 집은 한 집이다.
명제2에서 ‘주님의 식탁’(the table of the Lord)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서 사용한 ‘주의 상’(the Lord's table)에서 가져온 말이다. 캠벨은 구약시대의 성소에 상이 있었고, 그 상위에 매주 12덩어리의 떡이 진설(陳設)되어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집에도 언제나 바울이 말한 ‘주의 상’(the Lord's table)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이 ‘주의 상’이 일년에 한두 차례 쓰이기 위해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명제3에서 ‘오직 한 덩어리의 떡’(one loaf)은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 함이라”는 고린도전서 10장 17절의 말씀에서 가져온 말이다. 교회의 몸이신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고,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또 한 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깨지셨듯이 신약시대의 주의 상위에는 오직 한 덩어리의 떡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떡 뗌’ 또는 ‘떡 쪼갬’(breaking of bread)이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한 덩어리의 떡’이 문자적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한 덩어리의 떡으로 수십,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먹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 예전에서 한 덩어리의 떡을 쪼개는 의식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이고 예전적이며 시각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아진다. 교회의 형편에 따라 분병의 준비를 미리 할 수밖에 없다할지라도 한 덩어리의 떡은 주의 만찬 시간에 집례자에 의해서 반드시 쪼개어져야 할 타당한 이유가 명제5에서 설명되고 있다.
명제4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집의 구성원들(members)이며 가족(family)이다.”는 히브리서 3장 6절의 “우리는 그의 집(God's house)이라”는 말씀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들은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 칭함을 얻고 간주함을 받는 자들이다.”는 베드로전서 2장 5절,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a spiritual house)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에서 가져온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구세주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원하는 만큼 자주 기쁨을 가지고, 주의 식탁의 떡과 잔에 두려움 없이 참여할 복된 자들이다.
명제5에서 “이 제정을 위해서 ‘떡을 쪼갬’(breaking the loaf)이란 칭호를 얻은 한 덩어리의 떡은 성도들이 그것을 먹기 전에 쪼개져야(broken) 한다.”는 고린도전서 11장 23-24절에 “. . .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took bread), 축사하시고(had given thanks), 떼어(broke it), 가라사대(and said) . . . .”에서 가져온 말이다. 여기서 네 가지 예수의 행동 즉 (1)‘떡을 가지사’(took bread), (2)‘축사하시고’(had given thanks), (3)‘떼어’(broke it), (4)‘가라사대’(and said)는 주의 만찬예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예수의 전통이자 사도들의 전통이며 교회의 전통이다. 이 전통에로 환원하는 것이 주의 만찬 예전을 바로 잡는 바로미터(barometer)이다. 명제3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떡 쪼갬’ 또한 시간관계상 예배시간 전에 미리 준비해 두지 않을 수 없다할지라도, 주의 만찬 예전에서 집례자가 한 덩어리의 떡을 취하고, 축사하고, 쪼개고, 성도들이 받아먹는 의식은 매우 중요한 예수의 전통이자 사도들의 전통이며 교회의 전통이므로 반드시 환원되어야할 것이다.
명제6에서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것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함이다.”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의 만찬을 행하는 신학적인 입장의 표명이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에서 잡히시던 밤에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두 번씩이나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Do this in remembrance of me)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가져온 것이다.
기념설을 취한다할지라도, 「리마문서」17)에 정리된 대로, 주의 만찬이 인류의 구속을 이루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Eucharistia)이며,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과 십자가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Anamnesis)이며, 성령의 임재를 비는 제사(Epiklesis)이며,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연대하고, 수평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연대하는 교제와 화해와 나눔의 시간(Koinonia)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은총을 미리 맛보고 누리는 종말론적 식사(Anticipation)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초대교회가 예배를 제사와 물질의 성체화의식(聖體化儀式)으로 이해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예수가 주신 주의 만찬 제정의 말씀, “받아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다”(막 14:22)라는 표현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하신 말씀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의 제자들이 예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거나, 떡과 포도주가 축성된 후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 성체(聖體)를 먹고, 성혈(聖血)을 마셨다는 증거가 없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기념하라’는 부탁의 말씀으로 받아 드렸고,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고전 11:26)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성체신학(聖體神學)이 일찍부터 발전되기 시작한 원인은 영지주의 때문이었고, 봉헌신학(奉獻神學)의 발전의 원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제사문화 때문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기 때문에 주의 만찬을 무용하게 보았고, 희생 제사를 바치고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성전도 없고 희생물도 없는 기독교 예배를 무신론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18) 그리고 4세기경 키릴과 암브로시우스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봉헌신학(奉獻神學)과 성체신학(聖體神學)은 1545년에 열린 트렌트 공의회에서 명백한 가톨릭의 입장으로 표명되었다.
이에 종교개혁가들은 주의 만찬의 화체설(化體說), 희생 제사설(sacrifice), 그리고 떡 속에 피가 병존(concomitance)한다는 설에 반대하였고, 주의 만찬의 신성한 제정과 지속성,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 그리스도의 구속적 희생을 축하하는 기념적 특성,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와 차원 높은 예배의 중요성, 그리고 참여자들에게 내리시는 특별한 은총에 한결같이 동의했다.
명제 7에서 “언제나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고 불리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한 덩어리의 떡을 떼고, 주의 잔에 공동으로 동참하는 행위는 기독교 회중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행하는 제정된 예배와 덕 세움의 일부분이다.”는 사도행전 2장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는 말씀과 사도행전 20장 7절,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는 말씀에서 가져온 것이다.
Ⅵ.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이 갖는 현재적 의미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은 다섯 가지 측면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은 오늘의 교회들이 정통성 문제와 일치 혹은 연합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사도성은 처음부터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는 잣대였을 뿐 아니라, 정경과 외경을 구별하는 잣대였다. 따라서 “신약성경에로 돌아가자”는 신약성경교회운동은 이단들과 분열들로 얼룩진 오늘의 교회들에게 바른 교회가 무엇인가를 깨우치는 운동이다.
바울은 교회들에 보낸 서신서들에서 “배운 것”과 “전한 것”이란 말을 여러 차례 썼다. 복음을 누구한테서 배웠는가와 누가 전하였는가가 그만큼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서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에서는 주의 만찬의 전례를 전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께 배워서 사도들이 전한 것이 복음의 올바른 계보요 전통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주께 받아서 사도들이 전한 것 이외의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다(갈 1:8-9). 또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에서는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하였다. 요한도, 사도의 가르침 이외의 것을 가르치는 자를 일컬어, 거짓선지자요 적그리스도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이 가르치고, 사도들이 행한 예배전통대로 하지 아니하는 것을 일컬어 이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후대의 교회들이 신약성경 27권의 정경성 여부를 결정할 때에 기록으로 남은 문서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과 일치하는가를 보고 결정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은 오늘의 교회들에게 성경해석상의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총신대학교의 정훈택 교수는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구약성경이 탄생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제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이 말하는 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르게 읽는다면, 그는 구약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19)고 하였다. 이는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의 해석의 틀, 곧 예수와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했던 방식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저주의 대상인 다른 복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디모데후서 3장 15절의 말씀대로 구약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란 점에서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의 내용을 실체와 원형으로 구약성경을 모형과 그림자로 보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할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해석방법이 예수와 사도들의 해석방법이었고,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대로 하지 아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셋째, 사도들의 예배전통인 주의 만찬 예배는 성인성경공부가 거의 없는 오늘의 한국교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승천에 대한 기독교교리를 매주일 교육할 수 있는 훌륭한 장점을 갖고 있다. 필자는 매주일 1,000자 안팎의 주의 만찬 명상문을 작성하여 주보에 싣고 주의 만찬 시간에 성도들과 더불어 읽고 그 의미를 새기고 있다. 명상문의 내용은 신학적인 설명이나 국내외 역사적 인물들의 신앙고백과 삶을 내용에 담고 있다.20)
넷째, 사도들의 예배전통인 매주 주의 만찬 예배는 주일예배참석률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오늘의 교회들에게 교회성장을 위한 실천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주5일제근무시행으로 인한 주말여행이 잦아지고, 인터넷과 디지털영상의 발달로 교회출석률이 저하될 것을 우려하는 오늘의 교회들에게 사도들의 예배전통인 매주 주의 만찬 예배의 의미 있는 시행은 성도들의 교회출석률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사도들의 예배전통인 단순한 주의 만찬 예식은 주의 만찬의 도입으로 인해서 예배 시간이 길어질 것을 우려하는 오늘의 교회들에게 실천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또는 루터교회나 성공회와 같은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는 성만찬예전은 상당부분 후대에 첨가된 교회전통이지 결코 사도전통이 아니다. 장엄하고 긴 성만찬예전은 개혁정신에도 어긋난다. 개혁의 측면에서도 사도전통인 단순한 예배전통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Ⅶ. 나오는 말
이상으로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 주의 만찬 예배”에 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항상 나오는 원론적인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은 주의 만찬 예배를 포함하여 기독교 예배가 가야할 방향과 방법을 지시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일단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물음을 묻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 그대로 하겠다는 것이 환원정신이다.
사도들의 예배전통에로의 회복은 신약성경교회의 회복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 예수의 전통, 사도들의 전통, 혹은 초대교회의 전통들이 전해지고 있으면, 그것들이 비록 원시적인 방법들일지라도, 그대로 하겠다는 것이 환원정신이다. 우리가 따라야할 것들은 기독교 역사도 교회전통도 아니고, 잘 나가는 교회나 교단도 아니고, 오로지 신약성경에 담긴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뿐이다. 비록 그것들이 원시적일지라도! 또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들일지라도 그것들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것들이라면 철저히 배제시키겠다는 것이 환원정신이다.
이런 정신에서 발견되는 바람직한 교회의 특징은, 첫째, 신약성경에 기초한 단순한 믿음(a simple faith based on the New Testament); 둘째, 신약성경 기독교의 회복(a restoration of New Testament Christianity); 셋째, 이들 기초 위에서 벌리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일치운동(a movement for the unity of all Christians); 넷째, 침수에 의한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 by immersion)와 매주 주의 만찬(weekly celebration of the Lord's Supper)의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a restoration of ancient order of things)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각주
1)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 말씀과 성례전의 신학적 균형을 위하여,” 「기독교 사상」 제 22권 12호(1978년 12월), pp. 137-138.
2)이장식, “예배와 성찬 의식,” 「기독교 사상」 제 23권 제 2호(1979년 2월), pp. 63-65.
3)Alexander Campbell, Christian Baptism with Its Antecedents and Consequents(Nashville: Gospel Advocate, 1951), p. 27.
4)Gerhard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s.v. “maranatha”.
5)정양모 역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분도출판사, 1993), 10:6.
6)Robert E. Webber, Worship Old and New(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pp. 50-51.
7)J. B. Lightfoot, The Apostolic Father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6), pp. 30-32; 네메세기, 「주의 만찬」(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1986), pp. 86.
8)J. B. Lightfoot, op. cit., p. 84.
9)Ibid., p. 128.
10)Everett Ferguson, Early Christians Speak(Abilene, Texas: Biblical Research Press, 1981), p. 81.
11)Ibid., pp. 81-117; 네메세기, op. cit., pp. 90-91.
12)박근원, 「오늘의 예배론」(대한 기독교 서회, 1992), p. 33. 쯔빙글리는 종교개혁 이전에, 매 주일 예배는 주의 만찬예배로 드려졌으나, 신자들이 일 년에 한 번 정도 받던 성찬을 일 년에 네 번 받도록 배려를 했고, 주의 만찬을 거행하기 전 주일에 미리 신자들을 교리문답 등을 통해서 준비시켰다. 이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구원의 축제」 p. 181.
13)Alexander Campbell, "A Restoration of the Ancient Order of Things. No. Ⅰ," The Christian Baptist, February 7, 1825.
14)Alexander Campbell, "A Restoration of the Ancient Order of Things. No. Ⅴ: Oder of Worship," The Christian Baptist, July 4, 1825.
15)Alexander Campbell, "A Restoration of the Ancient Order of Things. No. Ⅷ: On the Breaking of Bread.--No.Ⅲ," The
Christian Baptist, October 3, 1825.
16)Alexander Campbell, The Christian System(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Publishing Co., 1989), pp. 266-294.
17)Faith and Order(WCC),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111(Geneva: WCC, 1982), s.v. “Eucharist.”
18)95년에 도미티안(Domitian) 황제가 기독교인이었던 자신의 사촌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를 ‘무신론’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했다. James B. North, From Pentecost to the Present: A Short History of Christianity(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1983), p. 25.
19) 정훈택, 「신약개론」(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8), 15쪽.
20) 필자의 주의 만찬 명상문은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홈페이지(http://kccs.info)→예배설교→성만찬명상자료 목록을 차례로 클릭하면 140여개의 명상문을 읽거나 다운로드할 수 있다.
참고서적
네메세기. 「주의 만찬」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1986.
박근원. “세례와 견신례의 의식적 가치.” 「기독교 사상」 1991년 8월호.
---------. 「구원의 축제」 도서출판 진흥, 1993.
---------. 「오늘의 예배론」 대한 기독교 서회, 1992.
이장식. “예배와 성찬 의식.” 「기독교 사상」 제 23권 제 2호. 1979년 2월.
정양모 역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분도 출판사, 1993.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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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James B. From Pentecost to the Present: A Short History of Christianity. 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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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ber, Robert E. Worship Old and New.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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