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의 사람 알렉산더 캠벨
Alexander Campbell As a Man of Action

글: 레스터 G. 맥알리스터(Lester G. McAllister, 제자교회)
조동호 목사 옮김


들어가는 말

돌이켜 볼 때, 알렉산더 캠벨(1788-1866)은 행동의 사람이었다. 캠벨은 장수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여러 분야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캠벨은 기독교 안에서 뿐 아니라 기독교 밖에서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설교가로써, 개혁가로써, 출판가로써 혹은 교육가로써, 캠벨은 미국 개척지대에서 기독교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필요한 정력과 재능을 가졌고, 자력사업과 자발행동을 결합하여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알렉산더 캠벨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지 않았다. 토마스 캠벨(1763-1854)은 젊은 시절을 아일랜드와 스코트랜드에서 보냈기 때문에 미국에 와서도 대륙적인 관점을 버리지 못했다. 캠벨은 미국에서 태어나 개척지에서 자란 발톤 W. 스톤(1772-1844)과 같지 않았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의 인격과 개성이 굳어지기 전인 젊은 시절에 북아일랜드에서 서부 펜실베니아주 개척지로 옮겨왔다. 그는 영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의 가장 좋은 점들을 결합할 수 있었다.

캠벨은 1811년 3월 12일 마가렛 브라운(Margaret Brown/1791-1827)과 결혼한 이후, 그의 부인과 함께 펜실베니아주 워싱턴군(郡)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북서 버지니아주(지금은 서 버지니아주)에 있는 장인의 농장에 보금자리를 정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캠벨은 개척지의 기독교 문제에 관심 하였고, 그의 넘치는 에너지를 수없이 많은 일들에 쏟아 부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일들이 사회와 교회에 큰 유익을 끼쳤다.

캠벨의 농장개발은 그 자체가 하나의 화제거리이다. 그가 살던 지역이름이 원래 하 버팔로(Lower Buffalo)였는데, 캠벨은 이름을 베다니로 바꾸었다. 그의 부동산은 300에이커(약 367,264평)와 작은 집 한 채에서 시작하여 1,500에이커(약 1,836,318평) 이상과 방 20개 짜리 저택으로 불어났다.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은 많았다. 따라서 그 수입금으로 목회사역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가 있었고, 후에는 자신의 자금으로 출판사를 발전시켰고, 대학을 세웠으며, 마을을 세웠다.

감정주의와 부흥이 기독교인의 경험을 지배하던 때에 알렉산더 캠벨은 상식과 이성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는 칼뱅주의의 예정론이 불필요하며, 구원에로 선택되었는지를 확인하는 특별경험을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믿음은 성경말씀의 "합리성"(reasonableness)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었고, 구원은 복음을 듣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지 믿고, 회개하고, 복종하는 것이었다. 구원은 그처럼 단순하고 분명하였다. 그의 강조는 개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에 있었고, 그 생각은 개척지의 자립정신과 일치하였다.

새 출발(Beginnings)

발톤 W. 스톤에도 불구하고(역자 주: [스프링필드 유언서]가 1804년 6월 28일에 나옴), 1909년에 100주년을 기념한 것은 논리적이고 고무적인 일이었다. 1809년에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이 나왔고, 같은 해에 알렉산더와 그와 가족이 아버지 토마스와 만난 해였기 때문에 기념할만한 이유가 충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2년 이상을 떨어져 살았으나, 그들은 피차 독립적으로 장로교와 개혁전통과의 관계를 끊고 있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탐구, 그것이 그들을 어디로 인도할지를 모르는, 새로운 탐구 중에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1809년 미국은 헌법제정이후(역자 주: 1788년에 발효하여 1789년에 개최된 제1회 연방의회에서 헌법 수정안이 심의·가결되었고 수정 1조에서 수정 10조까지의 권리장전의 여러 조항은, 1791년에 발효되었다.) 두 번째 10년을 막 끝낸 해였다. 해안지역의 과밀한 인구,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 한정된 토지 때문에 많은 가족들이 쿰버랜드(Cumberland) 도로를 따라 피츠버그(Pittsburgh)의 앨리게이니(Allegheny)와 모농가헬라(Monongahela) 강이 합류하는 서쪽을 향해 쿰버랜드 협곡을 따라 켄터키주 중부 블루그래스(bluegrass) 지대로 옮겨갔다.

유럽의 전통들과 선입견들에 기초하여 동부해안에 세워진 도시들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에서 이주민들은 새 출발의 꿈을 꾸었다. 교회생활의 새로운 형태들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바람직한 것 같았다. 공공업무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평신도들은 결정과 관리에 있어서 큰 몫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캠벨 가족이 서 펜실베니아주의 개척지에 도착했을 때에 미국 국민의 대다수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신 서부 개척지에서는 전도, 혁신, 종교적 실험에 대한 무제한의 기회가 있었다. 종교의 자유가 줄 수 있는 그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기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남서부 펜실베니아주의 레드스톤 지역으로 알려진 곳에서는 감리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가 이미 세워져 있었다. 감리교회가 가장 늦게(1780년) 그 지역에 들어갔고, 레드스톤 순회구역에서 의사록이 처음 나온 것은 1784년이었다. 최초의 침례교회는 1780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장로교회는 1766년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장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레드스톤 장로회가 1781년에 만들어졌고 서 펜실베니아주를 섬기는 교단들 가운데 가장 규모도 컸다.

불행하게도 장로교회는 이민오기 전 옛 대륙에서 다퉜던 쟁점들을 신대륙으로 옮겨왔다. 예외 없이 레드스톤 지역도 대부분의 장로교 분파 교회들이 세워졌다. 분파들은 탈퇴파(Seceder), 반탈퇴파(Anti-Seceder), 개혁파(Reformed) 그리고 1812년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교회인 "보통" 장로교회와 준 개혁파(Associate Reformed)가 있었다. 이 복잡한 교회분열의 문제가 바로 토마스 캠벨이 교회분열을 막고 연합할 방법을 찾게된 주된 이유였다(역자 주: 탈퇴파와 반탈퇴파는 각각 옛 빛과 새 빛파로 다시 나뉘어져 있었다).

이것이 토마스와 후에 알렉산더가 기독교인 연합에 필요한 몇 가지 방법들을 주창하게 한 정황이었다. 캠벨 부자는 연합의 기초를 성경말씀이라고 믿었으며, 그 위에서 하나가 될 것을 제안하였다. 그 당시 이 제안은 넓고 자유롭고 상식적인 관점을 나타낸 것이었다.

성경말씀에서 발견되는 믿음에의 본질들이 넓게 수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캠벨 부자는 그들이 모든 사람이 수용하게될 계획을 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제안이 반드시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서 펜실베니아주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확실히 연합은 개척지의 기독교인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전도를 도울 것이었다.

칼뱅주의 교리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었다. 저항의 토대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발전되었고, 그 저항은 많은 복음주의 그룹들이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의 전통을 재발견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자유로 인해서 얻어진 한 가지 큰 결과는 종교에 입문하는 신선한 통찰의 원천이 신약성경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운동들의 탄생이었다.

알렉산더 캠벨이 서 펜실베니아주에 왔을 즈음에 그와 같은 운동들이 뉴잉글랜드주에서 엘리아스 스미스(Elias Smith, 1769-1846)와 아브너 죤스(Abner Jones, 1772-1841)의 지도력아래 나타났고, 남 버지니아주와 북 캘롤라이나주에서 제임스 오켈리(James O'Kelly, 1735?-1826)의 가르침아래 나타났고, 중앙 켄터키주에서는 발톤 W. 스톤(Barton W. Stone, 1772-1844)의 설교아래 나타났다. 이들 지도자들은 거의 동일한 생각들을 했고, 그 생각들은 "신약성경에 기초한 단순한 믿음"이 성서적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믿음을 채택하는 것이 기독교인 연합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다.

1809년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이 그들의 새로운 고국의 문제를 숙고하면서 미국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 결론지은 것은 분열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개의 큰 교단들이 있었고, 많은 군소 교단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의 임무는 대단히 컸다. 기독교의 영향력의 분열은 교단이 교단과 경쟁하는 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헌법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명시되었기 때문에 유럽에서처럼 국가교회의 강제적인 연합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기독교인 연합은 이제 기독교인들이 성경연구, 교리논의, 설득 그리고 자발적 행동에 의해서 그들 자신들 사이에서 풀어야할 분명한 문제였다. 캠벨 부자가 신약성경 기독교 회복(a restoration of New Testament Christianity)의 기초 위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합운동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들에서 비롯되었다. 가능하다면, 그들은 16세기 루터와 칼뱅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개혁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랐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19세기 교회개혁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떠오르는 지도자로써(As Emerging Leader)

미국에 도착한 후, 알렉산더 캠벨은 목회사역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성경에 근거를 두고 기독교인 연합을 진작하는 목적에 투신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 토마스의 지도아래 즉시 학업을 시작하였고, 글래스고우 대학교에서 겨울학기 동안에 배운 지식을 불려나갔다. 착실하게 학업을 마친 후에 캠벨은 그의 22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둔 1810년 7월 15일 매주 모이는 이웃 사람들의 집회에서 그의 첫 설교를 하였다.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은 신자들의 친교를 도모하고 설교나 다른 기독교인의 일을 할 목적으로 워싱턴군(郡) 기독교인 협의회로 조직되었는데 널리 수용되지를 않았다. 1810년 가을까지 알렉산더와 그의 아버지가 주창했던 원칙들 위에서 교회들의 개혁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었고, 그와 같은 사실이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졌다.(역자 주: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교단의 벽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 해인 1811년 초에 장로 캠벨은 협의회가 그리스도인 친교의 기능들과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독립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1811년 5월 4일에 열린 협의회의 그 다음 모임에서 구성원들은 브러시 런 교회(Brush Run Church)로 알려진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서 토마스 캠벨은 장로로 선출되었고, 알렉산더는 복음을 설교할 자격을 얻었다. 독립교회를 조직함에 있어서 구성원들은 중요한 단계를 밟았는데, 그것은, 만일 이전 교회와의 관계들에 긴장이 초래된다면, 지금 그 모임을 해체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립자들의 염원과는 반대로 그들은 하나의 별개의 운동이 되었다.

교회로 조직한 후 첫 주일에 구성원들은 처음으로 주의 만찬을 축하하였다. 그로부터 매주일 성도들은 떡과 잔에 참여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침례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성경을 깊이 연구한 끝에 토마스 캠벨은 침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침수라고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이끌었고, 그로부터 침수는 그들이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되었다.

1812년 1월 3일 브러시 런 교회는 알렉산더 캠벨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이 때가 23세 때였다. 그와 마가렛(Margaret)의 첫 아이 제인(Jane)이 1812년 3월 13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출생으로 알렉산더는 침례에 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12년 6월 12일 캠벨과 그의 부인 마가렛, 토마스와 그의 부인 제인(Jane), 그리고 장로 캠벨의 딸 도로티아(Dorothea)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버팔로 개울에서 침례교 목사에 의해 침수세례를 받았다. 출발한지 일 년밖에 되지 아니한 이 운동은 이제 침수에 의한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 by immersion)에 헌신하였다.

침수문제에 있어서 젊은 알렉산더는 선도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환원운동의 지도력은 어느 사이에 토마스 캠벨에서 알렉산더 캠벨의 손으로 넘어갔다. 수년이 흐른 후 알렉산더는 기독교 사상과 실천에 있어서 분명한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제자들을 이끌었다. 이 행동의 사람이 1866년 죽을 때까지 참여했던 수많은 활동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우리는 알렉산더 캠벨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영향력을 미국의 종교생활에 강력히 발휘할 수 있었는가를 살피게 될 것이다.

교회 개혁가로써(As Church Reformer)

"개혁가들"-그들은 곧 이렇게 불리어졌다.-이 침수세례를 채택하자 그들과 다른 교회들 사이에 장애물이 생겼다. 그들과 이웃하고 있는 신앙인들의 대부분은 장로교인들이었다. 특히 목사들은 유아세례와 교권에 대한 도전을 받자 바짝 긴장하였다.

1812-13년 겨울 내내 브러시 런 교회(Brush Run Church)는 정규적으로 집회를 가졌다. 침수세례의 채택으로 인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침례교회들과 더 친근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모농가헬라(Monongahela) 강과 앨리게이니(Allegheny)의 산기슭에 다수의 침례교회들이 있었다. 그들은 1776년 친교를 목적으로 레드스톤 침례교 협의회(Redstone Baptist Association)를 만들었다. 1812년 당시 협의회에 소속된 교회가 33개, 목회자가 20명, 그리고 교인이 1300명이었다.

그 지방 이곳 저곳을 방문하기도 하고 설교하면서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은 곧바로 여러 침례교회들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침례교회의 친구들이 그들에게 레드스톤 협의회에 가입할 것을 계속해서 권하였다. 캠벨 부자는 망설였다. 협의회가 필라델피아 침례교 협의회가 사용하는 칼뱅주의 신앙고백서(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비슷함)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치명적인 결점은 신앙고백서가 친교의 시금석으로 사용된다는 점이었다. 신앙고백서를 받아드리지 아니하면 교인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침례교인들이 신약성경 기독교로 환원하려하는 그들의 계획에 전적으로 찬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캠벨 부자는 기존의 교단에 소속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걱정스런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815년 9월에 레드스톤 침례교 협의회의 가입권유를 받아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가입권유를 받아드리기 전에 성경말씀에서 배운 것만을 가르치고 설교하겠다는 그들의 목적을 명시한 진술서를 마련하였다.

1816년 8월에 열린 협의회의 모임이 베다니(Bethany)에서 멀지 아니한 크로스 개울(Cross Creek)에서 열렸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 모임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아마도 침례교 목회자들이 알렉산더에 관해서 좀더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로마서 8장 3절을 근거로 제목을 "율법에 관한 설교"로 정하였고, 그 설교에서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들을 강조하였다. 당시 레드스톤 침례교 목회자들은 신구약 구별 없이 모든 말씀을 다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캠벨 부자가 침례교 협의회에 가입한 해에 그들의 가입을 막는 반대자들이 몇 있었는데, 율법에 관한 알렉산더의 설교가 있고 난 후부터는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후 15년 동안 알렉산더 캠벨과 그의 아버지는 침례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긴장만 쌓여갔다. 처음부터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완전히 침례교단에 합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이 갖고 있었던 특별한 선교에 대한 감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에 캠벨 부자와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은 "개혁가들"이었을 뿐 아니라, "침례교회를 개혁하는 자들"이었으며, 나중에는 "제자"(Disciples)파로 떨어져 나왔다.

알렉산더는 전에도 펜실베니아주, 오하이오주, 버지니아주, 켄터키주에 산재한 많은 침례교 협의회들에서 설교를 하였고, 그 때마다 개혁을 촉구하였으나 개혁은 고사하고 거의 언제나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협의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알렉산더의 견해를 단죄하였고, 그 결과 침례교인들과 제자들 사이에 분열만 커져갔다. 1830년대 초까지 침례교인들은 알렉산더 캠벨에게 철저하게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환멸은 두 가지로 작용하였다. 분열의 과정에서 침례교회는 수 천명의 교인들과 더불어 많은 교회들을 잃었다.

인습타파자로써(As Iconoclast)

1820년대 초, 많은 침례교회들과 협의회들이 알렉산더 캠벨을 받아드리고 있을 무렵, 알렉산더는 "개혁"에 관한 자기 생각을 더 널리 유포하기 위해서 월간지를 발행할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크리스천 뱁티스트}(The Christian Baptist)지가 1823년부터 1830년 사이에 발행되었고, 알렉산더는 이 월간지에 단순한 믿음에로 돌아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것을 권하는 적극적인 메시지를 담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의 일치와 교회의 정화와 왕국의 승리를 가능케 하였다.

불행히도, 이것은 추정된 교회의 권력찬탈과 비성경적 실행들의 제거를 요구하였다.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전통들"(accretions of the centuries)을 제거해야할 필요는 만약 새롭게 세워야 할 기초가 있다면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알렉산더 캠벨은 인습타파자가 되었다. 그는 열정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그의 열정은 일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조차 괴로움을 끼쳤고, 자기 자신의 더 성숙한 판단조차 찬성하지 않았던 범위에까지 그를 끌고 갔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배전통에로의 회복"(Restoration of the ancient of order of things)은 궁극적 목적(ideal)이 되었고,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초대교회에 없었던 조직이기 때문에 선교단체들이 있어서는 안되었다. 목사들은 사례비를 받지 말아야 하고 설교는 자원해서 해야 한다. 성경을 공급하는 단체들도 존재해야 할지 의심스러웠다. 성경의 권위가 인가하지 아니한 것을 교회가 실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멈춰야 한다. 후에 그가 교회들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어, 그들 사이의 협력을 도모할 때에 그는 이들 문제들 가운데 몇 가지를 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았다.

토론가로써(As Debater)

알렉산더 캠벨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몇 차례에 걸친 그의 토론들 즉 그가 탁월하게 능력을 발휘했던 공개적인 발표형태에 대한 검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토론은 개척지대(frontier)에서 인기가 있었다. 토론이 어느 정도 지적인 자극과 재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캠벨은 토론이 자신의 견해를 알리고 개혁을 도모하는 이상적인 매체임을 알았다.

그의 첫 토론은 1820년 6월에 있었다. 토론의 대상자는 오하이오주 마운트 프레전트(Mt. Pleasant)에 거주하는 탈퇴파 장로교(Seceder Presbyterian) 목사, 존 워커(John Walker)였다. 침례의 문제가 그 날의 쟁점이었다. 이 날의 토론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제목은 {인위적 전통임이 입증된 유아 약식세례: 기독교 침례에 관한 토론내용이 되다}<Infant Sprinkling Proved to Be A Human Tradition: Being The Substance of A Debate on Christian Baptism
(Steubenville, Ohio: printed by James Wilson, 1820)>이었다.

캠벨의 두 번째 토론의 대상자는 "보통" 장로교인 윌리암 L. 맥칼라(William L. Maccalla/1788-1859)였다. 그들은 1823년 10월에 켄터키주 메이스빌(Maysville)에서 가까운 워싱턴에서 토론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토론의 결과는 1824년 책으로 출판되었고, 제목은 {침례에 관한 토론}<
A Debate on Christian Baptism(Buffalo, Va., Campbell and Sala)>이었다. 이 책은 널리 배포되었다.

세 번째 토론의 대상자는 스코틀랜드 뉴 래나르크(New Lanark)와 미국 인디아나주 뉴 하모니(New Harmony)의 유명한 19세기 사회개혁가 로버트 오웬(Robert Owen/1771-1858)이었다. 토론은 1829년 4월에 신시내티(Cincinnati)에서 열렸고, 동년 베다니(Bethany)에서 알렉산더 캠벨에 의해 {기독교 증거들에 관한 토론}(A Debate on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토론에서의 이슈는 철저하게 세속적인 오웬의 "사회 체제"(Social System)에 관한 것이었다. 캠벨은 이 토론을 기독교 신앙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변호할 기회로 삼았다.

1930년대까지 오하이오 밸리(Ohio Valley)에 산재한 개신교 교인들은 천주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천주교인들의 증가는 부분적으로 많은 이주자들 때문이었다. 캠벨의 네 번째 토론의 대상자는 신시내티 로마 카톨릭 주교인 존 B. 퍼셀(John B. Purcell/1800-1883)이었다. 토론은 1837년에 있었다. 캠벨은 카톨릭주의에 대항해서 개신교의 유산을 확고하게 방어하였다. 토론의 내용은 신시내티의 J. A. 제임스 앤 주식회사(J. A. James and Company)에 의해서 {천주교에 관한 토론}(
A Debate on The Roman Religion)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토론의 대상자는 켄터키주 파리스(Paris) 지방의 장로교 목사 나단 L. 라이스(Nathan L. Rice/1807-1877)였고, 토론내용은 침례의 끝없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토론은 1843년 11월 켄터키주 렉싱톤(Lexington)에서 개최되었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가 의장을 맡아 토론을 이끌어 갔다. 토마스 카터(Thomas Carter)가 1844년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양자의 주장을 모두 실어 {기독교 침례의 행위, 대상, 목적과 관리자에 관한 . . . 토론}(A Debate . . . on The Action, Subject, Design and Administrator of Christian Baptism
)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침수와 약식에 관한 문제로 장로교인들과 벌린 토론들은 단순히 시대적인 특징으로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 토론들은 더 이상 지속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오웬과 벌린 토론에서 캠벨의 기독교변호와 퍼셀 주교와 벌린 토론에서 개신교 입장변호는 개척지대에서 알렉산더 캠벨을 개신교의 위대한 챔피언으로 위치를 굳혔다. 이들 토론들로 인해서 캠벨은 유명세를 탔고, 그의 명성은 가까운 추종자들을 훨씬 뛰어넘는 전국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일상적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되었다. 교회연합의 목표를 좀더 진행시켜 가는 한편, 이 토론들은 신약성경의 실천에로 교회들이 환원할 것을 부르짖었던 캠벨의 입장을 널리 유포시켜 주었다.

정치가로써(As Politician)

알렉산더 캠벨은 1829년 버지니아주 헌법을 새로 쓰기 위해서 대표자를 뽑는 선거 때에 브룩크 군(Brooke county)의 대표로 출마하여 주(州) 대표자들 9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알렉산더는 주(州) 수도 리치몬드(Richmond)에서 3개월 간 속개(續開)된 의사일정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대표단 가운데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과 제임스 몬로(James Monroe), 그리고 미합중국 최고재판소의 부장판사를 지낸 존 마샬(John Marshall)도 포함되어 있었다.

캠벨은 버지니아주에서 노예제도를 종식시키는데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버지니아주 동부 저지대를 소유한 많은 유력한 인사들이 캠벨의 안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캠벨은 그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 민주적인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싸움을 이끌었다.

인쇄된 의사록에는 캠벨의 제안설명들이나 연설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입법대표의 근거 위에서 참정권과 군(郡)재판소제도에 관한 캠벨의 연설들은 그의 분석적 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의사록은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캠벨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동의안들은 통과되지 못했고, 부유한 토지소유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편집자와 출판가로써(As Editor and Publisher)

1820년에 열린 캠벨과 워커와의 토론이 책으로 출판돼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자, 캠벨은 출판의 위력에 눈이 뜨였다. 그 결과 앞에서 언급한 월간지 {크리스천 뱁티스트}(The Christian Baptist)지가 1823년에 시작되었고, 편집자는 캠벨이었다.

잡지발행을 추진시키고 가능하다면 이익을 내기 위해서 알렉산더 캠벨은 농장으로 이어지는 다리 가까운 버팔로 개울(Buffalo Creek) 방죽 위에 작은 인쇄소를 짓고, 자기 소유의 인쇄기들을 설치하였으며, 인쇄공을 채용하였다. 이 새로운 사업은 환원운동을 알리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결코 이익이 나지는 않았다. 캠벨은 일년에 1,000불 정도의 손실액을 보상해야 했다.

{크리스천 뱁티스트}지의 발행은 환원운동에 대한 공개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었고, 알렉산더는 인습타파를 위한 기사들을 실을 수 있었다.

인구가 적고 우편업무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볼 때, 월간지의 발행부수가 상당했다. 발행된 잡지는 거의 미국 전역과 캐나다, 심지어는 영국에까지 보내어졌다. 비판자가 되는 것에서 조직된 기독교의 주창자로의 근본적인 변화가 캠벨로 하여금 일곱 권을 찍어낸 후 즉 칠 년만에 {크리스천 뱁티스트}지를 폐간토록 하였다.

이제 제자들(Disciples)로 불리어지는 개혁가들이 침례교인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분리해야되는 상황을 인식하면서 또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란 이름으로 그들의 운동이 불려질 것을 우려하면서, 1830년 1월 4일, 알렉산더 캠벨은 새로운 잡지, {밀레니얼 하빈저}(
The Millennial Harbinger)를 시작하였다. 이 월간지는 캠벨이 1866년 죽고 난 다음에도 1870년 12월까지 계속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폐간되기 전 몇 년 동안만을 제외하고는 40여년 줄곧 환원운동에 가장 영향력 있는 월간지였음을 증명하였다.

잡지의 쪽수를 늘리고 다른 인쇄작업을 겸할 수 있도록, 베다니 마을에 새로운 인쇄소를 짓고, 인쇄기들을 더 주문하여 시설하였다. {밀레니얼 하빈저}는 48쪽에서 60쪽 정도로 만들어졌는데, 일년 치를 모으면 두터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었다. "엑스트라즈"(Extras)라는 이름의 특별부록은 정기 구독자들에게 무상으로 공급되었는데, 최근의 관심을 단독 주제로 다룬 것이었다.

캠벨의 편집지시아래 잡지는 다른 신문잡지가 할 수 없는 환원운동이 신약성경 기독교의 토대 위에서 교회를 연합하는 것임을 대변하였다. 거의 이익을 보지 못했고, 종종 캠벨이 손실액을 보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잡지는 환원운동의 안정과 형성에 기여하였다. 책장에 {밀레니언 하빈저} 전집을 갖고 살았던 제자들 목회자들이 수 세대에 걸쳐 있었다.

알렉산더 캠벨에게 신약성경을 읽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말씀에서 나오는 의미였다. 캠벨은 킹 제임스 신약성경에 수정 보완될 곳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개역판을 출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같은 새 번역성경을 만드는 토대로써 캠벨은 이미 50년 전에 출판된 번역본들을 사용하였는데, 세 명의 스코틀랜드인 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된 것들이었다. 조지 캠벨(George Campbell)이 복음서들을, 제임스 맥나이트(James MacKnight)가 서신들을, 그리고 필립 닷드릿지(Philip Doddridge)가 사도행전과 계시록을 번역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들의 번역본들을 다른 번역본들과 그리고 헬라어 본문과 비교하였다. 한 구절씩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찾아본 다음에 캠벨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택하였다.

번역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거룩한 글들, 평이한 형식의 신약성경}(
The Sacred Writings of the Apostles and the Evangelists of Jesus Christ, Commonly Styled New Testament(Bethany, Brooke Co., Va.: A. Campbell, 1826)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알렉산더 역시 초기 작업에서 "여러 가지 교정"을 하였고, 매 부분마다 머리말과 많은 비평각주와 부록을 첨부하였다. 캠벨이 새 번역 성경을 만든 주된 이유들은 근대 본문비평학자들이 더 나은 성경본문을 만들어냈고, 고대언어에 대한 지식이 17세기 때보다 지금이 더 철저하였고, "살아 있는 언어는 지속적으로 변천하기" 때문이었다.

캠벨은 모든 헬라어 단어가 가능하다면 가장 좋은 영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어떤 단어도 단순히 음역(音譯)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전 개역성경들에서 헬라어 단어를 단순히 음역하여 "baptize"(침례하다)로 한 것을 "immerse"(침수하다)로 고쳤고, 따라서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을 "침례 요한"(John the Immerser)으로 고쳤다.

캠벨의 새 번역성경은 종종 "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Oracles)이란 호평을 들으면서 추종자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따라서 여러 쇄를 거듭하여 출판되었다. 그러나 캠벨의 신약성경이 약식세례를 베푸는 교단들로부터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은 예상된 것이었다. 놀랍게도 침례교인들조차도 화를 냈고, 여러 장소에서 화난 군중들이 캠벨의 새 번역을 불태웠다(역자 주: 새 번역은 캠벨이 침례교단에서 분리되기 4년 전에 출판되었다).

침례교회와 분리된 후 1830년대까지, 환원운동은 성장하였고, 자체 찬송가의 필요성이 커졌다. 1835년 캠벨은 {제자들 찬송가}(
The Disciples Hymn Book)란 제목으로 찬송가를 편집 출판하여 시장에 공급하였다. 찬송가는 아마 발톤 W. 스톤(Barton W. Stone)과 다른 지도자들과도 협동으로 마련된 것 같다. 그러나 스톤은 단지 간접적으로 내용에 관해서만 문의를 받았고, 제목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결국 스톤의 항의에 부딪쳐 제목이 {그리스도인 찬송가}(The Christian Hymn Book)로 바꿨다.
해가 거듭되면서 찬송가는 실질적인 이익을 냈다. 캠벨은 이익금을 찬송가를 구입해준 미국교회들을 돕는데 사용하였다. 캠벨은 말년에 저작권을 미국 크리스천 선교사협회(American Christian Missionary Society)에 넘겼다. 그때부터 19세기 말엽 절판될 때까지 찬송가에서 나오는 이익금은 협회의 선교사업에 쓰였다.

캠벨은 시시 때때로 다른 책들도 인쇄하였다. 그 가운데는 {크리스천 시스템, 그리스도인들의 연합과 초대 기독교에로의 환원에 관해서, 현대개혁에서 간청된 것으로써}<The Christian System, in Reference to the Union of Christians and a Restoration of Primitive Christianity, as Plead in the Current Reformation(Bethany Va.: Printed by A. Campbell, 1839)>와 {크리스천 뱁티즘, 그 전례와 결과}<
Christian Baptism Its Antecedents and Consequents(Bethany Va.: Printed by A. Campbell, 1851)>가 있다. {크리스천 시스템}은 이전에 발행된 것의 수정판이었고, {크리스천 시스템}과 {크리스천 뱁티즘} 모두는 이전에 출판된 기사들로 만들어졌다.

설교가로써(As Preacher

알렉산더 캠벨이 1810년 7월 주일에 행한 첫 설교 때에 메시지 전달을 아주 잘해서 많은 교인들이 "왜 그가 자기 아버지보다 더 낳은 설교가인가!"라고 말하게 되어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캠벨은 훌륭한 설교가였다. 첫 해에 캠벨은 106번을 설교했는데, 많은 주제와 본문들이 그의 일기에서 발견되어지고 있고, 그의 {여러 주제들에 관한 소년소녀를 위한 에세이}<Juvenile Essays on Various Subjects (Alexander Campbell at Glasgow University, Nashville: Disciples of Christ Historical Society, 1971)에 실려있다.

캠벨의 설교들은 본문해설도 아니고, 엄격한 주제설교들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형태에 있어서 논리적이었고, 잘 요약된 것들이었다. 캠벨의 전기를 써서 유명해진 리차드슨(Richardson)은 캠벨의 능력이 상당부분 주제선택과 성경의 권위와 큰 인기를 모으는 호소력(appeal)을 잘 결합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캠벨은 논쟁적인 스타일로 말씀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고, 제스처는 거의 쓰지 않았다. 캠벨의 설교는 단순성이 특징이었고, 대체적으로 청중들은 그런 인상을 받았다.

캠벨의 설교의 효과는 전달을 강조한데서 만들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을 높여 주는 효과가 있는 개념들을 하나로 엮음과 사고의 논리적 전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알렉산더 캠벨은 설교가라기보다는 설교가의 설교가였다고 전해져 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기를 원하는 모델이었다.

그랜빌 T. 워커(Granville T. Walker)는 그의 훌륭한 저술, {알렉산더 캠벨의 설교원리}<
Preaching in the Thought of Alexander Campbell(Bethany Press, St, Louis, 1954)>에서, 급격히 팽창하는 미국의 개척지에서 제자들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한 설교의 모범을 환원운동에 제공한 것은 캠벨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캠벨은 복음을 설교할 때에 논증한 신약성경 믿음에 대한 분명하고 간결한 진술과 기독교의 합리적 개념을 환원운동에 제공하였다. 그것은 단번에 또 동시에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이어서 그것의 내포된 뜻들이 무진장하였고, 그러면서도 매우 단순해서 가장 비천한 청중이라도 큰 감화를 받게 될 것이었다.

캠벨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제시하되 이성과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은 분명하고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성경은 보통의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졌고, 그러므로, 그것이 적절하게만 제시되면,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의 것은 필요치 않았다. 이런 형식의 설교는 감정에 호소하던 부흥시대에는 흔하지 않았던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되었다.

교육가로써(As Educator)

교육에 대한 알렉산더 캠벨의 초기 관심은 목회를 시작한지 채 십 년도 안된 1818년에 버팔로 신학교(Buffalo Seminary)를 개교한데서 입증되었다. 그의 특별한 목적은 젊은이들을 찾아내서 교육시켜 출범한 운동의 설교가들과 지도자들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알렉산더가 부인 마가렛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은 학생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할 만큼 컸다. 그는 학생들을 그의 집에 기숙시키면서 개인적으로 가르쳤고, 때로는 아버지 토마스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기숙사비는 일주일에 1불 50센트였고, 학비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강습비를 포함해서 3개월 한 쿼터에 5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팔로 신학교는 의도된 목적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1823년에 폐교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설교보다는 사업을 더 선호하였다. 그러나 짧은 존속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교육에 대한 캠벨의 초기 관심을 입증하는 증표로 남게 된다.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캠벨의 집 지하실 방들에는 아주 오래된 벽지가 붙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벽지가 183년(2000년 기준으로) 이상 그곳에 그대로 보존되고있다는 점이다. 캠벨은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가족과 함께 지하실 방으로 옮겼던 것이다.

1823년과 1840년 사이에 캠벨은 교육문제를 놓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공립학교들에 대한 국가체계가 그때 형성과정에 있었다. 캠벨은 종종 나라 여러 곳의 교사들 협의회들이나 다른 교육단체들 앞에서 그 주제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캠벨은 1839년 {밀렌니얼 하빈저}(Millennial Harbinger)에 "하나의 새로운 교육기관"(A New Institution)이란 제목의 중요한 기사들을 시리즈 형태로 실었는데, 이 때 캠벨은 그의 교육철학을 좀더 충분하게 발전시켰다.

드디어 1840년 알렉산더 캠벨은 4년제 베다니(Bethany) 대학을 세우기 위해서 버지니아지주 의회로부터 인가를 획득하였다. 샬로츠빌(Charlottesville)에 있는 토마스 제퍼슨의 버지니아 대학교를 보고 크게 감탄한 켐벨은 커리큘럼과 학생생활에 있어서 가능하다면 베다니를 그 교육기관처럼 만들기를 원했다. 그는 첫 건물들이 들어설 자리로 자기 농장의 땅을 내놓았고, 작지만 능력 있는 교수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만들었다. 그는 1841년 실질적인 대학개교 후 20년 이상을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베다니는 빠르게 제자들 운동의 설교가들과 전도자들을 위한 최고의 장소로, 평신도를 위한 교육센터로,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제자들을 위한 "대학들의 모체"(mother of colleges)가 되었다. 오늘날 몇몇 유명한 최고 교육기간들이 그들의 시작을 베다니에서 찾고 있다.
캠벨은 기독교 사회를 위한 대학교육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베다니 대학은 문명사회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성경에 기초한 유일한 대학이다. 이 대학은 인위적 신학에 기초한 신학교(a theological school)가 아니며, 성경에 기초한 신학교(a school of divinity)도 아니며, 모든 참된 학문과 참된 학업의 기초가 되는 성경 위에 세워진 인문과학 교육기관이다. . . .
우리는 진실로 성경을 대학에 소개할 수 있는 유일한 교단이며 백성이다. 그리고 기독교계의 모든 교파가 무시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소중히 하기 때문에 매일 성경을 가르친다(The Millennial Harbinger, 1850, p. 291ff).

설립자의 기독교 연합에 대한 관심은 대학 강당(College Hall)이 매주일마다 "여러 교단의 훌륭한 목회자들을 초빙하여 강연을 듣는" 신앙강좌와 예배를 위해서 사용되도록 하였다.

베다니 대학은 개교초기부터 제자들 목회자들과 평신도 교육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장소로 급속히 부각되었다. 많은 가정들이 그들의 아들들을 베다니에 보내 존경하는 알렉산더 캠벨 밑에서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이끄는 리더십에서 베다니 졸업생들의 영향력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상당하였고, 이런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경학자로써(As Biblical Scholar)

대학에서 학장으로 봉직하는 것말고도 캠벨은 교수로써 정규적으로 일련의 아침 성경강좌와 다른 과목들의 강좌를 맡아 가르쳤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명성이 높았다. 그의 학식은 성경연구와 역사 그리고 기독교사상 분야에서 완벽하였다. 캠벨이 미국에서는 물론 영국에서 출판된 관련 과목들에 관한 근간서적들을 대부분 읽었고 또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역사비평의 적용을 통한 성경해석에의 알렉산더 켐벨의 공헌은 레드스톤 침례교 협의회에서 1816년에 행한 "율법에 관한 설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설교에서 캠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의 법칙으로써 신약성경에 충실할 것을 요청하였고,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주된 권위들이어야 함을 진술하였다.  

캠벨은 그리스도인의 주된 교과서로써 항상 신약성경을 생각하였고, 열린 마음으로 읽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성경말씀을 해석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성경책의 어떤 부분을 해석할 때에 독자는 저자, 연대, 장소와 기록시기, 수신자와 같은 정황들을 고려해야 한다. 알렉산더 캠벨이 이렇게 젊은 시기에 그와 같은 방법들을 성경해석에 기꺼이 적용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캠벨은 성경을 난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싸우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관한 더 큰 지식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경험들이 가득한 책으로 보았다.

캠벨은 국내외 성경공회(American and Foreign Bible Society)에서 활동적이었으나 1850년 한 단체가 떨어져 나와 미국 성경연합(American Bible Union)을 만들었을 때에 캠벨은 이 성경연합에 가입하였다. 캠벨은 1854년 겨울과 1855년 초까지 성경연합이 그에게 맡겨준 사도행전의 개역작업에 참여하였다. 그것은 새 번역 성경의 일부로써 1855년에 출판되었다.

대중연설가로써(As Public Speaker)

종교운동의 지도자로써 또 대학의 학장으로써 캠벨은 그의 남다른 능력때문에 다른 대학들과 종합대학교들, 그리고 학식있는 단체들로부터 강연요청을 많이 받았다. 그는 다양한 주제들로 연설하였다. 한 가지는 "앵글로색슨 언어, 그것의 기원과 특성 그리고 운명"(The Anglo-Saxon Language: Its Origin, Character, and Destiny)이었다. (이 강연은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1960년까지 오래동안 사용되었다.) 다른 주제들은 "사형제도에 관한 연설," "사회 상태 개선에 관한 연설," 그리고 "천재의 책임들"이었다. 언제나 이들 강연들은 조심스럽게 준비된 사고체계들이었다. 그가 행한 많은 강연들과 연설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제목은 {인기있는 강연들과 연설들}<Popular Lectures and Addresses(Philadelphia: James Challen and Son, 1863)>이었다.

조직가로써(As Organizer)

1840년대 초기에 알렉산더의 추종자들은 전국대회와 선교사협회와 같은 조직들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쏟아냈다. 그와 같은 조직들이 성경적인가 그렇지 아니한가? 1842년 알렉산더는 {밀렌니얼 하빈저}에 전국규모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서 착실하게 준비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1849년 10월 22-27일 신시내티에서 드디어 전국대회가 소집되었을 때, 알렉산더 캠벨은 참석할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 병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멀리서 보고 싶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어느 행사에서든 그는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정규적으로 회장에 재선출되었다. 전국대회는 물론이고, 1866년 캠벨이 사망할 때까지, 전국대회가 만들어낸 미국 크리스천 선교사협회(American Christian Missionary Society)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국대회들과 선교사협회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심하게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캠벨은 꾸준히 조직들을 옹호하였다. 실제로 그는 주(州)대회와 전국대회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긴 기사들을 {밀렌니얼 하빈저}에 실었다. 그는 전국대회들이 친교와 영감에 필요할 뿐 아니라, 더 큰 교회의 업무취급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사회개혁가로써(As Social Reformer)

알렉산더 캠벨은 사회개혁을 교회개혁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실제로 그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필수적인 선결조건으로 신약성경의 기초 위에서 교회들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교회를 통해서만이 사회불의의 뿌리를 뽑는 것이 가능할 것이며, 그 일의 성공은 연합된 교회를 이루기까지 지연될 것이라고 믿었다. 요약하면, 연합된 교회는 신약성경 기독교에로 환원할 때 가능할 것이고, 연합된 교회는 사회질서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캠벨은 그러한 변화가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연합된 교회가 언제 이루어질지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이슈들 가운데서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금주, 사형, 공립학교, 노예 제도와 전쟁에 관해서 피력할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당대에 가장 첨예한 이슈들이었던 노예제도의 불의와 전쟁의 사악함에 대해서 가장 많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캠벨은 개인의 자유와 도덕적 선택이 침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주단체들의 문제와 술 판매금지에 관해서 처음에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캠벨은 입장을 바꿔 술 판매금지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는 오직 살인자에 한해서만 사형시키는 것이 주(州)에게 맡겨진 신성한 권위라고 믿었다. 그는 공립학교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후원자였다. 공립학교는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고, 도덕적으로 강하고, 배움을 통해서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시민을 키워내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1840년대까지 많은 미국사람들은 노예제도에 관한 이슈가 국민의 삶에서 점점 더 불화를 일으키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주제가 너무 폭발적이어서 친구들과 가족들이 나뉘어졌고, 교회들이 찢어졌으며, 주요 교단들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다. 이런 긴장들과 더불어 무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위협이 있었다. 캠벨은 감정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념들을 용감히 선포하였다.

캠벨은 그가 참석했던 1829년과 1849년 버지니아주 헌법제정의회 때에 그리고 켄터키주에 넓게 배포된 소책자에서 점진적인 노예해방 방안을 제안하였다. {밀레니얼 하빈저}지에서도 캠벨은 노예제도에 관한 주제로 여러 차례 사설과 평론을 실었다.

그의 저술들로 볼 때, 캠벨은 신약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도덕성을 동일시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는 이 문제를 놓고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한 끝에 구약에서나 신약성경에서도 노예제도를 직접적으로 단죄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캠벨 부자는 노예제도는 부도덕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그가 개인적으로 노예제도를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캠벨은 그리스도인들이 노예제도를 도덕적으로 나쁜 것으로 선언할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동시에 캠벨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노예들을 소유물이 아닌 동료 인간들로 다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실행된 노예제도가 심한 인권침해라고 선포하였다.

캠벨은 또한 노예제도가 미국인이 이해하고 있는 자유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게다가 그의 의견에 따르면 노예노동은 남부의 경제에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캠벨은 자신의 금전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소유했거나 다루었던 모든 노예들을 풀어줌으로써 노예제도에 관한 확신들을 자신의 사생활에서 실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벨은 자신의 모범적인 행동을 따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점진적 노예해방 방안을 제안하였다.

기독교 공동체가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캠벨은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이 교회징계의 문제나 친교의 시금석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확고히 지켰다. 결국 캠벨은 그 유명한 사설에서 "노예제도는 견해의 문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노예를 소유하고 안하고는 믿음의 본질이 아님을 밝혔다.

노예제도 문제로 긴장들이 고조되면서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들은 남과 북이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해결을 위해서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예측불허의 사태를 내다보면서 알렉산더 캠벨은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취하였다. 그는 멕시코 전쟁에 반대했었고, {밀레니얼 하빈저}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다.

캠벨이 전쟁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밝힌 것은 멕시코 전쟁이 끝난 지 3개월이 된 1848년 5월 버지니아주(현재 웨스트버지니아주) 라이시엄(=문화회관), 휠링(Wheeling) 앞에서였다. 반전에 대한 그의 논쟁이 매우 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몇몇 지도자들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돌이킬 수 없이 말려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미주리주 출신 하원의원 조셉 B. 샤논(Joseph B. Shannon)은 1937년 11월 22일자 하원 의사록에 캠벨의 이 연설문이 기록되도록 하였다.

이 연설에서 캠벨은 전쟁은 비록 구약성경에서 허락되었고 또 실시되었지만, 신약성경의 문자와 정신 모두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금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양심적으로 전쟁을 허락하거나 종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방어전쟁과 공격전쟁 사이에 구분이 있어야한다면서 전쟁을 합리화시키는 사람들을 캠벨은 궤변가들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는 전쟁이 정의를 세우는 수단일 수 없으며, 전쟁은 논쟁을 종식시키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결국 전쟁이 종식되는 것은 전쟁터에서가 아니라 평화회담장에서이므로, 평화회담은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비극적으로 잃고 나서 열릴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열려야한다고 믿었다. 캠벨은 오늘날의 국제연합이나 세계재판소가 하는 것과 비슷한 국제분쟁을 해결할
국제연맹과 세계재판소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진실로 타협을 모르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전쟁을 거부해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들이 함께 모여 앉아 그들의 난제들을 해결하도록 모든 노력과 모든 설득력을 사용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을 오늘날의 사회이슈들에 적용하려고 하는 제자들은 그들이 알렉산더 캠벨의 정신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서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것을, 그가 그것을 보았을 때, 자기 시대의 도덕과 정의에 관한 주요 이슈들에 과감히 적용하였다.  

신학자로써(As Theologian)

캠벨은 신학이 수세기에 걸쳐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체계로써 교회를 망쳤다고 믿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신약성경의 실천에로 교회를 환원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말씀을 단순하게 읽고, 그 말씀들 속에서 배워지는 것을 교리와 실천으로 수용하는 것이 본질적이었다. 소위 신학은 성경말씀의 근거 위에서 캠벨의 연합의 계획 속에 어떠한 직접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캠벨은 자기 자신을 신학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성경말씀의 연구 위에 근거해서 교리 질문들에 관한 개인적인 판단을 강하게 믿었다. 캠벨은 신학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이나 사역의 성격으로 봐서 신학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산더 캠벨의 신학은 그것 자체로써 중요한 연구이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서 그것을 충분하게 다루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로얄 험버트(Royal Humbert)는 수많은 기사들, 논평들, 토론들, 강연들, 그밖에 다른 저술들로부터 캠벨의 사상을 수집하였고, 캠벨의 신학내용을 두터운 책으로 제시하였다. {알렉산더 캠벨 신학의 요약}<
A Compend of Alexander Campbell's Theology(St. Louis: Bethany Press, 1961)>에서 우리는 캠벨의 믿음과 이성,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성경, 계시, 교회, 종말론, 그밖에 많은 신학질문들에 관한 견해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오는 말(A Final Word)

행동의 사람으로써 알렉산더 캠벨의 인상은 다 같은 하루 24시간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물론 대답은 철저한 시간관리와 남보다 많은 시간을 일했기 때문이다. 캠벨은 규칙적으로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자정까지 일했다. 그의 하루의 일과는 인쇄공들이 일할 자료를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손님을 접대하고, 책을 읽는 것까지 다양하였다. 언제나 아침과 저녁에 그는 자신과 가족과 자기 집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여행하고, 저술하고, 편집하는 것 이외에도, 캠벨은 여전히 농장과 많은 부동산을 관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알렉산더 캠벨의 두 번째 부인 세리나 캠벨(Selina Campbell)은 그녀가 쓴 책, {부인이 쓴 알렉산더 캠벨의 가정생활과 회고록}<Home Life and Reminiscences of Alexander Campbell by His Wife(St. Louis: John Burns, 1882)>에서 자기 남편의 폭넓은 관심사들에 관해서 말하였다. 그녀는 캠벨이 공공복지, 도로개선, 농업경작에 관심을 보였다고 적었다. 그녀는 캠벨이 웰스버그(Wellsburg)에 이르는 도로건설과 지역에서 가장 우수했던 양떼의 품질개선에 보인 노력들을 예로 들었다.

알렉산더의 관심들은 실로 끝이 없었다. 캠벨은 다양한 계층의 방문객들을 유명하거나 무명하거나에 관계없이 언제나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캠벨의 집은, 나이에 관계없이, 멀고 가까운 곳에 관계없이,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휴양지가 되었다. 한번은 캠벨이 아이오와(Iowa) 부족의 인디언 소년을 8~9년 동안이나 집에서 데리고 있으면서 교육을 시킨 일도 있었다. 그 후 소년은 고향에 돌아가 그의 부족을 도왔다. 또 다른 경우에는 꽤 중요한 인물인 어느 멕시코 장군이 캠벨의 집에서 잠시 머물다 갔는데, 후에 그는 자기의 두 아들들을 베다니 대학에 입학시켰다.(역자 주: 미국의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알렉산더 캠벨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다. 지금도 캠벨의 저택에는 가필드 대통령이 머물렀던 침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의 생애를 자기 아버지 토마스의 생각들을 실행하고 확대시키는데 헌신하였다. 그 생각들은 어떤 면에서는 미국 종교독립선언문이었던 {선언과 제언}(
Declaration and Address) 속에 아주 잘 나타나 있었다. 마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몇 년 전에 새 공화국의 국민들에게 자치에 모험을 하도록 도전했던 것처럼, 캠벨 부자는 그들에게 기독교 발전에 모험을 하도록 도전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과거 유럽의 해묵은 다툼의 장애물들을 던져버리고, 사도교회의 일치, 자유, 단순성 그리고 순수성에로 옮겨가야 했다. 알렉산더 캠벨은 강단과 편집책상에서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관심사를 심사숙고하였다.

비록 캠벨이 우리 사회의 끝없는 복잡성을 관망했더라도, 그는 실망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너무 쉬운 낙관주의를 포기하거나 사회가 교육, 기술, 경제경영과 정부의 힘에 의해서 그 자체를 완전히 재생시킬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포기할 때에도, 알렉산더는 우리들을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것에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캠벨은 우리의 유일한 안전이 우리의 죄 많은 본성의 정복과 우리의 영적 삶의 발달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약성경 약속들에 확고하게 기초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목적들 속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 목적들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알렉산더 캠벨의 생애와 실천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은 많다. 가장 도움이 될만한 책들 가운데는 로버트 리차드슨(Robert Richardson)의 {알렉산더 캠벨의 회고록}<
Memoirs of Alexander Campbell(Philadelphia: J. Lippincott, 1868, 1870)>, D. 레이 린드레이(D. Ray Lindley)의 {자유의 사도}<Apostle of Freedom(St. Louis: Bethany Press, 1958)>, 해롤드 L. 룽거(Harold L. Lunger)의 {알렉산더 캠벨의 정치윤리}<The Political Ethics of Alexander Campbell(St. Louis: Bethany Press, 1954)> 그리고 편집자 페리 E. 그레샴(Perry E. Gresham)의 {베다니의 현자: 광폭피륙 속의 개척자}<The Sage of Bethany: A Pioneer in Broadcloth(St. Louis: Bethany Press, 1960)>가 있다. 또 다른 자료는 {가스펠 애드보케이트}(Gospel Advocate), {크리스천 스탠다드}(The Christian Standard), {크리스천 에반젤리스트}(The Christian-Evangelists) 그리고 {제자들}(The Disciple)과 같은 잡지들에 종종 실리는 캠벨에 관해 쓴 중요한 기사들 속에서 발견된다.

참고서적: McAllister, Lester G. Ed. An Alexander Campbell Reader. St. Louis, Missouri: CBP Press, 1988.   

 


ⓒ copyright    C · C·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