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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A. 연구목적
본 논문의 목적은 "환원 운동"이 기독교 역사를 이루는 핵심 요소임을 밝히려는데 있다. 환원 운동은 기독교 역사의 중심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지 주변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환원 운동은 신약성서에 계시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교회에서 인위적인 모습을
버리고, 오직 성서의 가르침대로 따르자는 운동이다. 이런 환원 운동은 바톤 스톤(Barton W. Stone), 캠벨 부자(Thomas
Campbell and Alexander Campbell), 월터 스콧(Walter Scott) 등에 의해 19세기 초 미국에서 활발하게
주창되어, 체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환원 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운동을 미국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환원 운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환원 운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뿌리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미국이라는 상황에서 벗어나 교회사의
전반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하여야 한다. 환원 운동은 '성서의 초대교회'라는 분명한 목표점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초대교회는 이미 과거이다.
성서의 초대교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독교 역사를 진지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다. 환원 운동은 성서에 근거한 운동으로 성서와 거리가 있는
인간적이고, 관습적인 전통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성서 외의 모든 신조까지도 부인하는 경향도 있었다. 이런 전통을 부인하려는 노력은
환원운동이 전개된 19세기 미국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 개혁 이후 유럽 대륙에서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그들만의
신앙을 향유하고자 하는 "소수 신앙 공동체"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통 신앙 공동체인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로부터 계속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신앙의 규제와 억압에 찬 유럽의 환경에서 벗어나 신대륙으로 이민한 사람들에게 전통에 묶여있는 과거는 잊고 싶은 것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연구의 대상이기보다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전통을 부인하려는 이같은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원 운동은 기독교 역사의
긴 전통의 일부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긴 전통에서 환원 운동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환원 운동의 교회사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본
논문은 환원 운동을 19세기 초 미국의 환원 운동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면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기독교 역사를 통해 환원
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B. 연구방법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환원 운동과 관련된 문서를 각 시대마다 분석하여 그 속에 나타난 환원 운동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환원 운동의 역사적 고찰에 앞서, 환원 운동의 개념을 정의하고, 성서에서 나타난 환원 원리, 그리고 고대와 중세에 나타난 환원 운동을
살펴보고, Ⅲ장에서는 종교 개혁 시대에 나타난 환원 운동을 살펴보며, Ⅳ장에서는 근대에 나타난 환원 운동을 미국을 주심으로 살펴본 후,마지막
결론에서는 앞의 연구를 토대로 환원 운동의 역사성과 전통을 증명하고자 한다.
C. 연구사
미국에서 바톤 스톤(Barton W. Storn) 목사는 교파교회와 결별하면서 환원 운동의 귀한 문서인 "최후유언과 증언"(The
Last Will and Testament)을 발표하였다. 그는 선언문에서 교회의 의회, 노회 그리고 총회의 기구를 반대했다. 그는 이 선언문을
통해 그러한 기관들이 신약성서의 전례에 없는 비성서적인 조직을지적하고, 모든 교회는 성서와 성서의 전례로 돌아가 교회의 성서적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환원 운동의 정신의 영향으로 인해 환원 운동의 연구의 대상은 성서였다.
그리고, 환원 운동의 역사를 연구할 때는 환원 운동의 정신을 주창한 19세기의 미국에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그로인해, 환원 운동은 19세기의
미국의 환원 운동의 태동과 그 이후의 진행 과정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밀리건 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환원 운동사가인 마샬
레겟(Marshall Leggett)이 주장한 바는 성서를 연구해야 하고 성서 외의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즉, 환원 운동은 성서의
초대 교회로 환원하기 위한 운동이므로 환원 운동은 먼저 성서의 연구가 있어야 하며, 환원 운동이 주장된 19세기 미국의 환원운동가들만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방향은 머치(James D. Murch)와 가렛(Leroy Garrett) 등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들의 관심은
19세기 초 환원 운동의 형성과 그 이후의 역사만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은 환원 운동의 기초를 성서에서 보고, 19세기 초 환원 운동을 주창한
이후의 환원 운동의 발전 역사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성서 이후 19세기까지의 역사는 무시된다. 존 와디(John Wadi)는 성서를 근본으로
하되, 16세기 종교 개혁 때의 재세례파를 모델로 한 환원 운동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노만 호간(Norman Hogan)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모델로 삼아 환원 운동의 뿌리를 찾고 있다. 또 샘 헤스터(Sam Hester)는 환원 운동은 어느 특정한 시대동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운동이라고 말하지만, 16세기의 종교 개혁 이후 만을 다루고 있다. 그가 이와 같이 주장한 이유는 종교 개혁이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하나의 모델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와디, 호간, 헤스터 등은 특별한 신앙
공동체를 모델로 했지만, 이 모델을 확대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레오날드 알렌(C. Leonard Allen)과 리챠드 휴즈(Richard
T. Hughes)이다. 이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19세기 초 환원운동에 이르기까지 길고 암울했던 시대에 진정한 교회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환원 운동가들의 역사에 대한 의식, 즉 전통의 무의미화를 지적하며, 르네상스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이후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환원 운동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환원 운동의 뿌리를 찾는데 있어서 모델을
확대하고,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환원 운동 연구에 진일보하였지만, 이들에게도 역시 성서로부터 16세기까지의 언급을 찾아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앞의 연구는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성서를 지켜온 고대, 중세, 종교개혁의 전통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성서로부터 종교 개혁이전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존재하는 환원 운동을 일부의 신앙공동체로 축소시켰다.
역사를 꿰뚫는 하나의 운동으로서의 환원 운동을 밝히는 것이 본 논문의 의도이다.
Ⅱ. 성서에서 종교 개혁이전의 환원 운동
A. 성서의 환원 운동
1. 구약에서의 환원 운동의 원리 환원 운동은 신약 시대의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구약은 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이에 조지 골드만(George E. Goldman)은 환원의 주제를 신·구약 성서에 모두 담겨져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진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유효한 원리임을 역설하고, 구약 성서 인물의 인물들을 통하여 환원의 원리를 알고자 하였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 아담과 이브에게 있어서 환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복종하여
지켰다면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 모든 인간도 하나님과 올바른 계약관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하여 타락하였다.
환원에 대한 성서적 근원은 인류의 첫 범죄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즉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뜨렸을 때부터 환원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격리, 계약의 파괴, 그리고 상호간의 불화를 경험하게 되고,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환원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결코 희망을 버린 채 아담과 이브를 떠나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은혜스럽게 은밀히 환원을 주지
시켰다. 환원은 인류의 첫 범죄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아울러 환원의 기쁜 소식이 인류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쌍무적 계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쌍무적 계약은 모든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현저하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약의 대부분의 이야기도 이 계약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 계약은 아무리 강조해도 견고하리만큼 창세기의 여러 부분에서
언급되고, 신약의 여러 기자들도 이를 참고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도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 계약은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원상 복귀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이후 인간은 하나님과의 어떤 계약의 관계도 맺지 않았기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필요로 하였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계약의 표시로 육체적인 할례를 하였고, 육체적 할례는 곧 환원을
필요로 한다는 증거인 것이다. 환원의 원리는 하나님과 모세와의 계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계약은 인간의 죄악된 모습으로 인해
더욱 환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계명, 제사장직, 장막, 희생제물 등에 대한 제도 등은 의롭게 사는 데 있어서 인간의 무능함을 지적한
계약의 모든 부분이다. 이 계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환원의 기준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래적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패턴을
가지고 계셨다. 즉, 여인의 씨(창 3:15)로부터, 아브라함의 씨(창12:1∼3)로부터, 그리고 다윗의 씨로부터의 패턴이다. 이 패턴은 인간의
본래적 상태로 환원시키기 위해 추구되어 온 것이었다. 환원의 길은 좁아져 특별한 가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정되어짐을 볼 수 있다. 환원의 원리는
다윗의 자손들로부터 계속 보여진다. 다윗 시대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악한 왕 아하스는
성전의 그릇들을 모두 깨뜨렸다. 그는 성전의 문을 봉쇄했으며, 예루살렘의 모든 모퉁이와 유대의 모든 도시에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을 설치하였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왕들보다도 더욱 더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는 바알을 섬기기도 했고, 몰록 신에게 자식을 바치기도 했고,
별과 천체를 숭배하는 등 유대 왕들 중에 가장 타락한 왕중의 하나가 되었다. 타락한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에 환원의 원리는 분명히
나타난다.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사악한 정책을 모두 개혁하였다. 그는 통치 첫 해에 성전 문을 다시 열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였다. 유월절 절기를 회복하였다. 우상 숭배의 제단들을 부수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와 연합하여 떠나지 않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획으로 환원하기를 원하였다. 히스기야가 죽자 이스라엘은 즉시 환원에
대한 노력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환원의 불길은 소멸되지 않았다. 므낫세의 아들 요시아는 부친의 우상숭배를 거부하였다. 포로기 전 타락한 유대
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한 마지막 시도였다. 제위 18년 째 되는 해에 성전을 수리 중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율법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것을 읽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행하라"고 명하였다. 우상숭배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였고, 우상의 제단도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이 경멸하였던
하나님이 명한 일들을 다시금 회복시키기 시작하였다. 요시아의 생애와 사역은 구약에 있어서 환원에 대한 주목할 만한 실례가 되고 있다.
유대왕들의 통치기간 동안이나 포로기 이후에도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도하였다. 예레미야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한 새계약을 통해 환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에스겔은 이상적인 환원의 희망을 보여 주었다. 70년간의 포로기 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환원의 일익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귀환하자마자 그들은 율법이 금지한 모든 행위를 끊어버리고, 오직 율법이 명한 것들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구약에 있어서 다시금 환원 운동을 일으키는 인물이 되었다.
2. 환원 운동의 정의 "환원"(Restoration)이란 단어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환원"은
신약 성서에서 세상을 위해 기록되고, 그 세상에 소개된 그리스도교로의 환원, 즉 요구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어지는 방법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환원하고자 하는 "원래의 상태"의 근거는 바로 신약성서이며, 신약성서에 계시된 본래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회복하고,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을 "환원 운동"(Restoration Movement)이라고
말한다. 환원 운동은 종교개혁처럼 현상을 타파하고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의 성찰과 반성에 철저히 실천적으로
대응하고자 "본래적인 말씀에로 모든 전통과 견해를 돌아가게 하고 그 안에 기록된 제도를 다시 세우는 것, 즉 신약의 교회를 환원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교파주의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본래적인 말씀에로 모든 전통과 견해를 돌아가게 하고 그 안에 기록된 제도를 다시 세우는
것, 즉 신약의 교회를 환원하는 운동이다. 환원 운동의 목표는 "환원"과 함께 하나(one)되자는 "일치"의 운동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고, 사도들이 지향했던 교회와 인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 아래서 하나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운동이다. 하나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출발점이기 때문에 "개혁"(reformation), "혁명"(revolution),
"혁신"(renovation)보다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 보다 효과적인 표현으로서 "환원"(restoration)을 외치는 것이다.
인위적 조직은 개혁되고, 재개혁될 수 있어도 기독교 그 자체를 개혁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은 말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으로 시작된다.
그것을 다시 개혁할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완전한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보다는 환원을 외치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신 완전한
신약성서의 본래의 모습은 하나이기에, 모두 이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하게 되면, 분열은 없어지고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환원
운동은 연합 운동이 목표가 아니라, 초대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단결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임을 알자는 운동인
것이다.
B. 고대 교회의 환원 운동 1. 이레네우스의 환원 운동 고대 교회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받아 온 신약의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대 교회는 교회에 도전하는 이단들로 인해 문제가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였다. 이단
영지주의에 대처한 교부들 중 이레니우스를 통해 나타난 환원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레니우스는 130년경에 소아시아지역의 서머나에서
태어나, 유년 초기 시절부터 폴리캅(Polycarp of Smyrna)과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희랍 시인들과 철학자들, 무엇보다 호머(Homer)와 플라톤(Plato) 작품에 정통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보다 넓은 범위로
전파하려는 의도로 주후 170년경에 고울(Gaul) 지방으로 가게 되고, 리용의 감독인 포티누스(Pothinus)에 의해 사제로 봉헌되었다.
그는 감독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가지고 사절로 로마에 파견되어 그 곳에 머무는 동안, 리용과 그 인근의 비인에서 박해가 발생하여 포티누스 감독이
처형되었다. 이에 따라 이레니우스는 리용에 귀환하자마자 감독에 임명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사람들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관해
사색하기보다는 교인들을 기독교 생활과 신앙 속에 이끌기를 좋아하는 목회자였다. 따라서 그의 저술은 논리와 사색을 주로 한 것이기보다는 명백하고
단순하게 이단을 반박하고 신자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기독교 교리를 강해한 「사도적 신앙의 증명」(Demonstration
of Apostolic Faith)과 영지주의를 반박한 것으로 「이단을 반박함」(Against Heresies)으로 더 잘 알려진, 「소위
지식에 대한 논박」(Refutation of the So-called Gnosis), 그리고 「에피데이키스」(Epideixis)로 불리는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Demonstration of Apostolic Preaching) 뿐이다. 이 저서를 통해 나타난 그의 목표는 그가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신앙을 자기 자신의 의견에 따라 가감함 없이 그대로 전달해 줌으로 2세기말 교회의 신앙 상태를 보여주는 뛰어난
자료이다. 이단의 도전과 이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반박의 과정에서 이레니우스의 환원 운동을 찾아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성서의
권위보다도 영지주의의 비의를 통해 올바른 가르침이 주어진다고 가르침으로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는 존립여부를 건
대립 속에서 정경의 확립을 가져왔다. 그러나 텍스트(Text)는 권위에 있어서는 충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서는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영지주의자들은 성서를 교회의 공적 해석과는 다른 방법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통"(Tradition)이라는 또 하나의
권위가 요구되었다. 성서 대신에 이 신앙의 기준(regula fidei)이 정경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이단의 도전에 대한 대처의
반박의 근거는 성서와 전통이었다. 성서에서 이단을 반박했다는 것에 대해 환원 운동이라 함은 동의할 수 있으나, 전통을 버리고 성서로 가자는 환원
운동에서 이레니우스의 전통은 환원 운동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사도적 전통은 사도들이 처음에 입으로
말해서 선포한 것을, 나중에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성서로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그에게 전통은 사도성의 의미였으며, 성서의 전통으로 성서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환원 운동이라 말함에 무리가 없겠다. 이레니우스의 사상 중에 중요한 것은
"총괄갱신"(recaptulation)이다. 이는 에베소서 1장 10절의 '통일'이란 말에서 유래하였다. 그 어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다 포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 첫째 아담의 대역이었다. 첫째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피조세계에 사망과 폐허를 가져왔다.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피조세계를 원래의 상태로 '환원'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 총괄갱신은 환원 운동의 목표인 '환원'과 '통일'의 환원 원리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2. 터툴리안(Tetullian)의 환원 운동 터툴리안은 서방신학의 대변자 혹은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평가되어진다.
그는 약 15년 동안(A. D. 196-212) 권당 1500페이지가 넘는 약 30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작품은 교회 생활
뿐만 아니라 교리 및 신학 논쟁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비록 그가 분리하여 공교회에서 이탈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저술들은 위대한
서방 교부들에 의하여 전수되고 연구되었으며 라틴 교회에서 무게있게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터툴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약 150-160년 어간에 칼타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주둔군의 백부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문학과 법률에 있어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었고, 특히 직업적인 법률가이었던 것 같다. 그는 40세인
195년경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 변증을 위한 글을 썼다. 그의 글은 197년으로부터 교황 칼리스터스(Callistus)의 때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200년경에 칼타고 교회의 장로로 안수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나 점차로 몬타니즘으로 기울어져 206년경에는 그 파에 가담하였고,
213년에는 완전히 교회에서 분립하였다. 터툴리안의 저술로는 31편이 남아 있다. 그는 헬라어로도 썼고, 라틴어로도 썼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작품을 라틴어로 썼다. 그의 작품 중 우리가 주목할 교리 논쟁 작품들 중 200년 경에 쓰인 「이단을 논박하는 취득시효」(Liber
de Praescriptionibus adversus haereticos)이다. "취득시효"(Praescriptio)란 회부된 재판의 내용을
문제삼지 않고, 재판의 진행 그 자체를 문제시할 때 쓰는 법률용어이다. 그러므로 취득시효란 상대편이 재판 절차에서 벗어났으므로 재판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대 의견을 뜻한다. 따라서 터툴리안이 이단을 반박하는「취득시효」를 저술했다는 뜻은 이단들의 이론 자체를 논의하자는
의도가 아니고, 이단들이 정통에 반대할 권한 자체가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다. 「취득시효」의 앞부분 7장은 이단들의 오류를 지적한
다음, 또 다른 7장에 걸쳐서 진리의 모습을 밝힌다. 이 책의 핵심은 제 15장에서 나오는데, 터툴리안은 이단들과 성경을 근거해서 논하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거룩한 책 그 자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교회만이 소유하고 있기에, 교회만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과 참된 교리는 사도들에 의해서 후계자들에게 전달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단들은 사도들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할 수 없는
반면 교회는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터툴리안의 취득시효 규정은 선대의 방법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터툴리안은 라틴의 법적인 방법을 통해 교회의 정통성을 규명하되 사도직이나 감독직 같은 직분에 의해 교회의 전통을 조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수한 사도들의 가르침 즉 진리의 전승과 보존을 통해 교회의 전통을 조명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터툴리안의 관심은 "성서"이며,
성서의 가르침대로 따르고자 하는 환원 정신을 반증하는 것이다.
C. 중세 교회의 환원 운동
1. 중세의 상황 초대기독교는 박해를 통해 성장하였다고 할만큼 세속적 권위의 박해의 연속이었다. 이런 기독교가 콘스탄틴에
의해 공인된 후 교회의 박해는 없어지고, 제도 안에서 탄탄대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회는 제도 안에 고착되어 갔고, 제도 안의 교회에 순응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중세는 미신(superstition)과 종속(dependence)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교육의 부재 속에 학식을
갖춘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신빙성있는 성서기관이나 신학교가 거의 전무했으며, 평민들은 끝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천사, 악마 등 초자연적인 존재로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정치,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고, 실제로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교회를 의지하고 종속되어 있었다. 한편 교회는 7성례를 행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또 교회는 파문의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이교도인들이나 죄수들은 성례전의 구원의 은혜에서
제외시켰다. 교황은 모든 나라와 모든 국민들에 성례전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금지 명령의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이런 권력의 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로마교회를 통해서만 신의 은총을 받게 만드신 격노의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들었다. 종속감을 뒷받침해준 제도는 봉건제이다.
봉건 영주들은 그들의 봉신들로 하여금 충성을 요구하고 역으로 봉신들은 생계를 위해 그들의 영주를 의존하였다. 이런 봉건 경제는 화폐나 교역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와 생계를 위한 충성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농노들과 봉신들은 종속제도에 굳게 매여 있었다. 이런 지배적인
사회-정치제도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영화로우신 봉건 영주로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틸리히는 '중세의 성격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중세는 거룩한 단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특별한 제도 안에서 구체화된 초월적 실재가 문화를 형성하고 자연을 해석했다'라고 말한다.
또, 중세를 이행기, 중세초기, 중세융성기, 중세말기로 나누고, 이 네 시기는 모두 세 가지 신학적인 기본 사상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며
스콜라주의, 신비주의, 성서주의를 설명한다. 첫째, 스콜라주의는 중세 전체를 규정하고 있는 인식적인 태도로서, 기독교적 교설의
방법론적 해석을 제공한다. 스콜라주의는 삶의 모든 문제를 붙들고 신학적으로 탐구하고 아주 풍부한 문헌들을 내놓았다. 두 번째는 신비주의이다.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은 동시에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스콜라주의적 교리는 그 기초를 예배, 기도, 명상 그리고 금욕적 훈련을 통하여 신적인 것과의
신비적 합일에 두었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기독교에 속한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현존하는 신과 직접적으로 하나되는 것, 신비적 합일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성서주의이다. 이것은 중세 말기에 특히 발전한 것으로서, 이 시기에 종교개혁에의 길을 예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성서주의는 오직 프로테스탄트적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중세 전체에 걸쳐서 성서주의적 반동은 있었다. 성서주의는 성서를 실천적 기독교의 터전으로
삼았는데 특히 평신도들 가운데서 두드러졌다. 성서주의는 중세 말기에 있어서는 평신도도 또한 성서를 읽도록 조장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기본 사상 중 성서로 돌아가자는 환원 운동은 성서주의에 관심이 있는 것, 즉
성서주의가 발생한 중세 말기로 집중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2. 중세의 환원 운동 ⑴ 왈도파(Waldenses) 12세기말에 등장한 왈도파 운동(Waldenses
Movement)은 다소 개신교적이고 청교도적인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프랑스 리용(Lyon)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왈도(Waldes or Val
s)에 의해 주창되었다. 왈도는 마태복음 19장에 감화되어 아내와 딸들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나머지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거리에서
참회의 생활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내리신 지시들을 절대적으로 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거기에 규정된
대로 옷을 입으려고 하였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만을 의존하여 살려고 하였다. 자신의 의무를 더 잘 알기 위해 성경과 교부들의 글의 일부를
방언으로 번역한 책을 구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 일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고, '사도적인
생활' 즉 자발적인 청빈과 참회의 설교를 하는 생활의 참된 표지가 여기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교회법은 평신도의 설교를 금지하고 있었다.
1179년 제 3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에서 자신들의 청빈과 설교의 생활을 승인해 줄 것을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Ⅲ, 1159-1181)는 청빈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는 찬사를 보내었지만 주교의 허가 없이는 설교할 권리가
없다고 거부하였다. 잠시 교황의 제한에 준수하였지만, 설교할 권리를 거절한 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는 인간의 음성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곧
설교를 재개하였다. 1182년경에 리용의 주교에 의하여 불순종을 이유로 파문 당하고 그 도시에서 쫓겨났다. 왈도파는 1184년 교황 키우스
3세(Lucius Ⅲ, 1181-1185)의 교서「아드 아볼렌담」(Ad aboendam)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어 파문
당하였다. 왈도파는 모국어 성경을 소유하고, 모국어로 설교하였다. 그들은 평신도들도 설교를 하고 성례를 집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들은 검소한 생활의 가치를 강조하였으며 엄격한 도덕률을 고수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 카톨릭교회는 그 사치와 제도주의
및 세상과의 타협 때문에 도저히 참된 교회로 간주될 권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성례들은 효력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사, 성자
숭배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연옥에 대한 신앙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유아세례(infant baptism)는 계속
실행하였다. 왈도파의 개혁 운동의 핵심은 성경에 대한 사랑과 그들이 성경에서 읽었던 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그들은
신약성경을 특별히 강조하였고, 특히 마태복음 5, 6, 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의 권위보다 성서의
권위를 위에 두었다. 그들은 행함의 근거를 성서에 두고,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살려고 노력한 환원 운동가들이었다.
⑵
위클리프(John Wyclif)
중세 후기 개혁 운동의 대부분은 교회의 교리와 교훈의 타당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존 위클리프에
이르러서는 사태가 달라진다. 위클리프의 출생년월일은 확실치 않지만, 그는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학생시절과 교수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스콜라주의 철학과 신학의 대가로, 유명론의 물결이 휩쓰는 시대에 실재론자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부흥을 주도했다. 그는
중세 학자의 어투를 구사했으나 그의 운동의 내용은 그를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생애 중 마지막
10년의 짧은 시간을 개혁가의 길로 걸었지만 그의 중요성은, 그가 후일 개신교 개혁자들에 의해 각색되고 명료화되고 확대되었던 일련의 원칙들을
이때 벌써 파악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무오한 권위, 교회 및 교회의 전통보다 우월한 권위였다. 그리고 성경은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성경 지식을 널리 유포시킬 때에 설교보다
더 귀한 의식은 없다고 생각했고, 교회는 당연히 신약성경의 빛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예정된 사람들로 구성되기에 교회에는 교황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클리프는 성찬 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재한다는 교황의
해석을 거부하였다. 그는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은총의 상징이거나 표시라고 주장했다. 그는 면죄부를 마귀의 소행으로 보았고, 성직자들은
결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성직자의 사역은 그들 자신의 거룩한 삶을 영위할 때만 하나님께 열납된다고 하였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뼈들은 무덤에서 파내어져 불태워졌고, 스위프트 강에 던져졌다. 그는 영국 내에서의 개혁의 길을 닦아놓는 역할을 했다. 농민들은 그가 주장한 교회
내에서의 평등의 가르침을 경제 생활에 적용했고, 결국 그의 가르침이 1381년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왈도파처럼 교회의
생활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개척자 역할을 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위클리프의 환원 정신은
환원을 열망하는 후대의 인물들의 정신 속에 흘러 넘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⑶ 후스(John Hus) 14세기 후반에 와서 보헤미아에서는 개혁운동이 상승세를 탔다. 성직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부패했고, 세속에 물들었다. 보헤미아에서 역시 설교자들은 삶의 지침인 성경에 호소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부정부패를 고발했고, 성만찬을 더욱 자주
베풀 것을 강조했다. 이 개혁운동의 지도자는 후스(John Hus)였다. 후스는 평민출신으로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하여 문학석사가 되었다. 그는
박사학위의 준비를 모두 마쳤지만 개혁의 투쟁으로 인해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후스는 프라그에 있는 베들레헴의 성 인노센트(The Holy
Innocents of Bethlehem) 성당의 설교자였으며 동시에 프라그 도시의 대학교구 담임목사로 일했다. 그는 위클리프의 글들을 통해서
감명을 받고, 위클리프의 모범을 따라서 비슷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국가의 개혁 능력에 기대하였지만, 후스는 교회의
본성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다. 후스는 성경연구를 통해 회심하고 성직 개혁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성경
연구를 촉구하였다. 그의 체코어 설교와 개혁적 제안들은 대중적이어서 거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후스는 참된 교회는 교황이 머리가
아닌 그리스도가 머리인 예정된 사람들로만 구성되며, 참된 교회의 삶은 그리스도와 같은 순수와 청빈의 삶이고, 이 교회의 유일한 법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이라고 가르쳤다. 후스는 '십자군 면제'를 비난하며 교황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권리가 없으며, 용서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 값없이 주기 때문에 면죄는 필요 없다고 가르쳤다. 후스는 교회와 교구사제들과 교황의 부정과 부패를 질책하였고,
교회의 초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역설하였고, 많은 교황들은 결코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단들이라고 고발했다. 후스는 과격한 신학적
혁명이나 교회적 혁명보다 도덕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후스는 많은 공중(公衆) 앞에서 자기의 견해를 변호할 기회를 열망하였고, 그래서
콘스탄스 공의회가 그를 이단으로 소환하여 견해를 밝히도록 했을 때 그는 크게 기뻐하였다. 1414년 11월 3일 황제
지기스문트 (Sigismund)의 신변 보장 약속을 믿고 후스는 콘스탄스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투옥되고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1415년 7월 6일에 화형 당하였다. 그는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서의
가르침대로 행한 환원 운동가이다.
Ⅲ. 종교 개혁 시대에 나타난 환원 운동
A. 에라스무스의 환원 운동
에라스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 배경이 된 르네상스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
운동과 더불어 1350-1500년 어간에 일어났다. 중세 신학을 거부하였고, 이탈리아를 진원지로 하여 1480년대에는 알프스 산을 넘어 이미
유럽에 소개된 이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희랍―로마 문화의 부흥으로 '근원으로'(ad fontes)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
교회의 권위로부터 국가의 독립 및 역사의식 등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인문주의 운동이 영국에서는 존 콜렛(John Colet)과 토마스
모어(Thomas More)에 의해서 프랑스에서는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독일에서는 로이히린, 아그리콜라, 멜랑히톤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은 이탈리아 중심의 남부와 독일 중심의 북부에서 성격상 서로 다른 두 가지 조류로 나타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신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경건보다는 향락적인 것을 추구하는 문예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띠고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능력을 강조했으며, 희랍과 로마의 고전에서 생활의 규범을 찾고자 하였다. 반면에 독일을 중심한 북구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명상적이고
경건한 종교적 보편주의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한 유대교 및 기독교의 경전을 연구하면서 성서연구에 자극을 주었고, 루터의 개혁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요소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단순화시키고 이성을 드높이며 의식보다도 도덕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 일을 위한 최고의 권위는 기독교의 원초적인 헌장인 신약성경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근원인 성서로의 환원을 주장한 환원
운동가라고 하겠다. 기독교 인문주의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지만,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는 이러한
비전을 주창한 가장 뚜렷한 사람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화란의 사제였던 제랄드(Roger Gerard)의 두 번째 아들로 약 1446년 또는
1466년에 로테르담 또는 고우다(Gouda)에서 태어났다. 에라스무스는 데벤터(Deventer)에 있는 학교에서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고, 공동생활 형제단의 경건에 의하여 교육받았다. 그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수도원적인 삶을 살며, 성직수임을 받았으나 개인적인 자유를
열망하고 수도원을 떠났다. 그는 파리대학, 이태리, 영국, 저지대 나라들 및 독일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그는 위대한 문필가였다. 그는 많은 독자들을 가졌고, 인쇄술의 발달로 많은 작품들을 출판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현자와 예언자로
교황들과 군주들과 대학들의 찬사를 받는, 국제적 명성을 누리는 학자가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1516년에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이었다. 그는 초대 교부들의 작품을 출판할 준비를 하였으며, 인간의 연약성과 사악함을 재치있게 폭로한 「우신예찬」(Praise of
Folly)과 대중 신앙 속에 스며들어 있는 미신적 요소를 명쾌하게 비평한 「담화」(Colloquies)를 써냄으로써 좀더 대중적인 작가로서의
그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또 보다 진지한 면에서는 「편람」(Enchiridion)이란 책을 써서 기독교적 삶의 지침을 제공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스콜라 신학자들을 공격하였다. 당시 많은 스콜라 신학자들은 당시의 운동에 사로잡혀 있어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제안하는
"새로운"(new) 것을 제안하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새로운"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오래된 것이며, 오히려 스콜라 신학자들의 "옛"(old) 것이 사실상 새로운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는 당시 신학자들과 달리 기독교적 가르침,
경건, 성서의 진정한 근원에 관심을 가졌기에 이와 같은 주장이 가능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에게 진정으로 옛것은 예수와 사도들, 초대교회의
가르침이었다. 기독교 인문자들은 중세의 신학에 있어서 추상적인 경향과 이성적 논쟁에 대한 강조로 인해 쉽게 그들의 근본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기독교 신앙인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전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순수 근원을 복구함으로써 에라스무스는 잊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철학"(Philosophy of Christ)을 회복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경건과 성결을 고수하도록 하였다. 이런 영적인 삶을 위한 가장
기본이 되는 근원은 성경이었다. 그는 성경을 "영원한 지혜의 숨겨진 창고"(the hidden storehouse of everlasting
wisdom)라고 불렀다. 에라스무스는 역사적 예수상을 제시하고 또 자신이 이해한대로 참된 기독교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우리가 모방해야 할 전형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단순한 것이었다. 기독교란 사랑과 관용의 정신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다. 교회는 교회의 본래 메시지가 지니고 있었던 단순성을 흐리게 만들어온 모든 부착물들을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설득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형제단의 생활과 고전연구에서 배운 성경에 근거한 초대교회의
단순성과 순수성으로 환원하는 것을 지향하며, 변질된 시기의 교회를 비판적으로 구별하였다는 점에서 환원 운동가라 하겠다.
B. 루터의 환원 운동
루터는 1483년 10월 아이스레벤에서 중산층 은광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률학을 공부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많은 투쟁을 거친 후에 하나님, 신앙, 그리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교황권과 충돌하여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1546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지도했던 루터파 교회를 세웠다. 루터의 영적 시험(Anfechtung)은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실제적 이유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한 시험들에 대한 루터의 생각은 그의 사고에 전형적이며, 많은 관점들과
문제들이 혼합되어 있다. 루터의 영적 시험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치라는 문제에, 즉 나는 어떻게 자비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궁극적인 의문이었다. 이렇게 괴로워하던 루터는 1512년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로마서 강해를 하던 중 로마서
1:16-17에서 말하는 "복음" 혹은 "좋은 소식"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17장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은혜"를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새로운 확신은 인간의 의로운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면죄부 발행이 선포되었던 1517년의 만성절 저녁, 루터는 신학 논쟁을
위해 비텐베르그 성당의 정문에 95개 신조를 써 붙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이라는 대변화의 시작이었다. 이와 같이 행동한 루터는 세 가지 의문에서
출발한 것인데, 즉 교황의 착취에 대한 독일 국민의 민족 의식의 대변, 교황의 권위가 과연 연옥까지 미칠 수 있을까하는 의문,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면죄부는 죄인들의 심리 상태를 그릇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초대 교회의 형태와 구조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내가 모방해야 할 성서적 모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 "어떻게 하면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
근본 질문은 루터의 성서관을 형성시키게 하였다. 종교 개혁의 핵심을 성서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고 말한다.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는 비록 어떤 점들에서는 상이하게 보기는 하였지만 성경의 권위를 당연시하였다. 그러나 "오직 성서로만"(Scripture alone)이라는
원리는 루터 이전에는 결코 주장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즉 루터 이전까지는 전반적인 성경의 권위가 교회 내에서 절대적으로
당연시되었고, 성경과 전통 사이의 관계는 아직 문제로서 규명되지 않았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로 하여금 성경의 내용과 권위에 근거하여 16세기
교회를 비판할 수 있게 만들었다. 루터는 "오직 성서"라는 말을 외칠 때, 항상 "오직 그리스도"라는 말도 함께 외쳤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계신다. 이것은 중요하기에 루터는 성서의 내적 규범, 즉 "규범
가운데 규범"은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계시해 주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성서라고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루터의 그리스도 중심의 성서관은 거짓 교회로부터 참 교회를 구별해
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진정한 교회는 보이는 의식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행위나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선포 속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말씀 선포는 교회를 이루지만 시간이 지남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각하게 부패한
로마 교회의 억압과 독재를 통하여 루터는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규명하였다. 루터는 교회 갱신을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성서적 모형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회복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고 믿는 자들은 죄용서를 받을 수 있다. 영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성서의
모델을 따르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면 믿음의 중요성을 잃게 되기 때문에 루터는 초대 기독교 신앙의 모범과 전통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근본적으로
복음과 대치되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루터의 관심의 초점은 값없이 얻은 은혜를 선포하는 순수한 복음이었다. 이러한 루터의 관심은
루터가 성서를 씌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기준을 갖게 했다. 즉 이신칭의가 그 기준인데, 이것은 성서 자체
안에도 가치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성서"라는 외침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성서로 돌아가게 한 점,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믿음을 통한 은혜로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은혜의 복음을 회복한 점에서 환원 운동을 엿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기준에
의해 가치를 판단한 것은 하나의 오점이라 하겠다. 또한 루터의 "오직 성서"의 환원 운동에도 불구하고, 이를 환원 운동의 효시로서
환원 운동가들이 이해하지 않는 이유는 종교개혁 자체가 교회를 찢는 운동이었기에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의 모습은 아집과 교파주의에 치우친 분열과
분쟁의 연속이 되었다는 점이다. 루터에게는 하나되고자 하는 환원의 목표가 결여되어 있고, 이로 인해 환원 운동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C. 쯔빙글리와 재세례파의 환원 운동
1.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의 환원 운동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위한 중대한 투쟁에 전념하고 있을
동한 쯔빙글리의 지도하에 스위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쮜리히에서 64Km 정도 떨어진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평범하지만 그 지역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는 울라이 쯔빙글리(Ulei Zwingli)와
마가레트(Margaret)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제로 있는 삼촌에게 가서 생활하였는데, 그의 삼촌 바르트헬레마이
쯔빙글리(Barthelemei Zwingli)는 그의 교육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었다. 그는 인문주의가 한참 성하고 있던 바젤(Basel)과
베른(Bern)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에 비엔나 대학으로 유학했다가 다시 바젤로 돌아왔다. 쯔빙글리는 바젤에서 인문주의자였던 그의 선생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후일 비일(Biel)에서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주도자가 된 토마스 비텐바하(Thomas Wyttenbach)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쯔빙글리는 그에게서 성서의 유일한 권위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 용서의 유일한 대가라는 것과 면죄부의 무용함을 배웠고,
이러한 가르침 아래 쯔빙글리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믿음의 초기 원천으로 돌아갈 것을 열망하고 일반적으로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1506년 글라루스(Glarus)의 사제가 된 쯔빙글리는 바쁜 틈을 내 헬라어를 공부했고, 히브리어를 시작했고, 에라스무스
작품에 몰두했다. 그는 고전, 성경, 교부들을 열심히 공부하여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고, 북부 소수 인문주의자들의 존경받는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영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성경을 면밀히 공부하다 보니 그의 마음에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 전체를 성경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모든 책들보다 우월한 권위를
소유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1516년에 결론을 내렸다. 이 원칙이 바로 쮜리히 종교 개혁의 전개를 주도할 원칙이
되었다. 1519년 그는 쮜리히의 한 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개혁 운동은 저항이라기보다는 개선,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더 이상 1년 중 각 주일마다 읽고 가르치도록 지정된 구절들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대신 강단 위에
헬라어 원문 성경을 놓고, 마태복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하겠노라고 했다. 쯔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라스무스와 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에 대해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쯔빙글리의 생애에 있어서 그는 초기에는 철저한 에라스무스의 제자였고, 이로
인해 쯔빙글리의 신학의 중요한 방법이 결정되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의 철학"과 함께, 고대 고전적인 근본 세속 이념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는 쯔빙글리에게 영향이 미쳤다. 특별히 루터와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은 에라스무스의 세속적 차원의 영향이다.
루터는 중세 전통에서 비롯된 죄의식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을 발견했을 때, 가능한 로마교회의 전통적인 구조 내에서 영적인
개혁을 이루어 보고자 하였으나, 쯔빙글리는 영적인 개혁과 제도적인 개혁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전반적인 교회의 삶에 대한 규범적인 양식을
성서에서 찾고자 하였다. 쯔빙글리는 "오직 성서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의 표준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는데 가지게 되었다. 성서의
선례를 따라 쯔빙글리는 쮜리히 교회에서 개혁을 외친 결과, 화려한 대성당의 동상, 기념물, 그림, 제단의 물품들은 추한 모습을 드러냈고,
오르간은 깨졌고, 성직자의 가운은 폐지되었고 벽은 하얗게 씻겨졌다. 높은 신비에 둘러 쌓여 있던 로마 카톨릭의 미사는 단지 하나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초대교회의 회중 예배의 단순성을 회복하기 위해 성서의 선례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진정한 의식에 덧붙이는 무엇이든 불필요한 것이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예배 중에 성직자는 가운을
입을 필요가 없으며, 노래를 부를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회중 음악의 대한 거부 이유는 성서에서 직접 명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금한다라는
원칙 때문이다. 그는 성서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예배할 때 회중 음악을 지시한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그는 개혁이 아닌 회복을 외친 사람이다. 그에게서 개혁과 회복의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점을 보게 되는데 개혁의 주창자는
성서의 어떤 해석이든지 간에 그 해석이 적용되게끔 하는 바로 그 전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전통을 중재하고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회복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교회 공의회와 신학자, 신조에 의해 형성된 전통이 거의 완벽하다는 것을
부인하고 성서의 직접적이고 순수한 이해를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성서의 선례대로 행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성서가 말하면
말하고, 성서가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사람이었다. 쯔빙글리의 개혁의 근거가 "오직 성서"에 두고, 성서로 돌아가 성서의 가르침대로
행하고자 한 점에서 환원 운동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2. 제세례파(Anabaptist)의 환원 운동 재세례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A. D. 4세기 초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틴(Constantin the Great)황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3세기 동안의 산발적이고 때로는 몹시 잔인한 박해가 기독교인들에게
있은 후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여, 기독교를 다른 종교들과 법적으로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았고, 여러 면에서 기독교 신앙을
선호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박해받는 교회를 관용받는 교회로 바꾸어 놓았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틴 보다 기독교를 더 옹호하여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이 종교로 인정하였다. 그는 380년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이 신앙을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제국의
권한으로 내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콘스탄틴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갖기 위해 헌신이 요구되었지만, 이후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강력하고 특권을 누리는 신앙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공인으로 외형적으로 상당히
발전하여, 교회 건물들이 건축되고 정교는 밀착되었다. 교회는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고, 세속화 현상이 발생했다. 예배의 형식이 영적인 성도의
교통에서 외형적인 형식 위주의 예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받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이 아닌 사회적 명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500년에 이르러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교회는 회중에게 헌신을 요구하지 않은 채, 약 1,000년 이상을 그런 모습으로
지속시켰다. 그 결과 교회는 부도덕과 무지로 파멸되어갔다. 음주와 음란이 성행하였고 심지어 성직자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황주의는 밑바닥까지
타락하였으며, 성직 매매가 횡행하게 되었다. 한때 그리스도교적 완성을 성취했던 수도원도 몰락하여 생동성을 상실하여 게으르고 사치하고 무기력하고
부도덕해 졌다. 또한 사람의 구원까지도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너무나 세속되어서 세상과 교회는 다를 바
없었다. 교회는 국교회로 불리워지고, 모든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저절로 국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국가는 교회에 특별한 권력을
부여하였고, 반대로 교 회는 국가에 충성하게 되었다. 이 국교회 원칙은 종교개혁가 루터, 칼빈, 쯔빙글리들도 받아들였다. 그들은
교회를 힘들게 하는 부도덕한 모습을 한탄하면서도 교회가 세상의 우위와 특권,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력 있는 국가보다는 살아 있으면서 순수한 교회를 갖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들은 당시의 부도덕한 교회와 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상황을 비교하고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재세례파들은 쯔빙글리가 외치던 성경에 제시된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 사도적 순수 신앙을 되찾는 것에 동의하였다. 쯔빙글리의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제자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근본적인 제자도의 삶이란 곧, 몇 세기 동안 지속된 국가와 교회의
연합을 끝내는 것을 의미했다. 재세례파들은 그리스도교는 개인의 확신의 사항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없으며 개인적인 결단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단지 유아세례를 문제 삼았을
뿐이며 어릴 때에 세례 받은 사람들을 다시 세례주지는 않았다. 재세례파는 쯔빙글리에게 교회의 연합을 위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일, 곧 헌신적인
성인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함을 설교해 주기를 요청하지만, 쯔빙글리는 공의회가 볼 때에 성인들의 세례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는 것이며, 이는
혁명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생각으로 세례의 회복을 요구하는 재세례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에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은 불만을 표시하고, 마침내 1525년 1월 21일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취리히로 피난 온 신부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이 같은 동료인 콘라드 그레벨에게 세례를 요청하여 세례를 받고, 공동체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은 당시에는
침례를 시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례의 형식이 아니라 세례를 받기 위한 신앙의 필요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점차적으로 더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기를 주장하면서 이들은 몸 전체가 물 속에 들어가는 형태의 침례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태어나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를 받았기에, 이를 반대하는 쪽에서 "재세례주의자"(Anabaptists) 혹은 "중복
세례주의자"(rebaptizers)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에게 붙여 준 재세례주의자 이름은 이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간과하게 만들고 이 이름에서 파생되는 결과만 중요하게 만든다면 이 이름은 타당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재세례파 운동이 내세운 표어는 "복구 혹은 환원(Restitution)"이었다. 이들은 당시 어떤 집단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환원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했다. 그러므로, 재세례파 운동가들을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어가 "환원"(Restored)인
만큼, 이들 운동에 환원 운동의 정신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Ⅳ. 근대의 환원 운동
A. 바톤 스톤의 환원 운동
스톤 목사(Barton W. stone, 1772∼1884)는 환원 운동의 기틀을 세운 중심역할을 담당한 지도자였다. 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1772년 12월 24일 미국 포트 토바코(Port Tobacco)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헌신적 영국교회의 교인들로 아버지가 일찍 별세하여 어머니는 8남매를 부양하기 위해 버지니아주 블루 라이지 마운틴(Blue Ridge
Mountain) 지역으로 이사했다. 어린 스톤은 당시의 남북 전쟁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전쟁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의 마음으로
성장했다. 1790년 스톤은 장로교 계통의 학교인 노스캘롤라이나에 소재한 길포드 아카데미(Guilford Academy)에 진학하였다.
1791년 장로교 목사인 윌리암 하지(William Hodge)로부터 세례를 받고 하지 목사에게 수학하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795년에는 죠지아주 워싱턴의 감리교 선교사인 호프 헐(Hope Hull)에 의해 운영되는 아카데미에서 어학을 가르쳤다. 일년 후 다시
노스켈롤라이나로 돌아온 스톤은 장로교회로부터 목회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1798년부터 스톤은 선교사업에 열정을 기울이게 되었다.
스톤은 캔터키 주의 캔리지와 콘코드에 있는 몇몇 장로교회 교인들로부터 초빙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응하기 위해 그는 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그는 비록 장로교 목사였지만 인간이 만든 교리들로 인해 고민하였고, 끊임없이 성서의 참된 가르침을 추구해 나갔다. 장로교의 신앙고백의
구원관에 대해서는 피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스톤은 네 명의 장로교 목사와 함께 1801년 당시 매우 알려진 케인 릿지
부흥집회에 참석했다. 이 부흥집회에서 영적 체험을 한 그들은 엄격한 예정설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에 맞서게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교리에서
이탈했다는 이유로 켄터키 노회로부터 통렬히 비난을 받게 되자, 스톤과 그의 동료들은 1803년 노회로부터 독립하여 그들 자체의 스프링필드
장로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1년여만에 그들은 장로교회를 해산하고 라이스 해거드(Rice Haggard)의 촉구 하에 "오직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스톤은 1804년 6월 28일 케인 릿지교회에서 스프링필드 장로교회의 6인 목사들과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것이
환원 운동의 귀한 문서인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최후 유언과 증언"(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ry)이다. 이 유언서 첫 조항에서 이들은 말하기를 "본 장로회는 죽고, 해체되어, 넓은 범위의 그리스도의
몸에로 연합하기 위하여 침몰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오직 한 몸, 한 성령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어지는 조항들에서는 "한
주님만이 계시므로 목사에 대한 높임 칭호인 '레버렌드'(Reverend)를 쓰지 않겠다"고 하였고, "사람들은 성서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채택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치리 할 법령이나 위임된 권위로 그들을 처벌할 권한을 영원히 멈춘다"고 하였다. 다른
조항에서는 말하기를, "복음사역을 위한 후보자들은 지금으로부터 열심 있는 기도로 성서를 연구하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인간의 전통과 세상의
초보적인 지식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로부터 부으시는 성령으로서 단순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자격을 얻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 유언은 목회자의 선택이나 책임은 물론 교회행정과 치리에 있어서 회중적이고 개교회 중심적일 것을 선언하였다. 또한 성서 한
권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인도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피차 관용의 정신을 키우고, 기도에 힘쓰며, 분쟁을 줄이고, 시대의 징조를 살펴
구속의 날을 고대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인위적인 조직과 기구를 반대했다. 이러한 기관들은 신약성서의 전례에 없는
비성서적인 조직임을 지적하고, 모든 교회는 성서와 성서의 전례로 돌아가 교회의 성서적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지로 여러 다른 비성서적 교회들의 이름을 가진 신앙인들이 성서적 교회의 이름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서의 이름이 분열된 교회의 이름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톤은 처음에는 세례의식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세례를 선택의 행위로 보았다. 그러나 세례의식에 관한 질문을 받고 성서의 세례를 연구한 결과 그는 침례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세례의식으로 결론짓고 자신도 침례로 다시 세례의식을 받았다. 침례는 왕이 명령한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는 의식으로서 성서의 분명한
가르침처럼 죄의 씻음과 사함을 위한 의식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침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도 주의 만찬을 허락하고 교인으로 인정했다.
인내와 사랑으로 침수세례를 이해시키고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침례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 경건한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제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스톤 운동은 특히 테네시주, 켄터키, 북부 알라바마, 남부 오하이오 지역에서 성행하였고 이미 환원정신의 성향을
공유하고 있는 분리 침례교인들 사이에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811년에 이르러 그 당시의 기록에 보면 스톤 운동은 약 13,000명의
지지자들을 갖게 되었다. 스톤 운동은 분명 환원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초대교회의 구조나 형태보다는 그들의 경건하고 의로운 생활에 초점을
맞췄다. 스톤과 그의 동료들에게 환원은 무엇보다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삶의 양식의 회복이었다.
스톤의 환원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의 환원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같이 직접 지으신 영원한
섭리의 이름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바로 성서의 진리의 이름이라는 주장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이름의
성서적 합법성을 고린도후서 11장 2절과 요한계시록 21장 2절을 통해 교회를 예수의 신부로 설명하며, 교인들은 신랑인 예수의 성씨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또 에베소서 3장 14절을 통해 교회를 한 가족으로 설명하며, 하나님은 아버지, 예수님은 장남이요 모든 교인들은 예수의 아래
형제와 자녀들이므로 모든 그의 형제들인 교인도 그리스도인으로 칭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뜻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이름이어서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사랑하면 누구나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 모든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성서의 이름으로 돌아가 하나로 일치하도록 하신 섭리와 명령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 했다. 교회의 일치
사업은 하나의 이름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성서에 없는 이름은 잊고 포기하자고 했다. 스톤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내리신 고유한 이름이라고 주장하여 그 이름으로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일치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환원 운동을 통해 그리스도인들만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기독교의 본래의 깨끗함으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의 기초를 만들어 크게 기여했다. 또 커밍스(A. G. Comings)는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개혁자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진정 위대했다"고 평했다. 어떤 이는 그가 환원 운동의 핵심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미국 교회사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란 옛 이름을 올바른 위치로 환원한 개혁자로 평가한 것처럼, 그의 환원의 방법은 성서에서 말하는 이름, 즉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의 환원이다.
B. 캠벨 부자 (Thomas Campbell and Alexander Campbell)의 환원 운동
토마스 캠벨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 이들은 문자 그대로 그들 자체가 19세기 기독교계를 뒤흔든 환원 운동의 일부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신약성서를 청사진으로 하는 일세기의 기독교를 당대에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캠벨 부자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 만든 신조들이나 이름들 및 각종의
인간주의적 속성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지침으로 취한다면, 성서적 근거 위에서 연합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 토마스 캠벨 토마스 캠벨은 1763년 2월 1일 아일랜드의 카운트다운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카톨릭 교회를 버리고 영국 국교회의 멤버가 되었다. 토마스는 군사학교에서 최상의 영국식 교육을 받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기독교 선교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분리교회(the seceder church)에 다녔다. 그는 한 친구의 도움으로
글래스고우 대학교를 3년간 수학할 수 있었으며, 졸업 후 선교사가 되기 위해 수업을 받았다. 아일랜드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교파간의
분열과 그것이 미치는 악 영향을 보고 가슴아파 했다. 그가 속한 분리교회도 네 개로 분리되었다. 네 교회는 모두 동일한 신조를 가졌지만 각
교회마다 자기들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속한 교회는 더 편협적인 교회로 다른 교파의 목회자의 설교를 들었다는 이유로 한 사람이
제명되었다. 또 성공회 교회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한 명이 징계를 받았다. 이에 토마스 캠벨은 네 개의 교회 중에서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두
개의 교회를 연합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교회에서 연합의 당위성을 호소했지만 결국 투표에서 지고 말았다. 이러한 교회
분열의 상처가 그로 하여금 환원운동을 하게 한 동기였다. 그는 교회 일치를 위해 그의 교회 설교 강단을 성서를 믿는 모든 목사들에게 개방하였다.
교회에서는 매주 성찬을 행했다. 장로교회 목사인 그는 성서의 연구를 통해 누구나 예수께로 초대되어 구세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1807년 교회의 분열의 책임을 괴로워하던 그는 육체적 피로와 함께 쇠약해져서 건강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대서양을
가르는 35일간의 항해 끝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이 머무를 교회의 총회를 찾게 되었다. 그는 총회의 보고가 있은 후에
챠티어즈 장로회에 배속 받아 펜실바니아 주의 워싱턴에서 일하게 되었다. 워싱턴은 인구도 많지 않았고, 종교적인 배타성도 없었던
지역이었다. 그는 어떠한 계층과 환경에 속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하였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교파에 속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식탁"(the Lord's Table)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였다. 이것으로
그는 고소 당하여 재판정에 끌려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교회의 분열된 상태를 공개적으로 한탄하며 연합의 축복됨과 순결, 평화에 대해
말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 가장 큰 잘못이었다. 그는 결국 총회를 탈퇴하고, 모든 분파의 종지부를 찍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권위인 성경 위에 연합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성서가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한다"(Where the Scripture speak, we speak; where the Scriptures are silent, we
are silent)는 환원 운동의 위대한 표어를 만들어 성서로 환원의 근거를 삼았다. 토마스 캠벨은 하나의 교회(a
church)로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단순한 설교, 신적 기준에 정확히 상응하는 의식들의 집행을 통해서 순수한 복음적 개혁을 이루고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을 도모하기 위한 공동체(a society)인 워싱턴 그리스도인 연합(Christian Association of
Washington)구성하였다. 그리고 1809년 8월 17일 토마스 캠벨과 그의 동료들은 "선언과 제언"(The
Declaration and Address)을 작성했다. 이 문서는 환원 운동의 대헌장으로 불려 왔다. 이 문서는 미국에서의 환원 운동을 알리는
글이 되었다. 이 문서는 신약성서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환원 운동의 기본적인 것을 제시했기 때문에 환원 운동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문서였다.
그것은 전체 4장으로 된 56면에 이르는 소책자로 만들어졌다. 이 문서의 선언문을 케쉬너(Frederick O. Kershner)는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하였다. ⑴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계획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하나다. ⑵비록 그 일치가
여러 각개의 교회 또는 단체들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만 그들 교회 상호간 완전한 조화와 영의 일치가 있어야 한다. ⑶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믿음과 행함의 유일한 규칙이다.
⑷ 신·구약 성서만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권위적 헌법을 가진다.
⑸ 어떤 인간 권위도 교회의 본래의 헌법과 규칙들을 수정 또는 변경할 권리가 없다. ⑹ 성서의 연역과 귀납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구속하지는 못한다. ⑺ 그것에 대한 의견 차이를 교인과 주의 만찬의 자격 조건으로 사용할 수
없다. ⑻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 자격을 위한 충분한 조건이다. ⑼ 그 신앙을
고백하고 행실로 믿음의 성실을 보이는 사람들은 형제들로, 같은 몸의 지체들로 , 그리고 같은 상속의 공동 상속자들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⑽ 그리스도인들 중의 분열은 반 그리스도, 반 성서적, 그리고 반 자연적이어서 거부되어야 한다. ⑾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부정하고 인간의 새로운 제도를 교회에 도입한 것이 교회에 있었던 분열과 부패의 원인이었다. ⑿ 교회의 순수성과 온전성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모든 필수적 조치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의식과 규칙들로 환원하는 것이다. ⒀ 신약성서에 상황이 요구하여 어떤
것을 더함은 인간의 편의로서 간주하고 그것의 잘못되기 쉬운 성질로 허락된 것 이상의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된다. 토마스 캠벨은 13개
제안으로 그의 개혁 운동을 위한 선언문의 내용을 밝히고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일치하기를 원했다. 토마스 캠벨은
선언문에 변증학적 설명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신경과 다른 모든 유사한 신경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장애가 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신경이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계시되지 않은 것을 내용으로 하여 교회의 일치를 방해했고, 그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주장하여 언약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상속자들을 억압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자행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서의 자유주의적 해석을 반대했고, 성서의 하나님의 율법이 교리와
교육의 기초라 했다. 그는 신앙인들의 도덕적 교육과 훈련을 강조했다. 토마스 캠벨의 환원은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인
성서로의 환원이다. 그는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함의 유일한 기초이기에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합법한 기초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성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의 신비한 진리들을 인류에게 계시하셨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만약 신앙인들이 성서만을 믿고 순종하면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된다고 하면서, 성서야말로 교인들을 일치로 인도하는 문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성서 외의 어느 것도 그 규칙이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그리스도인의 화합과 협력의 근거로 성서를 규정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성서가 말하는 곳에 우리는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 우리는 침묵한다"는 유명한 표어를 만들어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인 성서를 통하여 교회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2. 알렉산더 캠벨 토마스 캠벨의 환원 운동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 캠벨에게 계승되었다. 알렉산더 캠벨은 1788년 9월
12일 아일랜드 안드립 주 쉐인 성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의 말씀으로 훈계 받고 양육되었다. 그의 집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찬양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족들은 매일 같이 성경을 읽고 외웠다, 건장한 청년이 되어 바깥에서 일하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하던 알렉산더는 훌륭한
학자로 만들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에 공부하는데 열심을 다했다. 책들은 그에게 끊임없는 기쁨을 제공하였다.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불어와 영문학에
나오는 좋은 문장들은, 그것이 산문이든 시가이든 간에 알렉산더의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 리치 힐에서 목회하던 토마스는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학교에서 아버지를 돕던 알렉산더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종교적 분파의 수효에 대해 많이 놀랐다. 그는 이
분파들의 존재가 복음의 승리와 확장에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라는 확신이 깊어만 갔다. 아버지 토마스 캠벨이 미국으로 건너가자 알렉산더는
학교의 짐을 떠맡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는 가장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가족과 함께 1808년 10월에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이 탄 배가 스코틀랜드 서해안에서 난파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알렉산더는 글라스고우 대학에 입학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글라스고우에서 알렉산더는 그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준 몇 사람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교파를 대표하긴 했으나 교회
통치의 독립성, 신앙과 실천에 있어 성경을 엄격히 적용해야 된다는 공통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중 몇 사람들은 매주일 주의 만찬을
행하였다. 또 몇몇은 신앙고백을 한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야 하며 방법에 있어서 물에 잠그는 것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누구에게나
강요된 것은 아니었다. 글라스고우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함께 했던 분리주의자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관계를 끊었다. 그
다음에 미국에 도착한 후 아버지와 아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아버지는 알렉산더에게
"선언과 제언"의 교정본을 읽어볼 것을 요구하였다. 알렉산더는 이 문서를 읽고 이 글에 나타난 원리들을 전파하는데 자신의 생명과 힘을 다할 것을
선언하였다. 알렉산더는 1811년 마가렛 브라운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리고 1812년 제인이라는 딸이 출생하였다. 이 때까지
캠벨부자는 성서의 권위에 대한 환원과 교회의 연합에만 모든 관심을 쏟았을 뿐 세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딸의 출생을 계기로 유아세례의
문제가 논의되면서, 세례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하게 되었다. 영어 성경과 희랍어 성경을 통해 철저히 연구한 결과 그는 오직 회개할 수 있는
자들만의 세례가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또한 그는 세례는 침례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성화된다는 사실을 역시 알게 되었다. 또한 피세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간단한 신앙고백을 세례 전에 선언해야 된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하였고, 아버지 또한 성서 연구 끝에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캠벨 가족
7명은 은 침례교 목사인 마티아스 루이스에게 침례를 받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침례교 신자들과 그 목회하던 브러쉬 런 교회와
절친한 친분관계를 형성하게 되어 레드 스톤 연합(Red stone Association)에 가입하게 되었다. 1816년 8월 30일 그는 크로스
크릭 교회의 집회에 초청되어 설교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을 가지고 "율법에 대한 설교"(Sermon on the Law)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이 설교에서 알렉산더는 서로 다른 시대들에 대해서 세심하게 언급하였다. 이 설교는 집회에 참석한 많은 교파교회 사람들과
침례교회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환원 운동의 성서적 해석의 기본 방침을 제시했다. 이 설교는 그의 위대한
환원 운동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의 출발점이었다. 1823년 환원 운동에 있어서 매우 위대한 사건의 장이 열린 해였다. 즉
알렉산더 캠벨이 "크리스챤 뱁티스트"(The Christian Baptist)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잡지는 월간지였으며, 신약성서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는 기독교에 대한 선포와 해설과 옹호에 주력하였다. 창간호에 이 종교지의 성격과 목적이 발표되었다. 비교파주의에 입각하여
안디옥에서 칭호 되었던 가장 오래된 교파 이름, 즉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종교지로서, 그 유일한 목적은 진리의 회복과 그 가르침과 행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편집자는 성서 외에 아무것도 믿음과 행함의 규칙으로 인정하지 않고 신약성서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유일한 규칙으로
인정하고 신약성서에 있는 것은 다 인정하며 신약성서가 명하지 않은 것은 절대 권고하 지 않는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자리에 초청되었지만, 자신을 논쟁들이 오가는 토론회장으로 내몰리는 압력이 싫었다. 그래서 그는 공개토론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여한 논쟁 가운데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분리 장로교회의 목사인 워커(John Walker)와의 논쟁에 3번이나
초청에 응하지 않았던 그는 얼마 후에 마음을 바꾸어 논쟁에 참여했다. 워커와 첫 번째 논쟁을 1820년 6월 오하이오주의 마운트 플리젠트에서
열렸다. 이 때의 논제는 세례의 목적과 형식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 토론은 캔터키 주의 워싱톤에서 개최된 윌리암 맥칼라(William
McCalla)와의 대면으로 시작되었다. 이 토론에서는 죄씻음을 위한 세례에 관하여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렇게 강력한 입장을 천명하고 나선
것은 아마도 이 토론이 처음일 것이다. 세 번째 토론은 명사로 알려진 로버트 오웬(Robert Owen)과 토론을 벌렸다. 기독교를 대중의
아편이라고 비난하며 무신론을 주장하는 오웬을 상대로 기독교를 변증해야 했다. 토론의 마지막 날 그는 12시간 계속된 논쟁에서 기독교의 본질과
증거 그리고 그 위대함과 권능과 복음의 인류를 위한 공헌을 설명했다. 네 번째의 대토론은 로마 카톨릭의 신시내티 대주교인 퍼셀(John
Baptist Purrcell)이었다. 그는 이 토론에서 개신교에 대한 옹호론을 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토론은 알렉산더의 이름에 빛나는
빛을 더해 준 토론이었다. 알렉산더의 마지막 토론이자 다섯 번째 토론은 1843년 캔터키주의 파리스 출신인 라이스(N. L. Rice)를 상대로
신조와 성령의 주제로 토론하였다. 알렉산더는 대학을 설립하였다. 교회들이 증가될수록 교회를 섬기기 위해 교육받은 사람들이
필요하였다. 한때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모든 교리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것이 베다니 대학을 설립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대학의 설립 시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그 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성경을 가장 중요한 교재의 하나로 채택했다. 학기 중에는 매일 성경에
관한 강의가 있었다. 사람들은 베다니 대학에서 훈련받았고 그의 영성을 배웠으며 복음전도자로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도시대의 믿음과 행함으로 직접 환원하여 교회의 모든 부패를 씻고자 열심을 다했다. 성서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규칙과 좌표로 오직 성서만을 택하고 인간의 가르침과 유전 그리고 인본적 교회의 타파를 목표로 삼았다. 알렉산더의
환원 운동은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위해 아주 독특하고 유일한 성서의 방법을 제시했다. 교회가 신약성서에 명시된 신약교회로 돌아가 성서만을
순종하여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되고, 성서적인 것을 성서적인 방법으로 행하며 그리고 성서적 이름으로 불러서 비교파주의적이 되면 일치가 성취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옛 명령의 환원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실로 하나되는 기초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1866년 3월 4일 소천할 때까지
이를 위해 수없이 많은 글과 논문을 썼고, 설교와 연설과 그의 천부적 교육에 대한 능력, 열성, 확신, 그리고 담대성은 아무도 추종할 수
없었다.
C. 월터 스콧(Walter Scott)
월터 스콧은 초기 환원 운동의 네 중심 인물 중 가장 젊은, 그리고 늦게 운동에 관여했던 지도자였다. 알렉산더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알렉산더의 가까운 친구로 그들의 공동 관심사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관계로서 알렉산더가 이지적
성격으로 신학적 지식의 우위의 위치에 있었는데 반하여 스콧은 실질적 복음 전파에 크게 활약하였다. 스콧은 스코틀랜드에서 1776년
10월 31일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스콧 외에 아홉 자녀를 두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가족 모두가 장로교회의 독실한
교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에딘버러대학에 진학하여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플롯 연주가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 행을 선택하였다. 스코틀랜드로부터 뉴욕에 도착한 그는 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구하였다. 후에 그는 피츠버그로 가서 교사로 봉직하였다. 그 학교의 교장인 조지 포레스터(George Forrester)는 비정통
장로교인이었다. 그의 신앙 생활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회중 교회를 설립한 할데인 형제들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스콧은 포레스터의
성서에 대한 지식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와 함께 성서를 공부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곧 세례가 아닌 대리인으로서는 결코 참된 신앙과
속죄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희랍어 성서를 공부한 후에 스콧은 포레스터에게 침례를 베풀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후 스콧은
강단에서 신앙고백을 한 후 포레스터에게 침례를 받았다. 스콧은 존 녹크 할데인 형제, 바톤 스톤,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 부자 등과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만들어 놓은 근본적인 신학적 주장들을 실천에 옮기는 일을 했다. 그는 복음주의적인 전도 패턴을 확정시킨 자로서 인식되기고
했으며, 오늘날에 있어서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널리 통용되는 설교의 이론적 근거의 선두 주자로서도 인식되었다. 황금의 신탁자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그의 설교에는 힘과 감동력이 있어 집회 때마다 수백 명의 회심자를 만들었다. 그는 모든 교회가 인간의 신조와 교리를 떠나
성서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으며, 그의 설교는 언제나 간단명료하였으며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의 5단계를 다섯 손가락을 펴가면서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 다섯 손가락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여 그는 "다섯 손가락에 미친 전도인"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스콧은 옛 질서에 대한 체제의
회복을 했다. 당시에 있어서는 죄인들은 성령을 받아야 하며, 그런 연후에 죄인은 선택받아 죄가 용서되어 궁극적으로 영생에 이른다는 내용의 설교가
대중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스콧은 복음에 대한 순종을 주장하고 나섰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것을 말하였다. 이 순종의 의미는
회개와 세례가 뒤따르는 확신에 선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죄씻음, 성령의 은사, 영생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스콧은 침례교인과의
마지막 결별을 추진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새로운 교회를 시작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비난을 모면하기 위하여 몇몇 기존 교회의 집단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잘 유지했던 캠벨과는 달랐다. 그는 목회하던 교회에서 술을 마시거나 매매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만찬을 허락하지 않았고, 당시 문제가 되었던
노예제도에 반대의사를 표하고 만약 흑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돌아가는 것을 찬성하는 것을 성서를 사랑하고 인간에 대한 박애와 평등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스콧의 기여는 위대한 신앙 개혁 운동에 절대적으로 요구됐던 협력이었다. 그의 헌신적 협조가 없었다면 알렉산더의
업적이 사람들의 뇌리에 그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Ⅴ. 결 론
본 논문은 환원 운동이 기독교 역사의 주변이 아니라 핵심 요소로서 기독교 역사 중심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운동임을 밝히기 위해
교회사적으로 접근하였다. 먼저 환원 운동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는 그 연구가 성서와 종교 개혁이후로 집중되어 있으며, 둘째는
그 연구는 19세기 미국의 상황에 너무 집중되어 있고, 미국을 중심으로, 또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운동으로 주장함으로 기독교 역사를 무의미하게
혹은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본 논문은 환원 운동이 특정지역이나 특정 시대에 제한되어지는 운동이 아니라, 전(全) 기독교 역사와 함께
하여온 운동임을 교회사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환원 운동은 구약성서에서 계속 발견되어지는 원리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하는 것, 하나님의 율법대로 환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고대의 환원 운동은 사도적 전통을 계승한 교회에
도전하는 이단을 변증하는 가운데서 발견되어진다.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에게 사도적 전통, 즉 성서를 논박의 근거로 삼아 성서로의 환원을
주장하였고, 터툴리안은 "취득시효"라는 법률 용어를 통해 이단은 성서를 가지고 논할 자격도 없다고 주장하여 교회의 성서 전통의 환원을 말하고
있다. 터툴리안 이전은 성서와 전통이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터툴리안 이후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습관과 문화를 덧입고, 전통 속에 흡수되면서
전통은 하나의 거대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이 권위는 중세를 통하여 고착되어 성서보다 더 권위를 갖는 경우도 있었다. 환원 운동은 성서에
덧입혀진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성서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중세의 말기의 성서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어 진다.
이 운동을 펼친 사람들은 왈도파, 위클리프, 후스파 등이 있는데, 이들은 성서의 가르침으로 환원을 외치게 되었다. 이러한 환원의 외침은
종교개혁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종교 개혁의 환원 운동으로는 '근원으로' 돌아갈 것을 외치며, 성서와 고전으로의 환원을 외친
에라스무스와 '오직 성서'와 '오직 은혜'로 환원할 것을 주장하며 종교 개혁을 이끈 루터, 보다 구체적으로 성서의 선례대로 따르고자 한
쯔빙글리와 "환원"을 그 구호로 내걸었던 재세례파를 통해 환원 운동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성서로 돌아가자는 외침의 종교 개혁은
교회의 분열을 낳게 되었다. 저마다 자기들의 가르침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러 가지 사조들이 출현하면서 그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 분열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에 신약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스톤은 인위적인 조직이나 기구를 반대하고
성서의 이름을 따르자고 주장하였다. 토마스 캠벨은 '성서가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 침묵한다'는 표어를 통해 성서를 유일한
근거로 주장하고, 그 성서로 일치할 때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교회가 신약성서에 명시된 신약교회로 돌아가
성서적인 방법과 성서적인 이름을 행하면 교회는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스콧은 환원 운동 의 이론을 실천에 옮긴 환원
운동가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환원 운동을 접근하면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성서로 돌아가고자 하는 환원
운동은 비록 주장의 경향과 강도에는 차이가 있을 지라도, 시대와 지역에 구분 없이 교회사 속에 계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므로 환원 운동의
19세기의 미국 중심의 연구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환원 운동은 19세기의 미국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언제나, 모두에게" 일어나는 교회의
핵심 요소이다.
둘째, 환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서를 최고의 권위에 둔다. 환원 운동은 시대와 지역의 상호 사상적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목소리로 성서로의 환원을 외치고 있다. 이들이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지역에서 같은 성서로의 환원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인간의 어떤 권위나 조직이나 신조보다도 권위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서가
말하는 곳에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 침묵"하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성서이기에 이 성서를 근거로 성서로 돌아가, 성서의 가르침대로
따르고자 하는 이 운동은 기독교 역사의 핵심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 하나님 말씀인 성서에서 벗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성서로의
환원을 주장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 이단이 성서에서 벗어날 때 사도들의 가르침 곧 성서로의 환원을 외쳤고, 중세의 여러 예들은 고정화된
중세의 제도에서 성서대로 살고자 외침으로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되었으며, 종교개혁 시대에는 로마 카톨릭의 독선에 성서로의 환원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분열하는 교회를 향해 성서로 돌아가 신약의 초대교회의 본질로 환원하고 일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서로의
환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교회는 바로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의 핵심 요소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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