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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주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이 사명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는 그들의 성실성과 헌신을 통하여 복음을 세계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존재도 이 사명의 영향이라고 볼 때 그리스도의
명령이 얼만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사용하는 선교에 관한 용어에는 선교(mission)와 전도(evangelism)라는
두 가지 말이 존재한다. 선교란 본래 라틴어의 '미시오(missio)' 즉 파견 또는 사명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고 전도는 희랍어의 'euangelion' 즉 복음 또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이와 같이 말의 본뜻에 관계되어서 전도라고 할 때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로 선포하고 비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동시에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전도는 주로 동일한 언어권이나 문화권에서
수행된다고 할 수 있다. 전도는 그 말이 처음 사용된 신약성서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이와 달리 선교는 주로 비기독교 국가 또는 비서구 세계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교회설립과 함께 교육, 의료, 사회 사업 등을 실시하는 것을 가리켜
왔다. 이렇게 볼 때 전도는 국내용이라고 한다면 선교는 국외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교라는 말의 뜻이 변화를 가져 왔다. 비서구 세계를 향하여 선교를
수행하던 서구 교회가 소위 세속화의 영향으로 서구 세계 자체 안에 선교 사업을
추진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선교라는 말이 국내 선교와 국외선교라는
말로 분리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는 다양한 파생어와 여러 가지 뜻을 지닌
말로 발전하였다고 이계준 박사는 말하고 있다.
동석기와
북한지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북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은 동석기 전도자(1881. 4. 6∼1971.
12. 26)가 미국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1930년 10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을 타고 11월 8일 한국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해 11월 동석기 전도자가
고향인 함경도 북청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동석기 전도자는 북청 고향집으로 가서 아내를 복음화 시킨
후 친척과 친구들에게 성서를 가르친다. 처음으로 열 명의 남자와 열 명의 여자가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의 침례를 받는다. 이들은 장로교인과
무신론자들이었으나 북청의 추운 겨울날 결빙된 저수지에서 얼음을 깨고 구원의 침수
세례식이 거행된 것이다.
선교의 불길이 지펴지면서 1930년 11월 29일 북청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인 이곡면 초리에 함전교회에 이어 덕흥면 시흥리교회,
수동리교회, 하거서면 임자동교회, 수서리교회, 맹경리교회, 진산리교회 등 7개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에 세워진다.
지난날 '네비우스 정책'의 영향으로 장로교회의 전통이 강하던
와중에도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세워진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약교회와
성서가 말하고 있는 원칙을 올바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의
기독교회들이 선교사의 선교에 의존하기 보다 조선 자체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한 교육과 선교가 더 활발해져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동석기 전도자의 첫 출발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은 자생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이는 다른 교파들이 선교사들에
의한 일방적인 선교에 의존했던 것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동석기 전도자는 온전한 신약교회의 열 가지 기본적인 성서
교리를 가르치게 되는데, 그 열 가지의 기본 원리는 첫째, 구원의 침수 세례 받은
자만이 그리스도인이다. 둘째, 신약교회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만이 있다. 셋째, 매
주일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을 행한다. 넷째, 매 주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다섯째, 매 주일 성서를 공부한다. 여섯째, 악기 사용은
비 성서적이다. 일곱째, 유아 세례는 비 성서적이다. 여덟째, 약식 세례는 비 성서적이다.
아홉째, 교회 내의 조직은 비 성서적이다. 열째, 인간이 만든 교리, 헌법, 규칙 등은
비 성서적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강명석
전도자와 남한지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1931년 강명석은 고향인 밀양에서 목회를 하다가 양주삼 목사의
추천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는 밴더빌트 대학에서 "The office of the
modern Minister"라는 논문으로 1935년 신학사 학위를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귀국을 늦춰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교육기관인
프리드 하드먼 대학에서 공부를 한 후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1934년 [긔독신보]에 재미 강명석이 기고한 '전도인의 생활과
그의 일(1)'이란 제목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교회의 정의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 위에 세운 멸망하지 않은 조직이고, 그리스도 자신이 세운
것이며, 그리스도의 정신의 표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근본적 조직이며, 그리스도의 몸이고, 복음을 전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교회는 뭇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하는 장소로 하나님께 찬미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강명석(강문석) 전도자는 한국에 들어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비의 지원으로 울산을 중심한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1937년
4월 14일자 [긔독신보]에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설교문을 기고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명칭이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질문하는데 대한 대답이다. 강명석 전도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서에서 말하는
참다운 교회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신교의 선교의
역사
종교개혁의 시대에 프로테스탄트 세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모든 힘을 기울어야 했기 때문에 선교에 대하여 생각할 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즉 17세기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체결을 기점으로 해서 비로소 개신교는
더 이상 구교화의 투쟁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을 정비하기 위해 신학과 생활에
걸쳐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카톨릭 교회가 전세계로 확장을 재개한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유럽 밖으로 거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개신교는 대부분 자신의 영토내의
교회를 세우는 데 급급하였다. 즉 로마 카톨릭 측에서는 탐험, 정복, 무역, 정착에
앞장서는 우세를 몰아 헌신적인 여러 종단인 예수회, 프란시스회, 도미니크회, 어거스틴회
등이 강력한 수단을 통해 전세계에 복음을 전했던 반면, 개신교는 선교적 열심도
결핍되어있었고 , 이러한 열세에 대해 자신들을 합리화하는데 급급하였다.
유럽의 개신교가 선교운동을 지원하게 된 계기는 경건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경건주의는 신학적인 교리 우선적 정통주의와 철학적인 이성주의에 대한
응답이다.
경건주의자들은 선교에 대한 다섯 가지의 원칙이 정립되었는데
첫째 교회와 학교 교육의 병행, 둘째 원주민의 언어로 성서를 번역하는 일, 셋째
복음은 원주민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전파되어야 할 것, 넷째 명확히
개인적인 개종을 목적으로 할 것, 다섯째 빠른 시일 안에 인도인 교역자를 가진 인도
교회를 세울 것이다.
19세기 개신교의 선교는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성장 파급되어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근대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이 시대의 변화의 새 기원은
첫째 새 땅의 지배에 의한 식민주의라는 심리학적 변화와 둘째 과학 경제적으로 속도
권력의 우위를 보여주면서 산업혁명, 공장제 공업, 동력 사용 등을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시대에는 처음에는 개신교 교회들에 의해 지지되지는 않았지만 위대한
선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세워져서 헌신적인 개인들의 힘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점차로
교단들에 결속되었다.
근대 선교의 시조로 일컬어온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획기적
인물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시골 침례교 목사의 일과 구두
수선공의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선교에 대한 그의 열심과 노력은 그로 하여금 선교
사업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이루게 했다. 그의 선교역사에 대한 끈기 있는 조직적
조사와 연구는 결국 침례교 선교회의 결성과 함께 그의 가족 전체로 하여금 첫 선교사로
인도를 향해 출발하게 만들었다.
분단
이후의 한국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으로 분단 이후 참회선언을
할만큼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분단 이후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의 선교부와 주한 미군, 그리고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서
교회는 성장을 했지만 한국의 내부적 상황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선교적 대응을 펼치지는
못했다. 또한 그리스도신학대학교를 통해 동남아의 학생들이 입학하기도 하였는데
이 학생들과의 연계도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리 활발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분단 이후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로 학원 선교와
빈민 구호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공헌을 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지는 못했다. 한국의 교회들이 4.19혁명 이후 분단의 아픔과
노동자들의 아픔을 통해 성서를 조망하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동안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일치에 대한 연합운동에 대해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기보다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70년대를 통해 한국교회에 '성령운동'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부흥운동이 새마을 운동과 맞물리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장도 둔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보수적인 한국의 장로교전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성장
보다는 내치에 더 충실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추구하는 일치와 자유, 화해의
정신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만일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분단 이후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교회일치'를 보다 더 강하게 주장하고 '교회협의회'등의 교회일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의 위상이 더욱 커졌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업선교와 농촌, 분단의 문제 등 한국 내부의 선교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교단간 교류를 시도하였다면, 그리고 미주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도 일찍이 선교에 눈을 돌렸다면 오늘 날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대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을 하고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 구축을 해야 할 시기에 있어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내부적 모순의
극복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도 선교위축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들어 선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의 전망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가 그렇게 활발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선교사를 보냈던 미국의
3대도시 지역인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와 중남부 여러 지역에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이곳에서 신약교회의 환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90년대 중동과 90년대 러시아와 동남아 선교는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그리스도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에 열정을 품은 형제들이 세계의 여러 지역에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후배나
그리스도의 교인들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선교는 오늘날 '코리언 미션 웍샵'을 매년 개최함으로서
더욱 유대를 강화해 나가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자
양성기관'인 그리스도 신학대학교를 위해 기도하며 돕고 있으며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해외 문화 체험단'과 '사회복지 체험단'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기도 하다.
또한 러시아 지역의 경우는 러시아 지역 처음으로 선교사의
힘만으로 교회가 건축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는데 사회주의 국가의 색채가 강한
러시아에서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교회가 건축되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이 부러워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교회를 통해 유학생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동남아 지역의 경우는 라오스, 방글라데시 등지에 선교사가
나가 열심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특히 방글라데시의 경우는 '초등학교(아존뿔
초등학교)'를 통한 교육 사업에도 힘을 쓰고 있으며 이교도들의 위협 속에서도 꾸준한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밖에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나름대로의
비전을 갖고 현재도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신인 '환원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선교들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장했다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사실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간 미국의 선교부의 지원으로
성장했으며 '자기희생'을 통한 '선교'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약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열정적인 전도자들이 선교를 하고 그리스도신학대학교에 '선교학부'가
설치되어 선교의 일군들이 훈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낙도나 오지에 대한 선교, 농촌의
미자립 교회에 대한 관심과 선교는 미흡한 편이어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며
특히 지역의 다변화와 지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단적 관심도 시급한 실정이다.
또 그리스도의 교회의 형편상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도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신학대학교의 학생들이 선교지나 미주
지역을 방문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큰 도전을 받고 온 경우 이들을 수용하고
이들에게 '환원운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가는 말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의 역사는 동석기 전도자 강명석
전도자 등 신앙과 열정이 함께 했던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후 그리스도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한 우리의 형제들 중에
열정과 열심히 세계 선교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선교지로 나가야 할 것이며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환원운동을
맨 처음 외쳤던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선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들은
'성서가 말하는 곳'에서만 말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열정적으로
호소했으며 그분들의 호소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도 미국의
선교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조건 없이 다른 나라들을 도와야 할 때가 되었다. 또 이단들도
'선교'의 미명하에 지 교회를 세우고 있는 현실 속에서 참다운 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와 '환원운동'을 외쳐야 할 바로 그 시기가 왔다. 특히 해외의 선교뿐만 아니라
앞으로 북한교회 재건운동의 적극적 참여, 북한의 그리스도의 교회 재건, 역사자료의
보전, 통일에 관한 선교세미나와 조선족 동포 문제, 미군주둔지와 기지촌 선교, 외국인
노동자, 농촌교회 등 한국교회가 돌아보지 않는 소외된 지역에도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 생겨났을 때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갚음이며 나눔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통일의 시대이며 선교의 시대다. 바울도 조건 없는
선교의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다. 선교는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될 우리의 영원한 기도제목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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