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만찬

번역 조동호 목사


차례

1. 제정된 주님의 만찬

2. 명칭들

3. 참여할 때

4. 주님의 만찬의 중요성

질문들-주님의 만찬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초대 대통령 워싱턴 기념비가 높이 세워져 있고, 링컨 대통령 기념동상도 있다. 버지니아주 알링톤 국군묘지에는 무명용사들의 추모비가 있다. 복무 중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 기념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주인공들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어진 것들이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들을 기념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기념비들은 결국 파손되거나 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이름을 기념물에 남기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분은 지구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있을 그런 기념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만찬이다.

사람들은 기념비를 세울 때에 귀하고 값비싼 금속이나 돌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분의 기념을 위한 재료들을 아주 평범한 것들로 선택하셨다. 그것들은 떡과 포도주였다. 밀과 포도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들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념물은 세계 도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찾아 낼 수 있는 가장 견고한 재료를 가지고 기념비를 세운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파손되기 쉽고 상하기 쉬운 재료들을 선택하셨다. 떡은 빨리 만들어지고 빨리 말라버린다. 포도주도 공기 중에 방치하면 시어지거나 상해버린다. 이것은 예수께서 만들어진 물질을 통해서 그가 계속해서 기념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 백성들의 가슴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된 것을 통해서 영구적으로 기념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1. 제정된 주님의 만찬

A. 때

예수께서 주님의 만찬을 제정키로 작정하신 때는 매년 열리는 유대인의 유월절 축제 때였다. 예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마지막 유월절을 특별히 제자들과 함께 먹고싶어 하셨다(눅 22:15-16).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 때에 예법에 따라 네 차례 포도주를 마셨다. 이들 가운데서 다음의 잔, 추측컨대, 세 번째 잔을 마실 차례에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비교: 눅 22:17; 고전 10:1).

정교한 유월절 만찬 예법에 비하면 새로운 제도는 매우 간결하였다. 예수는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부탁하셨다. 그들이 떡을 다 먹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포도주가 담긴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고 말씀하셨다.

B. 사용된 재료들

1) 떡(빵)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때에 사용하신 떡은 추측컨대 유월절 축제의 무교병이었을 것이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날에 유대인들은 집에 있는 모든 누룩들을 제거한다. 칠일동안 그들은 무교병만 먹는다(신 16:3-4).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급하게 나왔음을 상기하기 위함이었다(출 12:39). 이날 예수께서 누룩으로 부풀린 떡(빵)을 드셨다는 어떠한 단서도 없다. 누룩이 죄악을 나타낸다는 개념은 무교병을 옹호하는 또 다른 중요한 증거이다(비교: 고전 5:6-8).

2) 포도열매

주님의 만찬의 두 번째 부분으로 '잔' 또는 '포도열매'가 언급되고 있다(막 14:23,25; 마 26:27,29). '포도열매'는 포도주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주를 '포도즙'으로 언급하셨다(신 32:14). 예수께서 '언약의 피' 즉 우리 주님의 피를 묘사하기 위하여 '포도즙'을 택하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잔이 발효된 포도주를 담고 있었는지, 발효되지 아니한 포도주를 담고 있었는지는 토론의 대상이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가을 추수 이후로 포도주스를 신선하게 보관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발효된 포도주라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고대인들이 포도주스를 일년 내내 발효시키지 않은 채로 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발효되지 아니한 포도주스라고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발효된 포도주를 쓸 것인지, 또는 발효되지 아니한 포도주스를 쓸 것인지를 지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어느 쪽을 사용하든지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관방법들이 다양함으로 발효되지 아니한 포도주스가 주님의 만찬의 전체적인 의미에 보다 더 적합하다고 보아진다.

2. 명칭들

A. 떡을 뗌

기독교의 성만찬과 관련해서 신약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떡을 뗌'이다. 사도행전 20장 7절은 제자들이 "떡을 떼려 하여"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고 적고 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은 초대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적고 있다. 동일한 표현이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주님의 만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제정사를 주셨던 밤에 친히 보여주신 주님의 행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마태, 마가, 누가는 물론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고 말씀하셨다고 적고 있다. 다음 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림을 받으셨을 때에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의미와 그림을 분명하게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찢기신 몸을 기념하기 위하여 떡을 떼던 그 순간들이 얼마나 신성했겠는가?

B. 주님의 식탁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1)고 상기시켰다. '주의 상'이란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속한 식탁을 생각하게 한다. 그분이 그것을 처음 우리에게 주셨으며, 또한 그분은 모든 식탁의 주인이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는 귀중한 약속을 하셨다. 이 약속은 교회의 모든 모임에 해당되며, 식탁이 크고 많아도 마찬가지이다.

이 숭고한 진리는 오늘날에 강조될 필요가 있다. 한 교회는 이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하였다고 한다. 그 교회는 성만찬상과 강대상사이를 충분히 벌려놓고 그 사이에 한 개의 의자를 더 놓았다고 한다. 장로들은 성만찬 집례시에 성만찬상 양끝에 놓인 의자들에 평상시처럼 앉고, 성만찬상 앞 가운데에 놓인 의자는 언제나 비어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만찬에 동참하고 계신다는 암시였던 것이다.

C. 주님의 만찬

'주님의 만찬'은 아마도 현재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 가운데 가장 친밀감을 주는 말일 것이다. 그분이 그것을 제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주님의 만찬'으로 불린다.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와서 먹으라고 초대하신다.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라도 이 식탁에 참석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초대는 거절을 당하는 게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참석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영적인 음식의 원천이 되신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초청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눅 22:19). 하나님의 자녀를 이 식탁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다. 그것은 참으로 주님의 만찬이다.

만찬이란 호칭은, 의심할 바 없이, 예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날 잡수신 유월절 식사가 바로 저녁식사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약성경에서 그것이 지켜진 분명한 실례는 저녁이었다(행 20:7).

D. 교제

교제라는 용어는 오늘날 종종 주님의 만찬에 적용된다. 신약성경에서 교제라는 단어의 사용은 명칭보다는 장소의 묘사가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고 상기시켰다. 교제라는 단어는 나눔과 참여를 의미한다. 바울은 우리가 잔을 마시거나 떡을 먹을 때,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의 축복과 은혜 안에서 함께 나누고 또 함께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또한 주인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그 단어가 궁극적으로 의미하는바 교제 요, 나눔인 것이다.

3. 참여할 때

예수께서 주님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에 준수 시간이나 빈도를 지정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주께서는 성령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도록 많은 부분들을 그대로 남겨두셨다(요 16:12-13). 그분은 단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만 말씀하셨다. 오순절 날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사도들은 그분의 충고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누가는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고 적고 있다. 이 말씀은 확실하게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지속적으로 헌신하면서 계속해서 성만찬을 거행하였음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한동안은 매일 주님의 만찬을 지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장 46-47절에서 우리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떡을 떼며"와 "음식을 먹고"라는 두 가지 표현은 각기 다른 식음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떡을 떼며"라는 표현은 특별히 주님의 만찬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님의 만찬을 지키는 빈도에 대한 첫 번째의 분명한 증거는 사도행전 20장 7절에서 발견된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였다"는 말씀에서 매주일 성만찬예배가 초대교회의 관례였다는 증거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한다.  

A. 분명한 성경적 실례

드로아에서 있었던 모임에 관계된 모든 사실들은 그것이 정해진 목적을 위한 정해진 모임이었음을 증명한다.

1) 정해진 모임

"안식 후 첫날에(On the first day of the week)"에서 정관사 'the'의 용법은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간 첫날에 모이는 것에 익숙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빌립보를 떠나 월요일에 이곳에 도착하였다. 왜냐하면, 누가는 드로아에서 7일간(행 20:6) 머물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두르고 있는 중이었다(행 20:16). 이것은 바울이 월요일 아침 일찍 드로아를 떠난 사실에 의해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주간 첫날에 교회와의 만남을 위해 바울은 7일간을 머물렀다. 이것은 주간 첫날의 예배가 드로아 교회의 확정된 관습이었음을 나타낸다. 이것이 드로아에서 사실이었다면, 틀림없이 사도들의 인도아래에서 설립된 다른 교회들에서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2) 정해진 목적

누가는 그들이 떡을 떼려고 모였다고 분명하게 설명한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였다"(행 20:7). 드로아 교회는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떡을 떼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모이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필자는, 바울이 그 날 드로아에 머물렀기 때문에 교회가 기꺼이 바울의 강론을 청취했지만, 이것이 그들이 모인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매주 예배를 입증하려고 이 구절을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매주 성만찬을 부인하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구절은 실제로 매주 예배의 실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도들이 매주 떡을 뗀 것의 실례를 확립시켜주고 있다. 한가지를 반박하게 되면, 결국 두 가지를 다 반박하는 것이 되고 만다.

B. 함축적으로 가르쳐진 매주 성만찬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주님의 식탁을 둘러싼 남용을 바로 잡기 위해서 훈계하고 있다. 그는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전 11:20)는 말로써 주님의 식탁에 대한 그들의 남용을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식탁에서 보인 행동으로 인하여 수용할만한 바른 태도로 진실하게 만찬을 먹지 못하였다. 이 구절은 그들이 그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이 모인 주된 목적, 즉 주님의 만찬을 먹기 위한 목적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선수들이 구장에 도착하였으나 비 때문에 시합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 모임의 목적이 운동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사실이 고린도전서 11장 20절에서 분명하게 보인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실로 매주일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발견된다. 그 구절은 고린도 교회가 모이는 횟수만큼 자주, 즉 매주일마다 그들이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였음을 의미한다.

C. 형식의 논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의 청사진을 주셨을 때, 그분은 단지 광야생활 동안에만 예배할 성막을 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담아 주셨다. 그 성막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준비를 위해서 주신 일종의 교훈의 도구였다. 대체로 성막의 뜰은 세상의 모형으로, 성소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형으로, 지성소는 천국의 모형으로 설명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하는 성소에는 세 개의 기구가 있었다. 성소를 비추는 금촛대는 하나님의 말씀의 모형이었다. 말씀은 사람의 길을 비춰주고 안내해준다(시 119:105,130). 향기롭게 타고있는 분향단은 하늘 보좌 앞 금단에 드려지는 성도들의 기도를 적절하게 묘사한다(계 5:8).

또 다른 기구는 진설병상이었다. 제사장들은 매주 그 위에다가 12개의 진설병을 두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상위에 남아 있었다. 다음 주에 새 떡이 상위에 진설되면 제사장들은 물려낸 떡을 여호와께 경배하면서 먹었다. '진설병'은 문자적으로는 '현존의 떡'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과 축복과 섭리적인 보호를 생각나게 한다. 이것은 확실히 오늘날의 주님의 만찬에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떡과 잔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제사장들이 충실하게 일주일에 한번 먹었다는 사실은 매주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을 지지해준다.

D. 교부들의 증언

교부(Apostolic Fathers)라는 용어는 사도들을 바로 뒤이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이들의 저술들이 영감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실로 말하자면 사도시대 직후에 행하여진 교회와 예배에 관한 정황들을 제공해준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순교자 저스틴이다. 그는 대략 주후 150년경에 변증서를 저술하였는데,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의 제자였다. 사도 요한과 그토록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이나 전통과 일치하는 가르침들을 그의 글에서 기대할 수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 시대의 예배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는 도시나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함께 모임을 갖습니다. 모여서 사도들의 회상록들이나 선지자들의 글들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읽습니다. 읽는 사람이 낭독을 마치면, 집례자는 설교를 통해서 훈계를 하며, 이들 선행들을 본받도록 권면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모두는 다함께 일어나서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기도를 마치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오고, 집례자는 같은 방법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기도와 감사를 올립니다. 그러면 회중들은 '아멘'으로 응답을 합니다. 성찬의 분배와 나눔은 축성된 봉헌물을 각자에게 줌으로 이루어지고 참석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집사들을 통하여 보내줍니다.

다른 교부들의 글이 인용될 수도 있으나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초대교회가 실제로 주님의 만찬을 매주 먹었으며, 처음 2세기 동안 이 관습이 지속되었다는 증거가 명백하다. 로버트 밀리건은 "처음 2세기 동안은 매주 성만찬의 관습이 세계 모든 교회들에서 시행되었고, 그것은 7세기까지 그리스정교회에서 계속되었다. 그것을 연속으로 3주간 거른 자는 파문되었다"(Robert Milligan, The Scheme of Redemption, p. 440)라고 말한다.

4. 주님의 만찬의 중요성

A.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기념

주님의 만찬은 매주 거행하는 기념 식탁이다. 기념은 적어도 세 가지로 기능을 한다. 이 기능들은 주님의 만찬에서 훌륭히 이루어진다.

1) 그것은 주님을 위한 어떤 갸륵하고도 사랑스러운 일을 하고자하는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준다. 주님의 만찬이 이런 기회를 제공해준다. 예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셨다.

2) 자주 거행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한다. 또한 영혼의 시계처럼 성도들을 십자가 아래로 모이게 한다.

3) 그 상징적인 중요성에 의해서 그것은 지속적으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는 바로 그 기독교의 중요한 사실을 기억나게 한다.

알렉산더 캠벨은 주님의 만찬의 기념적인 측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주님의 떡(빵)과 잔 위에는 '너희가 이것을 볼 때, 나를 기억하라'는, 눈에다 말하지 아니하고, 모든 제자의 마음에다 말하는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참으로 주님은, 각각의 제자들이 그들의 손에 그 상징들을 받아들 때,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깨어진 나의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이다'라고 말씀하신다(Christian System, s.v. "Breaking the Loaf," Proposition 6).

B. 선포

모든 주님의 날에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을 때, 그들은 가르침을 선포하고 잇는 것이다.

1) 첫째로 바울은 우리가 먹을 때,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1:26). 예수는 성만찬을 제정하실 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눅 22:20)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기념이다. 주님의 만찬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찾은 바 되었고, 죄사함받았다는 것을 선포한다(엡 1:7; 벧전 1:18-20).

2) 둘째로 우리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식탁에 나아올 때, 그는 주님과 세상을 향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가 속죄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분의 명령에 복종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에 나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약하고 무력한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도록 한 그리스도의 사랑은(롬 5:6-8)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해주고 그분의 식탁에 참여토록 해주는 바로 그 사랑이다.

3)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선포한다. 바울은 우리가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때,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고전 11:26)고 말한다. 주님의 식탁은 우리의 구원이 가능토록 한 갈보리를 기억하고 회상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충만하게 실현하실 그 날을 고대하게 한다. 속죄함을 받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그들을 죄에서 구속하신 그들의 주님과 함께 모일 때, 이것은 속죄계획의 장엄한 완성이 된다. 그분의 재림에 진실로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계속해서 이 만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질문들-주님의 만찬

주님의 만찬제도에 대한 다음의 네 가지 성구들을 읽고, 빈칸에 다음과 같은 성구가 발견되는 책과 장절을 적으시오(중복사용가능).

[읽을 성구: 마 26:26-29; 막 14:22-25; 눅 22:19-20; 고전 11:23-25]

------- 1.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2.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 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 4. "다 이를 마시매."

------- 5.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6.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토론

1. 주님의 만찬에 적용된 세 가지 명칭을 적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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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주 성만찬이 옳은 네 가지 이유를 적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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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만찬이 선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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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ver Sizemore, 13 Lessons in Christian Doctrine(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1991), pp. 9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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